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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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976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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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주장문
*이 글은 '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철학적 입장에서 쓴 발표문입니다.세계라 함은 물질 세계, 가능 세계, 수학적 세계 등등 수많은 세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세계란 무엇일까요? 세계의 정의는 앞서 제시한 세계들의 공통점에 있는데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 각각의 세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질 세계는 물질적인 존재들의 집합이고 가능 세계에서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 수학적 세계에서는 수학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완전한 세계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논제에서 말하는 세계가 도대체 어떤 세계를 말하는지를 헷갈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시간에 이런 헷갈리는 세계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제시하여 그 시작점을 탐구할 생각입니다. 여러가지 세계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다루기 쉬운 세계를 꼽으라 하면 우리는 단언 물질 세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 세계는 겉보기에 완전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은 쉽게 입증될 수 있는데 가령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튀어나와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대가 말하는 물질 세계는 어째서 믿을만한 것이 되는가?” 그럼 우리는 물질 세계는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해 너무나 쉽고 실감나게 체험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한 사람은 또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감관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럼 우린 아마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그가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감관에 의해서 체험된 사실을 말하는가?” 그럼 우린 이때 무언가 논리가 잘못됨을 느끼면서도 그의 물음에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그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우리의 대화를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네의 주장을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런 거라네. ‘물질세계는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감관에 의해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는 감관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경우 만약 감관이 믿을만 하다면 물질 세계를 우리가 믿을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감관이 믿을만 하지 않다면 물질 세계 또한 믿을만 하지 않음을 찾을 수 있지만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가 없기에 물질세계는 ‘꼭 그래야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다른 대부분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못하고, 단지 순환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가령 수학의 경우에도 공리를 믿음으로서 시작하므로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이유가 없고, 또 가장 쉬운 사례로 종교의 경우에도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세워진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
작성일 2025-09-14 작성자 Ted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4상세보기 -
감상&비평 김수영의 시 중 3편의 ‘눈’의 의미
