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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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459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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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변화와 역사의 비탈에서
요컨대 근대를 살아간다는 일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유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당장만 보아도 불과 2년 전(2023년) 출시되어 큰 반항을 일으켰던 인공지능 서비스 Chat GPT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 - 업무, 학업, 유흥 등 - 에 천착해있다는 사실은 시대적 감각을 가늠케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식적으로 보급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스마트폰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식주, 의사소통, 유흥욕구 등)을 편리적으로 소비/사용 하도록 돕고, 보다 나아가 개인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실존적인 문제를 증명하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처럼 보편화되어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기술과 문화 발전의 변화를 포용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계를 쫓는다. 발 빠르게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는 이 시대의 유동성만큼,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사고하고 운동하는 인간의 유동성은 그 시대의 변화들을 가능케 했다. 그렇기에 (칼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보자면), 이 시대에 변화하지 않는 것, 급변하는 근대에서 운동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고체는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곳에는 어느날 섬광처럼 번쩍 등장해서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유행과 기술들만이 존재할 뿐이고, 모든 부동한 고체들은 유동적인 세계의 산성에 의해 융해된다.망각과 부활 - 경복궁 월대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을 중심으로이런 세상에서 과거와 역사를 되살펴보는 일은 더욱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곧 유동적인 세계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채 특정 장소에서 미동 없이 머물고 있는 부동(不動)의 고체(또는 정물)들을 살펴보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고체’들은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잊고 있던 진실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근래에 재건된 경복궁의 월대는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월대는 예로부터 왕이 걷는 도보라는 의미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단지 오랜 기간을 버텨온 역사적 건축물 - 경복궁 월대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4세기의 일이고, 조성된건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4세기를 거쳐서 완성되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왕이 행차해왔던 길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이유로 1924년 경복궁 월대를 파괴했을 때, 그곳에는 ‘전철’이라는 조선의 근대화의 상징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선의 역사/권위적 상징과도 같은 왕의 길을 부숴버리므로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의식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적인 의도가 암암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지도자의 실권상실(순종의 죽음, 1926년)과, 민족문화역사의 폄훼와 왜곡(문화통치 1920년)으로 직결되어 조선의 국성을 뒤흔드는데 선험적으로 일조했다. 그러므로 일제 식민지배 치하에 파괴되어 버린 경복궁의
작성일 2025-05-07 작성자 화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151상세보기 -
감상&비평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상업 문학
‘우리가 섹스의 대상이기만 하면 좋겠지? 좋아. 대신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겠어’ 크로이체르 소나타 중 톨스토이.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 작품은 몰라도 이름은 알 것이고 대체로 작품을 기억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니 안나카레니나니 하는 것부터 단편선이나 이반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같은 작품들도 꽤나 유명하다. 그러나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어떤가? 톨스토이의 연대기에 짧게 나와있는 것이 전부일뿐이다. 그나마 찾을 수 있는 설명들은 금욕주의니 섹스에 대한 혐오니 하는 단어들 때문에 언뜻 보면 톨스토이는 노망 난 반동적인 노인네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두건대, 비록 그가 반동이라 할지라도, 그는 완전히, 정열적으로 순수하게 무모순적인 인간 해방을 위해 노력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나는 그를 반동이라 표현하느니 가장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라 부를 것 같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래서 어떤 소설인가? 그것은 그 내용 그 자체(내용 그 자체는 조금의 가치도 없다)보다 그것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지겠다. 