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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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한 편당 작품 최대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요?작성일 2023-11-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001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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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가 죽은 날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병실은 죽은 듯 고요했다. 창밖에서는 봄 햇살이 먼지처럼 가볍게 얹혀 있었고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 드는 바람이 커튼을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듯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다 뜬 느낌보다는 어쩌다 다시 삶을 되찾게 된 느낌이었다. 천장은 하얗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밝았다. 공기 속에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소독약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고, 귀 끝엔 낮고 일정한 기계음이 맴돌았다. 몸 곳곳에 붙어 있는 기계 장치들은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기계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나는 실패했다. 모든 것이 다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왔다. 내게 느껴진 건 살았다는 안도도, 아프다는 고통도 아니었다. 처음 느껴진 감정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마른 목구멍, 혀끝에 닿는 무기력한 침묵. 몸은 마치 비워진 껍데기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천천히 수액이 흘러들어오는 감각만이 희미하게 손끝을 간질였다.“다온아... 다온아... 들려? 너 괜찮아?”익숙한 목소리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머릿속에 맴돌던, 내 결정에 가장 많은 질문을 던지게 했던 그 사람. 바로 엄마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자 갑자기 눈물이라도 흐르려는 듯 눈이 아려왔다. 하지만 눈은 아려오기만 할 뿐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대신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엄마는 다시 한번 더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를 부른다기보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절박한 동작처럼 들렸다. 내가 다시 어딘가로 떨어지지 않도록, 이곳에 붙들어 두려는 몸짓 같았다.‘괜찮아. 난 이미 죽었으니까.’나는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마치 내 안의 문을 걸어 잠그기라도 하듯, 엄마의 목소리를 천천히 밀어냈다.나의 마지막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옥상, 차가운 바람, 흩날리던 머리카락.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의 적막한 정적.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했던 순간이었다. 세상의 소음이 모두 꺼진 듯했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빨리 가라며 재촉하는 자동차 경적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사라졌다. 시간조차 정지된 듯한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를 맞이한 건 흰 천장과 기계음뿐이었다.“내가 살아있는 척을 너무 오래 해서 내가 진짜 살아있는 줄 알았어.”내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었다. 마지막인데도 SNS에 올리지도 못하고, 핸드폰 메모장에 쓸쓸히 적어두었던 말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다는 건 기적이 아니었다. 운명도, 우연도 아니었다. 그저 다시 한번 내 목을 조이는 형벌일 뿐이었다.웅성거리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걱정스러운 엄마의 표정이 아닌 흰 가운을 입은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의사였다. 그는 내 몸을 쭉 훑어보더니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겠어요?”나는 그의 얼굴만 응시했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호흡기 탓에 대답 못 한다고
작성일 2025-07-02 작성자 밍맹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7상세보기 -
소설 쪽지
