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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 뮤지컬『베르테르』와『킹키부츠』를 중심으로
Ⅰ. 서론 – 뮤지컬에서 넘버는 왜 서사의 언어가 되는가 연극에서 인물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뮤지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만으로 더 이상 감정을 담아낼 수 없는 순간 이야기를 노래로 넘긴다. 이때 뮤지컬의 넘버(Number)가 맡는 역할은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음악적 즐거움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넘버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대사이자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 장치다. 뮤지컬을 감상하다 보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있다. 흔히 ‘대표 넘버’라 불리는 이 곡들이 기억되는 이유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대중적 인지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표 넘버는 인물이 삶의 전환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거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 순간 음악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기는커녕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 자체를 결정한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경험하게 만든다. 배우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지고 선율은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 오르내리며 리듬은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다. 여기에 가사와 오케스트레이션, 연기와 무대 연출이 더해지는 순간 하나의 넘버는 독립된 음악을 넘어 한 장면, 한 서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비평은 ‘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사랑과 성장이라는 전혀 다른 서사를 다루는 두 작품이자,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뮤지컬인 『베르테르』와 『킹키부츠』를 선정하였다. 장르와 시대, 음악적 색채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마다 넘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본 비평에서는 『베르테르』의 넘버 「어쩌나 이 마음」과 「발길을 뗄 수 없으면」, 『킹키부츠』의 넘버 「Step One」과 「Soul of a Man」을 중심으로 가사, 선율, 리듬과 템포, 배우의 음악적 표현, 장면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분석할 것 이다. 네 곡 모두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대표 넘버이자 서사가 가장 크게 전환되는 순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각 넘버가 왜 하필 그 장면에서 울려야 했는지 그 노래가 없었다면 인물의 서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살펴봄으로써 넘버가 음악을 넘어 인물의 삶을 완성하는 언어임을 고찰하고자 한다.Ⅱ.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지만 그 사랑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작품은 한 사람이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다가, 끝내 그 감정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서정적인 심리의 결은 대사만으로는 다 담아내기에는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그 순간마다 넘버가 등장한다. 베르테르의 넘버는 이미 정리된 감정을 노래로 옮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과정 자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작성자 시유레 작성일 2026-07-10 좋아요 0 댓글수 0상세보기 -
감상&비평
영화 <위플래쉬>-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육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본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기억을 살려 다시 한번 충격에 빠져보고자 이 글을 쓴다.첫 장면은 드럼 소리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긴장감이 흘렀다. 어두운 화면에서 일정한 간격의 드럼 소리가 흘러나오다가 드럼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앤드류가 나온다. 앤드류는 또 다른 주인공인 플래처 교수의 강의실을 바라보기만 하며 선뜻 다가가지는 못한다. 앤드류 역시 플래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말하지 못하는 앤드류가 그때는 참 소심해보였다. 결국 플래처가 앤드류의 연주를 보게 되지만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하지만 곧 앤드류를 자신의 수업에 불러들인다. 이때까지는 희망적이었다.그러나 이는 곧 절망으로 돌아선다. 플래처 교수는 지속적으로 앤드류를 괴롭혔다. 