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김선오의 「나무에 기대어」를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7-27
  • 조회수 1,580


나무에 기대어


물소리가 나를 흐르게 한다. 햇빛이 나를 하얗게 거두어들인다. 몸은 다 사라지고 나는 물이 되었구나. 물이 되었구나. 아무것도 아프지가 않다.


눈을 뜬다. 눈앞이 온통 거미줄이다. 나의 검은 야구 모자 챙 아래로 거미가 집을 지었나 보다. 어둠 속에서 거미줄이 흔들린다. 거미도 흔들린다.


거미줄을 떼어낸다. 손이 끈끈하다. 그러나 거미줄 여전히 눈앞에서 흔들린다. 비가 오려는 건가. 나는 주먹 속의 거미와 함께 돌아간다.

시인 이수명
김선오┃「나무에 기대어」를 배달하며

   잠깐 나무에 기대 있을 수 있어 다행이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리고 햇볕도 있어서 좋다. 나무에 나를 기대 놓으면, 물소리에도 나를 기대게 되고, 햇볕에도 나를 맡기게 된다. 그러면 “물소리가 나를 흐르게 한다. 햇빛이 나를 하얗게 거두어들인다.” 내가 사라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내가 없어서, “아무것도 아프지가 않다.” 모든 것이 무사하고 평온하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뿐이다. 내가 합일을 이루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제한된 대상들일 뿐이다. 눈을 뜨면, 눈앞에 물이나 햇볕과는 아주 다른 거미줄이 있다. 거미줄에서 흔들리는 거미가 있다. 이번에는 나를 기대거나 맡길 수가 없다. 나는 “거미줄을 떼어낸다.” 이 평온하지 않은, 불필요한 동작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거미줄과 함께, “주먹 속의 거미와 함께 돌아가”야 한다. 나무를 벗어나야 한다. 나무에 기대어 있던 짧은 순간을 뒤로한 채.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