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의 길, 서정시의 길
- 작성자 韓雪
- 작성일 201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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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세 해동안 나를 키운 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룰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
- 「자화상」 부분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에 실린 「자화상」은 그의 나이 스물셋에 지어진 시이지만, 그의 평생을 대변하는 시이기도 하다. 그는 친일을 한 민족의 "죄인"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독재 정권에 빌붙었던 "천치"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의 친일 행위를 '일본이 망해도 몇백년은 갈 줄 알았다'라면서 종천순일로 매도했고, 독재 정권에 빌붙은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친일, 친군부로 얼룩진 그의 삶은 그의 문학이 절하되어서 평가될 수밖에 없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자화상」의 다음 대목은 주목해볼만 하다.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그의 "이마 위에"는 항상 "시의 이슬"이 있었다고 그는 스스로 말한다. 비록 "몇 방울의 피"로 상징되는 기회주의적 삶의 모습이 그의 삶에 "섞여 있"기는 했으나, 그가 궁극적으로 닿고자 했던 것은 "시의 이슬"이었다. 그는 친일이거나 친군부이거나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상관없이 "시의 이슬"에 닿기 위해서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이슬"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화사집』에 실려있는 또 다른 그의 시를 보자.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큰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 「화사(花蛇)」 부분
처음에 시인은 뱀을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난 "징그러운 몸뚱이"로 인식한다. 이는 뱀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듯이, 뱀에 의해서 이브는 선악과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 때문에 인류는 원죄를 지어 에덴 동산에서 나오게 되었다. 시인이 뱀을 추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은 뱀 때문에 인류가 고통 속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이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뱀을 두고 "아름다운 배암"이라고 되뇌인다. 뱀을 단순히 추한 것으로 바라보기에는 뱀은 "꽃대님 같"은, 아니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늘에 꼬여 두"르고 싶을 정도로 뱀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돌팔매를 쏘면서"까지 뱀의 "뒤를 따"른다.
「화사」에서 시인은 뱀에서 추(醜)와 미(美)를 동시에 읽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인식에는 차이가 있다. 추(醜)는 뱀이 이브를 꼬여냈다는 데에서 비롯된 '의식적' 인식이라면, 미(美)는 뱀이 그저 아름답기에 생긴 '무의식적' 인식이다. 시인은 의식적인 추(醜)와 무의식적인 미(美)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미(美)를 선택한다. 오직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로 미(美)가 의식적인 추(醜)를 이겨버린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시인이 추구하는 것인 "시의 이슬"을 확인할 수 있다. 서정주가 추구했던 "시의 이슬"은 바로 미(美)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추한 것들 사이에 숨겨진 미(美)'인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의 또다른 시 「문둥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문둥이」
애기를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다. "문둥이"는 "해와 하늘빛"조차 "서러"울 정도로 주변 사람들의 냉혹한 시선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는 속설대로 "애기 하나"를 "먹고" 만다. 그러나 문둥병은 낫지 않고, 그는 절망감에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게 된다.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아기를 먹은 사람의 이야기는 추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서정주는 그 추한 이야기 속에서 원초적 욕망이 지닌 미(美)를 포착해낸다. 「문둥이」가 추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슬프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서정주는 추(醜) 속에서 미(美)를 끄집어내서 아스라하게 풀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추(醜) 속의 미(美)를 읽으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으로 읽을 수 있다.
*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꽃밭의 독백 - 사소단장(娑蘇斷章)」
사소(娑蘇)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다. 그녀는 처녀로 잉태해서 산으로 신선 수행을 간 일이 있는데 「꽃밭의 독백」은 떠나기 전 그녀가 집 앞에서 하는 독백이다. "노래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보다도 "낫기는 구중 나"은 것이지만, "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 역시 "바닷가에 가"서는 "멎어버렸다." 노래는 구름가에서 멈출 수밖에 없고, 말은 바닷가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노래와 말은 유한성을 지닌 존재이다.
그렇지만 꽃은 다르다. "아침마다 개벽하는" 것이 꽃이다.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것이 꽃이고, 그렇기에 영원한 것이 꽃이다. 사소가 "물 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헤엄도 모르는 아이"처럼 꽃의 "닫힌 문에 기대 선"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사소는 신선 수행을 하러 가는 것이다. 유한성을 떠나 영원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영원한 꽃처럼 살려는 것이다. 때문에, 설령 "벼락과 해일만이" 꽃을 여는 유일한 "길일지라도" 사소는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고 외치는 것이다. 온몸을 다해 영원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꽃은 영원한 것이자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 정도로 닿기 어려운 것이다. "문 열어라" 외치며 온몸을 다해 추구해야 비로소 "개벽하는" 것이다. 미당은 『화사집』 이후, 미(美)가 꽃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미(美) 역시도 영원한 것이지만 닿기 어려운 것이다.
