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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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한 편당 작품 최대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요?작성일 2023-11-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4258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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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내와 오두막유리창에 낀 성에마저도 희뿌연 혼야에는 모름지기 낯선 손님이 찾아오기 마련이다.사내는 수북히 쌓인 눈을 우직하게 짓밟으며 나아간다. 나아가는 길마다 후두둑 검붉은 꽃이 피어났다. 그의 머리칼은 짐승의 털가죽과 엉겨붙고 그 사이의 좁은 빈틈은 비릿한 것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두 치열한 목숨의 흔적들이다. 내뱉는 숨이, 살아있다는 차가운 반증이 눈발 사이로 흩날리는 것을 사내는 지켜본다.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가?맥박 소리도 들리지 않는 두터운 외투에 갇힌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문득 사내는 흩어지는 숨이 점차 환하게 빛나는 모습을 마주한다. 환희처럼 샛노란 불빛에 겹치는 그의 입김은 유령처럼 스산하게 사라진다. 불빛은 여전하고 사내는 빛을 향해 달려간다.여관도 집도 아닌, 고립된 것도 소유된 것도 아닌 외딴 오두막, 소녀는 화덕에 불쏘시개를 집어넣는다. 장작 타는 소리는 고요하고 소녀는 냄비에 재료를 넣고 한데 끓인다. 뭉근한 내음은 오두막 내부를 금세 따듯한 공기로 채워나갔다. 그러나 따스한 적막이 대게 그러하듯 평화는 침입자의 등장으로 쉽게 깨져버린다. 바닥에 빼곡한 판자가 낯설게 끼익대는 소리에 소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서 눈발이 사납게 불어오자 소녀는 눈을 찌푸리며 흐릿하게 시야에 놓인 새카만 미지를 응시한다. 틀림없이 사람이다. 그러다 문득, 사내의 서슬 퍼런 눈빛과 미지를 응시하던 소녀의 눈빛이 부딪힌다. 서늘한 눈을 피해 흐르듯 내려가던 소녀의 시야가 그의 털옷에 엉겨있는 붉은 것들에서 멈춘다. 두려움, 두려움이 소녀를 덮쳐왔다. 그녀는 방 안에서 잠든 어린 동생과 늙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혹여 그가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까, 검붉은 핏자국과 사내의 상처들이 그녀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비릿한 혈향이 어느새 소녀와 사내 사이의 기류로 이어진다. 죽음과도 같은 고요, 그 단락을 끊어내고 사내가 읆조렸다. 제 모습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로.제가, 아직도 살아있나요.소녀는 사내를 다시금 응시한다.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피가 아닌, 옷 밖으로 비져나온 피부마다 그어진 상처가 아닌 그의 얼굴을 본다. 소녀는 그 눈빛으로부터 두려움을 보았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길래? 소녀는 그가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경험을 겪었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여러 차례 역경을 겪어온 이들은 보통 두려움을 길들이거나 두려움에 길들여진다. 그런 이들은 이 사내와도 같이 두려움을 비롯한 어느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무감한 표정과 몸짓으로, 무심코 당혹스러운 말들을 건내곤 하는 것이다. 그런 사내와 대치하는 소녀는 사냥꾼도 모험가도 아니다.사나운 짐승과 맞선적도, 어둠을 뚫고 빛을 찾아 더듬거린 일이 없다.사랑하는 이를 불구덩이로 내몰거나 원수의 숨통을 끊어내거나 동료를 배신한 적도 없었다.그녀는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결코 겪어본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대답을 어떤 대답을 주어야 사내의 남모를 두려움을 떠안아 줄 수 있을까. 머뭇거리던 소녀는 화덕으로 향했다. 잠시후 사내의 앞에는 한그릇의 따듯한 스튜가 놓인다. 주저하던
작성일 2025-12-28 작성자 아마추어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4상세보기 -
소설 네 이야기
…짜증이 났다. 피부가 떨리고 근육이 수축하는 통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물론 나는 소매를 걷었다. 손목 밑에 뜯지 않은 비닐포가 아직 남아있었다. 곧 약효가 떨어질 터였으니 다시 섭취하는 편이 나았다. ‘이거 받아, 오빠.’ 느닷없이 그녀가 말했다. 나는 어느샌가 축축한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물방울이 손가락 마디 사이로 스며들며 땀과 썪였다. 가시돋친 얼음조각이 뿌연 용기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그 찬 기에 잠시나마 분노를 식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표피의 잔주름에 셔츠의 물망울이 흡착되는, 그 전신이 죄여 드는듯한 불쾌감을 단시간 떨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눈앞이 터널처럼 좁아진다고 한다. 저마다의 습관과 별개인 불쾌한 경험이다. 나는 동공을 고리 모양의 창살처럼 부풀렸다. 습관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둬놓았다. 여름 길바닥의 열을 빌려 그대로 팽창시켰다. 단순히 시야의 한가운데로 무언가를 위치시키면 그리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온몸을 떨었다. 흉추는 가만히 두고는 덜 자란 팔을 사시나무 떨듯이 어설프게 휘적거렸다. 그녀의 눈에서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유년기 특유의 안구가 산만히 배치되고 있었다. 반면 내 홍채는 점점 더 오므라들어서는 마치 뜬눈을 감는 모양새로 동공 중앙의 흑색 구덩이에 그녀를 밀어넣고 있었다. 