여기까지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관점에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왜 앤드류는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플래처의 곁을 떠나지 못한 걸까? 이 영화를 보면 가족과의 식사 장면에서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자랑을 늘어놓으며 앤드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가족조차도 무시했던 앤드류를 인정해주고 받아준 사람은 플래처 교수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플래처를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위플래쉬(채찍)만을 휘둘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플래처는 앤드류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주었다. 강압적으로 몰아붙였지만 앤드류한테 잘할 수 있다고 말해준 것 또한 플래처 교수였다. 앤드류에게 메인 드러머를 맡긴 것도 플래처였다. 즉 그런 식으로 앤드류가 떠나지 못하도록 정서적 감옥에 가둔 채 꼭두각시 인형처럼 갖고 놀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강압적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플래처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드류에게 기회를 주고 다시금 희망을 빼앗으며 앤드류를 지배하고 있다는 감정 자체를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앤드류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앞서 말했듯 앤드류는 소심한 아이였다. 플래처의 행동에 눈물을 보이던 여린 아이였는데 본인이 쟁취한 메인 드러머 자리가 다른 드러머로 대체되려 할 때 플래처에게 크게 화를 내며 둘은 싸움이 일어났다. 가장 놀랐던 부분은 대체 드러머가 상황을 말리려 할 때 그에게 소리치며 인신공격을 포함한 욕설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에 앤드류의 간절함과 함께 그가 점점 플래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음을 느끼며 안타깝고 두려웠다. 메인 드러머 자리를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스틱을 가져오는 길에 크게 교통사고가 난다. 온몸에 피를 흘리며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스틱을 잡은 채 모두의 만류에도, 플래처의 호통에도 공연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뜻대로 손이 움직여주지 않았고 스틱을 놓치는 등 공연을 망쳐버렸다. 플래처의 공감 능력의 결여를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픈 앤드류를 달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앤드류에게 '넌 이제 끝이다.'라는 말을 내뱉고는 돌아선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앤드류는 플래처와 몸싸움
작성자 캔디 작성일 2026-07-08 좋아요 0 댓글수 0상세보기 -
감상&비평
대중 앞에 놓인 카타르시스성 폭력-드라마 '참교육'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 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모티프다. 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그중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 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 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카타르시스 안에는 사회정의라는 이름에 감춰진 폭력이 존재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본래, 참된 교육이라는 뜻으로 선생이나 어른이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뜻한다. 현재까지도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지향해야 하는 교육이 바로
작성자 송희찬 작성일 2026-06-29 좋아요 0 댓글수 2상세보기 -
감상&비평
꿈과 무의식으로서의 글쓰기
긴 호흡을 요구하는 글을 쓸 때면 날마다 달라지는 필력의 편차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는 좋은 문장이 가득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당시의 감성을 장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논리적 글쓰기가 아닌 창의적 글쓰기는 무의식의 감각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실현되므로 의식만으로는 동일한 조건을 재현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의식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우리의 삶은 대부분 습관과 환경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다수의 작가가 본인에게 적합한 글쓰기 환경을 구축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실감한다. 한강 작가의 수필 「출간 후에」를 보면 4.3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과정에서 집필 환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소설이 출간되었다. 더이상 새벽에 일어나 초를 켜지 않아도 된다. 외딴집이 정전됐을 때 촛불이 얼마나 밝은지 보려고 보일러 센서 등을 가리고 냉장고 코드를 뽑지 않아도 된다. (중략) 살갗에서 눈이 녹는 감각을 기억하려고 손이 빳빳해질 때까지 눈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마다 가장 가까운 산을 향해 택시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중략) 더이상 자료를 읽지 않아도 된다. 