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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노는 동안」

  • 작성일 2019-01-03
  • 조회수 4,641


[caption id="attachment_273042" align="alignnone" width="640" class="cente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caption]




김소연|「노는 동안」을 배달하며…


십이월에도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은 추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상상하며 견디는 마음이겠죠. 심술궂은 겨울바람이 그 어여쁜 잎들을 다 떨어뜨렸으니, 너무 나쁘지 않나요? 시인은 “응, 그래서 좋아”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부서지고 땅과 섞여버렸기 때문에 그 땅의 힘으로 봄날, 새 잎이 단단한 가지를 뚫고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마룻바닥이 누군가 흰 무릎으로 기도를 올리는 아름다운 성소가 되기 전에 또 다른 기도가 있었어요. 더러운 바닥을 온몸으로 문지르고 다니는 걸레질의 기도. 그러고 보니 이 시는 희망의 마음으로 시작되어 헌신의 행위로 끝이 납니다. 새해예요. 우리는 희망으로 1월을 시작합니다. 곧 뜨겁게 우리를 바쳐야 할 날들이 긴 마룻바닥처럼 펼쳐지고 있어요.


시인 진은영


작품 출처 : 김소연 시집, 『i에게』, 아침달, 2018.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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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1건

  • 깃털

    십일월 상실을 경험하며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은 안온하고 찬란했던 계절을 떠나온 때늦은 후회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십일월에 있는 이유가 있음에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는 작은 존재가 할 수 있는 거대한 운명에 대한 들리지 않는 저항의 울부짐인지도 모르겠다.. 파릇하고 화려했던 그 시절을 알면서도 몰라봤던건 어리석음일 수 있으나 죄가 될 수는 없다.착하다 하나 나쁘기도 하며 온 계절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게 아닐까.. 착하기만 했다면 영원히 오월을 알면서도 몰라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십일월에 깨어 어리석음의 고통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면 오월처럼 내 고통을 그대로 마주해주었던 소중한 마룻바닥과 걸레질의 입장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십일월은 어쩌면 오월의 또 다른 동경일 수 있다.. 십일월에 오월을 생각하는 이 한 생각에서 지금을 배워본다

    • 2019-03-25 03:54:37
    깃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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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요19

    이 시를 읽고 나의 11월 26일이 생각났다. 나는 매해 11월 26일을 “은행나무의 날”로 정해 놓고 기념한다. 비바람이 불어 은행나무 잎이 바닥에 떨어지고 온 세상이 샛노란 나뭇잎으로 반짝거리는 날들이 몇 년 동안 쌓여서 그러한 날이 되었다. 그 때의 분위기는 스산하고 쓸쓸했고, 공기도 차가웠고, 비를 맞아 반짝거리는 노란색의 세상에서 나만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란색이 주는 유쾌함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쓰라리고 아픈데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상처처럼, 11월 26일들은 그렇게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어려워 여러 번 곱씹어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이, 놀지 않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나의 11월 26일의 기분처럼 얼마나 아프고 또 부정하고 싶은 일인지 마주하며 그 쓰라린 날은 언젠가는 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노는 동안, 화자는 11월에서 5월을 생각하고 있었다. 5월은 내가 지은 죄를 다 알 것 같고, 그 죄를 보아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 나날들이었다. 5월의 나는, 싱그러운 잎에 싸여, 죄로 뒤덮인 자신을 모른 채, 착한데 나쁜 자신의 모습이 좋다고 여기며 살아갔다. 그런 채로, 그래서 좋은 채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자연은 심술궂게도 잎을 떨구고, 화자는 순진무구한 샛노란 나뭇잎을 밟으며 걸어갔다. 그러면서 봄에 대한 잎의 입장과 기도에 대한 걸레질의 입장을 생각한다. 잎은 뚫는 성질을 가져서, 떨어지더라도 다시 나뭇가지를 뚫고 나온다. 비바람이 불어도, 또 시간이 지나면 잎이 돋아나고 봄, 5월, 죄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5월이 다시 온다. 그것이 봄에 대한 잎의 입장이다. 걸레질은 무릎을 받아주는 마룻바닥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깨끗하게 닦는 행위로, 화자가 자신의 죄를 깨끗이 닦아내려는 시도 같아 보였다. 기도는 마룻바닥을 닦는 행위, 즉 죄가 없었던 상태로 자신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진 마룻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으면서 시작된다. 마룻바닥이 무릎을 받아주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안심하고 무릎을 내려놓아도 된다. 기도는 마룻바닥과 무릎이 모두 있어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화자는 잎이 돋아나면 봄이 오듯이 걸레질을 하면 기도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했다. 봄에 대한 잎의 입장은 증명이 되었지만, 기도에 대한 걸레질의 입장을 “증명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화자도 이 증명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화자는 지금 샛노란 나뭇잎들을 밟으며 11월을 걷고 있다. 11월은 나를 받아주고 있는 나의 죄와 나를 알아보는 기도를 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은 화자는 자신을 보지 못한 채로 지나치고 있었다.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노는”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조적인 태도로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 같다.

