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석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작성자 neo
- 작성일 201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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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유명한 최규석 작가의 작품이라면 보통 <습지생태보고서>나 <공룡둘리의 슬픈 오마주>등을 뽑지만, 그에 못지 않게 뛰어난 구성력을 갖춘 작품이 바로 <지금은 없는 이야기>다.
이 책은 스무 편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가의 우화집이다. 대부분 우화라 하면 <이솝 우화>를 대표적인 예로 들지만, 최규석 작가 역시 이솝에 맞먹을 만한 주제의식과 충격적인 교훈을 가지고 있다. 그 중 마음에 드는 몇 편만을 골라 여기 소개해 보려 한다.
불행한 소년:
제목이 '불행한 소년'인 이 이야기는 청년에서 노년까지 모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다. 소년은 왕따를 당해 복수를 하려 하지만, 천사가 나타나 제지한 후 위로의 말을 해준다. 소년은 청년에서 노년까지 불행하지만, 그때마다 천사는 번번이 위로해줄 뿐 명쾌한 해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소년은 언제나 천사의 말만을 듣고 참았지만, 죽을 때가 되어서야 진실을 알고 천사에게서 빠져나온다. 모든 불행함은 천사에게서 나온 것임을, 분노를 참고 포기했기에 불행하게 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많은 천사들은 모두 천사가 아닌 악마를 뜻한다. 지구상의 수많은 악마들이, 이 이야기의 불행한 소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교묘한 속임수로 삶의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불행한 소년'이 되지 말라고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짧지만 강렬하고 매우 뚜렷한 교훈이 담겨 있는 우화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사람이 모든 일을 합니다. 이긴 사람은 놀러다니고요. 한 청년은 험한 일을 하다가 손을 다쳐서 주먹을 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마다 주먹밖에 내지 못하는 것이죠. 처음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계속 지게 됩니다. 억울한 청년은 마을 대표에게 항의하지만, 대표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마음대로 하게 해 주겠다고 하지요.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마치 끝난 것 같지 않은 결말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전하는 말은 이것이 전부지요. 가위바위보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시민들이 시위하자 정부는 엉뚱한 말과 함께 무시해버리는 것처럼, 이 우화는 그런 모순과 알레고리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원숭이 두 마리:
원숭이 빨강이와 검정이는 사이좋게 일하는 과수원의 일꾼이다. 그런데 빨강이가 검정이보다 일을 잘해서 주인이 음식을 더 주고, 검정이는 빨강이보다 못해서 음식을 적게 준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검정이는 자기 음식이 점점 줄어든다는 걸 알게 된다. 화가 난 검정이가 주인한테 항의하지만, 주인은 빨강이가 너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라고 한다. 검정이는 그 말을 듣고 빨강이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빨강이는 그럴수록 더 열심히 일한다. 빨강이는 일을 잘해서 많이 먹고, 열심히 일한다. 검정이는 일을 빨강이보다 못해서 못 먹고, 야위어 간다. 힘 빠진 검정이는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다. 빨강이는 검정이가 죽은 걸 보고 슬퍼한다. 그러자 주인이 검정이는 그냥 일을 못해서 죽은 것 뿐이라고 한다. 빨강이는 검정이가 없어져서 일이 더 많아졌지만 뿌듯해진다. 주인은 검정이한테 음식을 줄 필요가 없어져서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는 많이 먹고, 그렇지 않은 자는 못 먹는다. 그런데 검정이도 열심히 일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힘을 부여해서. 그러나 빨강이가 검정이보다 더욱 월등했다. 애초에 능력 자체가 달랐던 거다. 체력 자체가 다른 원숭이들이 노동을 했다. 그 노동을 시키는 자는 주인이다. 주인은 검정이에게 부당한 일자리를 주고 부당한 임금을 주었던 거다. 주인은 검정이가 사라져 임금을 줄 자가 한 명 사라졌으니 기뻐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원숭이지만, 사실은 노동착취를 당한 두 일꾼의 이야기인 거다. 글쓴이는 원숭이에 사람을 빗대어, 현대 사회의 노동자들을 상징하는 동물을 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냈다.
