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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 작성자 위다윗
  • 작성일 2024-02-11
  • 조회수 389

“너는 독서가 그렇게 좋니?” 


개학첫날 친구들과 수다떨기 바쁜 애들중 혼자 조용히 방에서 햄릿을 읽고 있었던 내게 물어본 어떤 누나의 질문이었다. 

오래전이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그렇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독서가 아니다. 책이다. 


이 미묘한 비교를 설명하자면, 독서는 책과 나 사이의 만남의 한 중요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책과 나의 관계는 독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치 책이 사랑하는 연인이듯, 독서를 통한 만남이 있기 전 책에 대한 설렘과 독서가 끝나고 남는 여운과 그리움이 있다. 아직은 내 취향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왠지 모를 끌림에 새책 향이 진동하는 서점에서 처음 만져본 책의 촉감, 책을 읽고 나서 몇년이 지나고 잠 못 이루는 밤 그 책이 나의 마음을 포옹했던 기억이 떠올라 책장에서 꺼내 다시 느껴보는 그 익숙한 촉감, 나에게 이건 옛연인의 사진을 쓰다듬는 것만큼의 감동을 준다. 


물론 사람의 추억어린 애정은 꼭 책 말고도 음식이나 장소, 음악을 향할 수도 있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성향이 그 “무엇”을 향한 지향성을 만드는 거 같다. 이를테면 나는 매우 어린 나이부터 아빠가 잠이 들기 싫어하는 나를 위해 약 500 페이지정도 되는 기독교 역사에 관한 책을 읽어주신 기억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문장이나 단어가 이해가 되지 않아 아빠에게 무슨 질문을 고를지 물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즉, 책의 맥락을 파악하기는 이미 포기한 셈이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이 내 지적 호기심을 해갈했던 것보다 사랑과 정서적 위로를 필요로 하는 마음의 구멍을 넘치도록 채워주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만약 아빠가 어린 내게 책을 읽어주지 않았더라도 그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하여 책만이 감히 나의 “연인”이 될만한 자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음식이나 장소, 음악또한 고유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있고 매력이 있고 경의를 느낄만한 요소들이 있다. 그렇다고 이것들을 나의 연인과 비교하는 것은 나의 연인에게 조금 불경하다는 감이 든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책을 특별하게 만드는가? 우선 나는 책의 글에 담긴 저자의 지정의, 정신과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새삼스럽게 감격한다. 저자가 쓴 글을 읽을때면 마치 함께 까페에 앉아서 단둘이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고 그 대화는 일상의 대화를 넘어선 누군가의 노고와 고민과 눈물과 열정이 가득한 대화이다. 책 속에 유령이 되어 말을 건네는 작가는 나를 때릴수도, 만질수도, 악수할 수도 없지만 그 뜨거운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누가 망치로 나를 때린 것 같은 이상한 의식이 든다. 사실 이 의식은 환각이 아니다. 인간이 가장 살아 꿈틀대는 정신이 제대로 얻어 맞은 것이다. 아니면, 영원이란 시간속 잠시 그 작가의 정신이 나의 정신과 교차된 것이다. 


또한 내가 책을 특별하게 느끼는 두번째 이유는 책은 그 무엇보다 나와 뒹구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보통 음악을 듣는 데는 3분에서 5분, 음식을 먹는데는 길면 30분에서 한시간인 것에 비해 독서는 짧으면 이틀, 길면 몇달이 걸리기도 한다. 장소도 시간이라는 잣대로 평가했을때 책을 읽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는 하지만 장소는 모두에게 공유되는 반면, 다른 활동들은 매우 개인적이고 참여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에 장소에 머무는 장시간은 이 논리에서 예외성이 있다. 책은 때로는 마치 같이 친해지고 싶은 근사한 친구처럼 남들에게 뽐낼때도 있는 가하면, 그 똑같은 책이 “독서할 시간에 문제집을 뜯어 먹어야 하는” 입시생에게 가끔은 학교 대표왕따와 어울리는 것 같은, 그러나 절대 손절할 수 없는 그런 친구같기도 하다. 친구가 누구든지 간에 우리는 서로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들이 된다. 