이미 전신이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몸뚱아리를 원반 모양의 구멍으로 옥죄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나를 이해했다. 한순간 나는 타자의 시점에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개다. 강아지. 욕구를 게워내는 중. 살냄새를 맡고 몰려든 파리들이 날리며 흙 부스럼을 만든다. 눈물이 났다. 눈에서 콧물이 질질 흐르듯 미간이 시큰했다. 나는 무력했지만 예견된 무력함이었다. 지성이 부정하는 것은 본능이 일러주는 법이다. 간단히, 도움 없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이었다. 나는 시야를 넓히고 모두를 지켜보았다. 나와 아버지를 제외한 전부가 각자의 삶 속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절로 박수가 나오게, 분에 넘치게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사후경직이라 불렀다. 실은, 그래서 저는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강한 사람이 뒤처진다는 것은 언제나 구경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매주 병문안을 가면서도 그의 정상적인 모습을 한순간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동물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경도가 없었다고나 할까요, 단단한 돌이 푸딩처럼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도가 이맘때쯤의 그에 대한 정직한 감상인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팔뚝에 찬 깁스도 더 이상 맞지 않을 정도가 되지는 않을까. 그를 왠지 서늘한 계절에 보관해 둬야 할 것 같았습니다. 예부터 그처럼 강직한 인간이라도 분명 세월이라든가 관계라든가의 풍파에 깎여나가고 말 거야, 라며 기도에 가까운 시샘을 해왔던 저였지만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유약하게 침상에 뉘여진 채 탯줄같은 주삿바늘이 연결된 그를 바라보며는 어딘가 설명할 수가 없는, 한마디로 이거 대체 뭔데?
작성일 2025-12-28 작성자 김케이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2상세보기 -
소설 저 너머의 카누와 여행자들
이 행성은 여러모로 짜증 나는 것투성이다.크레나토 표준 상수의 곱절 이하에 달하는 기압은 물론이며, 이 행성계의 주인 항성은 고작 하나밖에 없다. 또 생물종들은 어찌나 단조로운지. 고향 행성의 망한 변두리 동물원보다도 초라하다.그래서 항상 압력 조절 장치를 착용해야만 한다.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다. 부족한 광량 때문에 만성피로를 달고 사는 건 덤이다.무엇보다도 이 행성을 지배하는 지적 생명체 ‘인간’이 가관이다. 그들의 조악한 지적 수준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지경이니 말이다. 단적인 예시로 그들은 아직도 광속을 초월하지 못했다.그들 신체 구조는 몹시 비효율적이다. 어째서 주요 감각 기관이 얼굴 한 곳에 몰려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만약 그들의 머나먼 선조-‘아틀란티스’라 불리는 국가를 세운 족속들로, 현대 인류는 우습게도 그들의 존재를 부정한다.-가 자애로운 우리 코티하 행성과 방위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더라면, 인간들은 일찍이 여타 성간 외래종들에게 침략 되어 멸종했을 것이다.방위 조약에 따르면 적어도 한 명의 코티하인은 이곳 ‘지구’에 정착해야 한다.그리고 그 한 명의 코티하인이 바로 나, 코티하 정보조사국 외래 행성 부서 소속 파견 공무원이다.나는 지구에서 기본적인 방위 활동을 진행하고 인간에 관한 모든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리고 수집한 데이터를 고차원 연산을 통해 가공하여 은하 각지에 있는, 일명 ‘인간 마니아’들에게 판매한다.이러한 ‘약소생물 데이터 저장물 판매 산업’은 금전적 이익뿐만 아니라 코티하 행성의 대외적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열등한 약소생물을 외부로부터 지켜주고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장물을 만든다는 점이 코티하인들의 뛰어난 도덕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는 모두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코티하인들이 핵심적으로 여기는 진짜 목적은 바로 인간의 이용 가능성에 대한 조사이다. 지구의 속담 중에서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의 쓸모를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인간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궁리한다. 될 수 있으면 윤리적인 방식으로 이익을 얻고자 할 뿐이다.그리하여 나는 최대한 지적 수준이 높으면서 젊은 인간들이 많은 장소에서 업무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나마 쓸만한 인간을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기준에 따라 도출된 파견지가 바로 지구의 ‘대학교’라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어느 한 대학교를 선정했다. 대한민국은 단기간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국가로, 이 또한 지극히 목적 달성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것이라 보았다.그렇게 내가 타고 온 이동선은 현지 시각 12월 26일 03시 28분 11.39초, 지구의 대류권을 돌파하여 태평양이라고 불리는 바다 어딘가에 착륙했다.나는 이동선을 분해하여 업무에 필요한 장치들로 재구성했다.먼저 선임 담당자에게 전달받은 지구와 인간에 대한 데이터 저장 장치를 제조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와 지명, 그리고 문화 및 학술적 지식, 기타 인
작성일 2025-12-27 작성자 atonota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1상세보기 -
