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Time After time

  • 작성자 Ariel
  • 작성일 2011-05-14
  • 조회수 394

Time After Time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까마득히 아련한 한(恨).

언제부터인가 눈을 떠 본 그곳은 짙푸른 어둠만이 자리 잡아, 그 어떤 빛깔도 움직임도 없는 고요한 혼돈이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것들이 과연 진실로 보여 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잊고 지냈던 것들에 대한 환상인지, 그 조차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바람도, 그렇다고 어느 이의 부드러운 손길도 아닌 것이 쉬지 않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아, 아. 나는 이것을 시간이라 부르겠다.

 비록, 본디 시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드러낸 살결에선 느껴지지 않다 하더니만 지금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잠시 그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이다. 현재로서 내겐 ‘안다는 것’의 혜택을 부여 받을 수 없기 때문이기에. 그와 함께 흩날리는 까만 머리카락처럼, 다만 나의 얕은 앎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만약 내가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시간만은 반드시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그 흐름의 감촉이 어느 덧 익숙해졌다. 그저 하릴 없이, 보이지도 않는 아득한 수평선만을 바라보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씩 뱉어내는 짧은 호흡을 느끼며,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고 짙은 어둠 속에서도 시야가 적응이 되었는지 점점 무언가가 뚜렷하게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쪽빛에서 코발트블루, 그리고 하늘색이 되더니만 투명한 초록이 되어,

아!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전에 시간이라고 부르던, 그 아름다웠던 흐름은 그저 바닷물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나 자신이 ‘사람’이라고 믿는 시점에서 물속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던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았다. 지금에 있어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형태이던, 여기엔 나 혼자라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까마득히 아련한 한(恨).

 

나는 인어(人魚)였던 것이었다.

 

***

 

 한(恨)이라기보다는 억원(抑冤)에 가까웠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온전히 정신을 차린 후. 어둠 속에서 해매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괴로워해야만 했다. 차라리 색감을 구분 할 수 없던 좀 전의 삶이 그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무지의 평온함을 간절히 바라고 바라며. 어느 순간 들이닥친 묘연한 감정이 뒤섞기며 나는 억울함에 목이 메어 감히 우는 소리 조차 낼 수 없었다.

 무엇이 잘 못 된 것일까, 무엇이 잘 못 된 것일까.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수 없이 같은 질문만을 되풀이 해 보아도 나는 결코 그 해답에 도달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내가 기억하는 건, 한 때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기분. 단지 그것 뿐.

 감히, 한 때 사람이었던 하찮은 만물 따위가 바다에서의 생을 얻었기에 미처 부여 받지 못한 호흡의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얻은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전에 어떤 삶을 살았었을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떠한 생을 보내었기에 이리도 안타까워하며 눈물이 나는 걸까. 그래, 잊어버리는 것이 곧 나를 위한 방법이었다면 어째서 정작 괴로움만은 고스란히 남아두었단 말인가. 이것은 과거에 사람이었던, 그리고 현시의 인어로서의 나를 있게 한 창조주로부터의 형벌. 정말 그럴지도 몰라. 낙원에서 추방되어 차갑고 차가운 바다 한 가운데에 나 홀로 살아가게 하신 것을 보면. 기억나지도 않는 일에 슬퍼하는 날 위로하는 건, 주위를 맴돌며 방황하는 상어 무리들뿐이었다.

- 굳이 한 가지 좋은 점을 집어내보자면, 더 이상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돼. 내가 흘린 눈물은 시간이라는 급류에 흘러 사라져버렸으니까.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한다. 겨울날의 살을 에는 듯 한 바람처럼 머리끝까지 차오른 한류(寒流)는 내겐 너무 차가웠다.

 

 깊은 심연.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깊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도 태양 빛줄기는 파고든다. 다만 그 빛은 너무 가냘파 지나가던 초롱어귀의 불빛인지 아니면 드디어 미쳐버린 징조인지 혼동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틀릴지 모르지만 내가 햇볕이라고 믿고 있는 실낱같은 빛으로 보아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지난 듯 한 어느 날이었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언제나 아름다운, 바다를 떠나가지 않는 달처럼. 배회하던 상어들이 묘하게 들떠 있음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몸을 움직여 보였다. 그 때에 내 두 눈에 보이는 건 하늘의 유성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태양, 아니 핏빛으로 불타는 선박.

