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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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한 편당 작품 최대 분량은 어느 정도인가요?작성일 2023-11-0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59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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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장길산
극적(劇賊) 장길산이 러에서 서울로 온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곳에서 혼인을 맺었던 금순이라는 여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길산이 도착한 서울의 어느 날은 여느 때처럼 혼란스럽고 재빠르게 지나갔다. 매연을 뿜어대는 도시와 자동차의 위협적인 소음에도 길산에게는 당황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길산은 꿋꿋이 벌레 떼 같은 사람들의 행렬을 뚫고, 하늘을 가린 채 솟아오른 탑들을 지나며 멈추지 않고 길을 걸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길쭉한 체구, 오랜 세월을 꾸밈없이 간직한 주름진 굳은살, 그것들을 힘겹게 감춰주는 낡은 가을 외투와, 어디서 주운 건지 알 수 없는 민무늬 흑립. 그 애처로운 청년의 모습은 첫눈에 봐도 동정이 가는 딱한 이방인의 것이었다. 길산 그 자신도 주변과의 이질적인 부조화를 깨달았지만 애써 모른체 하며 금순의 집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금순의 집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길산은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분명 금순의 집 앞마당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끊임없이 치솟아, 또한 끊임없이 죽어가는 기이한 서울의 흐름에, 길산은 옛터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길산은 분명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그런 흐름이 마치 파도와 같다고 느껴졌다. 오늘 금순의 집 앞마당에 세워진 탑은 곧 내일이 되면 하얀 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라. 또 새로운 탑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 그러나 길산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그곳의 하루살이와 같은 풍경을 내심 마음에 들어 했다. 그들의 법칙과 달리, 변치 않은 모습으로 이곳에 서있는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져서였을까. 길산은 돌아갈 고향이 없어졌음에도 슬퍼하지 않았다. 길산은 그저 아스팔트로 변해버린 금순의 터를 한 번 쓰다듬고는, 단지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길산은 아스팔트 아래 묻힌 잔해와 함께, 금순을 그곳에 묻었다. 길산은 열차에 몸을 실어 남쪽에 있을 스승의 사찰로 향했다. 가느다란 수염처럼 휘날리던 나뭇가지들. 열차 안에서 본 그것은 길산으로 하여금 스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이미 오래전 사찰의 동전 무덤. 그 깊은 곳에 묻혀 잠 들었을 것을 길산은 어느샌가 알고 있었다. 천불산에 도착한 길산은 고려 시대의 전설을 떠올리며 새것처럼 반짝이는 천탑을 바라보았다. 반대로 천탑은 오랜시간동안 축적된 민중의 바램과 분노를 머금고 길산을 깊이 내려다보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길산은 옛날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절의 장길산이 현재 자신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스승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길산이 천탑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천탑은 대답이 없었다. 천탑에는 수많은 이끼가 생겨 났고, 부서지고 갈라진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입을 다문 길산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를 잠근 채 천탑의 오늘을 바라보았다. 길산은 자신이 과거에 있었다는 것을 금방 망각하고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왔다. 어느새 해가 자라기 시작했고, 사라진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 길산은 점점 더 어제의 일이
작성일 2025-05-04 작성자 히치콕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82상세보기 -
소설 칙명
20XX 년, 나는 지금 고향에 와 있다. 정확히는, 지도에서 사라진, 폐허가 된 마을에 와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이끼로 변색된 아스팔트와 벽돌, 그 위로 자리 잡은 무성한 억새풀들만이 외롭게 휘날리고 있는 알몸의 초원뿐이다. 바닷가와 근접한 탓에 들려오는, 파도의 희미한 노랫소리가 아름다운 이곳은 지금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생기 넘치는 장소였다. 서울 달동네에 홀로 남겨진 노인들도 그들의 꿈속으로 비치는 초상은 한없이 젊고 아름다웠을 것이라. 과거,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붙은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이곳을 떠났다. 마을을 뒤로한 순간 보았던 나의 집. 정든 고향의 터. 그 위로 쓸쓸히 흩뿌려진 어머님의 부고. 그날 보았던 모든 것들, 특히 죽음조차도. 이제 와서는 그것이 있었다는 것을 겨우 암시나 해주듯이 작은 향기의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나는 그 사실이 몹시도 슬프게 느껴졌다. 옷들을 잡아 끌 듯 거세게 부는 바람조차 잊힘에 대한 한탄으로 흐느끼는 곡조처럼 들려왔다. 오랜 시간 동안 고향을 잊고 살아온 내 기억 역시도 마찬가지로 하루, 이틀, 그리고 일 년. 그 조금씩의 풍화를 못 이겨 힘없이 바스라지고 있었음이, 그제야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기억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라 말하고 싶었다. 되찾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비록 모질게 떠나보낸 어머님의 마지막 말씀은 그리도 쉽게 사멸하였지만, 내가 겪었던 과거와 과거의 삶 자체만큼은 끈질긴 노력으로 어떻게든 힘을 써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거울 너머로 비친 소년 시절의 모습. 그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날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던 지독한 꿈과 환영이 출처였지만 말이다. 그러한 작은 희망에서부터 나는 여행을 결심했다. 부식되고 갈라져 죽은 건물 사이사이를 거닐며, 그 사이에 듬성히 자라난 세월의 풀들을 헤치며, 나는 다시금, 그 기억들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꿈을 꾸던 과거의 어린 소년에게로. 그 소년의 상처 입은 순수와, 미숙하게 돋아났던 반항심에게로. 나는 나에게 칙명을 보내기 시작했다.
