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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우리는 만난다」

  • 작성일 2018-06-21
  • 조회수 5,020


[caption id="attachment_273042" align="alignnone" width="640" class="cente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작품 출처 : 하재연 시집,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 지성사, 2006.




하재연 |「우리는 만난다」를 배달하며…



시 속의 너와 내가 만나는 장소를 생각해봅니다. 야구장인가 봐요. 흰 공처럼 나는 당신의 팔을 부수고 라이트를 깨뜨리며 경기장 밖으로 날아갑니다. 나를 멀리 쳐내고 당신은 비 내리는 야구장을 힘껏 뛰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슬픔의 홈런을 칩니다.
어린 시절에 ‘만남’이란 마냥 좋기만 한 단어였던 것 같아요. 앞마당에 내린 첫눈, 처음 뺨에 닿은 꽃잎, 처음 만난 바다, 처음 사귄 친구, 모두 놀랍고 아름다운 만남이었지요. 당신과의 만남도 시작은 분명 그랬을 텐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투우장에 나부끼는 붉은 천과 흥분한 황소처럼 만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오늘은 당신에게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모처럼 야구장과 투우장을 떠나, 바람이 살살 불어오는 데서 만나는 거 어때?’라고요.


시인 진은영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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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5건

  • 브러쉬

    오래도록 이 시를 응시한다. 너를 바라보듯이. 너는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유일한 존재다. 우리의 만남은 내가 너를 본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만남은 쨍하고 깨지는 야구장의 라이트처럼 강렬해서, 반드시 어떤 감정을 촉발시키고야 만다. 나는 눈이 멀어버렸다. 그 눈으로 다시 너를 본다. 너는 거짓말 같고 너는 여전히 운동장에 있다. 너를 바라보는 내 눈앞에, 너를 바라보는 나와 함께. 너는 현상인가? 현상이 너인가? 나는 더 묻지 않겠다. 다만 작은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너를 바라보라고 네가 만들어준 자리에서 나는 이탈하고 말리라. 그래서 행여 내가 놓쳤을 너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봐줄 것이다. 그러다 네가 나를 본다면, 자랑스럽게 너를 보여주려고. 우리는 만난다. 어디선가 비가 내리듯 바깥이 젖는 것 같았다. 거짓말처럼 푸른 잔디가 돋아났고 그 안에 네가 있었다. 그 안에 네가 있었고 주위는 조용했는데 붉은 흙투성이 신발을 하고 너는 뛰고 있었다. 라이트가 쨍, 하고 깨지는 순간. 너의 팔이 부서지고 흰 공이 너의 밖으로 아득하게 날아갔다. 나는 있는 힘껏 고개를 돌렸고 라이트에 눈이 멀었다

    • 2018-07-08 11:10:52
    브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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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상아

    나는 그제서야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도 있지만 지루함과 무료함으로 자꾸만 바깥으로 가던 나의 시선이 "쨍"하는 소리에 깜짝놀라 비로소 당신이 늘 내 안에 있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결국은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의 눈이 멀게 되었지만 나의 마음은 당신을 다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늦었으면 어떡하지, 팔의 상처로 모든 것이 멈춰버리면 어떡하지, 나의 조바심과 불안은 또 다시 내리는 비에 소리없는 위안과 다시 돋는 푸른 잔디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 시가 저에게는 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항상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시간이 쌓여도 여전히 어설픈 나의 방식과 변하지 않는 모난 구석들이 누군가를 어렵고 힘들게 한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어 멀리 달아나 버리고 싶었던 것인데, 그런 나도 괜찮다고 여전히 있어주는 그대들이 떠오르는 시입니다.

    • 2018-07-08 10:22:27
    푸른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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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수록

    너의 팔을 부수고 결국엔 너의 밖으로 아득하게 날아가 버리는 만남이었지만 만남 후 혼자 남겨진 곳에서 거짓말처럼 푸른 잔디가 돋아나고 그 위를 붉은 흙투성이 신발을 하고 뛰는 너의 모습은 생의 고단함을 묵묵히 견디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흔적도 없이 그냥 사그라지는 만남은 없는가보다 생각하게 한다. 만남... 익숙한 만남이든 새로운 만남이든 만남은 일방적일 수는 없는 것 같다. 얼굴을 마주하든 또는 목소리나 글로만 오고가든 만남에는 주고받음이 있고, 그러한 주고받음 속에서 나와 상대는 조금씩 변형되어 간다. 아마도 그것이 만남의 가치이고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일방적인 만남이 갈급할 때가 있다. 오롯이 나만 존재하는 만남. 내가 나와 만나는 만남 말고, 상대는 있으나 그도 나만 보고 나도 나만 생각하는 그런 만남. 지극히 이기적인 만남을 바랄 때가 있다. 그와의 주고받음으로 변형되기보다 나를 쏟아냄으로써 새로워지는 변화를 경험하고 싶은 바람. 실현 가능한 바람일까...?