사랑은 어떻게, 얼마나 인간을 구성하는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인간이 있는 반면에 그를 부정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역사에서나 지금이나)은 사랑으로부터 살아가야 할 이유와 젊음을 소모해야 할 당위를 얻는다는 것이다. 부수적으로 글 쓰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업을 제공했다(로맨스 장르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는지 보라). 사랑은 꽤나 중요한 감정이다.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면서 동시에 감정적 만족을 주고 상당히 많은(대체로 우리가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런 영향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다) 제도적인 장치와 문화를 남겼다. 자유로운 개인 간의 연애가 확산된 지는 꽤나 오래됐다. 그러나 반동적인 구조가 남아있는 것은 현대의 우리나 톨스토이 시절의 러시아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헤테로섹슈얼에서 다루어볼 것은 3가지가 있다. 섹스, 로맨스, 그리고 관계와 결혼이다. 섹슈얼리티와 로맨스는 본질적으로 성질은 거의 완전히 같다. 모두 상대를 필요로 하며, 독립적인 욕구다. 섹슈얼리티는 선천적이지만 로맨스는 다소 그 구분이 모호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어떻든, 로맨스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 둘은 대체로 비슷한 성질을 띄며 서로 연관되어 나타나고 또한 수많은 매체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출판된다. 다만 섹슈얼리티는 어느 정도 접근에 제한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로맨스는 맥락을 불문하고 섹슈얼리티보다 우월하며 도덕적으로 옳은 것처럼 취급된다. 대중에게 자주 노출되는 것도 있지만, 문학이 로맨스를 신성시하는 게 크다고 본다. 로맨스는 어째선지 다른 모든 감정과 욕구를 들을 초월하여 훌륭하고 권장할만한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면, 로맨스는 섹슈얼리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평생 섹스만 하며 살 수 없듯이, 로맨스도 어느 순간에서는
작성일 2025-05-07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8상세보기 -
감상&비평 이별과 사별, 인생미션의 초입에서 - 공태인 감독의 <두 사람>
혼자 살고 있는 엄마가 삼계탕을 먹으라고 자신의 딸 해은을 집으로 부른다. 해은은 보지도 않는 tv를 켜놓고, 밥상에서 이혼한 아빠를 언급하는 엄마와 한바탕 말싸움을 벌이고, 쓰레기를 버린다는 명목 하에 집을 나가버린다. 어둠이 드리운 밤, 해은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더 이상 집에 없다. 그녀는 넓은 거실에 쭈그려 앉아 홀로 Tv를 보다 새벽이 올 때까지 눈물을 흘린다. 표면적으로 모녀갈등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공태인 감독의 단편영화 은 층위적으로 쌓아 올린 인간 내면의 복합성을 담고 있다. 영화에는 보이는 진실과 감추려는 진실들이 있다. 보이는 진실이 모녀갈등이었다면, 감추려는 진실은 그보다 깊숙한 곳에서 영화적 장치들에 의해 꽁꽁 숨겨져 있다. 에서 가장 어색하게 다가오는 것은 엄마의 존재이다. 영화의 초반부, 해은이 집에 들어올 때 영화는 텅 빈 거실과 고요한 햇살이 내려앉은 집안의 온기를 비추며 그곳이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집인 양 묘사한다. 그러다 갑작스레 뒤바뀐 쇼트에서 희미한 TV소음이 영화 속으로 침투한다. 아무도 없던 집에 뜬금없이 TV가 켜진 것이다. 해은이 TV의 전원을 끄기 위해 서랍을 뒤지며 리모컨을 찾던 순간 엄마가 등장한다. 그녀는 집 내부에 있었던 것일까? 텅 비어있던 집에서 갑자기 등장한 존재. 관객은 엄마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뜬금없이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처럼 엄마의 등장이 얼마나 어색한 것인지를 떠올려 본다면, 엄마라는 인물에 대한 의문들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간다.한편 영화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옥상 창고의 고장난 문이다. 영화에는 제대로 닫히지 않아 삐그덕 거리는 옥상 다락방의 문이 여러 번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문은 아무 서사적 영향력도 갖고 있지 않지만,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영화의 쇼트와 쇼트를 이어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가령 영화의 시간이 아침에서 밤으로 이동할 때, 그 개별적인 시간대를 포착한 두 쇼트 사이에 옥상 장면을 삽입해서 아침과 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주고, 해은이 엄마와 언쟁을 벌이고 집을 나왔을 때, 집 내부에 있던 해은과 외부로 나온 해은을 사이를 연결해주는 식이다. 이 문은 집과 외부 사이, 또는 아침과 밤 사이라는 서로 다른 물질성을 지닌 (비)객체들 중간에서 공간성과 시간성, 그 어떤 것도 특기할 수 없는 모호성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영화 속 문의 존재가 처음 드러나는 것은 엄마의 말을 통해서다. 엄마는 해은에게 옥상 문이 고장 난 것 같으니 고쳐달라고 부탁하고, 옥상으로 올라간 해은은 자신이 문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열어둔 채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해은은 엄마와 논쟁을 벌이게 된다. 밤이 오고, 해은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집을 나왔을 때, 문득 열리 있는 옥상문을 보게 되고, 물통을 받침 삼아 문을 닫는다. 해은은 집으로 돌아오고, 우리는 또 다른 이상함을 깨닫는다. 엄마가 사라졌다. 영화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가려버리고,
작성일 2025-04-29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33상세보기 -