작성일 2025-05-01 작성자 히치콕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6상세보기 -
소설 내장 해방
이곳은 끝자락이다. 지도에서 손가락만큼만 밀려나도 이름 알릴 공간마저 잃을 작고 허접한 어촌. 바다는 서러우리만치 깊고 넓었으나, 마을은 축축한 골목길과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녹슨 난간의 울타리로 철저히 둘러싸여 있었다. 주인이 떠나간 집들은 빈 소라 껍데기처럼 자리를 지켰고, 잔재와 같은 주민들은 매일을 바닷바람에 쓸려가듯 살아갔다. 어떠한 마음으로든 몸을 앉혔다가는 아예 가라앉으리라 으르는 막막한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라는 이유로 이 마을을 사랑할 수 없었다. 아니, 나의 터전이라는 정체성은 이곳이 나의 그득한 혐오를 마땅히 삼켜야 하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꼬질꼬질한 짠내가 베어든 지긋지긋한 공기, 썰렁한 어판장에서 또렷한 고음의 잡담, 종일 비웃음을 실어 보내는 들쭉날쭉한 파도. 전부, 내게는 작살로 귀결되었다. 죽어라 나를 찌르면서도, 피를 내보내지는 못하게끔 결코 뽑혀 나가지 않았다. 독기의 작살은 꽂힌 그대로 마개가 되어 나를 틀어막았다. 고이는 피는 숨이 도는 내 안의 작은 방에 차올랐다. 피에 잠긴 내장이 최대한 오래 썩을 수 있도록 껍데기를 감옥으로 탈바꿈시키는 잔인한 수작을 부렸다. 실로 피학의 나날이었다. 마을은 그런 작살 천지였다. 한편 나는 횡사한 무명의 어류 속 고이 남은 내장 같은 것이었다. 물고기의 배를 가르지 않는 한 빛을 받을 수 없었지만, 어부가 칼을 들이미는 어느 날 쏟아진 빛을 품어봤자 썩어가는 실체만을 드러낼 터였다. 물고기, 죽음에 빠진지도 모르고 아가미를 벌름대는 지독한 물고기에 갇힌 나는 불쾌감과 지겨움 속에서 서서히 부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애향심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내게 사용처가 없었다. 하지만 비교를 넘어선 감상을 내리게 만드는 일련의 이변이 최근 일상을 덮쳤다. 마을은 두려워졌다. 전조가 가득했다. 전조, 무엇의 전조? 여기저기 서성이는 외부인 무리를 먼저 언급해야 했다. 내 신경을 가장 거슬리게 했으니까. 몇 주 전부터 나타난 그들은 단언컨대 관광객이 아니었다. 사기를 당하지 않고서야 이곳을 찾을 수 없었고, 사기를 당했다 해도 이곳을 관광지로 오인할 수 없었다. 구질구질한 사정이나 음흉한 목적을 안지 않고서야 일주일 넘게 체류할 수 없는 회색 불모지였다. 주민 중 누군가의 친척도 아니다 싶은 그들은 갈수록 불안하게 어촌을 배회했다. 그들에게는 공유되는 특징이 있었다. 목이 졸린 양, 튀어나올 기세로 팽창되어 있는 땡그란 눈하며 얼룩덜룩한 오팔 광택을 입은 창백한 피부와 쪼그마한 입으로 이루어진 불온한 외모. 결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며칠 전 그들 가운데 하나가 방파제에서 바다에 면상을 처박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장면을 목격했다. 물속에서 혀를 휘젓는 모습이 바닷물과 입을 맞추는 것 같았다. 어쩜, 바다와의 굶주린 입맞춤 정도는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현실이었다. 고린내가 밴 길목의 석상을 정성스레 핥고, 도로에서 열정적으로 기어다니고— 갯바위, 테트라포드, 오래된 선착장… 가로등조차 없는 어두운 장소를 잘도 골라 벌이는 그들의 기행
작성일 2025-04-30 작성자 지존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270상세보기 -
소설 지박령 지유리
1눈을 떴을 때, 익숙한 흰색 천장과 희미하게 빛나는 전등 불빛이 또다시 나를 반겼다. 철제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일어났니?"보건선생님께서 다가와 파티션을 걷었다."윤서훈, 너 오늘로 벌써 다섯 번째야. 요즘 시험기간이라 무리하는 건 알겠는데 건강도 챙겨야 한다."나는 긍정의 의미로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더 쉬고 괜찮아지면 들어가."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자습 시간에 시험공부를 하던 중 갑자기 어지럼증이 도졌다. 점차 몸에 힘이 빠지고 눈의 초점이 풀리면서 그대로 엎어졌던 것 같다. 이번에도 2등은 안된다. 1등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밤낮 가리지 않고 선행학습과 시험공부를 병행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며 수면 시간을 조금은 늘려야겠다고 생각할 참이었다."근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요. 어디 아파요?"오늘 아침 모르는 이웃에게 엘리베이터에서 건네받은 그 한마디가 뜬금없이 떠올랐다. 처음 본 사이에 예의 없다고 느끼지 말고 귀담아 들었어야 했나. 그러고 보니 처음이 아니었지. 최근 몇 번 인사를 나눈 기억이 있다. 요즘도 이웃에게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보건실을 나섰다. 선생님은 더 쉬고 있으라며 손짓했으나 사양했다.밤 12시, 학원을 마친 후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에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잠시 기다렸을 때였다. 계단 옆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짧은 비명이 고요했던 아파트에 천천히 울렸다."