소설 눈높이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내가 평생을 살며 가슴에 안고 있는 생각이다. 당장 내 아버지만 봐도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죽어버린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살려 평생을 노력했다. 이기적이기 위해 다짐했다. 아버지는 초라한 지붕 아래서 초라하게 돌아가셨다. 태생은 의지보다 질겼다. 의지보다 질긴 태생. 이보다 알맞은 말이 있을까. 없다고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아가는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 아들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이기적으로 살려 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진실을 깨달은 아들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아버지가 죽고, 손주를 바랄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았으니 어련할까.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아버지와 닮아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아들에게 감추고 싶어지는 것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들이 나의 키를 넘어섰을 때, 아내가 나보다는 아들에게 의지할 때.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으며, 부끄러워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들은 아직 내 어깨에다 자신을 기대려하는데, 그러한 인식과 현실의 부조화가 어색하고, 심지어는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담배를 피게 된 경위다. 나이 50이 다 되어 갈 즈음에 처음 핀 담배. 비약된 인과관계는 혼란한 마음속에 숨어있다. 적어도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 아버지는 뒷마당에서 담배를 피고는 했다. 이기주의를 고수하려던 아버지는 우습게도 밖에서 피라는 어머니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몇 차례의 욕설이 있긴 했지만, 눈 내리는 시린 겨울 와중에도 꿋꿋이 밖에 나가 추위에 떨며 담뱃불을 붙이던 장면은 아직 선명한 모습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집 안에서의 발언권이 축소되며 아버지는 흡연의 횟수를 늘려갔다. 난 한심하단 눈으로 그의 등을 바라만 봤었다. 가장의 짐 다량이 내게로 옮겨졌을 때였다. 아무렴 나와는 큰 상관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다만 산책하던 도중 편의점 하나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고, 우연히 5000원 권 지폐가 있었고, 우연히 담배를 한 값 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아니 크게 했지만,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본심과는 무관하게 나 스스로의 선택이라 믿었다. 담배를 피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꼴사납게 기침을 했고, 그러면서도 다시 입에다 가져다댔다. 몇 번의 도전으로 흡연은 익숙해졌고, 오래지 않아 그것은 습관으로 굳었다. 중독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밝은 전망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작한 담배는 생활의 여백들을 틈틈이 채워줬다. 그 만족감이 꽤 크다. 그러므로 나는 쉽게 담배를 놓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 사실에 관해서는 거부감이 없으면서도 나를 압박해오는 건 지금의 가족
작성일 2025-12-27 작성자 구포대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16상세보기 -
소설 타인타인의 대한 혐오를 멈출 수가 없다.동성애자는 전부 역겹다고 느끼고, 스킨쉽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범죄자들은 당연하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역겹다.나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저것들은 도대체 왜 태어나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저것들의 뇌를 전부 파먹어서 좀비로 만든다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역겨운 것 중에서 가장 역겨운 건 동성애자다.본인과 같은 성을 좋아하는 인간들은 불량품으로 느껴진다. 고장난 채로 채어나고 부품없이 태어난 불량품. 그런 불량품을 사랑해주는 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전부 볼품없고 이상한 존재다.나는 완벽한 존재다.타인보다 완벽에 가깝고, 고능한 존재. 다른 인간들보다 상위의 존재라고 확신할 수 있다.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다 병신이니까.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가장 완벽한 인간인 것이다.그렇기에 나보다 아래의 인간들을 존중할 이유는 없고, 완벽에 가까운 나 자신을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모두가 나를 좋아할 거다.실제로 내 앞에서는 전부 웃음으로 대답하고, 친절로 보답한다.이게 내 권리다.완벽한 존재를 받들지 않을 권리는 없다.당신들에게 선택지는 없고 나의 권리만이 존재한다. 오늘도 거지같은 학교에 등교한다.반 안에 들어서면 전부 인사를 하고, 웃음으로 다가온다. 난 당연하게 그들을 무시하며 가장 앞자리인 내 자리에 앉는다.“이거 영국 왕실에서 쓰던 거울이야.”당연히 거짓말이다.하지만 거짓말을 해도 멍청한 것들은 바보같이 믿고 넘어가지.거울을 들어 완벽한 내 용모를 확인하다.완벽한 내 뒤에 있는 인간들…하찮은…. 인간.“병신-”거울에 비친 그 모습은 하찮은 것들이 아니었다. 그건 웃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나였다.
