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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꼭지 이론

  • 작성자 최재혁
  • 작성일 2012-10-10
  • 조회수 575

1.

어느 대학 실험실의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찢어지며 떨어졌다.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던 실험조교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실험조교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머릿속이 미끄러운 윤활제를 바른 것 마냥 복잡했다.

많은 글자가 적힌 종이를 실험조교는 잡고는 크게 읽었다.

"12월 18일 여대생 살해. 사인은 교살. 12월 30일 여공 살해. 1월 16일 29세 시청공무원 살해."

그는 여기까지 딱 읽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가 아파……."

실험조교는 다시 종이를 잡고 읽었다.

"1월 17일 교사 살해. 이 연유는 사회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나의 조치이다. 정부는 전쟁계획을 중단하라."

실험조교는 눈이 붉어졌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오른쪽 눈을 향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망할 놈의 각막……. 눈이 아프다고……."

그리고 그는 왼쪽의 시력에 의지하여 서랍에서 주머니칼을 꺼내었다.(피가 완만히 묻어 있는, 욕심에 가득 찬 모양이었다.)

실험조교는 떨리는 손으로 목 앞으로 칼을 두었다.

"나머지 내용은 경찰력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칼로 목을 비틀었다.

핏방울이 튄 것이 이 작자가 꽤나 좋아할 모양이다.

2.

컨테이너 박스 안에 작자 셋과 양심가 하나가 모였다.

미사일이 양 옆으로 날아들어 소중한 국민을 다치지 않게 할 요량이었다.

"흠……. 내일 다시 모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별이 가장 많은(우주의 강자라도 되시는 양) 작자가 제안했다.

"그렇게 하죠. 이미 오후 6시나 되었으니 퇴근합시다."

양심가가 그의 말에 동조하며 말했다.

"계획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말입니다. 하나부터 백까지, A부터 Z까지, 모두 새겨져야 하지 말입니다."

유일하게 별이 없는 작자가 더했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네 명이 일제히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지긋지긋하고 머리 아픈 박스 안이 싫었을 터였다.

흙먼지 날리는 황무지를 지나 양심가와 작자들은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 봅시다!"

양심가는 경례한 뒤 자신의 집무실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는 종이를 한 장 꺼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별이 두 개로는 모자라지. 한 개 더 추가해야 돼."

별을 더하기 위한 전쟁계획을 휘갈겨 쓰던 양심가는 밤이 되도록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시계가 늦은 밤 열한 시를 가리킬 때, 양심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은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묘한 이끌림인 듯 했다.

양심가는 소변을 보고는 세면대에 다가 섰다.

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물방울은 강철의 (Faucet) 아래 가려져 있었다.

기생의 최후의 무희처럼, 물방울은 죽지 않으려고 철체를 잡고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양심가는 매정하게 수도꼭지에 손을 얹었다.

막중한 무게의 살덩이가 수도꼭지 위에 올려지는 그 찰나, 물방울은 배수구로 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버렸다.

물방울은 더러운 하수구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양심가는 그 급박한 순간을 보고야 말았다. 탐욕스러운 비양심적인 각막이 모든 것을 확인하고 뉴런에 전달해 버린 것이다.

그는 순간 머릿속이 반짝였다.

그는 달려가 의자에 급히 앉고는 그 계획서를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잘게 찢었다. 새 종이를 꺼냈다.

순백의 종이를 새로 받아든 양심가는 급히 무언가를 휘갈겨 쓰고 두어 번 고치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섰다.

무기창고에 들어선 양심가는 권총 한 자루를 들고는 군 트럭 안에 탔다.

"........"

아무 말도 않고 붉은 눈빛만을 심야에 내보인 그는 고속도로로 내달렸다.

둥근 지붕이 인상적인 멋진 건물이었다. (그리고 방사능 냄새가 나는 건물이기도 했다.)

그는 조용히 권총을 주머니 안으로 넣고는 입구로 발을 뗐다.

"충성!"

그를 알아본 군인들이 경례를 했다.

양심가는 말없이 그들을 지나쳐 아무런 제재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 일이십니까?"