검색창에 ‘학살’이란 단어를 넣지 않아도 된다. 구덩이 안쪽을 느끼려고 책상 아래 모로 누워있지 않아도 된다. 매일 지나치는 도로변 동산의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떨어지고 녹음 아래 그늘이 유난히 캄캄할 때, 거기 시체들이 썩어가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울지 않아도 된다. 더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 바람 부는 자정에 천변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산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 더이상 이 소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이 소설에서 풀려날 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출간 후에」 한강작가는 작품의 소재 중 하나인 눈의 감각을 체득하려고 의도적으로 눈이 내리는 환경을 찾아다닌다. 그 환경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 감정이 있다. 문장이 있다. 무의식이 있다. 의식적으로 환경을 바꾸었지만, 그 효과가 문장으로 나타나기까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에 쌓인 다양한 감각이 표출되어야 한다. 책상 아래를 구덩이라고 생각하고 시신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자기 암시의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작품의 배경을 낯선 세계로 두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작별하지 않는다』가 쓰인 삼 년 동안 작가는 다양한 고통을 일상처럼 받아들여야 했을까. 고통을 동반하는 글쓰기가 작가에게 일상적으로 느껴져도 괜찮은 것일까. 한강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고통을 마주한 경험은 사실 한 번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 『소년이 온다』를 썼던 일 년 육 개월을 기억하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압도적인 고통이다. (중략) 매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고통이 나를 부수고 또 부수는 걸 견디면서. 작업실에서, 지하철에서, 횡단보도에서, 부엌에서, 이불 속에서 이를 물고 울고 있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조금도 미치
작성자 아기호랑이 작성일 2026-06-20 좋아요 0 댓글수 1상세보기 -
감상&비평
라울 월시의 <북부 추격> - 나의 길을 찾아서
겨울이 다가오면 추위에서 허우적 거리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오래간 꿈 꾸어 왔던 업무들을 이루며 여기저기를 오가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당시에는 하루 평균 두 시간의 숙면을 취하며 서울에서 경기도, 전남, 전북 등을 횡단했다. 일이라는 변명 아래서 오랜 지인들을 만나고, 밤새 대화하는 경험을 연쇄적으로 겪었다. 일이 많아지면 육체는 고통을 수반한다. 일에 대한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정신적 고통도 만만치 않다. 육체의 활동을 명령하는 것은 뇌의 일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여러 사건이 쓰나미처럼 단기간 쏟아진 까닭인지, 그도 아니면 최근 벌어진 일들을 너무 오랜 기간 꿈으로 간직했던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단편적이고 분절된 이미지, 혹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장면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로 인해 성취감의 만조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왕왕 있었다. 너무 갑작스럽거나 오래간 기대해 왔던 것들은 기억에 자세히 남아있지 않고, 오히려 사소한 것들만 남는다. 기억은 사람의 자산과도 같다. 현재의 ‘나’를 이루는 것은 경험–기억에 의존한 데이터베이스–라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망각은 개인의 존재를 소거시키는 과정이다.그렇다면 갑작스럽게, 또는 오랜 기대를 끌어안고 성큼 다가오는 일들을 오래간 기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를 유지하기 위해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사뭇 진지한 고민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라울 월시의 영화 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여러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캐나다에서 ‘독일계’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인사발령을 당한 군인 스티브는 오랜 연인 로라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라의 아버지는 스티브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 로라는 스티브가 얼마 전 나치군 장교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사실을 부풀려 아버지에게 그가 “상공에 있던 나치군의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그 안에 있던 다섯 명의 나치군을 잡았다”며 거짓말한다. 스티브에 대해 불평불만을 내뱉던 아버지는 우스꽝스럽게 스티브를 자랑스럽게 떠들기 시작하고, 결혼은 여차저차 성사된다. 