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목소리
- 작성일 2007-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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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목소리
송경아
1. 사라져가는 것들
엄마는 왜 인터넷뱅킹을 이용하지 않는 걸까.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세 시간째 나는 이런 의문을 곱씹고 있었다. 곱씹는다는 말만으로는 모자라다. 의문은 분하고 억울하고 막막한 마음과 불안과 공포와 섞인 채 뱃속에서부터 가슴으로, 목으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그 순간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기라도 했다면 나는 부풀대로 부풀어 지쳐 버린 풍선처럼 그 자리에서 뻥, 하고 터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 주지 않았고, 아무도 내게 다정한 위로의 말 한 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덩어리는 부풀다 말고 제풀에 못 이겨 퍽석 주저앉으며 눈으로 비어져 나와 주르르 흘렀다. 결국 나는 고속 터미널 앞 벤치에 앉아 목구멍으로 끅끅 소리를 내며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렸다. 내가 생각해도 추한 모습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애당초 엄마는 왜 인터넷뱅킹을 이용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다못해 텔레뱅킹도 있고, 은행에 가서 직접 돈을 부치는 방법도 있는데.
대답은 전부 알고 있었다. 엄마는 기계치였고, 기계를 연상하게 하는 모든 것을 낯설어하고 무서워했다. 컴퓨터 앞에는 앉지도 못하고, 음성자동응답이 들리면 무서워서 전화를 툭 끊어 버리는 우리 엄마. 그렇게 소심하고 기계를 못 믿으니 은행에서 돈을 부친다는 간단한 일도 하지 않으려 든다. 게다가 옛날 옛적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신환을 찾으려다가 무슨 착오로 한참동안 돈을 찾지 못하는 낭패를 겪은 이후로, 중요한 돈일수록 꼭 직접 건네주고 챙겨주려고 한다, 고 엄마는 무슨 자랑스러운 일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안다고 해서 잃어 버린 육백만 원이 돌아오나? 등록금 오백이십만 원 플러스 한 달치 방값 삼십만 원 플러스 다음 아르바이트를 찾을 때까지 버틸 한 달 용돈 오십만 원.
어디서 어떻게 잃어 버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헤집어 보았다. 가방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있었던가? 버스 안에서 잠깐 졸기는 했지만 그때도 가방은 꼭 껴안고 자지 않았던가. 아니, 처음으로 돌아가서 되짚어 보자. 열흘 동안 고향에서 답답한 시간을 보낸 다음 집에서 나올 때 엄마는 “잘 가지가라. 큰 돈이니께.”라고 말하며 백만 원짜리 수표 여섯 장이 든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그 봉투를 손으로 건네받으려고 했다. 그때 엄마는 “아냐, 니 가방 좀 열어.”하더니 내 가방에 들어 있던 것 중 제일 두꺼운 책―집에 있을 때 읽으려고 가져온 수잔나 클라크의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상권이었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나는 이 책의 안개 낀 듯한 고딕 분위기가 좋았다. 그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숨 막히는 지방 소도시가 아닌 요정의 나라에 와 있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한가운데에 꾹꾹 눌러 넣었다. 나는 그때 이미 인터넷뱅킹을 죽어도 이용하지 않겠다는 엄마의 고집에 한참 질려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제 돈은 소중하면서 책 소중한 줄은 모른다는 엄마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비위를 상하게 했다. 나는 보란 듯이 책에서 봉투를 꺼내 와락 반으로 접어 가방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 순간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뭐여? 책 안에 넣어. 그깟 가방, 칼 한번 그으믄 기양 찢겨 나가겄네.”
엄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등을 돌리며 “그럼 올라갈게요.” 하고 말했다. 엄마는 내 등에 대고 “저 버르장머리 좀 봐라. 기집애가 고집스러운 거 하며. 서울이 어떤 곳인데.” 하고 못을 박았다. 2007년 대한민국에 함께 살면서도 엄마와 나는 완전히 다른 지리학을 익히고 있었다. 엄마의 서울은 지하철과 버스마다 소매치기들이 칼을 들고 날뛰고, 모두가 남을 등쳐먹지 못해 안달하고, (나처럼) 고집 세고 버릇없는 여자애들이 학업에 열중해야 할 잘나고 소중한 아들내미를 꼬셔대는 곳이었다.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낯선 고장에 간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고, 어쩌다 차로 한나절만 나갔다 와도 집에 돌아올 때면 과장된 한숨을 쉬어대며 ‘집이 최고여. 밖에 나가봤자 돈이나 쓰고 덤터기나 쓰지. 몽죄 사기꾼들이여.’ 하고 말하는 것이 우리 엄마였다. 반면 나의 고향은 나의 이방(異邦)이었다. 나와 동생은 나보다 두 살 많은 오빠 때문에 항상 무시당했고, 첫사랑의 아련한 동경을 품고 바라보았던 남자 아이는 알고 보니 무신경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중학교 때 이미 여자 맛을 보았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다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악의 없이도 거칠고 우악스럽게 말하는 곳이었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 나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꿈꾸었다. 고향과 절연하든가, 아니면 고향마저도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몸과 마음에 쌓아 돌아오고 싶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것은 그런 여유 혹은 절연을 준비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다시 흐느낌이 목에서 흘러나왔다. 다 끝났다. 가방이 찢겨 있지도 않고 한눈을 판 적도 없었건만, 엄마의 서울이 내게 한 방 먹였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한 방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은 원자폭탄이 터진 것처럼 하얀 빛과 검은 버섯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몇 시간이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긴 여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습기 찬 어둠이 내리덮이기 시작했지만 나는 벤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기도 싫었고 움직일 힘도 없었다. 땀과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도 밤이 되자 드러나지 않았다. 낮에는 힐끔힐끔 쳐다보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냥 지나쳐 가기만 했다. 그냥 그대로 앉아 돌이 되거나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때 손이 내밀어졌다.
하얀 손이었고, 펄이 들어간 연보랏빛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었다. 가는 손가락이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을 맵시 있게 쥐고 있었다.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서 맵시를 낸 손톱과 희고 가는 손가락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애였다. 하지만, 예뻤다. 눈물로 어리어리한 눈에도 가늘고 긴 몸매와 윤기 나는 머리칼과 조각도로 새겨 놓은 듯 단정한 이목구비가 구슬같이 빛났다. 여자애는 생김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아까부터 울고 계셨죠? 일단 좀 닦으세요. 예쁜 얼굴인데 다 더러워졌네요.”
보통 때 같으면 낯모르는 사람이 내미는 손수건 같은 것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나처럼 평범한 여자애한테 예쁘다고 말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엄마만큼 매사 경계심에 가득 차 있지는 않았지만 나도 낯선 사람의 접근에는 소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경계심을 발동시킬 기운도 정신도 없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그 여자애에게 친구처럼 말을 놓고 지금 내가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몽땅 털어놓고 있었다.
“저런, 어떡해! 그럼 등록금이랑 뭐랑 다 잃어 버린 거야? 아니, 도둑맞은 거겠네. 돈은 몽땅 현금?”
“아니야, 수표야. 백만 원짜리 수표.”
여자애는 활짝 웃었다.
“뭐야, 그럼 걱정할 거 없잖아. 은행에 분실 신고를 하면 돼. 그러면 누가 훔쳐갔든 주웠든 쓰지는 못할 거 아냐.”
“하지만 수표 번호를 모르는걸.”
“너희 어머니는 아시지 않을까. 전화 걸어서 물어봐. 아니면 너희 어머니 통장 계좌 번호만 알아도 어떻게 될 텐데.”
순간 가슴이 막막해지며 겁이 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끈질기게 캐물을 것이다.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면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놓을 테니’ 당장 휴학하고 월세 보증금을 빼서 내려오라고 소리치겠지. 우리 집에는 한 학기에 육백만 원씩 두 번 마련할 여력도 없고, 휴학생을 돈 내 가며 서울에 머물게 할 여유도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여자애는 깜짝 놀라며 내 얼굴에 손수건을 갖다 댔다.
