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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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ADHD
동의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으려한다. 우리는 위선자다. 너무나도 위선적이어서, 이제는 그 위선이 소시민적이라는 개소리마저 지껄이며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게다가 거기에 여러가지, 오래되거나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다 붙여다가 가끔씩 글이나 영화로 만들어 판다. 아마도 여러가지 흔히 알고있는 변명거리들이 생각나긴 할거라 짐작한다. 분명 밥을 남기면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 혼을 냄에도 사회환원에 대해선 일단 자기 일을 끝낸 뒤에 남의 일을 생각한다면서 여러 사회단체들에 십일조정도의, 혹은 대체로 훨씬 적은 돈을 내고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어른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도 사실을 굉장히 교과서적이며 동시에 희귀한 중산층의 모범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정도의 위안조차도 구매하지 못하고 아마 우리도 그러지는 못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 사회적 모범의 틀을 제외하고서는 그닥 제대로된 변명은 개발되지는 않은 듯하다. 끽해봐야 빈곤포르노나 사회적 박탈감 정도일려나. 위선!위선!위선!! 굳이 필요없는 곳에 느낌표를 이렇게나 무의미하게 적어 놓아서 미안하다. 오랫동안 묵어왔던 말이라 어떻게든 크게 소리질러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적어내어 보았다. 크게 생각을 하진 않지만 독자중에 이처럼 괴팍한 난제에 맞닥뜨린 이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항상 이런 생각이 너무나 이단적이며 불문율로서 언급해선 안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룻밤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떼로 죽어가며, 굳이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여러가지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위선자라는 이름을 새삼스럽게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을 울린 악역에게 쓴다는게 필자로서는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충격을 주었다. 이쯤 되었을 때 필자는 그대가 그 변명이라 지칭된 해명을 생각하거나 찾아왔기를 바란다. 오, 우리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화사, 혹은 국가를 운영하고 그들에게 원조를 주며 우리의 국제기구는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굉장한 도움을 주고 있다. 수없이 많은 국제기구들(대부분은 당신같이 질문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치료하고 생계를 찾아주고 있으며 그들 또한 종국에는 잘 살게 될 터인데 왜 걱정인가? 우리가 그들처럼 못 사는 거지가 되어서 이 비참한 위선자의 신분을 벗어나길 바라는 건가? 당신이 가서 그들을 구하지 왜 여기 앉아서 이딴 쓸데없는 글이나 쓰고 있는 건가? 또다른 훌륭한 해명이 당연히 가능하겠지만 지금으로선 이정도도 충분히 적당할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기부와 참여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무익하다는 이야기도 나올 것 같다. 그다지 상관없다. 어차피 위선을 고치는 것에는 아직까지는 관심이 없다. 아니, 아직 생각을 하기 싫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혹자는 생각하지 않음의 위험성을 알고 곧바로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요즘 필자가 자주 복용하는 진통제겸 마약이다. 저 해명이 옳은가? 꽤나 자유시장주의적인데다 국제주의적이다. 이
작성일 2025-05-01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19상세보기 -
수필 저출산 정말 위기일까?
얼마 전 해외 영상 중 대한민국의 저출산에 관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그 내용에서는 한국이 몇세대 안에 가파른 인구 감소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국방, 경제, 문화 등에서 위기를 겪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이러한 상황은 나에게 매우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경제와 정치 외교 등을 공부하며 한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어졌다.대한민국의 저출산은 위기가 아닌 기회로써 구조적 변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이다.최근 OpenAI, 구글 등에서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생성형 AI를 공개했고, 지금까지 15만개밖에 알아내지 못한 단백질 종류도, AI를 이용해 비교적 짧은 기간 만에 2억개 가까이 찾아내는 등 기술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또 현대자동차 그룹의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봇은 아직은 미숙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구현해내며 학습과 복습을 통한 기술의 진보적 발전과 대량 생산을 통해 무인화, 자동화가 곧 일어난다는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맞춰 국가적으로 무인화, 자동화 능력을 완전히 갖추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기업의 시장 활동(정부의 시장 개입 최소화), 높은 인건비, 규모의 경제 실현 가능, 정부 주도적 지원과 관심 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 해당하는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미국, 일본, 싱가포르 그리고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하다. 비슷하게 높은 인건비를 가진 여러 유럽 국가들은 유럽 연합(EU) 가입(혹은 창설) 이후 정부의 지나친 규제와 시장 개입으로 기업의 활동과 투자를 위축시켰으며, 복지 예산으로 인해 신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어려워졌고, 국방은 미국에게 경제는 중국에게 지나치게 의존된 상황을 보이고 있다. 또 정부 주도적 지원이 가능한 중국은 최근 2020년대 들어 과잉생산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발생, 그리고 이런 문제의 영향으로 실업률 증가와 소득 감소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런 변화는 무인화, 자동화를 하는 것보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이득이기에 무인화, 자동화로써의 변화에 큰 걸림돌로 다가와 한계를 보였다.그렇기에 대한민국은 이러한 변화에 있어 저출산이 오히려 부양인구 감소와 인건비 증가로 무인화, 자동화를 가속화 시킬 것으로 정부의 복지 예산은 장기적으로 줄어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무인화, 자동화로 기업들의 시장(생산) 활동이 늘어나면 정부는 그 수익의 일부를 국민에게 선별적으로 기본소득으로 지원함으로써 사회 구조적으로 안정된 형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어떨 땐 위기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다르게 보면 기회일 수도 있다.
