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거짓말

  • 작성자 Na
  • 작성일 2005-08-07
  • 조회수 861

 

네모난 틀 속에 박힌 흑백 사진 주인공처럼 그 애의 첫인상은 그렇게 내게 왔다. 낡은, 아련한, 잃어버린 지 오래된 소지품 같은 느낌. 양 갈래로 땋은 머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말할 때의 목소리 톤? 어쨌든 무언가가 그 애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만들었다.

전학 온 첫날, 그 애는 이렇게 말했다.

“친하게 지내자.”

친하게 지내자. 그 애가 이렇게 내뱉은 순간 그 말이 더없이 쓸쓸하고 억지스러울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그 애는 내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그래서일까? 그 애의 얼굴보다는 뒷모습이 더 익숙하게 떠오른다. 그 애를 길에서 만난다면 아마 뒷모습을 보고 알아챌 것이다.

그 애는 틈만 나면 뭔가를 지우는 듯 했다. 수업시간에 해놓은 필기까지도 전부. 그 애가 뭔가를 열심히 지 울 때마다 뭘 저러 지우나라기 보다는 뭘 저렇게 써놓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렇게 지울 거면서 그 많은걸 뭣 하러 써놓았을까?

하루는 그 애가 내게서 지우개를 빌  려 간적이 있는데 그날 산 지우개가 절반으로 닳아 돌아왔었다. 나는 정말 괜찮았지만 그 애는 한사코 됐다는 내게 다음날 똑같은 지우개를 사다줬다. 나는 아직도 그 지우개를 쓰고 있다.

체육시간이었다. 2인1조 달리기가 있었는데 우연찮게도 그 애와 내가 한조가 되었다. 어색하게 묶인 발이 영 불편했다. 골인지점까지 가는 데에만 해도 다른 조에 비해 턱없이 느렸고 그 폼 또한 민망했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쑥 빼고 안짱걸음으로 어떻게 해서든 빨리 가고 싶어 하는 그 애와 내 모습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골인지점을 돌려는 찰나 그 애와 내 발이 엉켰다. 다리보다 몸이 먼저 앞으로 나가면서 턱과 가슴을 모래바닥위에 찧었다. 뿌연 모래가루가 내 시야를 덮었고 꺼끌한 모래가 자글자글 씹혔다. 턱 밑과 손바닥이 쓰라렸다. 나와 그 애는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엎어져 있었다. 선생님이 달려와 발목에 묶인 끈을 풀자 그 애가 휘청하며 일어났다. 그 애가 일어서자 잔잔하게 누었던 모래들이 다시 일었다. 나도 서기 위해 발목에 힘을 주는 순간 그대로 주저앉았다. 발목이 욱씬욱씬 쑤시며 얼얼했다  . 선생님과 그 애가 양 옆에서 나를 부축했다. 한 쪽 발목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겨우 스탠드로 와 앉았다.

“괜찮니?”

하마터면 못 들을 뻔 했다.

“어? 어, 조금”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 내 발목과 함께 묶였던 그 애 발목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 묶은 끈 때문에 약간 발갛게 도드라졌을 뿐 말짱했다. 무릎이 약간 쓸린 정도.

“점점 붓는다.”

“응?”

그 애 발목을 보고 있던 나는 그 애 소리에 놀라 재빨리 내 발목으로 눈을 돌렸다. 방금 전보다 눈에 띄게 부어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통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운동장으로 얼굴을 들었다. 사납게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열, 온통 샛노란 색으로 보이는 운동장에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햇빛을 맞받으며 등나무가 가득 퍼져 있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한동안 있으려니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호루라기를 불어 아이들을 집합시켰고 곧 해산시켰다. 모두들 그 자리에서 뿔뿔히 흩어졌지만 결국은 같은 교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모래먼지로 가득 찼다 이내 가라앉았다. 복작거렸던 운동장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둥글고 휑한. 그 애는 그때까지 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일어서려 하자 따라 일어서면서 내 팔을 잡았다. 그 애의 땋은 머리가 내 얼굴을 스치자 샴푸 향과 먼지 냄새가 뒤섞여 났다.