“미안, 내가 뭐 말 잘못했나 보지? 울지 마.”
“아냐……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엄마한텐……말 못 해…….”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말 중간 중간 울음이 섞여 나왔다. 여자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른들 때문에 그러는구나? 알았어. 넌 집에 전화 걸어서 운만 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아참, 그러고 보니 너 이름도 안 물어 봤다. 이름이 뭐야?”
“수나, 이수나.”
“수나, 이름 이쁘다. 난 한미연이야. 자, 이제 집에 전화 걸어 봐. 미연이 언니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테니.”
머리가 멍했지만 미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머리가 멍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미연이 나서서 알아서 해 준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엄마는 쉴 새도 없이 퍼부어 댔다.
“왜 전화도 없어? 도착할 시간이 지나도 훨씬 지났구마는 왜 지금 전화하는 거여? 큰돈 들고 간 기집애가 전화도 안 하니 누구한테 잡혀 갔나 돈을 뺏겼나, 집에서 온갖 잡생각만 다 하고 있었잖여?”
나는 우물우물 되도 않는 변명을 하고 재빨리 미연이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미연이는 전화기 너머의 엄마에게 놀랄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수나 학교 친구 미연인데요. 달리 전화 드린 게 아니라, 오늘 학교에서 등록금 입금할 때 전산 사고가 터졌어요. 그래서 수표로 입금하는 학생들에게는 수표 계좌번호를 같이 제출하라네요. 네, 어머니 통장 계좌 번호요. 그래서 오늘 입금을 못했다고 수나가 걱정하고 있어서요. 네, 네. 아이, 물론 귀찮죠. 저도 수표로 내야 하는 걸요. 하지만 학교에서 그러라는데 어떡해요. 네, 수나 다시 바꿔드릴게요. 네, 어머니도 건강하세요.”
나는 꿈속의 광경을 지켜보는 듯이 내 전화기를 들고 있는 미연이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전화기를 다시 받아들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확실히 한풀 누그러져 있었다.
“니 친구냐? 애가 싹싹허네. 니가 엄마한테 좀 그래 보면 얼마나 좋아. 이거는 기집애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우물거리기만 하고. 자, 번호 부른다이. 받아 적어라.”
계좌 번호를 받아 적고 은행에 분실 신고를 하고, 이 모든 일이 꿈속이나 구름 속처럼 흐릿하게 진행되었다. 미연이 모든 것을 척척 처리하는 동안 나는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미연이 전화기를 도로 건네주며 말했다.
“됐어. 이제 분실 신고는 됐으니까 누가 마음대로 쓰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이 돈을 지금 당장 찾지는 못하고 누가 신고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데, 어쩌니? 등록금을 당장 내지는 못하겠는 걸?”
“휴학해야지 뭐.”
나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하게? 당장 아르바이트 자리는 있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집세와 생활비를 충당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통장에는 달랑 사만 원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는 어떻게 해도 일 주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잡고, 방값은 한 달 연체하고, 최대한 아껴 가며 살면 두 달쯤 후에는 방값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월 칠팔십만 원은 받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여야 했다. 나 같은 삼류 대학 재학생이 과외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편의점에서 시간 당 삼천오백 원을 받으며 열두 시간씩 한 학기 꼬박 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리도 쉬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앞길은 암담했다. 뒷골이 지끈 당기는 느낌에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문득 눈이 부셨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미연이 흰 꽃처럼 손을 벌려 뻗으며 활짝 웃고 있었다.
“걱정 많이 되겠지만, 잠깐 다 잊어 버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집에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나도 자취생이거든. 어때?”
어느 전생에 쌓은 인연일까. 인연치고는 참으로 이상한 인연.
수표를 잃어 버리고 한 달 후, 나는 미연과 함께 책상에 앉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전화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난 수표 신고는 아직 어디에서도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미연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게다가 미연은 비싼 방세를 내면서 월세 보증금을 묶어 놓을 필요 있느냐고, 조금이라도 이자를 받도록 보증금은 CMA에 맡겨 놓고 내 방세는 안 내도 좋으니 둘이 함께 살자고 적극 주장했다. 나는 CMA라는 말부터도 미연이에게 처음 들었지만,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은행보다 이자 예금이 높다고 했다. 어차피 휴학은 해야 하고 당장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나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이렇게 벌어진 일만 놓고 보면 미연은 하늘에서 떨어진 은인이고 귀인이었다. 그러나 얄궂었다. 모든 것이 얄궂었다.
우선 미연이 소개시켜 준 아르바이트 자리부터가 그랬다. 지방 소도시의 중산층 딸로 자라난 나는 아르바이트라 하면 편의점, 백화점, 과외, 카페 서빙, 옷가게 알바 같은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더랬다. 그러나 미연이 나를 끌고 들어온 세계는 내가 몸담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이상한 세계였다.
“괜찮아. 이 업체 사장님이 내 이거거든. 내 말이면 웬만한 거 다 들어줘. 더구나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사람 하나 더 쓰는 일인데 뭐.”
처음, 한 달에 이백만 원을 준다는 말에 깜짝 놀란 내게 미연이 눈을 찡긋하며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미연의 손에 이끌려 만난 사장님 겸 미연의 남자친구는 한숨이 나올 만한 미남이었다. 나이는 스물 일고여덟 정도일까? 대충 보기에도 키는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고, 짙은 눈썹과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호남형이었다. 내가 신세지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쭈뼛쭈뼛 건네자 사장은 활짝 웃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죄송하기는. 미연이가 친구라고 데려오는 거 네가 처음이야. 까탈스러운 우리 공주님이 드물게 마음에 드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정도야 못 해 주려고. 걱정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아무리 공주님 친구분이라지만 농땡이 치면 월급은 안 줄 테니까.”
그러고 나서 내가 하게 된 일은 한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거는 남자들에게 코맹맹이 소리로 이야기를 해 주고, 야한 농담을 거는 남자들에게는 웃겨 죽겠다는 듯이 맞장구를 쳐 주고, 만나자는 남자들과 전화할 때는 끝까지 꼬리를 빼며 시간을 질질 끌다가 약속을 하고 미연에게 약속 장소와 시간을 넘겼다. 미연과 내가 한 조였다. 내가 채팅에서 쓰는 아이디는 ‘여우미녀’와 ‘이쁜앨리스’, 그 외에도 서너 개가 더 있었다. 전화에서 나이를 말할 때는 열여덟에서 스물 둘 사이로 이야기했다. 첫날 첫 전화를 받을 때는 말문도 못 떼고 얼굴이 붉어지는 바람에 미연이 직접 나를 사무실 옆방으로 데려가 특훈을 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네가 야한 말을 하면서 남자들을 흥분시켜 줄 필요는 하나도 없어. 야한 말은 남자들이 다 할 거야. 자기들 머릿속에 시나리오가 다 들어 있거든. 너는 열심히 들어주고, 야한 농담이나 당황스러운 말을 들으면 웃으면서 ‘오빠 멋져,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해?’ 하고 말하고, 하여간 그때그때 남자들이 잘났다고 느끼게 해 주면 돼. 전화 너머의 남자들이 네가 이쁜지 안 이쁜지 어떻게 알겠니. 남자들은 네 얼굴이 아니라 여자들이 사근거리는 기분을 느끼려고 전화를 하는 거야. 아니면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거든지. 가끔 부끄러운 척해 주는 것도 좋지만 너무 자주 그러면 안 돼. 그래도 정 부끄러우면 네가 지금 전화로 연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잠깐 다른 인물이 된 것뿐이라고.”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적응 속도는 눈부시게 빨랐다. 첫날은 부끄럽고 서툴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날은 내가 지금 연극을 잘 하고 있다는 흥분과 재미를 느꼈고, 넷째 날부터는 익숙해졌다.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사무실에 나갈 필요 없이 미연의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다.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현장 뛰기’라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 미연의 몫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고, 채팅을 하고, 약속을 잡고, 약속이 겹치지 않도록 미연의 스케줄을 짰다. 공들여 화장을 한 다음 명품 핸드백에 화장품과 지갑을 집어 넣고 옷과 구두를 골라 입고 나가는 미연을 보면 나까지 마음이 살짝 설레었다.
