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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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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9건

하혁진 문학평론

계간 청색종이 2024년 가을호(제13호)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 임지은, 고선경, 송정원, 구윤재의 시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자명한 진리이지만, 그러한 왕래를 실감하는 것은 각자에게 개별적인 사건입니다. 완연한 가을이 되어서야 여름의 시들을 펼칩니다. 계절과 계절사이, 안녕하신가요. 생각해보면 지난여름은 무척이나 덥고 길었습니다. 발바닥이 녹아 시간에 달라붙은 것처럼 끈적끈적 느리고 더디게 흘렀습니다. 높은 기온과 습도의 날씨가 계속된 탓도 있지만, 꼭 ...

하혁진 문학평론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 ― 함윤이론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 —함윤이론1) 함윤이의 소설은 죄책감이라는 입구로 들어가 우정이라는 출구로 나오는 신비한 미로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입구와 출구를 유려하게 연결하는, 모호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알게 된다. ‘타자와의 연결’이 그 조건이라는 점에서 죄책감과 우정은 꽤 닮아 있다는 것을. 요컨대 함윤이의 소설에서 죄책감이라...

하혁진 문학평론

계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제119호)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 — 영매가 된 주체들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렸지만 영혼을 얻었다. —티머시 모턴, 『하이퍼객체』 멸망이라는 디폴트 멸망할 것이다. 이것은 지독한 저주도, 도저한 비관과 냉소도 아니다. 몇 년 전 박쥐와 천산갑을 비롯한 동물들이 선언했듯 인류가 갈 길이 비로소 정해졌을 뿐이다. 푸른 별의 주인이라 자만했던 인류가 “절멸의 재료”라는 사실이 이제야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하혁진 문학평론

포지션 2024년 가을호(제47호)

무척 뜨거운 것을 쥐고 있었군요 ― 차도하 『미래의 손』(봄날의책, 2023)

이것저것 쓰다 결국 편지를 씁니다. 어색한 편지입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를 모르는 편지니까요. 작년 10월, 소설가인 친구가 자신의 소설집 제목은 한 시인의 문장을 빌려서 지은 것인데1), 그 시인이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기에, 그랬구나, 마음이 좋지 않겠구나, 했던 것이 제가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한 바퀴의...

하혁진 문학평론

포지션 2024년 가을호(제47호)

일상의 전개도― 임승유 『생명력 전개』(문학동네, 2024)

전개도(展開圖, development figure)는 3차원의 입체도형을 2차원의 평면 위에 펼쳐놓은 그림이다. 예컨대 정육면체를 전개도로 표현하면 여섯 개의 정사각형이 십자가 모양을 그리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똑같은 입체도형을 서로 다른 전개도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인데1), 이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입체도형이 점과 선의 연결, ...

하혁진 문학평론

포지션 2024년 여름호(제46호)

내가 없는 곳에 나는 있다 ―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

동방정교회의 사상에서 엿볼 수 있는 부정신학(不定神學)은 신에 대한 앎은 적극적인 규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신은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존재이기에, 인간이 내리는 어떠한 규정도 신을 올바르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부정신학이 무신론이나 반신론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부정신학은 신은 ‘~이 아니다’라고 부정해...

하혁진 문학평론

포지션 2024년 여름호(제46호)

현상되지 않은 필름 ― 한영원 『코다크롬』(봄날의책, 2023)

시인과 촌장의 세 번째 앨범인 《숲》(1988)에는 〈가시나무〉라는 제목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유명한 노랫말로 시작되는 바로 그 노래다. 노래는 종, 피아노, 바람 소리로 이루어진 절제된 선율을 타고 흐르며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라는 노랫말로 이어진다. 이때 가사 속 ‘나’...

하혁진 문학평론

포지션 2024년 봄호(제45호)

발코니의 항해사 ― 박세미 『오늘 사회 발코니』(문학과지성사, 2023)

박세미의 두 번째 시집은 아슬아슬하다. 매일의 일상이 전쟁인 탓이다. 예컨대 첫 시의 첫 장면, “안전해지려고 / 들어오는 열차의 머리에 다리를 내민다”(「생활 전선」)는 문장부터 위태롭다. 확실히 ‘안전’이라는 단어와 달리는 열차에 다리를 내미는 행위는 모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매일 아침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출근길 열차에 오르는 장면은...

하혁진 문학평론

포지션 2024년 봄호(제45호)

부드러운 오믈렛 안에는 ― 임유영 『오믈렛』(문학동네, 2023)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 세 번의 시도 끝에 자살에 ‘성공’했다. 누나의 죽음과 어머니의 정신이상으로 어두운 유년기를 보냈던 류노스케는 한평생 죽음과 광기에 대한 공포를 떨칠 수 없었고, 그로 인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라는 문장이 적힌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