감상&비평 『ASSEMBLE24』 감상평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하자면 나는 K-pop 음반에 대한 감상을 쓰기에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특히 4세대나 5세대라고 불리는 아이돌들의 음악은 친구들이 알려주거나 SNS에서 마주하지 않는 이상 따로 찾아 듣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24인의 다인원으로 화제가 된 tripleS의 첫 완전체 정규 앨범, 「ASSEMBLE24」는 나에게도 소식이 닿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고 내 취향에 맞았다. 나는 K-pop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도 그들의 음악을 즐길 방법을 제안하며 이 앨범을 리뷰하려고 한다. 그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트랙의 사운드와 앨범의 구성이다.[사운드]나는 음악 감상에서 세계관이나 내러티브를 덜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그들이 팀을 결성한 경위와 지금껏 겪은 역경 등에 대한 가사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나에게 흥미롭지 않다. (이것은 앨범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는 구분된다) 대신 사운드의 디테일을 추구하는데, 이는 단순히 좋은 음색과 적절한 볼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압축과 (스테레오 오디오에서) 악기의 배치, 공간감의 변주 등의 완성도를 기대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는 음악의 장르와 뮤지션의 스타일에 따라 얼마든지 느슨해질 수 있지만, 요지는 그 타이트함과 루즈함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사운드의 관점에서 「ASSEMBLE24」를 바라보면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본 앨범의 7번 트랙 「24」를 예시로 들겠다. tripleS는 다인원 그룹이고, 데뷔 후 2년 만에 발매한 첫 완전체 앨범의 무드를 웅장하게 가져가고 싶었을 수 있다. 그런데 「24」는 웅장함을 목소리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다소 미숙했다. 「24」의 벌스에 사용된 드럼은 완전히 앞에 나와 있다. 벌스에서는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몇 가지의 효과음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공간이 압축되고 집중되는 효과가 생긴다. 프리코러스에서는 킥을 빼고 스네어만 연주하고 있어 타격감이 줄어든 드럼이 코러스에 달해서는 아예 사라지는데, 이때 베이스는 저음역대를 부스트하고 박자를 쪼개서 드럼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동시에 공간감의 확장을 위해 신스와 브라스, 그리고 여러 플러그인이 도입되는데 이들이 음역대의 관점에서 보컬과 부딪힌다. 웅장함보다는 밀도만 높은 지저분한 음악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보컬의 퍼포먼스다. 24인의 다인원 그룹의 멤버들이 (특히 앨범명 ‘assemble’의 의미를 고려하여)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게 파트를 분배하려면 많은 더블링과 코러스, 애드리브가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보컬의 볼륨이 작고 파워가 약하다. 이것은 공간감에 있어 뒤로 빠진 소리가 난다는 의미이고 여기서 몇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 첫째로, 원하는 소리를 명료하게 구현할 수 없다. 보컬보다 뒤에 배치되어야 하는 악기들과 보컬이 충돌하며 소리가 정돈되지 않는다. 둘째로, 멜로디의 임팩트가 없다. 물론 풍성한 코러스는 음악의 높은 완성도에 기여하지만, 적어도 「24」에서 표현된 보컬은 멜로디를 코러스가 받쳐주
작성일 2025-04-25 작성자 joomen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55상세보기 -
감상&비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독후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흔히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모든 사상과 철학의 집합체라고 말해진다. 말하자면 그의 ‘백조의 노래’인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이런 온갖 찬양들과는 상반된다. 이 책의 내용은 (오직 내용만 놓고 보자면) 언뜻 보기에 최소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불리고 찬양 받는 이유는 내용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책이 예술적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상세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때로는 신비스럽게 때로는 차가운 이성으로 종교와 신, 자유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랑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묘사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마치 오페라와 같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오페라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어쩔 수 없이 내용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오페라를 저급하다거나 세속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으며 차라리 아름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오페라 속의 아리아가 지니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아리아가 아니지만,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으며 우리는 아리아의 형식으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반박해선 안되는(반박은 말하는 것이다) 권위를 지니며 그 권위는 아리아에서 오페라, 한 극 전체로 확대된다. 이 책은 오페라처럼 아리아와 같은 몇몇 서술을 지니고, 또 그 서술은 ‘신비스러운 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고 알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오직 이 점에서 그의 책이 그런 찬양에 마땅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생각한다.쓰다보니 서론이 길어지고, 또 혼잡해진 것 같다(내게 생각을 조금 더 잘 서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일단 그럼 서론은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이번 글을 어떤 형식으로 전개할 것인지에 관해 약간의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내용은 가능한 한 간단하고 짧게 쓰고, 이 책의 아리아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인 즉 이 책은 내용보다는 메시지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1800페이지 책의 내용을 상세하고도 잘 요약할 능력도 시간도 내게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 책은 여러 심오하고 뜻깊은 주제를 다루는 만큼 철학적으로도 조금 더 풀어내보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사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이유 중 하나가 비트겐슈타인이 이 책을 좋아했었기 때문이었고, 또 이 책이 내가 니체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내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먼저 내용을 짧게나마 서술해보고자 한다.