어떤 동물:
오래전 멸종된 '어떤 동물'이 어떻게 멸종되었는지를 아주 쉽고 간단하게 풀어나간 우화다. 참 무식한 짐승들의 무식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무리로 사는 '어떤 동물'들이 자기들과 약간의 차이점을 갖고 있는 '어떤 동물'에게 불만을 품고 신에게 없애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신은 그 '어떤 동물' 중 조금 다르게 생긴 한 마리를 죽이지만, 무리 중 조금씩 생김새가 차이가 있는 동물들이 점점 더 생겨나고, '어떤 동물' 무리는 끊없이 신에게 없애달라고 부탁한다. 신은 그들의 부탁을 거리낌 없이 들어주고, '어떤 동물'은 스스로의 파멸에 의해 점점 사라져 간다. 오래전에 멸종된 '어떤 동물'이야기다. 한 무리에서 속해 있지 않고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는 무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특성상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렇기 때문이다. 최근 감상한 미셸 오슬로 감독의 <세 발명가들>에서도 시대에 맞지 않는 발명품 제작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밖에도 수많은 영화, 만화, 책 등에서 무리 중에 특별하거나 다른 점이 있는 자는 죽임 당하거나 쫓겨난다. 이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던 사실이다. 작가는 고전적인 이야기를 새로운 형식으로 창조해 낸다. 어쩌면 수록 작품 중에서 가장 특이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흰 쥐:
개와 돼지:
여러분, 신이 개를 만들어 냈습니다! 신은 자신의 창조물이 마음에 들었지요. 그런데 개들이 말했어요. 자기들한테도 뭔가를 달라고 말이에요. 신은 개들에게 무언가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을 주고 싶었지 뭡니까. 그래서 돼지라는 동물을 제작해 냈어요. 개들은 돼지를 물어뜯으면서 즐겼지요. 근데 개가 감정이 있으니까 돼지도 감정이 있을 거 아닙니까? 돼지는 맨날 개한테 죽임 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신에게 호소합니다. 개를 좀 없애달라고요. 아까전의 '어떤 동물'이 생각나는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 입장이네요. 신은 개를 좋아해서 없애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대신 괜스레 미안하니까 망각이랑 웃음이라는 약물을 주지요. 돼지들은 그걸로 세상 만사 잊어버리고 웃었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윗사람에게 고통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 윗사람이 너무 싫어서 죽이고 싶지만, 불가능하다면? 그냥 신경끄고 무시하고 싶겠지요. 물론 고통은 여전히 찾아오겠지만요. 자꾸 피하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지만, 더욱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실은,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괴롭더라도 현실에 맞부딪쳐야 합니다. 돼지들도 한꺼번에 모여 개들을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작가가 말하고 있습니다.
냄비 속의 개구리:
개구리들이 냄비 속에 있다. 냄비에는 물이 가득 차 있고, 물은 불에 가열돼 점점 뜨거워진다. 예민한 개구리는(작가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예민한 개구리'라 칭하고 있다) 물이 뜨겁다고 다른 개구리들에게 말하지만, 다들 냄비 속이 유일한 안식처이자 세계라며 가만히 있을 뿐이다. 오히려 삶이 주는 고통의 선물이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개구리도 있다. 못 참은 예민한 개구리는 냄비 밖으로 뛰쳐 나와버린다. 이 작품은 앞서 나왔던 멍청한 동물, 즉 '어떤 동물'과 유사한 개구리가 등장하며 재미있는 구조를 이룬다. 냄비 속이 유일한 공간이라고 믿는 개구리들, 그리고 혼자 냄비가 뜨거울 뿐이라고 외치는 예민한 개구리. 여러 개구리들이 한 마리의 경건한 태도를 보고 그대로 따라한다. 여러 명이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사람도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바로 같은 모습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예민한 개구리 같은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의 괴이한 행동을 보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그것들대로 즐기라면서 말이다. 그들은 그런 예민한 개구리에게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 할 일에 바빠 정신이 없다.
아주 긴 뱀:
이번 우화의 등장인물은 흡사 <탈무드>에 나온 뱀처럼, 그 뱀보다는 훨씬 길지만 아주 비슷한 뱀이다. 뱀은 기원전부터 사악한 짐승을 뜻했지만 여기서는 그냥 멍청한 뱀 한 마리로 나온다. <탈무드>처럼 머리와 꼬리로 나뉜 채로 말이다. 머리와 꼬리로 나뉜다는 것은 제일 위, 상위권과 제일 아래 하위권을 뜻한다. 뱀이 아주 길다는 것은 그만큼 신분 자체가 멀다는 것이다. 그래서 꼬리는 항상 축축하고 습진 바닥에 웅크리고 있고, 머리는 언제나 높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차이가 많은 두 인격이 함께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머리의 자만심은 하늘을 찔러 꼬리가 아무리 간청해도 몸만 늘일 뿐이다. 꼬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놔둔 채로, 몸통만 쭉쭉 늘리다 그만 뚝 하고 끊어져 버린다. 아무리 갑(甲)자리에 위치한 자라도 아래 사람에게 공손히 대하지 않거나 신경도 쓰지 않으면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는 교훈이다. 그리고 머리는 몸통이 끊긴 것도 모르고 많은 과일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러면 꼬리는 어떻게 될까? 그 자리에서 고립돼 썩을 뿐이다.
