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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그에 관한 마지막 감상문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5-09-15
  • 조회수 1,416

나를 고전의 우물가에 빠트린 이 소설에 대해 감상문을 쓴 지 벌써 일 년도 훌쩍 넘었다. 가벼운 책의 무게에 속아, 가볍게 읽어 내리려 했던 책에서 맛본 강렬함은 지금까지도 이 감상문을 계속 수정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오늘, 이 감상문을 <동물농장>에 대한 마지막 찬가로 남기고자 한다.

일종의 <혁명>을 통해 악덕한 '존슨'을 몰아내고 스스로만의 세상을 건설해내는 동물들의 모습은 처음에는 위대하고 이상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역사 속 공산주의의 일생 과정과 마찬가지로, 동물농장에서도 초기의 순수하고 이상적인 지도자인 ‘스노우볼’ 대신 스탈린 같은 독재자, 나폴레옹이 등장하였다.

초기의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일하고 공평하게 나누자는 이념은 의미 없이 바람에 휘날린다. 지배층들은 "존슨이 다시 돌아오길 원하는가?", "우리는 옛날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같은 구호로 다른 동물들을 선동한다. 초기에 세운 원칙마저 다수 동물들의 무지함을 악용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수정한다.

존슨을 몰아내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 자들이 스스로 존슨화되어 가는 것이다. 집권 세력은 자기끼리만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며, 그를 위해 다른 동물들을 착취한다. 그러나 무지한 동물들은 그저 "예전보다는 나아", "존슨이 다시 온다니 끔찍해!" 라 자위하며 노동할 뿐이다.

점점 동물들의 사회는 끔찍한 사회로 변질되어 간다. 존슨이 있던 <메이저 농장> 시절보다도 더 끔찍하고 야만적으로.

오랜 연륜으로 결코 <혁명>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통찰했던,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 벤자민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글을 읽는다. 바로 최초에 그들의 <동물농장>을 설립했을 당시의 규율이 써져있던 그곳의 글이었다. 그곳엔 처음의 10계명 대신 단 하나의 계명만이 남아 있었다.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물들이 지도자 돼지 <나폴레옹>이 서서 다니며 그토록 증오했던 인간인 농장주들과 어울려 카드게임을 할 때의 서술 또한 섬뜩하다.

[창 밖에서 동물들은 돼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누가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가장 증오했던 대상을 닮아가는 타락한 정권의 말로는 이러했다.

나는 조지 오웰의 또 다른 작품인 1984를 읽었을 때와 같은 좌절감을 느꼈다. 순수한 이상가, 스노우볼이 모함으로 쫓겨나고 끊임없이 비난받고, 동물들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때도 알파벳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에 결국 "그런 적 없었어. 너가 잘못 기억한거야."라는 말에 반발도 못 하고 금방 수그러드는 모습, 페인트칠을 하는 스퀼러의 모습에도 아무도 규율을 조작한다는 점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성실하게 전체를 위해 봉사하던 <복서>가 결국 나폴레옹에 의해 폐마로 팔려가 도살당하는데도 아름다운 최후를 맞았다고 스퀼러가 미화하는 점 모두가 잔인하게 마음에 박혀왔다.

조지 오웰이 그의 한 에세이에서 밝혔듯, 결코 이 <동물농장>은 타락한 공산주의 체제에만 반영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모든 사회에 대한 경고이다. 되돌아본다. 나는 계몽되려 발버둥치지만 이미 나는 무지한 시민이었던 건 아닐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 하나의 이익, 또는 결코 나로 인해 사회가 변하지 않으리라 멋대로 지레짐작하고 모르는 척, 전지적 시점에서 관조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행동하는' 당나귀 벤자민이 되고 싶다.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사회의 부조리를 외면해 그것을 끊어버리지 못하게 나둔다면, 나는 같은 가해자가 아닐까. 그렇게 노력하면서 살고자 노력하고 싶다.

더불어 1984와 이런 역작을 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의 대상에만 국한되지 않는 날카로운 작품을 집필한 조지 오웰에게 다시 한 번 존경을 표하고 싶다. 나도 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런 시대를 초월해 우리의 사회 단면을 통찰하는 역작을 쓸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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