이 책의 내용은 카라마조프 가문의 가정사이다. 그것도 아주 복잡한 가정사인데 일단 처음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이 책은 카라마조프가의 가장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그를 찾아온 세 아들 장남 드미트리, 차남 이반, 막내 알료셴카(보통 애칭으로 알료샤라 부른다)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인물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자
작성일 2025-04-16 작성자 Ted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377상세보기 -
감상&비평 세기말 빈의 예술가들(‘비엔나 1900’ 전시를 보고)
만일 당신이 어떤 한 문화 전체의 서사시적 저술을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이 문화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의 작품들 속에서, 그러니까 이 문화의 종말이 단지 예견될 수 있었을 뿐인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그것을 기술할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문구이다. 이를 인용한 까닭은 1900년대 당시의 예술이 이러한 가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2월 말 무렵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전시한 그림 전인 ‘비엔나 1900’을 볼 수 있었다. 이 그림전은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에 활동하던 빈 분리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룬 전시였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나는 이 전시를 조금은 분석적으로 바라보며 빈 분리파의 화가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예언’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미술 사조에는 인상주의, 큐비즘 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로 활동한 화가들로는 이 전시의 중심 주제인 빈 분리파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하고,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 미술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는 그들의 공통점이 그 통일성을 타파한다는점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상주의는 세계의 단순한 묘사에서 예술가의 눈에 비친 세계로, 큐비즘은 표상적인 사물에서 사물의 본질로, 빈 분리파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기존의 예술에서 추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예술로의 변화를 꾀하였다. 가히 그들의 그림은 혁명적이며 기존의 화풍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이나 르네상스의 문화혁명과는 달리 역동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들의 혁명은 열정이기 보다는 체념이며 환희가 아니라 차라리 심연의 고뇌이다. 이러한 점에서 내게는 이런 미술의 변화가 기술에게 그 가치를 위협받는 예술의 처절한 노력이자 앞서 인용문에서의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느껴졌다. 먼저 당시 미술 사조와 특징을 어렴풋이나마 분석해보고자 한다. 인상주의는 절대적인 세계의 사물 대신 상대적인 인식된 사물을 말한다. 사물은 빛과 보는 각도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의는 어차피 그것이 상대적이라면 눈에 포착된 바로 그 순간에 그리자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입체주의, 즉 큐비즘은 그 시작을 기술의 발달에 둔다. 왜냐하면 큐비즘은 그림의 사실 묘사의 기능은 발전된 기술의 산물인 카메라와 같은 기계가 더 잘 수행하므로 미술은 다른 목적, 즉 예술가의 자기 표현과 사물의 본질 파악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미술 사조가 예술가 자신의 눈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예술가가 주체적인 실존자로서 세상의 복제품을 만드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고자 한 실존주의적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꼭 미술 사조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
작성일 2025-04-08 작성자 Ted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97상세보기 -
감상&비평 고다르(론): 고다르와의 대화
고다르의 죽음 : 늦었지만, 이른 늦-초가을의 추도문그러니깐, 2022년 어느 늦여름이었다. 늦여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도보에 떨어진 낙엽이 가끔씩 눈에 들고는 하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나로서는 이 시기를 무어라 단정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수요일이었고, 몸이 아파 학교를 조퇴한 상태에서 여느날과 다름없이 영화 한 편과(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영화는 아마 테렌스 멜릭의 였을거다) 도서 한 권을 곁에 두고 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신의 부고소식을 들었다. “누벨바그의 거장,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하다”기사가 떴다. 당신의 이름은 고다르. 어디선가 스쳐가듯 들어본 적 있었으나, 당신은 내게 어색한 사람이었고, 난 어정쩡 그날 오후를 보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지나, 2023년의 겨울 끝자락 무렵, 당신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본 세 편의 영화. 와 , 그리고 . 