당직자가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양심가는 계속해서 침묵하며 그를 지나쳐 미사일 격납고 문에 손을 얹었다.

"장군님!"

그는 권총을 뽑고는 당직자를 쐈다. 시끄러운 총성이 사방을 울렸으나 방음이 쓸데없이 철저한 연구실 안은 평화로웠다.

양심가는 아무런 방해 없이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눌렀다.

붉은 화염을 달고 날아가는 미사일을 본 양심가는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말했다.

"....... 완료."

3.

끊임없는 악인들의 전쟁과 사고들, 온갖 음모와 투쟁으로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는 괴로워했다.

그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선한 자신이, 차가운 지하철역의 냉랭한 대리석 바닥 아래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는 가장 못마땅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는 가부좌를 틀었다. 옛 방식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기술이었다.

무색에 가까운 흐름이 목울대를 거쳐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요동시키며 가격하는 느낌을 그는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카메라를 든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ㅇㅇ에서 나왔습니다. 지하철에서 사는 기인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언제부터 계셨나요? 부인이나 자식은 있습니까?"

"무슨 사연이십니까?"

득달같이 달려드는 수많은 질문 무더기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멀리 하늘로 날아 어디론가 숨어드는 상상을 했다. 전설의 율도국과 북쪽을 생각하던 그는 손을 내저었다.

"모릅니다."

일어선 그는 빠르게 걸어 지상으로 나왔다. 뒤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쫓아왔으나 모두 느렸다.(풀을 먹지 않아서?)

작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수그려 뛰던 그는 길을 잃었다.

다행히 뒤의 카메라맨들은 없었다. 지친 그는 어디라도 가서 물을 마시고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이리저리 헤매다 그는 요행히 벤치가 있는 한적한 공원을 찾았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개수대까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기뻐 눈물을 슬쩍 흘렸다. 이내 그는 다시 눈물을 집어넣고 개수대로 달려갔다.

복잡한 심정에 겹친 사회의 악재로 마인드라인이 꼬일 대로 꼬인 그는 수도꼭지에 입을 들이대고 물을 틀었다.

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갈증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그의 미간은 찌푸려졌다. 비틀거리며 벤치에 앉은 그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서 다시 이리저리 골목과 대로를 헤맸다. 쌀쌀한 날씨에도 그의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어려운 생각들이 그의 뇌간에서 흘러나와 온갖 말초신경을 건드렸다. 우울한 그의 표정은 서서히 숨어들었다.

손발이 차갑게 변하며 그의 입술이 시퍼레졌다. 수족이 덜덜 떨리며 무색인 표정에서 웃음을 지어냈다.

눈물을 지을 대로 지으며 그는 서서히 웃기 시작했다. 선한 자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한 웃음이었다.

그는 지하철역 내부로 들어갔다. 그의 주머니에 접혀 있던 지폐와 동전을 모두 꺼내어 그는 표를 샀다.

지하의 철체를 숭배하는 종교자들이 빽빽이 모여 줄을 서고 있었다.

이윽고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주인공이, 그 거만한 자태를 드러내며 끼익 하고 멈춰 섰다.(다만 숨겨주는 작자들이 모두 악인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는, 그 악한 흑인들을 밀치고 먼저 쑥 들어가 앞문과 앞문을 열고 극한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을 놀렸다.

무례하다며 꾸짖는 사람들을 애써 무시하며 무리한 힘을 주어 마지막 문을 힘껏 당겼다.

빠르게 다시 문을 닫고는, 기관장의 목을 그는 꺾었다.

허허 웃는 그의 너털웃음이 그렇게도 선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조종간을 앞으로 쭉 밀어버렸다. 게이지가 올라가는 그 흔들림을 느끼며 선인은 웃었다.

모자라다, 라고 그는 느끼며 조종간을 그는 더 앞으로 밀었다.

세찬 흔들림과 당황해 우짖는 소리가 그의 귀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심리의 만족상태에 다다른 그는 멈춰야 할 곳을 지나쳐 선로를 갈지 않았다.(선로만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서 벗어나 벤자민을 숭배했다.)