“괜찮은데.”

그 애는 멋쩍어 하는 내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부축했다. 한발 한발 걷는 게 힘들었다. 자꾸 그 애 쪽으로 몸이 쏠렸다. 나는 그 애 쪽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 애는 줄곧 내 발목만 바라보고 있어 내 표정을 보지 못했다. 나는 곧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여전히 그 애에게 별다른 미안한 감정 없이 교실로 올라갔다.

다행히 그날은 마지막 수업이 체육이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싸고 있는데 그 애가 몸을 뒤로 돌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애를 보았다.

“집에 같이 갈래?”

나는 의아해져서 그 애를 쳐다보다가 곧 발목에 통증을 느끼며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오후 세시의 햇볕은 그야말로 땡볕이었다. 아스팔트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던 아지랑이에 퉁퉁 부은 발목이 오 그라 붙는 듯 했다. 그 애는 내 한쪽 팔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부축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목은 아찔하게 아파왔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 때였다. 그때도 발목을 삐끗해 혼자서는 걸을 수가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기위해 여느 때처럼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친구들은 나와 집에 갈수 없었다. 그들은 학원엘 가야 했고 유치원 다니는 동생을 마중 나가야 했으며 다른 친구와 약속이 있었으니까. 하필이면 친구들은 그날따라 바빴다. 나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집은 쉽게 갈수 없었다. 그러기엔 발목이 너무 아팠으니까. 그리고 왠지는 몰라도 내가 그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날 이후 한번 삐었던 발목은 자주 말썽을 피웠다. 그리고 혼자 다니는 것이 편해졌다.

그 애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쪽팔만 맡겼던 것이 점점 그 애 쪽으로 몸의 중력이 기울어졌다. 그 애 품이 부담스러웠지만 그것을 뿌리치기엔 발목이 너무 아팠다. 집의 절반을 다 와갔지만 누구하나 말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게 오랜만이었던 탓도 있었고 내 몸의 절반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결국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쪽은 나였다.

“지우는 걸 좋아해?”

느닷없는 내 반격에 그 애는 주춤하다 이내 알아듣고 대답했다.

“아, 그냥 그래.”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열심히 무언가를 지우는 그 애 모습이 그 대답으로 인해서 순식간에 바보 같은 행동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그럼 쓰는 걸 좋아하냐고 물어보려는데 그 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리 연습 하는 거야. 공들여 논   거 다시 공들여 지우기.”

예상치 못했던 그 애 대답에 내 고개는 그 애 쪽으로 픽 돌아갔다. 그리고 의외로 더 많은 말이 그 애 입에서 조근 조근 새어 나왔다.

“나 이사를 많이 했거든. 그때마다   모든 것을 처음 접해야 했어. 그   적응기간이 나한테 무지 힘들더라구.   그래서 터득한 게 있지. 지우기야.

그 애는 한 템포 쉬며 흣흣 웃었다 . 그리고 곧 말을 이었다.

“전에 알고 느꼈던 것들을 지우면   다른 것들이 쉽게 들어와. 어디에도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어차피 이 세   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   집 들 사이로 햇빛이 빗겨와 시멘트 바닥 위를 쨍하게 쏘았다. 내 등과 얼굴, 그 애 손에 잡힌 팔에서 삐질 삐질 땀이 났다. 저기에 담배라고 씌 여 있는 곳이 보였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그 애가 난처한 듯이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내가 사줄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애와 같이 구멍가게 앞에 놓여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로 갔다. 종류가 많지 않아 그 닥 고를 건 없었지만 그래도 고르고 골라 나는 비비빅 그 애는 빠삐코를 들었다.

“요즘 빠삐코가 그렇게 커졌네.”

나는 도로 비비빅을 넣고 그 애와 같은 빠삐코를 골랐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세어보니 100원이 모자랐다 . 300원짜리로 아이스크림을 다시 고르려는데 그 애가 설핏 웃으며 주머니에서 100원을 꺼냈다.

“100원밖에 없었거든.” 나와 그 애는 처음으로 마주보고 웃었다.