당시에는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런 영화가 다 있지, 싶은 정도. 그랬던 나는, 어느새 장 피에르 멜빌을 존경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새뮤얼 퓰러와 프리츠 랑을 사랑하던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신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풀어놓기에는 너무 늦은걸까. 당신은 이 세상에 없다. 이 글이 쓰여지기 불과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당신의 압도적인 지력으로 세계 영화사와 시네마의 의미를 탐구하는 걸작 과 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싹 트는데, 내가 보지 못한 당신의 영화는 이제 과 단 두 편 뿐이다. 이제 그 마음마저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일까.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나는 그 두 편 보기를 계속 미루고, 당신의 작품들을 여러번 돌려보고 있다.그러던 중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두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은 . 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첫번 째는 칸 영화제였다. 그곳에서 를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가려고 애썼다. 물론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상영일이 지났을 때, 나는 좌절했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영화가 바로 당신의 것이었다. 이건 내가 시네필로서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리고 반 년의 시간이 흘러 그 영화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당신의 영화를 볼 기회는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 방학시기와 여행시기가 맞물려 운좋게도 토론토국제영화제에 갈 수 있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건, 당신의 유작이 상영되었던 상영일이 당신의 기일이었다는 것이다. 선선한 저녁이었고, 내가 당신의 부고를 들었던 날이기도 했다. 지금이 2024년이라는 것만 의식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나는 마치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경계에 우두커니 서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누구보다 이 세상에서 강
작성일 2025-03-26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681상세보기 -
감상&비평 '논리 철학 논고' 를 읽고
이 책의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지금껏 과학, 철학, 수학, 예술 등에서 알고자 했던 그 본질적 진리를 그 자신이 찾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내가 이 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는 결코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다만(그가 정말로 그 문제들의 근본적 답을 찾았는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이런 진리를 찾는데 어쨌거나 철학을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껏 인류가 제시한 세계 해석 방식으로서의 거의 모든 학문들은 그 시작을 철학에 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철학의 유물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한 분야가 분리된 것이고 심리학과 인문학은 최근에야 철학에서 분리되었으며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의학, 역사학 등도 고대에 철학에서 분리되었거나 적어도 고대 철학자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이 점에서 철학은 모든 학문의 시점이며 세계 해석 방식의 시초였다. 그리고 이후 많은 학문으로 나뉘어 지긴 했지만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이 다시금 철학적으로 발견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점에서 그의 주장이 진리에 대한 답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비트겐슈타인은 머리말에서 아마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이 책은 그러므로 교과서가 아니다.-이 책의 목적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어떤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달성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전에 그가 했던 사고들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하나의 문장도 그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그러한 생각을 전에 해본 적이 없어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의 문장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생각은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해본 생각들을 적어보고자 한다.이 책의 두번째 문장 1.1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나는 이것이 세계가 절대적이지 않고 오직 인식 가능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가 사용한 사물은 말하자면 물리적이고 실존하며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물질이며, 사실은 그 절대적으로 ‘보이는’ 사물을 인식하여 사고되고 정의된 사물이며 상대적이고 인식에 의한 것이다. 만약 세계가 절대적이라면 우리의 인식(여기서 인식은 사고를 포함한 모든 세계 해석 방식이라고 할 때)은 그저 절대적인 세계를 옆에서 관망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가 인식 가능한 세계로 한정될 때 인식은 세계에 앞서며 세계가 더 거대하거나 위대한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인식의 창조물일 수 있고, 설령 그것이 절대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이며 그 정당성은 또한 인식에 기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후자의 세계라는 것은 분명하다.
