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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 작성일 2008-01-31

 

윤재철

 

 

 능소화

 발을 사랑하기로 했다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마음



능소화




어둠 속에서 담배를 핀다 칠흑 같은 바다의 어둠과 침묵 그리고 소멸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오는 허무의 꽃 꿈인지도 모른다 꿈의 꿈인지도 모른다 몽환의 화려한 꽃불 꽃가지 언제부터인가 눈에서 귀에서 검은 입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 웃음의 끝 울음의 끝에서 환히 피어오르는 허무의 꽃 가슴 저 끝에 뿌리박은 듯 뻗어 올라 가슴 가득 뒤덮은 능소화 푸른 잎 속에 피어오르는 주황빛 저 꽃




발을 사랑하기로 했다




발길 닿는 대로 간다 할 때에도

늘 생각이 앞장서 갔다

너무나 오래 걸어 발이 부르터 터질 때도

발보다는 앞으로 남은 길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지나온 길이 흔적 없음에

발은 조용히 눈을 뜨고

늙은 슬라브 노예의 눈빛으로 나를 본다


그래, 안다

이제는 돌아서 늦기 전에

집을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발이

그 길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혼자 있을 때면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틈만 나면 구두를 벗고

두 발을 어루만지며

발과의 행복한 귀향을 꿈꾼다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어

왁자지껄한 잡답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마음




사랑만한 수고로움이 어디 있으랴

평생을 그리워만 하다

지쳐 끝날지도 모르는 일


마음속 하늘

치솟은 처마 끝

눈썹 같은 낮달 하나 걸어 두고

하냥 그대로 끝날지도 모르는 일


미련하다

수고롭구나

푸른 가지 둥그렇게 감아 올리며

불타는 저 향나무




시?낭송 : 윤재철

출전 : 윤재철 시집 『능소화』, 솔,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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