가게 앞 평상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아 먹었다. 난 순수한 답례 차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준 거였지만 그 애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니 아주 조금은 우정의 증표 같은 걸로도 느껴졌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우린  집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단 것을 먹어 그런지 갈증이 몰려왔다.

“이제 조금만 가면 돼. 고마워.”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골목을 꺾어 들어갔다. 멀리 집이 보였다. 어서 빨리 집으로 들어가 찬물에 온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 애는 대문 앞까지 날 바래다주었다 . 그리고 싱겁게 우린 헤어졌다.

“잘 가.”

그날 이후 바뀐 것은 없었다. 그 애는 내 앞자리, 나는 그 애 뒷자리에 앉았고 나는 여전히 혼자 다녔다. 바뀐 게 있다면 그 애 목뒤에 땀띠가 나 있었다는 것. 그래서 땋은 머리를 풀어 높게 틀어 묶고 다녔다는 것 정도.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모두들 시험 준비에 바빴고 나도 그랬다. 시험을 이틀 앞두고 가창시험이 있었다. 그날 하루는 온종일 같은 노래 소리로 반이 어지러웠다. 쉬는 시간만 되면, 아니 수업시간이라도 음악 책을 펴 놓고 가사를 외우거나 노래를 다듬는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음악시간은 점심시간 바로 다음이었다. 아이들은 점심을 최대한 빨리 먹고 음악실로 올라가 노래를 반주와 맞추어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5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각자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나는 노래엔 젬병인 터라 가창시험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어느새 들어와 내 시야에 비쳤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손이 떨렸다. 어떡해 어떡해. 가사라도 틀리지 않으려고 보고 또 봤던 음악책을 다시 뒤적거렸다. 그리고 선생님은 드디어 안타까운 소리를 뱉었다. 그 소리는 언제나 안타까웠다.

“자, 1번부터 나와.”

그 1번은 바로 나였다. 다 아물지 않았던 다리를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한건 오래전부터였다. 선생님은 반주를 녹음한 테이프를 틀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저 예쁜 연-꽃은 햇빛 싫어하며   머리를 숙-이고서 곱든 밤 꿈을 찾   도다.”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예 눈을 꽉 감고 크게, 내 식대로 불렀다. 가장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나만의 방법. 어차피 힘들 거라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즐기자. 너무도 길었던 내 가창시험이 끝났고 나는 눈을 떴다. 선생님은 점수를 매기고 있었고 아이들은 나를 벙벙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금방 진정이 되었다. 몸에 힘이 쭉 빠져 엎드렸는데 잠이 든 것 같다. 눈을 떴을 땐 맨 마지막 번호인 그 애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 애의 음색은 말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안정적이었고 매끄러웠다. 그렇게 탈 없이 잘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애 입에서 트림이 나왔다. 정말 그 애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트림이었다. 모두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놀라 그 애를 뜨악하게 쳐다보았다 .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애 얼굴이 샛노랗게 변하더니 갑자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점심에 먹었던 메뉴가 그 안에 그대로 있었다. 구토물이 흘러 맨 앞자리에 앉은 내게로 왔다. 바로 발밑까지 와있었다. 자칫하다가는 밟을 것 같아 다른 아이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 애 얼굴을 보았다. 그 애는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자신의 구토 물을 보며.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저마다 코를 쥐어 싸거나 한마디씩 던지며 음악실을 나갔다. 선생님은 그 애에게 화장지를 주면서 속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 애는 괜찮다 했다. 그 애는 괜찮다했다. 선생님은 위청수를 하나 따서 그 애에게 주었다.

“다음시간에 수업이 있으니까 얼른   치우고, 니들도 수업 들어가야지.”
니들이란 말에 그 애가 선생님 곁에 서있던 나를 보았다.

“아직 안 갔구나. 빨리 가. 종   금방 치겠다.”

그렇게 말하고 그 애는 화장지를 뜯어 자신의 구토 물을 정성스레 치웠다 . 내가 물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그 애가 내게 고마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듯도 했으나 나는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 수가 없다.

