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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사랑이 없는 날」

  • 작성일 2018-09-13
  • 조회수 2,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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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사랑이 없는 날」을 배달하며…



사랑이 없는 날은 불화하는 날, 반목하는 날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려면 열렬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소란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 없는 날의 고요는 웬일인가요? 들끓은 마음 없이도 홍매화와 목련은 어울리고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 집으로 가는 길은 정답군요. 무슨 병은 없는지, 별고 없으신지 간간이 소식을 묻고 전하는 마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런 자유의 순간을 예감하는 것 같아요. 물론 ‘겨울을 이겨내는 봄’처럼 대립과 극복의 비유가 우리 삶에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부정이든 긍정이든 세상을 무엇과 무엇의 관계 속에 잡아두려는 마음 너머에서도 무언가 아름답게 존재합니다. 승객을 다 내려주고 홀로 가는 버스와 홀로 눈 쌓인 언덕길과 저 홀로 빛나는 초승달처럼.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곽재구 시집, 『와온 바다』, 창비, 2012.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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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6건

  • 계곡안개

    사랑이 없는 날은 사랑이 있는 날을 전제로 하고, 사랑이 있는 날은 사랑이 없는 날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는 날은 미운 날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고, 매일 사랑이 있는 날만 있어야 한다고 갈망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어릴 적 시골집 뒷마당 장독대 주위로 뱀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창포 잎사귀가 돋아나고 앞마당에서 봄볕에 병아리가 졸고 있는 계절이나, 거울처럼 모든 것이 짱짱 얼어버린 겨울이나 서로 의지한 체 연이어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연이어 숨 쉬고 있다는 것은 봄이 숨 쉬지 않았으면 겨울도 숨 쉬지 못한다는 것이다. 벌교 장터 수수팥떡을 먹는 수수한 사람들과 산 채로 보리새우를 먹는 사람들이나 그들 나름의 식성과 경제력이 있을 뿐, 무슨 상어 이빨로 씹어 먹는 사람들이 아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로 갈라져 반목하는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과수원 밭에 벌래먹은 사과를 몇 개 따와서는 과수원 전체가 썩었다고 총부리를 들이댔던 남과 북 사이에. 피아노 치는 소리가 나는 은서네 학원과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 종점 세탁소 사이에, 붉은 빛을 자랑하며 피어나는 홍매화와 순수와 우아함으로 피어나는 목련꽃 사이에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든지 그렇지 않은 사이든지 우리는 또 무슨 의미를 부여하여 만든 병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꽃이 진 뒤에도 나무를 흔들 수밖에 없는 바람과, 손님이 다 내린 뒤에도 저 홀로 가야만하는 자정의 마을버스와, 눈 쌓인 언덕길 홀로 빛나는 초승달 하나도 꽃과 바람, 손님과 마을버스. 눈 쌓인 언덕길과 초승달이 어우러져 사랑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렇게 의지하여 있으므로 서로 아름답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또 무슨 병은 깊은지.........

    • 2018-09-29 19:02:32
    계곡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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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미아

    처음 이 시를 읽을 때는 시의 제목을 ‘사랑이 없어진 날’, 그러니까 사랑이 사라지고 난 이후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시의 내용에 푹 젖어 들기보다는 ‘너’가 있는 세상과 일순간 ‘너’가 빠져버린 세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는 때의 날카로운 통증을 상상하며 어쩐지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시의 제목이 ‘사랑이 없는 날’임을 깨닫고 다른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평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서 인간의 동기나 욕구에 관심이 큰 내게 인간의 ‘사랑’은 근원적으로 이기심과 맞닿을 수밖에 없는 감정이고, 사랑의 스펙트럼은 그걸 얼마나 인지하고 얼마나 다르게 구현하려 하는가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날’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나와 동질화하려는 욕심, 너를 나의 안온한 지배 아래 두려는 열망, 제 뜻대로 되지 않는 너를 미워하는 마음,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기에 스스로가 미워지는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들을 생각하면서도 고요하게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일 것 같다. 온갖 기억과 복잡한 감정, 뒤엉킨 생각들로 부풀어 올라 이제 곧 터질 것만 같은 만월(滿月)이 아니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눈 쌓인 언덕길을 비추며 제 홀로 홀쭉하게 빛나는 초승달처럼 말이다.

    • 2018-09-30 14:58:11
    우주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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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거울

    시를 읽으며, 봄과 겨울 사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사이에 분명하지 않고 가물가물하지만 그 사이를 잇고 있는 반복되는 숨소리, 끊임없이 새로 이어서 나오는 상어이빨이 있어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졌다. 요즘 부모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생각,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중이라... 어떤 '단절'을 마주하는 것이 힘든것 같다. 섬진강과 지리산, 남과 북, 은서네 피아노 학원과 종점 세탁소도 무슨 관계가 있지? 싶을때, 너와 나 사이라고 해서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이 느껴지면서 가슴설레는 기분이 되었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 홀로 가는 자정의 마을버스, 홀로 빛나는 초승달 하나.. 시간이 흐르고 세상 일들이 지나가는 동안 각자 자기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느껴지며 내 마음도 단단하게 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 사이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또 무슨 병은 깊은지...에서 지나온 '너'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읽혔다. 사랑이 없는 날이라 가슴아프고 삶의 기운을 다 잃은건 아닐까 싶지만, 사랑 없이도 살아지고, 그 날도 편안하고 설레고 따뜻할 수 있다는게 위로가 된다.

    • 2018-09-30 16:23:51
    삶의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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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상아

    다른 시인님들처럼 나도 맨처음 시의 제목에 마음이 갔다. 이 시의 사랑이 없는 날은 사랑이 쉬는 날처럼 느껴졌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싸일 때가 많았던 나의 시간들 중에 사랑이 없는 날은 약간은 휴식같은 시간이었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싸우고, 욕망하고,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상처받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고... 어느새 사랑을 하는 주체인 나와 상대는 사라지고 길을 잃어버린 격정적인 감정들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로 병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 시는 묘한 편안함과 휴식을 준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나는 생각을 한다. 평소에는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관심을 끌지도 않았던 일들에 대해 그냥 생각을 한다. 굳이 답을 찾지 않아도 되기에 긴장감이 없는 이 시간이 좋다. 그저 무심히 바라보며 잠잠히 머물러있는 자리에서 나는 잠시 쉬어갈 수 있을 것 같다.

    • 2018-09-30 21:55:23
    푸른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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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추

    사랑이 없는 날에 시인은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랑이 없을 땐 생각이 많아지는것 같다. 누가 그랬다 사랑은 주는거 받는거가 아니라 하는거라고, 사랑이 있을 때는 이런생각이 다 무언가, 사랑하기 바쁜데. 그래서 사랑이 없는 날에만 할 수 있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그제야 은서네 피아노학원도, 종점 세탁소도, 손님 내리고 혼자가는 마을버스도 왠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너와 나 사이- 언젠가 사랑했던 그 이름도 사랑없는 자리에서 다시 떠올려 본다. 사랑이 다 지나갔어도 어딘가에는 그 때의 너와 내가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었으면 좋겠다. 아무 가게도 아니고 음식 한접시도 없이 돌 같은데 앉아서 어깨 기대고 풀이나 보고 좋다고 앉아있던. 아무 말 안해도 같이 있는게 좋았던 앳된 얼굴의 너랑 나. 그냥 어딘가 걔들끼리 그렇게 있어줬으면 좋겠다.

    • 2018-09-30 22:21:26
    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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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추

      사랑이 지나가도 어딘가에 그 사랑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던 어떤 얘길 듣고 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더라구요.

      • 2018-09-30 23:05:52
      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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