학생, 또 보내요!"단정한 묶음머리에 키가 조금 크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어른, 아침에 본 그 사람이다."안녕하세요..""학원 갔다 오는 길이에요? 되게 늦게 끝나나 보네."사실 학원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평소보다 일찍 온 것이었지만 중요한 얘기는 아니기에 대충 넘어갔다."네, 뭐.. 왜 거기 계세요?""음.. 그냥요. 잠깐 바람 쐬러 나왔는데 이제 나가려고요.""아.."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 특이한 사람이다.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빨리 엘리베이터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리는 즉시 발을 디뎠다."전, 이제 가볼게요.""그래요. 여전히 아파 보이니까 몸 좀 챙기고요!""네.."문이 닫힌 뒤 생각했다. 여전히 무례하다. 2"왔니.""네. 다녀왔어요."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엄마가 소파에 앉아있었다."너 오늘 쓰러졌다며."담임선생님께서 또 연락하신 게 틀림없다. 전화할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소용없었다."별 일 아니에요.""곧 시험이니까 계속 열심히 해. 힘 빼지 말고."".. 네."모자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가방을 열었다. 학원 숙제와 복습거리를 펼칠 시간이었다.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너머로 햇빛이 들어와 주말 아침을 밝혔다. 하품을 한 번 한 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요즘 자꾸 머리가 어지럽다. 시험기간 때문에 무리해서 그런가 싶어도 아파트를 벗어나면
작성일 2025-04-29 작성자 김종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03상세보기 -
소설 넋 멍든 개
비바람이 뺨을 사납게 할퀴었다. 거칠게 내리꽂히는 무자비한 빗방울은 우산으로도 채 막을 수 없어 정윤의 각진 어깨를, 얼굴을, 옷을, 머리칼을 젖게 만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려 이마에 달라붙었다. 털을 오소소 올라오게 하는 바람이 불면서도 후덥지근한 기이한 날씨였다. 정윤은 하얀 셔츠를 입었고 그 위에 걸쳐입은 와이셔츠와 넥타이에서 날티가 났다. 비에 젖어 옷에 살이 비쳐보였다. 정윤은 신경질적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불붙은 머릿속을 헤집는 ‘미안해.’라고 말하는 누나의 나직한 목소리를 지우려 애썼다. 마침내 방 귀퉁이에 쌓여있는 잉크 묻은 종이 뭉치를 기억해내자, 속에서 무언가가 차올라왔고, 그것이 그 자신에 대한 염오감임을 깨달았을 때 정윤은 분노에 가까운 충동으로 바닥을 쾅- 찼다. 물체와 부딪히는 액성의 소리가 바닥에 울렸다. 바닥에 묵묵히 고여있던 더러운 물이 정윤의 얼굴에, 옷에 튀었다. 그 축축한 감각은 정윤의 정서에 애상감을 가세해준 것이다. 비와 섞인 굵은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세찬 비바람 덕분에, 정윤은 흠뻑 젖은 얼굴의 연유는 눈물 따위가 아니라고 위안할 수 있었다. 이건 눈물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단지, 비 때문이라고. 정안과 정윤의 부모는 타계한 지 오래였다. 그들은 12살 차이의 남매였다. 아비는 정윤이 태어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정윤이 아는 바와는 다른 사실이다. 음주운전으로 돌진하는 차에 치여 죽었다. 정안은 기억한다. 그가 정윤을 베고 있는 어미와 저를 감싼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던 것을. 아비의 마지막 온기는 정안의 작은 손 안에서 고요히 식어갔다. 아비의 피가 묻었던 자리를 아직도 정안은 깨끗이 씻어내지 못한다. 죽은 사람의 살은 차갑다는 것을 정안은 그때 일찍이 알았다. 그 차가움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 되어, 종종 꿈에서 되살아났다. 피 냄새는 기억의 깊은 틈에 썩은 꽃처럼 박혀 남았다. 자상하고 책임감 있는 아비였다. 장례식에서 정안은 있지 않았던 생리적인 눈물까지 나오게끔 사력을 다해 소리 지르며 울음을 쏟아냈다. 배가 불뚝 나온 정안의 어미는 숨죽이고 있었다. 어미는 정윤을 낳다가 정윤을 세상에 남기고 죽었다.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 정안은 거짓말 같은 의사의 통보에 가슴이 내려앉았던 것을 기억한다. 정안은 죽음을 처음 마주한 날, 그것이 그렇게 조용하고도 잔인하다는 걸 알았다. 예고도 없이 삶이 꺾였다. 마스크 낀 의사에 입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언사와 대비되게 피로한 눈과 사무적인 말씨는 쎄하도록 이질적이었다. 의사의 옷에 검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세상이 빙글 거꾸로 도는 듯 아찔했다. 정안이 가끔씩 하던 코끼리코 하고 몇십바퀴 돌기 장난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눈 앞에 재생되고 있었다. 고막을 울리는 진동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엔 이미 정안의 눈에서 이슬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을 때이다. 그 말에는 물리적 무게가 없었지만, 정안의 세상을 무너뜨리기엔 충분했다. 참혹
