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2024년 봄호(제118호)
촛불 이후의 정치라는 단상斷想·單相·壇上
민주주의는 최악을 피하는 제도라던데 지금은 왜 이럴까
십 년 전 세월호 참사는 사회적 재난일 뿐만 아니라, 사회야말로 재난에 처해 있음을 체감케 했다. 언제 죽도록 내팽개쳐질지 모르는 나라에 살고 있다 는 충격은,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국가에 대한 분노를 동시에 일으켰다. 사회적 안전망이 이토록 무너지게 만든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진상 규명을 요구 하는 뜨거운 목소리가 촛불 항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 한 ‘최종 책임자’를 국민이 파면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은 지 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이태원 참사가, 오송 참사가 일어났고, 국민에 의해 선출된 최종 책임 자는 진상 규명은커녕 국민에 대한 사과조차 거부하고 있다. 그런 윤석열 대통 령이 취임 이후 처음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때문이었다. 국민을 살리는 것보다 국토종합개발이 정치의 최우선인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년 가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그동안의 일을 집약해주는 상징 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공직자로서 기밀을 유출하여 ‘조국 사태’를 촉발한 김태 우 전 구청장의 궐위 때문에 치러진 선거에서 검찰 출신 윤석열 대통령은 그를 사면 복권하여 직접 후보로 내세웠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경찰 간부 출신인 진교훈 후보를 지명했다. ‘정치 검찰’의 독재에 맞서 치안-행정 전문가를 내세우는 구도 속에서, 더 나은 정치는 국민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치안-행정으로 상상 된다. 1) 한국사회는 다시 ‘개발독재’와 ‘국민을 살리는 치안’ 사이의 대결에 머무 는 것일까? 촛불 항쟁이 요구했던 것은 단순히 전문가/엘리트 집단의 교체나 법 제를 유지/보완하는 개혁보다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갱신하라 는 근본적 문제 제기에 더 가깝지 않았던가.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그 결정적인 가능성이 폐제된 계기를 지난 21 대 총선 전 선거제 개혁 시도로 기억한다.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지탱하는 승자 독식 제도를 개선하고, 지역 유지 출신 정치인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를 벗어나 대안 정당을 향한 투표를 반영할 수 있도록 비례대표를 확충하는 것이 민주당이 내건 개혁의 요체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은 개혁의 흉내만 내다가 그마저도 자유한국당을 따라 만든 위성 정당이라는 꼼수로 형해화하고 말았다. 우선은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면서. 물론 그 나중은 도래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겨 최대 의석을 확보한 후로 얼마큼의 진보가 있었던가 되짚지 않을 수 없다. 자기 혁신을 멈추는 순간 진보라는 명명은 이름값을 할 수 없다. 의미 론적 관성 에너지로 남은 개혁은 그 목표가 자신이 되어야 할 때를 인정하지 않 는다. 끊임없이 ‘외부의 커다란 적’을 강조하는 이분법에 의존해, 자신이 적을 상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주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위치를 가까 스로 연장할 뿐이다. 그리하여 현행 제도 속에서 그 인적 구성을 전환하는 정도 가 최선의 정치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촛불 항쟁은 주권재민의 대의제적 원칙을 확인하는 공화주 의 회복 운동으로 한정된 셈이다. 이는 민주당 지도부와 주류 586 세대의 관성 이 더 많은 정치의 가능성을 제한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민주당은 기득권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통치 집단의 인적 교체에만 대부분의 역량을 쏟 았을 뿐이다. 국민을 살려야 하는 치안의 대상으로 여길 뿐 국민과 권력을 나누 려 하지 않았다. 아니, 삶과 권력의 형식 자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하지 않았다. 거대 양당의 위성 정당 창당이 예고된 이번 총선도 구도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촛불 항쟁의 함성이,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 촛불과 노란 포 스트잇을 집어든 시민들의 목소리가, 퀴어 청년과 여성 노동자와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기후 위기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기성 정치에 담기기는 여전히 요원해 보 인다. 통치 권력의 인적 교체를 넘어 권력·제도 자체의 갱신을 더 꿈꿀 때, 그 과정 안에서 비로소 민주주의가 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갱신의 요청은 (인) 문학장에도 마찬가지여야만 한다.
촛불의 역사적 단계와 ‘나중에’ 정권
백낙청의 「2023년에 할 일들—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2) 는 그 글이 실린 『창작과비평』 해당 호의 특집 ‘위기의 한국, 무엇을 해야 하나’의 기획안처럼 보 인다. 이 글은 “촛불 혁명이 진행중이라고 자랑하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물으며 “나라의 주인이신 시민 여러분”(16쪽)의 반성을 호소한다. 특히 보수 진영으로의 정권교체의 원인인 동시에 민주당의 재집권을 위한 방법으로 서 시민의식에 주목하여 “문재인 정부가 해낸 것이 적지 않은데도 촛불 정부를 자임했었기에 제대로 못한 부분으로 인한 시민들의 분노는 통상적인 수준을 훨 씬 넘었습니다. 반면에 촛불 정부가 한번 더 들어서면 자기네는 끝장이라는 기 득권 집단의 절박감도 남달랐습니다”(같은 쪽)라고 정권교체의 인과를 분석한 다. “기득권 집단의 절박감”에 비해 “민주당의 절박감이 태부족”(17쪽)이긴 했다 는 표면적 겸양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높은 정치적 요구치를 만족시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은근한 억울함 속에서 내부 책임자도 지목된다. “촛불 시민들의 열정으로 2기 촛불 정부를 꿈꾸는 대선 후보가 선출되었지만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만 생각했”(같은 쪽)다. 촛불 시민을 계승한 이재명 대선후보를 중심으로 뭉쳐야 하는데 내부의 농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후보가 무능하고 무개념이면 어떠냐, 당장에 유권자를 속이는 데 가장 유리한 인물이라면 ‘악마면 어떠냐’는 것이 그들의 공감”이었고 “레거시 언론”(18쪽)과 그들이 유착하여 “침묵의 카르텔”(19쪽)이 형성되었기에 시민들은 (정치적인 결정 을 했다기보다는) 속아넘어갔다.