작성일 2025-04-29 작성자 리지소어 좋아요 1 댓글수 3 조회수 264상세보기 -
수필 '한국판 NASA' 우주항공청의 1년을 조명하며
"한국판 NASA를 만들겠다!" 담대한 포부를 가지고 설립된 우주항공청도 내달 27일이면 첫 생일을 맞이한다. 이번 글에서는 어느덧 뉴스의 외우주 바깥으로 밀려나 관심에서 잊혀진 우주항공청을 다시 조명한다. 우주항공청은 설립 이전부터 많은 논란 속에 잠겨 있었다. 이미 우주 개발을 총괄하고 있던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KARI)와의 관계 설정, 대전광역시와 사천시의 청사 입지 논쟁, 우주항공청 설립 필요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까지, 그럼에도 우주항공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은 2024년 1월 9일 국회를 통과했고, 같은 해 5월 27일 우주항공청은 경상남도 사천시에 위치한 아론비행선박산업(주) 사옥에 임시 둥지를 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주항공청은 외로운 외우주 속에서 어떤 1년을 보냈을까? 우주항공청의 2025년 예산은 9649억 원으로 확정되었다. 2년 전 항우연의 예산 총액이 6585억 원이었으니 우주항공청 설립을 통한 우주 개발에 대한 관심 확대가 예산 증액으로 이어진 점은 긍정적이다. 우주항공청이 편성한 예산안 전액이 변경 없이 확정되었다는 점도 특기할만한 부분임에는 틀림 없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와 아르테미스 계획에 대한 연구 협약 체결 역시 개인적으로 높게 산다. 아르테미스 협정의 경우 2021년 5월 24일 항우연이 세계 10번째로 맺은 바가 있으나 실질적 협력은 요원했다는 부분에서 연구 협약 체결은 실질적 협력의 출발점이자 명백한 우주 개발 후발주자로서 충분한 경험을 쌓을 기회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항공청 본청사가 사천시에 2030년 입주하는 것으로 확정되어 앞으로 5년 가량은 임시 둥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본청사 입지가 확정되었음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대전광역시와 사천시 간의 갈등으로 본청사 입주가 더 미뤄질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우주항공의 날 기념식을 과천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은 우주항공청 입지 갈등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다. 또, 예산 증액은 긍정적이나 그 예산이 충분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미국 항공우주국의 예산 36조 6000억 원(254억 달러)와 유럽 우주국의 12조 6000억 원(77억 유로), 러시아 로스코스모스의 4조 9000억 원(2791억 루블)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도 우주연구기구의 2조 4000억 원,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의 2조 2000억 원과 비교해도 1조 원이 되지 않는 우주항공청의 예산은 5대 우주 강국 진입이 목표라는 공허한 희망과 함께 초라함만 더한다. 지난 11월, 정부는 우주항공청 설립일인 5월 27일을 우주항공의 날로 지정했다. 부(部)도 아닌 일개 청(廳) 기관의 설립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해 공식적으로 기념하겠다고 밝힌 것은 분명 고무적이라고 보지만, 이제는 형식적 외면 확장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우주 개발에 대한 국가적 공감대 형성·통합을 통한 내면 다지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우리 우주 개발의 영원한 롤모델 'NASA'가 '미국판 KASA'
작성일 2025-04-27 작성자 이해 좋아요 3 댓글수 1 조회수 213상세보기 -
수필 푸른에 대한 고찰
여러분은 푸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으십니까? 저는 푸른이라는 말을 들으면 푸른 들판, 푸른 하늘, 푸른 지구 등, 초록과 파란의 조화 一 생명력과 생동감이 한데 모여있는 一 자연과 맑음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우리 지구를 관용적으로 푸른 별이라고 칭하기도 하고요. 한문으로는 靑(푸를 청)과 綠(푸를 록), 蒼(푸를 창)이 조화되기도 하니, 세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해도 초록과 파란에 그치지 않고 각종 의미를 함께 내포하는 어휘는 흔치 않은 것으로 압니다. 이 즈음 해서, 시선을 옮겨, 바깥을 바라봐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시선은, 푸른인가요? 