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목소리
- 작성일 2007-09-28
- 댓글수 0
새의 목소리
송경아
1. 사라져가는 것들
엄마는 왜 인터넷뱅킹을 이용하지 않는 걸까.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세 시간째 나는 이런 의문을 곱씹고 있었다. 곱씹는다는 말만으로는 모자라다. 의문은 분하고 억울하고 막막한 마음과 불안과 공포와 섞인 채 뱃속에서부터 가슴으로, 목으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그 순간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기라도 했다면 나는 부풀대로 부풀어 지쳐 버린 풍선처럼 그 자리에서 뻥, 하고 터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 주지 않았고, 아무도 내게 다정한 위로의 말 한 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덩어리는 부풀다 말고 제풀에 못 이겨 퍽석 주저앉으며 눈으로 비어져 나와 주르르 흘렀다. 결국 나는 고속 터미널 앞 벤치에 앉아 목구멍으로 끅끅 소리를 내며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렸다. 내가 생각해도 추한 모습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애당초 엄마는 왜 인터넷뱅킹을 이용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다못해 텔레뱅킹도 있고, 은행에 가서 직접 돈을 부치는 방법도 있는데.
대답은 전부 알고 있었다. 엄마는 기계치였고, 기계를 연상하게 하는 모든 것을 낯설어하고 무서워했다. 컴퓨터 앞에는 앉지도 못하고, 음성자동응답이 들리면 무서워서 전화를 툭 끊어 버리는 우리 엄마. 그렇게 소심하고 기계를 못 믿으니 은행에서 돈을 부친다는 간단한 일도 하지 않으려 든다. 게다가 옛날 옛적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신환을 찾으려다가 무슨 착오로 한참동안 돈을 찾지 못하는 낭패를 겪은 이후로, 중요한 돈일수록 꼭 직접 건네주고 챙겨주려고 한다, 고 엄마는 무슨 자랑스러운 일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안다고 해서 잃어 버린 육백만 원이 돌아오나? 등록금 오백이십만 원 플러스 한 달치 방값 삼십만 원 플러스 다음 아르바이트를 찾을 때까지 버틸 한 달 용돈 오십만 원.
어디서 어떻게 잃어 버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헤집어 보았다. 가방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있었던가? 버스 안에서 잠깐 졸기는 했지만 그때도 가방은 꼭 껴안고 자지 않았던가. 아니, 처음으로 돌아가서 되짚어 보자. 열흘 동안 고향에서 답답한 시간을 보낸 다음 집에서 나올 때 엄마는 “잘 가지가라. 큰 돈이니께.”라고 말하며 백만 원짜리 수표 여섯 장이 든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그 봉투를 손으로 건네받으려고 했다. 그때 엄마는 “아냐, 니 가방 좀 열어.”하더니 내 가방에 들어 있던 것 중 제일 두꺼운 책―집에 있을 때 읽으려고 가져온 수잔나 클라크의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상권이었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나는 이 책의 안개 낀 듯한 고딕 분위기가 좋았다. 그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숨 막히는 지방 소도시가 아닌 요정의 나라에 와 있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한가운데에 꾹꾹 눌러 넣었다. 나는 그때 이미 인터넷뱅킹을 죽어도 이용하지 않겠다는 엄마의 고집에 한참 질려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제 돈은 소중하면서 책 소중한 줄은 모른다는 엄마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비위를 상하게 했다. 나는 보란 듯이 책에서 봉투를 꺼내 와락 반으로 접어 가방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 순간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뭐여? 책 안에 넣어. 그깟 가방, 칼 한번 그으믄 기양 찢겨 나가겄네.”
엄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등을 돌리며 “그럼 올라갈게요.” 하고 말했다. 엄마는 내 등에 대고 “저 버르장머리 좀 봐라. 기집애가 고집스러운 거 하며. 서울이 어떤 곳인데.” 하고 못을 박았다. 2007년 대한민국에 함께 살면서도 엄마와 나는 완전히 다른 지리학을 익히고 있었다. 엄마의 서울은 지하철과 버스마다 소매치기들이 칼을 들고 날뛰고, 모두가 남을 등쳐먹지 못해 안달하고, (나처럼) 고집 세고 버릇없는 여자애들이 학업에 열중해야 할 잘나고 소중한 아들내미를 꼬셔대는 곳이었다.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낯선 고장에 간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고, 어쩌다 차로 한나절만 나갔다 와도 집에 돌아올 때면 과장된 한숨을 쉬어대며 ‘집이 최고여. 밖에 나가봤자 돈이나 쓰고 덤터기나 쓰지. 몽죄 사기꾼들이여.’ 하고 말하는 것이 우리 엄마였다. 반면 나의 고향은 나의 이방(異邦)이었다. 나와 동생은 나보다 두 살 많은 오빠 때문에 항상 무시당했고, 첫사랑의 아련한 동경을 품고 바라보았던 남자 아이는 알고 보니 무신경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중학교 때 이미 여자 맛을 보았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다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악의 없이도 거칠고 우악스럽게 말하는 곳이었다. 철이 들고 나서부터 나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꿈꾸었다. 고향과 절연하든가, 아니면 고향마저도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몸과 마음에 쌓아 돌아오고 싶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것은 그런 여유 혹은 절연을 준비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다시 흐느낌이 목에서 흘러나왔다. 다 끝났다. 가방이 찢겨 있지도 않고 한눈을 판 적도 없었건만, 엄마의 서울이 내게 한 방 먹였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한 방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은 원자폭탄이 터진 것처럼 하얀 빛과 검은 버섯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몇 시간이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긴 여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습기 찬 어둠이 내리덮이기 시작했지만 나는 벤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기도 싫었고 움직일 힘도 없었다. 땀과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도 밤이 되자 드러나지 않았다. 낮에는 힐끔힐끔 쳐다보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냥 지나쳐 가기만 했다. 그냥 그대로 앉아 돌이 되거나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때 손이 내밀어졌다.