기말 고사가 순식간에 지나갔고 예년보다 빨리 장마가 왔다. 비는 많이 오진 않았지만 끈질기게 내렸다. 끈질기게 내린 비는 대지 위를 어느 정도 정리 해가며 흘렀다. 그리고 높게 틀어 올렸던 그 애 머리가 다시 양 갈래로 땋여있었다.

그 날은 비가 오다가 그쳤던 일요일이었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어 눅눅했지만 덥지 않았다. 운동도 할 겸  시간도 때울 겸 근처 약수터에 물을 뜨러 올라갔다. 학교 뒷산에 있는 약수터인데 말이 근처지 족히 30분은 걸렸다. 비가 와서 그런가. 사람이 없었다. 몇 사람만이 저쪽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을 뿐이었다. 탕, 탕, 툭. 공 소리가 고즈넉이 약수터를 울렸다. 졸 졸 졸 물이 새어 나오는 구멍에 물통 주둥이를 갖다 대었다. 겨우 저렇게 떨어져 언제 다 차나. 그런 생각은 끝에 항상 무안해 진다. 물통 대놓고 쭈그려 앉아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면 어느새 반, 또 한번 휙휙 둘러보면 금세 한통이 꽉 찼다. 그날도 테니스공이 라켓에 쳐지는 소리를 세고 있으니 금방 물 한통이 찼다. 물통을 들고 약수터를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목에 풀들이 무성했다. 봄이 지나면 꽃은 떨어진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고. 그런데 봄에 핀 꽃을 한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다. 봄, 정신없는 계절. 그렇다고 여름은? 가을은? 겨울은....... 주위를 둘러보며 살긴 살았을까? 과거에 대한 기억, 기억, 기억. 생각해 내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을 때 저기서 아담한 건물이 보였다. 풀이 무성한 좁은 길을 내려오자 보이는 아담한 건물. 그러고 보니 이쪽 길로 내려와 본적은 없었다. 아, 여기가 거기구나 . 학교를 가기위해 거쳐야 하는 작은 굴다리가 있는데 그곳에는 이런 표지판이 붙어있다. 학교 앞 200m. 희망 고아원 300m.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학교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 곳이 여기에 있었다니. 나는 왠지 반가워져서 그 곳 대문 앞에 서보았다. 희고 낮은 대문은 열려있었다. 대문 앞에서 길 아래쪽을 굽어봤다. 저기 밑으로 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대문 옆으로 역시 낮은 담장이 있었는데 그 밑으로 민들레와 봉선화가 뒤섞여 피어 있었다  . 봉선화 꽃잎은 이미 누가 따 갔는지 한 송이만 꽃잎이 제대로 달려 있었다. 꽃잎보단 잎이 더 잘 드는데. 나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봉선화 밑에 작게 핀 민들레를 보았다. 해가 안 나서 일까, 습기 때문일까. 민들레는 원래의 제 빛을 못 내고 있었다 . 나를 즐겁게 해주렴. 민들레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민들레를 꺾어 귓등에 꽂았다. 나를 타고 멀리 봐. 나는 그곳에 쭈그려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 손을 보았다. 열 손가락에 예쁜 물이 들어있었다.

“여기서 뭐해?”

톤이 높고 불안정한 목소리. 얼굴을 들어보니 그 애였다. 나는 멍하게 그 애를 쳐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쟤가 왜 여기서 나오냐. 내가 너무 빤히 그 애를 보아서 일까? 그 애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옆에 앉아도 돼?”

나는 다리가 저려왔지만 그러라고 했다. 그러다 도저히 저린 다리를 못 참겠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애도 나를 따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발목은 어때? 다 낳았니?”

한참 전 일인데도 그 애는 스스럼없이 물었다.

“그럼. 그때가 언젠데. 그러니까   이렇게 쭈그리고 있었지.”

마음과는 다르게 말은 퉁명스럽게 나갔다. 그 애는 흣흣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너 여태까지 한 말 중에서 제일   길다.”

그 애 말에 나도 픽 웃으며 그 애를 장난스럽게 흘겼다.

“여기 사니?”

풀들이 바람에 쓸려 소리를 냈다.

“응. 우리 집. 음, 아니다. 금   방 갈 거니까 별장 정도로 해두지   뭐.”