 그들을 구해야 한다....... 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점점 내가 있는 곳보다도 더 깜깜한 심연으로 사라져가는 그들을 보며. 어떤 이들은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호의 주름처럼 일그러져갔다. 바다빛깔 만큼이나 파랗게, 파랗게 질려가며.

 꽤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해파리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는 젊은 여인들도 전혀 가망 없는 노인들도 있었고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을 겪고 있는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도 그 중에 있었다. 하지만 가장 신기한 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이 또한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아, 과연 내가 느끼는 것들이 너의 살고자 하는 몸부림과 비교를 한다면, 누가 더 가여운 걸까.

 그들에게서의 나란 존재처럼 그들 또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싸구려와도 같은 동정심으로 그들을 건져 올려내고 싶지는 않았다. 반은 물고기인 몸인지라, 한 번도 헤엄 쳐 본 적은 없었으나 마음만 먹는다면 쉽겠지.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가장 미천한 일이 아닐까. 생명이 꺼져가는 아픔은 고작 영원일 것 같은 2, 3분이겠지만 생명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고통은 그것보다 더할 테니까.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지금도 느끼고 있는 걸. 앞으로도 영원토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와 가장 가까운, 지느러미의 곡선이 아름답던 그 아이들을 불러내어 저 가련한 촛불들을 빨리 꺼뜨려주기 위한 바람이 되는 것뿐이다.

 

불꽃놀이처럼 눈앞에서 터뜨려진 빨간 먹물은 바닷물보다도 더한 비린내가 났다.

 

커다란 암초 위에 앉아 또다시 구분조차 되지 않는 심연을 바라보면, 꽤나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전에도 현재도 지켜보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어떤 것도 없었으니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 곳을 스쳐지나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만큼의 수는 아니었지만 내 곁의 아이들이 충분히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하늘에선 맛나가 떨어졌다. 나는 그들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 낼 수 있었다. 아마도 다른 이들에게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가설. 아무도 나를 거들더라도 보는 사람은 없었고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했었다면 구태여 돌아섰겠냐만. 아니, 어쩌면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허덕이는데 과연 나 따위가 눈에 들어올까. 그러니 인어라는 존재를 전설로 치부해 버리고 메너티나 듀공 따위로 착각했다고 착각하니까.

 

 시간이란 수압에 짓눌려 무료하고 공허해진다.

 

***

 

 나는 지금도 그를 기다린다.

무료하고 공허했던 예전의 시간이 나를 감싸 안아 놓아 주지 않아도. 과거에 낙원에서 추방당한 인류가 너무나도 변해버린, 거칠어진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잠시 뿐이라지만 ‘행복했었다.’라는 추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기다릴 수 있었다.

내게 있어서 그와의 추억이라는 건, 산호 숲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나비고기에 불과했지만 그 빛은 진주만큼이나 반짝거렸으니까.

 오늘도 그가 가르쳐준, 오래된 선율을 입에 담아본다.

 

당신이 길을 잃어버려도,

당신이 나를 찾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를 처음 만나게 된 날은 딱 그런 때였다. 매 시간 분, 매 초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아주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얼쩡거리는 아이들을 안아주기도 더 이상 손이 헐어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가 나타났다.

 타다 남은 잿더미 같은 지느러미를 끌어안고 잠시 눈을 붙여 잠을 청하고 있던 참이었다. 무언가가 나의 얼굴을 툭툭 쳤다. 지나가는 해초려니.......치고는 딱딱했다. 떠다니는 부유물인가. 녹아들지 않은 산소의 비명소리가 요란해지고 더 이상 무시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가 쿡쿡쿡 내 볼을 찌르기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손으로 그것을 탁, 쳐내었다.

“·······?”

 나는 갑작스러운 낯선 생물의 등장에 소리를 지르지 않도록 두 손으로 입을 막아야만 했다.

 그는 내 존재에 대해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내가 정말로 보이기나 하는 건지.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였다. 얼굴이라 봤자 잠수복과 마스크, 산소통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뭐라는 거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으니까 이거나 빼고 제대로 말해.”