하얀 손이었고, 펄이 들어간 연보랏빛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었다. 가는 손가락이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을 맵시 있게 쥐고 있었다.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서 맵시를 낸 손톱과 희고 가는 손가락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애였다. 하지만, 예뻤다. 눈물로 어리어리한 눈에도 가늘고 긴 몸매와 윤기 나는 머리칼과 조각도로 새겨 놓은 듯 단정한 이목구비가 구슬같이 빛났다. 여자애는 생김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아까부터 울고 계셨죠? 일단 좀 닦으세요. 예쁜 얼굴인데 다 더러워졌네요.”
보통 때 같으면 낯모르는 사람이 내미는 손수건 같은 것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나처럼 평범한 여자애한테 예쁘다고 말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엄마만큼 매사 경계심에 가득 차 있지는 않았지만 나도 낯선 사람의 접근에는 소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경계심을 발동시킬 기운도 정신도 없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그 여자애에게 친구처럼 말을 놓고 지금 내가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몽땅 털어놓고 있었다.
“저런, 어떡해! 그럼 등록금이랑 뭐랑 다 잃어 버린 거야? 아니, 도둑맞은 거겠네. 돈은 몽땅 현금?”
“아니야, 수표야. 백만 원짜리 수표.”
여자애는 활짝 웃었다.
“뭐야, 그럼 걱정할 거 없잖아. 은행에 분실 신고를 하면 돼. 그러면 누가 훔쳐갔든 주웠든 쓰지는 못할 거 아냐.”
“하지만 수표 번호를 모르는걸.”
“너희 어머니는 아시지 않을까. 전화 걸어서 물어봐. 아니면 너희 어머니 통장 계좌 번호만 알아도 어떻게 될 텐데.”
순간 가슴이 막막해지며 겁이 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끈질기게 캐물을 것이다.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면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놓을 테니’ 당장 휴학하고 월세 보증금을 빼서 내려오라고 소리치겠지. 우리 집에는 한 학기에 육백만 원씩 두 번 마련할 여력도 없고, 휴학생을 돈 내 가며 서울에 머물게 할 여유도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여자애는 깜짝 놀라며 내 얼굴에 손수건을 갖다 댔다.
“미안, 내가 뭐 말 잘못했나 보지? 울지 마.”
“아냐……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엄마한텐……말 못 해…….”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말 중간 중간 울음이 섞여 나왔다. 여자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른들 때문에 그러는구나? 알았어. 넌 집에 전화 걸어서 운만 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아참, 그러고 보니 너 이름도 안 물어 봤다. 이름이 뭐야?”
“수나, 이수나.”
“수나, 이름 이쁘다. 난 한미연이야. 자, 이제 집에 전화 걸어 봐. 미연이 언니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테니.”
머리가 멍했지만 미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머리가 멍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미연이 나서서 알아서 해 준다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엄마는 쉴 새도 없이 퍼부어 댔다.
“왜 전화도 없어? 도착할 시간이 지나도 훨씬 지났구마는 왜 지금 전화하는 거여? 큰돈 들고 간 기집애가 전화도 안 하니 누구한테 잡혀 갔나 돈을 뺏겼나, 집에서 온갖 잡생각만 다 하고 있었잖여?”
나는 우물우물 되도 않는 변명을 하고 재빨리 미연이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미연이는 전화기 너머의 엄마에게 놀랄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수나 학교 친구 미연인데요. 달리 전화 드린 게 아니라, 오늘 학교에서 등록금 입금할 때 전산 사고가 터졌어요. 그래서 수표로 입금하는 학생들에게는 수표 계좌번호를 같이 제출하라네요. 네, 어머니 통장 계좌 번호요. 그래서 오늘 입금을 못했다고 수나가 걱정하고 있어서요. 네, 네. 아이, 물론 귀찮죠. 저도 수표로 내야 하는 걸요. 하지만 학교에서 그러라는데 어떡해요. 네, 수나 다시 바꿔드릴게요. 네, 어머니도 건강하세요.”
나는 꿈속의 광경을 지켜보는 듯이 내 전화기를 들고 있는 미연이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전화기를 다시 받아들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확실히 한풀 누그러져 있었다.
“니 친구냐? 애가 싹싹허네. 니가 엄마한테 좀 그래 보면 얼마나 좋아. 이거는 기집애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우물거리기만 하고. 자, 번호 부른다이. 받아 적어라.”
계좌 번호를 받아 적고 은행에 분실 신고를 하고, 이 모든 일이 꿈속이나 구름 속처럼 흐릿하게 진행되었다. 미연이 모든 것을 척척 처리하는 동안 나는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미연이 전화기를 도로 건네주며 말했다.
“됐어. 이제 분실 신고는 됐으니까 누가 마음대로 쓰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이 돈을 지금 당장 찾지는 못하고 누가 신고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데, 어쩌니? 등록금을 당장 내지는 못하겠는 걸?”
“휴학해야지 뭐.”
나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하게? 당장 아르바이트 자리는 있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집세와 생활비를 충당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통장에는 달랑 사만 원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는 어떻게 해도 일 주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잡고, 방값은 한 달 연체하고, 최대한 아껴 가며 살면 두 달쯤 후에는 방값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월 칠팔십만 원은 받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여야 했다. 나 같은 삼류 대학 재학생이 과외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편의점에서 시간 당 삼천오백 원을 받으며 열두 시간씩 한 학기 꼬박 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리도 쉬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앞길은 암담했다. 뒷골이 지끈 당기는 느낌에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문득 눈이 부셨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미연이 흰 꽃처럼 손을 벌려 뻗으며 활짝 웃고 있었다.