김수영의 시 중 3편의 ‘눈’의 의미 1. 서론 김수영은 어째서『눈』(1956, 1961, 1966)이라는 제목의 시를 3편이나 썼을까? 김수영의 시 세계에서 ‘눈’이라는 소재는 어떤 의미일까? 3편의 시는 모두 제목은 갖지만, 전혀 다른 시이다. 제목과 소재는 같지만, 그 속의 내용과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전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김수영의 작품 세계를 정의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세 편을 비교하면서 김수영이 시를 쓰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 판단해 김수영의『눈』(1956, 1961, 1966)이 쓰인 시대와 김수영의 시 스타일과 세계의 변화를 알고자 하였다. 시대적 상황과 김수영의 시 세계 변화는 사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김수영에게 분명 필연적이고 4ㆍ19 혁명(1960)과 5ㆍ16 군사정변(1961)을 기점으로 변화하는 김수영의 시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2. 본론 1) 1956년 소작「눈」 눈은 살아있다떨어진 눈은 살아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1956년 소작의 김수영의『눈』은 3편의 ‘눈’ 중 가장 유명하며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압도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 김수영의 치열한 현실 비판적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시 속에서는 “기침을 하자”와 “눈은 살아 있다”를 반복하고 변주시키며 작품을 진행한다. 작품에는 재밌는 지점들이 꽤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라는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눈을 떠올리면 대부분 사람은 내리는 눈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내리는 눈보다 “떨어진 눈”은 정적이다. 떨어진 눈의 정적인 이미지에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봐야 한다. 1950~1960년도에는 광복 이후 무엇 하나 잘 정리되지 않는 혼란이 있었으며 은폐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이미 다 내린 “떨어진 눈”은 김수영의 시선에서는 그저 겉보기에 집중한 그 당시의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김수영은 앞서 말한 “떨어진 눈”은 살아 있고 기침하며 가래라도 뱉자고 말하고 있다. 당시의 김수영은 이미 쌓인 악습(눈) 위에 목소리를 내는 것(기침)이 당시 김수영의 시론임을 알 수 있다. 김수영의「눈」(1956)에 담긴 김수영의 시 세계를 뒷받침해주는 작품으로 김수영의「폭포」를 들 수 있다. 시「폭포」에서는 “떨어진다”와 “곧은 소리”를 반복하며「눈」의 기침을 연상시킨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에서 드러난 김수영의 표현은 김수영의 시 세계를 일관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김수영의 시의 전반기 모습을 볼 수 있다. 2) 1961년 소작 「눈」 요 시인 /이제 저항시는 /방해로소이다이제 영원히 /저항시는 /방해
작성일 2025-09-13 작성자 한 휘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9상세보기 -
감상&비평 알 지 못하는 울음에 관하여 -청소년 과대대표의 관점에서- Op.70
왜, 하필 백은별인가? 왜 백은별이냔 말이다. 오래전에 비청소년이 되어버린 청소년이나 비청소년성을 겪어보지 못한 청소년이나, 사실은 어떤 영웅주의에 심취하여 이 시대의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기성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오래도록 고대하였다. 그것은 아주 추상적이고 거론되어 본 적도 없어 우리는 그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나, 창작자로서 창작물을 통한 해방, 그 해방자를 우리는 꿈꾸었고, 우리는 스스로 그 데데떼 같은 아이콘이 되고자 소망하여, 사실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단지 그 때문에 그대는 펜을 들지 않았는가? 자 여기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브하고 느린 전격전의 주인공, 교복을 입은 구데리안이! 도대체 우리의 황제는 어디 가고 이 오만한 코르시카인 소설가만 남았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후에 자기 창작물들을 모두 거둬들여 폐기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또 다른 압제자를, 물론 두 팔 벌리고 환영한 사람은 없겠지만은, 다시 튈르리에 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라 마르세예즈를, 혹은 에반게리온을 안다. 그러나 콩코르드 다리는 한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 자, 이제 다시 들어가라! 원래 있었던 네 로! 다시 짝사랑하거나 연애하거나 헤어지거나 늙어버리든가 심심하면 죽이던가 자살이라도 하란 말이다! 툇, 젠장할 거.
작성일 2025-09-12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147상세보기 -
감상&비평 어느 단상: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 당사자성
문학에서 (특히 소설의 경우) 저자가 3인칭 서술을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최근 한국문학에서 3인칭 서술 사용의 빈도가 가시적일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인상을 받고는 한다. 