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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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064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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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모모는 서로 닮아있다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 속 모모와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속 모모를 아우르는 말이다. 미하엘 엔데는 1973년 독어로 세상에 모모를 알렸다. 작중에서는 나이가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여자아이 모모가 나온다. 마을엔 회색 신사들이 등장한다.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에게 시간을 저축해 놓은 다음 이자까지 받아서 쓰면 더욱 이득 아니겠냐며 시간 저축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는 술수이며, 시간을 저축한 사람은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 까닭을 알지 못한 채 모든 일에 서두르게 된다. 회색 신사들은 많은 사람의 시간을 빼앗았다. 모모는 이 사실을 알아챘고 시간을 관리하는 호라 박사의 집으로 간다. 모모는 호라 박사의 도움을 받아 회색 신사들을 없애고 시간을 되찾는다. 사람들이 회색 신사에게 시간을 저축하고 모든 일에 서두르게 될 때 모모를 비롯한 아이들은 시간을 저축하지 않는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시선을 통해 시간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고 더 의미있는 일에 사용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회색 신사들의 말에 혹하고 시간 계약을 한다. 이는 결국 더 좋은 삶, 의미있는 삶을 살고싶다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고 사람들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시간을 아껴야 할 이유를 몰라서 저축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이 옳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사람은 늘 더 나은 삶을 생각한다. 그 위치에 가면 더욱 나은 삶을 바란다. 그러나 나은 삶의 조건도 없을 뿐더러 그 한계도 없다. 결국 사람은 현재 삶의 형태에 불만을 품게 된다. 모모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종착지는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모는 호라박사에게 가기 위해서 언제나 없는 거리를 거쳐야 했다. 이곳은 후퇴하거나 멈추어 있을 때만 전진할 수 있는 길이다. 이는 시간의 본질을 사람들과의 명확한 대비로 표현한 것이다. 그 후 모모는 사람들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시간 창고에 다가가는 등 적극적 행보를 보인다. 모모의 순수한 마음은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한국에 도서관이 세워졌다. 전북 남원시에 위치한 모모에게말걸기작은도서관은 주변에 모모 닮은 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자기 앞의 생은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 라는 필명으로 1975년 출간했다. 작품 주인공 모모는 프랑스 빈민가에서 창녀의 아이들을 돌보는 로자 아줌마와 살고 있다. 로자 아줌마는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거동이 어려웠고 돌봐야 할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모모의 친부가 아이를 돌려달라고 말하지만 로자는 모모를 돌려보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모모는 자신이 10살이 아니라 14살임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로자 아줌마가 죽고 모모는 시체와 3주가량 동거한다. 모모는 순식간에 4살을 먹게되자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작성일 2025-10-12 작성자 신기루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9상세보기 -
감상&비평 박유하 특별공로상 사건과 문학의 폭력성
출판문화협회가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특별공로상 수상을 취소했다. 많은 이들이 안도하는 분위기다. 펜을 잡고서 나이브하거나 두루뭉실하게 덮고 넘어가기엔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문학과 폭력의 관계가 말이다. 벌써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1주년이다.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워낙 많이 다루어져 어느 정도 대중적인 소개는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문학은 모든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 그녀의 말은 서정적이면서도 한의 감정을 보여주는 우리 문학의 한 단면을 잘 노정하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 고민과 사유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청소년 작가’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관련이 없으므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폭력이야말로 문학의 트리거이고, 그것은 문학의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플롯에 대하여 설명할 때,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배치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갈등 또한 폭력이며, 캐릭터 간의 서사의 깊이감을 주는(적어도 준다고 여겨지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갈등의 플롯은 어느 정도 언어가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인간 본능, 그러니까 말하자면 폭력성에 대한 어필이라 볼 수도 있다. 