작성일 2025-04-28 작성자 윤혜원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348상세보기 -
소설 인간찬가령
도롱뇽은 사람을 본다. 지긋이. 계속 쳐다본다. 그런 도롱뇽을 쳐다보는 타자는 무척이나 궁금하다. 따라서 키보드 위에서 손을 내려놓고, 머리를 도롱뇽의 눈속에 비집고 들어가 한 번 도롱뇽이 되어보도록 하겠다. ---타자는 사람을 관찰한다. 사람이 보이는 의식적인, 무의식적인 행동을 전부 관찰한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코를, 벌겋게 상기된 귀를, 흉하게 뻐끔거리는 입을, 상대를 부정하듯 깜빡이는 눈을, 그 모든 행동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팔을, 그 뻔뻔하기에 자랑스러운 팔의 전설적인 몸종, 손을, 어느 체형의 인간이든 풍만하고 오만방자해 보이는 배를, 사람의 혐오와 쾌락을 부르는 고간을, 비극을 주변으로 흩뿌리는 다리를, 그런 다리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는, 가장 선하기에 상처를 입기 쉽고 무슨 이유에선지 사람들이 가리고 다니는 발을. 관찰자가 된 타자는 사람을 십자가의 가운데에 맞추고 계속 바라보았다. 그렇게 꽤 많은 시간을 관찰로 보내던 도중, 어느샌가 타자의 십자가에 갑자기 빛이 번뜩였고 그 순간부터 사람은 객관적으로도, 타자의 주관에서도 무언가 바뀌기 시작했다.사람이 신경쓰이며 사람이 그립고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존재라면 타자의 무언가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사람을 모방하기로 했다. 그러나 모방으로 이루어진 모조품은 꿈을 꿀 수 없는 법. 따라서 사람을 도작하기로 했다. 사람을 박제하고는 무용하게도 그 박제를 관리하는 사람을 훔치는 짓을 하는 것이다! 나의 완벽하고 미끈거리는 몸을 불안정하고 꺼끌거리는 사람의 몸으로 바꾸었고, 사람의 행동을 훔쳐 하나는 머리에 슬쩍, 하나는 가슴에 자랑스럽게 넣고, 그 누구도 모르는 남은 하나는 구멍이 뚫린 주머니 속에 다급하게 집어넣었다. 머리를 한번 긁고 타자는 가로등이 비추는 비 내리는 거리를 걸어간 것이다. ---사람을 훔친 지 몇 년이 지났을까. 어느 아침의 일이다. 타자는 다리를 긁고 현관문과 태양을 등지고 선 채 복도 끝에 보이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오래전부터 간직해왔던 의문을 더듬으니,그 손길은 어딘가 익숙해보이면서도 알게 모르게 말 못할 깊고 깊은 우울감을 내비치고 있었다.예컨대 불륜녀를 아쉽다는 듯 더듬는 충실한 남편의 손길과 닮았으니,그런 그의 모습은 과연 어느 누가 오더라도 어찌 쉽게 말을 걸 수 있겠는가?하지만 예외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니 법. 저기 굳게 닫힌 문이 열리더니 갑작스럽게 뛰쳐나온 그의 몸종은 타자 앞에 서서 그의 손을 잡았다. 마치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이 굴던 그는 타자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자기자신조차 망각의 바다로 밀쳤는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타자는 그 의문을 주는 어떠한 현상을 그런 몸종에게 설명을 하니, "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사람이다. 그렇고 말고 내가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비록 얼마 전까진 젖은 발로 바위 위를 기어다녔다만 당신들도 아는 나의 사랑스러운 내면 속 강도는 사람을 아주 완벽하게, 완전무결하게 훔친 것 아닌가? 그 누구도 부정 못 할 테지. 그야말로 진짜보다 완벽한 가짜란
작성일 2025-04-25 작성자 dls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12상세보기 -
소설 평범한 하루의 끝에
정말,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포옹이다.사람의 품속이 이렇게나 포근했던가?"죽지 말아요, 죽지 말아주세요." 나 죽으라고 고사 지내는 세상에, 당신은 내가 살길 바란다. 새하얀 피부, 그것보다 더 눈부시게 하얀 백발의 남자는 나를 끌어안고는 쉴 세 없이 눈물만 쏟아낸다. *** 이단아, 17세. 그녀의 기구한 일상을 같이 들여다보자. 05:30 기상. 남들보다 조금은 빠르게 하루를 시작한다. 일찍 일어났다고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위는 없다. 입에 칫솔을 쑤셔 넣고는 밤새 충전 시킨 패드와 문제집들은 가방에 쑤셔 넣는다. 대충 사람의 몰골을 하고 집을 나선다. 집 바로 앞 세탁소에서 그제 밤에 맡긴 교복을 찾고 어제 입었던 교복을 맡긴다."아저씨, 5000원이요."교복 세탁 한 번에 5000원. 한 번 맡길 때 큰 돈이 드는 건 아니지만, 학기 중에 거의 매일 드는 돈이라 큰 돈이 되긴 한다."어쩌지, 지금 잔돈이 없네."내가 내민 만 원짜리를 보며 머쓱하게 웃는 세탁소 아저씨였다. "저도 만 원짜리 밖에 없는데요.""어차피 내일 새벽에도 교복 맡길 거잖아~ 만원 주고 가면 내일 돈 안 받을게."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이 세탁소 아저씨는 얌체 같은 구석이 있는데, 잔돈이 없다며 핑계를 대고 내일 돈 안 받는다고 해 놓고 돈을 기억이 안 난다며 돈을 받는다. 이런 일이 벌써 수차례라 늘 오천 원을 들고 왔었는데, 오랜만에 실수를 했다. 