작성일 2025-12-27 작성자 푸른그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5상세보기 -
소설 그들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그들은 참 신기하다.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얼굴로 교문을 넘고, 지각은 태도 대신 훈장이 되고, 비어 있는 가방은 멋이 된다. 전자담배는 애교처럼 소비되고, 연초는 어른이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된다. 나는 그들을 본다. 늘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구경하듯이.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서. 나는 그들을 증오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증오한다. 나는 지각하지 않고, 가방 안에는 필기구가 있다. 노트는 반듯하고 성적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나는 공부를 잘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잘났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무너진 쪽은 아니라고, 무성의한 쪽은 아니라고. 그렇게 나 자신을 분류한다. 살아남은 쪽이라고.그런데 나는 그들과 같다. 나는 집을 나온 아이다. 돌아갈 곳이 없어서 나온 건지,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나온 건지 이제는 잘 모른다. 밤은 길고, 방은 조용하다.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취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잠시 생각이 흐려지는 그 순간이 좋다. 연초는 폼이 아니다. 멋도 아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스트레스를 태우는 일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오늘 하루를 버텼다는 증거처럼 남는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발악한다. 그들과 다른 척을 하면서, 그들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웃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모순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외면받는 것보다, 스스로를 배신하는 편이 덜 아프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그들을 증오한다. 그 증오는 사실 나를 향해 있다. 그들이 멋이라고 부르는 결핍과, 내가 우월하다고 부르는 성취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다만 누군가는 지각으로, 누군가는 성적으로. 누군가는 연초로, 누군가는 반듯한 노트로.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같은 언어로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그들을 보고, 나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 증오와 이해 사이에서, 그 경계가 가장 나와 닮아 있다는 걸 알면서.
작성일 2025-12-27 작성자 시유레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7상세보기 -
소설 4일의 거짓말
옷수선 집을 하는 우리 집은 돈을 그리 잘 받지도, 잘 못 받지도 않다. 할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날씨는 추운 겨울에서 따듯한 봄으로 바뀌고 있었고, 그 사이 변하고 싶지 않던 건 나뿐이었다. 새 마음 새 뜻으로 많은 사람들은 전보다 겨울 옷을 가게에 더 맡기며 우리 가족은 아침부터 분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했고, 언니는 이미 갔고, 엄마 아빠는 가게에 들어온 주문으로 많이 바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 일이 아니니까. 평일이 지나고, 주말이 되던 시간 때, 나는 가게에 잠시 들러 내 옷을 챙겨가려고 했다. 여전히 가게는 바쁘기 마련이었고, 한 눈을 판 사이 내 눈에는 무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내가 원하던 '그 옷'이었다. 아무리 엄마 아빠, 심지어 자존심을 무릅쓰고 언니에게도 얘기했지만, 그 누구도 내 말을 듣지도, 사주지도 않던 '그 옷'이었다. 