새:
새 중의 왕 봉황이 어느 날 지구상의 모든 새들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습니다. 새들은 선물을 준다는 말에 즉시 모여들었지요. 그런데 봉황이 생각한 것보다 새 종류가 너무도 많았기에 한 마리씩 줄 수가 없었습니다. 선물이 부족해서 몇 마리는 빼먹어야 했죠. 그러자 이기적인 새 중 까마귀 한 마리가 말했답니다. 닭은 새가 아니기 때문에 선물을 받으면 안 된다고요. 닭은 자기가 새라고 우겼지만, 다들 닭은 날지 못한다고 무시한 채 선물을 받아갔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거대한 왕구렁이가 나타나 새알 백 개를 내놓으라고 하지 뭐에요. 새들은 구렁이의 협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알을 내놓지만 백 개를 채울 순 없었습니다. 까마귀가 다시 한 번 닭을 내세웠죠. 닭은 알도 많으면서 한 개도 안 내놨다고요. 그러자 닭은 자기가 새가 아니니 내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닭이 스스로 새라고 하는 걸 들었기 때문에 새들은 달걀을 전부 빼앗아 갔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기적인 닭과 이기적인 새들의 이야기이죠. 새들은 새대로, 닭은 닭대로 모두 이기적입니다. 말을 두 번이나 바꾼 닭의 멍청함도 자세히 나타나지요. 이 이야기는 두 상황에서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둘 다 물질적인 면에서이지만 하나는 남이 자신에게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남에게 줘야 하는 것이지요. 두 가지에서 새들은 두 가지 공격성과 방어성을 가지고 있지만 약한 방어를 한 닭은 패배하고 맙니다. 쪽수가 많은 새들이 승리한 것이지요. 말을 이랬다 저랬다 바꾸는 닭은 이기심에 눈이 멀어 알을 모두 빼앗기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닭을 이용한 새들은 알을 더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이 나 새들이 닭의 것을 훔쳐서 백 개를 채웠는지, 아니면 못 채웠는지 그건 알지 못했답니다.
팔 없는 원숭이:
내가 마지막으로 소개할 우화는 팔 없는 원숭이, 즉 장애원숭이(?)의 이야기다.
팔 없는 원숭이들은 팔이 없어 먹지고 못하고, 자지도 못했다. 나무에 올라가지 못해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었고, 천적이 쫓아와도 높이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중 팔 있는 원숭이들의 비난을 받고 분노한 원숭이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더니 마침내 나무를 탈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팔 없는 원숭이들에게도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팔이 없어도 나무에 오를 수 있는 원숭이는 행복했고 팔이 없어서 나무에 오를 수 없는 원숭이들은 불행했다. 팔 있는 원숭이들이 남에게 빌붙어 사는 놈들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작가는 장애인을 원숭이에 비유하고 있다. 사회에서 소외받는 장애인들, 그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환영받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늘 따돌림 당할 뿐이다. 참 답답하고 억울한 세상이다.
