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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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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배달 김연수「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어제 원장이 부르더라. 노력해보기는 할 테지만 아무래도 인문계 진학까지는 밀어주기 곤란하다 카더라. 내 동기들은 다 고아원에서 나갔다. 말은 안 해도 나도 그래 나갔으만 하는 눈치더라. 그란데 나는 이래 끝내고 싶지는 않아여. 그래갖꼬 오늘 담임한테 가서 한번만 도와달라 캤다.” “뭐라카더나?” “수산고등학교 가라 카더라. 학비가 공짜인 대신에 군대에서 하사로 오래 근무해야 된다 카데.” “그라만 되겠네.” 태식이가 원재를 골똘하게 쳐다봤다. 그 눈길에 원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싫다 그랬다. 아직까지 내 꿈은 선원이 되는 게 아이라. 나도 너처럼 대학교 전산학과 가고 싶어여. 다른 형들처럼 감방이나 들락거리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아여. 그래갖꼬 나는 일단 돈 벌어서 검정고시 치기로 했다. 너하고는 대학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끼라. 아마 내가 먼저 가 있을 끼다. 너 선배가 될 끼다.” 이를 악물면서 태식이는 하모니카를 내밀었다. “이거는 너 가져라.” “이걸 왜 날 주나?” “내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다.” “니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왜 나를 주나?” “내가 지금 한 말을 먼 훗날까지 잘 지켜나갈라고 그런다. 내가 우째 될란지 지켜볼 사람은 이 세상 천지에 하나도 없응께 니가 이거 갖꼬 있다가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이 되는가 잘 지켜보란 말이라. 나중에 대학교 전산학과에서 다시 만나만 나한테 돌려주라. 그때 다시 만나서 오늘 일 얘기하만 얼마나 좋겠나.” 보랏빛 꽃잎 몇 점이 태식이의 짧은 머리칼 위에 내려앉았다. 태식이는 돌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꽃잎들이 흩어졌다. “나가기 전에 내가 너들한테 선물 하나 하고 나갈 끼라. 너도 다시는 체력단련 끝나고 <캔디> 같은 노래 부르지 마라. 애꿎은 사람 눈물 흘리게 하지 말란 말이라. 매 맞는 거 참는 거는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다. 참고 참고 또 참지 말고 니가 원하는 사람이 돼라. 니가 원하는 대로 꼭 과학자 돼라. 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꼭 과학자 될 끼다. 그래갖꼬 담임한테 매 안 맞고도 훌륭한 사람 될 수 있다카는 거를 보여줘야 한다. 담임은 우리 때 얼마나 견딨는가 모르겠지만, 저래 선생질밖에 더 하나? 안 그렇나?” 태식이가 씽긋거리며 말했다. 원재도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둘은 그저 미소만 짓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껄껄거렸다. 둘의 웃음소리에 젖은 보랏빛 등잎이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작성일 2009-04-30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26 조회수 46699상세보기 -
문장배달 심상대「양풍전」