나는 그의 입에 물린 재갈 비슷한 것을 빼내었다.......

 아.

 허둥지둥 황급히 수면위로 올라가는 그를 쫓아갔다.

“이거, 이거 혹시나 했지만 아무리 인어라고 해도 이건 살인미수야.”

 여기서 살게 된 후 처음으로 맡아보는 지상의 공기였다. 차가운 산소가 혀끝을 지나 기도로, 온 폐에 상쾌함이 퍼져나갔다. 그 동안 죽어있었던 폐 세포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바닷물의 움직임이 아닌 몸이 기억하는 진짜 바람이 불어왔고 나를 감싸 안는 햇볕도 사랑스러웠다. 따뜻해.

“저기, 초면에 넌 뭐야.......라고 물으면 실례겠지?”

 누군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였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게 펼쳐진 광활한 바다 위엔 흰 보트 하나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태양보다도 밝았던 사람. 작은 보트 위에서 조금 전 그 다이버처럼 보였던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저기. 그거 빼내어서 미안해.” 나는 차마 눈을 못 마주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이 아무 생각 없었어.”

“괜찮아, 난 이래 뵈도 착한 인간이거든 뭣하면 연구실로 넘기면 되지.”

“.......!”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판단할 만큼 사람들을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다른 이가 만났어도 나와 같이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는 특별히 내가 이 넓은 바다에서 혼자 심심할까봐 곁에 머물러 주기로 했다. 연료도 충분하고-사실은 보트가 고장 났던 거였지만- 인간의 넓은 아량으로 함께 있어 주겠다고 했다. 딱히 부탁한 적도 없는데. 혼자 있어도 별 상관은 없는데. 제멋대로인데다가 이상한 질문도 막 퍼붓고, 한 번은 나를 속여 번쩍 보트 위로 올려다 놓기도 했다. 즐거웠다. 마치 영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래, 영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안타깝게도 난 바보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그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그가 내 곁에 있어서 행복했지만 즐거웠지만 그랬던 것만큼 두려웠다. 아니까, 두려워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헤어질 것을 알고도 하는 사랑은 얼마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자신에 대한 배신인가. 언젠가 상처 받을 것을 알면서도 하는 사랑은.

 나는 과연 이 사람이 떠나도 괜찮을 자신이 있을까. 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의 가녀린 폐는 차가운 바닷물만을 들이키고도 견뎌낼 수 있을까. 나를 구성하는 묘연한 감정, 불안과 아픔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고통 없는 괴로움. 다만 ‘그’라는 얇은 천으로 덮어 놓았을 뿐이었다.

 그가 나를 부른다.

그는 따로 이름이 없던 나를 ‘에리얼’이라고 부르곤 했는데-그러면서 자기는 왕자님이라고 부르랬다. - 아는 동화 속의 인어라나 뭐라나.

 에리얼.

소리 없이 그 이름을 불러본다. 혀가 부드럽게 굴러간다. 사랑만 받고 자랐을 것 같은, 귀여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중엔 사람이 되어 사랑하는 연인과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그 인어.

“에리얼,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억장이 무너진다. 이제는 나의 것이 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나의 눈으로 너를 바라보며, 나의 코로 당신의 채취를 맡으며, 그를 느끼는 나의 모든 것들아, 언젠가 사라질 한 여름 밤의 꿈과도 같은 환상을 기억해 두어라.

 결국엔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거지. 여기는 바다 속이 아니기에.

나는 아직도 부르고 있다. 넓고 시릴 듯이 파랗지만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서. 나의 노랫소리는 어느 덧 해류를 타고 사라져버리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도 부르고 있다.

 

내가 기다릴게요.

 

 

 언젠가 그가 가르쳐주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면서. 어렵게, 어렵게 가사와 음을 터득한 그 시점부터 나는 매우 성가시게 되었다. 매일 밤, 함께 별을 바라보며 불러 달라 졸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게 투정부릴 때 마다 나는 퉁명스럽게

“라디오로 틀어 들으면 되잖아.” 라고 하면

“나는 네 목소리로 듣는 게 더 좋은 걸.” 그 한 마디에 못 이긴 척 불러준다.