"나 안락사할려고…" "?" "안락사말이야 안락사. 조력자살." "…"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알았어." "어…" 20000 프랑. 좋은 죽음에 비하면 적당한 가격이다 내가 지금까지 번 돈이 그 정도 될 테니까. 아, 그 정도는 아니려나. 몇 달 후 최소 이년은 생각했는데 벌써 아빠는 그 큰돈을 구해왔다. 아빠는 담배를 물고 방문을 살짝 연 채 밖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식탁에 올려놨어. 내일 가져가." 나는 계속 자는 척했다. 아빠는 어차피 못 찾을 리 없으니 방문을 닫았다. 그는 한마디만 더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우뚝 서서 한마디만 덧붙였다. "늦어서 미안하다." 다음날 일어나서 돈을 확인했다. '비행깃값 200만 원' 새것 같은 5만 원짜리들에다 코팅된 느낌이 더 강하게 나는 뻣뻣한 1000프랑짜리 지폐뭉치 그리고, 아빠가 써둔 종잇쪼가리에 써있는 바에 따르면 '돌아올 수도 있으니 1500프랑' 나는 터벅터벅 도서관 컴퓨터로 가 티켓을 검색했다. 아무래도 에어차이나가 싸려나… 지금까지 공부한 독일어가 유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충 티켓을 저장해 놓고 도서관을 나왔다. 집에 가니 어디서 본 인간이 취해서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완전히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저씨 안 들어가고 뭐해요" "문 열어줄 사람이 없으니까.""아빠 없어요?" "매정한 새끼구만 쯧" "취했어요? "아니. 흐.. 흐흣 뭐 취했더라도 상관없지. 넌 내가 누군지 아니까." "아 할 말 빨리하고 가요 아빠도 없는데 외간남자 들일 순 없으니까. "야 이 씨발년아. 네 아빠 죽었어. 죽었다고. 8단지로 가봐. 옥상에서 떨어졌다니깐." "?" "그 새끼가 나한테 300을 빌려갔는데, 네 몸값은 하지 않을까?" "꺼져요. 아 빨리."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사라졌다. 심성은 착한 사람이다. 뭔 상관인가. 나는 내 짐을 쌌다. 그간 익혀두었던 독일어를 잠시 복습하고 만들어둔 여권을 챙겨 잠자리에 들었다. 집안을 마구 어지를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피곤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도 피곤하여 누웠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삶의 희망이라거나 하는 기분 좋은 것이 생겼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준비해 온 게 있지 않은가. 챙겨야 할 것들을 다 챙겼는지 모르겠다. 옷들을 마구 던져 넣어서 도저히 뭔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운 자리 바로 옆에 놓인 가방에 손을 뻗어 안을 잠시 안을 뒤졌다. 먼저 여권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종이쪼가리 하나가 여권에 끌려 나왔는데, 아빠가 남긴 그 쪽지였다. 버리지도 않고 같이 넣었었나 보다. 나의 아빠는 언제 죽었나. 여러 가설이 있다. 나는 다만 그 병신에게까지 돈을 빌려 마련한 그— 그 마지막 1500프랑이 그렇게도 고마운 것이다.
작성일 2025-07-02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0상세보기 -
소설 금메뚝설화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버스가 맥아리 없는 압축공기를 내뿜으며 정차했다. 털털거리는 시동의 진동 사이로 달칵거리며 운전석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 출장에 피로했던 나는 버스 기사의 두드림에 겨우 깼다. 종점이었다. 차고지에서 빠져나와 한적한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니 짧게 대답하고선 말 없는 주행을 시작했다. 백미러에 달린 동자승이 인자한 미소를 띤 채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주로 농사로 먹고사는 마을이었다. 있는 거라곤 논과 밭, 작은 구멍가게, 그리고 작은 공업단지와 소박한 마을회관. 아주 정답진 못하더라도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지내는, 그런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마을이다. 나는 마을이 싫진 않았지만, 농사나 공업보다는 더 편한 직업을 가지고 싶었고, 그러려면 시외버스를 한참 타고선 도시로 나와야 했다.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기에 도시에 작은 방이라도 얻어야 하건만 그럴만한 돈도 없었다. 이런 나에게 잦은 출장 대신 숙식을 제공하고, 한 번의 출장 이후 긴 휴식을 보내주는 이 직장이 적합했기에 외지인의 삶을 사는 것이고,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들여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해있었다.길게 뻗은 아스팔트 갓길과 그 옆에 우두커니 선 마을 비석. 매번 돌아올 때면 이 풍경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를 먼지 털 듯 떨쳐버리곤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길목에 서 있는 감나무 아래 어수선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사람이 모여있는 광경은 적어도 이 마을에선 흔치 않으므로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아주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였기에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 원인을 파악하고자 했다. 잠자리 통 안에서 메뚝이가 황홀한 금빛을 발광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둘러싸고선 마치 영웅담이라도 이야기하듯 자신의 공로를 나열하고 있었다.그들의 이야기인즉 다음과 같았다. 박 씨 할아버지가 모 판을 정렬하던 중 금빛 무언가가 날뛰는 것을 보았고, 이를 양 씨에게 알렸다. 