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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은의 「론리 푸드」를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5-25
  • 조회수 2,404


론리 푸드


식초에 절인 고추

한입 크기로 뱉어낸 사과

그림자를 매단 나뭇가지

외투에 묻은 사소함


고개를 돌리면

한낮의 외로움이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이미 배가 부르니까 

천천히 먹기로 한다


밤이 되면 내가 먹은 것들이 쏟아져

이상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식초 안에 벗어놓은 얼굴

입가에 묻은 흰 날개 자국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

무구함과 소보로


무구함과 

소보로


나는 식탁에 앉아 혼자라는 습관을 겪는다

의자를 옮기며 제자리를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가끔 미래에 있다


놀라지 않기 위해

할 말을 꼭꼭 씹어 먹기로 한다


임지은, 『무구함과 소보로』, 문학과지성사, 2019

시인 이수명
임지은┃「론리 푸드」를 배달하며

  어떤 음식이 론리 푸드일까. 혼자서 먹는 음식일 수 있고, 외로운 상태에서 먹는 음식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외로움 자체가 바로 론리 푸드일 수 있다. 즉 외로움을 먹는 것이다. “식초에 절인 고추/한입 크기로 뱉어낸 사과/그림자를 매단 나뭇가지/외투에 묻은 사소함”은 모두 론리 푸드이다. 나는 그 외로움의 형태들을 하나씩 흡수한다. 집안 곳곳에, “고개를 돌리면/한낮의 외로움이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다”. 바라보면 모두 론리 푸드인 것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배가 부르니까/천천히 먹기로 한다”고 할 때, 이미 외로움으로 포만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나는 론리 푸드를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먹은 것을 쏟아내기도 한다. 쏟아내도 론리 푸드는 큰 변형이 생기지 않는다. 조금 부스러졌을 뿐, 외로움은 상하지 않는다.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무구함과 소보로”가 그렇다. 무구함은 때가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외로움의 원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천진한 소보로와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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