돈을 들고 다니면 돈을 쓸까 겁이나, 지갑에는 이번 달 교통비가 든 교통 카드만 들어있을 뿐 이다."알겠어요. 여기, 만원이요." 순순히 오천 원을 건넸다. 배가 불룩 나온 세탁소 아저씨의 배는 18살 소녀의 푼 돈으로 키워진 뱃살이다. 예상에도 없던 오천 원이라는 지출이 난 거에 짜증 나지만 버스를 놓치면 안되는 나에게 실랑이 할 시간 따위 없다.*** 06:04 세탁소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다."abruptly, 갑자기. acquaintance, 앎. aftermath, 여파..." 불행하게도, 집 근처에 괜찮은 고등학교가 4개 가량 있었지만 지망하던 학교에서 모두 떨어졌다. 버스 타고 25분 가량 걸리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버스 타는 25분 가량 열심히 단어를 외워준다. "아가씨, 비켜.""네?" 심굴궂은 얼굴의 아줌마가 비키라며 손짓했다. 자기 지정석이라며, 자기는 이 자리가 아니면 갈 수가 없다며 난리를 친다. 빈자리도 많은데 피곤하게 왜 저러는 걸까?'망할 진상들은 아침 잠도 없나, 왜 새벽 버스를 타고 난리지.' 순순히 자리를 비켜드렸으나, 진상은 가는 내내 목소리를 높이며 요즘 애들은 글러 먹었다고 예의 밥 말아 먹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소리를 지르든 말든 그저 묵묵히 단어를 외웠다.*** 06:33 아무도 없는 교실에 도착해서 아까 세탁소에서 찾은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세탁소에 맡기면, 과장 좀 보태서 새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남들은 내 교복이 더럽지만 않으면 큰 관심은 없을 텐 데. 혼자 사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작은 발악질 이긴
작성일 2025-04-23 작성자 루시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25상세보기 -
소설 세컨드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숨이 찼다.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응원했고 함성을 질렀다.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소리쳤다. “달려라!” 세 글자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응원했다. 내 몸에서 땀이 났다. 얼굴에서도 물이 내렸다. 모래와 물이 만나 따가웠다. 기침이 나왔다. 뒷모습을 추월하고 싶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한 발을 더 강하게 내리쳤다.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누군가의 뒤태도 속도를 높였다. 순번을 바꿀 수 없었다. 앞으로 더 나아 갈려면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했다. 엄마가 소리쳤다. “아들. 더 빨리.” 내 앞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내 신발 끈이 풀렸다. 넘어졌다. 피는 나지 않고, 약간 까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어날 수 없었다. 아픔보다는 쪽팔림 같았다. 그러나 내 앞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똑같이 쪽팔린 건지 그도 자빠져 있었다. 나는 누군가 오길 기다렸다. 엄마가 트랙 쪽으로 달려왔다. “괜찮아? 그냥 뒤 보고 돌아오지. 빽 도하면 내가 있는데.” 그녀는 빠르게 달려왔다. 내 앞으로 가서 뒷모습을 일으켰다. 나는 내 신발 끈을 혼자 다시 묶어야 했다. 그러나 앞으로 달리지 않고 멈춰 있었다. 내 앞이 일어나 달리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알람이 울렸다. 내가 맞춘 시간보다 늘 5분 일찍 나를 깨웠다. 자고 나도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기름 냄새가 나는 물이 이마에서 내렸다. 잠을 잔 것 같지 않았다. “밥 먹어요. 오늘 아침이에요.” 엄마가 목소리를 떨었다. 그녀의 눈알은 좌우로 흔들렸고 추운지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몸이 고철덩이처럼 무거웠다. “엄마, 이름을 불러야지. 나 아들 김민성.” 내 이름을 천천히 입 모양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운 건지, 아님, 못 알아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함께 식탁 앞으로 갔다. 발을 한 발 내릴 때마다 몸 한쪽이 망가지는 것 같았다. 단순 고장이 아닌 부품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망가짐 같았다. 식탁에는 세발나물과 닭개장이 있었다. 어제저녁과 다른 메뉴였다. “엄마, 왜 이렇게 아침이 거해요. 몸 아프면서.” 그녀에게 투정 부렸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지만, 말은 속과 다르게 나왔다. “나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냉장고에 닭요리가 없어서 만들었어요.” 그녀는 어제저녁에 남겼던 프라이드 치킨을 잊은 듯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엄마의 몸은 차가웠다.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열은 아니었다. 이마는 정상 체온이었다. “몸 좀 떨어져 주세요. 저는 당신의 엄마가 아니에요.” 그녀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거리를 두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 빽 도를 했다. 그리고 식탁 위에 앉아서 닭개장을 먹었다. 엄마는 손을 떨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녀의 안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입 주변 피부가