언제부터인가 푸른은 우리 기억과 창작물 一 내지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에서나 볼 수 있는 색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강은 여전히 푸른색이고, 하늘은 여전히 푸른색이고, 가로수는 여전히 푸른색이고, 푸른 공원은 여전히 우리의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지만 一 그것은 진정한 푸른이 아닙니다. 물을 제 숙소 삼던 산천어를, 창공을 제 도로 삼던 기러기를, 나무를 제 창고 삼던 다람쥐를 보신 기억은 얼마나 오래되셨습니까? 공원을 마음껏 뛰어노는 온갖 동식물의 향연을 보신 기억은 어떻습니까? 푸른이라는 색채에는 색채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력과 생동감, 자연과 맑음의 의미가 그러합니다. 이러한 의미는 우리 인간이 인위적으로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一 오히려 푸른과 그 푸른 속에서 살아오던 모든 생물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푸른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푸른은 아름다운 초록과 파란의 색채에 대한 단순한 표현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푸른을 지구로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초록과 파란의 一 생명력과 생동감이 모인 一 자연과 맑음의 별 一 푸른 별 지구를 진정한 푸른으로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blue도, green도 아닌 earth color로 세계인이 모두 함께 푸른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푸른의 다른 이명, 지구색으로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9월 7일은 푸른 하늘의 날이라고 합니다. 꾸준히 미세먼지로 인한 피해를 보고 있는 우리나라의 주도로 제안되어 채택된 UN(국제연합) 공식 기념일이죠. 푸른 一 우리의 진정한 푸른이 자그마한 회색 글자로 남아 잊히는 이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일 2025-04-23 작성자 이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97상세보기 -
수필 수렴하지 못한 궤도
어쩌면 알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의 정적 속에서 나의 의식이 저절로 깨어나고, 다시 어둠으로 가라앉기까지 얼마나 긴 여정을 지나야 했는지를. 그건 중력을 잃은 감정이 서서히 암흑물질 속으로 스며드는 현상과도 같았다. 방향도, 무게도 없이 사라지는 어떤 흐름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해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등을 감싼 움츠림 위에는 현실의 기압이 내려앉아 있었을지, 아니면 말없이 쌓인 기억들의 무게였을지. 그날 흘러나온 한숨은 초신성 폭발 직전의 별처럼 모든 것을 감춘 채 고요히 진동하고 있었다. 작고도 선명한 그 진동은 태양계의 궤도를 이탈하는 보이저호의 마지막 신호처럼 천천히 멀어지는 기척이었다. 그 뒤로는, 작별만이 머물고 있었다. 서로의 궤도는 시간의 끝까지 이어질 수 있으리라 믿었었다. 만유인력을 거스르는 듯한 믿음 아래 함께 걸었다. 그날, 무중력의 공간 한편에서 희고 작은 꽃 하나가 조용히 피어났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조용히. 어느 순간, 특정한 진동이 이름을 불렀고 내부에 고요히 정지해 있던 공간은 흔들렸다. 성운의 빛이 수줍게 퍼지듯, 그 떨림은존재를 알려오는 한 점의 파동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서로를 둘러싼 중심값들은 서서히 달라졌다. 각자의 궤도로 밀려나는 행성들처럼 조용히 멀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 우리가 정의했던 ‘연결’이라는 감정은 지워지는 빛을 보며 아직 남아 있다고 믿는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별은, 변해버린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멈춰 선 좌표에 다시는 도달할 수 없게 된 항로 때문이었다. 닿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었던 거리였다. 끝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제야 감정은 초신성처럼 터지듯 피어나는 걸까. 그날 밤, 하루살이의 생처럼 짧은 궤도 속에서 사라질 듯했던 존재를 무언가가 가만히 껴안아 주었다.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우주의 어딘가,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점에 서로의흔적이 남은 별 하나쯤은 아직 떠 있을지도 모른다.