한국사회의 위기가 (악마로 묘사되는) 보수 진영 카르텔과 진보 진영 내부 의 배신/순진함 때문이라는 레토릭은 사실 방향만 바꾸어 반복되는 기성 정치 의 흔한 이분법적 음모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권자의 선택의 의미를 악한 세력에 의한 피해로 축소하고 ‘적’의 위력을 강조함으로써 민주당은 대의에는 부 합하나 현실에서 힘은 부족한, 연민받아 마땅한 피해자의 위치에 선다. 586 세 대와 민주당 정권이 이미 한국사회 기득권의 일부라는 점은 적극적으로 은폐되 고, 억울하게 억압받았으나 끝내 승리할 미래의 주역으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이 글의 후반부는 ‘추가적 단상 몇 개’라는 소제목으로 기후 위기와 성평 등, 평화의 문제를 덧붙여 다룬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논의와 연마가 부족했던 점도 촛불 혁명의 원활한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문제 의식”(24쪽)은 매우 적실하지만, 기획과 구성에서 볼 수 있듯 이 문제들은 부가 적인 차원에 할당되어 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점점 실감되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너무 국내 정치 에 열중한다는 비판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더 넓은 세상의 큰일들도 당연히 생 각해야지요. (……) 아무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 실을 젖혀두고 벌이는 거대 담론이나 거시적 전망은 한담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일은 한국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현존 세 계체제로서도 관건적 사안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핵심적 일부 이자 약한 고리거든요. 따라서 촛불 혁명은 기존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작업이 며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입니다.(22쪽)
정권교체가 최우선 과제라는 확신은 분단에 대한 기묘한 ‘특권 의식’과 연동된다. (유일한 분단 민족으로서 냉전체제를 대표한다는 자의식과 별개로 여러 분 단 민족 중 하나이기도 한) 가자-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민족주의적 권위주의 정부의 전쟁 및 인도적 위기, 후쿠시마와 지구온난화 같은 핵에너지 기후 위기가 상수가 된 지금, 한반도의 민족 분단이 유독/여전히 지금의 ‘세계체 제’를 체현하는 상징적 우위에 있다는 데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물론 한반도 분단이 냉전에서 중요했다는 점이나 군사주의적 체제가 여전히 강고하다는 점 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민주당으로의 집권 세력 교체가 곧바로 세 계체제의 핵심 변수이자 변인이라는 확신은 기묘하다. 이렇듯 범세계적 반군사 주의 운동보다는 강대국/기득권의 음모를 이겨낼 한반도의 민족국가 설립으로 과제를 한정, 선별하는 소명의식은 분단·전쟁문학, 냉전 담론으로 한국 (인)문 학이 세계시장에서 독특한 상품성을 지녔던 (한국학 1세대로 흔히 통칭되던) 시대의 세계화/탈식민주의/근대화 욕망을 환기하는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산업화-독재 세대에 대한 신자유주의-민주화 세대의 집권 투쟁 이 핵심 과제로 (아직도) 설정되면서, 진보/보수 지지층이 세대와 젠더를 교차해 서 나타나고 있는 현재의 구도와는 별개로 이분법에 의존한 정치가 다시 소환 된다. 이로써 ‘기성 진보’의 소명의식이 유지된다. 그래서 다른 긴급한 논의들은 정상 국가 건설 이후 자연스럽게 해소될 부차적인 ‘한담’이 되고, 그마저도 “성평 등보다 ‘음양의 조화’ 같은 좀 다른 차원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는”(26쪽) 이성애-재생산 중심주의적인 복고풍의 덕담으로 향한다. 평등이 “무조 건적 평등주의로는 달성될 수 없다고 할 때 ‘성차별이 사라진 평등 사회’ 구상에 나름의 새로운 개념과 호명 방식이 필요”(27쪽)하다는 제언은 지금껏 이미 치열 하게 논의·수행되어온 구상·실천들에 대해 사실 관심이 없다는 고백이자 이를 무력화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기성 정치(민주당)를 향한 ‘실사구시’로 대표되는 제언을 제외하면 대체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중용’의 반복에 가깝고, 현재 진행 되는 여러 인문사회학 논의를 거의 반영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팔십대 남성의 ‘단상’이라는 제약을 달긴 했지만, 오히려 그야말로 이 위기들이 나라다운 나라 를 건설한 ‘나중에’ 다룰 부차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단계론을 무람없이 제시하 기 위한 전제인 셈이다. 이러한 목적론적/국가주의적 역사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촛불 항쟁을 민족국가 건설 운동의 계보에 놓는 것이다.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촛불혁명 시대의 한반도」 3)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4) 등이 대표적인데, 「어떤」은 촛불 항쟁이 “기존의 혁명 개념에 미달함은 분명하 지만 우리는 교과서와 역사책에 없는 ‘분단 한국의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판 단해야 한다”(30쪽)고 공을 들여 강조하면서, 3·1운동이라는 민족 독립운동과 4·19혁명 이래의 민주화 운동의 사례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여러 민중운동의 성격을 구분하지 않고 민족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분단 한국의 특수 성’이 곧 현존 세계체제의 모순이 집약된 현장이자 ‘약한 고리’에 해당”(32쪽)한 다는 점 때문이다. 그에 따라 촛불 혁명이 남북 화해를 향한 강대국의 입장 변 화를 이끌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이어진다. 국가/민족을 역사의 기본 단위 로 하는 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약소국 한국’이 비로소 강대한 민족국가의 단계 에 들어섰느냐의 여부다. 근대 민족자결주의적 자유라는 선험적 절대정신의 실현 정도로 역사의 발전단계를 나누는 헤겔적 역사관 속에서 독립운동과 민주 화 운동 사이의 단속斷續과 그 주체 내부의 차이는 누락되고, 그 모두가 도래할 민족국가에 대한 자긍심의 증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촛불에 나타난 다양한 주 체들과 정치적 의제들, 그 성과와 한계는 모두 ‘한반도 나라 만들기’라는 절대정 신을 지휘할 수권 집단(민주당 지도층)의 유불리 문제로 흡수된다.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5)는 더 본격적으로 3·1운동의 실패가 촛 불 혁명으로 청산됐다는 도식을 설정한다. “한반도 근대의 나라 만들기는 단 계적으로 진행되어왔고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서 “국민국가의 형색을 상당 부 분 갖춘 두 개의 정부가 남과 북에 자리잡았지만 3·1이 요구한 의미의 ‘대한 독 립’ ‘조선 독립’에는 여전히”(307쪽) 미달하였으나, “촛불 항쟁으로 실현된 남한 의 정권교체가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으로 이어지고 한반도 전역에 걸친 민 중 역량의 비약적 증대를 이룬다면 이는 ‘혁명’의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 다”(319쪽). 이렇게 촛불은 민주당 정권에 의한 민족국가 건설의 사전 단계라는 ‘이성의 간지奸智’의 자기실현이 된다.
