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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 「클로로포름」

  • 작성일 2018-09-27
  • 조회수 3,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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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송승환|「클로로포름」을 배달하며…



우리는 정신 차리고 똑바로 걸으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단테는 『신곡』의 천국편에서 철학자 아퀴나스의 입을 빌어 다르게 말합니다. “부디 ‘네’와 ‘아니오’를 앞에 두고 가늠하다 지친 사람처럼 느리게 움직이도록 당신 발에 추를 달기 바랍니다.”* 삶이 던지는 물음 앞에서는 성급한 긍정과 부정을 내려놓고 지친 사람처럼 걸어보세요. 그렇게 걸으며 사물과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은 연기처럼 풀리며 내 속으로 스며들 거예요.
시인은 우리에게 견고한 세계를 기화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잠시라도 클로로포름에 취한 듯, 긴장을 풀고 움직여 봐. 그리고 천천히 둘러봐. 그러면 의식의 습관이 깨어진 틈 사이로 당신은 처음 보는 미소와 푸른빛을 만나게 될 거야.’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3』, 박상진 옮 옮김, 민음사, 2013.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송승환 시집, 『클로로포름』, 문학과 지성사, 2011.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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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3건

  • balm

    #2 수면제가 담긴 유리병 뚜껑을 열고 그 향을 맡아본 적은 없지만, 매년 위내시경 검사를 위해 마취 주사 바늘을 팔에 꽂아야 했다. 나는 마취에 취해 정신 없이 자는 그 느낌이 좋아 일부러 극도로 바쁘고 피곤한 때에 건강검진 예약을 잡기도 했다. 마취에 깨어난 뒤 간호사분께 ‘마취 주사는 언제 맞나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쉽게 마취에 빠지는 편인데, 잘 일어나지는 못해 조금 더 누워있도록 권유받곤 했다. 이렇게 깰듯 말듯 잠에 취해 있을 때 나는 날개를 다친 아기새가 된 듯한 기분에 약간은 울컥한, 감성적인 모드가 된다. 이 때 간호사분의 부드러운 돌봄이 너무 따뜻하게 다가와 ‘평생 따뜻한 일을 하는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야지’ 야심 찬 마음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 2018-10-07 22:30:25
    b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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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lm

    #1 오전 11시 45분. 잠이 부족한 날이나 마음의 에너지가 소진된 날 점심시간에는 마치 약속이 있는듯 서둘러 사무실 빌딩을 빠져 나와 스타벅스 2층으로 향했다. 통유리 창밖을 바라보게 배치된 1인석은 인기가 많은 자리라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안된다. 뜨거운 차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의자에 150도 정도로 걸터 누워 오리털 패딩을 내 몸 위에 덮고, 뜨뜻한 보온 물주머니를 품에 안은 채 잠을 잤다. 30분 정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10분 쯤은 실제로 잠에 빠지는 것 같고, 나머지 시간에는 창밖에서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아린 심장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유리 빌딩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이 대기 속으로 풀려나간다.’ 라는 구절은 12시 즈음 건너편 빌딩에서 사람들이 쏟아졌던 모습을 연상케 하여 나를 그 겨울날의 나른함으로 인도했다. 패딩 모자를 얼굴 끝까지 덮으면 카페의 소음보다 내 숨소리와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 패딩 안에서 나는 일이 아니라, 상사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생각하고 챙겼다. 12시 30분이 지나면 스타벅스는 여느 고등학교 점심시간을 방불케 할만큼 시끄러워지고, 그 번잡함 속에서 나도 나만의 시간을 마무리하기 시작한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차를 마시고, 빵을 먹는다. 핸드폰으로 남은 시간을 확인하며 들고온 책을 한두줄 읽고, 밀린 핸드폰 메세지를 확인한다. 그렇게 카페를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짧은 길, 공기는 차갑지만 햇살은 따스하다. 그 때 바라본 하늘은 그저 푸른게 아니라 ‘푸른 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표현과 어울린다.