“걱정 많이 되겠지만, 잠깐 다 잊어 버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집에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나도 자취생이거든. 어때?”
어느 전생에 쌓은 인연일까. 인연치고는 참으로 이상한 인연.
수표를 잃어 버리고 한 달 후, 나는 미연과 함께 책상에 앉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전화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난 수표 신고는 아직 어디에서도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미연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게다가 미연은 비싼 방세를 내면서 월세 보증금을 묶어 놓을 필요 있느냐고, 조금이라도 이자를 받도록 보증금은 CMA에 맡겨 놓고 내 방세는 안 내도 좋으니 둘이 함께 살자고 적극 주장했다. 나는 CMA라는 말부터도 미연이에게 처음 들었지만,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은행보다 이자 예금이 높다고 했다. 어차피 휴학은 해야 하고 당장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나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이렇게 벌어진 일만 놓고 보면 미연은 하늘에서 떨어진 은인이고 귀인이었다. 그러나 얄궂었다. 모든 것이 얄궂었다.
우선 미연이 소개시켜 준 아르바이트 자리부터가 그랬다. 지방 소도시의 중산층 딸로 자라난 나는 아르바이트라 하면 편의점, 백화점, 과외, 카페 서빙, 옷가게 알바 같은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더랬다. 그러나 미연이 나를 끌고 들어온 세계는 내가 몸담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이상한 세계였다.
“괜찮아. 이 업체 사장님이 내 이거거든. 내 말이면 웬만한 거 다 들어줘. 더구나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사람 하나 더 쓰는 일인데 뭐.”
처음, 한 달에 이백만 원을 준다는 말에 깜짝 놀란 내게 미연이 눈을 찡긋하며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미연의 손에 이끌려 만난 사장님 겸 미연의 남자친구는 한숨이 나올 만한 미남이었다. 나이는 스물 일고여덟 정도일까? 대충 보기에도 키는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고, 짙은 눈썹과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호남형이었다. 내가 신세지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쭈뼛쭈뼛 건네자 사장은 활짝 웃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죄송하기는. 미연이가 친구라고 데려오는 거 네가 처음이야. 까탈스러운 우리 공주님이 드물게 마음에 드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정도야 못 해 주려고. 걱정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아무리 공주님 친구분이라지만 농땡이 치면 월급은 안 줄 테니까.”
그러고 나서 내가 하게 된 일은 한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거는 남자들에게 코맹맹이 소리로 이야기를 해 주고, 야한 농담을 거는 남자들에게는 웃겨 죽겠다는 듯이 맞장구를 쳐 주고, 만나자는 남자들과 전화할 때는 끝까지 꼬리를 빼며 시간을 질질 끌다가 약속을 하고 미연에게 약속 장소와 시간을 넘겼다. 미연과 내가 한 조였다. 내가 채팅에서 쓰는 아이디는 ‘여우미녀’와 ‘이쁜앨리스’, 그 외에도 서너 개가 더 있었다. 전화에서 나이를 말할 때는 열여덟에서 스물 둘 사이로 이야기했다. 첫날 첫 전화를 받을 때는 말문도 못 떼고 얼굴이 붉어지는 바람에 미연이 직접 나를 사무실 옆방으로 데려가 특훈을 했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네가 야한 말을 하면서 남자들을 흥분시켜 줄 필요는 하나도 없어. 야한 말은 남자들이 다 할 거야. 자기들 머릿속에 시나리오가 다 들어 있거든. 너는 열심히 들어주고, 야한 농담이나 당황스러운 말을 들으면 웃으면서 ‘오빠 멋져,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해?’ 하고 말하고, 하여간 그때그때 남자들이 잘났다고 느끼게 해 주면 돼. 전화 너머의 남자들이 네가 이쁜지 안 이쁜지 어떻게 알겠니. 남자들은 네 얼굴이 아니라 여자들이 사근거리는 기분을 느끼려고 전화를 하는 거야. 아니면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거든지. 가끔 부끄러운 척해 주는 것도 좋지만 너무 자주 그러면 안 돼. 그래도 정 부끄러우면 네가 지금 전화로 연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잠깐 다른 인물이 된 것뿐이라고.”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적응 속도는 눈부시게 빨랐다. 첫날은 부끄럽고 서툴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날은 내가 지금 연극을 잘 하고 있다는 흥분과 재미를 느꼈고, 넷째 날부터는 익숙해졌다.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사무실에 나갈 필요 없이 미연의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다.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현장 뛰기’라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 미연의 몫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고, 채팅을 하고, 약속을 잡고, 약속이 겹치지 않도록 미연의 스케줄을 짰다. 공들여 화장을 한 다음 명품 핸드백에 화장품과 지갑을 집어 넣고 옷과 구두를 골라 입고 나가는 미연을 보면 나까지 마음이 살짝 설레었다.