너무나 갖고 싶었지만, 그냥 흘려보내려고 했는데, 막상 보니 실감이 무척이나 나 감히 발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이 보고 있지 않은 사이, 수많은 옷들이 걸려있는 옷들 사이에 '그 옷'에게 다가갔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보기만 하려고 다가간 것이었다. 전혀 다른 의도는 없었다. "엄마! 이거 누구 거야?" 그리고 물었다. 결국엔 "그거? 몰라. 어떤 학생이 맡기고 갔어" 학생이라니, 얼마나 부자일까?라고 생각했다. 뭐 값어치가 좀 있는 거니까. 좀 부럽기도 했다. 왠지 나랑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아서.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는 ' 그 옷''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또 모았다. 시간이 지나며, 추위는 온 데 간데없고 봄에서 따뜻한 여름으로 넘어가는 사이, 나는 초등학교 이후 중학생으로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예전과 다르게 중학생 때는 보는 눈이 생기기 시작하며 어느 정도 꾸미고 다녔다. 그래서 '그 옷'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건데 하며, 엄마가 가게에 들러서 옷 좀 챙기고 가라며 나를 가게로 불렀다.그리고 나는 또 한번 깜짝 놀랐다."엄마.. 왜 이게 아직도 있어?" "그러게 왜 안 가져갈까? 분명 가지로 온다고 했는데.." "아~ 그래?" 뭐. 인생에서 반항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결국 나는 옷을 훔쳤다. 심장 떨어질 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진짜 삼일만 깨끗하게 쓰고 몰래 가져다 놓으면 된다. 그러면 될 것이다. 나는 수학여행인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고 '그 옷'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미리 짐을 다 싸놓고 먼저 잠을 잤다. 내가 잠을 청하려던 순간 엄마 아빠가 집에 들어와 조금 마음에 찔리긴 했지만, 진짜 삼일만 입는 거니까 뭐. 상관없지 않을까 하며. 수학여행 당일 나는 우리 가족 그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학교로 향했다. 학교로 향하면서 솔직히 마음이 그리 가볍진 않았지만, 금세 형형색색 각자만의 개성을 담은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그 옷'이 없었더라면 정말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들뜬 마음으
작성일 2025-12-27 작성자 애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9상세보기 -
소설 밤의 모조품
나는 영원히 미룰 수 있을것만 같은 새벽이 익숙해, 이 밤을 지새우기를 진작에 결심하였다. 가족들은 이미 잠에 들었고, 이 밤의 비는 아주 세차지도 않게 그저 밍밍히 낙하한다. 하늘은 어죽 희미하다. 그 색은 꼭 플로트 유리 몇 장을 덧대고 다린 물망초를 펴 바른 듯하다. 공기의 눅눅함에 천정은 녹아 흐를 듯하고, 내가 앉은 자리 마주보는 작은 창엔 한창 만개 중인 밤나무 가지가 천칭 위에 오른 듯 일정한 박자로 부딪혀온다. 나는 방문을 걸어잠그고 자리로 돌아와 화학 문제집을 펼친 뒤 인터넷 강의를 틀었다. 하얀 보드에 1.4배속으로 선을 긋는 강사를 보고있으니 환멸심도 들고, 눈 안쪽이 가려워 안구에 점안액을 떨어뜨렸다. 백 일쯤 남은 수능과 점점 세차게 몰아치는 비는 나를 피로하게 만들었고, 신경 쇠약이 무엇인지 깨달은지도 며칠 안되었으니 그만 잠에 들까도 생각해보았다. 핑 돌아가는 머릿속은 날개가 달려 이상한 중력을 받는 듯했다. 버릇처럼 돌리는 볼펜은 책상위로 툭 떨어졌고, 봄 비는 점점더 거세게 내리쳤다. 나는 먹먹한 기분에 딴 생각을 하다 졸음이 몰려와 집중을 잃어버렸다. 더욱 거세진 비와 함께 번개가 내리쳤고 하늘을 찢는 굉음에 나는 단잠을 깼다. 문제지엔 침이 고여있었다. 소매로 대충 닦아낸 뒤 환기된 분위기를 달래고자 창문을 열었더니 눈살이 찌푸지며 피곤도 살짝 달아날 만큼 심한 밤꽃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매웠다. 청명한 봄날의 냄새를 웃돌만큼 냄새는 지독했다. 방충망엔 빗물이 거미줄 이슬처럼 고였고, 아까부터 창문 앞에서 살랑거리던 밤나무 가지가 방충망을 때려 물방울이 툭 떨어져 창틀에 묻어났다. 빗속의 시원한 공기가 조금씩 밤꽃 냄새와 함께 방안으로 스며서, 왜인지 가슴이 떨리며 더욱 후덥지근해진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고 왠지 모를 수치심이 들었지만 다리를 간드러지게 스쳐가는 바람에 오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처음 키스를 했던 때의 느낌처럼, 충만함이 감돌았다. 