다시 말해, 스티브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정말로 ‘상공에 있던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나치군 여럿을 잡는 일’ 뿐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로라의 거짓말에 불과하기에 이 결혼은 완전하지 못하다. 결혼식 당일 스티브는 자신이 발견했던 나치군 장교가 수용소를 탈옥했다는 이유 때문에 첩자로 몰려 법정 처벌을 받게 되고, 결혼식은 신랑의 부재로 중단된다. 영화는 마치 거짓말로 이루어진 결혼식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듯 모든 희망을 단번에 날려버린다.한편 장교 일당은 캐나다 무역 지역에 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가지고 북부의 지리에 능한 스티브를 회유해서 전투기와 폭탄이 숨겨진 나치군의 비밀기지를 찾아내려고 한다. 영화 속 이야기의 대부분은 스티브가
작성자 화자 작성일 2026-06-14 좋아요 0 댓글수 1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리에게 환상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불행을 받아들이기까지)
(황정은-모기씨를 읽고)누군가 이 작품을 읽고 어떤 감정이 들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고 ‘슬펐다’라고 답할 것이다. 황정은의 ‘모기씨’, 이 작품이 슬픈 소설이라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작가는 슬픔이라는 감정 이외의 것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부터 그런 작가의 노력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많이, 알아보려 한다. 소설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She’s Not You라는 제목의 노래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노래의 가사는 이러하다. 그녀의 머리칼은 부드럽고 눈은 너무나 푸르고 아무튼 완벽한 여자인데, 결과적으로 그녀는 네가 아니어서 나는 마음이 아프네. (Her hair is soft and her eyes are oh so blue. She’s all the things a girl should be, but she’s not you.) 노래에서 그녀는 완벽한데, 너는 아니고, 그래서 나는 슬프다는 내용의 가사가 반복된다. 솔직히 가사가 긍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너’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왜 이런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를, 체셔의 아버지는 늘 집에서 틀어놓았을까? 체셔의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사이를 암시하는 내용은 아닐까? 체셔가 불길한 거품을 보고 난 사흘 뒤, 사고는 일어난다. 그러나 병원의 천장을 보며 정신을 차린 체셔는, 자신이 그날 오후의 옥상에 누워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이 두 마디를 내뱉는다. 엘비스다,엘비스다.‘엘비스’는 집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인 동시에 일어나버린 현실이다. 반면 ‘그녀’는 체셔의 아버지가, 체셔가 바라는 행복한 삶, 이상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두 마디로, 체셔는 결국 포기하다시피 불행을 인식한다. 체셔는 자책한다. 머릿속에 세 개의 점을 떠올리고,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작업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결과는 바로 ‘모기씨’이다. 왜냐하면 ‘너의 주민, 거대한 삼각형의 주민’이라고 모기씨 자신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처음 장면에서, 미오는 벌레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물속에 있고, 꼬리와 마디가 있으니, 장구벌레일 것이라고, 대충 말한다. 체셔는 수긍한다. 때문에, 어느 날 사라졌던 벌레가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체셔는 그때 그 장구벌레가 모기가 되어서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이 생물을 ‘모기’라고 수긍해버린다. 사실 모기씨는 모기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모기씨는 체셔의 내면적 인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체셔와 모기씨의 만남은 체셔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환각이다. 그러나 환상은 언제까지고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에는 그 막이 드리워지며 세계의 비참함은 체셔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간병인 미오가 떠나고, 달걀에 구멍을 내서 빨아먹는 현실이. 이 관점으로만 보면 소설의 결말은 비극적이며 희망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 러, 나, 여기서 우리는 체셔가 너무 배가 고파서 몸을 굴리기 전에 한, 두 마디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체셔는 다시 그날과
작성자 궁예 작성일 2026-06-02 좋아요 0 댓글수 1상세보기 -
감상&비평
미겔 고메즈의 <그랜드 투어>