멀리서 노란 불빛이 보였다. 그는 웃었다. 자신의 시체를 남기지 않으려는 듯 했다. 가속된 철체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무시했다.

노란 불빛 안의 기관장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선인은 폭소했다. 박장대소로 이어지는 실소는 고소도, 냉소도 아닌, 순소 그 자체였다.

이윽고 강한 충격이 그의 신체를 통해 뒤로 전달되었다. 시끄러운 폭음이 100데시벨을 훌쩍 뛰어넘어 지상으로도 전해졌다.

그의 웃는 표정은 짜부라져버렸다. 하지만 그 웃음만은 진정성이 있는 듯 했다.

4.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그 철체가 짜부라져 부서져 버렸을 때, 잠을 자고 있었다.

해는 이미 떠 있었으나 두꺼운 커튼은 그 명멸하는 광채를 막아버렸다.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그는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핸드폰을 보고 천천히 일어났다. 8시 40분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가장 먼저 그의 각막에 비친 것은 철체의 짜부라짐이었다. 그들은 북의 괴한이 저지른 짓이라고 공분했다. 그는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누군가를 불렀다. "이년아!"

하지만 누군가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쌍년이 대답이 없어……."

그는 컴퓨터를 켜서 정보를 찾았다. 지하철 테러사건에 대해 그는 궁금해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사망자의 명단이 나왔다.

스크롤을 쭉 내리며 말을 되뇌던 가장 악한 자는 무언가를 찾았다. "미친년이 이 안에 있어?"

광분한 듯 스크롤을 올리고 내리며 화면의 전환을 계속하던 그는 다시 그 무언가를 찾아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밀실에서의 폐소공포증이 그를 덮쳐와 서서히 그를 옥죈 듯 했다.

대로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나갔다. 광장의 큰 텔레비전이 누군가를 비추고 있었다. 앞에는 많은 작자들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별이 가장 많은 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치를 떨며 말했다.

"이번 지하철 테러사건은 북의 괴한이 조종실을 급습해 선로를 변경하지 않고 반대쪽 지하철과 강하게 부딪힌 사건으로, 정부와 군에서는 이를 강도 높게 비난할 것입니다.

아울러 강력한 도발으로 간주하고,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음을……."

그의 말에 동요하는 이가 많았다.

"조종실의 문이 잠겨 있지 않아 이번 참사가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것은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적절하게 발을 빼는(사실은 모두 군의 소관이라는 것을 모르는 작자는 없다.) 별이 가장 많은 자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질문들을 받았다.

그는 허허 웃으며 길을 걸었다. 다시 그는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누웠다.

그의 눈이 깊게 감겼다.

5.

노인은 은빛 장막을 걷었다. 나방들이 순간 날아올라 퍼지며 회색빛 구름을 그렸다. 대략 아침쯤 되었다고 어림한 노인은 다 썩어 문드러진 나무통 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옆에 놓인 깃털 펜에 잉크를 묻힌 노인은 글씨를 휘갈겨 썼다.

"더럽게 많네." 노인은 투덜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양피지 한 장을 가득 채운 글자는 아직도 모자라는 듯 누런 아가리를 쭉 벌리고 나무통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새로 양피지 한 장을 더 꺼내 그 안으로 몸을 뉘였다.

노인은 식은땀을 닦으며 힘겹게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나무의자가 심하게 삐걱거리며 신음했다. 나방들이 글자들을 물고 다시 은빛 장막 안으로 모였다. 노인은 은빛 장막을 다시 쳤다.

노인은 오래된 찻잔을 꺼내 홍차를 타고는 천천히 마시며 잠들었다.

---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숲을 정처 없이 헤맸다. 어두운 녹색 빛의 숲은 심하게 조용했다. 그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수풀을 헤쳤다.

미간을 찡그리며 눈앞을 살피는 그에게 오래된 나무집 한 채가 보였다. 그는 기뻐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눈을 떠보니 숲이고 저는 길을 잃었어요!"