양 씨가 메뚝이를 잡으려는 양을 보고선 사람들이 합세했고, 메뚝이를 몰다가, 몰다가, 마지막에 장 씨가 잠자리채로 포획. 이 이야기를 몇 분 내내 지속하고 있었다.“잡는데 애 좀 썼어요.”양 씨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고 말을 이어나갔다.“수집가한테 가져다 팔면 돈 좀 깨나 되겠는걸?”양 씨는 예전부터 돈이라면 달려들기 일쑤였다. 일전에 그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이봐요 김 씨. 난 말입니다. 황금빛 번쩍이는게 그렇게 좋더랍니다- 이 세상 안에서 번쩍이는 것 하나만 있으면요- 모든 것이 행정절차처럼 따악- 따악- 맞춰 돌아간다는거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 시오- 금전이면 안되는게- 있더랍니까아?”그의 음정은 술에 취함을 연주하듯 음정이 늘어나고, 끊기고, 가끔씩 뒤틀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가슴 깊은 곳에 나뒹굴던 케케묵은 먼지가 실려있었다. 나의 말은 모두 끊고, 양 씨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조금 지치기도 하여 나는 그의 말
작성일 2025-07-02 작성자 박민결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8상세보기 -
소설 계단 - 단계
계단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그런 계단이 내 발을 받치고 있다고. 그 아래의 풍경이 아주 위태롭게 날 노려보았다. 어디까지 올라갈 셈이지?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길을 걸었을 뿐이었으니까. 그것은 아스팔트였고, 시멘트였고, 콘크리트였고, 우레탄이었고, 일종의, 횡단보도였다. 빨간불일 때는 횡단해서는 안 됩니다. 초록불이 깜빡일 때만 건너실 수 있습니다. 25초가 너무 짧다고 느껴지신다고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그것이 규칙이니까요. 앞선 인간들이 만든, 규칙. 법. 그 법을 따라 걸었을 뿐이란 생각이다.그것들은 모두 지그재그로 접혀져 있었다. 나를 끝없이 하늘로 올려 보내고 있었다. 앞선 인간들도 모두 하늘 너머, 우주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투명한 공포가 나를 감싸 안았다. 날개 없는 인간의 무력함이, 매섭게 날아와 꽂혔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야 하는 거라고. 최선을 다해서.그럼요. 인간은 올라가기 위해 태어났는걸요. 하늘을 동경하는 것은 태고의, 시초의, 시작에서부터 깃든 본능이랍니다.어느 대단하신 인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속삭였다.당신은......토머스 에디슨? 위대한 인류의 선지자. 속삭임의 정체는 당신인가.인류는 이제 비행할 수 있었다. 수많은 비행기가 낮과 밤을 누비고, 그런 비행운들로 어질러진 하늘 아닌가. 모험의 시대는 끝났다. 지구는 인간의 발자국들로 뒤덮였다.바람은 높아. 이젠 날 수 있겠어.우린 강철의 날개를 달았다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도 녹는 일이 없지. 이제 발과 다리는 필요가 없어. 잘라내야겠지. 계단을 오를 필요는, 없다고.그렇게, 지구를 돌았다. 태양계를 회전하는, 회전하는, 지구를 회전했다.그리고 지구의 축에 섰다. 북극점이었다. 새하얀 파랑색들로 얼룩진, 거대한 원이었다. 그것이 과녁의 정중앙이라도 되는 듯, 화살이 쇄도했다.폭발이 일고 나서야, 그것이 비행기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러진 날개가 빙산에 부딪혔다. 붉은 열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 불길 사이를 유유히 걸어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슈퍼맨이었다, 라고 생각해버렸다. 슈퍼맨이어여만 할 것만 같은 사내였다. 올곧은 몸에 올곧은 눈빛, 올백머리. 그 올백머리가 나를 사로잡았다.당신은 누구십니까?비행삽니다.비행사는 소매의 불씨를 탁탁 털어냈다. 역전의 영웅과도 같은 비주얼이라, 생각했다.비행사는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다시 날아오르면 되는 것 아닌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비행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한 번의 비행을 위해선, 무수한 계단을 밟아야 하는 법입니다. 많은 이들이 모든 성공에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나 부연설명이 필요합니다. 성공을 향해 도약하기 전, 출발대에 서는 것에도 거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출발선보다도 뒤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들에겐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것이, 사실은 출발선에 불과했다는 진실은, 그들을 절망케 합니다.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구포대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8상세보기 -
소설 뒷면