영원에 닿기 위해서 사소가 온몸을 다해 꽃을 추구하듯이, 그는 미(美)에 닿기 위해서 온몸을 다하려고 한다 그가 『화사집』 이후의 시집인 『귀촉도』, 『서정주 시선』, 『신라초』 등에서 추한 것이 아닌 설화, 불교, 동양적 사상 등에서 미(美)를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도 바로 거기에 있다. 온몸을 다해 미(美)를 추구하기엔 추(醜) 하나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이를 대변하는 시 세 편을 연속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굽이 굽이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귀촉도」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 「견우의 노래」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동천(冬天)」
「귀촉도」의 화자는 "피리 불고"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움에 사무쳐서는 "차마 아니 솟는 가락에 눈이 감겨서" "눈물"을 "아롱아롱" 떨어뜨린다. 울음소리도 애절한데 흡사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우는 것과 비슷하다. 사별한 임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전적으로 묻어나오고 있다.
「견우의 노래」는 그리움에서 더 나아가 그리움을 넘어선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견우는 직녀와 헤어진 상태이다. 그리움에 울 법도 한데, 그는 역설적으로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라고 말한다. 이별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물살과" "바람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이별의 아픔이 클수록 그리움도 커지고, 마침내 보다 성숙한 사랑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견우는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는 "비단을 짜"야한다고 말한다. 그리움을 참으면서 밀고 나가야 사랑에 이른다는 걸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동천」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사랑을 뛰어넘은 숭고한 사랑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시의 화자는 님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인 "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씼어" 낸다. 님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이 있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둡고 암울하기만 한 "동지 섣달"을 "나르는 매서운 새"마저도 "그걸 알"았나보다. 새는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놓은 님의 눈썹을 "시늉하며 비끼어" 간다.
미당은 「귀촉도」를 통해 '그리움의 미(美)'를 보여준다. 「견우의 노래」에서는, '그리움의 미(美)'를 밀고나가 '사랑의 미(美)'에 도달한다. 다시 그는 「동천」에서 '사랑의 미(美)'를 '숭고한 사랑의 미(美)'로 승화시켜낸다. 최종적으로, 그는 '그리움의 미(美)'를 '숭고한 사랑의 미(美)'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이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당은 미(美)를 계속해서 확장해 나갔다. 미(美)가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는 뜻과 같다. '보편적인 미(美)'를 향해 나아갔다는 것이다. 「꽃밭의 독백」의 사소가 꽃을 위해 "문 열어라 꽃아"라고 외쳤던 것처럼, 그는 미(美) 하나에 닿고 싶어서 보편적인 미(美)를 시로써 끊임없이 탐구하고 찾아온 것이다.
또한, 앞의 세 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추(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보편적인 미(美)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추(醜)에만 매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의 시는 풍부한 서정성을 지니게 된다. 그의 시는 추(醜)를 떠나 완연하고 순수한 서정시의 자태를 갖춘 것이다. 미당은 추(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미(美)를 끌어올려 거대한 서정의 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미당은 미(美)를 오롯이 표현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미(美)를 찾아 집요하게 매달린다. 무등산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며 희망의 미(美)를 찾아내기도 하고(「무등을 보며」), 춘향전에서 한계를 넘어서서 초월적 세계에 다가서려는 초극의 미(美)를 찾아내기도 한다(「추천사 - 춘향의 말1」). 또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신부(新婦)의 설화에서 여인의 한(恨)이 지닌 미(美)를 파헤치기도 하고(「신부」), "성한 두 손으로 멍석도 절고 광주리도 절"으며 "밥을 빌어먹고 살"아가는 재곤이의 이야기를 통해 인정(人情)의 미(美)를 발견해내기도 한다(「신선 재곤이」)
종합해서 말하자면, 그는 『화사집』 이후 '추(醜) 속의 미(美)'를 완전히 떠나 '보편적인 미(美)'를 향해간다. 미(美)가 추(醜)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리움, 사랑, 희망, 초극, 한(恨), 인정(人情) 등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시는 미(美)에 수렴한다. 그의 시는 미(美)에 대한 추구다.