작성일 2025-04-20 작성자 수정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86상세보기 -
수필 연주와 창작
유년기에 피아노 연주를 배우는 건 흔한 일이다. 나는 동네에서 피아노를 제일 잘 치는 아이였고 적절한 시기에 전공을 권유받았다. 물론 잠깐 전공을 하다가 결과적으로는 음악과 거리가 먼 분야를 공부하게 되었지만, 피아노를 제법 잘 치고 또 좋아했다는 이야기이다.나는 내가 훌륭한 연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연주보다는 교육으로 진로를 생각했다. 음악 교육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클래식 악곡을 연주하는 일은 기술인가, 예술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치열한 고뇌와 노력이 동반된 기술은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다른 질문이 생겼다. 클래식 악곡을 연주하는 것은 답습인가, 창작인가?모 피아니스트의 인터뷰를 보고 의문이 조금 해소되기는 했다. 그는 연주의 목표가 작곡가를 대신해 음악으로써 그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클래식 음악은 생각 외로 해석과 개성이 존중되는 분야이다. 다만 이미 존재하는 곡에 개개인의 해석을 더하는 것을 창작이라고 부를 수 있나?누군가의 작품을 잠시 빌려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말하는 것이 창작이라면, 그 '각자의 방식'에 연주자 자신을 얼마나 담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현대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의 목표는 과거의 음악을 재현하려는 것만이 아니다. 사실 연주가 창작인지 그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답습에 불과할지라도 단순히 과거를 반복하거나, 음악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성일 2025-04-19 작성자 joomen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76상세보기 -
수필 제목을 정하는 센스는 아직 없습니다
막연히 글이 너무 좋다.뻔한 표현들이 '적혔다'는 이유로 더 뻔해지지 않는 것이, 혹은 더 뻔뻔해지는 것이 너무 사랑스러웠다.보고 싶다는 말은 글 속에서 더 보고 싶다고 들렸고, 아름답다는 말도 글 속에서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원래 아름다움은 글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책을 읽고, 책을 더 읽고, 또 읽고, 그다음은 당연하게 글을 사랑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사랑하고 싶은 나에게 당연한 다음 수순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무작정 글을 잘 쓰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세상에는 재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 재능. 누군가는 천국으로 보내주지만 동시에 나를 가혹한 현실의 세계로 꾸역꾸역 집어넣는 너.글을 사랑하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7살, 책을 읽게 되었고, 18살, 글을 쓰기 시작했다-짧은 구절과 일기 등-. 19살,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나는 또 그릇된 욕망을 품는다. 늦지 않았나, 그런 생각은 없다. (사실 있다)내 그릇에는 얼마큼의 활자가 담길 수 있을까 가늠하며 나에게 재능은 없지만 사랑이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랑이 욕망과 닿아있다는 이유로 오늘도 내 머리털을 뽑아가며 글을 쓴다.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형태로 드러나자 사랑과 욕망은 점점 붙기 시작했다. 딱지가 떨어진 상처에 살이 자연스럽게 붙어오듯이. 나의 욕망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질투라고, 제발 내 안에서 나가주면 안 되겠냐고.멋진 작가들을 보며 질투한다. 터무니없지만 나는 이 정도로 열등감 속 덩어리이다. 나만 그런 걸까, 아름답다는 말은 이제 유치해 보이고, 나는 좀 더 멋진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선악과를 따먹는 이브처럼 남의 것을 탐낸다. 이브와 나의 다른 점은, 난 결국 그 열매를 먹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먹을 수 있다 해도 난 먹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글을 잘 쓰지도 못하면서 무슨 작가가 되겠냐고 이런 말은 오직 나에게 나만이 했다. 다른 사람들의 지적은 듣고 싶지 않고, 그저 잘하고만 싶고, 남들의 모든 것은 하루하루 부러워지기만 한다. 내 모습이 너무 추해서 나조차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을 때, 나는 또 활자 속으로 숨는다. 가끔 책은 숲 같아서 이응과 이응 사이에 숨으면 들킬 것 같고 나는 최대한 복잡한 단어에 숨는다.난 욕심이 너무 많아, 성공한 작가가 되어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고, 누구에게도 얕보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글을 계속 쓰고 싶다.이 마음이면 적어도 다음 달까지는 글을 쓸 수 있겠죠? 매주 주말마다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주중에 다시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나는 이곳으로 또 도피를 왔습니다. 모두가 나보다 좋은 글을 쓰고 그래서 가끔은 나보다 못한 글을 쓰기를 바라는 마음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징그럽습니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어떤 괴물의 소행일까요? 한 가지 바랄 수 있다면 그 괴물의 이름이 문학이길 바랍니다.