    • 2018-10-07 22:27:12
    b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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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거울

    시를 읽으며 의식 저 아래로 침잠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없이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모습, 그 사람과의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눈을 감는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은 어떨까? 요즘 들리는 사건 사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병원 환자들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안을 일으킨다. 그러다 어차피 살아가다 한번은 반드시 마주할 일이지 생각하면 담담해 지기도 한다. 위내시경 준비를 하며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침대 옆으로 긴 창이 있고 하늘과 구름이 보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보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떠날땐 이런 편안한 상태면 좋겠다 , 그러면 떠나는 날이 덜 무서울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시에서 의식을 잃어가는 모습을 떠올렸지만, '의식의 습관이 깨진 틈 사이로'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바쁘게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에서 잠시만 벗어나보자. 취한듯 긴장을 풀고 '의식의 습관이 깨진 틈 사이로' 스며들어가 보자. 깊은 내면의 나와 닿아보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때 더 나다운 나를 만나게 될 것 같다.

    • 2018-10-07 09:02:09
    삶의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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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사람이 사람에게 퐁당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이런 기분을 느껴보았나. 이 시는 내게 20살 첫사랑의 이야기와 같이 다가온다. 넋이 나간 아름답고 순수하지만 가슴 속엔 맑은 열정을 가진 청년의 모습이 연상된다. 숨은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한다. 그리고 내쉴 때 움직여야 한다. 내쉴 때 그녀가 떠오르는 것처럼. 시 속 인물은 마취제에 마취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떠올리고', 청각을 '잃고', 등을 돌리고 '내보이고', 눈동자에 '맺힌다'. 조용하게 계속 활동한다. 조금씩 조금씩..한걸음 한걸음.. 그 움직임이 내게는 더욱 건강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사랑이 이런 기분일거야.. 사랑하고 싶다. # 유리 빌딩 # 풀려나간다 # 내쉬는 # 물 속으로 잠기는 내 귀는 청각을 잃는다 # 내보인 # 천천히 # 흘러나온 # 맺힌다

    • 2018-10-07 07:02:27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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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곡안개

    술을 마시면 세상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때론 있는 그대로 보일 때도 있다. 나만의 현상학일지도 모르지만....... 우린 깨어 있으므로, 아니 현실적 자아가 작동하므로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내가 보는 것이 진리인 냥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환희에 차고, 불안하고, 충만하고, 질투하고, 연민에 싸이고, 갈구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추하게 보이고, 사랑하고, 절망하고, 의미를 만들고 그리고 죽어갈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것도 죽어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빛이 투과하는 실상은 있지만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유리 빌딩 속에서 연기처럼 흐느적거리며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사라진다. 우리의 뇌에서 맺히는 영상들이 들이 마시고 내쉬는 숨의 리듬에서 떠오른다. 공기 속에서 듣던 내 귀가 크로로포름에 취하듯 잠겨 청각을 잃는다. 모든 사물과 동작들이 크로로포름에 녹아 증발한다. 붉은 뺨은 등을 돌린 가치와 의미를 날려 버린 곳에 태초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간다. 그 곳에 재발견된 순수는 머리카락 날리듯 천천히 휘날린다. 감기는 내 눈동자에 맺히는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미소. 나는 내 입술을 본다. 내 입술은 내 눈동자다. 내 눈동자는 내 입술이 아니다. 내 입술이다. 하늘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런데 푸른빛이 아니다. 붉은빛이다. 아니 검다, 아니 희다. 그런데 푸르다. 푸른빛으로 어두워지고 있다. 하늘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다. 크로로포름은 나를 녹인다.

    • 2018-10-07 04:12:45
    계곡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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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죽어가는 것도 죽어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참 인상적이네요. 몇 년 전, 저희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이상했습니다. 몇 일 전까지 분명 내 눈으로 보였던 사람이 한 순간에 이 세상에 없어졌다는 사실이 이상했습니다. 그런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 맞나, 아닌가, 틀린가, 누가 지어낸건가, 그럴 수 있는건가, 아니야, 그런 건 없어, 내 속에 살아있다고 믿으면 그건 살아있는거야, 혼란스러웠습니다. 계곡안개님의 말씀대로 죽어가는 것도 죽어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판단하는 게, 이 우주에서 맞는 것인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요..

      • 2018-10-07 07:54:44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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