미겔 고메즈의 에는 여러 세계가 공존한다. 먼저 첫번째 세계는 에드워드와 몰리가 살아가고 있는 19세기이다. 두번째 세계는 현재의 풍경이다. 이 현재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목소리로 전개되고, 현실의 풍경을 보여주므로서 첫번째 세계의 물질성을 가려버리지만, 동시에 이야기를 서술하는 식의 유령적인 방식으로 그 물질계를 증언한다. 순간 영화는 허구적 세계와 실제적 세계의 경계에 종속된다. 영화는 그 경이로운 세계 사이에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여행을 한다. 이때 관객은 그 초월적인 여행의 여행객이 되고, 증인이 된다. 한편 우리는 첫번째 세계를 ‘몰리의 여행’과 ‘에드워드의 여행’으로 또다시 양분화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첫번째 세계는 두 개의 이야기를 가지게 되는데, 에드워드의 여행에서 우리는 이따금 여행객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기도 하고, 몰리의 여행에서는 토착민의 시선으로 문화를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그림자 인형극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에드워드의 세계에서 관계자의 시선마 냥 장벽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술사의 모습을 보게 되고, 이 후 몰리의 세계에서는 인형극의 구경꾼이 된 듯, 하얀 장벽 앞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게된다. 즉 앞과 뒤라는 양면적 공간을 그 두 세계를 관통하여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몰리와 에드워드라는 양면적인 두 세계는 19세기와 현재라는 세계가 맺고 있는 것과 비슷한 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현재와 과거는 영화 속에서 결코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 목소리는 과거의 서사를 기술하며 양자 사이에 느슨한 결속을 만든다. 몰리와 에드워드 역시 결코 만나지 못하고, 그 둘은 메모, 혹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뿐이다. 하지만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에는 이 두 세계들을 통합시키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천장에서 몰리의 죽음을 촬영하던 영화 세트장이다. 그것은 지금껏 우리가 보아왔던 모든 것이 허구임을 고백하는 동시에, 몽환적이었던 과거와 현재, 몰리와 에드워드의 여행의 종착지가 허구임을 선언한다. 우리가 여지껏 있어온 세계는 그 냉철한 선언 앞에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결말이 부활하여 영화의 세트장을 헤메는 몰리로 끝난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세계가 만들어지는 장소로서 세트장 결말은 오히려 더 희망적이지는 않은가? 등장인물이 부활하기를 관객들이 간절히 원하게 되는 의 관객들의 초심리학적 기적은 21세기에 들어서 이렇게 다시 재현되고 있다. 는 기적에 가까운 아름다운 공간적 구렁의 몽환에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오데트/몰리의 죽음)를 종착 삼아 끝을 맺는다.
작성자 검은눈 작성일 2026-06-01 좋아요 0 댓글수 1상세보기 -
감상&비평실패하지 않은 인간은 과연 성장할 수 있는가? (드라마 『하이퍼 나이프』 비평문)
드라마 『하이퍼 나이프』는 겉으로는 천재 신경외과 의사들의 사건을 그린 메디컬 스릴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은 의학도, 범죄도 아니다. 작품이 끝까지 붙들고 있는 주제는 ‘실패’이다. 나는 이 작품을 실패를 경험해 본 천재가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자신과 비슷한, 어쩌면 더 뛰어난 천재 제자를 붕괴와 좌절을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정세옥은 열일곱 살에 의대에 수석 입학한 천재이다. 뛰어난 실력과 압도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지만 타인의 감정과 사회적 규범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우선하듯 행동한다. 세옥은 수술에 집착하고,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서 강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녀에게 수술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세옥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녀를 단순한 사이코패스 혹은 반사회적 성향의 살인자로 보는 관점이다. 실제로 세옥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폭력과 살인을 저지른다. 의사 면허가 취소된 뒤에도 불법 수술을 이어가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제거한다. 특히 피해자가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그녀의 범행은 강한 가학성까지 드러낸다. 이러한 모습만 본다면 세옥은 위험한 범죄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세옥을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완벽주의적 천재가 스스로 붕괴해가는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세옥의 폭력성과 자기중심성은 단순한 선천적 악의가 아니라 지나치게 완벽해야 했던 삶과 압도적인 성공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석한다. 세옥은 열일곱 살에 명문 의대에 수석 입학한 천재이며,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모든 수술을 성공시켜 온 인물이다. 그녀에게 수술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고 자신이 특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녀는 사람을 살리는 윤리보다 완벽하게 뇌를 다루는 감각과 통제 자체에 더 강하게 매혹되어 있다. 