한편 나는 우리 사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장은 분명 미연의 애인이었다.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미연의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고,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자고 갔다. 미연의 자취방은 투룸이었다. 나는 한쪽 방에서 불을 끈 채 킥킥거리는 소리와 숨죽여 지르는 교성을, 한참 후에 쏟아져 내리는 샤워 물소리를 듣곤 했다. 사장은 내가 있는 곳에서도 예뻐 죽겠다는 눈길로 미연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어깨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도 사장은 미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남자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을 심상하게 들었고, 곱게 차려 입혀 현장에 내보냈다. 도대체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연애 한 번 안 해 본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미연은 카나리아 두 마리를 키웠다. 처음에는 의외였다. 미연이 살아 있는 것을 키우는 일을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그녀가 길거리에서 주워 와 키우는 셈이니, 키우고 보살피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18평짜리 투룸 공간이 새를 키우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았다. ‘새장 속의 새’라는 말도 있지만, 좁은 베란다에 커다란 새장이 공간을 차지하니 새들은 이중으로 갑갑하게 갇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새들은 미연이 베란다에 나갈 때마다 빠짐없이 날갯짓을 하며 울었고, 미연은 열심히 새에게 밥과 물을 주고 가끔 새장 청소를 해 주었다. 그것은 미연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술에 취한 채 한밤중에 들어와 침대 위에 쓰러지고, 아침 햇빛에 얼굴을 찡그리며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눈을 뜨는 쪽이 그녀에게는 어울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좋았다.
한번은 미연이 들어오기 전에 잤다가 밤중에 고함치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깬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장과 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술에 취해 귀퉁이가 일그러진 미연의 목소리만 울렸다.
“그래, 돈 보내잖아. 다달이 몇 백씩 보내잖아. 아빠 친구가 지금 거리에 나앉으면 나앉는 거지 나더러 어쩌라고? 그것 때문에 나한테 전화했어? 아빠는 내가 아빠 입맛대로 살면 좋겠지? 돈 잘 벌고, 공부 잘하고, 술 담배 안 하고 남자친구 따위는 하나도 안 사귀고, 꽃 한 송이 지면 슬퍼서 눈물 뚝뚝 흘리고, 아빠 친구가 딱한 사정이면 얼른 가져가시라고 서랍에서 일이백씩 덥썩 집어 주고? 그러다가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님한테 픽업돼서 돈 한 푼 안 내고 예물 하나 없이 아빠 손 잡고 버진 로드를 걸어가라고? 웃기시네. 아빠,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요즘엔 초등학교 사학년짜리 여자애도 그런 일은 안 믿어. 아빠가 그런 정신머리로 살다가 번번이 사기나 당하니까 엄마가 참다 참다 도망간 거잖아? 좀 영악해져 봐. 아빠는 속 편하게 착하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걸지 몰라도 나랑 현우는 숨이 막혀, 숨이. 그럴 바에 우리도 안 낳고, 결혼도 안 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나 중이 되면 좋았잖아? 왜 내 등골을 그렇게 파 먹어요? 내가 언제 낳아 달랬어? 차라리 당장 좀 죽어, 응? 죽으라고!”
나는 자기도 모르게 이불을 깨물고 숨을 죽였다. 부모자식 간에 이렇게 모가 난 말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뭔가 세게 내던지는 소리, 쿵쾅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가는 소리, 속을 뒤집는 소리와 물 내리는 소리가 차례로 들렸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문을 열고 나섰다.
미연은 거실 겸 부엌의 작은 식탁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아 있었다. 미연의 목소리에 놀라 깼는지 아까만 해도 조용하던 새들이 삐리릿거리며 울어댔다. 형광등 불빛에 비친 미연의 핏기 없는 얼굴과 서서히 올라가는 담배 연기가 둘 다 창백해 보였다.
“괜찮니?”
어색하게 운을 떼자 미연의 지친 눈길이 나를 향했다. 나는 흠칫 숨이 막혔다. 그때 미연의 눈길은 스물한 살짜리 여자애의 그것이 아니라 풍상에 시달리며 늙고 지친 고목의 껍질 같았다. 그 눈길에 대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가만히 있자 미연이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야. 저 녀석들 볼 때마다 부러워. 저 녀석들은 보살핌을 받아야만 살 수 있거든. 사람이 밥 주고 물 주지 않으면 금방 죽어 버려.”
빨갛게 불붙은 담배 끝이 베란다를 겨누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미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길은 나를 향하는 듯도, 내 뒤의 먼 허공을 향하는 듯도 싶었다.
“자립심? 인간의 존엄성? 웃기고 있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든데 무슨 자립심이고 무슨 존엄성. 사람도 다른 존재의 애완동물이었으면 훨씬 행복했을 거야.”
나와 미연 사이의 간격을 채우려는 듯 담배 연기가 천천히 흔들리며 올라와 허공에 퍼졌다. 베란다의 새들은 계속 삐요삐요 울어댔다. 미연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노래하듯 말했다.
“내가 새가 되면 네가 보살펴 줘. 밥도 주고, 물도 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 놓아 줘. 난 그걸로 만족할 거야.”
문득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연의 손에서 다 타 버린 담배를 빼앗고, 자기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미연은 순순히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말짱하고 한가할 때의 미연은 오히려 나를 이끌어 주는 자상한 선생님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일들, 여자애가 그런 것에 신경 쓰면 집안 망한다고 음으로 양으로 가르침 받아 온 일들을 미연은 태연하게 내게 가르쳤다.
“뭐? 너 탄생석도 몰라? 귀도 아직 안 뚫었다고? 이번 주 수요일은 휴일이지? 그때 명동 나가서 옷 구경이랑 보석 구경 좀 하자. 손톱도 한번 다듬고, 가방이랑 신발도 좀 보고. 너 모르니? 여자한테는 신발이 몇 켤레 있어도 모자란 거야. 그런데 너는 스니커즈 하나하고 펌프스 하나, 달랑 두 켤레 가지고 맨날 바꿔 신잖아. 발목도 가늘고 이쁜 애가. 발한테 미안한 줄 알아.”
“하지만 살 돈이 없는 걸…….”