삼촌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몹시 슬퍼하셨다. 그해 여름 방학은 시름에 잠긴 아버지를 따라 삼촌의 집으로 향했다. 유족은 떠난 가족의 흔적을 모아 오는 막중한 임무를 띤다고, 칙칙한 옷을 입히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그랬다. 그렇게 매년 떠나는 해외여행은 삼촌의 물건을 정리하는 침울한 유품 원정으로 대체되었다. 그곳까지는 차 안에서 질릴 때까지 졸고도 더 있어야 하는 먼 길이었다. 이전에 나를 데리고 방문한 적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정작 삼촌네를 찾아가게 된 날 나는 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운전대를 잡는 옆태가 이미 독한 슬픔으로 젖어 있어서, 금방이라도 울어 버리겠다 싶은 불안감이 차를 모는 내내 공기를 꽉꽉 눌렀다. 삼촌은 과묵한 남자였다. 행동은 조용하고, 딱딱했고, 기분은 읽히는 법이 없었다. 만사 관심을 두지 않는 무심한 인상이었다. 감정이 굳은 근육으로부터 자유로운지도 의문이었다. 닫힌 채로 메말라 있는 삼촌의 입은 그런 궁금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눈. 삼촌이 죽은 지금 괜히 무안해지는 감상이지만, 어둠으로 뒤덮인 그 눈에 스치는 순간마다 살갗을 걷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간의 눈이라면 자연히 서리는 정기가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묘한 인간의 표본이라 해도 좋았다. 아버지에게는 그런 삼촌이 참 존경스러운 형이었던 듯했다. 정확히는 이복형이지만, 둘의 관계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아버지에게 있어 관계의 출발선에 지나지 않았다. 삼촌도 나름 아버지를 아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아버지 대의 복잡한 가정 형편 속에서도 여태 친분을 유지한 사이였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가끔 아버지가 삼촌의 미소를 옅게나마 자아내는 신비를 목격했다. 삼촌은 웃고 있어도 어딘가 쓸쓸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떨어져 지내느라 삼촌이 형 노릇을 할 시간이 적었다고는 해도, 아버지에게는 따뜻한 인상을 남긴 일화들이 있을 터였다. 단지 그건 삼촌에 대해 내가 느낄 몫이 아닐 뿐이었다. 그날 오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삼촌의 집에 발을 디뎠다. 도착한 교외의 주택은 정갈하지만 단조로웠다. 주변의 생명이라고는 이파리를 죄다 잃은 비리비리한 나무가 다였고, 정면으로는 일직선 도로가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스쳐 지나가면서나 보고 말 지루한 풍경, 하얀 몸을 하고 옅은 햇살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삼촌의 집은 세상으로부터 은신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위치 선정이 묘한 삼촌다웠다. 실내로 거침없이 들어서는 아버지를 나는 조심스레 뒤따랐다. 현관문 너머 일자로 곧게 뻗은 복도 끝에는 맨들맨들한 계단이 보였다. 마른 공기가 온 집안에 감돌고 있었다. 정말이지 생활감이 증발한 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무래도 계획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거실로 직행했고, 뒷모습을 끔벅끔벅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2층으로 올라갔다. 분업 정신이라도 발동한 걸까. 목적지는 삼촌의 서재였다. 삼촌이 읽은 책이나 사용한 만년필이 있으면 챙기고 싶었다. 서재 안쪽 벽은 창문이 넓게 나 있었고, 계단보다도 맨들맨들한 책상이
작성일 2025-06-30 작성자 지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02상세보기 -
소설 회색의 의자를 빼앗아
그러니 모든 문제는 독고준에게 있다. 최인훈의, 원제는 「회색의 의자」인, 『회색인』에 나오는 헤겔 좋아할 듯싶은 대학생. “그러나 너의 이름으로 하라”니, 시지프를 밀어내고 돌은 멀리에 던져놓고 언덕 깎아 아파트 올리는데 이름 가져다 쓰라고 했었던 건지. 파낸 흙으로 간척지 만들고, 그리고 입주자 명단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맺음말. 명분 좋은 관념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언덕이 있는 블럭에서 계단 따라 내려가면 뱁새 앉은 나무에 살충제 뿌려져 있던 것 같다. 뱁새가 살 정도로 건강한 환경에 살충제가 있어서야 되는 것이겠냐고, 걸어다니면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상상하고 생산적인 일, 생산적인 일,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중얼거리고 온 신경을 다해 고민하는 척 하면 잠이 와서 기분 좋았는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이 감자튀김 기네, 집 가서 자고 싶다, 정도 떠올리려다 뭉갰고 실제로 지은 표정은 웃음을 억지로 참는 모양이었겠지. 느끼기로나 그렇고 실제로는 아무 표정도 없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상대방에게나 그렇고 실상이라는게 보일리 없잖아. 라쇼몽을 보다 잠들었던 날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2년 전쯤 산 라쇼몬에 실린 단편을 모두 읽지는 않았으며 연극 나생문을 예매했고 까먹고 있던 일정이 생각나 취소 수수료를 냈다는 문제는 독고준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쿠타가와의 머리가 길쭉한 것 하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일. 나생문 위에서 노파가 시체의 머리칼 고르는 자세가 있고, 실직한 무사가 노파에게 휘두르는 칼의 궤적이 있으므로. 졸다가 뭔가 말하며 깬 것 같았는데 내용과는 관계없이 노파가 머리칼을 잘라주면 좋을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나생문 위로 돌을 굴리는 독고준의 모습을 상상하려고 했으나 독고준의 삽화를 본 기억이 없어서 시지프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너의 이름으로..독고준의 이름으로..” 