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안 소설가의 목소리로 듣는 『온난한 날들』
- 작성일 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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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되자 태양이 머리 꼭대기 위에 떠올랐다. 슬슬 직장인들이 몰려와 테이크아웃을 해 갈 시간대인데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했다. 이런 땡볕에 에어컨도 안 트는 카페에 올 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 틈을 타 나는 유리와 함께 카페 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늘어져 있었다. 평택호 바로 앞 관광단지라는 특성 때문에 원래가 직장인보다는 뜨내기손님이 더 많은 가게였다. 단골도 별로 없다. 주변에 같이 장사하는 가게 사장님들 외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라 버스나 지하철을 탈 필요가 없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테이블에 반대쪽 볼을 갖다 댔다. 테이블에서 올라오는 찬기로 얼굴이 조금은 시워해져서 이러고 있으면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점장님은 이러고 누워 있는 우리를 보고 나무늘보가 따로 없다고 잔소리를 하시지만.
볼을 바꿔 대려고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던 스킨답서스 화분에서 불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듣는 순간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킬 정도로 놀랐다.
“부점장님,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정도로 놀란 것도 오랜만이었다. 소리가 들린 것 자체가 오랜만이긴 했다. 지난달 초에 한 번 듣고 이번 달에 처음 듣는 거니까 얼추 두 달 만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유리가 불안해할까 봐 다시 테이블에 볼을 갖다 대고 누웠다. 누운 채로 점장님이 있는 포스기 쪽을 향해 물었다.
“점장님, 저희 화분 몇 개만 더 뺄 수 없을까요?”
카페 내부에는 보이는 자리마다 화분이 깔려 있다. 어스프레소는 대대적으로 친환경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펼치곤 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없는 커피 브랜드로도 유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플라스틱 제로가 아니라, 여기 평택 에코시티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신소재 플라스틱만 사용한다는 뜻이지만 신소재 플라스틱은 일반 플라스틱과 달리 금방 썩는다는 특징이 있으니 크게 다른 말은 아니다.
평택이 신소재 플라스틱 시번 사용 도시, 에코시티로 지정된 지 이제 10년째였다. 평택 구도심 아래쪽, 평택호 인근 지역이 에코시티로 지정된 이후 시티 내에서는 사용하는 플라스틱 양에 제한이 없어졌다. 신소재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만큼 탄소 배출도 타 지역보다 20퍼센트까지 더 가능하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공장이나 기업의 본사가 에코시티로 이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스프레소의 본사만 해도 에코시티 내에 있었다.
그러니까 가게 내부에 가득한 화분은 어스프레소의 친환경 브랜드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어스프레소 사장님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게 내 업무 환경을 저하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점장님에게 매일 우리 화초 좀 몇 개만 빼자고 말해도 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점장님이 말했다.
“명색이 에코시티인데, 초록이 좀 많아야 보기도 좋지 않니?”
초록,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그렇다고 손님들의 사생활까지 제가 알아야 할까요?
스킨답서스 화분에서 다시 음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팀장 새끼 죽었으면.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점장님이 한 말도 유리가 한 말도, 당연히 내가 한 말도 아니다. 살짝 낮고 퍼스키한 목소리는 한 시간쯤 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 간 근처 직장인의 목소리였다.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오는 손님이었다. 단골이 거의 없는 카페라 일주일에 두 번 오는데도 얼굴을 외웠다. 외우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게, 창백한 인상에 다크서클이 짙어 얼굴이 꼭 유령신부 같았다. 주문할 때에는 항상 어딘가 넋이 빠진 목소리여서 이런 강렬한 목소리를 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스킨답서스 화분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안 죽지? 이 개밥버러지만도 못한 새끼. 길 가다 날벼락이라도 떨어져서 죽었으면.
말에는 힘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식물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는 그게 식물이 말을 하는 거라고 착각하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내뱉은 말이나 생각, 강하게 남아 있는 원한이나 사념 같은 게 식물에 흔적으로 남은 것뿐이라는 걸 머리가 좀 더 크고 나서야 알았다.
이상하게도 그 삭이고. 비밀을 털어놓고 있겠지.
누군가는 나무 아래서 사랑을 소 어떤 말, 생각보다 식물에 강하게 남는 것은 저주의 말, 원념이었다. 억울함, 한 같은 것도 많이 남았다. 사람이 가진 감정 중에 그게 제일 강하고 오래 남기 때문일 거다.
윤이안, 『온난한 날들』 안전가옥, 18-20p.