그 애의 발랄한 대답이 참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봉선화, 키우는 거야?”

“아, 이거. 키우는 게 맞나? 알   아서 잘들 자라니까. 여기 있는 건   지나가는 사람들 따가라고 심은 거래

. 저쪽 뒤꼍에 가보면 더 많은데.   가볼래?“

나는 그 애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은 앞 서 온 비 때문에  촉촉이 젖어 있었고 주위에 잔디밭은 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고요했다  .                                             “원래 이렇게 조용해?”
  “다 산에 갔어. 여기 원장님이 산   을 좋아하신대. 그래서 애들 데리고   자주 가시나봐.”

“넌 왜 안 갔어?”

“나? 흣흣. 여기 온 지도 얼마   안 됐구, 그냥. 섞이는 게 싫네.   ”              

그렇게 말하다 보니 어느새 뒤꼍에 와 있었다. 뒤꼍에는 봉선화가 말 그대로 만발해 있었다. 절반은 꽃잎이 없는 상태였지만 꽃잎이 있는 절반으로도 충분히 많았다. 그 애는 그 사이에 놓여있는 평상으로 가 앉았다. 나도 처마 밑에 물통을 놓아두고 그 애 곁으로 가 앉았다.

“손 줘봐.”

나는 그 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톱이 참 예쁘네. 물들여 줄까?   ”

뜻밖에 제안에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 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백반과 그릇, 실과 랩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꽃잎을 따서 백반과 같이 찧었다.

“자, 손 이리 내.”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 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애는 손톱 하나하나에 정성들여 꽃잎을 얻고 랩으로 싸서 실로 묶었다.

“여기 애들 손톱은 여름만 되면 다   빨개진데. 선생님들도. 더운 날 여   기 나와 이렇게 앉아서 손톱에 물   들이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왼손 검지 손가  락을 실로 묶었다.

“내가 여름에 여길 왔잖니. 선생님   들이랑 애들이 나보고 운이 좋네 했   어.”

그 애는 그렇게 말하면서 찡긋 웃었다.

“그런데 난 솔직히 좀 그랬어. 아   무래도 이 손톱물이 빠지기 전에 여   길 떠날 것 같단 말야. 씁. 그럼   이 손톱을 보는 내내 이곳 생각이   나지 않겠니?”

저 애가 저렇게 말을 잘 했던가. 높고 불안정한 목소리 톤도 차츰 익숙해졌다. 그 애는 내 왼손의 마지막 손톱까지 막힘없이 칭칭 동여맸다.

“자, 오른손.”

나는 오른손을 그 애에게 내밀었다.

“너 노래 잘하더라. 말할 때랑 달   라.”

그 애가 나를 흘끔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 음악시간 생각나.”

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일이  번뜩 지나갔다.

“그래도 만점 받았잖아. 노래 한   곡만 불러주라.”

내가 부탁을 해놓고도 우스워졌다. 뜬금없이 노래라니. 그런데 그 애는 하던 손을 멈추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 에   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 애 노랫소리 는. 그러다 갑자기 끄윽, 트림을 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애를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푸 하하하하. 야, 너 진짜 왜   그러는 거야?”

그 애가 다시 내 손위에 봉선화 꽃잎을 올리며 곤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몰라. 노래만 하면 헛 트림이 나   . 이상해.”

그러다 한 템포 쉬고,

“있지. 이 노래 어렸을 적 내 동   생이 매일같이 부르던 노래야. 음악   시간인가 배워 와서는 노래가 좋다고   항상 불렀었는데. 흣흣. 내게 있는   유일한 추억.”

나는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추억, 아니 기억이라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하룻밤 자고 나면 어제 있었던 일들도 가물가물해. 어젠 그렇게도 기뻤던 일들이 내일이 되면 시무룩해지지. 기억이란 거 그런 게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변색되는 거.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 그렇게 될 수 없는 기억이 있다면. 기억에서부터 오는 추억. 그 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후회 할 것 같았다. 다음날 학교에서 그 애를 보아야 했으니까. 내일이 되면 함께 있었던 오늘의 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혼자 멍하게 앉아있는데 그 애가 말했다.

