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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사랑이 없는 날」

  • 작성일 2018-09-13
  • 조회수 2,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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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곽재구|「사랑이 없는 날」을 배달하며…



사랑이 없는 날은 불화하는 날, 반목하는 날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려면 열렬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소란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 없는 날의 고요는 웬일인가요? 들끓은 마음 없이도 홍매화와 목련은 어울리고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 집으로 가는 길은 정답군요. 무슨 병은 없는지, 별고 없으신지 간간이 소식을 묻고 전하는 마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런 자유의 순간을 예감하는 것 같아요. 물론 ‘겨울을 이겨내는 봄’처럼 대립과 극복의 비유가 우리 삶에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부정이든 긍정이든 세상을 무엇과 무엇의 관계 속에 잡아두려는 마음 너머에서도 무언가 아름답게 존재합니다. 승객을 다 내려주고 홀로 가는 버스와 홀로 눈 쌓인 언덕길과 저 홀로 빛나는 초승달처럼.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곽재구 시집, 『와온 바다』, 창비, 2012.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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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6건

  • 햇살토끼

    왜 시 제목이 '사랑이 없는 날'일까? 혹시 제목이 의미하는 건 '(나의) 사랑이 (이제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는 날'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나에겐 10대 시절부터 아주 오랜 시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서로 확실하게 사랑을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사이였다. 그렇지만, 인생의 타이밍에서 우리는 늘 어긋나서 본의아니게 그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그 사람이 떠올랐다. 계절의 시작과 끝인 봄과 겨울 사이의 시간 속에는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떠올린다. 그래, 그 사람은 이걸 좋아했었지...이걸 싫어했었지...우리는 식성도 취향도 달랐었지.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은 언제나 존재했지만(너와 내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지만), 그 간극 사이에는 남들에게 일일히 설명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숨쉬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어째서 해피엔딩이 되지 못한 걸까? 참으로 오랜 시간 생각해 본 것 같다. 너와 나 사이는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그러다 마지못해 결론을 내렸다. 인생에서는 서로 사랑하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이 있을 수 있구나. 이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 사랑도 내 곁을 떠나고, 홀로 남은 마을버스와 초승달처럼 나도 혼자가 되어버렸지만, 홀로 남겨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사랑의 안부를 물어본다. 몸 건강히 잘 지내시는지요?

    • 2018-09-21 08:09:10
    햇살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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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시인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누가 봄과 겨울 사이의 계절을 생각할 수 있을까? 꽃이 진 뒤의 나무에 누가 관심이 있을까? 손님이 다 내린 뒤 저 홀로 가는 자정의 마을 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는 몇이나 될까? 추워서 손 호호 불며 가기 바쁠 눈 쌓인 언덕길 위 홀로 빛나는 초승달은 또 어떤가. 시어 하나 하나는 왠지 외롭다. 그러나 시어들이 손을 맞잡고 외롭지 않게 해 주는 게 있다. 그 건 바로 '사이'다. '사이'라는 시어가 많이 쓰였단 것을 알 수 있다. 사이는 둘 이상이 존재해야 있을 수 있는 말이고, 관계 속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기에 홀로 빛나는 초승달 하나도 덜 외로울 수 있었을 것 같다. 이번 시는 사실 내게 어려웠다. 제목도 왜 사랑이 없는 날인지 잘 모르겠고, 설명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나에겐 '사랑'도, '사이'도, 병을 물어볼 수 있는 걱정을 할만한 '용기'도 없는 게 아닌지... 생각해 본다.

    • 2018-09-22 13:11:25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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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사이가 없는 날 생각한다 나와 그들 사이에 어떤 수많은 말들이 숨어있었던건지 하고 싶었던 말들과 하기 싫었던 말들 사이에 좋았던 웃음과 미웠던 웃음 사이에 무슨 순간들이 뼈저리게 박제되어 있었던 건지 생각한다 너와 나 나와 너 다시 너와 나 나와 너 사이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었는지 생각한다 이제는 쉬길 바라는 내 숨, 누워있는 내 뺨에 닿아주는 귀여운 바람 한 줄기, 조그마한 나의 집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 2018-09-22 14:06:09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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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lm

    시어 한 구절, 한 구절이 아름답게 느껴져 깨끗한 노트에 옮겨 적었다. 읽을 때마다 의미가 다르게 다가와 여러 차례 읽었다. 아래의 해석이 나의 마지막 생각이다. _ 사랑이 없는 날 생각한다. 사랑과 이별 사이에 어떤 시간들이 존재했는지, 많이 다른 서로의 사이에 어떤 상처가 아직 남아있는지, 가까운 또는 먼 서로의 사이에 또 다른 아픔은 없는지, 담담히 이별을 겪어내는 외로운 모든 것들은 얼마나 많이 아플지.

    • 2018-09-22 23:52:43
    b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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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lm

      내게 ‘사랑이 없는 날’은 가슴이 터질 것 같거나,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거나, 심장이 찢길 듯한 순간들 대신, 오가는 바람에 마음 설레고, 길가의 감, 대추, 은행 열매 여물어 가는 모습에 뿌듯하고, 쇼팽 프렐류드에 아릿해지는 순간들 가득한 나날.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언제쯤 잘 것인지, 주말에 무엇을 할 예정인지 대답할 필요가 없는 날. 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의 어떤 모습을 열망하는지 살피는 대신, 내가 밤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A밤잼과 B밤잼 중 무엇이 더 내 취향인지 살펴보는 날. 자주 만나지 않지만 늘 그리운 이들에게 연락해 서로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날. 지난 날 나와 내 사랑을 반추하고 재구성하는 날이자, 곱게 그리고 망측하게 다가올 사랑을 상상하는 날. 코트 밖에서 오롯이 세상을 마주하는 날.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끼고, 음미하고, 사랑하는 날.

      • 2018-09-23 00:59:50
      b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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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왜 종이가 구겨져 있을까?

    • 2018-09-23 12:22:20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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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perto

    ‘사랑이 없는 날’이라는 제목에 뒤따르는 ‘생각한다’는 시어가 인상적이다. 왠지 사랑이 없는 날은 생각하는 날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열정이 잠잠해진 고요한 시간에 내 주변 세계에 대해 섬세하게 마음을 가져보게 되는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사이에 놓여있을 수많은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지 질문해 보게 한다. ‘모든 사물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음을.’이라는 어느 시인의 고백이 떠오르면서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만이 존재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처 내가 머물지 못했던, 아직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들을 발견하게 만들 사랑이 없는 날을 살아보고 싶어진다.

    • 2018-09-29 18:34:32
    aper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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