심상대「양풍전」 옛날에 어떤 집에, 옛날에 양풍이 집에, 아버지가 작은집 하나 뒀는데, 이 여자가 하도 지독스러워 가지고- 엄마는 살았어 죽었어?죽었어. 그럼 작은집이 아니네. 계모지. 있을 때 있을 때, 작은집 둔 건 양풍이 엄마 있을 때야. 양풍이 엄마는 내중에 죽었지. 으응.그래 살았는데, 이 여자가 하도 본어머이를 못살게 하고 이래서, 양풍이 어머이가 양풍이를 업고 양녀를 앞세우고 문 앞을 나설 때 산천도 울고 초목도 울었대. 그런데 그 이야기책 어디서 난 건데, 어머니.몰라. 옛날에 느이 외할아버지가 내 어려서 읽으라 해서 읽었어. 설에 어대 놀러다니라 하나. 이런 거나 읽으라 그러지. 그런데 양풍이 어머이가 양녀를 업고 나갈 때 어데로 간다고 핸고 하몬, 옛날에 양풍이 외갓집이 잘살 때 종으로 있던 할아버지 집으로 지망(志望)하고 업고 나가니, 하마 그 종이 죽은 지 수년이 돼서 그 집터 찾아가니 쑥대밭이 됐드래. 으응. (……) 또 종을 쳤다. 이번에는 상당(上堂)에 있는 하인이 나와 어쩐 일로 이런 먼 지경에 와 어린 소녀가 그러나고 하니, 성은 양(梁)가요 이름은 풍(風)이와 녀(女)라고 했다. 엄마 찾아왔다고 하니, 잠깐만 있으라 하더니 안에 들어가 상감 있는 대 가서 십세 어린 동자, 소녀가 엄마 찾아왔다 하니, 데리고 오라 하여 들어가니, 고대광실 높은 의자에 앉아 있던 엄마, 버선발로 뛰어와, 양풍아 젖 먹고 싶어 어찌 살았느냐, 양녀야 손 아파 어찌 살았느냐, 하고, 이곳은 너희가 있을 대 아니라고, 양녀는 손목을, 싸놨던 걸 붙여주고, 너는 옥황상전 선녀 가고, 양풍이는 칼을 줘서 나라에 군사가 되어 좋은 사람 되라 했대. 그럼 양풍이가 받은 건 칼이구만.그래. 칼.그게 다야?거럼 다지.또 없어?머? 우터하라고? 마카 잘 먹고 잘 살았다는대. ● 출전 :『묵호를 아는가』, 문학동네 2001 ● 작가 : 심상대- 1960년 강릉에서 태어나 1990년『세계의 문학』에 소설을 발표하며 등단.‘마르시아스 심’이라는 필명을 한동안 사용하기도 함. 소설『묵호를 아는가』『명옥헌』『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덟 편의 소설』『떨림』『심미주의자』등이 있으며, 제46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함. ● 낭독- 심상대 염혜란: 연극배우. 연극<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차력사와 아코디언> <장군슈퍼> <반성> 등에 출연함. 소설의 어머니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소설의 젊은 목소리가 계모니 칼이 어쩌느니 저쩌느니 따지는군요. 어머니는 모르는 척 하며 너그럽게 아들을 끌어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소설보다 훨씬 중독성이 높겠군요. 생명력 역시 길 것이고요. 마지막 부분에서
작성일 2008-04-24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7 조회수 17700상세보기 -
문장배달 정이현 -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 중에서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작품 출처 : 김애란 소설집 , 『바깥은 여름』, 79-81쪽, 문학동네, 2017년. 김애란 │ 「노찬성과 에반」을 배달하며… 이 작품을, 고통과 선택 그리고 상실에 대한 소설이라고 읽는 것은 어떨까요. 찬성은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소년입니다. 소년이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 옆 화단에 묶인 늙은 개를 발견했을 때, 저는 외로운 존재 둘이 서로를 알아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를 에반이라고 부를 때, 이제 소년이 조금 덜 외로워지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에반은 큰 병에 걸립니다. 소년은 에반의 지독한 고통을 없애주려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를 안락사 시키기 위해 돈을 모읍니다. 소년의 그 슬픈 목표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소설이 마지막을 향해 치달아갈수록, 읽는 이는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작고 허약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어두운 고속도로 옆 갓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소년의 마지막 뒷모습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소설가 정이현 ⓒ 이상엽 문학집배원 문장배달 정이현 - 정이현 소설가는 1972년 서울 출생으로 성신여대 정외과 졸업, 동대학원 여성학과 수료,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말하자면 좋은 사람』『상냥한 폭력의 시대』 등이 있다.