그의 눈 밑에 눈물이 고였다.

---

"계십니까? 눈을 떠보니 숲이고 저는 길을 잃었어요!"

노인은 달콤한 잠에서 깨어났다. 놀라 일어선 그는 문을 열고 그를 들어오게 했다.

"감사합니다! 여긴 어딘가요?"

"미친놈이 왜 왔어. 아직 니 글자는 없으니까 온 김에 여기서 나랑 살아."

노인은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이랑요?"

"싫어? 괜히 글자 가져오게 하지 말고 천년만년 살다 처 죽어 그럼."

노인은 나무지팡이로 그를 세게 내리쳤다. 그가 풀썩 쓰러졌다. 노인은 다시 앉아 졸기 시작했다.

---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방에서 눈을 떴다. 이상한 꿈을 꾼 듯, 그는 머리를 세차게 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이상해……."

그는 밖으로 다시 나가며 혼잣말을 했다.

"미친년이 왜 죽었어. 도망가려고."

---

그녀의 곁에 온갖 가재도구가 나뒹굴었다. 그가 물건들을 던지며 욕을 했다.

불쌍한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짐을 쌌다.

"이혼이야. 같이 더는 못 살아."

술취한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그녀는 집을 나갔다. 네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술취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다시 오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들었다. 깊은 잠.

---

불쌍한 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저주하며 길을 걸었다.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간 그는 눈이 붉어져 빙초산을 구입했다.

"수고하십시오."

그는 가장 붐비는 최신 대로를 찾아 바삐 뛰었다.

"에이. 왜 이렇게 눈이 아파."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웃으며 가장 크다는 대로에 우뚝 섰다.

"여러분!"

악한 자가 불쌍한 여인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떠난 것이 너무나 슬퍼 죽으려 합니다!"

그는 공갈을 뻑뻑 치며(얼굴만은 진심인 듯이) 빙초산을 들어 보였다.

"원샷! 내가! 아내를 위해!"

악한 자는 그 말을 끝으로 빙초산을 한 입에 꿀꺽 삼켰다.

비명소리가 들리고 그는 쓰러졌다.

---

노인은 글자 한 개를 보고는 욕지거리를 했다.

"가자마자 죽냐? 멍청한……."

6.

핵미사일이 터졌다. 철체가 짜부라진지 열다섯 시간 만이었다.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오르며 웃었다.

폭발이 가시고 백색이 된 인간들이 새빨간 피눈물을 흘리며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더럽고 추악한 남 놈들!"

장군이 탁상을 주먹으로 치며 격분했다.

"핵에는 탱크로! 미사일에는 총알으로!"

그 밑의 소령과 대령이 구령을 맞춰 노래 불렀다. 장군은 그들을 만족스럽게 본 후 크게 외쳤다.

"모든 병력을 동원해 남을 칠 것이다!"

많은 병력이 다리를 타고 남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곳곳의 다른 작은 장군들이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다.

공개적 선전포고를 한 지 하루 반 만에 다리를 모두 내려온 병사들은 남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핵벙커 안에 별이 가장 많은 자와 나라의 수장이 대화했다.

"북이 지금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핵미사일을 더 쏘아 그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본토에 두 방을 쏘고 오만 명을 격전지로 모이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라의 수장은 겁먹어 모든 일을 별이 가장 많은 자에게 미뤘다.

"충분합니다. 이번 기회에 분단국이라는 오명을 한 번 벗어 봅시다. 하하."

무너지지 않는 벙커 안에서 안전하게 회담을 끝낸 별이 가장 많은 자는 안전한 기지 안에 들어가 명령만을 내렸다.

"핵미사일 두 기와 오만 명의 병력, 삼천 대의 탱크를 준비하고 각개격파 시키시오!"

장군은 의기양양했다. 수많은 정적들을 밟고 올라온 특별한 자리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사뭇 아름다웠다.

그가 승리해 돌아온다면 그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이다.

성전이라고 분류된 이번 전쟁에 대해 그는 막대한 예산을 들이부었다.

