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중의「판」을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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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아내는 숙소를 집이라 불렀다
아내의 말을 따르자면
판 위에 숙소를 삼은 오늘은
판도 집이었다
집이 다만 하나의 판이라니
조금 서글프기도 하지만
우리가 묵어온 모든 자리가
서로 다른 장소였다 할지라도
단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따듯했다
그 온기가 지나온 숙소를 이으면
하나의 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과학자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사실
액체 위에 떠 있는 판과 같아서 끝없이 움직인다는데
그렇다면 아내와 나는 이 판의 진실을 살아내는
집의 가족이 아닐까
그녀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잠드는 곳에
나 또한 이미 도착해 있다는 느낌
밀가루 반죽이 한켠에서 숙성되는 시간으로는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으나
나는 잠시 하나의 판에 몸을 맡긴다
그러곤 집이라는 거대한 판의 이미지를 덮고 잠든다
지금은 그 이미지의 이불을 함께 덮는 우리이겠으니
다음은 늘 간단하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튿날을 이어가는 것이다
일어나
커다란 빵 반죽에서 알맞게 떼어낸 빵들을 오븐에 넣을 뿐이다
여러개의 판에 담아
층층이
빵이 오븐에서 알맞게 부푸는 동안
열기를 견디는 빵 아래 판도 은밀하게 익어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판이 있는 곳이면
우리가 짐을 풀어둔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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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0-1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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