나는 두 번째 해석이 더욱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세옥을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완벽주의적 천재가 스스로 붕괴해 가는 인물로 바라보는 관점. 이 관점에서 세옥의 폭력성과 자기 중심성은 선천적인 악의 결과라기보다 지나치게 완벽해야 했던 삶과 압도적인 성공 경험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해석한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그녀에게 수술은 사람을 살리는 행위 이전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세옥은 생명을 구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기보다,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해낸다는 사실에서 희열을 느낀다. 이러한 특징은 세옥의 범죄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그녀의 첫 살인은 계획적이라기보다 우발적이다. 그러나 이후의 행동은 다르다. 증거를 처리하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체계적이
작성자 시유레 작성일 2026-05-31 좋아요 1 댓글수 2상세보기 -
감상&비평
추락은 끝이 아니라 변화를 향한 시작이다
"지푸라기를 잡았다면 그 지푸라기를 의지해 떠오르면 된다."'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는 말은 보통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쓰는 말이지만 이 문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다. 지푸라기에 의지해서 다시 일어서면 그만이라는 듯.나는 손원평 작가의 라는 소설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탄탄한 문장력과 청소년인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손원평 작가의 후속작 에 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는 청소년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소재로 청소년들의 관심을 끌었다면 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세상과 삶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그것은 아마 이미 세상에 찌들 때로 찌들어버린 중년을 내세우면서 남성적인 어조로 투박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상을 내세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프롤로그: 추락김성곤이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 시도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과연 그가 삶을 포기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왜 첫 장면부터 이렇게 시작했을까? 그건 아마 포기하고 싶은 삶 속의 모습을 가장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는 굳이 왜 투신을 선택했을까? 이는 추락하는 그의 모습으로 바닥까지 떨어져버린 그의 삶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절망의 끝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몸은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마치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 싶다는 듯. 하지만 절망의 끝에서도 역설적으로 생의 목소리가 요동치고 있음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튜브의 의미가 드러난다. 물 속에서 떠오르게 해줄 수 있는 존재로 가라앉아버린 성곤을 떠오르게 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인간은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늘 줄타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줄타기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책에서 서술자는 이 이야기를 끝이 아닌 시작으로 묘사한다. 죽음이 아닌 변화를 택한 김성곤을 따라가보자. 죽음조차 뜻대로 되지 않던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1부: Back to the Basic말 그대로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일단 여기까지도 김성곤은 죽음을 바라고 삶을 원망한다. 노숙자를 보며 '안정된 삶'이라 여기는데 이는 차라리 현실에서 벗어나 저들처럼 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한마디로 그의 체념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온다. 작지만 확실한 깨달음. 펴진 등. 그건 행복과 젊음, 자신감의 상징이었으며 그때의 자신을 느끼며 이 자세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사라져버린 지금, 김성곤의 펴진 등은 그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안간힘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로 한다. 몸의 자세를 바꾸면 삶의 자세도 달라질 것이다. 작가는 김성곤을 크게 바꾸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이런 게 아니라 그저 단순히 등을 펴는 것이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것은 몸을 곧게 세우는 것임을 표현한다. 삶 속에서의 변화는 그리 큰 걸 요구하지 않는다. 튜브란 거창하지 않다. 그저 우리의 마지막 구원이 되
작성자 캔디 작성일 2026-05-31 좋아요 0 댓글수 1상세보기 -