*
미당은 온몸을 다해 미(美)를 추구했다. 그리고 자신이 찾아낸 미(美)를 시로 옮기려고 했다. 시와 미(美)라는 간극에서 필요한 것은 언어다. 미(美)는 언어를 거쳐야만 비로소 시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발견한 미(美)를 오롯이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미(美)를 갖춘 언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미당이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불릴 만큼, 언어를 조탁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포착한 미(美)를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를 갈고 닦았다.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북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라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포그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 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부분
눈발이 "수북이 내려오"고 있다. 모든 것을 덮어 평화로운 상태를 만들려는 듯 "포그은히 내려오"고 있다. 미당은 눈이 내리는 풍경 속에서 "까투리 메추라기 새끼들도" "낯이 붉은 처녀 아이들도 깃들"인 평화의 소리를 들었나 보다. 거기서 그는 평화의 미(美)를 발견해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평화의 미(美)를 완전히 구현해 내려면 눈발을 표현해야하는데, 그러기에는 적당한 언어가 없었다. 결국 그는 눈발의 소리를 "괜, 찬, 타, ……"라는 소리로 재현해낸다. 이 표현 하나로 그는 평화의 미(美)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다. "괜, 찬, 타, ……"라는 표현은 미당의 언어가 미(美)에 다가서려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준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 와서는 그의 언어가 더욱 조탁되었으며, 언어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미(美)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별의 아스라함이 지닌 미(美)를 놀라운 순도의 언어를 통해서 길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와 언어는 온 힘을 다해서 미(美)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
반복해서 말하지만, 미당의 시는 미(美)에 대한 추구다. 미(美)를 어디에서 찾아내려고 했는가에 따라서 그의 작품 세계가 변화했을 뿐이지, 그의 시 세계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것은 미(美)에 대한 추구다. 초기에는 추(醜)에서만 미(美)를 길어 내었지만, 이후로는 동양적 사상, 민족적 정서, 불교 정신, 인생과 인간, 설화 등 다양하고 보편적인 소재에서 미(美)를 길어 올렸다.
서정주는 끊임없이 미(美)를 포착하려고 했던 시인이었다. 그리고 포착의 순간을 글로 구축해낸 시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글은 미(美)로 넘칠 수밖에 없다. 그의 시가 밀도 높은 서정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순도 높은 언어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독립, 통일, 민주화에 관한 내용 일색이었던 우리나라 근대시에서 그의 시가 독보적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시가 현실과 무관했다는 점은 비판을 받을 거리가 있다. 또 그가 일제 강점기, 군부 정권이라는 현실의 추(醜)를 직시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분명히 비판 받아야 할 점이다. 현실의 추(醜)를 애써 미(美)라고 생각하기 위해서 친일, 친군부의 삶을 살아온 것은 더 비판 받아야 할 점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문학사를 되짚어 보았을 때, 오직 미(美) 하나만을 그렇게 집요하게 달려든 시인은 없었다. 미(美) 하나만을 추구하면서 순도 높은 서정의 세계를 쌓아 올린 시인은 없었다. "시의 이슬"을 위해서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시를 쓴 서정주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서정주의 길은 미(美)를 향한 서정주의 글이다. 서정주의 글은 서정시의 길이다. 결국, 서정주의 길은 서정시의 길이다. 서정시의 길은 서정주의 길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서정주의 삶이 친일, 친군부로 점철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서정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높게 평가해야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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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살인적인 열기의 낮과 극심한 추위의 밤. 인적 하나 없는 광대한 공간 속의 외로움.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메워지지 않는 목마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문득 저 멀리에 호수가 보인다면 누구나 뛰어가기 마련이다. 희망을 가득 품고 허위허위 달려가 보지만 정작 있는 것은 모래밖에 없다. 신기루. 광학에서는 빛이 실제로 만나서 생기는 상을 실상이라고 하고, 빛이 실제로 만나지 않았음에도 생기는 상을 허상이라고 한다. 허상이 생기는 이유는 빛이 직선으로만 뻗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미묘한 기온 차이에도 빛은 조금씩 꺾인다. 그 조금씩의 차이가 모여 나중에는 뒤집힌 허상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눈은 실상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나무가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호수에 나무가 반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상을 실상처럼 받아들이는 것.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광활한 삶의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 우연히 발견한 이상을 향해 달려가곤 한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자가 호수를 향해 달려가듯이. 마침내 이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쯤 우리는 허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부조리의 작가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 삶에 숨어있는 허상을 들춰내어 폭로해왔다. 앞서 그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왜곡된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보여주며 행복한 가정이라는 허상을 파헤친 바 있었고, 『빛의 제국』에서는 서로를 속이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진실한 관계라는 허상을 파헤친 적도 있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그가 천착하는 것은 바로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이다. 그가 어떻게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을 밝혀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소설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살인의 모든 과정과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서 일지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문장을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시를 공부했고 어쩌다 등단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알츠하이머에 걸린 평범한 일흔 살의 노인일 뿐이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은희. 그녀는 “농대를 나와 지역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그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녀는 그가 마지막으로 죽인 여자의 딸이다. 여자는 자신의 딸만은 살려달라고 빌었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켜주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잇따라 여자 셋이 죽었”고 “세 여자 모두 이십대”인데다가 “밤늦게 귀가하다가 당했다”고 한다. 연쇄살인범으로부터 은희를 보호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늙었고 심지어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은희에게 밤길을 조심하라는 주의상황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우연한 기회로 연쇄살인범의 단서를 찾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정차해 있는 놈의 차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추돌하고 말았다. 사냥용으로 개조한 지프였다.