노래방을 가는 취미는 없지만, 첫 연애의 모호성은 나에게 조금 특이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둘이서 좁디 좁은 밀실에 갇혀 한 시간 가량을 보낸다는 것은, 방 안을 비추는 카메라가 있음에도 프라이빗함에 대한 망상과 흥분감을 고취시키기엔 충분했다. 초여름 비오는 날 에어컨이 아주 차갑게 틀어져 있는 방에 들어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지 몰라 차트를 순회하던 중 흐름이 끊겼고, 달라붙어 앉아있던 우린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대화도 없었다. 학교를 마친 직후라 우린 둘 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애는 내가 치마만 입고있는 것보단 교복 치마속에 체육복 반바지를 입는 것을 굳이 더 좋아했고, 난 그게 일상복이었던 터라 굳이 체육복을 벗지도 않고 그렇게 계속 입고있었다. 다리를 붙이고 딱 붙어 앉아있으니 에어컨의 추위는 부분만 가셨다. 그는 나에게 더 달라붙어 앉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안추워?” “조금, 시원해.” 그리고 허그를 했다. 투명 문 때문에 바깥이 신경쓰였지만 시험 막일 점심때
작성일 2025-12-26 작성자 유진선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7상세보기 -
소설 희미할지라도
감기가 올라 목소리조차 떨리기 시작했어요. 이미 손과 발은 내리는 가랑비에 따라 소실된 지 오래였고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 마음이었죠. 지키고 싶은 표정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손이 없어 가리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떨구면 열 기운 때문에 눈 앞이 흐릿해 참을 수가 없었어요. 잠깐이라도 하늘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한때 동경하던 것들이 저를 지워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입꼬리가 사라져 있었답니다. 이 정도 빗물에도 쉽게 휩쓸려 버리는 저는 어느 세탁소로 대피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몇몇 있더군요. 다들 신체의 일부가 씻겨 내려간 모양이었습니다. 속으로 조금은 안도했지만 미소 지을 수 없었어요. 웃을 때 사용하던 도구를 잃었으니 말이죠. 표정이 옅어질수록 마음마저 희미해져갔어요. 운 좋게 세탁소에서 우산을 건졌지만 어차피 비에 녹여질 테니 의미 없었네요.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은 괴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충혈된 눈과 살점을 헤집고 다 튀어나온 심장이 보였어요. 웃을 줄 몰라 웃어넘길 수도 없었어요. 걷고 있는 부위는 더 이상 발바닥이 아닌데 심장은 어째서 그리도 쿵쾅댔을까요. 밖에는 서로의 심장을 쥐어뜯고 내던지는 사람들로 가득 찼어요. 언젠가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지만 주인공의 극복 방법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지구를 정복하러온 외계인이 인간들의 목숨을 채가듯 정신없이 살벌했고, 빗물과 피가 섞인 적색 액체 가득한 길바닥에 나뒹구는 심장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두근대고 있었어요.쿵쾅- 쿵쾅-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그 음성은 상처로 물든 세상에 보기 좋게 피어난 한 떨기 꽃 같았습니다. 전쟁통 속에서도 선명했고, 어떠한 마음을 드러내는 의지 같기도 하더군요. 시체들 사이로 그런 영원함이 깃들었어요. 순간적으로 눈물이 났던 건 멸망에 대한 공포심이었는지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이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괴물 같은 모습으로라도 미래를 다져보려 합니다. 유리창 너머로 여전히 두근대는 제 심장을 마주한 이상 다짐할 수밖엔 없었네요. 비록 세상이 흐릿하게 보이고 웃음을 짓진 못하지만, 제 앞엔 앞다투어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과 절망이 차례대로 놓여 있지만 지키고 싶었던 표정을 지킬 예정입니다. 이미 수많은 영생을 봐버렸기 때문입니다.