가령 긴장감이란 요소를 든다면, 서사적 긴장감은 어느 정도 인간이 진화론적으로 폭력성을 발달시키며(창을 들고 은밀히 사슴에게 접근하는 네안데르탈인을 상상해 보라. 클라이막스 직전의 긴장감이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못할 것이다) 생기는 부수적인 직관들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관들을 유용함과는 무관하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폭력이 긍정적인 관점에서 제시된 경우는 드물다. 아니, 정상적인 문학 안에서는 없다고 확언할 수 있다. 문학가들은 외교관이나 기업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안티테제로서, 그들이 초래한 모든 차악적인 관념들을 비판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문학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윙어의 강철폭풍 속에서가 특히나 그렇다) 그것들은 파시즘으로 규정되고 맥이 끊겼다. 그러나 문학이 폭력을 다룸은, 폭력을 다루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가져온다. 창작자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문학은 때론 폭력을 호도하고, 편향시키며 왜곡이나 체리피킹이 당연히 무엇보다 잘 일어나나, 우리는 아주 원론적인 부분만 규정할 뿐 연속적으로 얽혀있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해법은 주지 못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예시를 들어보자면, 만약에 박유하가 아니라 어느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커티스 르메이의 도쿄 대공습이 현대적인 총력전에서 아주 적절한 방식이라고 칭찬한 어느 냉혈한 군사학자가 받았다고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깊게 이야기해 본 주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10만 명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유 없이 살해된 데에 있어 우리는 그 또한 비판해야 하고, 또 수상이 결정된 바가 있다면 또한 취소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정확한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작가가 다룬 것이 그것의 당
작성일 2025-10-03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88상세보기 -
감상&비평 호접지몽 세계: 텍스트와 이미지의 (불)가능성
x=x 칠판에 수식이 쓰여있다. 이 기호식(혹은 방정식)을 마주하게 되면 이것이 품고 있는 부당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특히 위 방정식에서 두 개의 기호 ‘x’를 매개하고 있는 등호(=)는 일종의 ‘같다(same as)’의 형용사처럼 사용되곤 하는데, 우선적으로 칠판에 쓰여진 ‘x’가 뒤 따라오는 x와 동일한 기호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기호로서 ‘x’는 ‘x’ 일 것이다. 그러나 ‘칠판에 그려진 피상적인 기호’로서도 동일할까? 두 ‘x’는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칠판 위에서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둘 중 다른 한쪽의 선이 더 길거나 짧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접근법에 따라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기호의 ‘가변적 성질’을 감지하게 된다.문학의 미술성텍스트(기호)에 새롭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다. 특히 말라르메와 블랑쇼, 그리고 바르트의 작업들은 텍스트에 ‘정신성(mental)’이라는 유령을 덮어씌움으로써, 기호의 본질을 들여다보도록 만든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반대로, 텍스트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 역시 있었다. 편의를 위해 이 시도를 ‘텍스트-이미지’라 부르도록 하자. ‘텍스트-이미지’는 (내가 방정식을 부정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의 피성성을 중심으로 시도되어 왔다. 이 접근법으로 시도된 작품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이상의 일 것이다.이상 숫자와 기호들이 열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하게 되면 이상하게 텍스트 보다 ‘정사각형’이라는 이미지, 또는 측면에 위치한 화살표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왜?시간이 지나면 숫자와 기호들 역시 점차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숫자와 기호에 대한 그 어떤 서술도 부가적으로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위 작품만 보고서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뜻을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한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숫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숫자인가?”, “기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호가 맞을까?’ 이런 질문들을 거치게 되면 사실상 이 작품이 텍스트에 대한 기준을 자가의심을 통해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 놓인 한자마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가 맞는지 의문에 들게 한다. 이곳에서 텍스트는 ‘기의’로서 공용성(共用性)을 상실한다. 요컨대 로만 제이콥슨(Роман Якобсон)은 “공용성을 상실한 기호는 ‘기표’ (또는 이미지)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기의(記意)가 ‘읽는 것’이라면, 기표(記標)는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 (see)’과 ‘읽(히)는 것(read)’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는 것이 인지(recognization)의 영역이라면, 읽는 것은 ‘이해(understand)’의 영역이다. 인지의 경우는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감각’의 영역인 반면, 이해는 특정한 상황과 사건을 받아들이기 위해 시간과 논리를 함유한 ‘지성’을 필요로 한다. 특히 문학 - 처럼 텍스트가 보편적으로 기의로 받아들여지는 상황 - 의 경우는