나아가 이 글은 “100년의 지체 끝에 실현되는 채무이행”으로서 촛불 혁 명이 보여준 “감수성의 확장”(319쪽)의 대표적 사례로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을 독해한다. 백낙청은 이 작품이 “1996년의 연세대 투쟁과 2014년의 세월호 참사 등을 2016~17년의 촛불 항쟁과 하나의 서사 속에 묶음으로써 촛불 혁명 이 대중의 누적된 학습의 결과”(같은 쪽)임을 보여준다면서, 『디디의 우산』의 마 지막 대목,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6)라는 소설가 화 자의 선언에서 ‘이렇게’의 내용 대신 민족국가 건설을 읽어낸다. “촛불 항쟁의 탄 핵 쟁취로 혁명이 ‘도래’했지만 혁명의 ‘완성’을 향한 긴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다 는 생각으로까지 나갈 대목이며, 한반도 체제의 변혁을 가져올 혁명의 진행에 따라 제도·정동·사유의 더욱 발본적인 변화를 전망하고 탐색할 대목”(같은 쪽) 이라는 것이다. 이는 촛불 혁명이 이룬 정권교체가 “낮은 단계의 남북 연합”이라 는 “한반도식 나라 만들기의 당면한 다음 단계”(321쪽)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론 으로 이어진다. 본격적인 문학평론이 아니기에 연세대 사태에서의 여성 혐오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여성 혐오를 연결하는 소설의 핵심적 구성에 대한 논 의를 누락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세월호 참사와 촛불 항쟁에 대한 문학적 재현을 민족국가 건설의 전 단계를 지향하는 민족의식으로 서둘러 흡수하는 서술 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 퀴어 청년 ‘나’가 일상 노동에서 겪는 폭력, 민주화 운동 에서 촛불 항쟁으로 이어지는 진보 담론/운동 안에서의 ‘악의 상투성’을 다룬 소설의 주제를 과소 독해하는 것은 촛불 항쟁 당시의 여러 의제와 실제 인과관 계를 거의 소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혁명운동이나 혁명관을 삐딱한 각 도에서 바라보”고 “혁명 개념을 재구성하도록 이끈”7) 소설이라는 한기욱의 평을 직접 인용하고도 이를 반대로 읽고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 운 착각”(『디디의 우산』, 306쪽)에 대한 소설적 발견에서 도리어 역사적 연속성/ 전체성을 강조하는 비평은 선험적·관념적 역사철학에 의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디디의 우산』은 촛불 항쟁이 타자의 고통과 정치에 대한 감수성을 확장하는 동시에 혁명을 혁명하는 잠재적 가능성이었음을 적실하게 성찰하고 관찰하는 소설이다. 특히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 록한다”에 이어 서술된 ‘이렇게’는 다음과 같다.
남자는 울지 않는 법이라며 구석에 숨어서 우는 아이를 말하고 그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며 살아야 하는지를 걱정하기도 하면서. 쌤 스미스의 커밍아웃 을 말하다가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해 회원들과 작은 언쟁을 벌이고 만 일을 말하 기도 하면서. 헌법재판소로 들어가는 재판관의 머리칼에 핑크색 헤어롤 두 개가 말려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으나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서 그 것에 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고.(317~318쪽)
‘나’는 광장의 혁명(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식탁에서 나누는 이야기 의 전환이 만들어내는 다른 혁명을 기록하자고 말한다. 탄핵을 앞두고 “동학농 민운동, 만민공동회운동, 4·19혁명과 87년 6월항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이겨 본 적 없는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고. 이 나라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최초로 승리 를 경험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314쪽) 자긍심을 표출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 고 ‘나’는 식탁에 머무른다. 정상 국가를 회복했다는 “승리와 완성의 축제” 속 에 서기보다는 “파도가 가고 남은 자리에 이 식탁이 남는 광경을 나는 생각해 본다”(315쪽). ‘광장’의 ‘민주 시민’ ‘민족/민중’이 여성, 퀴어, 청년, 비정규직, 비혼 돌봄 가정의 일상적 투쟁을 직간접적으로 배제/삭제함으로써 보편적 역사 를 구현해온 과정을 몸소 겪고 읽었기 때문이다. 촛불 혁명의 과정을 전후하여 겪은 퀴어 페미니즘적 결절점들에 주목하여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이야기를 만 들고자 하는 황정은에게 촛불은 일상의 통치성을 전복하고 혁명을 갱신하는 이 야기로 “이제 모두를 깨울 시간”(같은 쪽)이었다. 역사 법칙을 예증하기 위하여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 재현 언어의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을 역사로 만들어가 는 과정이 되도록.
그러나 ‘살던 대로 살지 말자’는 권유는 기성 대의제 안에서 민족국가 건 설에 관심이 있는 세력이 정권을 차지할 때까지 다른 열망을 유예하자는 말일 뿐, 지금의 삶 자체를 위해 주권 제도를 재구성하자는 말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논의는 ““박근혜 이후 ‘누구’가 아니라, 박근혜 이후 ‘무엇’을 말해야 한 다”는 지적은 일단 경청할 만하지만, 조기 대선이 확실시되는 현 시점에서 재고 할 필요가 있다”(「‘촛불’」, 24쪽)8)는 민주당의 인물론으로 이어진다. 지금 다시, 윤 석열 이후 ‘누구’를 찾는 질문만이 남게 된다면 촛불은 다시 원점이 될 것이다.