한편 나는 우리 사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장은 분명 미연의 애인이었다.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미연의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고,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자고 갔다. 미연의 자취방은 투룸이었다. 나는 한쪽 방에서 불을 끈 채 킥킥거리는 소리와 숨죽여 지르는 교성을, 한참 후에 쏟아져 내리는 샤워 물소리를 듣곤 했다. 사장은 내가 있는 곳에서도 예뻐 죽겠다는 눈길로 미연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어깨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도 사장은 미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남자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을 심상하게 들었고, 곱게 차려 입혀 현장에 내보냈다. 도대체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연애 한 번 안 해 본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미연은 카나리아 두 마리를 키웠다. 처음에는 의외였다. 미연이 살아 있는 것을 키우는 일을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그녀가 길거리에서 주워 와 키우는 셈이니, 키우고 보살피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18평짜리 투룸 공간이 새를 키우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았다. ‘새장 속의 새’라는 말도 있지만, 좁은 베란다에 커다란 새장이 공간을 차지하니 새들은 이중으로 갑갑하게 갇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새들은 미연이 베란다에 나갈 때마다 빠짐없이 날갯짓을 하며 울었고, 미연은 열심히 새에게 밥과 물을 주고 가끔 새장 청소를 해 주었다. 그것은 미연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술에 취한 채 한밤중에 들어와 침대 위에 쓰러지고, 아침 햇빛에 얼굴을 찡그리며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눈을 뜨는 쪽이 그녀에게는 어울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좋았다.
한번은 미연이 들어오기 전에 잤다가 밤중에 고함치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깬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장과 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술에 취해 귀퉁이가 일그러진 미연의 목소리만 울렸다.
“그래, 돈 보내잖아. 다달이 몇 백씩 보내잖아. 아빠 친구가 지금 거리에 나앉으면 나앉는 거지 나더러 어쩌라고? 그것 때문에 나한테 전화했어? 아빠는 내가 아빠 입맛대로 살면 좋겠지? 돈 잘 벌고, 공부 잘하고, 술 담배 안 하고 남자친구 따위는 하나도 안 사귀고, 꽃 한 송이 지면 슬퍼서 눈물 뚝뚝 흘리고, 아빠 친구가 딱한 사정이면 얼른 가져가시라고 서랍에서 일이백씩 덥썩 집어 주고? 그러다가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님한테 픽업돼서 돈 한 푼 안 내고 예물 하나 없이 아빠 손 잡고 버진 로드를 걸어가라고? 웃기시네. 아빠,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요즘엔 초등학교 사학년짜리 여자애도 그런 일은 안 믿어. 아빠가 그런 정신머리로 살다가 번번이 사기나 당하니까 엄마가 참다 참다 도망간 거잖아? 좀 영악해져 봐. 아빠는 속 편하게 착하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걸지 몰라도 나랑 현우는 숨이 막혀, 숨이. 그럴 바에 우리도 안 낳고, 결혼도 안 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나 중이 되면 좋았잖아? 왜 내 등골을 그렇게 파 먹어요? 내가 언제 낳아 달랬어? 차라리 당장 좀 죽어, 응? 죽으라고!”
나는 자기도 모르게 이불을 깨물고 숨을 죽였다. 부모자식 간에 이렇게 모가 난 말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뭔가 세게 내던지는 소리, 쿵쾅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가는 소리, 속을 뒤집는 소리와 물 내리는 소리가 차례로 들렸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문을 열고 나섰다.
미연은 거실 겸 부엌의 작은 식탁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아 있었다. 미연의 목소리에 놀라 깼는지 아까만 해도 조용하던 새들이 삐리릿거리며 울어댔다. 형광등 불빛에 비친 미연의 핏기 없는 얼굴과 서서히 올라가는 담배 연기가 둘 다 창백해 보였다.
“괜찮니?”
어색하게 운을 떼자 미연의 지친 눈길이 나를 향했다. 나는 흠칫 숨이 막혔다. 그때 미연의 눈길은 스물한 살짜리 여자애의 그것이 아니라 풍상에 시달리며 늙고 지친 고목의 껍질 같았다. 그 눈길에 대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가만히 있자 미연이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야. 저 녀석들 볼 때마다 부러워. 저 녀석들은 보살핌을 받아야만 살 수 있거든. 사람이 밥 주고 물 주지 않으면 금방 죽어 버려.”
빨갛게 불붙은 담배 끝이 베란다를 겨누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미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길은 나를 향하는 듯도, 내 뒤의 먼 허공을 향하는 듯도 싶었다.
“자립심? 인간의 존엄성? 웃기고 있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든데 무슨 자립심이고 무슨 존엄성. 사람도 다른 존재의 애완동물이었으면 훨씬 행복했을 거야.”
나와 미연 사이의 간격을 채우려는 듯 담배 연기가 천천히 흔들리며 올라와 허공에 퍼졌다. 베란다의 새들은 계속 삐요삐요 울어댔다. 미연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노래하듯 말했다.
“내가 새가 되면 네가 보살펴 줘. 밥도 주고, 물도 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 놓아 줘. 난 그걸로 만족할 거야.”
문득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연의 손에서 다 타 버린 담배를 빼앗고, 자기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미연은 순순히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말짱하고 한가할 때의 미연은 오히려 나를 이끌어 주는 자상한 선생님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일들, 여자애가 그런 것에 신경 쓰면 집안 망한다고 음으로 양으로 가르침 받아 온 일들을 미연은 태연하게 내게 가르쳤다.
“뭐? 너 탄생석도 몰라? 귀도 아직 안 뚫었다고? 이번 주 수요일은 휴일이지? 그때 명동 나가서 옷 구경이랑 보석 구경 좀 하자. 손톱도 한번 다듬고, 가방이랑 신발도 좀 보고. 너 모르니? 여자한테는 신발이 몇 켤레 있어도 모자란 거야. 그런데 너는 스니커즈 하나하고 펌프스 하나, 달랑 두 켤레 가지고 맨날 바꿔 신잖아. 발목도 가늘고 이쁜 애가. 발한테 미안한 줄 알아.”
“하지만 살 돈이 없는 걸…….”
“살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신경을 안 쓰는 거지. 너한테 어울리는 거 한두 개 정도는 내가 사 줄게. 그리고 걸을 때는 어깨랑 허리를 좀 펴고 걸어. 키도 별로 안 크면서 왜 그렇게 구부정하게 걸어?”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겸연쩍게 웃었다. 그럴 때의 미연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아서, 여자는 모름지기 조신하고 얌전하고 남의 눈에 안 띄어야 하고, 겉멋을 부릴 시간이 있으면 집안 일 요령 하나를 더 익히고 엄마를 도우라는 우리 집 분위기를 전하려야 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미연이 내게 가르쳐 주는 새로운 세계가 좋았고, 그 세계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공기가 청량하게만 느껴졌다. 얼마가 지난 후 미장원에 앉아 볼륨 파마를 하면서 나는 엄마가 지금의 나를 얼마나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아마 알아볼 수 없을 걸.
그랬다. 미연을 만나기 전인 두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파마를 하고 브리지를 넣은 머리카락 속에서 내 얼굴은 전보다 작아 보였고, 반듯이 편 어깨와 10센티미터 힐은 나를 훨씬 더 날씬해 보이게 했다. 나는 예전과는 달리 하늘하늘한 스커트와 날렵해 보이는 정장 바지를 즐겨 입었고, 화장술이 늘었다. 이제 길을 지나가거나 버스를 탈 때, 하다못해 편의점에 갈 때도 남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나를 바라보았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만 알고 청바지에 티셔츠밖에 입을 줄 모르던 촌뜨기 이수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 애가 하나도 그립지 않았다.