작성일 2025-12-25 작성자 이에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5상세보기 -
소설 흉이 보이지 않을 만큼은
꿈을 꿔요. 창문은 통로죠. 희망은 아편이고요. -정유정, 내 심장을 쏴라- 눈을 뜨면 마주하는 건 오직 새하얀 벽지뿐이다. 아무것도 없이 빈 그곳에는 자꾸만 현실의 것이 아닌 것이 일렁이는 탓에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는 꿈에 취해있고 싶다. 오늘의 꿈도 여전히 그런 세상이었다. 벅찬 희망으로 점철된 세상이었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아도 되는 곳. 쓰라린 상처마저 아문 지 오래인 곳. 그곳에 있노라면 자신은 마치 여태까지의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굴 수 있었다. 덕분에 자신은 언제나 꿈을 꾸는 그 짧은 시간에 빠져…. 위잉. 백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던 공상이 처참히 부서졌다. 짧고 기계적인 진동이 삭막한 공간에 울려댔다. 유일한 희망을 만끽하던 정신이 퍼뜩 현실로 끌려 나왔다. 아…. 짤막한 한숨을 내뱉으며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여전히 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휴대폰에 떠있는 시각은 어느새 오후 2시였다. 병원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일어나고 싶지 않은 정신이며 몸이며 꾸역꾸역 일으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현실에 버려져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 물에 젖은 탁한 공기는 답답하고 지겹다. 당장이라도 다시 눈을 감고 싶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어딘가에 버려두고 싶다. 2주 만에 내원한 병원은 여전히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정신건강의학과라 쓰인 간판처럼,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자신과 익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눈동자는 치켜떠있고 정면을 응시하는데도 분명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야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빈 공간에 버려진 듯이. 혹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는 듯이.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계에 잠식되어 있다가는 귓가에 꽂히는 무감한 목소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곳은 일종의 휴식소이자 덧없는 천국이다. 눈에 드러날 만큼 미친 사람은 없는데, 적당히 어른거리는 정신상태가 평균치를 간당간당하게 맴도는 그런 곳.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오랜만입니다 서재희씨. 약은 잘 복용하고 계셨나요?”진료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노년의 의사는 다급히 묻는다. 환자가 많아 그러는 모양이지만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태도는 언제나 이곳에 오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한다. 때문에 나는 의자에 앉기까지 다물린 입술을 열지 않으며 그저 익숙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네. 똑같아요.”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대답에 의사는 질릴 법도 한데 그는 내색도 하나 없이 곧바로 딱딱한 말을 건넨다.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아도 의사의 얼굴은 상상이 갔다. 지겨운 진료를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 특유의 무감정한 눈빛. 그걸 마주하고 있노라면 결국 오늘은 조금 다를 거라며 다짐했던 마음마저 불쑥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현실이 꿈같으시다고요.”“네. 깨어있는 게 오히려 끊기는 꿈 같아요. 아니 어쩌면 정말로 그런 걸지도 모르죠. 차라리 잠들어 있는 쪽이 더 현실같이 느껴지니까요.” 나는
작성일 2025-12-25 작성자 서벽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21상세보기 -
소설 아무 일
역에 지하철이 들어온다. 어디까지 이어질지 생각하고 있으면 문이 열린다. 그렇게 차가운 봉을 잡고 손이 시려지며 여러 역을 거쳐 지나간다. 세 번째 역에서는 손의 감각이 사라진다. 바닥을 보며 다섯 번 더 역을 지나간다. 익숙한 안내 방송 대사가 들려오면 천천히 내린다. 근심을 덜어내지 못하는 한숨은 뿌연 김을 내뿜는다. 발자국은 급히 역을 벗어난다. 그러자 출구 바로 앞 횡단보도는 나를 바라본다. 해가 지는 시간의 신호등은 유독 밝다.‘하나, 둘, 셋’눈을 감고 셋을 센다. 다 세고 눈을 떴을 때 초록불이 된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없다. 아쉽게도 오늘은 아닌가 보다. 터벅터벅 대로 한가운데를 횡단한다. 모든 자동차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다. 그렇게 걷다 보면, 한 빵집에 도착한다. 문을 열자 딸랑이는 방울 소리가 들리며 커피 내리는 냄새가 난다. 밖에서 보이라고 진열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들 옆, 혼자 주눅이 든 듯 작은 조각 케이크가 있다. 어디 내놓으면 부끄러울 것 같은 그 케이크를 고른다. 저 큰 케이크는 내 용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겠지. 책상에 놓여있는 메모지에 케이크 이름을 쓴 뒤, 계산대로 들고 간다. 직원은 메모지를 힐끗 확인하고선 가격을 말한다. 이 정도 가격이면 아이스크림 5개는 먹을 수 있다. 결제하면 직원은 나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케이크를 가지러 간다. 나는 잠시의 온기를 가슴 깊이 넣는다.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잠시 꺼내보려고 말이다. 목도리를 고쳐 매고 케이크 상자를 잡아 빵집을 나간다.‘같은 길, 동일한 횡단보도, 잠시 전에 본 지하철...’