하기에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독고준이라는 이름으로 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외형묘사는 없는 것을 통해 최인훈이 본인을 철학과라는 렌즈의 왜곡으로 투사한 것이 독고준임을 추측할 수 있고, 읽은 모든 장편소설이 그런 상태라는 것에 어떤 감상을 가져야 하나. 그 왜, 최인훈 전집이라는 것은 구보씨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그 왜,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같은거 말이다.)를 쓴 대하소설이 아닐까. 읽지 않은 책은 꿈으로 처리하면 꽤 재미있는 가설이 아닐까, 싶어도 반 정도는 읽지 않은 것이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어났더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진 않는다. 중요하지 않은 말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런 말. 천장에는 정사각형으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모양의 문으로 보이는 것이 달려있다. 구멍이 열리고 당신이 들어오죠, 당신은 마징가일 거라 믿어요. 고증에 맞으려면 안에 있던게 밖으로 사출돼야 하지만, 이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잖아. 창문에는 빛을 가리는 용도로 필름이 붙어있지만 빛은 전혀 가려지지 않고 뿌옇게 번질 뿐이다. ‘내 마음의 진리
작성일 2025-06-29 작성자 데카당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6상세보기 -
소설 곡두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아니, 알 것 같기도 하다. 책에서나 봤던 녹색 자연환경. 이걸 숲이라고 했었나…? 아니 사파이어 빛 바다? 아무튼. 지금 연도가 삼천…. 잘 모르겠다. 달력이라고는 볼 생각도 없어서.그런데 그 와중에도 정확한 건 지금 내 나이는 120살이라는 것이다. 그건 확실히 기억한다. 근데 왜 이렇게 젊냐고?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말을 물으면 엄청 실례다. 인류가 발전함에 따라 생명과 피부, 건강 그밖에 다양한 것들이 성장했다.내가 120년째 인공심장을 끼고 살았지만, 멀쩡한 이유도 그것과 동일했다. (이쯤에서 눈치챌 수도 있겠지만, 병원에 매달 정기 검진을 갈 땐 나이는 꼭 알아야 하기에, 나는 나이 하나만큼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세상은 발전했지만, 자연환경은 퇴보되었다. 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고, 나무가 시들고, 동물들이 죽어갔다. 인공지능의 발전과 인간의 무자비한 자연 훼손 때문에 지구는 썩어갔다. 그때쯤 인공 자연이 나타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인공 자연은 이걸 따라올 순 없을 것이다."우와…."진짜는 남달랐다.숲의 내음은 인공 자연과 거의 일치했지만 분명 달랐다. 이곳, 진짜가 따스한 분위기라면 인공 자연은 차가운 따뜻한 분위기였다. 마치 사람과 로봇처럼, 아무리 비슷하게 해도 느껴지는 이질감, 이라고나 할까.멀리서 들려오는 산새들의 속삭임도 남달랐다. 여기는 그냥 '숲'이라고 밖에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숲이다, 진짜 숲….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넋을 잃은 채 순수하게 감탄만 할 수밖에 없었다."저기, 누구?"경계가 한가득한 질문 나를 찔렀다. 뒤를 돌아보자 한 남자 나를 째려보듯 바라보며 서 있었다.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지만 나이 추측은 하지 않은 게 좋기에 티 내지 않았다.남자는 도저히 숲에 사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결정적으로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은 연구소에서나 볼 법한 옷이었다. 숲에 사는 사람보단 숲에 놀러 온 과학자가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기에, 왠지 모르게 팔뚝이 싸해지는 것만 같았다."어… 안녕하세요…?""…혹시, 이그제머?""…네?""이런 못 알아보아서 죄송하군요."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남자는 꽤 이상했다. 이그제머? 이그젬? 뜻이 … 예시? 아니, 시도였나? 영단어는 직접 사용한 지 오래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의아한 나와는 달리 남자는 나에게 밝은 듯한 미소를 보냈다. 분명 미소였지만 어딘가 꺼림칙했다. 쉽게 말해 그냥 웃음이 아닌 자신을 숨기고 포장하는, 그런 웃음이었기에 더욱 수상했다."이곳은 어떠신가요?""…좋네요. 멋져요, 아니 어떤 형용사도 부족해요."남자의 말에 잠시 경계하던 태도를 버리고 주위를 다시 한번 보았다.남자가 너무도 수상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숲의 아름다움에 빠져 다시 한 번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멋지고, 아름답고, 따듯하며 다정했다. 아니, 이것도 부족했다. 누군가에게 이곳이 어땠는지 설명해야 한다면, 나는 형용사 백과사전 앱에 들어가 잔뜩 검색했을 것이다."좋네요.""…그럼, 당신은… 여길 어떻게 생각
작성일 2025-06-26 작성자 A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3상세보기 -