“다 됐다. 근데 너 저 물통 어떻   게 들고 가?”

“그러게.”

내가 어이없게 웃어버리자 그 애가 속삭이며 말했다.

“내가 들어다 줄까?”

“됐네요.”

나도 속삭이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 집까지 언제 갔다가   언제 오려구. 너 그때도 무지 수고   했겠다.”

그 애가 나를 보며 웃었다.

“조심해서 가. 손톱에 거 안 떨어   지게. 그리고 이거.”

그 애가 봉선화 하나를 꺾어 내게  주었다.

“집에 가서 엄마 해드려. 동생이나   언니 있으면 해주고.”

나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그 봉선화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난 아빠랑 단 둘이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때 받았던 꽃잎들을 일기장에 껴 놓았는데 지금은 종이에 봉선화 물이 말갛게 들어있다. 그 애는 대문 앞에 서서 날 배웅해 주었다. 난 민들레를 꽂고 물통을 들고 봉선화를 안으며 그 곳을 내려왔다. 민들레가 내게 속삭였다. 나를 즐겁게 해주렴. 그 후로도 그 애와 난 다른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지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미소 짓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빨갛게 물든 손톱을 보면 그 날 맡았던 봉선화 향이 물씬 풍겼다.

방학식날이 되었다. 교실에서 방학식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애가 복도에 서있었다. 나를 보며 쌩긋 미소 짓더니 입을 열었다.      

“나 아무래도 여름방학 중에 떠날   것 같아. 너한테 인사하려구.”

나는 그 애 눈을 끔뻑거리며 쳐다봤다.

“그게 예의 같아서. 흣흣. 잘 있   어. 잊지 않을게. 안녕.”

“그래, 잘 가.”

그 애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뒤돌아 가 버렸다. 나는 그 애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 동안 내게 그리도 담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때, 그 애가 했던 잊지 않겠다는 말, 사실은 거짓말이라는 걸.


Na
Na

추천 콘텐츠

장미축제

 축제 전야-알 수 없는 이야기  밥상 앞에서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엄마는 중얼댔다. 숟가락으로 밥을 푹푹 찌르고만 있는 나 들으라고 한 소린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닌가 보았다.  나는 밥그릇에 물을 말며 엄마를 치어다봤다. 엄마의 파마기 풀린 앞머리가 부스스하다. 엄마는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더니 멍든 한 쪽 눈을 내 쪽으로 들이민다.  “그래서 꼬우냐? 기지배. 말하는 뽄새 하고는.”  엄마가 멀뚱멀뚱 내 뻗은 손을 보았다. 나는 괜히 엄마 눈앞에다 대고 손바닥을 슬슬 흔들어 본다.  “치.”  “추워, 이년아. 문 좀 닫고 다녀.”  “엄마 나 간다.”  나는 방문턱에 걸터앉아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중얼거렸다. 운동화를 방 안에다 넣어놓아야 할까보다. 신을 때 신발이 차면 나가고 싶지 않다. 특히 요즘처럼 해가 금방 지는 계절이라면 더.   “으, 정말.”  불 꺼진 방안을 등지고 선 엄마가 어둡다.  엄마의 목소리는 조용조용 하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소리를 크게 내는 법이 없어졌다. 내 목소리만 짜증에 억눌린 채 어둠 속에서 격해져 있다.  나는 손목을 올려 시계를 보았다. 그러나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에 촉박해 지는 건 싫다. 그렇다고 시간이 약속 때 보다 남아돌아 서성이는 것도 싫다. 그래서 난 혼자가 편하다.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는 한 장소 같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억지로 껴 맞추는 인연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아르바이트에 가야 한다.  “보이기나 해? 진짜, 불 좀 켜고 찾아.”  “너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찾고.”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며 내 얼굴로 톡톡 튀었다. 알싸하고 비릿한 비 냄새가 진동한다.  “또 뭐가.”  “저만치서 걸어가 이 기지배야. 내가 언젠 화냈냐? 참 일찍도 물어본다. 둔해 빠져가지고는.”      “삐쳤냐?”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신고 있던 운동화가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정말 왜 그래.”  “싸가지 없는 년. 물어보지도 않냐?”  “무슨 병원?”  “뭐야?”  “갱년기래, 엄마. 어쩐지 통 기운이 안 나고 축축 늘어지고 생리까지 몇 달 걸러서 가봤더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내가 일하는 곳이 나온다. 엄마는 나와 같이 종점에서 내린 다음 지하철을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일자리를 갖고 처음으로 엄마와 같이 탄 버스였다. 나는 우산을 쓰고 한껏 차려입은 채 걸어가는 엄마 뒷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어디서 일하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엄마는 자신이 어디서 일하는지 내게 말해준적이 없고 나도 꼬치꼬치 캐물은 적이 없다. 뭐든 내게 말