작성일 2025-10-02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5상세보기 -
감상&비평 시에서 등장하는 장르적 요소 분석
시에서 등장하는 장르적 요소 분석-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과 서호준 ‘소규모 팬클럽, 엔터 더 드래곤’을 중심으로 목차 1. 서론 2. 본론 1)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2) 서호준, ‘소규모 팬클럽’과 ‘엔터 더 드래곤’ 3. 결론 4. 참고문헌 1. 서론 최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어 시에 장르적 요소를 도입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변혜지 시인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김누누 시인의 『착각물』, 서호준 시인의 『엔터 더 드래곤』 등은 게임이나 장르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들로, 점차 문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경향을 단지 모더니즘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본고에서는 시대적 흐름 외의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발생한 장르적 특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장르성이 시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현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본론 1)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은 변혜지 시인의 첫 시집으로, 제목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줄여서 ‘멸살법’)과 유사하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제목에 대해 합의된 차용이며 표절은 아니라고 밝히며, 시집의 내용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제목 자체가 특정 장르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며, 이는 시집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다행이야, 정말.네가 아니라 나라서. 온몸이 박살 난 채 나와 동갑인 여자애는 웃고 있다. 내장과 뼈를 질질 흘리며 그 애는 세계를 위한 싸움을 이어 나간다. 저 여자애는 세계로부터 무엇도 받지 못했다.전부 내 잘못이야. 그 애에게 힘을 준 것은 내 잘못이 야. 나는 몰랐어. 이럴 줄 몰랐어⋯⋯ 여자애의 아버지는 여자애의 이름을 부르며 마구 웃어젖힌다. 모르는 사람들이 잘못한 사람을 껴안고 있다. 모두가 나와 동갑인 여자애를 쳐다보았고 이렇게 많은 장면이 지나가는 동안에도여자애의 내장은 쏟아지고 있다. 초능력을 쓸 줄 아는 손들이 움직이고 있다. 다치지 마. 이제 제발 너를 위해서 살아. 만화책 속의 여자애에게 들려주려고 나는 고함을 지른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는 모습이 더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려 했고 으으응⋯⋯ 으으응⋯⋯ 보일러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러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 세카이계 만화/ 변혜지 * 대표적인 시로는 『세카이계 만화』가 있다. 이 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노벨에서 자주 등장하는 세카이계(Sekai-kei)의 전형을 따라가며, 주인공 개인의 감정과 세계의 운명이 직결되는 구조를 담고 있다. 시 속에서는 "내장과 뼈를 질질 흘리며 싸우는 여자아이", "초능력을 쓰는 손들", "보일러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 SF적이고 과장된 이미지들이 사용된다. 이러한 몽타주적 표현 기법은 장면을 빠르게 전환하며 독자에게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장르 문학적 요소들이 모더니즘적 감수성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한 휘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8상세보기 -
감상&비평 산소
깊은 산골 새하얀 이불 덮고 누워계신 젊은 노인 파리한 황태 한마리, 식은 전 삼키고 다시 드러눕는다 술 한모금 머리 위에 적시고 다시 외로워진다 뭐가 그리 급했냐는 할매의 말에 대답도 안하고 철 없는 소년의 눈을 뜨겁고 가득히 매운다 젊은 노인, 소년과는 생면부지인데도 나 왜 그리도 갈망하랴 옆엔 하냥 없었는데두고 간 따스한 기운은 무엇이고 참, 답답하다
작성일 2025-09-29 작성자 굿보이b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36상세보기 -
감상&비평 같은 캐치볼에서 다른 궤적 만들기월장원 선정