소설 사랑의 기억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아주 불행했었다. 나의 몸은 정말 왜소했기에 다른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아주 잘 당했다. 친구들은 매번 나에게 와서 동전들을 던지며 빵을 사오라고 시키고... 강당에서 나를 발로 차며 목을 조르기도하고 물을 뿌리기도 하고, 공을 나에게 던지며 나를 계속 맞혔다. 주변에 나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도와달라고 몸으로도 표현하고 말로하기도 했지만 친구들은 아무도 날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매번 날 무시했고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선생님에게 말씀을 드리기까지도 했다 "선생님...이런 애들이 저를 괴롭혀요 도와주세요...." 하지만 선생님도 내 말에 "알았어" 라고만 하고 실제로 도와준 적은 없었다 매일매일 힘든 생활을 견디는 것은 초등학생인 나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그러던 어느날 친구들은 오늘도 나를 괴롭히기 위해 나를 강당으로 끌고 가서 나를 사정없이 발로 차기 시작했다."하지마...하지 말란 말... 이야..."내가 계속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도 강당 안에는 "퍽!퍽퍽!" 소리만이 가득찼고, 고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옆에 있는 친구들은 울고있는 나를 보며 "야야 저새끼 처운다."라며 웃었다. 그런 나를 도와준건 어느 한 여자애였다. 그 여자는 강당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때리는 친구들에게 말했다"야! 여기서 이러지 마라. 빨리 나가 선생님 부르기 전에!"날 때리고 놀리던 친구들은 나에게 침을 뱉으며 "에이씨 재수가 없구만." 욕을 하며 강당을 나갔다. 그 여자는 아파서 누워있는 나에게 휴지 두장을 주면서 말했다."야야 울지말고 이거 휴지로라도 눈물 닦아... 그리고 여기 피도 닦고..."그 여자는 내 손까지 잡아주며 나를 부축해 주기까지 했다. 나는 울먹거리며 그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고.. 고마워...도와줘서...근데 나를 왜 도와주는 거야...?"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친구끼리 뭘 이정도는 기본이지!! 나는 미윤이라고 해 반갑다. 친하게 지내자!""나...나는... 준기라고...해....안.. 안녕..."나는 이날 이후로 미윤이라는 여자애한테 관심이 생겼다. 미윤이는 그날만 도와준 것이 아니라 내가 계속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맞고 있으면 내 옆에 와서"야! 내 친구 괴롭히지 마!" "야! 저리가! 왜 계속 괴롭혀?"라고 말하며 계속 도와주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식 전날 고민고민을 하다가 미윤이와 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번호를 교환하려고 했다 밤늦게까지 어떻게 번호를 교환할까...거부하고 싫어하면 어쩌지...생각을 하다가 밤을 새고, 학교에 갔다.계속 내 머릿속에 대사를 곱씹어 본 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어라?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온 교실과 반을 뒤지고 다녀도 미윤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미윤이와의 만남은 끝이 나고 말았다.나는 그녀를 잊고 싶지 않아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일기장에 그녀와의 이야기를 한가득 적어 놓았다. 그리고 4년후에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 때 찾고 싶어했던 미연이는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작성일 2025-06-26 작성자 역사 좋앙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148상세보기 -
소설 반지
“그래… 그래서?” “안 죽으려고. 미안해.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게 해서.” 그녀는 난간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그러자 나는 준비했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뭐야, 뭐가 있어?” “네가 안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야. 그냥.” “뭔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반지 케이스를 꺼내 열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하는 게 맞다고 하긴 하지만 나는 그냥 앉은 채로 그녀에게 손만 내밀었다. “의사라고 아주 돈은 남아도나 보네. 병신새끼.” “그래도 비싸. 다이아몬드잖아. 그리고 나 아직 인턴이거든?” “다이아몬드라… 왜 다이아몬드야?” 뭘 물어보는 건지 몰라 혹여나 내 상식을 재확인했어야 했나 하고 번뜩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질문을 정정했다. “왜 다이아몬드를 가져온 거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다이아몬드는 영원을 상징하니까.” 내가 어색하게 로맨티시스트를 흉내 내는 게 웃겼는지 그녀는 나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노려보며 계속 질문해 댔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지 않아. 아주 천천히긴 하지만 분명히 언젠간 구조가 변성돼서 흑연이 되어버릴 거야.” “그래서 뭐.” “흑연은 다시 더 안정된 형태로 바뀌어 버릴 거고.” “그래서 뭐, 내가 이걸 어떻게 바꿔올까?” 나는 그녀의 궤변에 화가 났는지 그렇게 말해버렸다. “오, 오, 아니야, 그럴 필요야 없지. 다만,” “다만 뭐, 그래서 뭐가 영원한데, 내가 그 잘난 영원한 걸 구해줄게 그럼.” “반지로 만들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건 역시 철이지 않을까. 다른 물질이 안정한 철로 변하긴 하지만 그 반대는 일어나기가 어려우니까. 