작성일 2025-03-23 작성자 Ted 좋아요 1 댓글수 4 조회수 518상세보기 -
감상&비평 사랑을 깨닫는 것 - 김복유 <레아의 노래>를 듣고
*종교적 관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야곱은 날 외면하여도 주님은 날 보아 주신다야곱은 날 무시하여도 주님은 날 들어주신다야곱은 날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만 안으신다야곱은 날 인정 안 해도 주님은 나만 인정하네Shout of the 유다 내게 행복을 주신 분께Shout of the 유다 나를 사랑한다는 분께Shout of the 유다 나를 좋아하시는 분께Shout of the 유다 유다 유다너는 아주 특별해 아주 많이 특별해사람들이 뭐래도 너는 아주 내게 아주 특별해세상은 널 외면하여도 주님은 널 보아 주신다세상은 널 무시하여도 주님은 널 듣고 안고 껴안아세상은 널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만 안으신다세상은 널 인정 안 해도 주님은 너만 너만 너만 -<레아의 노래>(부분 삭제) 이 찬양은 성경 중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야곱은 형이 밖에 나간 사이에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대신 받고, 그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한다. 라반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는데 첫째가 레아이고 둘째가 라헬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해서 라반에게 7년을 무보수로 일하고 라헬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7년 후, 라반은 그를 속여 레아를 대신 보낸다. 그리고 결혼 다음 날 아침에 야곱이 그 사실을 알고 따졌을 때,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경우는 없다고 하며 7일을 채우면 라헬도 줄 테니 이후로 7년을 더 일하라고 한다. 그래서 야곱은 그렇게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레아이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했기에, 레아는 결혼 후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첫째 아들부터 셋째 아들을 낳을 때 계속해서 야곱의 사랑을 갈구한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짓는다.첫째의 이름은 ‘르우벤’으로 ‘보라, 아들이라’라는 뜻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리라는 것이다.둘째는 ‘시므온’으로 ‘듣다’라는 뜻이다. 첫째를 낳았음에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자, 자신의 기도를 들으셔서 또 아들을 주셨다고 생각한 것이다.셋째는 ‘레위’고 ‘묶다, 연합하다’라는 뜻이다. ‘이제는 정말 그가 날 사랑하겠지’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그런데 넷째인 유다를 낳을 때 레아의 마음이 바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이란 뜻이다. 유다를 낳으며 레아는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했다. 야곱의 사랑에 목말라 그의 사랑을 위해 아들을 낳은 전과 달리,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고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위로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분께 찬양을 드리게 된 것이다. 찬양 <레아의 노래>는 넷째 유다를 낳고 난 후의 레아의 고백에서 나온 찬양이다. 이 찬양의 가사를 보면 레아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외면할 때 나를 보시는 분-모두가 날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을 때 내 말을 들어주고 날 인정하시는 분-누군가가 나를 떠나갈 때 나를 안
작성일 2025-03-22 작성자 가엘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280상세보기 -
감상&비평 이데올로기에 대한 단상
여전히 세상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의 이해는 조금도 진전이 없다.언어가 가지는 가정적인 세계가 확장 되었을 뿐, 과연 그 세계가 현실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지, 현실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여전히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일률적인 일반화를 필요로 하며 인간 개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해서 복잡한 언어의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말하자면 이런 것이다.어떤 물리 엔진을 구현한다했을때에 우리는 어떤 것을 필요로하는가? 우선 그 물리엔진을 돌릴 컴퓨터가, 튜링머신이든 유기체든 필요할 것이며 우리가 지금 까지 발견한 물리법칙을 훨씬 단순화한 행동표가 필요할 것이다. 물리법칙을 그대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컴퓨터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아직까지 TOE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계급 투쟁에 대해서도 다뤄보겠다. 인간 개체를 분류하고 그 행동을 일률화하여 이해하고자 하는것, 그것이 운좋게 들어 맞는 경우가 있더라고 그것은 일시적이며 우연적일 뿐이다. 