수도를 점령했다는 기쁜 소식에 편하게 앉아 와인을 따라 부으려던 순간, 넓은 유리창으로 미사일이 그의 각막 안에 퍼졌다.

"뭐야……. 뭐야 저게!"

정확히 그가 있던 높은 아방궁으로 버섯구름이 웃었다. 다시 희어진 인간들이 생겨났다.

K신문의 언론장은 수를 썼다. 선전포고 오 분 전에.

7.

물웅덩이가 마른하늘 아래에 제법 고여 있었다. 그는 보랏빛 표정으로 길을 걸었다. 역간 앞에 다다라서 그는 K신문을 뽑아들었다.(금빛 가판대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나무 활주로 아래 새까만 활자들이 그 거만한 자태를 드러내며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첫 장을 펼쳐들고 정독했다.

좋지 않은 말들 사이로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가 적혀 있었다.

흠칫해 주변을 돌아보자, K신문을 든(비싼 콩기름 잉크가 눈에 띄는!) 작자들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정신에 부합하는 철체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 누구도 철체를 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에 있던 도망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도 남은 시간에 그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급히 철체 안으로 몸을 피했다. 문이 닫히고 철체가 출발하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철체 안에 남은 인간은 벌벌 떠는 기관장과 그 뿐이었다. 그는 두려워 신문을 접어 의자 밑에 넣고는 구부정하게 섰다.

망망대해에서 온 큰 쓰나미가 그의 온 심리를 휘젓는 듯 했다.

그는 세 번째로 선 역간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갔다.

아직 K신문을 보지 못한 작자들은 걸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부패로 얼룩진 긴 언덕을 걸었다.

곳곳의 악인들이 그를 노려봤다. 그는 묵묵히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가 알맞은 책을 꺼냈다.

그는 날카로운 긴장감과 살기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망부석처럼 세 시간을 앉아 있었다.

선생이 무의미한 수업을 계속 할 때, 누군가가 재빨리 뛰어 들어왔다.

"티비 켜고 소리 높여!"

화면에는 침통한 표정의 별이 가장 많은 자가 무언가를 발표하는 것이 비춰져 있었다.

"북이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예비군은 모여주십시오."

텔레비전은 강제로 꺼졌다.

[별이 가장 많은 자가 발표를 마치고 돌아설 때, 별이 없는 작자가 그에게 귀띔했다. "K신문이 미리 선전포고를 알렸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별이 가장 많은 자가 말했다. "전부 다 구속시켜. 전시상황이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모든 이가 웅성거렸다.

몇몇의 악인들이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가왔다. 눈이 붉어진 그들은 그에게 닿았다.

이곳저곳을 살핀 그는 악인들에게서 빠져나와 달렸다.

문이 곳곳에서 열리고 악인들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방향을 틀어 계단으로 달렸다.

그의 보라색으로 시작된 스펙트럼이 붉은색으로 변하며 분자 자체가 교체되었다.

뒤에서 악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서슬 퍼런 칼날이 다가와 그의 목을 끊을 듯 했다.

악인들의 각막의 스펙트럼이 서서히 붉은색에서 기분 나쁜 백색으로 변해 원소의 붕괴를 나타내고 있었다.(그와 사뭇 달랐다.)

그는 옥상의 문을 걷어차 열었다. 악인들이 그를 에워쌌다.

뒷걸음친 그의 등에 철망이 가볍게 흔들리며 금속음을 냈다. 죽어가는 자들은 그를 밀쳐내고 철망을 벗겨냈다.

그를 집어든 악인들은 눈이 너무나 붉어져 있었다. 그는 이카루스가 되었다.

녹은 밀랍의 살결엔 들끓는 구더기와 말벌뿐이었다. 붉은 성수를 철철 흘린 그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특수부대한테 국방장관이랑 대통령이 죽었대!"

8.

빗물이 알맞게 고였다. 미끄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신발에 부직포를 붙였다.

전쟁이 일어난 지 삼 일 만에 북쪽은 핵미사일 두 개를 얻어맞고 초토화되었다. 비록 국방장관과 대통령이 죽었지만 그 자리에 올라갈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고 생각한다.

