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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홀드 메스너, 『검은 고독 흰 고독』

  • 작성일 2016-01-14
  • 조회수 1,313


“고요에 이끌려 나는 슬며시 정상을 만진다.
나와 정상은 하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르다”


라인 홀드 메스너, 『검은 고독 흰 고독』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늦겠다.
--달이 있겠지.
나는 여전히 커다란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황홀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구름은 발 아래 1000미터의 골짜기에 꽉 찼고 산등성을 스쳐 흐르고 있었다. 골짜기에 어둠이 퍼진다. 밤은 어슴푸레하고 이슬처럼 차가운 안개의 막이 드리워지듯 다가와서 지금까지 뚜렷이 보이던 것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높이 뜬 구름에만은 따뜻한 햇빛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아직 정상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공중에 떠도는 얼음의 결정체가 햇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이제는 정말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에도 천막을 찾을 수 있을까. 꼭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여러 가지 기묘한 결단이 내려지는 법이다. 정상이 이를 데 없이 고요해서 하산이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뜻이 없는 것 같기만 했다. 나는 고독의 바다에서 나와 우주의 안식처로 가는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구름과 만년설에 덮힌 봉우리뿐 생명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이 산은 생명에 대한 거부, 혹한, 그리고 단절의 상징이었고 내 가슴에 복잡한 감정을 사정없이 불러 일으켰다. 나를 둘러싼 지평선은 원으로 보였다. 주위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눈 위에 난 내 발자국뿐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강렬한 인상을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기야 느낌을 입으로 나타내려고 해도 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드디어 생각을 멈출 수 있는 지점에 왔다. 희미하게 보이는 지평선, 하늘에 걸린 엷은 무늬--이 모두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다. 내 머리로서는 이때의 감정을 제대로 나타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그곳에 앉아서 그 감정 속에 내가 녹는 대로 놔두는 길밖에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이해되고 의심이 생기지 않았다. 저 지평선 위에 가물거리는 희미한 빛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싶었다.
하고 입을 연다. 그러나 내 속에서 나오는 이 한 마디가 벌써 나를 흔들어 놓으려고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내가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됐다. 이 끝없는 평온이 나에게 만족감을 안겨 준다. 고요에 이끌려 나는 슬며시 정상을 만진다. 내가 말을 계속하려 하자 고요한 세계가 입을 다물게 했다. 지난날의 일들이 바람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저것이 언젠가는 끝나리라고 느낀다. 그러나 별로 슬프지 않았다. 세상이 나를 들이마셨다가 토해내며 들끓고 소용돌이치는 것을 체험한다. (중략)
한 시간 후 나는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다. 지나온 발자국이 장미 빛으로 물든 설면에 검게 드러나 보였다. 눈의 상태가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밑으로 내려왔다. 나는 몸이 녹초가 되고 지친 것을 알았다.
비박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세계의 뜻을 알았다. 천막은 작았고 얼고 기울어져 있었다. 입구가 좁아서 들어가는데 고생했다. 단절--이 얼마나 나와 친숙했던 세계인가!


▶ 작가_ 라인홀트 메스너-산악가. 1944년 북부 이탈리아 티롤 지방에서 태어남. 파두아대학에 적을 둔 공학도였으나, 구도로서의 등반은 오를 때마다 불멸의 업적을 남겼 다. 5대양에 100건이 넘는 고산등반 기록을 가지고 있고, 히말라야 8000 미터급 14봉을 모두 완등했고, 그 중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한 기록도 있다. 2004년 5월 위성항법장치가 내장된 시계만 차고 고비사막을 건너기도 했다.

▶ 낭독_ 박상종 - 배우. 연극 ,, 등에 출연


배달하며

전설적인 등반가 메스너는 1978년 8월 9일 16시경 낭가 파르바트 정상에 올랐다. 세계 최초 무산소 ‘단독’등반이었다. 신의 영역, 수직으로 직립한 만년설로 뒤덮인 차디찬 빙벽, 그 한계영역을 오직 혼자 오르게 한 힘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라는 검은 고독이었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고요의 흰 바다에서 우주로 열린 안식에 들어서는, 황홀한 흰 고독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잊게 만든다. 그가 선 자리는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이해되는 화엄(華嚴)의 자리.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검은 고독 흰 고독』 (김영도역) (평화출판사 1989년 5월)
▶ 음악_ The Film Edge /Suspense-Tension / Have a Look Around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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