작성일 2025-04-17 작성자 하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97상세보기 -
수필 이 나라가 원망스럽습니다
우리나라 정치는 보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다가 이 사회가 원망스럽고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한심합니다. 누구도 자신이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국민은 자신을 볼 돌 줄 모르는 듯합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권만 우선시하고 국민들은 태어난 지역에 따라 자신들의 지지 정당과 정치 성향이 정해지는 듯합니다. 무엇하나 자아도 자신도 생각도 포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너무 순종적이라 무섭습니다. 타인을 비판하지만, 그저 강 넘어 말이고 자기 집에 불이 났지만, 자리만 옮길 뿐입니다. 불이 멎고 그 자리에 돌아온들 남은 건 온기가 아닌 차갑게 식은 재뿐일 거 같습니다.
작성일 2025-04-15 작성자 리지소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34상세보기 -
수필 전진하는 졸업식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다.물론이지만 뇌리에 깊게 새겨진 적이 없는 단어.‘졸업’이란 그러했다.여느 때와 같은 그 시간대에, 여상한 얼굴로.샛노란 튤립 여섯송이, 카랑코에 한송이와 함께 찾아왔다.“드높은 기상으로-”졸업식이 진행되고, 화면에 떠오른 교가의 구절을 낮게 읊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3학년생들이 모두 모여있는 강당에서 나 홀로 무심히 교가를 제창하고 있었다.누구도 노래를 따라부르지 않았다.모두 무언가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이었다.나는 그를 지각함에 노래를 따라부르길 멈췄다.좋지않은 음질에 기계음이 섞인채 재생되는 노래가 끝날때까지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두 손을 앞사람의 의자에 둔채 그저 화면에 띄워진, 어느 진부한 교가의 구절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조금의 파문도 없이 가만히 있길 수십초.그동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만, 그때의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는 일률적인 주제가 떠올라있었음에 틀림없다.졸업.내게는 졸업을 선언하는 교장선생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찬 캐치프라이즈를 창달하는 학생회장의 말에는 물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떠나가기 전에 정 떼라고 불러왔나 싶은 이웃 성당의 목사님.(앞으로 학교기금에 보탬을 해준다고 약조했다고 한다. 물론 이제 졸업할 우리가 알 바는 아니다.)그의 장광설에는 별 동조를 하지 못했다,졸업이 도대체 뭐길래.등굣길에 늘상 마주쳐온 아침바람이 사무치리만치 시리게만 느껴진다.그들과의 추억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휩싸인다.그 미시감에 머리가 아파온다.“야, 너 고등학교 어디 썼어?”모두가 앞만을 보고 달린다.난 아직 여기에 있는데.내 마음은 칙칙한 운동장에, 검붉은 벽돌에, 문드러진 노후 시설에 남아있는데.그 좁디좁은 축구 골대에 욱여 들어가있는데.아직 이곳에 있는데.모두가 저만치 떠나버린 출발선에 나 홀로 남아있기란 괴로운 일이었다.1년이고 2년이고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릴 나이였던 그 소년들은 어느덧 어른의 경계선, 그 오른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모두와 같은 곳을 바라봐야만 하는 시기가 왔다.그 사실을 깨달음에 문득.시작선에서 이제는 발을 떼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달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뒤를 돌아보면 찬란한 추억들이 가득할테니까.내 등 뒤의 빛을 내는 그것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은하수를 수놓은 별들을 여름 하늘, 궁수자리가 가장 빛날때, 그때 바라봤으면 좋겠다.그때는…은하수의 광휘에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돌이켜 본 나의 회상이 찬란하기를 소망한다.