작성일 2017-08-0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206상세보기 -
문장배달 윤후명「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윤후명「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다음 과제는 그림 보고 느낌 말하기였다. 의사는 가방 속에서 다른 책자를 꺼내 이쪽저쪽 펼쳐보였다. 그것은 아무런 구체적 형상도 아닌 부정형의 형상으로서, 말하자면 제멋대로 된, 그림 아닌 그림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의사 역시 이건 정답은 없는 거라고 안심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박쥐……나비……골반……바다 속……사원…….” 나는 그야말로 느낌을 말하려고 애썼다. 정답이 없다고 했어도, 아니 정답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 어려운 문제였다. 정답이 있었다면 모른다고 해도 그만일 텐데 어쨌든 무엇인가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임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하나하나 말할 때마다 의사는 무엇인가 차트에 꼬박꼬박 적어넣는 것이었다. 의사가 적어넣는 것을 보며 나는 그가 내 존재의 비밀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기분 나쁜 느낌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몇 개의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말하고 하는 동안 나는 마치 산 채로 회를 떠 살이 다 발라내지고 앙상한 뼈만 남은 생선 꼴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거제도에 갔을 때 낚시꾼 사내가 갓 잡은 물고기를 회를 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살은 말끔히 발라내고 머리와 꼬리와 뼈만 남은 것을 사내는 바위 밑 바닷물에 휙 던져버렸다. 거기까지는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재미있게 보았었다. 그와 함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 뼈만 남은 물고기가 꼬리지느러미만을 부지런히 양옆으로 움직여 저쪽 물 가운데로 도망쳐 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낚시꾼 사내도 어 저 놈 봐라 하면서, 허허허 어이없는 웃음을 내게로 날렸다. 나는 마지못해 따라 웃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기어코 내가 못 볼 것을 보았구나 하고 낙담하고 있는 모습을 그에게 보이기 싫어서 웃어준 웃음이었다. ● 출전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 1990~1996』, 현대문학사 2008 ● 작가 - 윤후명 :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67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가, 1979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작품으로「둔황의 사랑」「부활하는 새」「여우 사냥」「약속 없는 세대「삼국유사 읽는 호텔」등이 있으며, 녹원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수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이영석: 연극배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유령> <달빛 멜로디>, 영화 <라디오스타> <선생 김봉두> <시간> 등에 출연. 뼈만 남은 물고기는 어디로 갔을까요? 혹시 친구들이 알아봐 주었을까요? 친구들은
작성일 2008-04-10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6 조회수 12229상세보기 -
문장배달 파블로 네루다 「추억」
파블로 네루다 「추억」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오마르 비뇰레라는 괴벽스러운 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비뇰레씨는 아르헨티나의 농경학자였는데, 떨어질 수 없는 친구인 암소를 끌고 다녔다.(…) 그 당시 그는 <암소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암소와 나> 등등의 괴상한 책을 출판하였다. 국제 펜클럽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첫 대회를 열었을 때, 빅토리아 오캄포를 비롯한 작가들은 비뇰레가 암소를 끌고 나타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경찰에 경호를 요청, 회의가 열리고 있는 플라자호텔 주변의 거리를 차단하여 이 엉뚱한 사람이 자기 친구를 호화스러운 장소에 끌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축제가 한창 열이 올라 작가들이 그리스 고전문학의 세계와 그 현대적 의미를 토론하고 있을 때, 이 위대한 비뇰레가 돌연히 암소를 끌고 나타나 그 소가 토론에 참여하고 싶은 듯이 음매 하고 울어젖히자 모든 것이 끝장났다. 