작성일 2025-04-22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74상세보기 -
소설 카프리치오 II
카프리치오 II를 아십니까? 그, 기상곡 말고. 카프리치오 II라는 이름의 피아노 소나타 말입니다. 그걸 작곡한 안씨는 악곡의 거장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연주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음악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지만, 아무튼 거장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음악가들 특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놀라운 참신함 같은, 그런 게 부족했습니다. 그는 그저 그런 음악들만 작곡하는 그저 그런 인물이었지요. 나 같은, 이름부터 고리타분한 음악들이 그의 커리어 전부였습니다. 안씨는 주목받고 싶었지만 세간에서 그의 평가는 좋지 못했어요. 달리 팬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없어서 실패한 음악가로 보였습니다. 그는 돈이 없어서 공사판을 전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생부터 음악가라서 몸이 허약했고 운동을 해도 근육이 잘 안 붙는 체질이었습니다. 뼈도 약하고 병도 잘 걸리고, 그래서 일을 못 나가다가 잘리는 일이 허다했지요. 그의 외모를 묘사하자면, 아실수도 있겠지만, 창백한 피부에 등은 조금 굽었고 눈가는 움푹했습니다. 입매나 눈이 신경질적으로 얇고 음울한 느낌을 줬는데 그래서 호감을 사는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누구와도 깊이 친해지지 못했어요. 그것은 그의 외모 탓도 있겠지만 성격적인 결함도 있었습니다. 일할 때는 최대한 참는 듯했지만 결벽증이 심했고 온갖 강박을 가지고 있어서 예측이 전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해줄 선한 인물들이 그의 곁에는 별로 없었던 거겠지요. 그가 환한 웃음을 짓는 것은 음악을 대할 때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단단하지만 고전적인 틀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프레임이 꽉 잡혀서 코르셋처럼 몸을 조이는 감각을 즐기는 것 같았어요. 한 번은 자기는 속박에서 자유를 찾는다고 제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 의견을 흥미롭게 받아들였지만 공감해주긴 어려웠지요. 안씨는 천재를 동경하고 재능 없는 자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조차 매우 싫어했는데, 음악적으로 수준이 너무 낮다고 항상 우울해했습니다. 또한 천재적인 음악은 자기로서는 작곡할 수 없는 것이라서, 노력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곤 했지요. 저는 솔직히 어느 날 그가 어딘가로 훌쩍 떠나거나 투신을 해도 놀라울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럴 정도로 불안정하고 어느 의미로는 조금 미친 사람 같아서, 품위 있는 클래식에 그의 광기가 어울리는지는 조금 고민을 해봐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어쨌든 안씨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대학 동기였던 저와 그나마 연락을 하고 살았습니다. 저는 그와 음악적인 이론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업물들을 들으러 다니곤 했지요. 그는 음악적인 품위를 잃고 싶지 않았는지 연주회 같은 곳을 갈 때마다 항상 정장을 잘 다려 입었습니다. 그는 없는 형편에도 그 정장만은 아주 아꼈지요. 하지만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상태가 안 좋아졌지요. 어쩌면 정신의 문제 때문에 육체마저 쇠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건강
작성일 2025-04-22 작성자 김희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35상세보기 -
소설 HEART 3