촛불 항쟁이 87년 체제 이후 민주주의 시스템(의 최소한마저)이 작동하지 않는 사태가 중첩되어가는 꼴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촛불의 궁극적 과제는 민 주주의 시스템의 재점검과 갱신일 것이다. 그것은 집권 세력과 대통령의 인물 됨됨이에 크게 좌우되는 대의제 안에서의 권력 집단 교체에 그치지 않고, (‘한반 도’를 특권화하지 않는) 범세계적 반군사주의 평화운동, 기후 운동, 퀴어 페미니 즘, 장애-질병 담론 등 정치제도와 그 주체를 심문하는 목소리를 통해서 이뤄 져야 하지 않을까. 정상 국가(전체)를 우선 만든 다음 ‘나중에’ 다룰 문제가 아 니라, 도리어 이것을 시민사회의 구성 원리로 삼아야만 (굳이 단합된 민족/국가일 필요는 없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지식인의 우주 진화적 사명과 죄책감의 미학적 흡수력
단계론적 역사관의 특징 중 하나는 절대정신을 체현하는 지도부와 시민 의 독특한 관계다. 백낙청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촛불’」에서 문재인, 안희정 등 당시 민주당 대권주자에 대한 간접적인 하마평과 더불어 시민이 지지하는 후보를 잘 고르라고 주문한다. 역사적 사명을 기꺼이 짊어지는 ‘진보적 지식인’을 제대로 선발하고 ‘살던 대로 살지 않기로’ 결심한 시민이 결합한다면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역사의 전위인 엘리트 정치인과 속지 않는 시민으로 구성된 연대체가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다.
탈성장이 아무리 정당한 목표이고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 및 기 업들과의 싸움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싸움의 성패는 결국 단·중·장기 목표를 얼마나 슬기롭게 배합해서 대중의 지지를 얼마만큼 얻어내느냐에 달린 것 아니 겠는가.(「2023년」, 25쪽)
이러한 단언은 시민이 탈성장(을 비롯한 여러 의제)을 국가에 먼저 요구하 고 다른 시민을 직접 설득하는 현재의 시민사회/운동의 구도와는 동떨어진 정 세 분석에서 나온다. 진보적 엘리트 관료 계급이 일부 시민의 성급한 요구를 슬 기롭게 통제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해가면서 목표를 달성해가는 이러한 단계적 근대화론에는 정상 국가를 설계하는 엘리트와 이를 지지하는 진보 시민 연대 체가 후위에 있는 대중을 설득한다는 은근한 계몽의 서사가 저변에 깔려 있다.
기실 이 구도는 『창작과비평』의 창간사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9)에 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문단의 낙후성”(6쪽)을 딛고 “대국적 안목”으로 “문학의 온전한 사회 기능을 옹호”(9쪽)하는 이 글에서 흥미로운 점은 근대화와 선도적 문학인의 관계다. 그는 시민 생활과 문학이 일치했던 서구의 황금기 및 혁명의 모범 사례를 열거하면서, “근대화의 중심 과제가 곧 산업화”이고 “현대는 집단 감정과 집단 행동이 움직이는 시대”(31쪽)이므로 개인의 문학이 아닌 집단 의 문학을 꾀해야 한다고 본다. 후진적인 “한국에서 정말 대다수 민중이란” “문 학을 읽을 여유도 능력도 의욕도 없는 사람들”(17쪽)이기에 “현실 독자들의 한심 한 수준”(19쪽)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민중의 저항을 가로맡고 근대화를 위한 가장 보편적인 이상을 제시하며 또 실천하는 역사의 주동적 역할을 작가와 지 식인이 맡아야 한다는 데에 딴말이 있기 어렵다”(34쪽)고 주장한다. “대중의 소 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38쪽) 렸다는 것이다. 대중을 올바르게 통제함으로써 서구적 근대화 기획을 현실화하는 (인)문학 엘리트라는 구도다.10)
「시민문학론」11)에서는 민족의식을 체현하는 ‘중위’적 시민이라는 매개가 부가된다. 그에 따라 지식인/문학인의 역할도 대중의 교양에서 민중 속 시민 정 신의 맹아를 발견하고 이를 지원하는 역할로 변한다. 고전적 시민혁명인 프랑스 혁명이 “혁명기에 절정에 달했던 시민의식을 온전히 지키고 키워 참다운 민주 적 시민사회를 완성하지는 못했”(464쪽)기에 현대인은 시민의식을 잃고 소시민 으로 전락해버렸다. 백낙청은 사회경제적 계급인 시민에서 “자신의 공동 운명과 사회적 위치를 명백히 인식”(463쪽)하는 공동체적 자의식을 분리하여 시민(성) 의 맥락을 전환하는데, 그 ‘시민의식’은 근대/민족정신의 역사적 자기실현 과정 으로서의 헤겔적 절대정신과 유사한 속성을 지닌다. “열병처럼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민주주의에의 집념은 한 동물학적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자신의 우주 진 화사적 위치를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이에 고무”(466쪽)된 덕분으로, 우주적, 종적 절대정신이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필연을 체현해가는 인류의 추진력이라 는 것이다. 그는 플라톤을 경유해 “세계의 창조가 ‘필연anakhe’과 ‘정신noos’의 협 동 작업이었다고 설명”하고, “주어진 환경조건의 필연성 내지 폭력성을 ‘설복’시 켜 조화를 증대시켜나가는 우주 진화의 어떤 궁극적 요인”(469쪽)으로서 ‘이성’ 을 주장하면서, 이는 단순히 합리적, 분석적 이성이 아니라 (예수와 보살의 사랑 을 예로 들며) 설복과 조화라는 정동적 요소를 담은 합일의 원리임을 강변한다. 그래서 소시민이 되어버린 현대인에게는 “하나의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우주 전 체를 움직이고 이끄는 힘으로서의 ‘사랑’”(509쪽)이라는 일종의 교양 문학이, 개 인을 전체로 조화시키는 고전주의적 재현 원리가 필요해진다.