돌아가는 시간, 이번에는 빈자리가 많다. 딱히 시리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의자에 앉는다. 상자는 무릎 위에 올리고 코를 목도리에 파묻어 본다. 집에 가는 길에는 석양을 보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터라 볼 수 없다. 창문 너머로 들판 위의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흐릿하게 보이지만 느티나무 같다. 정말 신기하다. 지하철은 멀리 있는 것을 더 오래, 자세히 보여준다. 들판의 덤불과 꽃은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작다는 이유도 있지만 금방 지나가는 지하철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참으로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지나간 일 중에서 유독 먼 역사가 보이는 우리 같았기 때문이다.그렇게, 지하철과 조각 케이크의 횡단은 다행히 오늘 안에 마쳤다. 저녁이 나를 내쫓고, 아침이 나를 이끄는 다음 날이다. 주방으로 걸어가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신다. 오늘따라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하는 것을 냉장고에 있는 케이크를 확인하는 것이다. 갑자기 무슨 의심이라도 드냐고 묻는 듯이 상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허름한 잠옷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면이 코를 간질여 재채기한다. 거실에 가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는다. 그러다 가끔 새벽하늘을 바라보는데 까만 새가 지나가기도 한다.‘다시 자야겠다.’아무 사건도 없고, 할 일도 없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깊고 깊은 잠에 스며드는 수밖에 없다. 하루의 반의반만 더 자고 일어나야겠다. 그러면 적어도 귀찮게 아침이라는 식사를 챙겨 먹는 일은 없
작성일 2025-12-25 작성자 user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2상세보기 -
소설 출가
그의 고향은 먼 우주다. 그는 어둡고 추운 그 공간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어느 순간 그는 어느 행성과 충돌했고 바다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방랑은 계속됐고 어느 순간 바다는 쪼개지고, 명명됐다. 그의 이름은 태평양이 되었다. 다른 태평양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에워싼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그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다. 태평양으로 정착한 이후로 바깥 세계로 끌려 나간 적도 없었다. 가끔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잊을 정도로 그의 삶은 평온했다. 다만 그의 주변 환경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바다에서 끌려나가 사라져버린 친구들이 태반이었고 해류에 휩쓸려 친구를 잃기도 했다. 우리들의 삶이란 건 무엇일까 하고 그는 자주 고민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고민을 나눌 만한 친구가 생기기도 전에 다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방금 인사했던 이가 고개 한 번 돌린 후에 사라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자신을 빼고 변화하는 세계에서 그는 외톨이었다. 바다의 수평선처럼 평생 평온할 것만 같던 그의 생도 언젠간 태풍을 맞길 마련이다. 은빛의 물고기들과 함께 달리던 무렵, 그는 바다 바깥으로 끌어올려졌다. 그물에 엉킨 갈치들과 함께였다. 다른 많은 친구들이 다시 바다로 돌아갔으나 그는 은빛 비늘에 매달린 채로 끝까지 버텼다. 그에게 이는 절호의 기회였다. 평온했던 삶의 수면을 잔뜩 헝클어뜨릴 반항의 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차가운 박스 안으로 유폐되었다. 춥고, 어두웠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자 다른 친구들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이봐, 괜찮아?” “으, 으응. 잠깐 겁이 난 것뿐이야.” 그는 애써 웃었다. 그가 선택해서 올라탄 배였지만,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태평양 속에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안전했는데 괜히 올라와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는 친구들은 어째 태연해보였다. “난 이번에 두 번째야. 삶이라는 게 맘대로 되지 않는 거 아니겠어? 크게 겁먹지 않아도 돼. 우리가 할 일은 넓은 세계를 구경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맞아 맞아.” “나도 이번이 세 번짼데 난 호수를 가보는 게 꿈이야. 말로만 들어봤거든.” “와......다들 대단하다.” 그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늘에 매달렸던 때의 자신감을 회복했다. 두려울 건 없었다. 미지의 세상을 향한 호기심만이 가득 샘솟았다. 바닷속과 달리 아이스박스 속에서 그는 주변의 이들과 오래 몸을 부딪쳤다. 그는 다른 이들의 유랑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모두 달랐고 세계란 바다보다도 무척 다양해보였다. 시간이 꽤 지나, 아이스박스의 뚜껑이 열렸을 때 그는 그들과 헤어졌다. “그럼 멋지게 세상을 돌아다녀봐!” “고마워!” 그는 뚜껑에 매달린 채로 이동했다. 그렇게 어느 부둣가의 고인 물에 섞여들어 갔다가도, 금방 하수구로 떨어져버렸다. 아이스박스만큼 어둡고 추운, 아이스박스보다 넓은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 넌 바다에서 나온지 얼마 안 됐구나?” “응. 넌......구정물이네. 고생이 많겠어.” 그의 말에 구정물은
작성일 2025-12-25 작성자 구포대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6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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