그는 암소를 거대한 수하물 마차에 몰래 싣고 도심에 들어옴으로써 경찰의 경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또 한번은 비뇰레가 레슬링 선수에게 도전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프로선수에게 호언장담을 하고 시합하는 날, 정시에 루나 공원에 소를 몰고 도착했다. 소를 구석에 매어두고 요란스러운 윗도리를 벗고 캘커다 스트랭글러와 대전했다.(…)직업적인 레슬러는 비뇰레에게 느닷없이 덮쳐 순식간에 시합장 바닥에 그를 때려 눕히고 한 발로 문학계의 황소의 목을 찍어 눌렀다. 둘러싼 군중은 시합을 계속하라고 휘파람과 야유를 퍼부어댔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비뇰레가 신간서적을 하나 냈다. 제목은 <암소와의 대화>. 나는 그 첫 페이지에 나와 있던 독특한 헌사(獻辭)를 잊을 수가 없다. 기억하는 대로는 ‘이 명상적인 작품을 2월24일 밤 루나 공원에서 내 피를 요구하며 울부짖던 4만 마리의 개새끼들에게 바친다’라는 것이었다. ● 출전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 1990~1996』, 현대문학사 2008 ● 작가 - 파블로 네루다: Neruda(1904~1973). 칠레의 시인이며 외교관.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0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함. 작품으로『지상의 거처』『모든 이들의 노래』1971년 노벨문학상 받음. ● 낭독- 전국환: 연극배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아큐정전> <말광량이 길들이기>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기 전, 저는 서울 신림동의 헌책방에서 네루다의 자서전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미완으로 끝난 그 자서전을 덮으면서 저는 이 시인이 제 인생에서 아궁이와 등대 속의 불꽃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치열하고 낙천적으로 살며 곳곳에 이야기를 만들어 뿌리고 또한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방랑자로서. 그의
작성일 2008-04-17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11542상세보기 -
문장배달 김애란「나는 편의점에 간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 큐마트에 다니면서 내가 한 가장 큰 착각은 푸른 조끼의 청년과 사적인 말을 하지 않으므로 내 사생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내가 아는 한 큐마트는 ‘어서 오세요’와 ‘감사합니다’의 세계였다. 그의 관심은 그가 파는 물건에, 나의 관심은 내가 사는 물건에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큐마트를 오래 다니다보니 나는 뜻밖에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내 정보들이 매일매일 그가 들고 있는 바코드 검색기에 찍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그는 나의 식성을 안다. 대여섯 종류의 생수 중 내가 어떤 물을 가장 좋아하는지, 자주 사가는 요구르트가 딸기맛인지 사과맛인지, 흑미밥과 쌀밥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는지 등을 말이다. 원한다면 그는 내 방의 크기도 추측할 수 있다. 쓰레기봉투를 매번 10리터를 사가는 나는 결코 큰 방에 살고 있을 리 없다. 그는 나의 가족관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벽마다 와서 햇반을 사가는 여자, 필수품을 스스로 사는 어린 여자, 젓가락은 한개만 가져가는 그 여자는 독신이리라. 그는 나의 고향을 안다. 편의점에 겨울옷을 정리한 택배를 부치러 갔을 때, 그는 수수료를 받으며 내 주소를 확인했다. (……) 그는 나의 식생활에서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고’ 있다. 왜냐하면 편의점이란 모든 걸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큐마트는 나의 가장 오랜 단골이 된 덕에, 청년은 내게 단 한마디의 사적인 대화를 걸지 않고도, 나에 대해 그 어떤 편의점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나의 습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사이 그곳에선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큐마트의 푸른 조끼의 청년이 몇번 바뀌었으나 그곳의 남자들은 항상 푸른 조끼를 입고 있으므로 상관없다. 몇번 더 휴대폰을 충전하러 갔으나, 사장들은 충전기를 없애고, 일회용 배터리를 들여놓았다. 몇번의 폭설이, 장마가, 안개가 있었으나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므로 상관없다. 이따금 ‘말’이 듣고 싶을 때 당신은 수다쟁이 사장이 있는 세븐일레븐으로 가라. 비디오방에서 서로를 안았던 어린 연인을 퇴학시킨 선생은 컵라면을 사 먹고, 아이를 지우게 한 남자는 목이 말라 맥주를 사러 왔고, 아직도 아버지께 꾸중 듣는 백수 청년은 오늘도 담배가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이 기록은 마침내 시시해진다. 