가장 마지막에 남을 물질도 철일 테고.” “그래, 그럼 철 반지를 사 올까?” 나는 어느 정도 그만두라는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특유의 재잘대는 투로 말을 이어가며 내 옆에 앉았다. “철 반지는 녹이 슬 텐데. 다 녹슬어서 부스러지면 어떡할 건데.” “아 그래서 어쩌라고. 받을 거야 말 거야?” 나는 이제는 심지어그녀가 내 반지를 받지 않을 거란 생각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는 듯했다. “근데, 양성자가 붕괴하면 철도 붕괴되어 사라질껄? 그럼 이 우주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버리는 거야!” “...” “그래서, 굳이 영원히 사랑을 약속하려 하지 마. 그에 걸맞은 제대로 된 증표 따위는 없으니까. 나는 다만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는 걸로 족해.” 나는 그녀가 결국은 그렇게 결론을 짓는 구나하며 빙그레 웃고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는 내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배고프다. 내려가서 뭐라도 먹을까?” “그래, 그러자.” 관악산 너머로 해가 진다. 우리가 밟고 선 옥상도 결국에는 식어간다. 나는 그 옥상에 반지를 두고 나왔다. 청혼은 언젠가 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작성일 2025-06-25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73상세보기 -
소설 유서를 쓰는 일
1 내 손에 잡힌 두 장의 봉투는 모두 얇았다. 종이는 잘 구겨졌고, 활자는 기계적으로 잘 정렬 되어 있었다. 정현지, 향년 17세. 너무 짧은 생 이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인쇄된 부고장을 들고서도, 나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였다. 우편함 안에서 종이를 꺼낸 것은 몇 개월만이었다. 엄마와 새 아빠는 무너져가는 집을 일으키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가셨고, 모든 이삿짐을 정리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어쩌면, 은둔생활을 끝내라는 일종의 경고였을 수도 있다. 겹겹이 꽂아진 종이들 사이 내 이름이 보였다. 눈앞에 보인 그 봉투가 익숙해서, 손이 먼저 반응했다. 그 아이가 자주 쓰던 꽃이 그려진 편지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글씨체. 그리고 낯선, 하지만 너무도 정돈된 죽음의 언어. 마지막으로 너 얼굴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서연아. 2 몇 달 전, 그 애가 내게 남긴 유서가 문득 떠올랐다. 아, 어쩌면 내가 남긴 유서일까. 그 애는 내게, 자신의 유서를 써달라 하였다. 그건 조금 이상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애는, 자기 이야기를 누군가가 ‘끝까지’ 들어줬으면 했던 것을 바란게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울었고, 조용했다. 그 아이의 짧은 생을 추모하듯. 그 아이의 해맑은 사진 앞에서 마지막이 되어버린 편지지를 펼쳐보았다. 함박눈 내리는 하얀 병실 안에서 그 애는 내게 유서를 건네었다. 아니, 정확히는 유서가 채워질 빈 종이였다. 자신의 유서를 대신 써달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달라며, 조금 이상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여러개의 바늘이 통과되었던 고운 살은 어느새 핏빛으로 물들어가 그녀의 팔을 장식했고, 독한 항암제는 그녀의 머리를 하나씩 뭉개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모를 모습으로 변해버린 괴물 같은 아이는 숨어버렸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작은 병실 안으로 꽈리를 틀었다. 2년 8개월 길다면 길테고, 짧다면 짧을 입원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를 뚜렷이 느낄 수 있는 손바닥만 한 창문과 함께한지 3년 남짓 되었을 무렵, 현지는 이제즈음 어엿한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 계절들이 떠나고 난 자리, 난 아직도 그 아이를 안고 있었다. 3 현지가 나에게 쥐어준 것은 작은 백색종이와 흑연이 닳은 뭉툭한 연필 한자루였다. 연필 상단에는 초등학교때 반, 번호와 현지의 이름이 적혀진 이름표가 너덜너덜하게 붙어있었으며, 새끼 손가락만한 몽땅연필과 같았다. 나는 그 낡은 연필을 손에 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딱히 뭘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연필이 너무 작아서 괜히 더 오래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현지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았고, 나는 그 옆에서 쿡쿡 웃는 엣된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너 줄게. 그 한마디가 무겁게 가슴에 앉았다. 누군가에게는 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그 몽땅연필이, 현지에게는 가장 좋아하는 것 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미묘하게 죄어왔다. 연필심처럼 조금씩 꺾여 사라지면서도, 마지막까지 쥐여주고 싶은 무언가, 그것이 현지의
작성일 2025-06-25 작성자 이람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167상세보기 -