특히 그러한 양상은 미디어 매체에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고, ‘SNS’와 ‘알고리즘’이라는 자기 폐쇄적인 공간을 시대에 의해 수용하게 된 2030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서 크게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이들만 간단히 호명해 보자면, ‘김병운’, ‘김멜라’, ‘김지연’, ‘이서수’, ‘서이제’, ‘손보미’ 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대게 소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화자를 ‘나'라는 1인칭 단수로 설정함으로써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기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솔하게 이끌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민의 흔적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작가들이 1인칭 묘사를 애용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휴대폰이 이제 막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거나, 혹은 대학을 전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때 국내 문단을 주름잡았던 7080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서 사회를 마주하고 발화와 사유를 터득했던 것처럼, ‘2030’ 젊은 작가들은 휴대폰이란 자가폐쇄적/개인적 공간에서 세상을 마주했다. 그렇기에 ‘7080’ 세대 문인들이 운동권에서 세상을 배워나가며 ‘정치 문학’이라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2030 세대 문인들은 (옳은 명칭은 아니겠지만) ‘개인 문학’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1인칭 묘사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하지만 이 사례를 긍정적으로 (또는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뒤바뀐 양상을 검토 없이 수긍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뿐더러, 체화되지 않은 것들을 내부로 끌어들일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묘사법처럼 독자와 작품을 매개 하는 중요한 형식으로서 기능하는 것들은 더욱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런 1인칭 묘사/서술에 대해 조금 더 많은 논의를 거쳐야만 할 것 같다. 1인칭 묘사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논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작품 속 ‘나’가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구체화된 창조적 ‘인물'인지, 아니면 이면지 뒤에서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인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당사자가 아닌 사람(작가)’이 화자가 되어 당사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쩌면 작품의 윤리를 결정적으로 판가름 지을 수도 있는 흐릿하고도 모호한 자가당착의 경계에 봉착한다. 작가가 입을 열지 않는 한 그 자가당착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래 한국문학의 동시대적 담론이 과거에 비해 비교적 유보되어 있다는 인상이 적지 않게 드는 것 역시 당사지성에 대한 논의가 제한적인 자장 내에서 야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까.최근에는 유명 인플루언서나 연예인들의 일상을 담아낸 콘텐츠가 대중의 유흥거리로 소비되고 있
작성일 2025-09-11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82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리는 어긋남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마중도 배웅도 없이(박준)를 읽고
조부상을 당했다.장례식장에서 책을 읽었다. 제목은 마중도 배웅도 없이.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시집을 읽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박준 시인의 전작도 읽어보지 않았다.이렇게 말하는 건 내가 쫄리기 때문이지. 필자가 이 밑으로 쓸 건 해석이 아닌 감상이다. 틀렸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계속해서 어긋남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낯선 이미지들을 차용하는 것 대신에 친숙한 소재들을 활용해서 그것들 사이의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그게 꼭 남겨진 사람의 넋두리처럼 보였다.죽음은 불공평하다.필자는 이번 기회에 그걸 깨달았다.그러나 거기에 대고 박준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모든 건 원래 다 불공평하다.그래. 세상에 원해 공평한 건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다 양쪽이 똑같을 수 없는 거다.내가 한 가벼운 실수가 누군가에게는 중범죄처럼 느껴지고 (초승과 초생參)내 믿음과 현실이 같을 수는 없고 (공터參)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끊어지는 시점과 내가 그 사람을 끊어내는 시점이 같을 수는 없고 (마음을 미음처럼參)내가 바라보는 그 사람과 실제 그 사람은 같을 수 없고 (눈參)죽음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상參)그런 어긋남들은 종종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울게 하고, 비통하게 하고, 화가 나게 한다.그런데도 살아야 한다.왜냐면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니까.진실을 깨닫고 세상이 무너진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안 무너진다. 원래 그렇게 생겼으니까.못 받아들여도 상관 없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니까.그냥, 원래 그런 거다.사람은 원래 어긋난 걸 못 받아들이고, 세상은 원래 어긋나 있다.우리는 어긋남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작성일 2025-09-03 작성자 박하해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5상세보기 -