가끔씩 시를 쓸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제목이 정말 누구와도 겹치지 않을까? 며칠 전 그 궁금증을 타파할 수 있었다. 그때 난 안희연 시인의 과 황인찬 시인의 를 읽고 있었다. 각 시집에서 이라는 제목의 시가 각각 있었다. 같은 제목이지만 내용은 다르게 쓰여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말하고 싶었다. 사람마다 각자의 세계가 생기고 구축하고 그게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오로지 자신이 되니까. 평소 시를 읽거나 쓰는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만 최근 들어 ‘시란 뭘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 시들은 그런 생각을 조금이나마 잊히게 해줬다. 시를 잘 모르거나 조금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많고 많은 시 중에 이 시들을 고른 이유. 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어 이런 흥미를 발견하고 또 같은 제목으로 쓰여 다른 내용인 시를 각각 분석해보면 어떨까?라고 느낀 종착점. 평소 캐치볼하면 ‘주고 받는다’, ‘손에 꽉 잡힌다’라는 특징이 떠오른다. 과연 이 시도 그런 내용만 가득할까?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또한, 여기서 보여주고 싶은 건 각 시인의 시를 분석하고 이들의 시 세계와 마인드를 엮어 나타내기. 자, 이제 한 번 캐치볼을 던져보자! 캐치볼 / 안희연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다 불타는 공이었다 되돌려 보내려면 마음의 출처를 알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투수는 보이지 않고 언제부터 내 손엔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을까 벗을 수 없어 몸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알 수 없겠지, 이 모든 순서와 이유들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나에게 다정해지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었음에도 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왔을 것이다 불행을 막기 위해 더 큰 불행을 불러내는 주술사처럼 뭐든 미리 불태우려고 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 그래도 가끔은 지평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불타는 공이 도착했다는 것은 불에 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글러브를 단단히 조인다 -> 이 시는 화자가 예고없이 날아든 공을 받는 상황이다. 처음엔 공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더 커보인다. 전개될수록 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다시 날아오는 것에 대한 준비를 마친다. 캐치볼은 순식간에 날아오는 특성이 있다. 단순히 불타는 공은 공 그자체가 아닌 예고 없이 우리에게 오는 시련과 고난을 의미한다. 모두 그런 경험 한 번 즈음은 있을 것이다. 갑자기 무기력해진 날, ‘인생노잼시기’, 우산이 없는데 소나기가 내림 etc. 이런 시기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지만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다. 시인을 화자가 대신해 이 시로 알려주고 싶은 건 ‘고난과 시련에 대한 의지하는 법’이다. 처음엔 마음의 출처도 몰랐지만 나중엔 또 다른 불행을 일부러 부르고, 고독을 이해하게
작성일 2025-09-28 작성자 yerbi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22상세보기 -
감상&비평 .작성일 2025-09-23 작성자 노도현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85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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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아가씨
“어? 저기요”처음 들은 목소리다아닌가 조금은 익숙한가대답을 하려 했지만무언가에 잡혀 뒤를 돌아볼 생각을 못했다그냥.내 길을 다시 걸어간다뭐, 필요하면 다시 부르겠지얼마나 걸었을까또 그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아니 잠시만요!”신이 내린 결정일까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가볍게 몸을 돌려 바라본다“누구세요?”그사람의 표정은 잊을수가 없다당황스러움,허탈함,슬픔너무 많은 감정이 들어가 있어서너무 많은 생각이 보여서그사람은 아무말 없이 나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데려간다“내 말 좀 들어 이상한데 가지 말고 쫌..!”이사람은 왜 화가 났지?나를 아나?의심을 가득 품음 채 도착한곳은 집이였다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그이의 얼굴을 본다“아들..? 집에 언제 왔어?”눈물을 흘리는 그이를 보고난 또 다시 의문을 품는다
작성일 2025-09-20 작성자 박재영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17상세보기 -
감상&비평 '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주장문
*이 글은 '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철학적 입장에서 쓴 발표문입니다.세계라 함은 물질 세계, 가능 세계, 수학적 세계 등등 수많은 세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세계란 무엇일까요? 세계의 정의는 앞서 제시한 세계들의 공통점에 있는데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 각각의 세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질 세계는 물질적인 존재들의 집합이고 가능 세계에서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 수학적 세계에서는 수학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완전한 세계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논제에서 말하는 세계가 도대체 어떤 세계를 말하는지를 헷갈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시간에 이런 헷갈리는 세계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제시하여 그 시작점을 탐구할 생각입니다. 