감상&비평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상의 재정립 시도
2025.12.05~2026.1.10 나는 이번 글에서 지난 일년간 나의 사유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는 단지 지금의 나로서는 지금까지 생각해온 사유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정리함으로서 이런 종류의 주제에서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함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세계와 존재의 정형성과 확실성의 의심에서 시작하여 일종의 유아주의적 세계, 즉 인식된 것들의 구조를 표현함으로서 가능한 한 모순이 없고, 그러면서도 정형적인 세계라는 환상 아래 어떤 관념들을 배척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시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지난 일년간의 사유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인물과 그의 저서 논리 철학 논고에 대한 이해가(설령 완전히 잘못된 이해였더라도) 중심이 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소개와 논고에 대한 나의 이해를 먼저 서술해보고자 한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그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이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를 중심으로 소개되는데 이에 대해 지금의 나로서는 올바른 이해라 여겨지는 이해를 말하고자 한다.논리 철학 논고(이하 ‘논고’)는 사실, 사태, 사물이라는 논리학적 개념을 제시하며 시작한다. 먼저 사물은 원자 명제로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최소 단위의 명제, 즉 p, q, 사과, 빨간색(사실 일상 언어는 원래는 복합적일 수 밖에 없지만 예시를 들기 위해 넣음) 등지의 기본 단위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태는 이런 사물들이 이루는 관계 예를 들어 pRq(p와 q가 R의 관계에 있다), 사과가 빨간색이다(사실 사과R사과의 표면R…R빨간색 형식이라 일상 언어의 문장에는 무수히 많은 관계가 암시되어 있기에 일상 언어를 사물로 보기가 힘듦. 그래도 이 문장은 복잡하긴 해도 크게 봐서 pRq관계니까 사태임) 등과 같은 사물의 모든 가능한 조합이다. 이런 사태는 일단 조합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의미의 참 거짓 여부와는 관계 없이 형성이 가능하다. 가령 ‘사과는 파란색이다’ 같은 문장도 일종의 사태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참인 사태는 사실이 되는데 가령 앞의 문장에서 ‘사과는 빨간색이다’는 사태일 뿐 아니라 사실이 되지만 ‘사과는 파란색이다’는 단지 사태가 된다. 여기서 참이란 현실과 사태의 모사 관계, 즉 논리적 구조를 공유하는 관계로서 제시된다. 여기서 제시되는 현실이란 개념의 모호성(다소 유아주의적 세계를 의미하는 듯 하지만 완전히 그런 종류의 세계는 아닌 세계)은 추후 프레게의 비판(사실과 사태의 구분에 대한 비판)과 논리 실증 주의적 오해(비트겐슈타인의 현실이란 단지 자연 과학적 현실일 뿐이라는 주장)의 원인이 되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라는 개념은 논고의 축을 구성하는 중요한 개념이 된다. 이후 그는 사실의 총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논리학적인 이야기에서 나와서 점차 사실의 총체로서의 세계, 그 논리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의 밖의 것, 즉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란 논리학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작성자 Ted 작성일 2026-05-25 좋아요 0 댓글수 2상세보기 -
감상&비평
10대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 소설『급류』와 『구의 증명』을 통해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쉬운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부모에 대한 사랑 이후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나이는 통상 십 대이다. 이런 10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연애 소설은 풋풋할 것만 같고, 그들의 첫사랑은 청춘이란 단어에 적합한 성장을 담은 이야기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예스24 기준 2025년 10대 독자들이 가장 많이 구매한 도서 1위에 오른 도서 『급류』에서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58p) 또 교보문고의 발표에 따라 2024년도에 한강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고 10대 이하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책으로 집계된 소설 『구의 증명』의 주인공이 정의하는 사랑도 일맥상통한다. “괴롭다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27p)2024년, 2025년의 10대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두 도서는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 이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또렷한 공통점을 보인다. 두 도서의 주인공은 모두 유년기 시절 가정불화라는 환경 속에서 서로를 처음 만난다. 『급류』에서는 여주인공 도담의 아버지와 남주인공 해솔의 어머니가 불륜을 저지르다 적발되어 사망한다. 『구의 증명』에서 구는 가난으로 인해 빚에 시달리고 담은 부모님의 부재로 인해 이모와 살아간다. 