감상&비평 관계속 여백을 글로 채우며-박준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읽고
박준의 시집을 보고 있으면, 서정적인 문장과 서사를 보곤 한다. 그의 대표 시집인 의 제목만 봐도,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신작인 의 제목은 흥미가 가는 제목도 아니고, 서정적 이거나, 아름다운 제목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다. 그렇기에 그의 다른 시집과 대비할 때, 독자로써 흥미도는 떨어진다.하지만,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책을 열어, 차례를 봤다. 위 시집은 총 4개의 소제목으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다. 1부인 , 2부인 , 3부인 , 4부인 이렇게 시들이 구성되었고, 뒤에는 그의 산문과 해설 그리고 시인의 말이 있다. 이런 구성으로 볼 때, 위 시집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시집의 제목처럼 마중과 배웅이 없는 관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위 시집의 첫 세 시는 , , 이다. 위 제목들은 모두, 변화와 관련이 있다. 지각은 본래,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에서 변화되게 도착한 것이고, 미아는 알고 있는 길로 들어가야 할 것을, 모르는 길로 들어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사는 살고 있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앞 세 시는 모두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이르게 찾아오는 것은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 中사람들에게 휩쓸려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가방까지 어딘가에 흘리고 그렇게 서로를 잃어버렸을 때 中언제인가질렀어야 할 비명은사람의 말로 나누었습니다中이렇게 세 시 모두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야기하면서도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시 에서는 화자가 대놓고, 슬퍼하고, 타자에게 미안해 한다. 그렇게 행동하지만, 결국 결미에 이르면서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라고'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왜 이르게 왔는데, 한결같이 늦었다고 표현한 것일까? 나는 이를 역설이라 본다. 이를 이용해 해석하면, 현재 화자는 약속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만날 때마다 늦었던, 사람을 더 이상 보지 못하기에 생긴 자책 때문에 늦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라는 시에서 역시 화자는 자신을 찾지 않고, 너를 찾는다고 했다. 미아라는 설정의 화자는 거대한 은유이며, 너를 찾는다는 말도 결국 만나지 못한 사람을 찾는 것을 뜻한다.이는 앞서 말한 것 중 후자에 힘을 실어준다.마지막으로 역시 병원과 학교라는 이미지와 눈 밑에 불길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만나야 했던 사람이 죽었거나, 더 이상 보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감각적이게 표현하고 있다.위 시편들 이후 다른 시들을 보니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그 결과 파편적으로 구성되었지만, 유기적으로 이어진 시집의 구성이 그랬다는 답에 도달했다.특히 3부 중 은 그의 생활을 모르는 독자로써 매우 불친절한 시다.바람이 그 집문을 엽니다다시바람이 그 집문을 닫습니다 전문여기서 그 집은 위 주소에 대한 사유일까? 그러나 시 내부에서는 건물이나 장소에 대한 서사보다 바람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의 이미지만 그리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는 위 시가 어떤 의미인지, 어떤 것인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나 역시 여러 번 위 시만 재독했는데도, 의미 파악은 어려
작성일 2025-08-31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69상세보기 -
감상&비평 10대의 시선에서 바라본 학창시절의 노스탤지아 - 박상수 시인의 <후르츠 캔디 버스>를 읽고월장원 선정
평소 학창시절에 대해 생각하면 기쁨과 행복 보다는 후회,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고 끝나버린 인연, 어리숙했던 첫사랑이 떠오른다. 또한, 남들보다 빛나지 못 한 순간이 내 앞을 가려버린 적이 많아 성인이 되면 이때의 순간을 잊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그러나 이 시집은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인연에 대한 상념, 불안정한 10대의 모습, 청춘의 계절이라 할 수 있는 여름날의 후회등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빛나지 않아도 울적한 날이 달력을 가득 채웠어도 괜찮다는 말을 소녀와 소년의 시선에서 보여준다. 난 항상 누군가에게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어도 마음처럼 잘 되진 못 했고 오히려 엇나가는 모습이 대부분이였어서 나를 더욱 옭아맸다. 