- 韓雪
- 2014-12-23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자. 열달동안 어둠 속에 살았던 아기의 눈에 분만실의 환한 조명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수술이 끝난 의사의 안도한 표정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비로소 어머니가 된 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 아기의 눈에 어떤 것이 보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기가 ‘너’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던 시간이 끝나자마자 홀로 세상과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기가 어떤 물건이든지 우선 입에 넣어보려는 행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아기에게 있어서 감각이 가장 발달된 기관은 입이다. 아기는 물건을 입에 넣어보면서 물건에 대해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너’라는 존재를 그토록 궁금하게 여기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타자에 대한 의문이 자아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두 질문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모든 학문의 근저에는 이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다만 조금씩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금은 말장난 같겠지만, 미학은 미학적인 방식을 통해 아름다움의 원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경제학적인 방식을 통해 경제 행위의 원리와 경제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 역시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자연 현상의 원리와 그 원리를 따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과학적으로 ‘너’와 ‘나’를 분석해 보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방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과학적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과학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인가. ‘과학적’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몇몇 과학철학자의 생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은 생각의 관성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라는 지식을 우리는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 우선 우리는 매일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오르는 것을 확인했었다. 지금까지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올랐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100년도 채 안 되는 삶을 바탕으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도 될까?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역사책을 근거로 들면서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 것이 적어도 몇천년이 되었기에 확신할 만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할 만한 것과 확실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올랐다는 사실과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연관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랜 기간의 경험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처리해버린다. 태양이 내일 서쪽에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보았을 때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모두
- 韓雪
- 2014-07-13
당신, 사랑을 믿나요? 언젠가 당돌하게 소설의 첫 문장을 써본 적이 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거기서 끝이었다. 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원래 문장은 문장을 부르는 법이다. 문장이 제대로 들어서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 다음의 문장이 들어선다. 나는 분명히 정확한 문장을 썼다.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었고, 읽는 이의 관심을 끌만한 문장이었으며, 문법적 오류도 없었다. 그럼에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어본 듯도 했다. 제대로 문장을 썼는데도 다음 문장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이 쓴 문장을 스스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설득시킬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당신, 사랑을 믿나요? 나는 이 문장을 믿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사랑에 설득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믿지 못했다. 한 줄만 써놓고 버렸던 원고지를 내가 다시 꺼내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내가 사랑에 설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사랑을 믿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이 문장을 믿을 수 있었다.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장은 문장을 따라왔다. 물론 첫 문장은 다른 문장으로 바꿨다. 퇴고를 하면서 첫 문장이 너무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설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소설을 써냈다는 것이다. 그 문장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문장으로 말이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나는 사랑을 믿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순전히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아닐까 싶다. 나는 김연수 때문에 사랑에 설득되었고 사랑을 믿었던 것이다. 세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로. 자아와 타자. 세상은 그 둘로 구성되어 있다. 나와 너는 이분법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다. 나와 너는 선천적으로 다르다. 나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다. 나는 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너의 조그마한 움직임이나 바뀐 말투 정도로 너의 생각을 간신히 추측할 뿐이다. 나에게 있어 너는 철저한 미지未知다. 그리고 그건 너도 그렇다. 너는 결코 나라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나와 너는 영원히 갈라서 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자, 그것은 곧 지옥이라고. 너라는 존재는 나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끊임없이 간섭한다. 결국 너는 나를 꺾어버린다. 내 의지는 너 앞에서 비참하게 허물어질 뿐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너란 존재는 나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며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타자를 극복하려 했던 건 사르트르뿐만이 아니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철학자들 역시 타자를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나라는 존재만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절대적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유아唯我론으로 귀결된다
- 韓雪
-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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