두 작품 모두 혼란스럽던 유년기에 서로에게 의존하기 시작하여, 두 주인공은 원초적인 자아 상태에서 사회적인 페르소나 없이 서로를 마주하며 서로에게 더 극도로 의존하게 된다. 논문 “대상관계이론 관점으로 본 거짓, 거짓말”을 참고하며 이런 지점을 더 심화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유년기 시절 서로를 만나 깊이 의존하게 되는 현상은 참자기와 거짓자기의 충돌로 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거짓자기를 형성하기 전, 혹은 가혹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이러한 방어 체계가 채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대상관계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성공과 생존을 위해 거짓자기를 형성하지만, 이는 곧바로 내면의 공허함과 고립감을 낳는다. 따라서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맹목적인 끌림은 세상의 기만적인 원리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참자기를 유일하게 긍정해 주는 대상을 만났을 때 느끼는 심리적인 해방감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청소년의 또래 애착, 사회적 위축, 우울, 학교생활 적응 간의 구조적 관계 분석”은 특히나 가정불화를 겪은 주인공들에게 또래 애착이 정서적인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완충 작용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사회적 가면 없이 서로를 마주한 두 인물 간의 관계는 외부
작성자 매화 작성일 2026-05-23 좋아요 0 댓글수 1상세보기 -
감상&비평
깊이라는 위조—영화 <마이클>론
마이클 잭슨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20세기 팝스타로서 전 세계 각지에서 사랑을 받는, 세계 제일의 월드스타라 봐도 무방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삶을 제대로 알았던가? 이라는 영화는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춰 그의 생애를 너무나 평면적으로 다룬다는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던가. “마이클 잭슨이 무슨 사람이지?”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성추행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월드스타라기보다, 문워크를 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사람이 정녕 영화화될 수 있던 사람이었는가라는 궁금증에 휩싸였고, 이렇게 글로 풀어나가려 한다.우선 최근 들어 유행하는 몇 가지 예시를 가져오자면 숏츠와 틱톡이 있다. 짧은 영상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그런 시대가 온 현대다. 나는 마이클 잭슨 또한 숏츠적인 인물이라 생각된다. 문워크를 하는 장면과 고개를 돌리는 쇼트, 빌리진 스텝과 스릴러 군무 등, 짧게 소비되는 순간과 밈화되는 동작 및 반복된 퍼포먼스로 사랑을 받던 인물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계는 모두 그를 알지만 세계는 그를 모른다. 극소수의 사람만 안다.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이라는 팝스타에 열광하는 것이지, 마이클 잭슨이라는 인간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마이클 잭슨이라는 인간은 완벽주의적 성향을 띠는 인물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 조 잭슨에게 엄하게 자랐고, 심한 체벌과 모욕, 외모 비하, 끊임없는 연습 강요를 당했다고 인터뷰에서 여러 번 밝혔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천재로 소비되며 쉬는 아이가 아닌 항상 결과를 내야 하는 아이였으며, 마이클 잭슨이 처음으로 들어간 기획사 모타운의 교육 방식은 표정, 동작, 인터뷰, 태도, 발성, 무대 매너까지 통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마이클 잭슨은 를 통해 세계적 히트를 쳤다. 훗날 지인들은 그 후로 그가 완벽해지려 노력했다고, 수백 번에 걸친 녹음 반복, 끝없는 안무 수정, 작은 음정 차이에 대한 집착, 공연 연출 강박 등 완벽주의적 성향이 불타올랐다고 한다.그의 완벽주의가 매체에서 드러나지 않을 리가 있을까. 마이클 잭슨이 매체에 남긴 흔적은 MTV, 라이브 편집, 뮤직비디오, 반복 재생, 클로즈업 — 모두 파편들이었다. 그러나 그 파편 너머에 진짜 이야기가 있었을까. 모타운의 교육은 ‘팝스타란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 위에 서 있었고, 마이클 잭슨은 완벽주의적 인간이었다. 완벽주의는 매체에서 깊이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파편화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 파편이 곧 그였다.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라는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 생각된다. 숏츠와도 같은 그의 서사를 숏츠와도 같은 강렬함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좋았다. 은 분명히 그렇게 혹평받을 작품은 아니라고, 난 생각한다.평론가들은 이 비극을 외면했다고 한다. 학대, 의혹, 약물이 퍼포먼스 뒤로 흘러들어가 모습을 감췄다고.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존재 양식이 깊이를 대중
작성자 고래 작성일 2026-05-14 좋아요 0 댓글수 2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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