그 날은 이 주일에 한 번 미연과 내가 쉬는 날이었다. 쉬는 날마다 그렇듯이 나는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눈을 비비며 미연의 기척을 찾았다. 그러나 미연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 갔나 보지 뭐.’
그것도 달라진 점이었다. 처음에는 미연이 없으면 전전긍긍하며 설거지거리는 없나, 정리하거나 집안 청소할 건 없나 살펴보곤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미연과의 생활이 주는 여유를 느긋하게 맛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얹혀사는 처지라는 자각은 무디어지고, 미연이 뿜어내던 여신 같은 광채도 희미해졌다. 나는 미연의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여섯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그러나 전화를 건 것은 미연이가 아니라 우리 사장이었다.
“진호 오빠예요? 미연이 지금 없는데.”
“어, 알아. 오늘 일하는 애가 몸이 아프다고 쉬는 바람에 잠깐 대타 뛰러 갔어. 저녁때까지는 온다고 했으니까, 찬거리 좀 사 갖고 갈까 하고.”
“그래요. 오세요.”
사장인 진호 오빠가 미연이 집에서 밥을 먹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미연의 요리 솜씨는 형편없었으므로 가끔은 진호 오빠가 직접 요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안과 싱크대를 정리했다. 이삼십 분 지나자 진호 오빠가 이마트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진호 오빠는 들어오자마자 집 안을 둘러보고 말했다.
“확실히 깔끔하네. 미연이 혼자 살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래요?”
인사치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역시 기분이 좋았다. 진호 오빠는 자연스럽게 내게 이마트 봉지를 넘겨주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봉지를 받아들었다. 커다란 봉지 안에는 포장된 불고기와 유기농 채소 한 팩, 쌈장과 와인 두 병이 들어 있었다.
“어머, 와인이다! 하지만 불고기는 왜 사 왔어요? 그냥 고기를 사 오면 내가 해 줄 걸.”
“수나는 불고기도 할 줄 알아? 대단한데. 미연이는 불고기를 하라는 얘기만 들어도 머리 아프다고 징징댈 텐데.”
“여자가 다 미연이 같은 줄 알아요? 요리 잘하는 여자도 많다고요.”
우리는 공모하듯 소리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의 여운을 즐기며 내가 밥을 안치고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늘어 놓고 있을 때, 진호 오빠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미연이니? 나 너희 집에 와 있는데…….”
날카로운 미연의 목소리가 핸드폰 밖으로 새어나왔다.
“오빠? 나도 들어가는 길이야. 오늘 졸라 재수 없어. 뭐가 일이 안 돼. 첫 번째 약속 장소에 갔더니 웬 양아치 새끼가 같은 값에 일대 이로 하자지 뭐야. 그래서 관두라 그러고 돌아섰더니 쫓아오데? 응, 아냐. 중희 오빠가 잘 처리했을 거야. 마침 가는 길이 같았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어. 두 번째 장소에 갔더니 글쎄 남자가 나오질 않아. 내 참, 이런 장사에서도 바람맞는 일이 다 있어.”
“고생했네. 지금 어디야? 내 데리러 갈까?”
“아냐, 지금 잠실역이니까 금방 갈 거야. 배고프니까 수나랑 저녁 준비나 하고 기다려. 끊을게.”
진호 오빠는 전화를 끊으며 내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좀 늦는다는데, 어떡할까? 우리끼리 먼저 와인이라도 한 잔 할까?”
“그럴까요?”
나는 애교 섞인 눈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때 나는 그날 일이 그렇게 될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미리 구워 놓은 불고기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와인 잔을 부딪쳤다.
와인 한 병을 천천히 다 비울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지만 미연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망설이다가 두 번째 병을 따 버렸다. 나는 조금씩 말이 많아졌다. 시시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진호 오빠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고, 가끔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어느 새 그는 이마트 봉투를 건네줄 때처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모른 척했다. 내가 일부러 그를 꼬신 것은 아니니까, 모른 척하기만 하면 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는 중에 진호 오빠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너 참 예뻐졌다. 키도 더 크고 날씬해진 것 같아.”
“에이, 그럴 리가요. 나 원래 이랬어요.”
“원래 이랬어? 하긴 수나가 원래 이뻤지.”
그렇게 시시덕거리다가 어느 순간 진호 오빠의 입술이 내 이마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쩐지 모든 일이 이렇게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미연의 인도에 따라 그녀의 세계로 한발 한발 들어섰다. 미연은 내게 아름다움과 자신감과 여유를 주었고, 이제 그녀의 존재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내밀한 부분―잘생기고 부유한 남자친구와 성(性)의 세계도 알려줄 참이었다. 내 잘못이 아냐, 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뇌었다. 그 사이 이마에서 귓불을 따라 목덜미까지 온 입술이 허겁지겁 내 입술을 찾고 있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혀를 반쯤 내밀었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입술이 그 혀를 덮었고, 그와 함께 단단한 손가락이 내 가슴과 허리를 움켜잡았다. 나는 헉 하고 와인이 묻은 신음을 토해냈다. 가슴을 움켜쥐던 손가락이 남방셔츠 앞섶을 헤집고 들어와 유두로 향하자 다리 사이가 저절로 축축해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문이 열렸다는 말이다. 문간에서 미연의 동그란 눈이 우리 한 쌍의 비열한 간부간부(姦夫姦婦)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되뇌던 뻔뻔함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당황하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온 세상이 슬로모션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은 순간, 미연은 들고 있던 까만 비닐봉지에서 작은 버드와이저 병을 꺼내 우리 쪽으로 던졌다. 병은 우리를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식탁에 맞고 부서져 조각조각 튀었다. 배은망덕과 간통과 분노를 눈부시게 보여 주는 그 간명한 증거 앞에서 우리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새로 변했다.
2. 되돌아오는 것들
그렇게 많은 것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나의 한 학기에 버금가는 육백만 원이 사라지더니 점차 내가 알고 있던 이수나가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미연이 내 생활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새가 된 미연은 또록또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날아와 내 눈을 쪼려 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고, 진호 오빠가 반사적으로 미연을 낚아챘다. 미연은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지만 진호 오빠의 손은 미연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미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내 몫이었다.
“여기로 넣어 줘요, 여기로.”
나는 진호 오빠의 남은 한 손을 조심스레 잡고 베란다의 새장으로 이끌었다. 넓지도 않은 새장 안에 또 한 마리의 새가 들어오자 먼저 있던 새들은 기겁을 하고 퍼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새장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미연은 돌덩이가 된 것처럼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경멸 어린 눈으로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이후 나와 진호 오빠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출렁이는 구름다리 위에 함께 있던 한 쌍의 남녀는 사랑에 빠질 확률이 훨씬 더 높다고 한다. 그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이변을 함께 목격한 한 쌍의 공모자들은 그 날이 끝날 무렵 이미 침대로 함께 가고 있었다. 그것이 내 첫 경험이었다. 처음 진호 오빠가 내 몸 안으로 성기를 삽입했을 때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베란다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미연을 생각하면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진호 오빠를 더욱 자극했나 보다. 오빠는 혀와 손가락과 성기를 동시에 휘둘러 나를 공략하며 “이래도? 이래도?” 하고 속삭였다. 결국 나는 비명인지 희열인지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내질렀고, 그 순간 오빠는 내 몸 안에 사정했다.