이 시집을 통해 나와 같은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지난 날의 후회와 추억을 담아서 빌려말할 수 있는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했다. 날려보낼 수도 있지만 휘발성이 강하기도 하고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올 후회라면 조심스레 건네보내는 게 매듭을 짓기 위한 좋은 스텝 중 하나일지도.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가기 전, 탐구하고자 하는 바를 밝히겠다. 박상수 시인은 소년과 소녀를 화자로 내세워 이 시집을 총 4부로 나눴다. 각 부에 있는 시들중 1-2편을 골라 분석한 후 제목이 ‘후르츠 캔디 버스’인 이유와 ‘10대의 시선에서 바라본 학창시절의 노스탤지아’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또한, 시는 소리를 축적해주는 예술인 음악과 함께라면 더 즐기기 좋다. 이와 어울리는 노래도 몇 번 담아볼 예정이다. 이 시집은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느 곳에 있는 화자인지 정확히는 알기 어렵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말처럼. 따지자면 과거에 더 가까울지도. 학창시절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에게 위로와 행복 또는 물기어린 슬픔을 선물할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떤 감정이든 소중히 품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시집이 바라는 바가 그런 게 아닐까라는 조심스런 나의 생각이다. 이런 말이 있다. ‘이럼에도 저럼에도 나는 모두를 사랑해!’ 이 시집을 관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섭하다. 작가의 말이 책을 관통한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먼저, 2006년 2월 구판 속 시인의 말을 보자. ‘괜찮니? 그래, 오늘은 잠깐 너를 보러 온 거야…… 달이 있고 여전히 이곳엔 지구인의 폐기된 기억이 떠다닐 테지만.‘ 시인은 여기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너’에게 말을 건넨다. 뒷 부분을 보면 달, 지구인의 폐기된 기억 … 아마 시인이 말하는 ‘너’는 외계인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버리는 걸 넘어 폐기하고 싶었던 기억 옆에서 부르는 미지의 존재라니. 아무래도 주인공은 무척이나 외로운 상태라고 생각했다. 잠깐 보러온다는 말이 조금 애달팠다. 모두들 이런 경험 한 번 즈음은 있을 것이다. ‘나.. 학원 가야해서
작성일 2025-08-30 작성자 yerbi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29상세보기 -
감상&비평 웹소설의 인식에 관한 고찰과 몇 가지 진주들
우선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할까 한다.난 중학교를 재학하는 3년 간 국문학이랄까, 순문이랄까, 이제는 그 경계마저 희미해진 분법 속에서 특히 웹소설과 가까이 지냈다. 비록 지금은 순문학 – 웹소설과의 대척하는 문학의 종류로써 이하 순문이란 표현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그 단어 사용의 정확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국문학의 긴 역사를 온전히 이해해야만 하고, 내게는 벅찬 일이다. 미리 양해 구한다, -을 지향하고 쓰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웹소설에 관해 오해하고 있는 지점들에 대하여 몇 가지 의견을 남기고자 한다. 아마 몇 가지 작품들을 중점으로 얘기하게 될 것이다.‘모든 웹소설들은 형편없는 수준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활자 조합물일 뿐이다.’약간은 극단적인 말이지만 동의하는 이들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아마 웹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자들은, 혹 인기 작품 몇 화만 읽다가 때려치운 자들은 그 수준을 얕잡아볼 것이다.웹소설의 구조에 대해 말해보자. 그것들은 편당 연재다. 순문 쪽에서도 장편소설이 신문 등을 통해 연재되고는 했었지만 약간은 결이 다르다. 독자들은 1화에서 재미가 없으면 1화에서 읽기를 포기한다. 5화에서 재미가 없으면 5화에서 읽기를 포기한다. 웹소설 작가들에게는 한 화 한 화 독자들을 재미의 올가미로 붙잡아야만 하는 숙명이 존재한다. 웹소설 한 화의 평균적인 분량은 5500자다. 작가들은 나름의 재미요소들을 그 5500자 내에 필수적으로 심어놔야만 한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웹소설들이 아주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어쩌면 웹소설만의 특징이다. 웹소설을 사람들이 가볍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할 터다.또 다른 특징으로는 문장의 간결성을 말할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웹소설은 스마트폰, 혹은 데스크탑 등으로 읽히는데, 웹소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가독성이다. 한 문단 내에 많은 문장들이 몰려서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이른바 벽돌체는 웹소설 작가들이 특히 기피하곤 한다. 오히려 한 두 문장 마다 행갈이를 하며 화면 내에 여백을 늘여 문장에 집중시키는 스타일이 대유행이다. 웹소설에겐 그것이 정도다.가벼운 이야기, 가벼운 문장들, 쾌락에만 치중하는 작품들. 웹소설에 대한 인식이 이러한 이유는 대부분의 인기작들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전술한 특징들을 구사하지 못한 작품들은 태반의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다. 옳고 그름이 아닌, 독자들의 성향이 그렇다.이제부터는 이 웹소설의 문법들을 약간씩 벗어나며, 가벼움을 탈피하고, 혹 가벼우면서도 울림을 주는, 감명 깊게 읽은 작품들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그것들은 일종의,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들이다. 후술할 글들은 일종의 추천사들이라 보아도 무방하다.로드워리어 작가의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은 보통의 규율을 무시한 명작이다. 명작이란 표현이 남용되는 시장이라곤 하지만 난 단정할 수 있다. 보통의 웹소설들이 화마다의 내용을 연결 지으며 서사를 만드는데, 로드워리어의 일명 <아집숨>은 한 화 한 화가 개별적인 서사를 그려내고 있는 옴니버스식 구조의 소설이다. 이야기가 중후반부로 갈수록 이 차별화