소설 사랑하는 사망자 A 씨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1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오후 9시경에 지하철에서 칼부림 사건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시민들의 빠른 대처로 사망자 1명, 부상자 3명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범인을 제재하고 신고한 두 명의 일행은 직장 동료이며— 뉴스의 내용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사망자 1명, 그 비운의 사망자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매일 아침 보물 같은 6살 딸아이의 머리를 서툰 실력으로 묶어주고, 매일 저녁 신선한 반찬을 사 오는 그런… 그런 사람이었는데….그이는 사망자 A 씨라는 이름으로 땅속에 묻어졌다. 뉴스가 끝난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나는 박제된 동물처럼, 혹은 칼에 찔린 그이처럼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혹시 나의 잘못일까. 회식을 말리지 않은 것,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 그 쉬운 말을 하지 않은 것, 처음부터 이 집으로 이사 오자고 한 것—미안해, 내 잘못이야. 돌아오면 네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꼭 해줄게. 하얗고 부드러운 두부와 버섯도 넣어줄게.딸한테는 아직 전하지 못했다. 내일 아침 머리를 묶어주는 사람도, 반찬을 사 오는 사람도 그이가 아니라 나일 것이리라. 정성스레 땋아줄게. 귀여운 머리핀을 꽂아줄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옷을 입혀줄게. 엄마가 잘못했어. 2눈 내리는 쓸쓸한 겨울날, 우리는 만났다. 연인과 헤어져 울고 있는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그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오래된 꿈에서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고백합니다. 그이를, 사망자 A 씨를 애열(愛悅)하고, 익애(溺愛)했습니다. 그이는 나를 새로운 꿈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난 꿈에서 깨어버렸습니다.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나는 딸아이의 머리를 세 갈래로 땋아주었다. 귀여운 머리핀, 예쁜 옷 전부 있다. 그러니까 날 용서해 줘. 이 못된 엄마를 용서해 줘.딸을 유치원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적막이지만, 절대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경찰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받지 않았다.딸은 하원한 후에도 아빠를 기다린다. 오늘은 시금치가 먹고 싶다고 한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그이와 전화하는 척한다. 시금치를 사 오라고 말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리고 비참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언젠가 전부 들켜버릴 거짓말, 하지만 나는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그것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듯 입꼬리를 인위적으로 들어 올린다. 아빠는 지금 우리 딸이 좋아하는 유니콘을 찾으러 가서 잠시 못 볼 것 같아. 찾으면 꼭 집에서 다 같이 살자.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겨우 참았다. 나에게 그이는 죽었지만, 그녀에게 아빠는 저를 위한 유니콘을 찾으러 간 것이다. 처음 그이의 소식을 들었을 때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나한테는 딸이라는 가장 큰 책임이자 위로가 있었고, 그것이 나를 더욱 깊은 늪에 빠뜨렸다. 3맞아, 아니야, 이건 현실이야. 아니, 꿈인가? 그이는 유니콘을 찾으러 갔어. 그이는 언젠가 빛나는 유니콘과 함께 돌아올 거야. 그렇지
작성일 2025-06-24 작성자 정한나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158상세보기 -
소설 신기루
그 애는 나의 신기루였다. 몰라요. 그게 벌써 몇년 전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첫사랑은 있었냐고 묻는 의사 눈에 내가 비쳤다. 나는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의사는 말 대신 미소로 일관했다. 병원을 나선 나는 잠시 쉴 곳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나는 곧장 항구로 향했다. 도착지도 제대로 거들떠보지 않은 채 배를 타고 나섰다. 나는 계속 여행했다. 그러다 사막에 닿았다. 그 무렵 나는 죽어가고 있었고 물이라면 바닥에 떨어진 한 방울조차 먹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때 오아시스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곧장 그리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모래 범벅이 된 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마저 그 애를 생각하고 있었다.
작성일 2025-06-23 작성자 신기루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227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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