병신과 머저리- 당신의 고통
- 작성자 하늬별
- 작성일 200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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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1,450
<병신과 머저리>
과거에 ‘액자식 구성’에 대해 공부한 기억이 난다. 나는 액자식 구성을 한 책을 추천받고는 책장에 꽂혀있는 <병신과 머저리> 라는 짤막짤막한 단편집을 읽어 보았다. 이 소설은 인간 내부의 실존적 의미를 묻고, 인간이 자신의 환부와 억압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꽤나 많은 생각을 하며 읽어 보아야 하는데, 당시 나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내부액자’인 형의 소설 속 이야기에만 집중하며 이야기의 흐름을 타며 편안히 흘러가듯 책을 보았다.
다시 책을 집어들었을 때는 조금 더 많은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여기서 형과 동생이란 인물을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무엇이 형을 변하게 하였는지, 형의 소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며,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생각하며 읽으니 예전에 소설을 읽은 후 머릿속에 실타래, 꼬인 실타래 하나가 머리에 달라붙어 떼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의미를 파악함과 동시에 후련하게 날아갔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깨달은 바를 독후감으로 쓴다. 비단 책 속의 의미를 깨달은 것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지적계발과 나 자신의 상처를 되돌아보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다룰 지 생각한 바 또한 말이다. 이전에 겉핥기식으로 맛만 본 것에 비해 지금은 많은 것을 깨달았고 항상 나에게 짐이 되어왔던 문제를 해결해 스스로도 나 자신이 이 책을 읽고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의 형은 수술 실패로 열 살 짜리 소녀를 죽인 후 병원 문을 닫는다. 수술 실패의 책임이 형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나’는 형이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기이하게 생각한다. 당시 ‘환부 없는 아픔’을 겪고 있던 동생은 형의 소설을 보고 형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고, 형의 소설이 끊기는 것을 보고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붓을 놓아 버린다. ‘나’는 형의 문제와 자신의 문제를 동일시하며-종국에는 다르다 밝혀지지만- ‘환부 없는 고통’을 상징하는 둥그스름한 얼굴의 윤곽선만을 그리고 괴로워한다.
여기서 동생, ‘나’가 고통스러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부 없는 고통’ 이라고 나왔듯이 이것은 동생의 무중력적인, 이도 저도 아닌, 문제에 대한 동생의 애매모호한 태도 때문이다. 형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려 술을 마시고 소설을 통해 그것을 분출함으로서 고통과 투쟁한다. 그에게는 치료의 가능성이 보인다. 그러나 동생은 어떤가. 그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시종일관 거리를 유지하며 가까이 다가가려고도 않는다. 사랑하는 여인 혜인이 떠났을 때도 동생은 방관하기만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자신의 문제를 알고 어떻게든 치료하려 하는 형보다는 자신에게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를 내버려 두는 동생에게 더욱 동질감을 느꼈다. 나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
그러나 상처가 없는 ‘척’ 하더라도 실제로 상처는 ‘존재’한다. 자신이 아무려 숨기려 애써봐도 상처를 곪게 만들 뿐이다. 이런 동생, ‘나’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에 당당히 맞서는 형 같은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처럼 행하지는 않는다. ‘저런 짓을 왜 해, 나한텐 아무 문제도 없는데’ 편한 변명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들은 상처를 꺼내어 보면 오히려 더 커질까 두려워하며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는 사라지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고통, 즉 ‘환부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글 중에선 ‘혜인’을 통해 동생의 이런 면을 알려준다. 조금만 힘들고 해결하기 어렵다 생각하면 손도 대지 않는 사람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동생이다.
형은 ‘김 일병’을 죽인 ‘관모’를 죽이는 것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그리고 나서 혜인의 결혼식에서 관모를 봤다며 소설을 태워버리고 다시 병원을 열어 일상으로 돌아간다. 동생은 그 순간 형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상처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은? 동생은 ‘어쩌면 그것은 나의 힘으로는 영영 찾아내지 못하고 말 얼굴인지도 모를 일이었다’고 말하며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고,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었다’며, 자신의 회피적 모습을 인정하나 여전히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소설을 끝맺는다.
형은 자신의 상처가 625 전쟁 때 김 일병을 관모(오관모)가 죽이는 것을 방관한 데서 오는 죄책감임을 안다. 소녀의 죽음으로 그 상처는 벌어지고 형은 근본적 대책을 찾아 그를 해결한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다. 자신의 상처의 근원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러는 것일까. 형은 극복하고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는데 반해 동생은 어찌할 바를 몰라 스스로 파멸해간다.
세상에 상처를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상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뀐다. 영원히 묵혀 둠으로서 고통받으며 살 것인가. 고개를 들어 맞서고 상처를 치유할 것인가. 답은 너무나 뻔한데도 우리는 쉽게 그러지 못한다. 상처를 ‘인정’하면 모든 게 뒤틀릴까 봐 지금의 일상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고통을 없애는 쪽을 포기한다 상처의 고통에 몸서리치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포기한다. 이런 비이성적인 상황이 나타나는 원인은 상처를 인정하고 치유하는 과저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일탈’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를 회피하는 당신은 이미 일상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귀를 기울여라. 삶이 조금씩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문을 보면 사회에서 받은 상처에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끌어안기만 하다 종국엔 정신병까지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 뭣하러 그렇게까지 참고 사는 걸까, 라고 생각하다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속병앓이를 하는 나를 바라본다.
큰 상처는 아니더라도 자잘한 상처를 나도 많이 갖고 있다. 나는 이때까지 이런 자잘한 거, 건드려서 뭐해, 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꾹 눌러 참고 살아갔다. 하지만 참고 살아가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한 번에 터뜨려 주위 사람을 곤란하게 하란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보고 치유 방법을 알아내라, 그리고 치유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된다. 이같이 간단한 일을 못 하는 것은 아까 말했듯이- 공포 때문이다. 이 공포는 손톱에 돋아난 가시같은 존재일 뿐이다.
귀찮게만 굴고 따갑게만 하는 성가신 가시는, 인정사정 봐줄 것 없이 그냥 콱 뽑아버려라. 당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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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까지 조금더 짚어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매우 적절하게 논점과 논거를 찾아 주장을 흐름을 잘 잡아 갔습니다. 수고했습니다.
하지만 '형은 극복하고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는데 반해 동생은 어찌할 바를 몰라 스스로 파멸해간다.'라는 구절에서 '형은 극복'하였다는 해석은 자칫 주관적일 수 있겠군요. 형은 소설 속에서는 '오관모'로 상징할 수 있는 이기심과 본능을 죽여버렸지만 소설밖에서는 그런 속성을 버릴 수 없었다는 자책감에 술을 마시고 와 원고를 불태우는 장면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들은 인간이 경계는 할지라도 쉽게 극복할 수 없고 일상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모순적 상황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병신과 머저리'에 나오는 두 형제의 선택과 행위에 대해 인물의 성격이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동생의 성격에 대해 한편으로 이해하면서도 마지막에는 비판하는 입장이 잘 드러는 글입니다. 동생이 자신이 지닌 상처를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회피하려는 모습에 대해서 독자인 자신의 주관을 분명히 밝히며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 극복해 낼 것을 촉구하고 있는 글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여 옹호하고 비판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 점이 이 글의 장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