작성일 2025-08-30 작성자 구포대교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273상세보기 -
감상&비평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책은, 친구 인선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경하로부터 시작된다. 급히 달려간 병원에서 손을 잃은 목수는 전에 없이 수척한 모습으로, 그럼에도 약하거나 무너지지 않은 채 그녀를 맞는다.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녔다. 완전히 절단된 손가락을 되살리는 것에는 끔찍한 통증이 수반된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새로운 고통이 뼛속까지 스민다. 의사는 말한다.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지속될 것이라고.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는 비명도 없이 스러져 간 수만 명의 숨 막히는 고통 속으로 이어진다. 4월의 제주, 지독하기 짝이 없는 야만과 광증이 온 섬을 뒤덮었던 때가 있었다. 티 없는 순박함을 총검으로 난자하고 환호성을 지르던 때가 있었다. 갓난아이를 난도질하는 광기가 허용되었던, 오히려 포상되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가장 어둡고 비좁은 곳에서 소리없이 죽어간 사람 들이 있었고, 백골로 와해돼 바스라진 영혼들이 있었다. 그날의 총성이 너무도 생생해 잊혀지지 않는다 했다. 치매에 걸린 인선의 엄마는 흐려지는 정신에서도 동생을 찾았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역사적 치매 속에 살아 왔다. 정부의 은폐와 회피 속에서 4.3 사건은 한동안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못했다. 독재 정부는 폭력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치매 환자로 만들었다. 무력을 통해 망각을 강요했고, 선혈이 채 마르지 않은 상처를 대강 포장한 후 작별을 고했다. 참척의 슬픔과 단장의 고통을 낡은 공포심으로 치부하면서, 안녕할 수 없는 이들에게 안녕을 통보하면 그만이었다. 안온하였으리라. 제 발 밑에 깔린 뼈를 애써 잊은 채 고개 돌린 삶은 퍽 편안하였을 것이다. 무지는 쉬운 일이다. 외면은 그렇게 큰 노력과 의지를 요하지 않는다. 앎은 그만큼 괴롭다. 떳떳해지기로 결심한 순간, 딱지를 긁어 내고 환부를 헤집어 심연 속에 내재한 고통과 오롯이 마주해야만 한다. 무매에서 깨어나 불편한 진실 속에 제발로 걸어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면, 스스로 불러온 고통에 분노하고 가슴 아파할 준비가 되었다면 나는 비로소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작가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크기의 고통을 잔인하리만치 세밀한 문장으로 벼려 낸다. 잘못된 과거의 참혹한 상처들을 하나하나 들어 내고 죄를 묻는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의 살갗을 찌르는 바늘이 된다. 독서의 과정은 더없이 고통스럽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다. 인선에게 일어났던 사고는, 잘려나간 손가락을 봉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술을 마치고 처치를 마무리한 후에도, 매 3분마다 바늘로 찔러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야 한다.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통증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리고 만다. 없어서는 안 될
작성일 2025-08-30 작성자 작은토마토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63상세보기 -
감상&비평 나를 형성한 어느 작가 - 박민규에 관하여
박민규가 2000년대를 풍미한,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들 중 하나임은 부정하기 힘들 터다. 그의 파괴적인 문체는 시대를 넘어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원래 문학이란 시대를 관통하며 전해지는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아무튼, 박민규는 김승옥과 더불어 나의 문체를 뒤흔든 작가이다.그는 뛰어난 이야기꾼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문장가다. 내가 바라본 그는 그렇다. 앞서 난 그의 문체를 두고 파괴적이라 말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는 문체였던 것이다. 파격을 넘어선 파괴다.그는 문장을 해체하고 재배열하며 글을 바라보는 관점을 넓힌다. 시와 비슷하다. 산문의 형식을 빌려 쓴 산문시가 대세인 요즘인데(나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그러하다)그의 소설은 운문의 형식을 빌려 쓴 시가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문장의 사이에 문단을 개항하는 식의 호흡은 분명 산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체였다.