채팅 기록.2016년 7월 8일-나: 들어왔어?-HEART3: 응-나: 자랑할 거 있어-HEART3: 뭔데?-나: 드디어 집이 생겼어!-HEART3: 와, 축하해-나: 그게 다야?-HEART3: 응. 그리고 다음 날짜는 8월 16일 5시야. 게임하자 2016년 8월 16일 -HEART3: 뭐 하고 지내?-나: 아무것도-HEART3: 난 드디어 퇴원이야.-나: 진짜? 이제 좀 괜찮은 거야?-HEART3: 글쎄다. 의사 말로는 악화되면 다시 입원해야 한대.-나: 그렇구나-HEART3: 다음 날짜는 9월 3일. … 2020년 3월 4일 -나: 요즘 좀 게임하기가 어렵네. 잘 지내? 2020년 6월 14일 -HEART3: 아니 … 2021년 1월 9일 나: 잘 지내? 나 취업했어! 2022년 3월 7일 나: 잘 지내? 요즘 아예 안 들어오네. 접은 걸까 오래된 인터넷 게임에는 작은 비밀방이 있었다. 암호를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지인끼리 일대일로 게임하는 데 쓰이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 게임 속, 우리의 암호는 12월 31일이었다. 게임하러 로그인하던 것은 아니다. 짧은 글만 적을 수 있는 채팅창으로 떠들기 위해, 서로 연락처를 모르는 우리가 만나기 위해 그곳에 로그인했다. 상대는 내가 알기로는 여자였고 내가 알기로는 동갑이었다. 또 내가 알기로는 외로운 사람이었고 몸이 아픈 사람이기도 했다.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모른다. 모두 거짓일 수도 있다. 그게 웃겨서, 그녀의 말을 모두 믿기로 했다. 내가 취업을 준비하게 되면서 우리의 만남은 뜸해졌고 어느 날 끊겼다. 뜸해진 원인은 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해진 날짜에 로그인하지 않은 것은 그녀였다. HEART3. 그 계정은 아직도 로그인하지 않는다. 그 이후로 게임 속에는 나만 남았다. 시간은 외로움을 해결해주기에는 부족한 매개였다. 그것이 4년 전의 일. 비밀 방으로 누군가 로그인하기 시작한 것이 얼마 전이다. 2024년 5월 19일 qqa님이 로그인했습니다. -나: 누구세요? HEART3너야? -나: 어떻게 알고 들어오셨죠? -나: 저기요? 아마 심심했던 누군가가 우연히 로그인했을 것이다. 계정도 달랐고 플레이 스타일도 판이하게 달랐다. 대답 없는 그와 나는 게임을 했다. 나는 그가 누군지 대답을 들을 요량으로 시간을 끈 것이었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게임을 하게 된 우리는 대화 없이 화면 속 카드를 들고 주사위를 굴렸다. 상대는 묵묵히 게임을 했고 나도 그랬다. 첫 번째 판이 끝났을 때였다. 나는 메세지가 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2024년 7월 31일 -qqa: 나 기억나? HEART3야. 나는 다급히 답장했다.-나: 진짜로? -qqa: 응. 우리 게임 많이 했었잖아 -나: 뭐야, 지금까지 왜 대답 안했어 -qqa: 미안, 사정이 있었어서… -나: 잘 지냈어? 몇 번째 묻는 건지 모르겠네 -qqa: 응, 많은 일이 있었어. 다 말해주기엔 시간이 없네 -나: 괜찮아. 나중에 천천히 말해줘 -qqa: 게임할까? 어떨떨한 기분으로 나는 게임 시작 버튼
작성일 2025-04-21 작성자 김희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06상세보기 -
소설 기억을 잊게 해드립니다
일어나보니 나는 정장 차림이었다.그리고 여태까지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손목이 이상하리만큼 쓰라리다.하지만 단추를 풀고 손목을 보기엔이 자리가 엄숙해 보였다. 고개를 들고나니 왠 중절모를 쓴 남자가 있다.아마 면접관일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접을 보다 잠들더니 이젠 기억상실이라니!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나는 저 앞의 면접관에게 지금 내가 무슨 상황이었냐고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지금 기억을 잃어버렸다고말하기로 결심했다. “저.. 지금 제가 무슨 상황인지제가 기억을 못하겠어요. 여긴 어디죠?” “항상 익숙한 반응입니다.”그 면접관은 항상 같은 반응을 대하듯편하게 말했다. “뭐요?”나는 내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살짝 발끈하였다. “이 회사는 당신 같이 기억상실을 겪은 사람만을 뽑는 회사입니다.” “즉 당신은 기억을 잃고 이 회사에 온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 이 회사는 기억을 잃은 사람들만 오는 회사라는 겁니까?그런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게요?”나는 단순 궁금증이 든 것이었다. 도대체 기억을 잃은 사람들을 굳이 찾아서어디에 필요로 하고 무슨 일을 시키는지 말이다. “새로운 기회를 주는 곳이죠” “뭔? 기회요? 당신이 나 같이 기억을 잃은 적이 있기나 해?” “워, 화내지 마시고”면접관은 발끈해서 일어나는 나를 앉히고 말했다.“저도 기억을 잃었었습니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저처럼 일을 하시다 보면운 좋게 기억을 되찾으실 수도 있죠” “그게 기회인 건가?당신이 말하는 그 일을 하다가 어쩌다 기억을 되찾는 게?”나는 솔직히 믿기질 않았다.이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기억을 되찾는다니?그리고 그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저도 당신과 똑같은 반응이었죠. 처음에는 말입니다.하지만 일은 당신이 기억을 잃기 전그러니까 높은 확률로 사라져버린 기억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아마 당신의 주변인들도 마주치겠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그리고 회사는기억을 잃기 전 내가 무슨 짓을 한 줄 알고연관을 시키고 일을 하게 만들어?” “그렇다면 제가 잃어버렸던 기억들을증거로 말해야겠군요”면접관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제가 기억을 잃기 전딱 하루 전의 일들을 말하도록 하죠.” 저는 정신병을 앓았습니다.