길바닥에 짐들이 나려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간단한 식료품을 사는 이도, 가족과 만날 이도(또는 사람 고기를 살 이들도) 모두 마지막 철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매우 아팠다. 손거울을 꺼내 보니 왠지 모르게 눈이 붉어져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철제가 흔들거리며 흘러들어 멈춰 섰다. 모두(나와 사람 고기를 살 놈들까지) 철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눈이 붉다 못해 핏방울이 새어나올 것 같은 군인 무리와 방독면과 갑옷을 착용한 무리가 내렸다.

우리들은 잠시 멈춰섰다. 갑자기 그들이 가스통에 호스를 연결하고 문을 가로막고 섰다. 군인들이 먼저 내려 뒤로 갔다.

방독면에 비친 눈알은 역시 붉었다. 가스를 발포한 그들이 웃었다. 맨 앞의 여자가 쓰러져 거품물었다.

뒤에 있던 자들이 도망을 시도했으나 군인들은 놓치지 않고 총을 쐈다.(마치 의도한 듯 했다.)

가스가 퍼짐에 따라 모두가 쓰러졌다. 바닥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

숲에서 긴 시간 동안 헤맸다. 같은 나무와 공기, 땅 뿐이었다. 집이 멀리 보였다. 문을 두드렸다.

노인이 나와 말했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이 왜 왔어? 말세야, 말세. 쯧쯧……."

노인은 나무의자에 앉아 낡은 양피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의 이름과 '중독사'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노인은 지팡이로 내 따귀를 후려쳤다.

---

눈을 뜨자, 주변에 우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방독면을 쓴 자들이 앞에서부터 배를 갈라 우리의 신장을 빼내가고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에 나는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노인은 현명했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노인이 호통치는 듯 했다.

---

"거봐, 인생만상 개새끼인 걸……. 나처럼 숲에서 집이나 짓지……. 쯧쯧……."

e.

그녀는 수도에 있다. 북의 병사 하나를 엉겁결에 찔러 죽이고 그녀는 떨고 있다. 그녀는 핵과학자다.

그녀는 죽음의 지하철 곁에서 방독면을 쓴 자를 관찰했다. 맡아서는 안 될 방사능의 향기가 퍼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녀는 돌아간다. 모든 연락처에 새로운 방사능오염의 여파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녀는 잡혀간다. 새로운 국방장관이 그녀를 능멸한다.

머리채가 잡히고 온갖 수모를 당한 그녀는 결국 목숨을 끊는다.

새로운 국방장관은 북의 군사에게 돈을 주고 웃는다.

결국 모든 국민이 수도꼭지 이론에 의해 죽는다.

결국 새로운 국방장관과 새로운 나라의 수장도 죽는다.

북과 남은 모두 불모지가 되어 쓸 수 없게 된다.

노인은 아직도 글자를 쓰고 있다.

물방울은 아직도 똑똑 흐르고 있다.

최재혁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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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극劇