고등학생 1학년, 그러니까 고작 1년 전이다. 그의 글을 접한 나는 이야기보다 문체에 매료되었다.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소설을 막 쓸 때, 어느덧 나는 박민규의 문체를 따라하는 자신을 발견 가능했다. 함부로 따라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 한편에서 들었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문장 사이에서 문단을 나누는 방법은 문장의 호흡을 조절하는 최적의 방안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단순 쉼표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난 몇 가지 절충안으로써 나만의 스타일을 그의 문체에 섞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 좋은 문체이긴 했어도, 난 나조차도 나의 글을 보고 박민규의 아류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좋지 않았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본 소제목에서 문단으로 이어지는 글을 참고하기도 했다. 공모전 제출 작에서도 문단 첫 단어를 개항하는 식으로(설명이 어렵다)쓴 글을 냈다. 당장 글틴에서도 나의 글 몇 개를 보면 그런 스타일의 글들이 꽤 있을 터다. 특히 <꼰대가 아니라, 나!>는 의도적으로 박민규의 문체를 모방한 글이다. 따라서 문장은 있지만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스스로 느꼈고 멘토님의 의견도 그러했다.(이야기의 빈약함이란 포인트에서 말이다.)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될지 모르겠다. 당장 구상을 하고 쓰는 게 아니라 손가락에게 의식을 맡기고 적어내리는 글이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박민규에 대한 글을 쓰게 됐다. 그는 내 손가락에게마저도 깊게 스며들었다. 말하자면 의식의 그림자에서조차 그에 대한 존경이 숨어 있었다.아, 몇 마디를 끝으로 글을 마치겠다.박민규는 표절 작가다. 아마 표절의 공론화와 시인으로 인해 그가 집필활동을 더 이상 활발하게 하지 않는 것일 거다.(계간지 등을 통해 단편을 드문드문 발표한다고 듣기는 했다,)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표절은 명명백백한 그의 잘못이었으므로 비판하는 자들에게 따로 반박할 수는 없지만. 그의 표절작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단편소설 <낮잠>으로 알고 있다.(더 있을 수도 있다. 아마도)우선 앞의 작품은 내가 처음 본 그의 작품이었으므로 표절임을 알고 깊이 안타까웠다. 심지어
작성일 2025-08-28 작성자 구포대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45상세보기 -
감상&비평 삶의 계절 앞에서 폭싹 속았수다
*글에 들어가기 전, 본문은 최신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2025년도 상반기 대한민국 콘텐츠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 무엇인가는 질문에 나는 고민하지 않고 이 작품을 말할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라고. 이를 증명하듯 제61회 백상 예술대상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받았으며, 제4회 청룡 시리즈 어워즈에서는 대상을 받았다. 이처럼 는 올해 상반기 나온 한국 시리즈 중 높은 위상과 인기를 보인다. 그럼, 왜 이 드라마가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우리의 삶을 담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이를 알려주듯 드라마의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1.춘하추동-작품의 구성드라마는 4주 동안 4개의 시리즈로 나누어 방송되었다. 한 주에 4화씩 총 16부작. 그렇다면, 이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이는 각 화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1화 4화 , 7화 ,12화 마지막으로 15화 이로 볼 때, 드라마의 각 시즌은 춘하추동, 즉 삶의 사계절을 그리고 있다.1-1:춘-사랑과 시작어떤 사람들은 봄이라는 계절을 보면, 사랑을 떠올리곤 한다. 그도 그런 게, 봄에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드라마의 시작인 1막은 애순과 관식의 사랑을 보여준다. 물론 봄에도 미세먼지 같은 불청객이 있는 것처럼. 그들의 봄에도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야반도주한 부산에서 여관 주인에게 돈을 뜯기고, 관식의 할머니인 천우보살의 반대, 그리고 애순의 엄마 광례의 죽음까지. 모두 봄 파트에서 일어났다. 그런데도, 관식과 애순은 금명,은명,동명을 출산하고, 애순의 친할머니 춘옥이 관식과 애순에게 배를 사주고, 애순이 제주 도동리 부 계장이 되는 등 뜨겁고 행복한 일들이 그들을 반겼다.1-2:하-갑작스러운 이별 그리고 연대그러나 늘 행복할 것 같았던, 그들에게도 태풍이 몰아쳤다. 바로 태풍과 함께 찾아온 동명의 죽음. 애순이 금명이를 챙기고, 관식은 마을 사람들과 도량을 정비하러 갔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한동안 애순과 관식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와 더불어, 자식인 금명과 은명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이 애도하고 슬퍼할 수 있던 시간은 단 사흘. 