 

침대 위에 누워 시계 소리를 들으며 당신을 생각해요

끝없이 이어지는 고민들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죠.

과거의 그 때, 따뜻한 밤을 뒤로 두고 온 채.

소중한 기억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인어라면서 생각보다 노래 못 부르네.”

 아마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를 밀어 바다에 빠뜨렸을 것이다. 거짓말. 내 목소리를 좋아하면서. 보트 위에서 팔짱 끼고 토라진 나를 보며 그가 얼마나 웃었던지. 한참을 혼자 웃은 끝에 손을 뻗어 나를 잡아 당겼다.

 까만 장막을 드리운 밤하늘 아래에서 보름달만이 우리를 비춰줄 때, 그의 따뜻한 온기로 그 때만큼은 바닷물도 차갑지 않았다. 그리고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을 하며 내게 부드럽게 입을 맞춘 그 사람.

“우리 헤어지자.”

그 사람이 내게 이별을 고했다.

“보트를.......고쳤나봐.”

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당신의 노래와 함께 여기서.”

그리고 그는 다음날 떠나가 버렸다. 괜찮았다.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이 목소리가 쉬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나는 부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 노래가 그가 있는 저 머나먼 육지까지 닿진 않겠지만 간절한 염원을 실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있도록. 일 년, 이 년, 사 년, 십 년이 지났어도 그가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는 것 뿐 일거야. 시간이 흘러 그의 모습이 조금 변했다 하더라도 나는 괜찮은데.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나와의 사랑이 변하지만 않았다면. 나를 찾으러 오는 도중 행여 길이라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나는 그가 가르쳐주었던 노래를 지금도 부르고 있다.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졌다.

 그리고 수면 위에서 춤추는 빨간 불꽃.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생활. 나도 늘 그랬듯 그들 하나하나를 지켜본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어 사라질 때까지. 운이 좋은 사람들. 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다른 이들보다, 나보다도 서둘러 낙원으로 떠나는 것인가.

 늘 그랬듯이 지켜보았다. 고통에 괴로워 숨이 멎어 버릴 때 까지. 어느 한 사람을 지켜보았다. 조금 나이가 들었는지 햇볕처럼 빛났던 금발도 이제 눈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당신이 쓰러질 때에,

내가 구해줄게요.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If you FALL

I'll catch you

I will be waiting

Time after time

 

 그를 지켜보았다. 저 심연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서 바라보았다. 저 수면 위에선 화염이 불타오르는데도 그날따라 바닷물이 너무 차가웠다.

 이제 그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암초로 돌아가 노래를 불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음 날,

오늘도 나는 그를 기다린다.

Ariel
Ariel

추천 콘텐츠

성화(腥火)

성화(腥火)          그 때에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내가 그 길을 지나가지 말았어야 했거나, 혹은 그가 그 자리에 없어야 했던 것이 옳았다. 로마가 사랑하는 불의 여신, 베스타를 추앙하기 위한 축제가 한참이었던 어느 꿈과도 같은 날 밤에, 수많은 인파 속에서 왜 하필 우리는 서로와 마주쳤어야만 했었는가? 가느다랗게 떨리는 두 손에서 그의 맥박 소리가 고동친다. 대리석 조각을 깎아내린 듯이 하얗고 그리고 단단했다.   ****    나는 행복해 하곤 했다. 나를 감시하던 이들 위로 까만 장막이 드리워질 때마다, 그의 쇄골에 얼굴을 묻고는 언제나 나만의 것이었던 그의 온기를 느낀다. 규칙적으로 뛰는 그 사람의 심장 소리. 따뜻한 살결에서 익숙한 향이 물씬 풍겨졌고 영원할 것만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가 곁에 있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존재만으로도 내겐 위로가 되는 걸.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그리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기적일 나의 사랑.  아련히 비치지는 햇살과 종달새의 울음소리로 우리들의 새벽은 시작되었다. 이른 시각, 잠에서 깨어날 때 마다 나는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기에. 허락되지 않은 선을 넘었다는 것에 대해, 이제는 더러워져 용서 받을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내게는 보여. 우리 사랑의 결말이.” 사실 알고 있었어. 조그맣게 흐느끼는 내게 괜찮다고 속삭여 주던 당신도. 당신도 사실은 울고 있었다는 걸.   ****    그 따뜻한 목에서 고동소리가 느껴진다.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아귀. 거기에 조금이라도 힘을 줬다간 그가 아니라 내가 베어질 것만 같았다. 이젠, 돌아갈 수 없어. 그렇게 난, 반듯하게 누워있는 그의 위에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움직임도, 말도 없었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걸 예상했었다는 듯이. 한결같은 그의 눈에서는 어떠한 원망도, 체념도 전해지지가 않았다. 사랑해  입을 열어 소리를 뱉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그가 손을 뻗어 나의 뺨을 어른다. 이마에서부터 코끝, 입술까지 내려와 다시 한 번 얼굴을 감싸 안아주었다. 들리지도 않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눈물이 흘러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를 조여 가며. 달콤하면서도 끝내 뿌리칠 수 없는 죄악의 희열을. 저린 마음 한 구석에 집착하며.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줘.  내가 지금 보다 더 어렸다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도달할 종착점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아무것도 몰라 천진난만하게 거리를 뛰놀며, 모든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찬사와 축복 속에서 그저 마냥 즐거웠더라면. 만약 내가 지금 보