언젠가 했던 약속대로 새가 된 미연은 내가 돌보았다. 오빠는 꺼림칙해하며 애완동물 가게에 팔아 버리라고 했지만, 차마 미연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인터넷의 애완조 카페에 가입해서 새 돌보는 법을 조금씩 공부했다. 처음에는 물을 갈아 주고 밥을 줄 때마다 내 손을 쪼거나 도망치려고 했지만, 내가 빈틈을 보이지 않자 미연도 체념한 듯 얌전해졌다. 대신 내 손에 닿지도 않으려 하고 한 마디도 울지 않았다. 새가 된 미연은 어떤 목소리로 울까, 가끔 궁금한 적이 있었지만 미연은 절대로 내 궁금증을 채워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미연의 세계를 조금씩 넘겨받았다. 나는 당연한 듯이 그녀의 집에 계속 살았고, 그녀가 입던 옷을 입었다. 놀랍게도 미연의 몸 치수는 나와 별로 차이 나지 않았다. 작아서 못 입을 만한 옷은 별로 없었다. 미연이 하던 일도 내 것이 되었다. 남자들을 만나 그들이 원하는 역할을 해 주고, 가끔 이차까지 가기도 했다. 거부감과 이질감은 한순간뿐이었다. 드물게 밝히거나 변태적인 남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이차까지 가기를 원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남자들이 바라는 것은 섹스 그 자체보다 예쁘고 한창 때인 값 비싸 보이는 여자애가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내 일은 한결 편해졌다. 진호 오빠는 내게 새로 들어온 여자애를 한 명 붙여 주었다. 그 여자애는 내가 하던 것처럼 남자들과 채팅을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내가 나갈 약속을 잡아 주었다. 착하고 싹싹한 애인 데다가 형편도 곤란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 애에게 같이 살자고 하지 않았다.
한번, 화장대 위에 놓아 두었던 미연의 핸드폰이 울린 적도 있었다.
“여보세요, 미연이니?”
지치고 슬픈 듯한, 돈이 필요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한순간 숨을 들이쉬었으나,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평온했다.
“아닌데요. 얼마 전에 전화번호 바뀌었거든요.”
“아……그렇습니까. 혹시, 번호 어디로 바뀌었는지는……모르시죠?”
“네, 몰라요.”
남자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고, 어쩔 줄 모르는 긴 침묵이 흘렀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하자 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때도 베란다의 미연은 울지 않았다. 다음날 진호 오빠가 미연의 핸드폰을 해지했다. 알고 보니 미연의 핸드폰은 오빠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십일 월 중순에 접어들 때쯤 새로운 생활은 완전히 익숙해졌다. 나는 매일 새들에게 밥과 물을 갈아 주고, 종종 명품 핸드백과 구두와 화장품과 새옷을 샀다. 진호 오빠와는 일 주일에 한 번쯤 만나서 같이 영화를 보거나 저녁을 먹고 섹스를 했다. 오빠는 늘 다정하고 점잖았지만 그 모습에 속아 주제넘게 굴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이제 웬만큼 영악해진 나는 눈치 채고 있었다. 나는 손님을 모시듯 깍듯하고 사근사근하게 오빠를 대했고, 오빠는 후한 선물과 낭만적인 저녁과 격렬한 섹스로 그에 보답해 주었다.
가끔 오빠는 함께 눕기 전에 약을 주기도 했다. 흰 알약일 때도 있고 캡슐약일 때도 있었다. 나는 무슨 약이냐고 묻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약을 먹으면 오빠가 더욱 다정해지고 세상이 찬란해지고 섹스가 더욱 뜨거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서너 번씩 절정에 올랐고,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잠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는 약간의 두통은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그날은 진호 오빠가 저녁 일찍 찾아왔다. 오후 네 시쯤? 다섯 시쯤? 십일 월 중반이 넘었는데도 아직 햇빛이 남아 있는 때였다.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약을 먹고 섹스를 한 뒤 잠들었다.
내가 밤에 왜 깨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약에 내성이 생긴 것일까?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머리가 무지근했다. 몇 번 더 눈을 감으며 다시 잠들려고 애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가만가만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거실의 시계는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지으며 식탁에 앉아 잡지책을 훌훌 넘기다가 한 잔 더 하고 자려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한때 내가 쓰던 작은 방은 이제 냉장고와 옷을 두는 곳으로 변했다. 선반 형 행거가 방 한 쪽 면을 온통 차지했고, 냉장고 옆에 있는 작은 벽걸이에는 진호 오빠가 입고 온 양복이 걸려 있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여닫다가 그만 오빠의 옷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떨어졌는지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며 수첩이며 명함 같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라 큰방 쪽에 귀를 기울였지만 깨어나는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아마 오빠도 약기운에 곤히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집어 하나하나 양복 주머니에 챙겨 넣던 내 손이 문득 멈칫했다. 반으로 접힌 하얀 편지 봉투가 어쩐지 낯익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살펴보았다. 봉투와 함께 접힌 여섯 장의 파란 수표를 보자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성은 이것이 내가 잃어 버린 그 돈일 리가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 돈이라면 설명해야 할 연결고리가 너무 많다. 진호 오빠는 그 돈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미연은 그 사실을 알고 내게 접근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수표 신고하는 것을 도와주었을까? 상식적으로 이 수표가 그 수표일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수표라고 하더라도 오빠가 모르고 남에게 넘겨받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안 그러고서야 굳이 이 수표를 품에 품고 나를 만나러 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직관은 그것이 처음부터 진호 오빠의 짓이라고 말했다. 그가 나를 곤경에 빠뜨렸고, 미연이 나를 구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미연을 배신하고 오빠를 차지했다. 이렇게 치달아가는 상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왜? 라는 물음은 사람이 새가 되고 넉 달 전에 잃어 버린 돈이 한 달 전에 사귀게 된 애인의 품에서 발견되는 현실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아,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을까. 나는 망연히 생각했다. 안개 속에 단 하나 보이는 길을 따라오다 보니 어느덧 이런 이상한 나라에 들어 온 것이다. 이제 원래 떠나 온 출발점은 아스라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나는 두통과 수면 부족으로 안 돌아가는 머리를 움켜잡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 버렸다,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나는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딱 부러지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나냐? 넌 대체 왜 그리 전화를 안 하는겨? 무슨 딸내미가 엄마가 전화할 때까지 전화를 안 혀? 별일은 없는 거제이? 왜 말이 없어? 수나야, 수나야? 여보세요?”
내가 버려두고 온 세계의 닻과 같은 목소리가 귓전에서 우렁차게 울려댔다. 나는 전화기를 든 채 입술만 달싹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계속 내 이름을 불러댔지만 내 귀는 베란다로만 쏠렸다. 베란다에서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이질적인 소리가 났다.
삐요로로 삐요오-.