작성일 2007-08-30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4 조회수 11085상세보기 -
문장배달 흥부전「놀부 심술보」
흥부전「놀부 심술보」 이 놀부의 심술을 보면 다른 사람은 오장육부지만 놀부는 오장칠부였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니 큰 장기 주머니만한 심술보 하나가 곁간 옆에 붙어서 심술보가 한번만 뒤집히면 심사를 피우는데 썩 야단스럽게 피웠다. 술 잘 먹고 욕 잘하고 게으르고 싸움 잘하고 초상난 데 춤추기,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 해산한 집에 개 잡기, 장에 가면 억지 흥정, 우는 아이 똥 먹이기, 무죄한 놈 뺨치기와 빚값에 계집 빼앗기, 늙은 영감 덜미 잡기, 아이 밴 아낙네 배 차기, 우물 밑에 똥 누기, 올벼 논에 물 터놓기, 잦힌 밥에 흙 퍼붓기, 패는 곡식 이삭 빼기, 논두렁에 구멍 뚫기, 애호박에 말뚝 박기, 곱사등이 엎어 놓고 밟아 주기, 똥누는 놈 주저앉히기, 앉은뱅이 턱살 치기, 옹기 장사 작대 치기, 면례하는 데 뼈 감추기, 잠자는 내외에게 소리지르기, 수절 과부 겁탈하기, 통혼에 방해하기, 만경창파에 배 밑 뚫기, 목욕하는 데 흙 뿌리기, 담 붙은 놈 코침 주기, 눈 앓는 놈 고춧가루 넣기, 이 앓는 놈 뺨치기, 어린아이 꼬집기, 다된 흥정 깨놓기, 중놈 보면 대테 메기, 남의 제사에 닭 울리기, 한길에 구멍 파기, 비오는 날 장독 열기라. ● 출전 :『흥부전·심청전』, 하서출판사 2004 ● 낭독- 최석규: 연극배우. 연극 <오월의 신부> <산양섬의 범죄> <착한사람 조양규> 등에 출연. 심술을 부리는 법이 지금과는 차이가 있군요. 지금은 ‘옹기 장사 작대 치기’는 시도해 보려고 해도(어떤 판소리 대본에는 “옹기 짐 받쳐놓으면 가만 가만 가만 가만 가만 가만 가만히 찾아가서 작대기 걷어차기”로 자세히 되어 있습니다만) 옹기를 지게에 얹어 다니고 다니는 장수를 볼 수가 없으니까요. 어찌됐든 심술이 그 시대를 담는 살아 있는 액자 가운데 하나라는 건 알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흥미로운 것으로.어찌 보면 놀부 심술은 귀여운 데가 있는데 그게 흘러간 것이고 이야기 속에 있어 멀게 느껴져서 그렇까요. 참고 하기 위해 읽던 판소리 대본에서 ‘물통 이고 오는 부인 귀 잡고 입 맞추기’에서는 아련한 향수마저 느꼈습니다. 물론 ‘물통을 이고 오는 부인’까지만. 2008. 3. 27. 문학집배원 성석제
작성일 2008-03-27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10842상세보기 -
문장배달 루쉰「아Q정전」
루쉰「아Q정전」 어느 해 봄 그는 얼큰히 취한 채 길을 가다가 담장 아래 양지바른 곳에서 털보 왕씨가 웃통을 벗어젖히고 이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갑자기 자기 몸도 가려워지는 느낌이었다. 털보 왕씨는 아Q처럼 백대머리 부스럼, 즉 나두창이 있고 수염도 덥수룩해서 사람들은 “왕라이후[王癩?](대머리 부스럼 털보 왕씨)라고 불렀는데 아Q는 거기서 나두창의 ‘라이(癩)’ 자만 빼고 부르며 그를 몹시 경멸했다. (…) 아Q는 그자 옆자리에 앉았다. (…) 아Q도 낡은 겹저고리를 벗고 뒤집어서 검사해보았다. 새로 빨아서인지, 아니면 꼼꼼하질 못해서인지 한참 시간을 들여 이를 겨우 서너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왕털보를 보니, 한 마리, 또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연달아 입에 넣고 툭툭 깨물어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맥이 빠져 있던 아Q가 나중에는 슬슬 화가 났다. 같잖은 왕털보도 저렇게 많은데 자신은 이렇게 적다니, 이런 체통 안 서는 일이 있나! 그는 큰 놈을 한두 마리 찾아내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 그는 부스럼 자국 하나하나가 다 시뻘게져서는 옷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침을 탁 뱉고 말했다. “이런 털벌레 같은 놈!” “털 빠진 개새끼, 누굴 욕하는 거냐?” 왕 털보가 경멸하듯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 “누군 누구야, 그렇게 대답하는 놈이지!” 아Q는 일어서서 두 손을 허리춤에 대고 말했다. “너 맞구 싶어 뼈다귀가 근질근질하냐?” 