    • 2019-03-25 21:44:21
    담요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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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반

    시 전체적으로 정반대의 것을 대조시키며,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11월과 5월은 겨울과 봄으로 전혀 다른 계절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마치 겨울에 봄을 생각하듯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화자와 '너'의 성질이 매우 다르다는 느낌, 대상과 접촉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연에서 지은 죄를 겨우 알 것 같기도 했으나, 반대로 자신의 죄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고, 세 번째 연에서 앤서니 퀸은 착한데 나쁘기 때문에 시적 화자가 좋다고 표현했다. 나는 내 죄를 알지만, 내 죄는 나를 모른다는 것이 내가 가지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 마음을 착한데 나쁜 것이 좋다는 세 번째 연의 표현에서 받아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째 연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을 밝으며 걸어가며 시적 화자는 봄에 세상 밖으로 뚫고 나오는 잎에 대해 생각한다. 반대로 마룻바닥은 무릎을 받아주는 성질을 가졌다. 봄과 기도에 대한 잎과 걸레질의 입장은 이렇듯 정반대고, 이 다섯 번째 연에서 다시 첫 번째 연에서 던졌던 '대조', '역설'에 대한 인상을 받았다. 마지막 연에서 '십일월에도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으로/나를 내가 지나치고 있'는 마무리에서, 결국 시적 화자는 자기 자신과 접촉하지 못하며 언제나 당연히 하나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지나친다는' 대조를 시켜 그 자체가 역설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분리시켜 놓아두는 듯한 느낌이었고, 나 자신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지나쳐 가는 그것 자체가 제목처럼 시적 화자에게 '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 2019-03-26 00:18:33
    햇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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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바토디

    대부분의 시가 그렇지만 유독 이번 시가 내게 어렵게 느껴졌다. 이렇게 단상을 쓰는 동안에도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걸 느낀다. 나는 확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십일월에 엉뚱하게 오월을 생각하고, 착한데 나쁜 여자가 '그래서 좋다'는 얄궂은 심리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십일월에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심술궂은 비바람이 샛노란 나뭇잎들을 떨어뜨려, 그걸 밟으며 걸어가면서 가지를 뚫고 소생하는 이파리를 갈망하는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의 십일월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그냥 나를 지나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십일월에 오월을 생각하는 마음처럼 다소 허황되고 헛헛한 이 기분을 음미하는 것도 결국 노는 동안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 2019-03-26 20:29:05
    쿠바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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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놀

      이번 시가 어렵게 느껴진다고 쓰신 글이 이렇게 반가울수가 없네요.

      • 2019-03-27 12:29:35
      지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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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린북

    먼저 시를 읽었을 때 제목 “노는 동안”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나라면 노는 시간이 즐겁고 신날 것 같은데 이 시에서는 그런 가벼움이 안 보인다. 그러니까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놀다’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마치 화자에게 노는 동안은 유희의 시간이기 보다는 십일월이라는 스산한 계절을 견디는 마음으로 오월의 푸름을 생각하는 시간인 것이다. 노는 동안은 모호하고 이중적인 삶의 모습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지은 죄를 겨우 알 것 같’지만 ‘내 죄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옛날 영화를 보며 등장 인물인 여자가 착한 동시에 나빠서 마음에 든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심술궂은 바람에 의해 바닥에 떨어진 샛노란 나뭇잎들을 밟으며 걷는다. 그러면서 화자는 생각한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다시 뚫고 새 잎으로 탄생될 수 있음을, 그리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 마룻바닥을 깨끗이 해 줄 걸레질의 신성한 의미를... 아마도 화자에게 노는 동안의 시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 2019-03-26 21:13:21
    그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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