새가 무서운 기세로 울어대고 있었다. 밤의 장막을 몽땅 찢어 버릴 정도로 날카롭게, 비웃듯이, 새가 울어대고 있었다.《문장 웹진/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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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향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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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광장원형 광장 신유진 콩트르스카르프(La Contrescarpe)는 작은 원형의 광장이다. 그 광장은 둥지처럼 품는다. 나무와 분수대, 카페, 거리의 악사를. 노천카페에서 늙은 남자가 와인을 마신다. 아이들이 분수대를 돌며 웃는다. 예빈, 현우, 윤아, 윤준. 네 겹의 웃음소리가 분수대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퍼져 나간다. 바이올린 선율과 나이프로 접시를 긁는 소리가 뒤섞인다. 모두 광장 안에 있다. 한 남자가 분수대로 다가온다. 남자는 체구에 비해 작은 카키색 점퍼를 입고 커다란 검은 가방을 메고 있다. 남자가 분수대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남자는 가방에서 맥주 한 캔과 빵을 꺼낸다. 그는 맥주를 마시다가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본다. 바이올린 연주가 끊긴다. 아이들이 멈춰 선다. 남자는 화가 난 듯 먹던 빵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비둘기들이 날아온다. 순식간에 비둘기 떼가 시커멓게 분수대를 감싼다. 그때 해원은 비둘기들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중에서 발가락 하나가 없는 비둘기를. 그 새의 목은 초록색과 보라색이 뒤섞여 있었고, 왼쪽 발은 발가락이 네 개, 오른쪽은 세 개뿐이었다. 해원은 그 비둘기가 빵 조각을 향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절뚝이는 발로 다른 새들보다 빠르게 가장 큰 조각을 가로챘다. 남자가 다시 비둘기들을 향해 맥주캔을 던졌다. 비둘기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맥주캔이 바닥에서 하얀 거품을 내뿜으며 돌았다. 새들의 날개가 젖었다. 발가락이 세 개밖에 없는 비둘기의 날개가 가장 먼저 젖었다. 비둘기가 목을 긁으며 울었다. 새는 얼마 동안 울었던가. 남자가 빵을 던진 순간 30초, 비둘기가 모여든 시간 1분? 발가락 하나가 없는 비둘기가 빵을 쟁취하기까지 2분? 맥주캔이 터지고 새들이 날아오른 순간 1분? 다 합쳐도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사이, 한 아이가 사라졌다. 그런 일이 가능한가. 모두 그럴 리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원은 얼마나 오래 그 발가락 없는 비둘기를 바라봤던 것일까. 다시 시작해보자. 그 작은 원형의 광장에서부터. 실종일: 2019년 7월 17일 이름: 정윤준, 나이: 7세 키: 124cm, 몸무게: 24.7kg (봄에 학교에서 신체검사할 때 측정한 기록) 얼굴은 하얀 편이고, 앞머리가 눈썹까지 내려옴. 한쪽 눈에만 쌍꺼풀이 있음. 해원은 평소보다 오래 샤워를 한다. 귀, 목 뒷덜미, 겨드랑이, 허벅지 안쪽, 구석구석 정성껏 닦는다. 샤워를 마친 후에는 벌거벗은 채로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꺼내두었던 옷을 입는다. 헐렁한 바지와 티셔츠, 바람막이 점퍼다. 점퍼는 접으면 손바닥만 한 파우치 안에 들어간다. 옷을 다 입은 해원은 침대 옆에 놓인 캐리어를 거실로 끌고 나온다. 십 년 전에 인터넷으로 산 샘소나이트 기내용 캐리어다. 상표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피카츄 스티커는 이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일그러져 있다. 꼭 누군가 할퀸 것 같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는데. 해원은 항공권과 숙소 예약 정보를 캡처해서 수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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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11-01
문장웹진 소설
나까마나까마1) 김남숙 중보가 앉아 있는 낚시 의자 반대편 도로로 하얀색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섰다. 차가 들어서자 중보와 나란히 앉아 있던 경현이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같았다면 멀리서부터 차의 움직임을 감지한 중보가 달려와 도로 중앙에서 그 차를 맞이했겠지만 중보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최근 들어 몸이 무겁고 특히나 눈이 아팠다. 이곳에서 왕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중보는 그만큼 큰 눈을 검은 손가락 마디로 벅벅 비볐다. 요즘 따라 눈까리가 왜 이래. 얼른 먼저 가 봐. 중보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눈을 비비며 읊조리듯이 말했다. 경현은 그런 중보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형님 아프면 좀 쉬셔, 라며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경현의 말투에 어딘가 냉한 것이 묻어났지만 중보는 경현에게 별말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모가지를 잡았겠지만 지금의 경현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기세 같은 것에 눌려 수그러드는 자신이 느껴졌다. 중보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요즘은 경현이 물어온 손님으로 수입을 나누는 일이 많았기에 괜히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경현의 말대로 폼이 좀 그래 보여도 명색의 의형제니까. 형이 동생을 봐주기도 하고 그러는 법이니까. 중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형님, 저거 저거, 운전하는 폼이 딱 봐도 여자네. 경현은 중얼거리며 차 쪽을 향해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어울리지 않는 명품 로퍼를 신고 새하얀 셔츠를 입은 경현에게서 독하고 촌스러운 향수 냄새가 풍겼다. 경현이 점차 도로로 몸을 이동하자,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모를 이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도로 중앙으로 다가오는 흰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색은 다 달라도 모두가 이곳에서 숙련된 나까마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경현이 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중보는 경현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의 몇 년 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손님부터 잡고 본다는 마음이 그랬다. 손님은 즉 돈이었다. 경현은 몸을 재빨리 움직여 다른 이들을 제치고 멈춰 서 있는 차창 안으로 능숙하게 노크를 했다. 차에 부딪히기 직전까지 밀어붙여야 차가 멈춘다는 것을 경현은 잘 알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차 안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리둥절 앉아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차 좀… 보려고……요. 중보는 경현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경현이 짓는 특유의 미소가 눈에 선했다. 오늘 크게 남겨 먹고 어딘가 가서 진탕 술을 마실 경현의 모습이 뻔하기도 했다. 중보는 왕눈이 같은 큰 눈을 계속 비비적거렸다. 눈이 가렵기 시작한 것은 한 세 달 전쯤이었다. 처음에는 가렵기만 했던 눈이 점차 시려지다가 이내 매워졌다. 중보는 눈이 매워지면서부터는 눈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지랄이네, 지랄이야. 중보는 축축하게 젖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경현과 하얀 승용차 손님은 어느새 오래된 고객처럼 나란히 걸으며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 김남숙
- 2026-11-01
문장웹진 소설
전사의 후예전사의 후예 강화길 1 족보 읽어본 적 있어? 서 주임은 콩나물국밥의 계란 노른자를 터뜨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들어서 당황한 듯했다. 내 생각에도 좀 뜬금없는 소리긴 했다. 족보라니. 그래. 관두자. 뭐 좋은 일이라고 떠들고 다니냐. 그때 서 주임이 대답했다.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족보요? 그런 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나는 숟가락으로 국밥을 휘저었다. 투명하던 국물이 계란과 뒤섞이며 사골국물처럼 뽀얗게 흐려졌다. 김제 출장길이면 꼭 이 가게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토렴 된 흰쌀밥과 국물을 뱃속에 든든히 채우고 콩나물까지 천천히 씹어 삼키고 나면 어떤 까다로운 일이나 심각한 상황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자신감이 차오르곤 했다. 이전에는 그랬다. 지금은 그냥 익숙해서 온다. 이번 달만 세 번째. 하. 오늘은 과연 고 단장을 만날 수 있으려나. 나는 말했다. “우리 집 우편함에 편지가 있더라.” “편지요? 손 편지? 아, 혹시...... 민원인이에요?” “응. 손 편지. 민원인은 아니고, 그냥 나도 모르는 여자야.” 서 주임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거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럴 것이다. 나도 늘 그랬으니까. 아니다. 신입 시절, 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상사들이 진심으로 싫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이런 소리나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자식새끼가 인사를 안 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리고 지금, 나는 서 주임에게 말한다. “내가 부럽대. 조상이 독립운동가라서.” 서 주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어떤 찬사라도 내뱉을 표정이었다. 서 주임은 그런 사람이었다. 화를 참으며 무뚝뚝하게 앉아 있던 나와는 많이 달랐다. 아니, 완전히 달랐다. 서 주임이 센터에 들어온 지 겨우 일 년. 사람들은 툭하면 그녀를 찾았다. 같이 밥을 먹고 싶어 했고, 쉬는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서 주임은 말을 할 줄 알았으니까. 듣기 좋은 말을 정말로 듣기 좋게 말하는 사람. 그리고 뭐랄까.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나도 느낀 바인데, 서 주임은 대화를 하는 순간만큼은 서로 진심을 주고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신뢰. 애정. 다정함.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녀는 선을 넘지는 않았다. 듣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더 알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속내도 털어놓지 않았다. 상대가 원하는 만큼 적당히 호응해주고, 이야기가 끝났다 싶으면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센스. 그게 참 좋았다. 아, 물론 나는 그녀의 상사였고, 그래서 서 주임이 내게 더 깍듯하게 군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냥...... 적당히 외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시, 어쩌면