왕 털보도 일어서서 옷을 걸치며 말했다. 아Q는 그가 도망가려는 줄 알고 주먹을 한 대 날렸지만 그 주먹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상대방에게 벌써 붙들렸다. 왕 털보가 한 번 잡아당기자 아Q는 비틀비틀 끌려가더니 금방 그에게 변발을 휘어잡혔다. 그러고는 담벼락으로 끌려가 늘 당하던 대로 이제 그 위에다 머리통을 짓찧게 생겼다. “君子動口不動手(군자동구부동수 : 군자는 말로 이르되 손을 쓰지 않느니라 - 역주)!” 아Q는 머리를 비틀며 말했지만 왕 털보는 군자가 아니었나 보다. 이 말에 아랑곳 않고 아Q의 머리를 다섯 번이나 짓찧고는 힘껏 밀쳐 버리더니, 아Q가 2미터가량 나가떨어지자 만족해하며 가버렸다. ● 출전 :『아Q정전 읽기의 즐거움』, 살림 2006 / 임명신 옮김 ● 작가 - 루쉰: (魯迅 : 1881~1936)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이자 근대중국어의 성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문호.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고 루쉰은 필명. 반제 반봉건 문학운동을 전개하면서 당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1백 가지 이상의 필명 가운데 하나가 루쉰.
작성일 2008-04-03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0148상세보기 -
문장배달 지하드 다르비슈「이슬람의 현자 나스레딘」
「이슬람의 현자 나스레딘」 지하드 다르비슈 나스레딘에게는 열세 살 난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아들은 늘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심해 집 밖으로 나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날 비웃을 거야.’ 그는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람들은 험담하길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들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아들은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스레딘이 아들에게 말했다. “내일 나와 함께 장에 가자꾸나.” 다음날 아침 아주 이른 시간에 그들은 집을 나섰다. 나스레딘 호자는 당나귀를 탔고, 그의 아들은 그 옆에서 걸었다. 시장 입구에 사람들이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스레딘과 아들을 본 그들은 마구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사람 좀 봐. 동정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군. 자기는 당나귀 등에 편히 앉아 가면서 불쌍한 아들은 걷게 하다니! 이미 인생을 누릴 만큼 누렸으니 아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러자 나스레딘이 아들에게 말했다. “잘 들었지? 내일도 나와 함께 시장에 오자꾸나.” 둘째 날, 나스레딘과 아들은 전날과는 반대로 했다. 이번에는 아들이 당나귀를 탔고 나스레딘이 그 옆에서 걸었다. 시장 입구에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스레딘 부자를 보자 그들이 외쳤다. “저 녀석 좀 보게. 버릇도, 예의도 없군. 당나귀 등에 유유히 앉아 불쌍한 노인네를 걷게 만들다니!” 그러자 나스레딘이 아들에게 말했다. “잘 들었지? 내일도 나와 함께 시장에 오자꾸나.” 셋째 날, 나스레딘 부자는 당나귀를 끌며 걸어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시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비웃었다. “저런 멍청한 사람들을 봤나! 멀쩡한 당나귀가 있으면서도 타지 않고 걸어다니다니. 당나귀는 사람 타라고 있다는 것도 모르나봐.” 그러자 나스레딘이 아들에게 말했다. “잘 들었지? 내일도 나와 함께 시장에 오자꾸나.” 넷째 날, 나스레딘 부자는 둘 다 당나귀 등에 걸터앉아 집을 나섰다. 시장 입구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야유를 보냈다. “저 사람들 좀 봐. 저 가엾은 짐승이 조금도 불쌍하지 않은 모양이군!” 그러자 나스레딘이 아들에게 말했다. “잘 들었지? 내일도 나와 함께 시장에 오자꾸나.” 다섯째 날, 나스레딘 부자는 당나귀를 어깨에 짊어지고 시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l