작성일 2025-04-12 작성자 안지호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99상세보기 -
수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난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이들과 함께 살아갈지 결정할 모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각자가 너무나도 다르고 유일하기에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가족의 형태가 모두에게 최선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상가족은 성역할에 따른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가족 구성을 정상으로 여기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비롯된 개념이다.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부터 뭐라 콕집어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다. 정상?우리 사회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결혼의 형태인 이성 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부부와 혈연으로 맺어진 그들의 자식, 이들만을 가족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정형화 된 한 형태의 가족만을 정상이라고 칭하는 게 너무나도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이성애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개념이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이, 그것도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도록 압박 받는 것이 이상해서 견딜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상가족이라는 개념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 반대인 ‘비정상 가족’의 존재를 상정한다. 위에서 말한 정상가족의 정의에 부합하는 형태가 아닌 모든 가족들을 비정상의 범주로 밀어넣고. 사회가 제시한 가족의 형성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해버린다니, 사회적 규범에 맞는 가정을 갖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찍어누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다 제쳐두고, 애초에 가족이라는 것에 '정상'이 필요한 개념이기는 한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가족이라는 건 도대체 언제부터 정상성이 적용될 수는 있는 개념이었는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가 좀 굵어지고부터 내게 있어 가족이라는 개념은 꼭 함께 사는 사람의 성별이나 자식의 여부 같은 것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서로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고 지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그들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닐까? 그게 혼인이라는 제도에 묶여 있어야 하는 관계인지, 굳이 상대방이 이성이어야 하는 건지, 반드시 로맨틱한 관계가 동반되어야 하는 건지... 내가 상상하는 바가 언어의 틀 안에 다 넣어지는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설명해보자면 저런 것이었다. 저게 가족이었고 저게 사랑이었으며 저게 내가 그리던 미래였다.몇 년 전부터 내가 추구하는 삶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청소년이니 당연한 거긴 하지만, 주기적으로, 또는 언제나 하고 있는 몇 가지 생각들 중 일부인데, 추상적인 주제이긴 했지만 영 결론이 나기 쉽지 않은 생각이다보니 의도치 않게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장기화 되는 사유 끝에 난 내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성에 부합하는 가족을 꾸리고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결론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 사실을 뭔가 엄청난 것처럼 포장하고 싶은 마음에 말이라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하고 싶지만, 내게 사회적 정상성에 들어가기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내가 언제나 사회적 다수에 들지 않을 수
작성일 2025-03-26 작성자 환상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402상세보기 -
수필 자화상: 풍화가 당신을 떠난 세계의 하루
"내가 너를 버렸다고 기억할 때,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너를 버렸던 것 조차 아니라고 네가 슬프게 말할 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라고 네가 생각할 때, 도대체 누가 지금 네 곁에 남아있는가?" -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1962)여름의 더위가 아물지 않은 작년 초가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베르나르 뷔페 회고전을 다녀왔다. 한때는 미술학도였으나 이제는 붓을 꺾고 꽤 긴 시간 영화와 일탈을 벌여온 사람으로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고는 하는데, 특히 그것이 학교에서 얼핏 들어본 이름이라거나, 관념적인 이론 내부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중에서도 베르나르 뷔페는, 근현대 국외작가를 향한 화단의 협소한 연구와 담론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던 작가였다. 뷔페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이번 전시회 시기를 내외로 갑작스레 여러 지면에 발표되었다는 것과, 같은 시기 열린 뭉크 전시회의 방문객에 비해 뷔페 전시회의 객들이 눈에 띄게 적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일 것이다. 