(이때까지 책 소개와 동시에 독후감을 중간 중간 넣어 쓴 글이었다. 어째 줄거리만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의 작가는 사실 소설가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닌 만화가이다. 이미 이 우화집을 내기 전 <울기엔 좀 애매한>, <대한민국 원주민>등 많은 만화책을 낸 바 있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삽화와 글이 섞여 있는 우화지만, 나는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항상 같은 형식의 만화만 접하다가 '최규석 우화'라는 신선한 소재를 만났기 때문이다. 만화가 아니라서 특이했고, 무척이나 눈이 끌렸다. 이 작품은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책이었다. 앞서 말했듯 '불행한 소년'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늙어 죽은 불행한 소년이자 노인의 이야기이고, '가위바위보'는 역시 사회에서 억울하게 무시 당한 청년의 이야기이다. 모두 사회, 정치, 인생사를 때로는 인간을 통해, 때로는 동물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100도씨> 등 사회적 만화들을 그린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과감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최신작 <송곳> 또한 흑백으로, 송곳처럼 날카롭게 공격하는 내용이다. 영화 <카트>와 같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의 대부분 작품들이 거의 다 만화지만, <지금은 없는 이야기>만은 만화 이상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 편마다 다양한 그림이 보여 읽는 이가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전부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다른 이야기라 진부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책은 최규석 작가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는 작품집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수준높은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박건웅 작가의 <삽질의 시대>처럼 장편보다 단편에 이끌릴 때가 많다. 짧지만 강렬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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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런 재미있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내가 거미에 물려서 스파이더맨이 된다면 악당을 물리치고 연인도 얻을 텐데! 내가 특별한 시약을 마셔서 헐크가 되면 영웅들과 손을 잡고 함께 지구를 지킬 텐데!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이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허구적 요소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영화 속 가상 이미지가 아무리 가시적이고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해도 허구는 허구일 뿐, 우리 사회에 영웅처럼 등장하는 실재는 아니다. 그러나 허황돼 보이는 상상을 실현 가능케 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어떨까? 가상이 현실로 탈바꿈하고, 인류가 초능력을 얻어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된다면? 이런 즐거운 상상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 바로 <영화 속의 바이오테크놀로지: 영화로 읽는 생명공학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이자 대학교수 박태현은, 점점 발전하고 상용화되는 바이오테크놀로지가 앞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우리를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 영화를 통해 상세히 설명한다. <영화 속의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읽으려면 우선 이 책이 주로 다루는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제시할 필자의 견해를 위해 잠깐 짚고 넘어가자.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영어로 biotechnology(BT), 우리말로 생명공학, 또는 생명공학기술(生命工學技術)이라 한다. 바이오테크놀로지는 하나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대체적으로 바이오테크놀로지는 레드(의학 공정), 그린(농업/환경 공정), 화이트바이오테크놀로지(산업생명공학기술)(위키백과 참조)로 나뉘는데 본서에 가장 근접한 바이오테크놀로지는 화이트바이오테크놀로지이다. ‘화이트바이오테크놀로지는 옥수수ㆍ콩ㆍ사탕수수ㆍ목재류 등 재생 가능한 식물 자원을 원료로 하여 화학제품 또는 바이오 연료 등의 물질을 생산하는 기술을 말(매경시사용어사전 참조)’하는데 이것이 왜 미래에 다가가는 기술인지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차근차근 풀어나가고자 한다. 바이오테크놀로지가 어떤 세계를 품고 있는지, 어떻게 해서 새로운 미래를 가져올 수 있는지 알아보자. 1부 ‘바이오 정보를 담고 있는 DNA’는 DNA의 변형, DNA의 결합 등 DNA와 바이오테크놀로지의 연관성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 몸속의 DNA가 바이오테크놀로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어떤 실험을 통해 효율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말한다. 1부는 다섯 편의 영화를 소개하지만, 여기서는 <스피시즈(Species, 1995)>를 예로 들어 이종교배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영화 <스피시즈> 이야기는 실험으로 인해 외계인과 인간의 이종교배로 탄생한 주인공이 2세를 잉태하려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이다. 영화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DNA와 이종교배가 아니지만, 저자는 동식물 잡종과 DNA의 결합을 이야기한다. 몇몇 독자는 모를 수도 있겠지만, 최근 들어 제주도에서 ‘천혜향’ ‘황금향’ 등 밀감류와 오렌지를 교배