화분에 물을 주면서 예쁘다 예쁘다 소리 내 말하곤 합니다. 이파리들을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닦아주는 것은 내 마음이 심란할 때죠. 수년 만에 꽃을 피운 행운목을 들여다보면서 정말 행운이 오려나 들뜰 때도 있습니다. 식물들에게 말을 걸면서도 그들이 알아들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그저 있을 뿐이죠.
그런데 그들이 사람들의 속엣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저 알아듣는 게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면. 선의보다는 악의가, 좋은 말보다 나쁜 말들이, 억울함과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더 세고 강렬하게 박힌다면.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몸인데 어찌할까요? 그 목소리 그대로 다시 뿜어낸다면. 우리 주변의 식물들이 내뿜는 것이 산소가 아니라 인간들의 온갖 마음이라면, 그 마음들을 들이마시고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벌써 질식해 죽고 말았을 겁니다.
『온난한 날들』을 읽으며 공기정화식물이라는 명칭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에코를 붙인 온갖 것들을 되돌아봅니다. 지속가능한 미래. 공허한 구호가 공해처럼 부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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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2-27
그 순간을 꽤 선명히 기억한다. 백영중학교 건물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고, 덕분에 학교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는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야구부 아이들이 기합을 외치며 트랙을 돌고 있었고, 담장 근처 등나무 그늘에는 늦은 시간까지 동아리 활동을 하는 방송부 아이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중이었다. 야구부 애들이 나아갈 때마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그 그림 같은 배경 안으로 달음박질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하늘색 컨버스화 끈이 풀려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이제는 회색에 가까워진 흰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눈이 시린 걸까. 양손으로 두 눈을 비벼 보있다. 눈은 여전히 시렸고, 눈앞에는 믿기 힘든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푸르른 기운이 무성한 6월의 학교에 내리는 함박는. 그것은 그 해의 녹지 않는 첫눈이었다. 때아닌 함박눈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눈송이를 손으로 받고, 고개를 쳐든 채 방방 뛰며 팔을 휘저었다. 건물 안의 아이들은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진풍경은 화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는 현관에 서서 팔을 뻗어 떨어지는 눈 한송이를 받았다. 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그 결정체는 꼭 모형처럼 딱딱했으며, 차갑지 않았다. 차갑지 않은 눈이라니. 이게 정말 눈이 맞을까? 눈송이는 높은 기온과, 내 체온에도 녹지 않았다. 6월 충순, 초여름이었고, 등교 직전 뉴스에서 본 기온은 27도를 웃돌았다. 결정체의 모양이 일반적인 눈송이와는 달리 불규칙적이었다. 그리고 훨씬 밝게 반짝였다. 꼭 진짜 눈을 흉내 내어 만든 모형처럼. 그런데 곧 눈송이를 받치고 있던 손바닥 주위로 불그스름한 반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가려움이 밀려들었다. “아, 따가워.” 소리가 나는 곳을 좇았다. 운동장과 이어지는 계단에 앉아 있던 두어 명이 건물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머리와 체육복에 묻은 눈들을 털어 낶다. 그들의 몸에서 떨어지는 눈은 눈이라기보다는 조금 입자가 큰 모래알 같아 보였다. 잔 우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박처럼 차갑지도 부서지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녹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쌓였다. 맨 처음 따갑다고 외쳤던 단발머리가 둥얼거렸다. “왜 이렇게 따갑지? 이거 뭐야? 나 새우 먹어서 알레르기 반응 올 때 꼭 이러는데.” “내 손도 그래. 이 두드러기들 뭐야? 징그러워.”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과 손등이 온통 붉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하늘 곳곳을 수 놓은 하얀 점들이 보였다. 눈송이들은 조명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떨어졌다. 그 비현실적인 풍경에 정신 팔려 잇던 나를 깨운 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였다. 제일 먼저 뛰쳐나왔던 1학년 아이 한 명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 바닥을 구르고 잇었다. 황토색으로 물든 하복 교
- 최고관리자
- 2024-11-28
비로소 어떤 슬픔이 찾아왔다. 죽은 할머니의 몸 일부와 맞닿아 있는 몸들이 이상하게 한몸 같았다. 죽음의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종의 유대감인 듯했다. 천운영, 「내 다정한 젖꼭지」, 『반에 반의 반』, 문학동네, 2023, 181쪽
- 최고관리자
- 2023-05-18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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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화음은 오지랖이라고 했지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 연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sf라서 오히려 현실적인 문제들이 더 잘 느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