세계의 이해는 이제 미시세계의 법칙과 환원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전술된 경우에선 사회 법칙은 심리학으로, 심리학은 신경학으로, 신경학은 다시 화학과 미시 물리적인 법칙으로 환원되어서 이해되어야하는 것만이 올바른 접근이다. 이 이외에는 단지 이 세계를 언어로 이해하기 위한 일반화일 뿐이다. 어떤 인간이 프롤레타리아(혹은 그 어떤 특수한 계급이나 이론화된 행동양식을 가진 인간 집단에 속한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이해는 (당연히) 인위적인 것이다. 각 개체가 완전히 상이하며 그나마도 1차원적이지도 않고 동시에 시간에 따라서도 바뀌며 애초에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 자체부터 굉장히 오만하며 위험한, 그러나 불가능한 발상을 내포한다. 우리 직전 세기에 저물어 버린 과학처럼(현재의 과학은, 그러니까 최협의의, 가장 근본적이며 더이상 환원되지 못하는 과학은 이미 추후 반박되기 어렵다고 보여지는 상당한 부분이 규명되었으며 또한 동시에 기술적 한계에 다다랐다. 더 이상의 발견은 우리 문명의 카르다쇼프 척도가 유의미하게 증가했을 때야 가능할 것이다) 언어로서 표현되는 거시세계 또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전을 이루어 인류에게 굉장히 유용한 혜택을 주고 있으나 여전히 근본적으로 내포된 문제(거시세계를 카오스 이론에 의해 요구되는 정확도 이상으로 이해하는 능력의 부재)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듯 하다.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어떤 행동의 당위에 이르는 알고리듬이며 그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모종의 윤리관또한 갖추어야한다. 이데올로기 간의 이질은 세계를 언어로서 표현되는 세계가 다름뿐만 아니라 인간 개체간의 윤리관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리관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도 모호하고 호소력이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혹자가 기독교적 유신론자라 한다면, 혹자는 유일신의 공회와 그 유일신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일신이 있다 한들, 그가 창조주이며 전지전능한 절대자라
작성일 2025-03-11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67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공이산-멀리 떨어진 힘으로도 세계를 밀 수 있을까(미완)
이 주제를 두고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었지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문장으로 엮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처음 본문을 쓰고자 다짐했던 날보다 지금의 나는 더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세상이 더 멋지지 않다는 걸 하루 하루 인정해나갈 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불확실한 세상에서 눈을 떠보니 생각보다 지구에는 다정한 마음으로도 강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혐오자와 비관론자는 무수히 많이 모여 있지만, 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라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었던 날보다 더 조심스럽고 단단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고등학교 한문 수행평가 시간의 주제였다. 우공이산을 두고 두 가지 관점으로 글을 쓰기. 우공이산,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듯이다. 첫 번째 관점(A)은 이 성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두 번째 관점(B)은 이 성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A 관점은 이렇다. 을 마주할 때 우리는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단편적인 천장이 그렇게 가로막더라도 나는 우공이산과 같은 뜻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왜냐하면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음이 세상을 바 꿀 것이다'를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불확실함과 어려움 가득한 세상의 벽에 가로막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두 세 문장, 두 세 단어로 이뤄진 편리한 혐오를 마주한다. 인터넷 상에서10초면 이루어지는 '편리한 혐오'에 아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고통받는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고 깎여 분노하는 일 조차도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안 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라"고 얘기하 지만 그것은 어떠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가 아닌 '체념해서'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 '무모하게'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들은 정말 바보일까? 아 니면 하늘에서 계시를 받은 성인이거나 진정한 지식인일까?