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인연
- 작성자 윤스리
- 작성일 2012-02-11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950
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
‘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우연히 그대를 본 순간’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반복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이정선의 ‘우연히’라는 곡의 후렴 부분이다. 가사 내용은 간단하다. 우연히 본 그대에게 내 마음을 다 빼앗겼다는 내용이다. 한순간 내 마음을 빼앗아 버린 그대를 나는 인연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우주의 중심은 ‘나’니까 단순한 우연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기에, 우연(偶然)보단 인연(因緣)을 특별하게 느끼기에 우리는 수많은 우연 중 하나를 꼽아 인연으로 둔갑시키는 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인연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인연의 겁이란 우주가 태동해서 멸망하기까지의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장구한 시간을 의미하며, 일 겁의 시간은 물방울이 떨어져 집 한 채만한 바위를 없애는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하여 힌두교에서는 43억 2천만 년을 1겁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범망경에서는 선근인연이라 하여 전생에 좋은 과보를 맺은 사람 간의 만남을 겁으로 표현한다. 1천겁에 한 나라에 태어나고, 2천겁에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며, 3천겁에 하룻밤을 한 집에서 지낸다. 4천겁에 한 민족으로 태어나고, 5천겁에 한 동네에 태어나며, 6천겁에 하룻밤을 같이 잔다. 7천겁은 부부가 되고, 8천겁은 부모와 자식이 되며, 9천겁은 형제자매가 된다. 1만겁은 스승과 제자가 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당연히 존재하는 인연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나? 불교의 관점에서 인연은 우연이란 수학적 개념보다 필연이란 철학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모든 인연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아빠, 엄마가 생긴다. 아빠, 엄마, 형제자매 같은 가족은 인생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관계이다. 자의든 타의든 일단 가족을 이루면 가족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몇 십 년 동안 떨어져 지내면서 얼굴조차 선명히 기억나지 않는 이산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인류학적, 심리학적 이론을 제시한다고 해도 가족에 느끼는 특별한 유대감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가족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도저히 계산할 수 없이 복잡한 운명의 실타래를 보고 있노라면 신이란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샘솟는다.
나는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1993년 1월 대한민국의 어느 병원에서 태어나 주로 수원에서 살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곤 하지만 이 중 하나라도 달라지면 내 인생 전체는 전혀 다른 판도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빠른 생일이라 빨리 입학했더라면 지금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이다. 하지만 나는 93년생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들과 친구의 인연을 맺었다. 내가 만약 대한민국이 아닌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면, 1993년이 아닌 1893년에 태어났더라면, 수원이 아닌 서울에서 살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나’가 아닐 것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어왔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어갈 것이다. 하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우연의 만남은 평생 소중히 간직하는 인연의 상대가 되기도 한다. 스쳐지나감, 관계맺음, 지속적 교류, 고착, 소멸 등 우연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떤 얼굴이 될지는 연을 맺은 두 사람이 하기 나름이지만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우연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자신이다.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는 경우라 해도 자신이 피해버리면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친구
가족의 인연은 선천적으로 결정되지만 친구의 인연은 후천적으로 맺어진다. 물론 가족의 인연도 특별하지만 나 같은 경우엔 정해진 인연보다 만들어가는 친구의 인연에 더 마음을 쏟는 편이다.