따라서 우주적, 종적 역사의식을 실현하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형성 과 정에서 작가와 지식인이 또 한번 핵심적 역할을 맡”(465쪽)아야 한다. 이를 위 한 시민문학으로는 “사회와 인간을 보는 어떤 ‘원숙한 관점’과 이에 수반되는 ‘균 형’”(472쪽)을 담은 리얼리즘이 합당한데, 여기에는 “어느 개인 개인보다 전체 사회 그 자체를 중시하는 동시에 (……) 그들 자신은 제 나름으로 하나의 절대적 목적을 이루는 인간의 창조”(473쪽)12)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시민문학은 개 인과 사회(전체·우주) 사이의 ‘균형’을 재현함으로써 세계정신을 추구하는 ‘원숙 한 관점’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 삶의 근거에 대한 정직하고 온전한 파악”을 하 게 해주는 (시민)문학을 통해 교양을 갖추어야 “시민다운 시민”(477쪽)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시민성에서 사회적 계급성(과거의 것이니까)과 당파성(부분적인 것이 니까)을 지우고, 이를 민족/국가라는 전체 지향적 합일의 원리로 전환하면서 사 랑의 문학이 그런 교양의 매개로 재정의된다. 당대 역사학계의 자발적 근대화 론의 분위기 속에서 백낙청은 전체를 위한 사랑이 구체화된 한국적 사례를 검 토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3·1운동과 같은 민족적 민중 봉기에 잠재된 우주 적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민족 대표 33인 같은 문학인·지식인들이 보여준 “영 도력의 취약성”(486쪽)이다. “대다수 민중과 소수의 선구적 지식인이 하나의 시 민의식으로 뭉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484쪽)을 민중은 기다렸으나 지식 계 층은 그동안 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문학인이 민중 과 자신을 다시 묶어주는 시민의식, 시민문학을 깨닫길 역설하는 것이 이 글의 요체다. 그렇게 묶일 때의 세계와 자신을 사랑하는 감각, ‘국가(민족)’–‘시민(의 식)’–‘ 지식인(문학인)의 자아’가 하나된 삼위일체에 대한 자긍심이 문학적 사랑 에 이른다.
그런데 백낙청은 이 ‘사랑’을 실제 문학비평에서는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번역한다. 특히 김수영의 자기반성을 고평하며, 지식인이 “매우 힘들여 얻은 통 찰과 성실성과 긍지”(506쪽)를 시민문학의 목표로 꼽고, 역사적 시민의식을 알 면서도 충분히 체화하지 못했거나 이를 이미 체현한 민중과 호흡하지 못한다는 지식인의 죄책감·책임감에서 “순수한 사랑과 기다림의 경지”(508쪽)를 찾아낸 다. 그리하여 김수영의 시는 (역사를 미리 체현하고 있는) 민중, 민족을 보라는 정 언명령에 따라 시민의식이라는 이념을 (뒤늦게 반성하며) 획득함으로써 “세계와 우주 전체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며, “가장 높은 의미의 시민의식을 ‘사랑’이란 말로써 표현한 것도 바로 김수영이다”(509쪽). 그럴 때 문학/비평은 전 체를 위한 부분으로서의 책무를 깨닫는 자기 고양(니코마코스 윤리학적 자기 계 몽이라는 개별자의 덕성)을 민족/국가 완성을 향한 (헤겔적 선험적) 사명과 연결하는 매개다. 전체에 대한 이념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분열된 세계-자아 의 전체성을 재종합하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헤겔 미학의 얼개를 여기 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백낙청 비평은 ‘시민의식’을 통해 문학을 선험적으로 공공적인 것 으로 설명하고 단일한 전체에 대한 부분의 기여를 역사의 원리로 만들어 선험 적 공동체(민족국가)와 개인을 연결해왔다. 그런 점에서 백낙청 비평의 근간에는 전체로 합일될 역사적 법칙을 아는 조화의 관점, 그런 부분으로서 제 역할을 아는 균형, 이를 미리 체현해온 민중·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들의 시민의식 에 부합하지 못한 지식인 자신에 대한 반성과 (반성하는 ‘나’에 대한) 긍지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랑과 긍지는 민중(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죄책감으로부 터 미래적·선험적 시민의식을 회복하는 계기를 찾아내는 미감이다. 민족·국가 의 필연적 완성태와 자신을 일체화함으로써, 현재/타자의 비극에 대한 수치심 에 머무르기보다는 그를 재빠르게 미래의 민족·국가적 자긍심으로 전유專有하 여 ‘부분’의 죄책감과 ‘전체’의 자긍심을 오가는 정동의 변증법인 셈이다.
하지만 그 민족/국가의 미래는 누구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것일까? 국가 가 제대로 건설된다면 (그에 일조한 모범적인) 덕 있는 국민에게 행복이 분배될 것이라는 (끊임없이 유예될) 약속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미래의 국가를 향한 투자를 지속하게 한다. 한편으로 보수 진영의 노동/소비 인구 소멸론과 진보 진 영의 민족국가 지연론은 모두 국가의 완성을 향한 통치술이라는 점에서는 상통 하는 것 아닐까. 둘 다 경제적 빈곤과 외세의 간섭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현 재에 소환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을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는 계 몽의 강령을 만들고, 국가가 완성된 이후에야 비로소 개별자들에게 행복을 분 배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이 서사는 공히 특정한 역사를 차출해 현재의 문제와 직접 대응하는 인과관계를 과잉 설정하고, 민족적·국가적 트라우마가 자부심 으로 바뀌는 행복13)에 기대어 국민/시민에게 아름다운 전체로의 조화/복종을 권유하는 것은 아닐까.