- 강화길
- 2026-11-01
문장웹진 소설
공유자의 기록공유자의 기록 이서수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엉뚱하게도 낡은 정자 앞이었다. 아버지는 육모정이 있는 그 땅을 세 조각으로 잘라 친구들과 나누어 가졌던 사실을 내게 처음 알려주었다. 사다리꼴 모양의 땅 둘레에 소나무와 중국 단풍나무, 벚나무가 띄엄띄엄 심겨 있었다. 파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정자 마루 끄트머리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며 발끝으로 축구공을 굴렸다. 그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여 부근에 사는 아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사람이 삼분의 일씩 갖고 있어. 그러니까 이 땅의 삼분의 일이 네 몫이라고. 아버지에게 땅이 있었는지도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내게 증여할 생각이라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만들면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한편으론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낡은 정자가 지어진 땅을 물려받게 된 사실이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자 앞은 너른 공터였고 지도 앱을 통해 확인한 주변엔 초등학교와 파출소, 보습학원과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정자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으면 가치가 얼마나 오를지 궁금했다. 정자는 저대로 내버려 둬. 그건 지켜. 아버지가 내 속내를 읽은 듯이 말했다. 나는 미약하게 항의했다. 땅을 이렇게 놀리는 사람이 어딨어? 놀리는 게 아니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가 입을 뗐다. 올해 우리가 자식들에게 땅을 증여하기로 다 같이 합의를 봤어. 왜 그런 결심들을 하셨는데? 그냥 때가 된 거지.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하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 빨리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땅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이 더는 없었다. 나는 의구심을 삼키고 정자와 나무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어색함을 적당히 감추며 아버지와 정자 앞에서 헤어졌다. 해마다 한두 번씩 오가던 안부 연락마저 뜸해지던 때였기에 서울로 함께 돌아갈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전에 재산을 미리 처분하려는 아버지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혹시 어디 아파? ―건강해.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분명 건강했던 것 같고, 나는 언젠가 그 땅에 대해 아버지와 길게 얘기할 기회가 다시 있을 줄 알았다. 3년이 훌쩍 흐르고 겨울 산행을 나선 아버지가 실족사로 세상을 뜰 줄은 까맣게 모르고서. * 부고장엔 그들이 아버지의 자식으로 되어 있었다. 내 이름이 없는 온라인 부고장을 들여다보다 장례식에 가지 않을 결심을 세웠다. 그러곤 동네 성당으로 가 나름의 작별 인사를 했다. 자식에게 지은 죄가 있긴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의 안식을 위해 켜둔 초를 바라보다 아버지의 봉헌초도 마련해 불을 밝혀 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친족의 도리로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새 초가 보이지 않아 나는 스스로 초가 되어 아버지 생의 일면을 조용히 밝혔다
- 이서수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베일베일 윤해서 ∴ 배달을 끊을 수 없다. 이번 달에만 12번째 같은 메뉴를 시켰다. 분리수거 배출일은 월요일이다. 월요일 18시부터 23시까지만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다. 일주일치 쓰레기를 모아 월요일 밤에 내다 버린다. 조명을 환하게 밝힌 주차장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커다란 이케아 봉투 가득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온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과 말없이 번갈아 비닐, 플라스틱, 종이, 캔을 분리 배출한다. 내가 이번 달에만 열두 개째 버리고 있는 똑같은 플라스틱 뚜껑 아래 색색의 플라스틱이 가득하다. ∴ 두 개의 점이 있다. 점을 번갈아 본다. 어떤 움직임이 점을 만들 때 점에 내려앉는 건 뭘까. 같은 크기의 점을 찍을 뿐인데. 무엇이 점과 점 사이에 차이를 만드나. ∴ 면허 갱신 안내 문자를 받았다. 최근 6개월 내 찍은 사진이 있어야 하고,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증명사진을 찍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고 어색하다. 어딘가 제출했을 최초의 증명사진을 앨범에서 발견했는데, 5살의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마다 흑백사진 옆에 모아두었는데 조금씩 다른 사진 속 얼굴이 모두 흑백사진 속 얼굴과는 기묘하게 닮아 있다. 내가 사진관을 선택할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같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몇 년 만인지 그 사이 사진관은 이사를 했다. 큰길가에서 골목 안쪽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하고 찾아갔는데 이전 사진관 크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 의자와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왼쪽으로 조금 갸우뚱. 이런 지시를 하던 사장님이 답답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였다. 보정을 거친 사진 속 나는 거울로 매일 보던 나와 달랐다. ∴ 금을 넘는 데 몰입하던 때도 있었다. 충동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면서.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거나 휴대전화를 없애고 오래 걷거나 새벽까지 놀이터에 앉아 있거나. 보고 싶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토끼 머리 위에 쌓인 먼지를 털고, 알람이 울리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토끼는 세 마리. 접시 하나를 들자고 매끈한 토끼 셋이 두 손 모으고 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어 사이좋게 나란히. 어떤 날 접시 위에 사과를 올리고 토끼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아래층 사람이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해서 팔 아프겠다, 생각하다가. 아래층 천장 위에 웅크리고 깜빡 잠들었다. 해가 지려는지 집은 어둑하고 에어컨 바람이 서늘했다. 눈을 뜬 건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 ∴ 통 속에 손을 집어넣는 기분. 통의 깊이를 알 수 없다. ∴ 큰 화분 2개와 작은 화분 2개가 있다. 작은 화분 중 하나에서 꽃대가 올라왔다. 이렇게 더운데. 꽃이 피었다. 역대 최대. 역대 최고. 이런 표현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 에어컨을 틀어 갇힌 공기를 식힌다. 2주 전에는 짧았던 꽃대가 일주일 만에 길어지더니 다섯 송이의 꽃이 피
- 윤해서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보트 아래보트 아래 손호영 한때 나는 얀의 말대로 집 앞을 비추는 보안카메라를 설치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 보곤 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햇빛, 무심히 우리 집을 침범하던 빛을 나도 결국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 도시에 뿌리내렸다면, 나의 세계는 바라던 만큼 넓어졌을까? 어쩌면 우리는 아기를 낳아 키웠거나, 혹은 결혼했을지도…… 이런 생각들은 물의 파동처럼 하나의 점으로부터 사방으로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가곤 했다. 나는 그를 떠나며 가족 핑계를 댔다. 여기서는 영원히 가족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짐짓 놀라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나에게 너는 오래전부터 가족이었다고. 글쎄. 정말? 찰나였지만, 얀은 정말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고, 나는 승리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지난 일들을 여러 번 되감아 보면서 나는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지 원점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정말 그의 견고한 세계에 작은 생채기라도 낼 수 있는 존재였는지를. * 암스테르담 출장에 김수오를 데려간 건 박 대표 부탁 때문이었다. 그곳에 살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로컬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와 국내 독점 유통 계약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수 개월간 메일과 화상 회의로 대략의 조건 조율이 끝난 단계여서 큰 부담은 없었다. 현지 스튜디오와 쇼룸을 돌아보는 일정까지 포함해 4박 6일 출장 계획을 보고했는데, 박 대표가 그제야 김수오에게 시킬 만한 일을 고민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오 년을 살다 이 년 전쯤 귀국했다. 반년 넘게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내게 해외 바잉과 상품 기획을 총괄하는 차장 자리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어준 게 대학 선배인 박 대표여서, 나는 그의 지시라면 가급적 따르는 편이었다. 김수오는 박 대표 친구의 아들로 올해 스물일곱 살이었고 몇 달 전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그의 아버지는 치아 교정 전문의로 전국에 네트워크 병원이 30곳쯤 있는 치과 체인의 대표라고 했다. 잘은 몰라도 박 대표는 김수오의 아버지에게 얼마간 빚을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쑥 남의 사무실을 찾아와 맡겨둔 듯 자기 아들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그것도 정규직을, 의사라면 상식이 있는 사람일 텐데, 하고 직원들끼리 수군댔다. ─우리 아들이 올해 졸업하는데 패션을 하고 싶다네.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하거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박 대표에게 전해 들으니 그 집안은 대대로 의사였는데, 김수오가 삼수를 하고서도 의대 입시에 실패했다고 했다. 메디컬 편입을 하라고 생명공학부에 보내놨더니, 학점 관리는 뒷전에 갑자기 패션MD를 하겠다고 선언해 집안이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경력직 뽑아달랬더니 낙하산 신입이 웬말이냐고 투덜대는 직원들에게 박 대표는 김수오가 비싸고 좋은 것들 많이 보고 자랐으니 감각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미감이니, 취향이니, 요즘 그런 거 없는 애들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지.