우울증 말이죠무슨 일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건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당신도 숨기고 싶은 건 있을 테니까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억을 잃었는데 숨기고 싶은 게 있을까?난 내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나는 그가 무슨 일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는지 궁금했고말해주지 않겠다 해서 일부러 꼬투리를 잡았다. “아, 이건 사과하도록 하죠” “죄송합니다.” “으흠!!”그는 목을 풀었다.마치 눈치라도 주는 듯이 “다시 저의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죠.” 여느 때와 같이 저는 상담과 약을 받기 위해상담센터로 갔습니다. 저는 진찰을 기다리기 위해의자에 앉았죠. 그곳에는 고독해 보이는 흰 발의 노인과아직 중학교도 안가 보이는 초등학생과 말이죠저와 그들은 다 같은 자세였습니다.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만을 바라보았죠. 그들은 자신들의 진료시간이
작성일 2025-04-20 작성자 숲든시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87상세보기 -
소설 추모 프로필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그런 이야기가 학교에 퍼진 것은 일주일 전부터였다. 내가 프로필을 발견한 게 그 날이었다. "진짜?" "응. 죽었다는데." "확실한 거야?" "걔 카톡 프로필 봐봐. 추모 프로필로 바뀌었어." 그 말에 내게 시선이 쏠렸다. "무슨 얘기야?" "누가 죽었다고?" "왜 아무도 모르냐. 이경민이라고 있잖아." 몇 명 친구들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폰을 켜서 추모 프로필을 보여주었다. "근데 그게 누군데." "우리 반 24번. 그 아픈 애." 공교롭게도 그날 담임은 그 아이의 죽음을 알렸다.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이라고 했다. 즉 자살이었다. 나는 거의 항상 비어있던 구석의 책상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담임의 말이 끝난 시점부터 반 전체가 웅성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애였지만 어쨌든 같은 반 애가 죽은 건 놀랄 일이었다. "왜 죽은 거임?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그럼 우리 장례식 가?" "걔랑 친한 애 아무도 없어?" "아니 그래서 왜 자살했냐고." "알빠노." 알빠노라는 그 유행어에 의해 웅성거림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 반 애가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이경민이라는 고등학생이 자살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구석에 있는 책상에 다가가 보았다. 다시 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24번 사물함을 열어 봐도,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별로 슬픈 일은 아니었다. 이름만 알아서는 감흥이 안 느껴졌으니까. 학교가 끝날 때까지 반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그것은 반 아이들이 보인 최소한의 애도일지도 몰랐다. 다음 날 나는 담임에게 불려갔다. 내가 반장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담임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표정이 어두웠다. "너도 잘 모르지? 경민이." "예." "반 분위기는 어떠니." "밝지는 않은데 딱 그 정도인 것 같아요." "...그래, 그럴 것 같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담임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가정사가 복잡한 것 같더라. 내가 해줄 얘기는 아닌 것 같고, 혹시 장례식 갈 생각 있니? 넌 그래도 반장이잖아." 담임은 몇 가지를 더 물어보고 나를 돌려보냈다. 그 질문들에 나는 모르겠다는 답변밖에 하지 못했다. 반에 돌아갔을 때 그 아이의 자리에는 하얀 꽃이 몇 개 올려져 있었다. 한 개는 내가 올린 것이었고 나머지는 감수성 섬세한 몇몇 아이들이 올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는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은 걸까. 문득 이경민의 프로필 아래에 써 있던 아이디가 생각났다. 아마 소셜 미디어 아이디였을 것이다. 누군가라도 보고 연락해주기를 바랐을. "Widnwozn@77...." 몇 번 실패한 끝에 찾아냈다. 하필 그 계정이 발견된 곳은 소위 음지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올라왔던 글들을 하나씩 읽었다. 몇 달 전의 것부터, 이경민은 멀쩡한 것 같았다. 물론 그 내용은 여자 게임 캐릭터에게 성희롱을 하거나 극단적인 사상을 드러내는 것들이었지만
작성일 2025-04-20 작성자 김희수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279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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