“살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신경을 안 쓰는 거지. 너한테 어울리는 거 한두 개 정도는 내가 사 줄게. 그리고 걸을 때는 어깨랑 허리를 좀 펴고 걸어. 키도 별로 안 크면서 왜 그렇게 구부정하게 걸어?”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겸연쩍게 웃었다. 그럴 때의 미연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아서, 여자는 모름지기 조신하고 얌전하고 남의 눈에 안 띄어야 하고, 겉멋을 부릴 시간이 있으면 집안 일 요령 하나를 더 익히고 엄마를 도우라는 우리 집 분위기를 전하려야 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미연이 내게 가르쳐 주는 새로운 세계가 좋았고, 그 세계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공기가 청량하게만 느껴졌다. 얼마가 지난 후 미장원에 앉아 볼륨 파마를 하면서 나는 엄마가 지금의 나를 얼마나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아마 알아볼 수 없을 걸.
그랬다. 미연을 만나기 전인 두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파마를 하고 브리지를 넣은 머리카락 속에서 내 얼굴은 전보다 작아 보였고, 반듯이 편 어깨와 10센티미터 힐은 나를 훨씬 더 날씬해 보이게 했다. 나는 예전과는 달리 하늘하늘한 스커트와 날렵해 보이는 정장 바지를 즐겨 입었고, 화장술이 늘었다. 이제 길을 지나가거나 버스를 탈 때, 하다못해 편의점에 갈 때도 남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나를 바라보았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만 알고 청바지에 티셔츠밖에 입을 줄 모르던 촌뜨기 이수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 애가 하나도 그립지 않았다.
그 날은 이 주일에 한 번 미연과 내가 쉬는 날이었다. 쉬는 날마다 그렇듯이 나는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눈을 비비며 미연의 기척을 찾았다. 그러나 미연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 갔나 보지 뭐.’
그것도 달라진 점이었다. 처음에는 미연이 없으면 전전긍긍하며 설거지거리는 없나, 정리하거나 집안 청소할 건 없나 살펴보곤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미연과의 생활이 주는 여유를 느긋하게 맛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얹혀사는 처지라는 자각은 무디어지고, 미연이 뿜어내던 여신 같은 광채도 희미해졌다. 나는 미연의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여섯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그러나 전화를 건 것은 미연이가 아니라 우리 사장이었다.
“진호 오빠예요? 미연이 지금 없는데.”
“어, 알아. 오늘 일하는 애가 몸이 아프다고 쉬는 바람에 잠깐 대타 뛰러 갔어. 저녁때까지는 온다고 했으니까, 찬거리 좀 사 갖고 갈까 하고.”
“그래요. 오세요.”
사장인 진호 오빠가 미연이 집에서 밥을 먹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미연의 요리 솜씨는 형편없었으므로 가끔은 진호 오빠가 직접 요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안과 싱크대를 정리했다. 이삼십 분 지나자 진호 오빠가 이마트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진호 오빠는 들어오자마자 집 안을 둘러보고 말했다.
“확실히 깔끔하네. 미연이 혼자 살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래요?”
인사치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역시 기분이 좋았다. 진호 오빠는 자연스럽게 내게 이마트 봉지를 넘겨주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봉지를 받아들었다. 커다란 봉지 안에는 포장된 불고기와 유기농 채소 한 팩, 쌈장과 와인 두 병이 들어 있었다.
“어머, 와인이다! 하지만 불고기는 왜 사 왔어요? 그냥 고기를 사 오면 내가 해 줄 걸.”
“수나는 불고기도 할 줄 알아? 대단한데. 미연이는 불고기를 하라는 얘기만 들어도 머리 아프다고 징징댈 텐데.”
“여자가 다 미연이 같은 줄 알아요? 요리 잘하는 여자도 많다고요.”
우리는 공모하듯 소리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의 여운을 즐기며 내가 밥을 안치고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늘어 놓고 있을 때, 진호 오빠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미연이니? 나 너희 집에 와 있는데…….”
날카로운 미연의 목소리가 핸드폰 밖으로 새어나왔다.
“오빠? 나도 들어가는 길이야. 오늘 졸라 재수 없어. 뭐가 일이 안 돼. 첫 번째 약속 장소에 갔더니 웬 양아치 새끼가 같은 값에 일대 이로 하자지 뭐야. 그래서 관두라 그러고 돌아섰더니 쫓아오데? 응, 아냐. 중희 오빠가 잘 처리했을 거야. 마침 가는 길이 같았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어. 두 번째 장소에 갔더니 글쎄 남자가 나오질 않아. 내 참, 이런 장사에서도 바람맞는 일이 다 있어.”
“고생했네. 지금 어디야? 내 데리러 갈까?”
“아냐, 지금 잠실역이니까 금방 갈 거야. 배고프니까 수나랑 저녁 준비나 하고 기다려. 끊을게.”
진호 오빠는 전화를 끊으며 내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좀 늦는다는데, 어떡할까? 우리끼리 먼저 와인이라도 한 잔 할까?”
“그럴까요?”
나는 애교 섞인 눈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때 나는 그날 일이 그렇게 될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미리 구워 놓은 불고기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와인 잔을 부딪쳤다.
와인 한 병을 천천히 다 비울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지만 미연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망설이다가 두 번째 병을 따 버렸다. 나는 조금씩 말이 많아졌다. 시시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진호 오빠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고, 가끔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어느 새 그는 이마트 봉투를 건네줄 때처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모른 척했다. 내가 일부러 그를 꼬신 것은 아니니까, 모른 척하기만 하면 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는 중에 진호 오빠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너 참 예뻐졌다. 키도 더 크고 날씬해진 것 같아.”
