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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중에서

  • 작성일 2023-01-26
  • 조회수 1,121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그날 주호 씨는 저한테 끝까지 거짓말을 했어요. 아니, 절반의 거짓말이랄까. 윤범씨를 잘 만났다고. 같이 연극을 보고 산책을 하고 서점 구경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고요. 저는 한동안 의문에 잠겼어요.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왜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새벽에 무슨 나쁜 꿈이라도 군 건지 제 팔을 꼭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주호 씨를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이 사람은 윤범 씨를 만난 게 아닐까. 그날 이 사람이 만난 건 언제라도 연락해 만날 수 있는 윤범 씨가 아니라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윤범 씨가 아닐가. 이 사람은 윤범 씨에 대한 마음을 처분하거나 무효화하지 않고 끝내 간직해 보려는 게 아닐까. 작가 : 김병운 출전 :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 73쪽-74쪽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을 배달하며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와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걷고,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던 자리에 혼자 앉아 함께 마시던 차를 혼자 마시며 시간을 보낸 경험. 그럴 때 우리는 거기에 혼자 있었던 것일까. 그럴 때 그 사람을 만났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지는 않지만 온통 한 사람 생각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진정으로 같이 있는 것일까. 누가 정말로 만나고 있는 것일까.
어떤 그리움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절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그리움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연락해 만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과거의 어떤 시간 속의 그 사람. 이 그리움을 노스탤지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사라진,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열망. ‘처분하거나 무효화하지 않고 끝내 간직해 보려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잘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아주 늦게 알아차린다.


소설가 이승우


작가 : 김병운

출전 :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 73쪽-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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