  • Na
  • 2006-12-22
낯선 소리

     K는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 가방을 왼손으로 들어 올린다. K의 오른쪽 어깨가 살짝 기운다. K는 시린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는 자신의 발끝을 보며 앞으로 걸어간다.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납작하고 차가운 열쇠 . K는 열쇠를 손안에 쥔다. K손안에서 점점 미지근해지는 열쇠를 느끼며 K는 계속 발걸음을 내딛는다.  K는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간다. K 코앞으로 쉰내가 확 풍긴다. 누구의 쓰레기가 저렇게 봉투 밖으로 터져 나왔는지 K는 잠시 궁금해진다. K는 쓰레기봉투에서 나온 내용물을 뒤적이는 고양이를 굽어본다. 고양이는 까맣다. 까만 고양이는 자신만큼 까만 K의 그림자가 자신의 주위를 덮고 있다는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생선 가시를 연분홍빛 혀로 핥는 것을 K는 얼마간 그렇게 바라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니, K?  K는 멀뚱히 보고 있던 현관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는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는다. 금속의 착 감기는 느낌. K는 손에 힘을 주고 열쇠를 돌린다. 차락, 풀리는 구멍.  K는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언뜻 옆을 보았다. 구석에서 무엇인가가 잔뜩 웅크리고 있다. K는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다시 앞으로 내민다. K는 벽을 손으로 짚으며 가까이 다가간다.  어머, 이런 게 왜 여기 있을까, K? 앉은뱅이책상이 단단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다. K는 허리를 숙이고 그것을 들여다본다. 구석의 옅은 어둠을 가만히 받치고 있는 앉은뱅이책상을 누가 놓고 간 것일까. K가 책상 앞에 주저앉는다. 방바닥의 시큼한 기운이 K엉덩이를 확 문다.     K는 몸을 호르르 떨며 혀를 축 내밀고 있는 책상 앞으로 가서 앉는다. 무릎을 양 팔로 감싸며 K는 서랍 안에 누워있는 공책을 본다. 공책은 이 안에서 이미 많은 잠을 잔 것 같다.그래도 졸려 보이는 그것. K는 한동안 무릎 위에 턱을 대고 있다가 무릎을 안고 있던 한쪽 팔을 푼다. 그리고는 색이 바랜 공책 겉장을 펼친다. 이게 뭘까, K? 누리끼리한 종이위에 납작하게 붙어있는 그림이 K눈앞에서 흠칫한다. K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림 위로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그림이 찍힌 엽서다.    K는 책상에 앉은 채로 몸을 반쯤 돌린다. 현관문 앞에서 두툼하게 앉아 있던 가방이 K의 눈길을 담담하게 받는다. K는 앉은 채로 가방에까지 간다. 바닥의 냉한 기운에 K몸이 얼얼하다. K는 코트를 벗어서 몸 위에 덮고는 가방위에 머리를 눕힌다. 짐이 담뿍한 가방이 듬직하다. 누운 K앞에 네모난 천장이 떠있다. 천장 곳곳에 핀 곰팡이가 줄기를 뻗어 장미 넝쿨처럼 서로 얽혀있다. K는 둥글게 피어오른 곰팡이를 보면서 스르르 눈을 감는다. 점점 사그라지는 오후 햇살이 K머리맡에서 꿈틀대고, 방바닥으로 가라앉은 K의 건조한 손바닥이 경계를 푼다.     K는 머리를 벽에 기댄 채