알테르 에고(Alter ego). 분신(分身), 또 하나의 자기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알테르 에고는 이런 뜻도 가지고 있다. 둘도 없는 친구. 자기의 다른 면, 또 하나의 자신. 어떤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친구는 타자(他者)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자아의 일부분이다.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 행운 중 하나라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길고도 짧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수많은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돼서 핸드폰 번호를 정리하면서 그동안 만난 사람들이, 사귄 친구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만족했다. 그 중에서도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때 사귄 ‘옛’ 친구들에 대한 정이 가장 크다고 느꼈다. 그런데 점점 옛 친구들과의 왕래가 적어지면서 심경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적게는 3년, 많게는 6년 전 사귐에 대한 기억들은 언제부턴가 어떤 추억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잠깐일 줄 알았던 단절이 길어지며 이별이 되고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다르다고, 나와 친구만큼은 다르다고, 절대 그럴 일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만한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관계란 쌍방향 소통 아래 성립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사람의 감정이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를 수 있어 비틀어지고 뒤틀리기 십상이다, 항상 ‘통(通)’을 경험하던 나에겐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결국엔 남과 남이 맺은 관계이기에 그 사이는 광활하고 척박하고 삭막하고 춥다. 이 황무지에 가까운 땅을 가꾸기 위해선 해와 달의 공존이 필요하다. 해만 비추어 너무 뜨겁지 않게, 달만 비추어 너무 차갑지 않게 적절한 온도를 유지해야마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 나는 그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체적 접촉이 지속되지 않으니 권태기 부부처럼 뜨거움은 식어버렸다. 나와 ‘또 다른 나’가 가꾸던 땅은 바짝 말린 생선처럼 앙상한 뼈만 드러낸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 친구의 옆자리엔 내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의 옆자리에 더 이상 내 자린 없었다. 이미 누군가가 꿰차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는지 자문을 구해본 적이 있다. 오랜 고민 끝에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건 내 이기심이었다. 특히 연인 사이에 자주 발생하는 지나친 집착, 소유하려는 욕심을 나는 친구를 상대로 부리고 있었다. 머리론 알았지만 마음은 계속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렸다. 머리도 알고 있었다. 이성보다 감정을 내세우고 있는 마음의 심정을.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가 평생을 함께 할 알테르 에고가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맺어진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는 생각을 마음은 오래 전부터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장벽 같은 것이 친구 쪽에 쌓여있는 것을. 장벽의 존재를 친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내 모습이. 나는 두려웠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봐.
이별은 만남의 시작인가, 만남은 이별의 시작인가
언젠가 끝날 운명의 관계라서 씁쓸한 미래가 예정돼 있다면 행복한 현재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현재보다 앞으로 두고두고 아파해야 할 미래의 흉터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현재를 포기했다. 다치지 않게 몸을 사리기로 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프랑스인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추억하며 그리고 추억이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강을 건너지 못한 채로 과거와 현재의 경계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저 아름다웠던 그때 그 시절만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별 수 없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그림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달라진 서로를 보며 그림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그때 그 시절의 친구와 우연히 만났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귀갓길 친구가 먼저 나를 불렀다. 우리는 함께 걸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친구네 집으로 걸어갔다. 그때 친구가 멈춰서더니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라고 묻자 나는 ‘너희 집’이라 답했다. 친구는 자기가 배웅해주겠다며 방향을 바꿨다. 이런저런 이야기, 간헐적으로 터지는 가식 없는 웃음, 서로에 대한 칭찬과 덕담, 아쉬운 헤어짐……. 나는 잠시나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한때 옛 친구들이 나를 찾지 않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규명해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쓸데없는 짓이었다. 언제나 답은 예상외로 간단한데 나는 답을 피해 아주 멀리 돌아가며 문제를 만드는 피곤한 스타일의 인간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자주 만날 수 없다면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동안 하지 못한 말들을 한 번에 쏟아내면 될 것이다. 나는 언제든지 만나면 환영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친구를 만나지도 않고 스스로를 고독의 감옥에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별은 만남의 시작인가, 만남은 이별의 시작인가. 어쩌면 둘 다 맞는 지도 모르겠다. 만남과 이별은 서로의 처음과 끝,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순환되는 인생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게 만남과 이별이라면, 만남과 이별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게 인연이라면 인생에서 인연을 찾길 원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살다 보면 하나둘씩 배워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깨달은 건 같다. 인연이 아름다운 이유를 말이다. 인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만남의 설렘과 이별의 슬픔이 공존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인연이든 유성처럼 한순간 반짝인다 해도 북극성처럼 한자리에서 계속 빛난다 해도 아름답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언젠가 가슴 속에 간직한 별이 소멸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는 한밤중이 아니라 해 뜨기 직전이래. 어둠은 무섭지만 너에겐 별이 있어.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 중 하나를 가슴에 품는다면 무서운 어둠도 별을 감싸며 빛을 더 밝혀줄 거야. 별을 따다 네 가슴에 품는 건 너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별에 닿지 못할 거란 걱정은 마. 별은 항상 손을 힘껏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떠 있거든. 내가 널 도와줄 순 없지만 멀리서 응원하는 걸 잊지 않을게. 서로를 비추는 별이 돼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그날이 오길 기도하며.
