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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거미의 생에 가보았는가」

  • 작성일 2018-11-22
  • 조회수 3,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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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고형렬|「거미의 생에 가보았는가」를 배달하며…


시인들은 종종 아버지 흉을 봅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시에다 “아버지, 개자식”이라고 쓰기도 했어요. 이 시의 늙은 학생 같은 남자 역시 좋은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버지, 장남이라 귀하게 여기고 막내라서 이뻐하는 일도 없이 참으로 공평하게 내다버리셨군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에서 미움 대신 슬픔이 느껴집니다. 찢어진 벽지 속으로 들어갔던 ‘나’는 아버지처럼 늙은 학생 같은 아버지가 되었어요. 식구들은 내다버리고 검은 책만 챙겼던 아버지, 검은 책으로 혼자만의 집을 짓던 아버지처럼. 그러고 보니 거미는 참 쓸쓸한 곤충이네요. 늘 뿔뿔이 흩어져, 바람에 자기의 실이 가닿는 대로 집을 지으니 말입니다. 거미의 생에 가보니 혼자 집을 짓는 일이 우리의 숙명인 듯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의 생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고형렬 시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비, 2010.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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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8건

  • 파라솔

    아버지..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나는 왜 당신의 1순위가 아닌 것인가요. 나는 왜 당신만큼 소중할 순 없는 것인가요. 당신은 왜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너 자체를 사랑한다'는 동화 속 아버지가 아닌 것인가요. 아버지. 아버지는 왜 하필 내 아버지로 태어난 것인가요. 나도 그 누구처럼, 사랑을 넘치게 받는 공주처럼 살고 싶었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하필 나의 아버지인 것인가요. 아버지도 내가 하필 당신의 딸인 것이 부끄럽겠지요.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난 부끄럽게 살지 않았으니.. 난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내일도 살 것이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2018-12-01 21:39:23
    파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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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토끼

      파라솔 님의 내일을 응원하고, 기대합니다. 스스로의 삶의 주연은 바로 나니까요. 멋진 주연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 내실 겁니다.

      • 2018-12-02 10:11:35
      햇살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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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perto

    천신만고 끝에 문지방을 넘은 거미가족의 생이 비극으로 끝이 났다. 거대한 인간의 손에 의해 밖으로 버려지고 가족들끼리는 서로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이젠 과거가 돼버린 일. 그런데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고 시적 화자인 거미가 말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주인공 거미는 가족들을 찾아 나서는 대신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버렸기에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찾아 나서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미에게 도대체 어떤 생각이 스쳤기에 슬프다는 생각조차 없이 황토 흙 속으로 들어 가버린 것일까.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가는 거미의 모습이 마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듯 비통하게 느껴진다.

    • 2018-12-01 23:01:21
    aper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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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거울

    첫 부분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아버지 잃은 가족의 암담함이 그려졌다. 읽어 내려가며 늙은 학생같은 남자가 어머니 형 동생을 쓸어 내다버렸을 때 절망이 느껴졌다. 그 늙은 학생같은 남자가 아버지구나! 아버지는 왜 늙은 학생같은 모습일까? 나이는 들었으나 그 나이에 걸맞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여전히 배울게 많은 미숙한 사람이라는 뜻일까? 같이 세상을 배워나가고 있을 뿐인 그저 좀 더 일찍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일까? 어떻든간에 아버지를 보며 세상을 배우는것 같다. 각자 살아남아라.

    • 2018-12-02 08:25:57
    삶의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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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토끼

    '거미의 생'이라는 단어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봤던 루이스 브루주아의 '마망'이다. 마망 탓인지 나에게 거미는 모성애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곤충이다. 거미의 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거미는 사마귀처럼 교미 후 암컷이 수컷을 잡아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엔 애거미끼리 모여 있거나 어미거미 곁에 있지만 나중에는 흩어져서 독립생활을 하는 특성이 있다. 아버지를 잃고, 어미와 함께 새로운 방으로의 삶을 시작하는 거미 가족의 이야기. 시 속의 '늙은 학생같이 생긴 남자'는 나에겐 무심한 듯 하지만, 다정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곤충을 싫어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발견되었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거미가족의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어야만 했을 꺼다. 남자의 손길로 인해 독립생활의 시작이 예상보다 빨리 시작되었을 수는 있지만, 어찌되었건 '나'도 새로운 방의 흙 속으로 자신만의 집을 지으러 들어가게 된다. 삶이란 어쩌면 거미처럼 혼자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숙명이라면, 삶에서 나같이 매정한 손길이 아닌 무심한 듯 해도 다정한 '늙은 학생같이 생긴 남자'의 손길을 만날 수 있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 2018-12-02 10:08:03
    햇살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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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lm

    나의 첫 원룸에 이삿짐을 풀었던 날, 엄마 아빠가 떠나는 차를 배웅하던 나는 목 끝까지 무언가 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사 전 날까지 난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늙은 나의 엄마 아빠에게 그렇게 소리를 질러야 했을까. 방을 구할 때부터 시작되었던 아빠와 나의 긴 다툼은 이삿날 아무래도 아빠차가 필요한 이유로 임시 중단되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답게, 나로서 살아도 괜찮다고 나 스스로에게 오롯이 증명해내고 싶어 부모님의 집을 나오는데도 부모님은 계속 부모님의 방식으로 나를 도우셨고, 나와 부딪혔다. 부모님의 방식이 틀려서가 아니라, 나는 내 뜻대로, 내 방식대로 하고 싶었다. 그게 부모님 생각에 비효율적이고, 답답할지라도.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밀어내어도 나를 위하고, 또 위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퉜다. 이 방에 오기까지 다사다난했지만,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서 다행이라고, 첫날 밤 나는 일기를 썼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맨몸으로 우왕좌왕하다 끓인 물을 섞어 샤워를 해야했지만, 괜찮았다. 여행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독립의 둘째날은 사실 아팠다. 밤새 심한 복통에 시달렸고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렇게 온 몸으로 울었다. 몸 속 수분을 다 짜내고 박스로 둘러쌓인 방바닥에 널부러져있다가, 열이 오르고 손발이 떨려오는 데 죽을 끓여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외투를 걸쳤다. 집 앞 문을 연 어떤 가게에 들어가 약국이 어디냐고, 죽은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었다. 누군가는 저 거미처럼 마음의 준비 없이 가족과 생이별을 당했을테고, 나는 수년을 벼르고 벼르다 가까스로 이렇게 떨어져 나왔다. 결국은 다 그렇게 각자의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리라.

    • 2018-12-02 15:34:40
    b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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