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계엄령 이후 광장에 모여서 시위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거리에 나와 응원봉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평소에는 '무모한 짓 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던 내 친구들도 시청 앞으로 갔다. 우리는 알고 있다. 결심의 정도는 각자 달라도, 모두 분노한 것이다. 개인의 영달만 중시하는 것을 넘어 '안 되겠다'고 느꼈기 때문에 뛰쳐나간 것이다.그렇다. 우리는 변화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법의 정의는 언제나 시민보다 한 발짝 느리고, 국가는 사전에 많은 일들을 대비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무모한 사람들이 만든 땅에서, 무모하지 않게,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 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누군가 '산을 옮길 수 없다'고 돌아갈 때, 삽 한 자루를 가지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삽 한 자루 와'우공'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산'했을 때 산을 돌아가던 사람들도
작성일 2025-02-28 작성자 방백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40상세보기 -
감상&비평 연대와 꿈의 기로에서 -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_우스운 전쟁들>
장 뤽 고다르의 유작 2편 중 처음으로 공개되었던 은 다소 급진적이고 정치적이었던 고다르의 ‘영화 행위(Filming)’를 종결짓는 마지막 보루다. 무엇보다, 감동적이다.고다르는 을 만들고 나서 또 하나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제목은 미정의 장편이었지만 프랑스의 소설가 플리스니에의 소설 에 수록된 단편 “샤를로테”를 각색한 영화였다. 그러나 고다르는 늙었고, 내용은 다소 어려웠으며, 아무도 영화를 위해 투자하지 않았다. 영화는 여러번 제작이 무산되었다. 마지막까지 고다르의 곁을 지켰던 그의 조수 파브리스 아가리노에 의하면, 그즈음 고다르는 자신 스스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다르는 영화 제작하기를 관뒀다. 대신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모아둔 여러 이미지와 텍스트 자료들을 조합해두었던 자료집을 재구성해서 전자문서로 변환했고, 이 후 그 곳에 나레이션을 입히고 간단한 편집작업을 거쳤다. 그러자 그 자료들은 고다르가 원하던 영화의 형태로 얼추 뼈대를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이다. 이건 고다르가 원했던 완전한 형태의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자료 콜라주를 영화화시킨 것이므로 피상적인 ‘예고편’ 정도에 불과했다. 제목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인 까닭은 그래서이다.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다르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듯, 영화의 도입부에서 “어두운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없더라면 더욱이 어렵다.(It’s hard to find a black cat in a dark room, especially if it’s not there.)”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고다르는 본작의 핵심을 알려주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 후 다음과 같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등장한다. (영화 이미지)A. ‘우리들의 전쟁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와 같다. 그곳에는 두개의 이미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녀와 나. 그녀 다음에 내가 있지만, 난 그녀를 만난 적 없다. 그저 인지할 뿐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Our war, It's like...an image that comes from far away. There are two of them, side by side. next to her is me. I’ve never seen her before.)’고다르는 위 문장을 통해 이미지들에게 ‘그녀와 나’라는 육체를 부여한다. 이미지들은 비로소 탈-이미지화되어서,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게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된다. 고다르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그다음 영화는 여러 이미지(영혼)들의 배열과 조합을 보여주고, 나레이션으로 전쟁에 대한 참상을 묘사한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8번의 음악이 등장하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와 샹탈 아커만의 사진이 보인다. 고다
작성일 2025-02-28 작성자 화자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372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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