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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 「클로로포름」

  • 작성일 2018-09-27
  • 조회수 3,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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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송승환|「클로로포름」을 배달하며…



우리는 정신 차리고 똑바로 걸으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단테는 『신곡』의 천국편에서 철학자 아퀴나스의 입을 빌어 다르게 말합니다. “부디 ‘네’와 ‘아니오’를 앞에 두고 가늠하다 지친 사람처럼 느리게 움직이도록 당신 발에 추를 달기 바랍니다.”* 삶이 던지는 물음 앞에서는 성급한 긍정과 부정을 내려놓고 지친 사람처럼 걸어보세요. 그렇게 걸으며 사물과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은 연기처럼 풀리며 내 속으로 스며들 거예요.
시인은 우리에게 견고한 세계를 기화시키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잠시라도 클로로포름에 취한 듯, 긴장을 풀고 움직여 봐. 그리고 천천히 둘러봐. 그러면 의식의 습관이 깨어진 틈 사이로 당신은 처음 보는 미소와 푸른빛을 만나게 될 거야.’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3』, 박상진 옮 옮김, 민음사, 2013.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송승환 시집, 『클로로포름』, 문학과 지성사, 2011.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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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3건

  • 후추

    당신, 꽤나 자주 내 꿈에 방문했답니다. 맨발로 걷는 길에 보석 같은 유리조각으로. 데이트 나서는 현관에 신발 한짝을 감추러. 어떤 날은 빽빽한 스케줄 채워진 복도에 나타나 내 모든 일정을 취소하게 만들었지요. 지난 모든 것 실수였다고. 그런 쓸데없는 말을 왜 했나요? 깨지 않으려 그렇게 조심해도 꼭 깨고야 말더군요 나는 한참 가슴팍에 이불을 꼭 누르고 눈만 깜박였습니다 그런날은 비틀비틀 걸었습니다

    • 2018-10-06 21:36:47
    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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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당신'이 아무 것도 못 하게 만들었군요. 유리조각은 맨발에 많이 아팠을텐데, 신발이 없어 데이트에 나갈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을텐데, 일정을 취소하면 후추님이 곤란했을텐데도 지난 모든 것이 실수였다라는 말로 모든 것이 용서가 되던가요? 그래서 깨고 싶지 않으셨나요? 평소에도 눈을 깜박 깜박 하시는 귀여운^^ 후추님의 모습에서 시 속의 모습 또한 쉬이 그려졌습니다. 비틀비틀 걸었다는 마지막 말에서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네요.

      • 2018-10-07 07:10:23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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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토끼

    마취제가 정맥주사관을 통해 들어오는 순간, 혈관을 타고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 퍼지면서 내 정신은 순식간에 아득한 곳으로 떨어진다. 지난 목요일에 수술을 받았는데, 시인의 시는 수술대에 누워서 마취를 하고, 기억을 잃을 때까지의 내 모습을 너무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수술실 밖에서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을 가족들의 얼굴도 떠오르고,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고생했던 지난 몇 달동안의 내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영화 엑스맨의 퀵실버가 떠오르기도 했다. 총이 발사되는 찰나의 순간에도 퀵실버는 자신만의 속도로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가끔은 남들과는(또는 평소의 내 모습과는) 다른 속도로 세상을 들여다 보는 것도 꽤 재미난 것 같다. 난 어떻게 하면 다른 속도를 가져볼 수 있을까?

    • 2018-10-06 22:19:28
    햇살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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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햇살토끼님, 수술 잘 마치셨는지 안부 묻습니다.. 저도 마취는 해봤지만 햇살토끼님보다 더 금방 아득한 곳으로 떨어졌는지, 이 시에서 미처 마취했을때의 저를 떠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성인이 되서 수술대에 누운 적도 없군요. 있었다면 저도 긴장됐을테고, 밖에서 나보다 더 애가 타고 있을 가족들의 얼굴도 떠올랐을테고, 고생하는 내 모습에 울컥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수업시간에 직접 안부를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엑스맨: 아포칼립스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퀵실버가 귀여운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 햇살토끼님의 글을 보니 자신만의 속도 그 독특함때문에 귀엽다고 생각한 것 같네요. 자기만의 멋이 때론 엉뚱하게도 보이니까요. 그러나 천재적인 엉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만의 속도를 갖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렇게 살고자 카톡 상태명도 '내 인생은 내 멋대로'라고 짓기도 했습니다^^ 나만의 스타일로 살고 싶지 않나요? 햇살토끼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자신의 생각을 많이 알게 되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생각이더라도 그러기 쉬운 건 아니지만요. 햇살토끼님의 방법도 공유받고 싶네요.