“에이, 그럴 리가요. 나 원래 이랬어요.”
“원래 이랬어? 하긴 수나가 원래 이뻤지.”
그렇게 시시덕거리다가 어느 순간 진호 오빠의 입술이 내 이마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쩐지 모든 일이 이렇게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미연의 인도에 따라 그녀의 세계로 한발 한발 들어섰다. 미연은 내게 아름다움과 자신감과 여유를 주었고, 이제 그녀의 존재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내밀한 부분―잘생기고 부유한 남자친구와 성(性)의 세계도 알려줄 참이었다. 내 잘못이 아냐, 나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뇌었다. 그 사이 이마에서 귓불을 따라 목덜미까지 온 입술이 허겁지겁 내 입술을 찾고 있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혀를 반쯤 내밀었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입술이 그 혀를 덮었고, 그와 함께 단단한 손가락이 내 가슴과 허리를 움켜잡았다. 나는 헉 하고 와인이 묻은 신음을 토해냈다. 가슴을 움켜쥐던 손가락이 남방셔츠 앞섶을 헤집고 들어와 유두로 향하자 다리 사이가 저절로 축축해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문이 열렸다는 말이다. 문간에서 미연의 동그란 눈이 우리 한 쌍의 비열한 간부간부(姦夫姦婦)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되뇌던 뻔뻔함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당황하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온 세상이 슬로모션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은 순간, 미연은 들고 있던 까만 비닐봉지에서 작은 버드와이저 병을 꺼내 우리 쪽으로 던졌다. 병은 우리를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식탁에 맞고 부서져 조각조각 튀었다. 배은망덕과 간통과 분노를 눈부시게 보여 주는 그 간명한 증거 앞에서 우리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새로 변했다.
2. 되돌아오는 것들
그렇게 많은 것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나의 한 학기에 버금가는 육백만 원이 사라지더니 점차 내가 알고 있던 이수나가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미연이 내 생활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새가 된 미연은 또록또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날아와 내 눈을 쪼려 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고, 진호 오빠가 반사적으로 미연을 낚아챘다. 미연은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지만 진호 오빠의 손은 미연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미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내 몫이었다.
“여기로 넣어 줘요, 여기로.”
나는 진호 오빠의 남은 한 손을 조심스레 잡고 베란다의 새장으로 이끌었다. 넓지도 않은 새장 안에 또 한 마리의 새가 들어오자 먼저 있던 새들은 기겁을 하고 퍼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새장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미연은 돌덩이가 된 것처럼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경멸 어린 눈으로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이후 나와 진호 오빠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출렁이는 구름다리 위에 함께 있던 한 쌍의 남녀는 사랑에 빠질 확률이 훨씬 더 높다고 한다. 그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이변을 함께 목격한 한 쌍의 공모자들은 그 날이 끝날 무렵 이미 침대로 함께 가고 있었다. 그것이 내 첫 경험이었다. 처음 진호 오빠가 내 몸 안으로 성기를 삽입했을 때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베란다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미연을 생각하면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진호 오빠를 더욱 자극했나 보다. 오빠는 혀와 손가락과 성기를 동시에 휘둘러 나를 공략하며 “이래도? 이래도?” 하고 속삭였다. 결국 나는 비명인지 희열인지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내질렀고, 그 순간 오빠는 내 몸 안에 사정했다.
언젠가 했던 약속대로 새가 된 미연은 내가 돌보았다. 오빠는 꺼림칙해하며 애완동물 가게에 팔아 버리라고 했지만, 차마 미연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인터넷의 애완조 카페에 가입해서 새 돌보는 법을 조금씩 공부했다. 처음에는 물을 갈아 주고 밥을 줄 때마다 내 손을 쪼거나 도망치려고 했지만, 내가 빈틈을 보이지 않자 미연도 체념한 듯 얌전해졌다. 대신 내 손에 닿지도 않으려 하고 한 마디도 울지 않았다. 새가 된 미연은 어떤 목소리로 울까, 가끔 궁금한 적이 있었지만 미연은 절대로 내 궁금증을 채워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미연의 세계를 조금씩 넘겨받았다. 나는 당연한 듯이 그녀의 집에 계속 살았고, 그녀가 입던 옷을 입었다. 놀랍게도 미연의 몸 치수는 나와 별로 차이 나지 않았다. 작아서 못 입을 만한 옷은 별로 없었다. 미연이 하던 일도 내 것이 되었다. 남자들을 만나 그들이 원하는 역할을 해 주고, 가끔 이차까지 가기도 했다. 거부감과 이질감은 한순간뿐이었다. 드물게 밝히거나 변태적인 남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이차까지 가기를 원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남자들이 바라는 것은 섹스 그 자체보다 예쁘고 한창 때인 값 비싸 보이는 여자애가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내 일은 한결 편해졌다. 진호 오빠는 내게 새로 들어온 여자애를 한 명 붙여 주었다. 그 여자애는 내가 하던 것처럼 남자들과 채팅을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내가 나갈 약속을 잡아 주었다. 착하고 싹싹한 애인 데다가 형편도 곤란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 애에게 같이 살자고 하지 않았다.
한번, 화장대 위에 놓아 두었던 미연의 핸드폰이 울린 적도 있었다.
“여보세요, 미연이니?”
지치고 슬픈 듯한, 돈이 필요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한순간 숨을 들이쉬었으나,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평온했다.
“아닌데요. 얼마 전에 전화번호 바뀌었거든요.”
“아……그렇습니까. 혹시, 번호 어디로 바뀌었는지는……모르시죠?”
“네, 몰라요.”
