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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의「판」을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5-11




아내는 숙소를 집이라 불렀다


아내의 말을 따르자면

판 위에 숙소를 삼은 오늘은

판도 집이었다


집이 다만 하나의 판이라니

조금 서글프기도 하지만


우리가 묵어온 모든 자리가

서로 다른 장소였다 할지라도

단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따듯했다

그 온기가 지나온 숙소를 이으면

하나의 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과학자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사실

액체 위에 떠 있는 판과 같아서 끝없이 움직인다는데

그렇다면 아내와 나는 이 판의 진실을 살아내는

집의 가족이 아닐까


그녀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잠드는 곳에

나 또한 이미 도착해 있다는 느낌


밀가루 반죽이 한켠에서 숙성되는 시간으로는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으나

나는 잠시 하나의 판에 몸을 맡긴다

그러곤 집이라는 거대한 판의 이미지를 덮고 잠든다

지금은 그 이미지의 이불을 함께 덮는 우리이겠으니


다음은 늘 간단하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튿날을 이어가는 것이다

일어나

커다란 빵 반죽에서 알맞게 떼어낸 빵들을 오븐에 넣을 뿐이다

여러개의 판에 담아

층층이


빵이 오븐에서 알맞게 부푸는 동안

열기를 견디는 빵 아래 판도 은밀하게 익어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판이 있는 곳이면

우리가 짐을 풀어둔 집이 있다


시인 이수명
김학중┃「판」을 배달하며
숙소와 집은 다르다. 숙소가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라면 집은 육체적, 정신적 휴식처다. “우리가 묵어온 모든 자리가/서로 다른 장소였다 할지라도/단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따듯했다”에서 알 수 있듯, 아내와 나는 집이 아니라 다른 숙소에 머물러 있다. 다른 곳에서 하나의 집을 생각한다. “그녀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잠드는 곳에/나 또한 이미 도착해 있다는 느낌”은, 각자의 노동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우리가 하나의 집에 도착해 있는 상상에서 비롯된다. 이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판이다. 판구조론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사실/액체 위에 떠 있는 판과 같”은 것이라면, 아내와 나는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판에서 잠드는 것이다. 판은 집이고 집은 판이다. 그러므로 “집이라는 거대한 판의 이미지를 덮고 잠드”는 우리에게 지상의 거처는 모두 집이 된다. 우리는 그 집에서 빵을 굽고 짐을 풀어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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