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전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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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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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너의 등뼈를 쓸어내릴 때면
어딘가 기형적인 데가 있다
릴리, 너는 꽃대처럼 구부러진 얇은 선에 매달린 채
두세 번 차가운 재채기를 하지
그것은 너의 인영이 되어 온 새벽을 흘러 다니고
지난밤, 인디고블루 빛으로 타오르던 오로라는
너의 영혼이 통과해 온 짧고 투명한 불꽃이었을까
네가 수플레를 삼킬 때 사람들은
그것을 지난 세기의 잔해처럼
낡아버린 알약의 무덤으로 오독하고
죽음 같은 침묵으로 너의 파란 어깨를 핥는데
릴리, 네가 가진 빙하 같은 혼란도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야만성도
걷잡을 필요 없어
북반구로 흘러드는 신화,
그곳에서 나는 너의 운명을 본 적이 있으니까
해왕성이 떠오른 검은 눈동자 속으로
부서질 듯 흔들리며 나아가던 등뼈를,
너의 공포를
가끔은 너의 속살을 헤집어 보고 싶었지
가늘게 벌어진 뼈대에
달라붙은 몇 점의 히스테리아를 목격하고 싶어서
그것은 정말로
한 시대의 생존자였던 선조들과 같은 종류의 것일까
릴리
다시 한 번 너의 떨림을 듣고 싶어
극지보다 차가운 병증을
너의 슬픈 눈을 가지고 싶어
다시 타오르지 않을 너에게 그런 것들은 무용하잖아
이제 척추를 펴, 릴리
…… 세계는 갈기갈기 찢겨나간 베일처럼 너를 감싸고
그 위로 차오른 금빛 햇살이 출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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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료
- 2024-11-29
쓰지 못하고 삼켜낸 문장들은 곧사랑니로 돋아난다는 문법을 믿은 여름밤투명한 열기가 뒷목으로 차오르면나는 얇은 이불에 몸을 휘감고 열대야의 바다로 표류하는 꿈을 꿔너와 젖은 어깨를 부딪히며난파된 세계의 파편 사이로 나아갈 때행갈이 없이 이어지는 이 열기는서로의 등뼈로 엉겨붙는 손톱처럼 자극적이야몇 번의 파도가 덮쳐오는 동안 너는나의 손금을 뒤집어 운명을 알아내려 해해안선처럼 뒤얽힌 선분들 사이에서우리는 유약한 언어만을 모아 만든 섬을 발견하고시집처럼 얇은 발목을 내딛으면섬은 검푸른 그림자 속으로 우리를 삼켜내검은 돌 위로 몰려온 파도가 부서진 시어들을 남기고 가는 해변에서나는 펜을 쥐듯 너의 손목을 쥐고행갈이 없이 이어지는심장 박동을 들어일렁이는 열대야 너머로 세계는 저물어 가고이제 더는 어떤 문장도우리보다 뜨거워지지는 못할 것 같지너의 눈물샘이 반짝이기 시작했을 때맞아,우리는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였어
- 료
- 2024-11-07
연녹색의 빛이 우리를 통과하고 있었다한여름이었다반투명한 하복 셔츠를 날리며 하염없이 달리다 아무 지붕 아래에서나 숨을 고를 수 있는 나이서로의 손금을 따라가다미래라는 걸,운명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어 울다 잠들면나누어 낀 이어폰 줄은늘 한 쪽만이 빠져 있었고수영장 새파란 타일 위로 엎드린 듯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언제 이 여름의 필름이 끊길지 알 수 없어서걷잡을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는 시기매일 아침마다 키를 재어보며언제쯤 너를 한 품에 안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감기와 성장통을 나누어 앓는 밤들모든 찬란한 시절이 유한하다는 미신을믿지 않기 위해 너의 손을 잡자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뒷목,견딜 수 없었다
- 료
- 2024-10-03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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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안녕하세요, 김선오입니다. 료 님의 <릴리 전람회> 잘 읽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다정한 목소리가 독특한 조화를 이루는 시였어요. 릴리라는 대상을 호명하며 말을 이어나가는 방식도 좋습니다. 김행숙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
너무 좋아요.. 릴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도, 중간중간 기울임체로 쓰인 부분들도 전부 시의 분위기를 잘 구축해주는 것 같아요
@카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