발견, 반영, 승화의 선험적 전체주의를 넘어서
이러한 비평적 기원을 바탕으로 역사의식을 (자기도 모르게) 미리 실천하 며 슬기로운 지식인을 기다리는 ‘중위’적 시민을 『창작과비평』의 ‘촛불 시민’이 계승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더 나아가 문학의 근본적 공공성을 사랑으로 명명하 는 것, 그 전체적 공공성에 대한 ‘시민의식’적 죄책감/자긍심을 ‘커먼즈 문학론’ ‘돌봄의 공동체론’과 연결해 읽어보면 어떨까14)). 미처 언어화되지 못했으나 정치적 열망을 품은 시민의식을 알아보는 선각자 지식인/문학인이 있고, 이를 더 보편적인 민 족국가 건설의 방향으로 슬기롭게 설계하고 인도하면 전위의 의식 있는 민주/촛 불 시민들이 이를 흡수하고 확산하여 결국 후위의 대중 역시 이를 따르게 된다 는 암묵적인 구도가 현재까지 여전히 유사하게 전개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욱 그렇다.15) 『창작과비평』의 근래 지면 배치 역시 노동자 시민의 언어·독서 현 황보다 (민주화 세대의 교수진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내외의 사회 지도층과 진보 적 교육자, 정책 전문가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시민의식’을 대리 발화하거나 지 식인을 대표하여 반성하게 하면서 민주당 (재)집권이라는 미래를 자긍하는 경 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한기욱의 비평은 촛불 항쟁 시기의 동시대성을 중심으로 소설을 꼼꼼히 독해하면서 이를 통해 촛불에서 기존 혁명과는 다른 방식, 주체, 의제를 읽어내 고 민주당 정권이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애도와 연대의 경험을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하는 등의 의미 있는 독 해를 보여왔다. 그럼에도 이는 페미니즘적 의제를 촛불 시민의 ‘시민의식’으로 사후적으로 발견/흡수하거나, ‘조국 사태’의 위선과 모순 자체보다는 그 때문에 분노한 청년들을 “정동의 아나키즘”으로 몰아가는 야만적 자본주의를 발견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16) 이런 발견-흡수는 시민의 ‘즉각적 정동’을 지식인·문학인 의 ‘훈련된 사유’로 승화하여 민주당(을 존립하게 하는 제도/세대의 개혁보다는) 정 책으로 전유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강경석이 촛불 항쟁을 ‘혁명의 갱신’의 필요를 드러낸 사건 으로 차분히 독해하는 장면은 소중하다. 그런데 그가 자신과 김건형, 김요섭, 강 지희의 황정은론 사이의 해석적 차이의 원인을, “「아무것도」〔「아무것도 말할 필요 가 없다」, 『디디의 우산』—인용자〕가 말하는 혁명이 ‘혁명의 혁명’을 포함하는 개 념임을 간과한 결과일 것”17)으로 꼽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네 논자 모두 촛불 혁 명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 혁명 운동/전략의 보수성과 자기동일성 을 지적하고 혁명의 갱신을 향한 동시대 문학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있음에도 그가 자신과 다른 논자들의 독해가 사뭇 다르다고 해석하는 배경에는 촛불 항 쟁 및 당시 텍스트에 대한 역사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광장의 (민주 주의적 가능성과 동시에 상존하는) 타자 소외/누락이라는 현상과, 시민정신의 이 념에 따라 필연적으로 종합될 촛불의 거시적 미래 어느 쪽에 무게를 싣느냐는 시각의 차이다. 이는 현재 개별자들의 수행성이 만들어가는 미래와 역사의 선 험적 법칙에 따라 해석된 현재라는 역사철학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강 경석은 백낙청이 “‘소수의 지도자 또는 지배자가 아닌 다수의 국민’ 정도로만 풀 이해놓으면 그 이상의 정의가 필요 없이 된다”(「민중은 누구인가」, 1979)라고 한 민중의 정의를 인용한다. “민중은 거주지나 계급 또는 성차 등에 따라 정체성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단위 공동체가 아니며” “차라리 특정 공동체 또는 특정 공동체를 통어하고 있던 규범이나 제도, 코드, 정체성의 동요로부터 소환되곤 해왔다.”18) 그럴 때 ‘민중’은 시기별로 출현하는 양태는 상이하지만 기득권과 싸 운다는 점에서는 단일한 상이며, 따라서 ‘민중적인 것’의 이념은 민중/국민 안의 위계와 폭력을 오래 응시할 수가 없다. 하나된 민중(이라는 동일성)과 외부의 기 득권/적이라는 이분법에 그 존재 형식이 기대기 때문이다.
송종원은 퀴어 페미니즘 비평은 (민중적인 것의 종합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비퀴어와 퀴어 사이의 분할선을 만들고 그 분할선 너머의 통합적 정치성을 방 해한다는 염려를 토로한다.19) 그가 보기에 (일부) 퀴어 비평은 “디테일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시선” 속에서 “교정의 논리”로 “전체적 의미에 대한 독해에는 비교적 덜 신경쓰는” 문제가 있는데, 이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과도한 민감성으로 이 어”(428쪽)지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작품이 퀴어 재현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므 로 “당시의 환경에서 나름의 타자성과 공동체성을 구현하려는 실험”으로서 “작 품을 역사화하여 읽는 방식이 필요”(428~429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 연 구/비평이 작가/작품이 당대로서는 선구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제한적 칭찬’에 복무하는 작업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폭력 과 억압에 대해서도 후대의 문학 비평/연구는 개입할 수 없다. 여성 시든 노동 자 서사든 어떤 작품이든 특정 집단의 재현 자체에 그치지 않고 나름의 주제의 식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임은 당연한 바인 것처럼, 작품의 형상화 방식이 그 전 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혹은 전달하려는 그 의미가 어떤 가치가 있 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비평의 당연한 역할이다. 비평 본연의 정치미학적 작업 은, 텍스트가 그 나름대로 타자성/공동체성을 구현하려는 시각/재현 방법 그 자체가 당시의 역사적 한계이자 가능성이었다는 점을 가시화함으로써 지금의/ 당대의 문학 독법/창작론 자체를 정치화하여 텍스트 내외의 ‘전체적인 의미’를 더 폭넓게 읽어 의제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퀴어 페미니즘이 기존 문학사를 재점검하고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독해하거나 텍스트에서 새로운 미학을 찾아 내는 작업은 단순히 작가/작품에 대한 사후적 ‘교정’(일 때조차 그간 누적된 독 법/창작론에 개입하는 작업에 더 가깝지만)에 멈추지 않고 문학 자체의 정치성을 갱신하고 확장하는 작업이다. 그런 비평 본연의 역할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애 써 이를 분할선의 구축이라고 재분할하는 일은 특정한 비평적 욕망을 드러낸 다. “의미 있는 전체”(430쪽)로 나아가 타자가 억압받는 현재를 “끊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고 구축하는 일이” 더 중요하므로 “광장의 정치와 퀴어 서사를 애써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429쪽)는 말은, 기실 이 분리를 전면으로 다룬 문 학 텍스트의 현재성을 감소시킨다.