  • Na
  • 2006-09-09
빨래터

  또독 또독.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소리는 아이들을 충분히 재울 수 있는 자장가이리라. 그 소리가 끊기고 나면 사방은 순간 고요하다. 땅 바로 위까지 어둠이 내려 묵직한 공기가 집 주위를 감싸고돌면 기다렸다는 듯 풀벌레 소리가 잔잔히 퍼지고 아이들의 순진한 숨소리가 나무 바닥으로 된 마루에까지 고르게 전해진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함께 쏟아지는 엄마냄새. 여자의 미지근한 커피 잔 에서는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는다. 여자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의심하고 싶다. 넌 그가 아니라고 어서 가면을 벗으라고 밀쳐내고 싶다. 여태껏 들어 본적 없는 사무적인 그의 말투. 헤어지자.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그의 얼굴을 보고 나면 그가 정말 그라는 것도 헤어지자는 말도 모두 진짜가 되어 버릴 테니까. 결혼할 여자가 생겼어. 너도 아는 여자야. 아는 여자? 여자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본다 . 남자의 얼굴. 만지고 싶어. 그가 짜증을 내도 소리를 쳐도 괜찮아. 여자는 입을 앙 다물고 스커트 자락을 움켜쥔다. 정민 씨. 여자는 숨이 탁 막힌다. 거짓말. 여자는 물 컵을 잡는다. 물을 마시고 싶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달에 결혼해. 청첩장 보낼게. 여자는 잡고 있던 물 컵을 든다. 착. 물 컵의 물이 그의 얼굴로 쏟아졌다. 무슨 짓 이야. 조용한 , 화가 억눌린 남자의 음성.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물을 닦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차 값은 내가 낼게. 여자는 남자의 가는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창 밖으로 남자의 차가 가는 것을 내다보고는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바보, 바보, 바보. 그래요. 나 바보에요. 모든 게 꿈만 같아. 여자는 갑자기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멍멍하다. 오늘 내가 그와 만나긴 만난 걸까? 여자는 사람과 차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 속에 우뚝 멈춰 섰다. 몸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쿵쿵  거리며 무너지는 기분. 그동안 어렵사리 꼭꼭 매워 왔던 실밥이 결국엔 투둑 하고 터진 듯 하다. 외롭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여자와는 무관하다는 새삼스런 사실. 여자는 발이 끄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옮긴다. 신호등 앞에도 서보았다가 시장 안으로 들어가 과일을 고르기도 하고 아무버스나 골라 타기도 했다. 여기가 어딘가 . 한참을 돌아다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는 이름모를 곳에 서있다. 여자는 발바닥이 따끔거리며 얼얼함을 느낀다. 많이 걸어서 일까? 뜨거운 발바닥. 엄마는 항상 발에서 열이 난다고 했다. 엄마의 몸에서 열이 나는 부분은 발바닥 뿐 이었다. 추운 겨울 밤. 여자는 엄마 곁에 누워 자신의 찬 발을 엄마 발에 비벼대곤 했는데. 온몸으로 퍼져 나갔던 따스함. 발이 뜨거워 몸이 더운 거라며 겨울에도 이불자락 아래로 발만 빼꼼히 내놓았던 엄마. 여자는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저 앞에 공중전화가 보인다 . 여자는 공중전화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Na
  • 2005-08-1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익명

    어머 ; 맙소사 ㅋㅋ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겠어용 !!

    • 2005-08-11 17:36:41
    익명
    0 /1500
    • 0 /1500
  • 초록불

    잘 읽었습니다. 민들레는 봄에 피는 꽃이라 봉선화랑 같이 피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리고 아픈 것이 라고 써야 합니다. 는 와 같은 경우에 쓰지요. 는 ㅅ불규칙이어서 과거형이 되면 로 ㅅ이 사라집니다. 낫다와 낳다는 잘 혼동하는 맞춤법이니 주의하기 바랍니다. 소설에 대한 평은 주장원 발표 때 하겠습니다.

    • 2005-08-07 21:02:11
    초록불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