추천 콘텐츠
고장 난 심장 – 내 인생 최고의 경험 언제부터 문학을 창작할 생각을 하셨나요?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평소 글을 쓰는 걸 좋아했지만 평생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글을 잘 쓰는 재능을 타고 나야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문대에 진학해 학식을 많이 쌓아, 사르트르처럼 어렸을 때부터 책에 파묻혀 살아 학문과 친하게 지내 얻은 후천적 재능이나 소위 천재라 불리는 이들의 선천적 재능이 없으면, ‘예술적 재능’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선택받지 못한 일반인이었다. 내가 물려받은 유전자에 특별한 글재주는 들어 있지 않았고, 환경 또한 유전적 필연에 부응하여 평범했다. 평범했기에 나에게 글을 쓰는 예술가로서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여느 인간처럼 특별한 삶을 꿈꿨다. 어렸을 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점점 해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변해갔다. 주변 사람들이 내 먼 미래, ‘꿈’보다 내 가까운 미래, ‘현실’에 관심을 가질 때쯤 나는 해낼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확고히 했다. 나에겐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평범한 인생은 필연(必然)적으로 받아들여야할 운명이었다. 노력을 전적으로 무시한 건 아니다. 물론 노력으로 부족한 재능을 채운 사례가 비일비재했고,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는 말도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노력도 재능의 영역이다. 미칠 듯이 좋아하는 것도 재능이라 하지 않던가. 나에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몰입시키는, 계속 해도 질리지 않는, 하루 종일 그것만 생각하게 하는 불덩이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피를 끓게 하고, 심장을 헤비메탈의 드럼사운드처럼 격렬하게 진동시키고, 영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그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뜨거운 것이 내 안에 없었다. 나 자신이 뜨겁지 못했기에 뜨거운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학교 – 컴퓨터게임 – 학원의 무한반복, 일상이란 철창 없는 감옥생활. 나는 일상에 속박돼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던 모범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루하루가 하루란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공정(工程) 같았고, 내 육신은 하나의 기계 같았다. 연료를 공급해주는 식사, 1분기씩 성과를 산출하기 위해 보는 시험들, 그 시험을 위한 하루하루 반복되는 노동, 고장을 방지하기 위한 휴식시간, 어쨌든 기계는 1년 365일 풀가동된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면서 무엇을 얻는가? 기계처럼 살았으니 기계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남겼을 거라 생각했다. 그 결과는 초라했다. 모든 것이 평범해 타사 제품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가격, 품질,
- 윤스리
- 2011-12-17
나는 몰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해가는 그의 얼굴을. 가면 뒤에 감춰져 은밀한, 매일 한 꺼풀씩 벗겨지는 음란한, 얼굴의 진실을. 나는 지금 그를 추억한다. 첫 만남 D-240 나와 그의 첫 만남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것은 운명이 아닌 필연이었다. 때가 오면 그를 만날 거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기다림 끝에 자리하는 시간의 사구(砂丘)였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닳고 닳은 설렘, 무심하게 침식당한 설렘 밑에 쌓인 무미건조한 기다림의 부스러기, 그 부스러기가 모여 나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모래사막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흘러 사막은 깎였고, 모래는 언덕을 쌓았다. 그것은 사막에서 으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축물이었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와 만날 운명이었고, 마침내 만났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와 그의 관계가 불편할 거란 걸. 그리고 처음부터 틀어진 관계가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 거란 걸. 걷고 또 걸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구(砂丘)에서의 여정처럼. 물음표 D-? 나는 이과였다. 내 스스로 문과 쪽이 절대우위하단 걸 알았지만 이과를 선택했다. 그것은 어떤 치기어린 도전이었다. 우뇌와 좌뇌의 결합이란 거창한 목표로 시작한 도전은 도전다운 열정 한번 불사르지 못하고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내 좌뇌는 오래전에 굳었다. 공부를 한창 열심히 하고, 또 잘했던 시기에도 이과 계열보다는 문과 계열이 우수했다. 일단 국어, 영어, 사회는 재밌었고, 과학은 재미없었다. 