[어떤 극劇]         나는 모른다   A(여자) : 그 사람들이 구덩이에 들어가 파묻힌 이후에,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상징이 생겨났어. 십자가 모양의 펜던트인데, 알다시피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하기 때문에 겹친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십자가의 아래쪽에 있는 길쭉한 부분을 세 갈래로 나눴어. 신성히 추모한다는 뜻이야. 다른 종교적인 상징물에서 파생시킬 수도 있었지만 이 나라의 국교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그걸로 정했다는 모양이네.   여자는 자신의 목에 걸린 펜던트에 대해 설명했다. 한 참사에 대한 추모였다. 그 여자는 자신과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꾸준히 연회장 대신 추모식에 참여했다. 흰 꽃을 바쳤다.   Z(남자) : 왜? 난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 펜던트, 반지. 장신구는 결국 쓸데없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때가 지나면 부끄러워하면서 내다 버릴 걸?   남자는 반박했다. 남자의 목과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는 결혼했으나 결혼반지를 맞추지 않았고 남자의 부인만 홀로 기념 반지를 맞춰 끼고 다녔다.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애당초 그는 참사에 관심이 없었고,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남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남자의 주변에 있는 친구들, 그의 부모, 친척들이 질질 끄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남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추모는 장례식처럼 사흘만, 하자는 것이 남자의 애초 생각이었다.   A(여자) : 전혀 그렇지 않아. 슬픔을 이끌어내자는 것은 꽤 중요해. 내재된 억압, 공포를 상징물로써 치환하는 것은 분노의 표출에 있어서 가장 평화로운 일이야. Z(남자) : 그런 걸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좀 때려야 해. 그리고 그걸 뺏어서 고물상에 팔아버리고. A(여자) : 왜 그렇게 생각하니? Z(남자) : 아, 몰라. A(여자) : 지적을 회피하는 태도는 잘못되었어, 미안하지만. Z(남자) : 응~ 알았어. 난 모르니까.   A(여자)는 모든 것을 모른다고 말하며 가 버린 남자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질을 싫어하는 모양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과학자였다. 철학적 본질과 과학적 본질은 서로 다를까? 여자는 질문을 던지고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관객은 술렁였으며 그것에 대해 토론하기 바빠 보였다. 다른 누군가가 무대에서 나타났다.   C(사람) : 이 이야기는 현실에 본질을 두었습니다. 가상으로 치닫았지만 현실에서 본질을 찾아야만 할 거예요. 가상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상징물로 추모한다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것과, 토론을 회피하는 과학자에 대해 할 말들이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이제 막을 내려야 하네요. 커튼이 내려왔고, 커튼콜이 열렸다.   그 남자, Z의 일생에 대한 편編   그는 남성으로써, 남성성에 대한 모든 의무를 가지고 태어났다. 씩씩함, 늠름함, 사나움, 정열적인 정신을 가지고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어머니는 숭배할 만한 모성애로

  • 최재혁
  • 2015-09-13
폭식의 하루

폭식의 하루   그는 가끔 새벽에 일어나곤 한다. 극히 드물지만, 그럴 때 그는 생각한다. 지금 아침밥을 먹어야 할까. 그의 통장 잔고에는 1만 4800원이 있다. 내일 월급이 들어오고, 돈이 정 부족하다면 비상금 20만원을 뽑아 써도 된다. 그는 편의점으로 향한다.   편의점의 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활짝 열려 있다. 아르바이트생은 포스기 앞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그는 삼각김밥 2개와 작은 오렌지 주스 1개, 편의점 돈육불고기 도시락 1개와 일본식 볶음우동 팩 1개를 산다. ‘7900’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뜨고, 그는 파란색 지폐 8장을 낸다. 100원을 거슬러 받는 사이 편의점 밖 사거리의 신호등이 바뀐다. 자동차 몇 대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정적이 흐르는 사이 그는 신호등이 녹색불로 바뀌는 것을 본다. 비닐봉지에 음식들을 담고 그는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간다. 새벽바람이 귀 뒤를 스친다. 그는 음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물을 끓이고, 전자레인지의 입구를 연다. 도시락을 전자레인지 안으로 넣고, 머리카락을 오른쪽으로 매만진다. 물이 다 끓고 그는 볶음우동 봉지에 물을 넣는다. 1분 30초가 흐르고, 그는 각자 데워진 볶음우동과 도시락을 식탁에 둔다. 오렌지 주스의 뚜껑을 열고 삼각김밥의 포장을 뜯는다. 그는 웃으며 입에 도시락의 밥을 한 숟갈 넣는다. 흰 쌀밥은 침과 섞여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그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다. 간장과 설탕을 위시한 조미료들이 어우러진, 자극적인 맛이 혀를 가득 채운다. 그는 삼각김밥 하나를 손에 쥐고 베어 문다. 삼각김밥은 두 개 모두 참치마요이다. 기름진 맛이 올라온다. 그는 한 입에 삼각김밥 한 개를 모두 집어넣는다. 빠른 속도로 씹고 나서 그는 볶음우동으로 젓가락을 향하게 한다. 데리야끼 맛이 났다. 굵은 면발이 혀를 감쌀 때, 그는 어금니를 한 번 쓴다. 면발이 끊어져 천천히 입 속으로 스며든다. 오렌지 주스는 자신의 절반을 그에게 내어 준다. 그는 도시락 구석에 있던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는다. 잘 구워진 계란말이는 달걀 특유의 비린내도 나지 않는다. 흰밥에 볶음김치를 올려 입에 넣는다. 매콤함과, 약간의 단맛이 쌀밥의 무無에 달라붙는다. 그는 만족한 듯 남은 음식들을 위장에 털어 넣듯 먹어치운다. 빈 일회용 용기와 나무젓가락, 비닐 포장은 그냥, 식탁 위에 잠들어 있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랬으므로 그는 그것을 한 자연처럼 받아들였다.   해가 완연히 솟아오르고, 지면이 데워진 뒤 정오 무렵이 되면 그는 다시 음식의 향연에 사로잡힌다. 남은 돈은 6900원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중국집에 전화를 건다. 반쯤 불친절한 목소리가 그의 고막을 겉돈다. 그는 말한다. 자장면 하나에, 단무지 조금만 더 주세요. 전화는 끊어진다. 그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잠시 본다. 코미디 프로가 그에게 헛웃음의 신을 보낸다. 조소를 띈 그의 얼굴은 가차 없다. 초인종이 울릴 때까지 그의 조소는 끊이지 않는다. 헛웃음은 그냥 공