    • 2018-07-06 18:05:26
    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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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야80

    시인이 말하는 만남은 어떤 만남이었을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시의 만남은 나와 나의 만남인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첫 연을 잘못 읽은 탓도 있으리라. "그 '안'에 '네'가 있었다."가 아닌, "그 '곳'에 '내'가 있었다."로... 낭독으로 듣고 분명 눈으로 따라 읽고 있었음에도 잘못 읽은 것이다. 하지만 잘못 읽은 덕분에(?) 시에서의 만남이 나와 다른 타인과의 만남만이 아닌 나의 한 세계와 또 다른 한 세계의 만남, 혹은 의식과 무의식의 만남, 무지와 깨달음의 만남 등... 나와 나의 만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무언가(고통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갈등이든 꿈이든 이상이든)를 적극적으로 공을 던져 깨고 나와 푸른 잔디를 뛰어가는 모습에 해방감, 자유로움이 느껴졌으며, 붉은 흙투성이 신발 대목에서는 깨어지기 전 그 안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져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게 하는 시 속의 '너'는 헤르만 헤세의 을 연상케 하기도 하였다.

    • 2018-07-06 15:58:52
    희야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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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줄

    어떤 만남이 아름다운 만남일까? 얼마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한 만남의 거리일까? 우리는 만난다고 했는데, 시(詩)에서는 마주하고 있는 만남이 아니라 멀리,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만남인 것 같다. 내가 흰 공이고, 너는 나와 접촉하는 그 찰나의 순간 동안만 나와 마주하고, 이내 날려 보내지만 끝까지 나를 응시하는 너.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짧지만 강렬한 만남에 오히려 푸른 잔디가 축복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만난다’, 혹은 ‘만났다’, 때론 ‘만날 것이다’의 주어를 ‘우리’라는 복수보다 ‘나’라는 단수이 형태로 이야기 할 때가 조금씩 더 늘어나는 것 같다.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존재해야하므로, ‘나’가 아닌 ‘우리’, ‘너’가 아닌 ‘너희들’, 혹은 ‘그들’이 어법상 온전한 것 같지만, 의미로는 단수의 만남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서이다. 상대방과의 동의나 약속 없이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나는 만난다’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팬심과 덕질의 경우, 손바닥으로도 가려질 만큼의 거리에서 본 유명인을 두고 ‘나는 만났다’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나는 만났다’의 경우도 과거의 기억이므로 일방적인 개인의 편집이 작용할 수 있는 경우를 고려한다면, 이 역시 충분히 ‘나는 만났다’라고 쓸 수 있다.(어쩌면 이 기억이 더 합당할 때가 있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도 이렇게 일방적일 수 있는데, 하물며 미래는? 미래야말로 가정법이 성립되니 ‘나는 만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말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미와 함께, 만남이라는 사건에 의해 맞이하게 되는 감정들 -기대나, 설레임, 부질없는 희망, 되풀이되는 원망-을 제거 할 수 있으니,이런 이유들로 나는 만남의 주어를 단수화 시키는 것에 더 큰 만족과 의미를 두고 있었는지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시를 감상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용기가 부족한 사람인지 알게되었다. 만남에 대한 사후적 해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주어를 단수 처리해 버리고 마는 나. 시 속에서 너는, 나를 날려 보내면서 라이트에 눈이 멀게 되는 그 순간까지 나와 너의 만남을 응시하고 고스란히 슬픔의 비를 맞는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만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단단한 존재인가. 나만 기대했던 만남이던, 또 기억하고, 설레이는 만남이던 나도 시 속에 나와 너처럼 ‘우리’의 만남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만남에 있어서 아름다운 거리를 지켜내며 나의 만남 속에 ‘우리’도 다시 찾아야겠다.

    • 2018-07-06 00: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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