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타오르는 죽음 ['파견자들'을 읽고]

  • 작성자 기경
  • 작성일 2024-07-09
  • 조회수 398

  태양은 오늘도 하얗게 빛난다.

미국항공우주국, 약칭 나사에선 달에 착륙한 뒤 깃발을 꽂았다. 지구의 작은 종족인 인류 따위가 외계 위성을 점령했다는 일종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몇 세기 후, 인류의 주거지에 외계 생물이 당도하며 다시 한번 되풀이된다. 그리고 점령의 주체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시대에 박아 넣은 여괴는 무참히 꺾였다. 외계에서 온 이름 모를 균사체에 의해, 인류는 살해당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사망이라고 본다면 이는 무리가 있다. 균사체, 통칭 범람체는 아포芽胞를 인간에게 퍼뜨리며 미치광이로 만드는 광증을 유발한다. 이미 정부에서는 이 범람체들과 전쟁을 선포하였고, 광증이 발현되어 자아가 해체되는 시민들을 즉각 처리했다.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다. ... ... 이제 그 맹목적 시도를 잠시 멈추고, 우리는 우리가 싸우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이 조직을 설립하려 한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이 있다. ... 우리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를 바란다. ... ... 그렇기에 이 전제를 다시 한번 되새기자. 결국 이 또한 분명한 전쟁임을.

상대를 절멸시키기 전에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에반 바노스의 기고문 <파견 본부 설립에 부치며> 중

  범람체에 대한 혐오로 메워진 지하 도시. 그러나 이 와중에도 색채의 기이한 아름다움과 사랑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지상으로 나가 범람체를 조사하는 인간. 무언가를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그런 존재를 파견자라고 부르곤 한다. 이는 종종 지하 도시에서 선망을 발견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며, 빈민가 라부바와에서 숨 쉬던 소녀가 동경한 직업이기도 했다. 태린은 파견자로서 지상에서 관망할 노을을 꿈꾸며, 또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곁에 아주 낯선, 하지만 유습한 존재가 드리운다.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고 난 존재는 태린의 미래와, 동경과, 사랑을, 송두리째 뒤집는다. 아주 태연하게.


  '파견자들' 은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서술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지하 도시 시민들부터, 광인의 모습을 한, 어쩌면 오염된 괴물종.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오만을 버린 늪인들. 그리고 아름다운 색채로 생존해가는 아포 범람체. '정상적'이지 않으면 존재 취급조차 해주지 않는 세계와 달리, 작가는 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숨이 끊기는 사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 라는 자아가 해체되는 과정, 그것은 과연 죽어가는 것이 맞는가.

   그야 당신이 오직 당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린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지상과 지하의 경계 지역에서, 전前 파견자 자스완은 이렇게 말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체만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의 피부, 머리카락 같은 단백질을 넘어선 다음, 우리의 정체성은 오로지 우리의 것인가?

자아란 성격구조의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원초아의 본능적 욕구와 초자아의 도덕적이며 양심적인 요구를...이론학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나는 자아란 한 권의 원고지라고 생각했다. 철학을 연필로 마구 써내리다가도, 틀린 글자가 생기면 지워버린다. 물에 젖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페이지는 찢어버린다. 자아는, 주변인에 의해 물들여지는 유약한 종잇장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리 은하에서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파견자들' 은 내 믿음을 완전히 엎었다.

여전히 시민들과 정부는 자아를 내 믿음과 동일시한다. 그렇기에 광증에 걸린 사람들을 죽은 자, 내지는 미친 자라 치부한다. 하지만 범람체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를 취급한다. 자아란 착각이다. 주관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맹신하며, 개체 중심적 사고에 불과한 것을 떠받드는 것. 그게 그들이 말하는 인간들의 자아상이었다.

  그렇다면 자아의 해체는 정말 죽음이 맞을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정신적으로 명백한 죽음이자, 타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인간의 정신이 오로지 당사자의 것만은 아니라고 한들, 자아가 찢기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의식이 흩어진다면 혼란은 필시 온다. 태린이 범람체에게 말했던 것처럼, 진정 자아가 착각이더라도 인류에게는 그 착각이 필요하다. 오만할지언정, 근원적 공포를 직격으로 맞는 것보다야 낫다. 때로는 영광의 흉터보다 물 한 번 닿지 않은 손이 나은 법이다. 그러니 자아의 해체는 죽음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모든 생명은 생명이기에 죽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그 또한 삶이기에 주어지는 것이다. 모든 삶이 모든 죽음이다. 결국 이 삶이라는 독립영화는 한 치의 이변도 없이 데드 엔딩을 장식하기에, 죽음은 비로소 삶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작가가 '파견자들' 에서 흘려보내고픈 노래는 음울한 장송곡이 아닌, 형형색색의 찬란한 삶과 마주한 교향곡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잠깐 반짝였다 스러지는 불꽃이지. 그렇다면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야 해.

  이제프 파로딘의 답이었다. 삶은 짧고 빠르게 지기에, 정점의 순간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야 한다고. 어차피 모두 질 빛이니 그 순간 속에서라도 가장 밝게 빛나야 한다며, 그렇게 나지막이 태린에게 의존을 갈구했다.

  하지만 너무 어렵지 않을까?

빛나기 위해선 그만큼 아파야 한다. 원치 않는 일을 해내야 하고, 사랑하는 것을 잃어야 한다. 결국 내 모든 호불호는 나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면, 이미 배는 출항해있다. 그렇게 표류하게 되는 나.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항로를 밝히기 위해 전신을 불태우는 나. 과연 버티고 버텨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재 밖에 안 남은 비루한 몸이, 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그저 적당한 온도로 적당하게 타협하며 산다면. 덧없는 합리화일 뿐이더라도- 인류 절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 벤담이라면 만족하고 돌아설지도 모르니. 그러니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자. 꺼져가는 불씨이더라도 내일을 살자. 태양은 뜨겁게 몸을 태우고 모닥불은 따뜻하게 몸을 데운다.

하얗게 빛나는 태양은 우리의 두 눈을 멀게 하니까,

그렇게 불씨처럼 살아가자.

추천 콘텐츠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