더군다나 베르나르 뷔페 회고전 현판에는 대놓고 ‘피카소가 질투한’ 화가라거나 현대미술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작가라는 둥, 다소 보편적이고 신화적인 문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려운 수식어들이었다. 그 수식들의 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뷔페의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지닌 채, 어느 위치에 놓여있는지 말해보아야 할 것이다. 뷔페의 풍화요컨대 뷔페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작가의 심상을 가장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때로는 날카롭고, 어쩔때는 정갈하며, 움푹 파여있는 감각적인 선들은 캔버스에 선을 긋고 있던 뷔페의 심상을 가늠케한다. 보다 명료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나열해서 비교해보는 편이 더욱 효과적일 듯 하다.(1) 청년기 1948년 (당시 뷔페 나이 20세) (왼쪽부터) , , (2) 중년기 1970년대 (당시 뷔페 나이 40세 중반) (왼쪽부터) , , (1)은 청소년 시절에서 청년 시절까지 그린 그림들이고, (2)의 경우는 그의 작품이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중장년기의 작품들이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여의고 뷔페 혼자 살아가야 했던 불행했던 유년시절 그린 그림들, 가령 (1) 의 작품들은 난잡한 선들이 캔버스를 뒤덮고 있고, 무미건조한 색감과 왜곡된 정물들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곳에 그어진 거친 선들은 마치 당시 고독과 연민에 빠져있던 뷔페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 그가 사회적으로 유명 화가로 떠올랐을 시기의 작품들 (2)은 대부분 초기에 비해 비교적 단조롭게 정리된 선들과 정물화같은 일반적인 색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작품들에 그어진 선들은 부동할 것처럼 단단하고 두꺼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도록 한다. 그것은 초기에 비해 외려 산뜻하고 정갈한 감각을 불러일으켜서 이 시
작성일 2025-03-25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28상세보기 -
수필 일기의 조각
-진짜 그냥 일기에요 제 다른 글처럼 재미없습니다 ;) 요거트를 다 먹었을 때 내 배는 요상한 죄책감으로 차 있었다. 억울했다, 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왜 나는 내게 어떤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굴까. 나는 오글거리는 로맨스 영화의 여주인공도 노래 가사에서 나오는 ‘너’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내 인생이, 이 일어나는 일들이, 아무것도 그렇지가 않은데 왜 아플까? 가슴이. 나는 서둘러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귀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나의 목소리를 가려 주었다. 울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이 찜찜한 감정을 나의 울부짖음에 담아 저 하숫구멍으로 흘려보내고 싶었다. 눈이 무거워지고 코 끝이 찡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울 수가 없었다. 알고있었다. 울지 못한다. 꽤 됐다. 언젠가 부터, 이 감정을 느꼈을 때 부터, 울기가 힘들었다. 나 혼자 맘 편히 울 수 있는 상황이여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 때 깨달았다. 우는 것은 일종의 표현이었다. 응어리를 풀어내는 순간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눈물이 잘 났다. 제일 울기 싫은 순간에, 제일 보여주고 싶지 않은 속내를 벌려 보여주듯이 눈물이 났다. 나를 위해선 울지 못하는 사람으로 커버렸다. 더 우울한 것은, 앞으로 나에게 내 그 속내를 보여줄 사람이 없을 거란 것이다. 이제 흐르지 못한 눈물은 내 폐 안에 맺혀가고 숨을 쉬기가 어렵다. 내 몸이 모두 이 짭짤한 물로 가득 차 버린다. - 오늘은 이상한 꿈들의 연속이었다. 거울을 본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거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마음이 고요했다. 그렇다고 느낀 순간 아파왔다. 구멍이 뚫려 내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정말로 누구도 아무도 무엇도 나에게 무언가 하지 않았다. 근데 왜? 왜? 왜? 왜? 왜? 하지만 행복해 지고픈 마음은 없다. 그렇게 되면 나를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언젠가부터 나의 감정들을 나의 정체성과 동일시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분명 그냥 서 있었는데. 별 생각없이. 근데 막 눈물이,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슬퍼서 눈물이 난 것 보단 눈물이 나서 슬펐다. 이유없이 목적이 있는 듯 울었다. 울었다 하기도 뭣했다. 이일은 전혀 나와 상의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얘 혼자서 한 거다. 엉엉 울지도 않았다. 그저 내 눈 밖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말리지도 않았을 뿐이다. 눈물로 채워지는 내 얼굴은 그 무게와 달리 매우 가볍게, 그 보다 더, 가벼워 비틀어진다. 비워진다. 눈물은 비운다. 감정과, 무게와. 그리고 올린다. 우울과, 다시 수위를.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소리치는 이들의 모습은 보는 건 익숙하면서도 익숙치 않다. 갈비뼈 안쪽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벽에 붙어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자면 정말이지 내가 덩굴이 되어 그 위를 타고 오르는 것 같다. 눈을 감아 세상이 물로 변해버릴 때 까지. 통제가 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불안이 끊길 때 그 누구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기를 희망한다.
작성일 2025-03-25 작성자 아이졸려라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33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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