남자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고, 어쩔 줄 모르는 긴 침묵이 흘렀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하자 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때도 베란다의 미연은 울지 않았다. 다음날 진호 오빠가 미연의 핸드폰을 해지했다. 알고 보니 미연의 핸드폰은 오빠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십일 월 중순에 접어들 때쯤 새로운 생활은 완전히 익숙해졌다. 나는 매일 새들에게 밥과 물을 갈아 주고, 종종 명품 핸드백과 구두와 화장품과 새옷을 샀다. 진호 오빠와는 일 주일에 한 번쯤 만나서 같이 영화를 보거나 저녁을 먹고 섹스를 했다. 오빠는 늘 다정하고 점잖았지만 그 모습에 속아 주제넘게 굴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이제 웬만큼 영악해진 나는 눈치 채고 있었다. 나는 손님을 모시듯 깍듯하고 사근사근하게 오빠를 대했고, 오빠는 후한 선물과 낭만적인 저녁과 격렬한 섹스로 그에 보답해 주었다.
가끔 오빠는 함께 눕기 전에 약을 주기도 했다. 흰 알약일 때도 있고 캡슐약일 때도 있었다. 나는 무슨 약이냐고 묻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약을 먹으면 오빠가 더욱 다정해지고 세상이 찬란해지고 섹스가 더욱 뜨거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서너 번씩 절정에 올랐고,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잠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는 약간의 두통은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그날은 진호 오빠가 저녁 일찍 찾아왔다. 오후 네 시쯤? 다섯 시쯤? 십일 월 중반이 넘었는데도 아직 햇빛이 남아 있는 때였다.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약을 먹고 섹스를 한 뒤 잠들었다.
내가 밤에 왜 깨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약에 내성이 생긴 것일까?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머리가 무지근했다. 몇 번 더 눈을 감으며 다시 잠들려고 애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가만가만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거실의 시계는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지으며 식탁에 앉아 잡지책을 훌훌 넘기다가 한 잔 더 하고 자려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한때 내가 쓰던 작은 방은 이제 냉장고와 옷을 두는 곳으로 변했다. 선반 형 행거가 방 한 쪽 면을 온통 차지했고, 냉장고 옆에 있는 작은 벽걸이에는 진호 오빠가 입고 온 양복이 걸려 있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여닫다가 그만 오빠의 옷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떨어졌는지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며 수첩이며 명함 같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라 큰방 쪽에 귀를 기울였지만 깨어나는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아마 오빠도 약기운에 곤히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집어 하나하나 양복 주머니에 챙겨 넣던 내 손이 문득 멈칫했다. 반으로 접힌 하얀 편지 봉투가 어쩐지 낯익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살펴보았다. 봉투와 함께 접힌 여섯 장의 파란 수표를 보자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성은 이것이 내가 잃어 버린 그 돈일 리가 없다고 말했다. 만약 그 돈이라면 설명해야 할 연결고리가 너무 많다. 진호 오빠는 그 돈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미연은 그 사실을 알고 내게 접근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수표 신고하는 것을 도와주었을까? 상식적으로 이 수표가 그 수표일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수표라고 하더라도 오빠가 모르고 남에게 넘겨받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안 그러고서야 굳이 이 수표를 품에 품고 나를 만나러 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직관은 그것이 처음부터 진호 오빠의 짓이라고 말했다. 그가 나를 곤경에 빠뜨렸고, 미연이 나를 구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미연을 배신하고 오빠를 차지했다. 이렇게 치달아가는 상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왜? 라는 물음은 사람이 새가 되고 넉 달 전에 잃어 버린 돈이 한 달 전에 사귀게 된 애인의 품에서 발견되는 현실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아,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을까. 나는 망연히 생각했다. 안개 속에 단 하나 보이는 길을 따라오다 보니 어느덧 이런 이상한 나라에 들어 온 것이다. 이제 원래 떠나 온 출발점은 아스라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나는 두통과 수면 부족으로 안 돌아가는 머리를 움켜잡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 버렸다,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나는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딱 부러지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나냐? 넌 대체 왜 그리 전화를 안 하는겨? 무슨 딸내미가 엄마가 전화할 때까지 전화를 안 혀? 별일은 없는 거제이? 왜 말이 없어? 수나야, 수나야? 여보세요?”
내가 버려두고 온 세계의 닻과 같은 목소리가 귓전에서 우렁차게 울려댔다. 나는 전화기를 든 채 입술만 달싹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계속 내 이름을 불러댔지만 내 귀는 베란다로만 쏠렸다. 베란다에서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이질적인 소리가 났다.
삐요로로 삐요오-.