그렇게 나의 긍지이자 수치이며, 내 시간의 낭비이자 가치인 책과 난 사랑에 빠졌다. 책은 생각보다 이상적이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이다. 가끔은 번역된 고전에 오타를 발견하기도 하고, 찟어지고 더러워진 책을 갖게 되기도 하고, 잘 펴지기 조차 어려운 책을 읽을 때도 있다. 그렇기에 독서를 하는 모든 순간이 의미있다던가 즐거웠다던가 뿌듯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표면적인 결함을 넘어서 내게 낭만적인 대화를 함께 해준 책들을 결코 미워할 수 없다. 애인의 목에 난 거대한 점은 결함이다. 동시에 결함이 아니다. 그 점은 내가 그 애인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그 애인의 목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세상으로부터 더 열정적으로 지키며 애무해야 할 보석인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 내가 그 책을 집을때 마치 못이겨주는 듯이 나의 소유가 되어준, 나의 희노애락을 함께해준 모든 책들과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 책들을 창조해준 작가들에게 나의 짧은 세르나데를 부른다. 나는 당신들을 좋아하는 걸 넘어서 애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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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내 인생은 미치도록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 복잡하고 답답한 사실을 증명해보고 싶어 쓰고 버린 내 글들과 시간이 참으로 아까울 뿐이다. 모두가 어지러운 인생, 모두가 특별해지기 위해, 위대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 세상에서 나 위다윗이 얼마나 특별한지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뭐, 그렇다고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지하철만 타도 남고딩들이 신나게 욕을 쏟아 붓는 그 “문제적” 기독교 (어떤 불특정 다수에게는 *독교이겠지만)를 독실하게 믿고, 그 신앙에 자신의 젊음을 던진 목회자 부부의 외동아들이자 어릴적부터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꼈으나 그걸 억제하며 버텨온 꽤 인내심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말하면 적당할 듯 하다. 참고로, 이미 보편적인 상식이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사랑”의 형태가 아닌 인간 본성의 “뒤틀어짐” 내지는 인간행위의 “탈선”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오늘날 정통 개신교 내에서 동성애라는 죄와 그 죄를 행하는 LGBTQ 집단의 사람들은 주로 공감과 긍휼 대신 극심한 혐오, 경계와 거절을 받는 대상이다.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우가 노골적이다기 보다는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한 사람들이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에 가깝게 보여진다.) 부모님께서 내가 여성의 몸보다 남성의 몸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사춘기를 시작할 즘,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두분 모두 굉장히 속상해하셨지만 기도와 통제 속에서 충분히 꺾일 수 있는 죄의 씨앗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물론 이 씨앗은 보수적인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했고 오늘날 나는 더이상 내가 남편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며 신앙안에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게 되는 남자가 되었다. 내게는 게이라이프 아니면 독신밖에, 적어도 솔직하게는, 선택권이 없게 느껴진다. 다행히 성경은 독신라이프를 반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 핵심교리를 확립했던 사도 바울도 독신으로 살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원하는가이다. 아니, 내가 그걸 견딜 수 있는지이다. 아무리 내가 애늙은이라도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은 곧 스무살이 될 나에게 다른 이성애자 젊은이들보다 덜 강하게 일어나진 않는다.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갈지 모르겠지만, 난 동성애가 죄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과 오해, 적대심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동성애라는 욕구는 한 남자의 한 여자를 향한 자연스러운 욕구만큼 실제이며 이 끌림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한 인간의 영적, 정신적인 필요까지를 담고 있다. 동성애에 대해 말할때 흔히 내 교회 지인들은 “게이들은 온전히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목적으로 다른 남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인사이더로서 분명한 것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이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의 케미, 친밀감, 대상의 지적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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