  • 최재혁
  • 2015-09-06
날개 없는 천사

나는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천천히 땅 속으로 스며들고, 당신을 등 뒤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모래사장을 거닙니다. 나는 당신에게 내 나랠 떼어다가 줍니다. 나는 당신의 우울, 광기입니다. 믿기지 않는 것을 기꺼이 눈앞에 보여줍니다. 신뢰의 방벽을 당신의 그 깊은 마음속에 쌓습니다. 당신은 먼지가 물컵 속으로 침전하듯이, 심연 속으로 가라앉으려 합니다. 물방울이 켜켜이 눈가의 눈그늘에 달라붙습니다. 나는 당신을 앞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립니다. 티끌이 눈가에 묻어서는 아닙니다. 그냥, 슬픈 일이 그 여린 심장에 부닥친 것이겠죠, 아마도. 당신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나는 나만의 푸른 손수건으로 붉은 피를 스치듯 닦습니다. 나는 당신을 슬프게 껴안아 줄 거예요. 종이와 깃펜 곁에는 양피지로 얼기설기 엮여 있는 시편詩篇이 있습니다. 진짜 시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바람에 날아가고, 그곳에는 검은 잉크 먹물만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글자를 읽으며 당신은 다시 깃펜을 듭니다. 시를 엮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쉬운. 쉬우면서도 어려운. 복잡하고 단순한. 그런 것입니다. 나는 한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릿결을 쓰다듬습니다. 당신은 홀로 콧노래를 부르며 썩어 가는 나무판자 벽과 함께 생을 같이 합니다. 시편은 당신의 손으로 다시 정렬됩니다. 당신은, 그 업적을 애써 무시합니다. 검은 잉크로 쓰여진 시들은 결국 당신의 횃불로 활활 타오릅니다. 모든 인간들의 욕심과 생명이 담겨 있는 시는 그렇게, 당신에 의해 무너집니다. 당신을 껴안고 싶습니다. 나는 나래를 당신에게 주고, 눈물을 주고, 뛰고 있던 핏줄을 월계수 화환처럼 머리에 둘러 줍니다. 나는 천천히 땅 속으로 스며들고. 그 후 당신을 등 뒤에서부터 껴안아 줄 거예요.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믿기지 않는 사랑을 기꺼이 눈앞에 보여줍니다. 당신은 사랑에 대해 씁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씁니다. 당신은 시편을 앞에 두고 깃펜을 잉크에 적십니다. 나는 땅 아래로,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당신 대신에. 당신은 다시 한 줄을 씁니다.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 최재혁
  • 201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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