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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왜가리 클럽」 중에서

  • 작성일 2021-12-23
  • 조회수 794



 왜가리 클럽 중에서 - 이유리 그날도 벤치에 앉아 개천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나는 나대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으므로 앉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옆자리 사람도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아 휴대폰도 책도 없이 그저 앞을 똑바로 응시하고 한참을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거는 것이었다. “자주 나오시네요.”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옆에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떨떠름한 마음으로 여자의 행색을 살폈다. 말마따나 이곳에 자주 나오긴 했으나 눈에 익은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일일이 쳐다볼 만큼 여유로운 마음도 아니었지만. 여하튼 모르는 사 람에게 웃으면서 말을 거는 사람에게는 분명 수상한 목적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으므로 대답은 커녕 얼른 시선을 돌려보냈는데, 여자 역시 별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듯한 태도로 그저 어딘가를 흥미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뭘 보는 것인가 싶어 시선을 따라가니 개천 가장자리 물풀과 죽은 갈대가 우거진 곳에 커다란 왜가리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잘 봐요, 곧 성공할 것 같으니까.” 여자가 왜가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뭘 성공한다는 건가 싶어 얼떨결에 나도 그 왜가리를 빤히 쳐다보았는데, 그러고 보니 도림천에도 저런 큰 새가 있었나, 의아해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왜가리가 별안간 기다란 부리를 물에 내리꽂았다. 다음 순간 여자와 나는 동시에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고개를 쳐든 왜가리의 부리 끄트머리에, 신기하게도 펄떡이는 은빛 송사리 한 마리가 몰려 있었다. 왜가리는 머리를 요령 좋게 움직여 물고기를 꼴깍 집어삼키고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우뚱기우뚱 몇 걸음을 걸어갔다. “와, 진짜 잘 잡네.” 나도 모르게 양손을 부여잡고 그렇게 말하니 여자가 방긋 웃었다. “그렇죠? 보고 있으면 정말 재밌어요.” 재미있을 것까진 없고 그냥 좀 신기했을 뿐이었다. 여자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 같아 퍼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가게가 망한 날부터 이때까지 내내 얼굴 대신 금이 간 돌멩이 같은 걸 달고 다녔던 터라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가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는데 다시 돌멩이가 되고 나니 바로 그 직전에 내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웃을 일이 뭐 있다고 웃었나, 새가 물고기 잡아먹는 게 웃을 일인가. 양양미 참 배알도 없지, 가게 말아먹고도 웃고 앉았네, 속으로 읊조리는데 여자가 내 속내를 다 읽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그 봐요, 웃으니까 또 웃어지죠?” 나는 어이가 없어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냐고 쏘아붙이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으나 말을 섞기보단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 싶어 그만 입을 꼭 닫았다. 엉거주춤 일어서려는데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혹시 왜가리 보는 거, 관심 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릴까,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발끈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여자가 쉿,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리며 턱짓으로 왜가리를 가리키기에 나도 모르게 그쪽을 쳐다본 그 순간, 왜가리가 또 한번 부리로 물을 내리찍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렵한 동작이었다. 곧이어 어김없이 잡혀 올라온 통통한 송사리가 왜가리 목구멍 속으로 쏘옥, 빨려드는 걸 지켜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장관은 장관이네, 중얼거리고 말았고 그러자 여자는 그것 보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작가 : 이유리 출전 : 『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 2021)



이유리 ┃「왜가리 클럽」을 배달하며


모든 존재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왜가리가 부리를 내리꽂아 은빛 송사리를 낚아채듯, 우리에게는 삶의 한 순간을 잡아두기 위해 온 마음을 모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걸거나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언제나 성공만 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몰두해도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뭔가 낚아챘다고 여겼는데 알고 보면 그저 요란하게 물만 튕긴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의지를 다잡고 시작한 일이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는 것도 자주 겪습니다. 뜻을 이룰 때보다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상할 때가 더 많고요. 그러다 보면 본래 간절히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헛갈리기도 합니다.
누군가 삶에 집중하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노라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너그러워집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힘을 다해 응원하고 싶어지고요. 우리는 모두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응원하고 그런 응원으로 위로받았던 순간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들 때문에 아무리 큰 실패를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어도 다시 마주 보며 웃게 되는 것이겠지요.
올 한해, 여지없이 최선을 다했지만 뜻대로 안 되어 마음이 작아진 여러분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가까이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내년에는 더 큰 힘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소설가 편혜영


작가 : 이유리

출전 : 『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 2021)

책 소개 링크 : 문학과지성사 https://bit.ly/3bD56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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