분할된 것의 총합이 곧 전체는 아니며 주체의 행위와 생애는 분할된 것들 사이 의 조합과 그를 초과하는 결합 효과들로 인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의미 있는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젠더 감수성이 충분히 수용되어 있지는 않 았지만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이나 ‘시민’의 개념이 하던 일이 그것이기도 하 다.(430쪽)
이러한 ‘전체’를 향한 지향 속에는 어떤 재현/존재든 그 부분/자체로는 의미가 없거나 적고 ‘의미 있는 전체성=시민의식=우주 진화적 사명’을 따르는 민족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최종 목표의 사전 단계로서만 유효한 정치 적 주체일 수 있다는 선험적 전체주의의 기획이 들어 있다. 따라서 김현이 “형들 의 나라”20) 만들기를 비판하면서 그간의 선험적 공동체주의, 단계론적 역사의식 이 적극적으로 분할해온 혁명의 작은 주체들을 회복하는 작업과 한국 퀴어의 일상적 노동과 사랑, 돌봄의 역사를 읽는 작업21)에서 송종원이 추출하는 것은 “광장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고도 타인의 생을 염려하고 연대하는 이 감각의 발 견”(431쪽)이다. 퀴어가 광장의 정치, 연대로 돌아가는 통합의 움직임에만 주목 할 때, 광장에서 누락되어온 퀴어적 역사철학을 주창했던 바는 크게 주목되지 못한다.
황정은과 김현의 문학에는 선험적 역사/전체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 의식 이 없다. 도리어 그 이념을 따랐던 지식인/시민 담론에 대한 청년의 분노가 있 다. 기존 분할선을 가시화하고 이를 의제로 숙고한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달라 진) 광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화자의 문제의식(과 이를 강조한 비평의 문제의식) 을 송종원은 도리어 분리주의로 치부한다. 그러한 변증법적 운동에서는 소외의 주요 원인이 바로 그 ‘저항적 시민 집단’일 수 있다는 비판은 피상적인 포용과 서정적 전체성으로 인해 흩어지고, 그 덕분에 얼마간 겸허해진 ‘시민의식’은 재 빨리 회복된다. ‘나’의 소외와 배제를 말하는 타자의 목소리에서 그 선험적·총체적 원인인 (타자는 몰랐지만 지식인에 의해 드러나는) 거대한 외부의 ‘적’을 지목 함으로써, 타자는 이에 맞서는 저항적 시민 집단의 일부분으로 다시 흡수되어 미래의 국가/민족의 재긍정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 도식에서 퀴어적 인식론은 소시민적 이기성에 가깝게 독해된다. 그래 서 퀴어 되기의 수행성이 “비-퀴어의 주체성을 소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며 “퀴어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같은 쪽) 타자적인 존재이므로 우리 모두를 규율하 고 조율하는 존재로 확장하는 대국적 관점이 주문된다. 퀴어의 고유한 존재론 을 구축/확장하려는 시도를 ‘역사화하여 읽기’보다는, 그 문제의식을 재빨리 더 큰 보편자(가 이미 갖고 있었다는)의 자의식으로 흡수하면서 퀴어적 인식론의 고 유함/필요함이 무화되는 셈이다. 여성/퀴어가 매일 하는 보편 언어의 자기화라 는 번역 노동이 역으로도 가능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하지 못하는 것일까? 굳 이 퀴어 비평이 없더라도 이미 ‘시민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퀴어 비평이 제 기하는 문제들을 왜 진작 보지 않았던 것일까?22) 그 근간에는 비-퀴어가 퀴어 적 인식론을 통해서 배우고 자신의 인식론을 갱신하기보다는 기성 전체/보편의 입장에서 효용가치를 입증하라고 퀴어에게 요구하는 당당한 자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비-퀴어의 대의에 ‘대국적’으로 이입해달라는 요구나 비-퀴어 에게도 익숙한 언어로 번역해야만 문학/학술적 시민권을 배분하는 분할은 그간 무수히 반복되어온 페미니즘에 대한 진부한 요구와도 닮아 있다.23) 사소한 표현 에 집중할 뿐 선험적 공동체를 따르지 않기에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퀴어 페미니즘을 통해 구축할 수 있는 다른 역사성을 미리 평가절하하면서 ‘나 중에’ 도래할 민족국가 건설의 단계론에 따르길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낙청에게 사랑은 모든 존재가 완성으로 향하는 도정을 부추기는 힘”24)이었겠지만, 퀴어 페미니즘 비평에게, 아니 지금 비평에게 사랑은 개별자는 몰랐지만 역사적으로 정해져 있는 하나의 완성을 향하도록 부추기는 책임감/죄 책감이 아니다. 사랑은 모든 존재가 각자의 삶을 스스로 형성하는 과정에서 출 현한다. 그러니 이제 현재를 이미 있던 하나의 광장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 자체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를 만들어가는 언어적, 미학적, 정치적 원리가 더 필요하다. 우리는 누가 정치를 하길 원하는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정치-관계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교양, 그로부터의 말 걸기
황정은과 김현이 촛불을 통해 기존의 혁명(사) 속 주체와 관계성을 정지 하고 갱신했다면, 김기태의 「보편 교양」25)은 지금의 지성 체계 속의 주체와 관계 성을 정지하고 갱신해간다. 이 소설은 선험적 전체성에 대한 지식인의 책임감과 자긍심의 변증법이 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를 부조한다. 화자인 곽은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고 해설되는”(189~190쪽) 늙은 교수와 달리 현실 문제 를 사유하고 고민하는 학생을 길러내려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식인으로 서 사회적 책임감을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늘 고민하는 곽은 선택과목과 자기 설계 수업이 늘어난 교육 정책에 힘입어 ‘고전 읽기’ 수업을 자원해 개설한다. 문 제 풀이를 위해 토막 낸 단편적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에서 벗어나려면 “고전 읽 기는 일하고 사랑하고 꿈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적 교양을 담 은 수업이어야 했다”(196쪽). 그래서 곽은 수강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 하지 않는다. ‘성적’으로 평가되는 ‘학생’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으로 접근하고 싶기 때 문이다.