      • 2018-10-07 07:31:13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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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perto

    몸에 힘을 쭉 빼고 물 위에 가만히 누워있을 때 전해지는 느낌. 물의 출렁임에 맞춰 몸의 부분들은 제각각 흔들리고 오로지 하늘을 향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오롯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태양 빛의 온도. 내 의지를 몸의 어디에 싣는 순간 깨지는 균형. 온전한 내어맡김으로 나의 무게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입술에서 흘러나온 미소가 감기는 내 눈동자에 맺힘’을 느낀다. 유리빌딩으로부터 걸어나온 발걸음이 향하고픈 방향은 제 몸을 띄워줄 수평선이 있는 곳. 보일 듯 말 듯 가리워진 길을 더듬더듬 따라 걷는다.

    • 2018-10-06 23:15:19
    aper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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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오! 이런 느낌을 떠올리시다니! 공감만빵이네요^^ 그런데 뭐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요?^^ 물 위에 누워있으면 귀에 물 들어오잖아요ㅎㅎ 물 속으로 잠기면 내 귀는 청각을 잃는다^^ 추가합니다! 저는 물을 좋아해요. 목까지 물에 잠겨 있을 때의 그 따뜻함, 평온함이 좋습니다. 그래도 물 위에 누워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온전히 내어맡기다가도 순간 치솟는 불안감으로 자연이 주는 균형은 깨지고 제 무게는 저를 다시 덮치기도 합니다. aperto님은 온전히 내어맡김을 하실 수 있는 분이기에 이 글을 쓰실 수 있었다고 추측해봅니다. 여유가 느껴지네요. 그 여유에서 흘러나오는 입술의 미소가 상상됩니다. 마지막 말에서의 더듬더듬도 답답함이 아닌 여유로움, 천천히, 자연스러움이 느껴져요.

      • 2018-10-07 07:41:27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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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곡안개

    술을 마시면 세상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때론 있는 그대로 보일 때도 있다. 나만의 현상학일지도 모르지만....... 우린 깨어 있으므로, 아니 현실적 자아가 작동하므로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내가 보는 것이 진리인 냥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환희에 차고, 불안하고, 충만하고, 질투하고, 연민에 싸이고, 갈구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추하게 보이고, 사랑하고, 절망하고, 의미를 만들고 그리고 죽어갈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것도 죽어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빛이 투과하는 실상은 있지만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유리 빌딩 속에서 연기처럼 흐느적거리며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사라진다. 우리의 뇌에서 맺히는 영상들이 들이 마시고 내쉬는 숨의 리듬에서 떠오른다. 공기 속에서 듣던 내 귀가 크로로포름에 취하듯 잠겨 청각을 잃는다. 모든 사물과 동작들이 크로로포름에 녹아 증발한다. 붉은 뺨은 등을 돌린 가치와 의미를 날려 버린 곳에 태초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간다. 그 곳에 재발견된 순수는 머리카락 날리듯 천천히 휘날린다. 감기는 내 눈동자에 맺히는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미소. 나는 내 입술을 본다. 내 입술은 내 눈동자다. 내 눈동자는 내 입술이 아니다. 내 입술이다. 하늘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런데 푸른빛이 아니다. 붉은빛이다. 아니 검다, 아니 희다. 그런데 푸르다. 푸른빛으로 어두워지고 있다. 하늘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다. 크로로포름은 나를 녹인다.

    • 2018-10-07 04:12:45
    계곡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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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죽어가는 것도 죽어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참 인상적이네요. 몇 년 전, 저희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이상했습니다. 몇 일 전까지 분명 내 눈으로 보였던 사람이 한 순간에 이 세상에 없어졌다는 사실이 이상했습니다. 그런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 맞나, 아닌가, 틀린가, 누가 지어낸건가, 그럴 수 있는건가, 아니야, 그런 건 없어, 내 속에 살아있다고 믿으면 그건 살아있는거야, 혼란스러웠습니다. 계곡안개님의 말씀대로 죽어가는 것도 죽어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판단하는 게, 이 우주에서 맞는 것인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요..

      • 2018-10-07 07:54:44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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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라솔

    사람이 사람에게 퐁당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이런 기분을 느껴보았나. 이 시는 내게 20살 첫사랑의 이야기와 같이 다가온다. 넋이 나간 아름답고 순수하지만 가슴 속엔 맑은 열정을 가진 청년의 모습이 연상된다. 숨은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한다. 그리고 내쉴 때 움직여야 한다. 내쉴 때 그녀가 떠오르는 것처럼. 시 속 인물은 마취제에 마취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떠올리고', 청각을 '잃고', 등을 돌리고 '내보이고', 눈동자에 '맺힌다'. 조용하게 계속 활동한다. 조금씩 조금씩..한걸음 한걸음.. 그 움직임이 내게는 더욱 건강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사랑이 이런 기분일거야.. 사랑하고 싶다. # 유리 빌딩 # 풀려나간다 # 내쉬는 # 물 속으로 잠기는 내 귀는 청각을 잃는다 # 내보인 # 천천히 # 흘러나온 # 맺힌다

    • 2018-10-07 07:02:27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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