새가 무서운 기세로 울어대고 있었다. 밤의 장막을 몽땅 찢어 버릴 정도로 날카롭게, 비웃듯이, 새가 울어대고 있었다.《문장 웹진/2007년 10월호》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늦은 새해늦은 새해 주나영 우기 막바지인 3월 아침, 조식당에 안까지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원은 사다리에 올라 창에 붙은 검은 시트지를 문질렀다. 들뜬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눌렀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해서 창을 가려야 하나 싶었다. 어젯밤 체크인할 때 받은 안내문 상단에는 영어로 ‘침묵의 날(녜삐 데이)’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발리의 불빛과 소음을 줄이며, 투숙객의 호텔 외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건네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아주 조용하게 보내는 풍습이 있거든요.”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호텔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췄고, 손님들도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줄이는 듯했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시트지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래도 한쪽이 다시 들뜨자 시트지 한 장을 떼어 사다리 아래로 내려보냈다. 창의 절반쯤이 드러났고, 유리 바깥 면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케이지-프리 에그 화이트 오믈렛을 주문했다. 쉰을 넘긴 뒤부터 식단과 운동에 부쩍 엄격해졌다. 디종 머스터드 병을 열어 숟가락으로 접시 귀퉁이에 덜어 놓은 뒤, 오믈렛을 잘라 찍어 먹었다. 면도를 공들여 한 듯 턱끝이 말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혜리는 빵 바구니에서 올리브 치아바타를 집어 들더니 박혀 있는 올리브만 손끝으로 빼 먹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었다. 나는 냅킨 상자를 혜리 쪽으로 밀었다가 멈추었다. 혜리는 이미 옆에 놓인 냅킨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혜리는 남편과 전처 사이의 딸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혜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리다. 혜리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호주로 건너간 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혜리를 만났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 남편이 서재에서 혜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방에 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면 물병만 꺼내 돌아왔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먼저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통화를 마친 뒤 혜리의 학교생활과 새로 키우기 시작한 동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몇 장 넘겨본 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혜리는 빵에서 올리브를 하나 더 빼 입에 넣었다. 남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은 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미뤄 왔다. 결혼식은 석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흘 정도 쉬고 오자고 한 것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쯤인 발리에서 혜리를 만나자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서재에서 청첩장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구겨지지 않도록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혜리는 아보카도 스프레드를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한입 베어 물자 빵 껍질이 바스러져
- 주나영
-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장정호장정호 장희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기가 차고 맑은 곳. 다른 곳보다 해가 빨리 뜨고 지는.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희재에게서 그가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우듬지 너머로 뜨는 어슴푸레한 새벽 동이나 찹찹한 분위기,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임야를 떠올렸다.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허공 속의 한 점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어머니가 복수가 찬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분명히 그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느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른 아침부터 희재와 나는 서둘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입을 헹구고, 어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희재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양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창문으로 머리를 기댔다. 저기 뭐가 죽은 것 같아. 아니다, 다시 보니까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어. 희재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답했다. 한참 후 주위가 고요해진 것 같아 옆을 보니 희재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백반과 우동을 나누어 먹었다. 밥을 다 먹고도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휴게소 뒤편으로 펼쳐진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휴가철이 지나서인지 대체로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왜 그렇게 서둘렀냐고 묻자 희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희재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는 삼 년 전 아내가 간경화로 죽고 난 후 홀로 지내다 언제부턴가 야산에서 지내고 있었다. 양산에 있던 그가 어떻게 산천에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 살게 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미처 주변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냉장고에는 그가 먹다 남긴 반찬들이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희재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부터 기르던 식물들, 호야 나무, 산세비에리아, 스투키가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지가 가득한 집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희재와 희재의 가족이 살았던 집. 희재와 나는 명절이면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오곤 했다. 간간이 희재와 희재의 어머니, 내가 웃을 때면 그는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가 왜 그런 곳까지 가게 되었을까 하고 묻자 희재가 대답했다. 자신도 우연히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뿐 더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뭐든 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죽어버렸으면. 나는 희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본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말이 없고 등이 조금 굽은 왜소한 노인. 그는 묵묵히
- 장희원
-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내 마음이야내 마음이야 이갑수 퇴근하고 싶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신나는 음악을 듣는다. 눈을 감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린다. 졸업, 제대, 여행, 생일파티, 800만 원 복권 당첨, 첫 키스…… 아니 첫 키스는 빼자. 그리고 명상을 한다. 생각을 비우고 차분하게. 절대 조금이라도 우울해선 안 된다. 어제도 제시간에 퇴근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 회사가 정부의 근로자 지원프로그램 시범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지난달부터 퇴근하기 전에 우울증 지수를 체크 한다. 보건복지부가 대학 연구소와 산학협력으로 개발했다는 ‘뉴진’이라는 우울증 측정기는 헬스장의 인바디 측정기처럼 생겼다. 악력기처럼 생긴 손잡이를 잡고 발판 위에 올라서면 우울증 지수가 100분위로 표시되는데, 우울증 지수가 50이 넘는 사람은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한다. 어떤 원리로 우울증을 측정하는 건지는 모른다. 아무리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몸을 측정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몸을 통하지 않고는 마음을 알 방법이 없으니 둘 사이의 어떤 메커니즘을 알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시범 사업이 끝나고 일반에 공개가 되면 측정 원리도 밝혀질 테니 기다리면 곧 알게 될 일이다. - 80.00 오늘도 실패다.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첫날에는 51이었고, 그날 상담은 5분 만에 끝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신기한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 요즘 기분은 어때요? 강 박사의 첫 질문은 항상 똑같다. -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그냥 괜찮습니다. 처음 그 질문은 받았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 무감각한 것도 우울증세일 수 있어요. 일단 지켜봅시다. 강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지난 한 달간 나를 지켜본 결과는 부정적일 게 분명하다. 내가 상담을 받으며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수치가 올라가고 있으니까.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들을 부러워하며 상담실로 올라갔다. 내 앞에 대기자는 일곱 명, 네 명은 자주 보는 얼굴이고, 세 명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울증 지수가 높아서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다들 정말 우울해 보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상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로 강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이 지원프로그램은 경력형 일자리 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은퇴한 의사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으니까. 정부 입장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좋은 정책이었다. 강 박사도 대학병원에서 정년 퇴임한 정신과 전문의다. 강 박사는 슬램덩크에 나오는 안 감독님을 닮았다. KFC의 샌더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흰 양복 대신 흰 가운을 입고 있다는 것 빼면 정말 똑같았다. 강 박사를 보면 치킨이 먹고 싶었다. - 요즘 기분은 어때요? 자리에 앉자마자 강 박사가 모니터의 차트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전에 없이
- 이갑수
- 2026-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