작성일 2009-04-23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5 조회수 9312상세보기 -
문장배달 성석제「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성석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에는 웃음소리를 직접 인용한, 형용한 대목이 적다. 특히 진지하고 정통에 가까운 소설일수록. 그나마 자주 나오는 것은 미소. 미소 짓다, 미소를 흘리다, 미소하다, 소리없이 웃음 짓다, 웃음을 머금다, 빙그레 웃음 짓다 등으로 아까울 것도 없는 웃음소리를 아끼고 있다.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점잖지 못하다고 여겨서인가. 그래서 감정 표현에는 점잖은 소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솔직한 만화를 대상으로 웃음소리를 찾아보았다. 웃음소리가 가장 많은 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1_숨을 모아 한꺼번에 내보내는 소리에 가장 가까운 ㅎ자음에 다섯 모음을 결합한 형태. 빈도수가 가장 높다. 하하, 허허, 헤헤, 호호, 후후, 흐흐, 히히. 2_1의 경우에 ㅅ을 결합, 강조한 것. 핫핫핫, 헛헛헛, 헷헷헷, 호호홋, 후훗, 흣흣, 힛힛힛. 3_1의 경우에 웃음에 충분한 숨을 만들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웃음소리를 형용한 것. 목적이 있는, 억지웃음에도 쓴다. 아하하, 으하하, 와하하, 어허허, 에헤헤, 우후후, 으흐흐, 이히히. 4_파열음 ㅋ, ㅍ을 ㅎ 대용으로 쓰고 있는 경우. 카(크)하하, 크카카, 카카카, 크크크, 파하하, 푸(프)하하, 푸후후. 5_몇몇 작가만이 쓰고 있는 경우. 우후훙, 후아, 헐헐헐, ㅎㅎㅎ, ㅍㅍㅍ. 6_헛웃음, 냉소. 피식, 픽, 푸시시, 피시식. 7_실제로는 들을 수 없으나 문자로는 쓰는 경우. 깔깔깔, 낄낄낄, 끄끄, 깰깰깰, 킬킬 8_위의 경우를 모두 이용하여 만든 간단한 소극(따라 읽는 것이 효과가 큼). 하하……허허……헤헤……후후……흐흐……히히……핫핫핫……헛헛헛……호호홋……후훗……흣흣……힛힛힛……아하하……으하하……와하하……어허허……에헤헤……우후후……으흐흐……이히히……우후훙……헐헐헐……푸하하……푸후후……ㅎㅎㅎ……ㅍㅍㅍ……피식……픽……푸시시……피시식. 9_응용
작성일 2009-03-19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9 조회수 9179상세보기 -
문장배달 강신재「젊은 느티나무」
강신재「젊은 느티나무」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 그가 이삼 미터의 거리까지 와서 멈추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저절로 그편으로 내달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젊은 느티나무 둥치를 붙든 것이었다. “그래, 숙희, 그 나무를 놓지 말어. 놓지 말고 내 말을 들어.” 그는 자기도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말하였다. 그 얼굴에는 무언지 참담한 것이 있었다. (…) 그는 부르쥔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말 알아 주겠어, 숙희?” 나는 눈물을 그득 담고 끄덕여 보였다. 내 삶은 끝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겠지? 내일이건 모레건 되도록 속히…….” 나는 또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 그럼.” 그는 억지로처럼 조금 미소하였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산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 출전 :『젊은 느티나무』, 1994 소담출판사 ● 작가 - 강신재 :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49년『문예』에 소설을 발표하며 등단. 소설『임진강의 민들레』『오늘과 내일』『파도』등이 있으며, 한국문학가 협회상, 여류문학상, 중앙문화대상, 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1년 5월 작고함. ● 낭독 - 정인겸 : 배우. 연극 <보이첵> <호텔 피닉스에서 잠들고 싶다> <관객모독> <살색안개> 등에 출연. 박유밀 : 배우. <연극열전 불좀 꺼주세요>
