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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필, 「천문」

  • 작성일 2023-03-02
  • 조회수 2,905





 천문 -김연필 유리로 된 달빛 같은 밤, 달빛으로 된 거울 같은 밤, 거울 속에 비친 어두운 밤, 밤의 너머에 비치는 어떤 밤. 어떤 유리로 된 밤, 어떤 유리로 만든 밤, 어떤 유리를 만든 밤, 어떤 유리로 남은 어떤 밤. 어두운 밤. 유리로 된 달빛 같은 밤, 달빛으로 된 거울 같은 밤, 밤으로 된 겨울 같은 밤. 겨울로 된 밤. 겨울에 비친 밤. 겨울 속에 남은 어떤 밤. 어두운 밤. 유리된 달빛 같은 밤. 해가 없는 밤. 해가 없이 빛나는 밤. 밤마다 사라지는 밤. 밤의 멀리로 사라지는 그 어떤 밤. 그 어떤 밤의 조각 같은 어떤 유리 같은 어떤 달빛 같은 어떤 조각만 남은 어떤 밤. 모든 밤. 모든 밤이 서술되는 밤. 모든 밤이 서술되는 유리로 된 거울에 비치는 밤. 작가 : 김연필 출전 : 『검은 문을 녹이는』(파란, 2021)



김연필┃「천문」을 배달하며


밤이란 무엇인가. 날마다 지상을 가득 덮어버리는 어둠은 무엇인가. 천문학 같은 과학적 분석이나 철학의 심오함을 가지고 밤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이나 철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시는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를 통해 밤을 제시한다. 그것도 어떤 상황으로 정돈된 한 장면이 아니라 그냥 밤의 여러 모습이다. 밤은 “해가 없는 밤”으로 어두우면서 또 “해가 없이 빛나는 밤”이기도 하다. 시는 밤의 이러한 모순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냥 보여준다.
시에는 또 유리, 달빛, 거울, 겨울 같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밤과 연결되어 밤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데 함께 한다. “유리로 된 달빛 같은 밤” “달빛으로 된 거울 같은 밤” “거울 속에 비친 어두운 밤”을 보면 단어들이 마치 바톤을 넘기며 미끄러지듯 춤을 추는 것 같다. 춤은 시에서 계속된다. “유리로 된 달빛”과 “유리된 달빛”의 미묘한 터치, “거울”과 “겨울”의 조율과 순환이 있다. 말들이 논리나 의미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 놀이를 하고 있다. 이것이 시에서의 밤이다. 언어 놀이와 밤의 놀이가 어우러지는 “모든 밤”이다.


시인 이수명


작가 : 김연필

출전 :『검은 문을 녹이는』(파란, 2021)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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