- 손호영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암순응암순응 박선우 스트레칭의 마지막 단계는 아기 자세다. 우선 바닥 매트에 두 무릎을 꿇고 발뒤꿈치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앉는다. 상체를 숙이면서 두 손을 머리 위로 곧게 뻗는다. 그러면 어깨의 삼각근과 등허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얕은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대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 그리하여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 자세를 갖춘 뒤에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속으로 하나, 둘…… 서른까지 세다 보면 몸의 뒤틀린 부위들이 바로잡히는 게 느껴진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에 끼워 맞춰지는 기분. 신체가 교정되는 감각은 정신 상태로도 이어진다.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하다. 힘이 다하면 매트 위에 드러눕는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뱉어낸다. 몸이 이완되는 감각에 집중한다. 그러면 호흡이 잦아들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서서히 멀어져감을 느낄 수 있다. 아득해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나 역시도. 스트레칭을 마친 후에는 몸을 일으켜 방문 앞으로 간다. 나는 번번이 문손잡이를 쥔 채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젖힌다. 거실로 나가면 가죽 소파에 길게 누운 아버지가 보인다. 올해 일흔넷의 아버지는 한 손을 이마에 올려둔 채 나지막이 코를 골고 있다. 더는 염색을 할 수 없어 백발이 성성해진 머리카락과 고목 껍질처럼 버석하고 거무스름해진 얼굴, 움푹 파인 볼, 살집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앙상해진 팔다리로 맥없이 축 늘어져 있다. 매일 아침 나는 그 모습을 본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으며 쇠약해지는, 무시로 잠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하는 아버지를 마주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다 못해 한순간 뚝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현실과 유리되면서 내가 아버지의 세계에, 그러니까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와버린 것만 같다. * “이대로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사실 겁니다. 항암을 하시면 6개월에서 1년쯤이고요.” 혈액종양내과 허 교수는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초진을 맡았던 소화기내과 전문의와 위암센터 외과의가 입에 지퍼라도 채운 양 말을 삼갔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어쩐지 속 시원한 감정마저 들었다. 처음으로 상급종합병원 의사에게 신뢰감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허 교수의 소견에서 새로운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전이성 위암 말기 환자의 여명’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속 시원함은 아버지가 시한부 환자임을 누군가 육성으로 선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동안 가족은 물론이고 지인들조차 쉬쉬해온,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얼마나 남은 거니?”―공식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후련함 말이다. 그래, 내가 의사에게 원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우리가 환자에게 도
- 박선우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 임아라 그가 돌을 키우자고 했을 때 나는 딸기를 먹고 있었다. 케이크에 얹은 것치고 과즙이 실해서 턱이 저릿했다. 나는 테이블 매트에 포크를 내려놓고 오른뺨을 어루만졌다. 입안에 머금은 걸 삼켰는데도 신맛이 가시질 않았다. 어금니에 들붙은 씨가 거슬려서 자꾸 혀끝으로 더듬댔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돌을 키우자는 거지. 문득 씨가 아니라는 게 떠올랐다. 딸기의 겉에 박힌 점들 말이다. 그게 열매고, 그 속에 더 작은 씨가 있다는데, 그렇다고 그걸 달리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골라낸 씨를 검지에 뱉었다. 침과 뒤엉켜서인지 꽤 부푼 것 같았다. 자기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한테? 그래, 우리한테. 그의 윗입술에 묻은 생크림이 바르르했다. 나는 그것을 닦아 주려다가 관두고 나이프를 집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면 으레 주는 플라스틱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직원이 물었을 텐데. 그가 뭐라고 답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초는 없고, 나이프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손잡이에 달린 마개를 열었더니 성냥 두 개비가 쏟아졌다. 돌을 키우기도 해? 응, 돌도 키울 수 있대. 그는 컵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또 커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 컵은 가장자리가 겉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물이 넘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서랍에 들어박힌 처지길래 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발끈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다. 너무 말짱하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 이후 그의 커피는 그 컵에만 내줬다. 똑같은 컵이 있었는데 이미 버렸다는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왜 돌이야? 손이 가는 건 싫다며. 그렇다면 돌 만한 게 없지. 그가 살며시 컵을 기울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슬쩍슬쩍 드러나는 둥근 밑면을 바라보면서 유난히 까맣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에 닿을 때마다 닳았을 테니까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하얀 컵과 대비되어서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너머에 있는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흰자위를 바삐 오가는 걸 보아하니 뭔가 숨기고 있었다. 실은 주문했어. 나는 잼이 덕지덕지한 접시를 토닥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몫의 케이크는 모로 누운 채로 사이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겹겹인 시트에서 반쪽짜리 딸기들을 빼낸 흔적이었다. 언제부턴가 버터에서 여물의 향을 맡았다. 내가 투덜댔더니, 그는 여물의 근처라도 가본 적이 있느냐며 놀렸다. 그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는데, 어째서 끄덕였는지 의문이었다. 미리 이름을 지어 주자. 그가 반절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새 눅눅해진 받침대가 흔들려서 잠시 애를 먹었다. 나는 식탁에 흐트러진 빵 부스러기를 그러모으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검지에 뱉은 씨앗이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로 옮았을 텐데, 전연 기억나지 않았다. *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따끈한 물줄기를 쏘였더니 순식간에 케이크가 일그러졌다. 폭우를 맞은 모래성처럼 쉬이 뭉그러졌다. 자잘한 건더기는 배수구를 향해 미끄러지고,
- 임아라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심심심심 임승훈 심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심심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심심해서 집안을 싹 바꿔봤어."라든지, "심심해서 머리핀을 또다시 찾아봤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심심함이란 일종의 수사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유는 있는데 말하기 귀찮거나,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고. 대체 그 심심함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그만한 에너지를 들여서 굳이 무언가를 저지르냔 말이다. 하지만 이 년 전 급작스럽게 아내인 진서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심심함에 시달렸다. 사실 위의 말들은 주로 진서가 한 거였다. 그녀는 '심심해서 뭐뭐 했어'란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나는 때로는 재치 있고 수사적인 그녀의 화법이 귀여웠고, 때로는 완곡적인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고, 때로는 자기 마음에 시달리다 지쳐버린 그녀가 답답해 종종 짜증이 났었다. 왜 그녀는 본심을 밝히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심심. 진서는 왜 심심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진서와 나의 기질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다. 뭐 대단한 농담도 아니다. 대화하다가 내가 무심코 '지금'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잽싸게 내 말을 자르고 '이 순간-'이라고 흥얼거리는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바로 오늘'이라고 대꾸해주곤 했다. 섹스할 때도 그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비장한 표정으로, "어디, 오늘 자네 실력 좀 확인해 보겠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진서 언니, 그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옷을 훌렁 벗었다. 그 무렵 우린 홍명희의 소설 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진서와 광명 본가에서 아버지가 내놓은 책 박스를 뒤적이게 되었다. 진서와 나는 그 속에서 을 꺼내 들고 "우리도 이거 보자, 보자."라며 집에 가져왔다. 그 소설에서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임꺽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꺽정이 언니, 이 우라질 놈의 목을 뎅강 자를깝쇼? 진서는 또한 예민하고 침울한 사람이기도 했다.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툭 내뱉고는(주로 꿈에서 내가 자기가 키우던 양을 잡아먹었느니, 섬세한 사람에겐 섬세한 날이 있다느니 했다), 긴 침묵에 빠지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스 부호처럼 짤막하고 건조한 말을 하긴 했으니 완벽한 침묵은 아니고, 침묵의 근사치에 이르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이틀 정도. 그러다가 그 침묵(의 근사치)에서 벗어나서 문득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였다. "심심해서 LA갈비를 만들어봤어."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내 사랑은 진서의 사랑과 조금 달랐던 걸까? 확실히 나의 사랑엔 고통이 없었다. 친구의 후배였던 진서를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까맣고 가느다랗고 풍성한 단발머리,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녀는 왠지 어떤 정물 같았다. 그런 그녀를 나는 힐끔힐끔 쳐다봤는데, 그때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후, 한 달 뒤에 우린 연애를 시작했고,
- 임승훈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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