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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효환, 「마당 약전(略傳)」

  • 작성일 2018-12-20
  • 조회수 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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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곽효환|「마당 약전(略傳)」을 배달하며…


약전(略傳)은 한 사람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록한 글입니다. 시인은 마당의 약전을 통해 하나의 공간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하나로 고정된 존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톡 치면 작은 색유리 조각들이 새 문양을 만들어내는 만화경 속 유희가 좋다.”* 지금이야 병원에서 태어나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결혼식장에서 결혼하고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죠. 하지만 예전에는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졌어요.
가족들이 아이의 탄생 소식을 들으며 기쁨으로 두 손을 맞잡던 곳도 마당. 집 밖이 익숙해지기 전까지 아이가 아장아장 걷던 곳도 마당. 그곳에서 혼례를 치루고, 이웃을 만나고, 물그릇을 놓고 소원을 빌기도 했어요. 세월이 흘러 숨을 거두기 전 한 사람은 떨리는 목소리로 방문을 열어달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방문 너머로 자신의 한 생을 오롯이 받아준 눈 덮인 마당을 바라보며 고요히 떠나가기 위해서요. 문득,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집니다.


* 롤랑 바르트, 『목소리의 結晶』, 김웅권 옮김, 동문선.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곽효환 시집, 『너는』, 문학과 지성사, 2018.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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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1건

  • 바다유리0

    듬성듬성 돌담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초록색 잔디가 있는.. 시할머니가 살고 계신 시골집에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10년 전 쯤 되었을거에요.. 식구들과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다 파란 잔디가 타버려 걱정했지만 다음 번에 갔을 때에도 금방 푸르름을 되찾는 폭신폭신한 놀이터였습니다.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피어나고 우리 딸이 좋아하는 쥐며느리랑 메뚜기, 그리고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뛰어 놀아 신기하게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무화과향기가 바람에 은은하게 다가와 달콤하고 계속 궁금해지는 마당이었습니다. 서울에서만 살아서 시골집이 너무나 좋았지만 시집이라 불편하기도 했지요. 시아버지도, 남편도 남편의 형도 누나도 모두 그 집에서 태어나고, 그 금잔디위에서 뛰어 놀다 서울로 올라왔겠지요.. 서울의 손녀는 그곳에서 쥐며느리벌레를 굴리며 깔깔댔습니다. 그리고 몇 해의 시간이 지나고 치매라는 가슴 아픈 병이 더 깊숙하게 기억을 지워갔습니다. 기억과 함께 몸의 움직임도 점점 멈추어버리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요양병원으로 가시면서 다시 찾은 그 집은 써늘하고 온기 없는 제주의 바람만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잔디는 푸르름을 잃어 듬성듬성 지푸라기처럼 변해 있고 바람에 날아온 쓰레기와 거미줄이 할머니의 부재를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마당은 그런 곳인가 봅니다. 마당만 보아도 그 집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올 해 추운 2월 할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가족들 모두 돌아온 시골집은 더더욱 춥고 흐르는 눈물이 얼음같이 아렸습니다. 잔디가 죽어서 까만돌이 드러나는 마당의 한 구석이 애잔하였습니다. 이제 그 집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고 애도하며 가끔씩 쉬러가시는 고향집이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잔디에 물을 주시고 할머니가 하셨던 것 처럼 여기저기 숨은 공간들에 아버님과 어머님의 흔적들을 남기시겠지요.. 곧 무화과가 열리고 호박과 양애, 부추, 깻잎들이 마당 옆 검은 밭에 자리잡겠죠. 손으로 까서 한 줌씩 나눠주시던 결명자도요.. 누가 먹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또 돋아날거에요. 막내손주며느리를 무척이나 예뻐해주셨던.. “밥 먹언?” 하시며 수십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하시던... 마지막까지 잊지 않으시고 온 힘을 다해 ‘곱다’라고 말씀해주시던 할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제가 그 공간을 사랑하기에 제가 살아있는 동안 그 곳은 희미해지지 않을겁니다. 이 시가 할머니를 기억하게 만들어주고 시간의 흐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해주네요.

    • 2019-04-04 01:08:30
    바다유리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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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요19

      마당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었는데 바다유리님 댓글을 읽으니 마당이 그곳에서 삶을 살아간 사람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러한 공간이 있는 바다유리님이 부럽습니다. ^^

      • 2019-04-09 16:23:40
      담요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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