관식은 금명의 시험지와 육성회비를 보고, 다시 배를 탔고, 애순 역시, 웃지 못하는 은명을 보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마치 시어머니인 권계옥의 "살민 살아져."라는 말처럼.하늘이 그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고 도왔을까? 금명은 학교에서 늘 좋은 성적을 받아왔고, 그 덕분에 애순의 꿈이었던 육지 대학인 서울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애순은 도동리 최초의 여자 계장이 되었다.1-3:추-어지러운 삶하지만, 3막에 다다르고서 분위기는 많이 바뀌게 되었다. 금명이 일본 유학을 보내기 위해, 애순은 지금 껏 살아온 엄마 광례집을 팔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금명을 더 좋게 키우고 싶었기에. 그러나 금명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서울로 올라와 박영범과 사랑을 맺고, 대리시험을 거부했다가 도둑 누명을 받는 등, 그녀 역시
작성일 2025-08-05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552상세보기 -
감상&비평 그날의 우리에게 천국어 변명-조성래 <천국어 사전>을 읽고
변명이라는 단어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친구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동생을 보면 훈수라고 불리는 잔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 ,그들은 뭐 때문에 늦었다고, 뭐 때문에 이것을 했다고 변명한다. 나 역시 변명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나는 위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명백한 잘못을 한 상황에서 변명하는 사람을 싫었다. 또한 위 생각은 나에게도 적용이 되었다.그러나, 변명이 나오는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경우가 많았다. 내 경험으로 이야기하면, 작년에 담임 선생님께서 "희찬이가 학교에 남아 있으면, 좋은데 기침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 선생님은 네 담임이기도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담임이기도 하니까."라는 변명으로 내게 자퇴를 권했던 지난여름과 같은 상황이 있다. 처음에는 그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았다. 역으로 화가 나고, 억울했다. 한 사람만 마음 편하게 지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렇기에 변명이라는 행위 자체를 좋게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나아가던 중 조성래의 을 선물 받았다. 이렇게 나에게 온 그의 작품은 변명 덩어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위 작품에서 말하는 변명은 밉지 않았다. 역으로 그의 말에 동요되었다.안개를 걷으려고칼을 휘두르며{시인의 말}시집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이는 말이 있다. 시인이 위 시들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 즉 시인의 말이다. 그러나 위 시집의 시인의 말은 안개를 벗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는 조금은 날이 선 문장이다. 안개를 걷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시인은, 안개 속을 걷는 존재처럼, 춥고 무서울 것이다. 그럼에도 안개를 걷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는 표현은 위 추위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읽힌다. 따라서, 위 시집은 시인이 자신에 고통을 잊게 하려고 쓴 시들이라는 것을 어림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차례를 보면 위 시집은 단순한 사회적 고통이 아닌, 시인이 살아오면서 느꼈을 고통에 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위 시집의 챕터는 총 여섯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인 부터 2.3.4부인 , 5부인 와 6부인 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보면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왜 하필 6일까? 서양에서 6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의 시집 은 시인의 삶에서 지금까지 느끼고 있는 것. 특히 죽음과 관련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을 암시 시켜준다.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을 것처럼흰 것들이희구나언젠가부턴가착한 사람을 만나면미안할 일이 닥쳐올 것만 같은하얀 구름하얀 파도아무런 악의도 미움도 없었는데심지어 사랑도 없었는데한 사람이 자신의 시신을 끌고해안선을 따라가네:전문위 시는 시집을 열고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시이다. 제1부의 제목이자, 1부의 첫 글의 제목인 위 시는 무엇을 전달하고 있을까? 아마도, 처음 나오는 시이니, 시인이 하고픈 말이 가장 많을 것이다. 일단 의 화자는 착한 사람을 보면 미안할 일이 닥쳐올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 뒤 따르듯 하늘 위의 구름도, 바다 위의 파도도 전부 흰색이다. 시인은 흰 것을 순수의
작성일 2025-07-31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508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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