수학은 싫어했다. 수학은 하나의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내가 그 노동을 수확 없는 소비활동이라 간주한 데에 있다. 수학과에 진학하지 않으면 수학은 단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에 불구하다고, 미분적분을 한다고 해서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과에서의 실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수학을 잘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생각해야한다. 나는 학원을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학원을 떠나면서 수학에게 잠깐 동안 이별을 고했다. 어쩌면 도피였을 지도 모른다. 수학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불운이었고, 행운이었다. 나는 끝없는 추락을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이과에 진학해 수학공부에 매진해도 수학은 추락 혹은 정체였다. ‘매진’이란 표현이 무색하게 나의 노력은 딱 추락을 멈출 수준이었다. 죽지만 않을 정도로 등급컷이란 수면 위에 입만 내놓은 상태로 호흡을 이어갔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인생이 점점 피폐해지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정신적 발기부전이었다. 열정이 샘솟지 않았다. 노력도 없었다. 나는 ‘그저 그런’, 다시 말해 누구나 다하는, 그래서 별 볼일 없는, 그리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열심히 호흡하지 않았기에 산소호흡기가 필요했다. 나에게 억지로 산소를 공급해주던
- 윤스리
- 2011-11-10
나는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을 찬양했다는 걸 알고 있다. 최근에 다녀 온 코르다전(展)에서 체 게바라의 에피소드를 통해 다시금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쿠바 혁명 이후의 일이다. 쿠바의 첫 사탕수수 수확기를 시운전하는 체 게바라가 시운전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코르다는 그를 찾아갔다. 코르다는 말했다 “드디어 뵙는군요. 사탕수수 수확기에 관한 기사를 쓰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체는 코르다에서 사탕수수를 베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코르다가 없다고 대답하자 체는 수행원 한명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 사진작가에게 마체테 칼을 하나 주시게나. 사탕수수 수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어 코르다에게 “아침마다 사탕수수를 베어보게나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보기로 하세.” 결국 코르다는 직접 사탕수수를 베는 노동을 경험하고서야 체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노동의 본질은 생산에 있다.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내 가치를 생산한다. 그것은 육체적 노동일수도 있고, 정신적 노동일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동에 우열 관계를 정립시켜 인식해왔다. 지난 세기 우후죽순 터졌던 혁명운동은 사실 노동에 대한 차별에 저항한 것이다. 자본을 가진 부르주아가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릴 때 프롤레타리아는 작업장에서 시간도 없이 일하는데 각각의 대우는 파격적이다. 마치 두 노동 간의 간극이 인류의 역사를 쭉 늘어뜨려 놓은 듯 끝도 없이 뻗어있는 형색이다. 물론 정신적 노동의 성취가 인류를 진보시켜 작금의 경지에 도달시킨 건 인정한다. 하지만 육체적 노동이 동반되지 않았더라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도달했을 지라도 뇌세포 속에 안장되었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 건 책 그리고 땀이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이다(땀도 많이 흘리신다). 시민들의 발인 버스를 운전하신다. 본인은 종종 내가 무능력해서, 가난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시지만 내게 그런 사과는 사치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 어떻게 가난을 논할 수 있겠는가? 가난을 몰랐더라면 검소한 생활습관이나 빈자에 대한 배려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옛날에는 귀족이셨잖아요’하고 농담을 던진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웃으시긴 했지만 ‘그 기사랑 이 기사랑 같니’라며 웃음을 거두셨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아버지 얼굴에 웃음을 선물하는 것뿐인데 그것마저 잘 안될 때가 있다. 일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 가볍게 인사하고 대화는 단절된다. 덜어내려 해도 손닿지 않는 가슴 깊은 곳에 앙금이 남아 있어서다. 비교적 조용한 사춘기를 보내고 나는 스스로를 ‘정신적 노동자’로, 아버지를 ‘육체적 노동자’로 정의했다. 이분법의 철저한 질서는 의식의 그림자에서 차곡차곡 벽을 쌓아올렸다. 어린 시절 버릇없는 나를 향했던 아버지의 주먹질과
- 윤스리
- 2011-09-2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