여러가지 세계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다루기 쉬운 세계를 꼽으라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물질 세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 세계는 겉보기에 완전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은 쉽게 입증될 수 있는데 가령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튀어나와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대가 말하는 물질 세계는 어째서 믿을만한 것이 되는가?” 그럼 우리는 물질 세계는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해 너무나 쉽고 실감나게 체험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한 사람은 또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감관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럼 우린 아마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그가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감관에 의해서 체험된 사실을 말하는가?” 그럼 우린 이때 무언가 논리가 잘못됨을 느끼면서도 그의 물음에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그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우리의 대화를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네의 주장을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런 거라네. ‘물질세계는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감관에 의해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는 감관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경우 만약 감관이 믿을만 하다면 물질 세계를 우리가 믿을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감관이 믿을만 하지 않다면 물질 세계 또한 믿을만 하지 않음을 찾을 수 있지만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가 없기에 물질세계는 ‘꼭 그래야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다른 대부분의 세계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순환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수학의 경우에도 공리를 믿음으로서 시작하므로 필연적일 이유가 없고, 또 가장 쉬운 사례로 종교의 경우에도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세워진 것에 지나지
작성일 2025-09-14 작성자 Ted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05상세보기 -
감상&비평 김수영의 시 중 3편의 ‘눈’의 의미
김수영의 시 중 3편의 ‘눈’의 의미 1. 서론 김수영은 어째서『눈』(1956, 1961, 1966)이라는 제목의 시를 3편이나 썼을까? 김수영의 시 세계에서 ‘눈’이라는 소재는 어떤 의미일까? 3편의 시는 모두 제목은 갖지만, 전혀 다른 시이다. 제목과 소재는 같지만, 그 속의 내용과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전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김수영의 작품 세계를 정의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세 편을 비교하면서 김수영이 시를 쓰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 판단해 김수영의『눈』(1956, 1961, 1966)이 쓰인 시대와 김수영의 시 스타일과 세계의 변화를 알고자 하였다. 시대적 상황과 김수영의 시 세계 변화는 사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진 김수영에게 분명 필연적이고 4ㆍ19 혁명(1960)과 5ㆍ16 군사정변(1961)을 기점으로 변화하는 김수영의 시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2. 본론 1) 1956년 소작「눈」 눈은 살아있다떨어진 눈은 살아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1956년 소작의 김수영의『눈』은 3편의 ‘눈’ 중 가장 유명하며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압도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 김수영의 치열한 현실 비판적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시 속에서는 “기침을 하자”와 “눈은 살아 있다”를 반복하고 변주시키며 작품을 진행한다. 작품에는 재밌는 지점들이 꽤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라는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눈을 떠올리면 대부분 사람은 내리는 눈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내리는 눈보다 “떨어진 눈”은 정적이다. 떨어진 눈의 정적인 이미지에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봐야 한다. 1950~1960년도에는 광복 이후 무엇 하나 잘 정리되지 않는 혼란이 있었으며 은폐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이미 다 내린 “떨어진 눈”은 김수영의 시선에서는 그저 겉보기에 집중한 그 당시의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김수영은 앞서 말한 “떨어진 눈”은 살아 있고 기침하며 가래라도 뱉자고 말하고 있다. 당시의 김수영은 이미 쌓인 악습(눈) 위에 목소리를 내는 것(기침)이 당시 김수영의 시론임을 알 수 있다. 김수영의「눈」(1956)에 담긴 김수영의 시 세계를 뒷받침해주는 작품으로 김수영의「폭포」를 들 수 있다. 시「폭포」에서는 “떨어진다”와 “곧은 소리”를 반복하며「눈」의 기침을 연상시킨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에서 드러난 김수영의 표현은 김수영의 시 세계를 일관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김수영의 시의 전반기 모습을 볼 수 있다. 2) 1961년 소작 「눈」 요 시인 /이제 저항시는 /방해로소이다이제 영원히 /저항시는 /방해