- n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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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에게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란 어떤 것일까? 주변 사람들의 힐난과 강요가 모든 희망을 억누르는 세상일까? 아니면 모든 상황이 비참하고 견디기 힘들지만 절벽 끝에 한 줄기 희망이 있는 따뜻한 세상일까? 제인 볼링의 <광산 탈출>은 바로 후자를 말하는 청소년문학이다. 이 작품은 한없이 어둡지만 시간이 지나면 환해지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으며, 아무리 괴롭고 모진 노동을 한다 해도 결국 끝에는 새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인공 '레길레'는 불법 폐광에 강제로 이끌려온 18세 소년이다. 레길레는 짧으면 세 달, 길면 여섯 달 정도를 어둡고 갑갑한 광산 속에서만 보낸다. 사방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전등으로 돌만 캐야 하는 고통은 '자마자마(불법 폐광 채굴에 동원된 사람)'의 피치 못할 운명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레길레는 괴로움에도 적응돼 친구와 가족 모두를 잊어버리려 한다. 레길레는 갈수록 심해지는 구타와 핍박에도 묵묵히 일만 하다 어느 날 열세 살 소년 '타이바'를 만나게 된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는 타이바는 광산을 빠져나갈 생각에 희망을 품는다. 레길레는 그런 타이바를 철 들지 않았다며 한심하게 내려다보지만, 친구 '카테카니'의 설득으로 타이바를 도와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작품은 광산 안의 일과 광산 밖의 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광산 안의 일은 레길레와 어린아이들의 극대화된 답답함과 고통스러움을 표현한다. 책임자 '페이스맨'의 계속되는 구타, 총알의 타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돌에 깔려 심한 상처를 입게 되는 등 어둠 속에서의 외적 파괴와 내적 파괴를 뼈저리도록 생생하게 포착한다. 광산 밖의 일 역시 안의 일과 다를 게 없다. 살아 숨 쉬는 공기가 가득한 세상이라는 것만 빼면, 지배자 '파파'의 삿대질과 모욕은 광산 안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레길레에게 세상은 갇혀있어도 괴롭고, 나와 있어도 불편한 공간이다. 레길레는 이미 희망을 저버린지 오래지만, 타이바는 자마자마들을 구해주었다는 '스파이크'라는 인물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숨 막히는 광산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건 영웅 스파이크뿐이다. 레길레는 불행 속에서만 답을 찾으려 하지만 타이바는 가망 없는 환상 속에서 미래를 찾으려 한다. 레길레가 광산 밖으로 나와 만난 친구 카테카니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굳센 희망을 갖고 있다. 레길레는 계속되는 친구들의 설득에도 너무 오랫동안 세뇌되어 있던 탓에 잠시 주저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아직 한 줄기 빛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타이바를 돕는다. 이렇듯 작가는 희망은 혼자 있을 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쳤을 때 나타난다는 사실을 타이바와 친구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청소년들은 가족을 위해 광산에서 살아가는 레길레처럼 불편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이라 해도 희망을 잃지 않고 탈출을 포기하지 않는 타이바가 되어야 할
- neo
- 2016-12-31
아이돌 가수로 활동하는 '미마'는 돈과 성공을 위해 가수 생활을 접고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의 밝고 희망찬 모습에 비해 드라마에 잠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하고, 아이돌이었다는 이유로 감독과 제작진들은 미마를 비웃는다. 연기를 못하는 미마는 결국 누드모델의 길을 선택하고, 미마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스토커 '미마니아'는 미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사생활을 누출한다. 그 글을 본 미마는 자신이 직접 썼다는 착각에 빠져 아이돌 가수로 귀환하고 싶다는 마음과 더럽혀졌다는(돈을 벌기 위해 누드모델로서 몸을 판) 생각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중압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러던 도중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이 잇달아 살인되고 미마는 방 안에서 피 묻은 옷을 발견한다.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자괴감으로 파국에 치닫은 미마에게 아이돌 가수로 복귀하라고 협박하는 스토커 미마니아가 나타나고, 미마는 미마니아를 쓰러뜨린 채 간신히 도망치지만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는 자기 자신의 형체, 이중인격의 또 다른 '나'에게 끈질긴 강요를 당한다. 미마의 진정한 속마음에서는 아이돌 가수로 복귀하라는 강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때의 그리운 시절, 가수가 되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 자신의 진정한 면모, 에로 배우가 되기 전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미마는 지리멸렬한 망상과 현실을 혼동하며 벗어나지 못하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또 하나의 '나'를 확인하고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주인공 미마가 아닌 미마의 부 매니저 '루미'가 미마로 가장한 범인이었고, 미마에게 광적으로 집착했던 스토커 '미마니아'는 루미가 명령해서 죽이려는 시도를 했던 거였다고. 루미는 미마의 방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방을 똑같이 제작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자신이 미마의 옷을 입은 채 아이돌 가수라는 망상에 빠져 살았다고.(비록 루미의 자세한 과거사는 나타나지 않지만, 한때 잘 나갔던 가수가 퇴직해 다른 가수의 부 매니저로 활동한 사실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첫 번째 해석인데 스릴러 좀 봤다는 관객들은 당연히 이렇게 풀이할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말하고 있고, 이 결말이 더할 나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극명한 차이에서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실은 루미가 미끼였고 진정한 살인마는 미마였다는 것. 이것은 결말 부분에서 확실히 두드러지는데 '내가 진짜'라고 여기는 미마는 사실 진짜 미마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애당초 미마가 환상에 시달렸던 것도 미마 자신의 탓인데 그런 미마가 루미를 함정에 몰아넣어 정신병원에 수감시켰을 수도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진범은 미마라는 것. 그러나 너무 과도하게 앞서간 증명은 일단 배제시키고 반대로 증명해 보자. 루미가 미마의 탈을 뒤집어쓰고 미마를 정신병원에 가두었을
- neo
- 201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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