  • Ariel
  • 2011-05-08
이데아- 변하지 않는 진실

 "안녕"학교에 도착한 직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힘없는 나의 인사는 소란스런 소음 소리에 먹혀버렸다. 아무런 침울함도 애도의 분위기도 바란 건 아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웃고 떠들며 좋다는 반 애들의 소리에 화가 끓어 온다. 그러고도 너희들이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니? 'In the end, I want to be happy'"아~ 그 일 때문에 우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은정인 한나랑 많이 친했지." 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잔인하게 내 가슴을 휘어파는 이기적인 그들의 발언. 자신과 상관없어 괜찮다는 무심한 그 한마디에 순간 현기증으로 어지러웠다. 윤한나. 나랑 같은 16살 중학교 3학년 같은 반 친구. 중학교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보통 애들같이 나랑 레슬링(?)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항상 귀찮고 배고프고 졸려워 하며, 내 연애 상담 같은 비밀 정도는 충분히 공유해 줄 수 있는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자살을 하다니! 필시 다른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사연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 것이게 이런 결과가 있었다고 굳게 믿는다. 오전에 비가 많이 내렸던 탓인지 별 없는 밤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그리고 시원하게 내 얼굴을 감싸는 겨울바람과 달. 내 머리 위에 별 하나 없이 홀로 떠 있는 둥근 보름달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빛났지만 차마 내 방까지는 그 달빛이 머무르지 못했다.'똑 똑 똑'어머니께서 아직 안 주무셨나. 누군가 굳게 닫혀있던 내 방문을 두드렸다."문 열어 강은정. 나야.""아 네. 네"역시 나는 나답게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니었다. 드르렁 코골이 소리를 뒤로 한 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리 눈을 비벼 봐도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한나였다. 한나는 한참 내 눈을 쳐다본 채 아무런 말이 없었었다. 끝내 피식하고 웃음을 뱉어놓고 말했다. "그래. 맞아. 나보다 더 힘들고 더 지친 사람들은 많겠지." 그녀의 뜻밖의 대답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곤 한나는 마주 편에 걸려있는 조그마한 졸업사진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도대체 그 무엇이 널 이렇게 만들었지?"난 한나의 기에 눌리지 않으려고 당당하게 물어보았다. 그녀가 귀신이든 죽은 사람이든 결코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먼저 간 친구의 심정을 캐내려고 싶을 뿐. 지금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할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너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오늘 아침 학교에서도 내 안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는 그 처절한 심정을 네가 알기나하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냐고! 나뿐만이 아니야. 담임선생님도 얼마나 슬퍼하셨는데. 네가 그 장면을 봤어야 했어. 그리고 너희 부모님과 동생은? 언니 잃은 슬픔과 자식 잃은 부모님 심정이 얼마나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줄 네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래. 지금 와서 내

  • Ariel
  • 2009-07-0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