작성일 2008-01-31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9123상세보기 -
문장배달 황순원「별」
황순원「별」 누이는 시내 어떤 실업가의 막내아들이라는 작달막한 키에 얼굴이 검푸른, 누이의 한반 동무의 오빠라는 청년과는 비슷도 안한 남자와 아무 불평 없이 혼약을 맺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결혼하는 날, 누이는 가마 앞에서 의붓어머니의 팔을 붙잡고는 무던히나 슬프게 울었다. 아이는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누이는 동네 아낙네들이 떼어놓는 대로 가마에 오르기 전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자기를 찾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는 그냥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누이가 시집간 지 또 얼마 안 되는 어느 날, 별나게 빨간 놀이 진 늦저녁때 아이네는 누이의 부고를 받았다. 아이는 언뜻 누이의 얼굴을 생각해내려 하였으나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 도로 골목을 나오는데 전처럼 당나귀가 매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러나 전처럼 당나귀가 아이를 차지는 않았다. 아이는 달구지채에 올라서지도 않고 전보다 쉽사리 당나귀 등에 올라탔다. 당나귀가 전처럼 제 꼬리를 물려는 듯이 돌다가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는 당나귀에게나처럼, 우리 뉠 왜 쥑엔! 왜 쥑엔! 하고 소리질렀다. 당나귀가 더 날뛰었다. 당나귀가 더 날뛸수록 아이의, 왜 쥑엔! 왜 쥑엔! 하는 지름 소리가 더 커갔다. 그러다가 아이는 문득 골목 밖에서 누이의, 데런! 하는 부르짖음을 들은 거로 착각하면서, 부러 당나귀 등에서 떨어져 굴렀다. 이번에는 어느 쪽 다리도 삐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그제야 눈물이 괴었다. 어느새 어두워지는 하늘에 별이 돋아났다가 눈물 괸 아이의 눈에 내려왔다. ● 출전 :『20세기 한국소설 』10권, 창비 ● 작가 : 황순원- 1915년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1931년『동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방가』『골동품』, 소설 『늪』『카인의 후예』「목넘이 마을의 개」「독 짖는 늙은이」등이 있으며, 자유문학상, 대학민국문학상, 아시아자유문학상, 국민훈장동백장 등을 수상함. ● 낭독 : 이경선- 배우. 연극 <윤동주> <아마데우스> <세자매> <더블린 캐롤> 등에 출연.윤상화- 배우. 연극 <발자국 안에서> <천년전쟁> <관객모독> <돼지사냥> 등에 출연. 어째서 세상의 착한 누이들은 처녀 때 자신을 좋아하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작달막한 키에 얼굴이 검푸르고 부잣집 막내 아들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일까요. 어째서 누이가 시집 가는 날,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남동생은 누이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몸을 숨기는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라고 말하려다 보니 지금은 시집을 가기보다는 결혼을 하는군요. 동생들은 양복을 하나씩 얻어입고 ‘웨딩타운’ 인근
작성일 2007-12-06 작성자 웹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8963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