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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락, 「고요의 입구」

  • 작성일 2013-01-07




 

신현락, 「고요의 입구」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시_ 신현락 - 1960년 경기 화성 출생. 시집으로 『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과 논저로『한국 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이 있음.
낭송_ 변진완 - 배우. 연극 <블랙박스>, 뮤지컬 <천상시계> 등에 출연.
출전_ 『히말라야 독수리』(bookin)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를 ‘문득 한 깨달음 주려는가’로 읽어도 좋을까? 시에 두 개의 개심이 나온다. 개심(開心)과 개심(改心). 앞의 개심은 ‘지혜를 열어 불도(佛道)를 깨우친다’ 즉 ‘마음이 열린다’는 뜻으로 굉장히 높은 경지의 말이고, 뒤의 개심은 ‘마음을 바르게 고친다’는 뜻으로 범상한 우리네 경지의 말이다.
  별안간 소낙눈이라지만, 눈이 쏟아지기 전에도 하늘은 끄무레했을 것이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시인의 마음처럼. 범상한 한 사람인 시인은 깨달음과 번민, 용서와 상처 사이에서 진자처럼 움직이는 마음의 불평에 처해 있다. 울퉁불퉁한 그 마음바닥이 눈경치를 바라보면서 둥글어지는 듯하다. 곡선은 고요하다.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내리고 쌓여 이루는 설경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은 그러하나, 나(시인)는? 나는 기실 뾰족뾰족하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뭐, 눈이 오기에 잠시 취해 있었을 뿐, 호락호락 개심(開心)할 내가 아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마음의 고요, 평심의 입구 산문에서 그저 설경을 바라볼 뿐이로다.
  소박하고 단아한 시인데, 호락호락 깨달은 척하지 않는 총명함이 톡 쏘는 맛을 낸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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