작성일 2025-09-13 작성자 한 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97상세보기 -
감상&비평 알 지 못하는 울음에 관하여 -청소년 과대대표의 관점에서- Op.70
왜, 하필 백은별인가? 왜 백은별이냔 말이다. 오래전에 비청소년이 되어버린 청소년이나 비청소년성을 겪어보지 못한 청소년이나, 사실은 어떤 영웅주의에 심취하여 이 시대의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기성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오래도록 고대하였다. 그것은 아주 추상적이고 거론되어 본 적도 없어 우리는 그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나, 창작자로서 창작물을 통한 해방, 그 해방자를 우리는 꿈꾸었고, 우리는 스스로 그 데데떼 같은 아이콘이 되고자 소망하여, 사실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단지 그 때문에 그대는 펜을 들지 않았는가? 자 여기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브하고 느린 전격전의 주인공, 교복을 입은 구데리안이! 도대체 우리의 황제는 어디 가고 이 오만한 코르시카인 소설가만 남았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후에 자기 창작물들을 모두 거둬들여 폐기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또 다른 압제자를, 물론 두 팔 벌리고 환영한 사람은 없겠지만은, 다시 튈르리에 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라 마르세예즈를, 혹은 에반게리온을 안다. 그러나 콩코르드 다리는 한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 자, 이제 다시 들어가라! 원래 있었던 네 로! 다시 짝사랑하거나 연애하거나 헤어지거나 늙어버리든가 심심하면 죽이던가 자살이라도 하란 말이다! 툇, 젠장할 거.
작성일 2025-09-12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361상세보기 -
감상&비평 어느 단상: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 당사자성월장원 선정
문학에서 (특히 소설의 경우) 저자가 3인칭 서술을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최근 한국문학에서 3인칭 서술 사용의 빈도가 가시적일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인상을 받고는 한다. 특히 그러한 양상은 미디어 매체에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고, ‘SNS’와 ‘알고리즘’이라는 자기 폐쇄적인 공간을 시대에 의해 수용하게 된 2030 ‘젊은 세대’ 작가들에게서 크게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이들만 간단히 호명해 보자면, ‘김병운’, ‘김멜라’, ‘김지연’, ‘이서수’, ‘서이제’, ‘손보미’ 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들)은 대게 소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화자를 ‘나'라는 1인칭 단수로 설정함으로써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기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솔하게 이끌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민의 흔적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작가들이 1인칭 묘사를 애용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휴대폰이 이제 막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거나, 혹은 대학을 전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때 국내 문단을 주름잡았던 7080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서 사회를 마주하고 발화와 사유를 터득했던 것처럼, ‘2030’ 젊은 작가들은 휴대폰이란 자가폐쇄적/개인적 공간에서 세상을 마주했다. 그렇기에 ‘7080’ 세대 문인들이 운동권에서 세상을 배워나가며 ‘정치 문학’이라는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듯, 2030 세대 문인들은 (옳은 명칭은 아니겠지만) ‘개인 문학’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1인칭 묘사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 사례를 긍정적으로 (또는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닌 듯하다. 시대에 따라 뒤바뀐 양상을 검토 없이 수긍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뿐더러, 체화되지 않은 것들을 내부로 끌어들일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묘사법처럼 독자와 작품을 매개 하는 중요한 형식은 더욱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런 1인칭 묘사/서술에 대해 조금 더 많은 논의를 거칠 필요성을 느꼈다. 1인칭 묘사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논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작품 속 ‘나’가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구체화된 창조적 ‘인물'인지, 아니면 이면지 뒤에서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인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당사자가 아닌 사람(작가)’이 화자가 되어 당사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어쩌면 작품의 윤리를 결정적으로 판가름 지을 수도 있는 흐릿하고도 모호한 자가당착의 경계에 봉착한다. 작
작성일 2025-09-11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741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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