“70년대, 혹은 60년대 작품”을 가르치며 “억압적인 권력에 훼손된 개인의 자유를 형상화하며 반성과 실천을 독려하는…… 식의 설명을 마쳤을 때 맨 앞 줄 학생이 질문”한다. “선생님도 민주화 운동 했어요?”(190쪽) 학생들에게 반성 을 통해서 실천으로 확장해가는 지식인의 사명감과 부채감은 동시대적인 감각 이 아닌 것이다. 곽은 고전 읽기 시간에 자거나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을 책망하 지 못한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봤을 거라 짐작하며 어제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자냐고 물”으면 “늦게까지 배달을 해서…… 죄송합니다”(197쪽)라 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곽은 “사연을 물을지 고민”했지만 “각자의 삶에 서 이 수업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차라리 50분의 숙면이 더 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을 교실에 가두는 것은 어른들의 욕심이 아닐까”(같은 쪽) 생각하며 더 겸허해질 뿐이다.
그런 곽에게 은재만이 희망을 준다. 은재는 『자본론』을 수업에서 읽힌다 며 학교에 민원을 제기하는 아버지를 도리어 어른스럽게 만류하고, 고전 읽기의 취지에 맞게 인간의 본성을 논하며 마르크스의 유산을 논하는 비평문을 써내 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대에 합격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곽은 졸업식 날 은 재를 다시 만나 아버지와의 해프닝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은재는 입시 컨설턴 트 선생님이 마르크스가 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아버지에게 전화했었다고 말하 며 아버지의 교양 없음을 탓한다. 보편 교양을 가르치려는 곽의 사명감은 비판 적 담론마저 지식 자본으로 흡수하는 교육/입시 시스템 덕분에 ‘늙은 교수’들에 의해 가까스로 ‘성과’를 낸다. 외로움과 패배감에 빠져버린 곽은 수업시간에 늘 잠만 자던 아이들이 몰려와 굳이 자신과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는 데에 기분이 더 묘해진다. “그들이 성인의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지 만 불투명한 상황이라면 실례일 수 있으므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210쪽)
곽이 교육에 실패하고 입시에 성공하는 역설은 학생들의 사연을 묻지 않 는 데에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는 “일하고 사랑하고 꿈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적 교양”을 바탕으로 권력에 맞선 “반성과 실천을 독려 하는” 지식인을 육성하고 싶었지만, 누구여도 무관한 보편적 인간에 대한 책임 감과 죄책감은 학생들에게 시대착오적이거나 자신과 무관한 것이었다. 입시 컨 설턴트의 조언처럼 대학의 늙은 교수들에게 중요하게 평가받아 학력 세습에 도 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수업시간에 문제를 풀어야만 하는 이유 와 야간 알바를 해야 하는 이유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고전은 아이들에게 공허 했다. 곽 역시 자신이 왜 ‘이 고전’을 가르쳐야 하는지 묻지 않았기에 책장을 메 운 추천 도서 “하나하나는 알맞게 배치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롭지 않아” 보 인다. 그러나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었다”(209쪽). 그는 정규 직 교사로서 임금과 안정성을 보장받으므로 “균형감각, 계급의식, 뭐라고 부르든 견지해야 할 미덕이 있다면 푸념은 자제해야”(191쪽) 한다고 다짐해왔다. 보편적 지식인으로서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한다는 자긍심이다. 그래서 은재의 아버지 와 교장이 “전교조는 아니”냐고 노동권과 교수권을 침해할 때도 “혼자 맞서는 편이 낫다는 결론”(199쪽)에 도달할 뿐 자신에게 필요한 사유와 환경을 찾지 않 았다.
하지만 곽이야말로 노동환경과 교사 공동체를 제대로 직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 교양이 필요했다. 누구여도 상관없는(그래서 실은 특정한 계급/집단을 지 칭하고 마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선험적 책임감을 가르치는 강단講壇은 이제 아 이들에게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불안과 분노를 말하는 단상壇上이야 말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교양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이제 교양은 민 족·국가에 대한 선험적 죄의식을 습득하고 도래할 전체로 현재를 이월하는 지 식인의 자부심이 아니다. 내가 속한 사회가 지금 어떠하길 원한다고 말하고 설 득하는 데 필요한 도구야말로 교양이다. 곽이 마주한 것은 스스로 말하는 자들 의 단상으로부터 다시 교양을 교양해야 한다는 시대적 전환점이다. 우리도 그 단상 위에 있다.
- 1) 김건형, 「이태원의 ‘나’ 아카이브와 치안-행정을 넘는 문학/비평」,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 2) 백낙청, 「2023년에 할 일들 —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이하 「2023년」),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3) 백낙청,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촛불혁명 시대의 한반도」(이하 「어떤」),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4) 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이하 「‘촛불’」),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5) 백낙청,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6) 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317쪽.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7) 한기욱,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디디의 우산』을 읽고」,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2~3쪽.
- 8) 최근 외부 필진이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원론을 소개한 적은 있으나 본격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개혁 요구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하승수, 「선거제도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 9)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비평』 1966년 겨울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10) 물론 “‘지식인-문학인’과 대중을 선명하게 구별하는 그의 생각이 대중을 무시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백낙청은 한국의 후진성이 대중 의 의식 발전의 지체를 낳고 있고 그래서 대중의 잠재성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당대 한국에서 ‘지식인-문학인’은 ‘소수 선구자’로서 의 역사적 위상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에게 역사의 주체는 결국 ‘대중-민중’이다. ‘지식인-문학인’은 ‘소수 선구자’로서 대중의 주 인 됨, 민주주의를 앞장서서 대중 스스로 일깨울 수 있도록 앞장선다.” “이렇듯 백낙청의 ‘지식인-문학인’에 대한 높은 역사적 책무와 위상의 부여 는 기본적으로 현재까지 줄곧 지속된다. 여하튼 창비를 창간할 때부터 백낙청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그래서 그는 새로 창간하는 잡지명을 ‘전위’라고 할까도 생각했다고 한다”(이성혁, 「1970~1980년대 한국 문학운동 담론에서 ‘지식인-문학인’ 위상의 변천」, 『뉴 래디컬 리 뷰』 2016년 가을호, 126쪽). 1960년대의 엄혹한 사회적 환경이나 동시기 인문학계의 전반적인 인식틀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 백낙청의 비평관 이 꾸준히 갱신되어간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으나, 지면상 이러한 역사-주체의 구도가 현재까지 큰 변동 없이 이어진다는 점에 우선 주목한다.
- 11) 백낙청, 「시민문학론」, 『창작과비평』 1969년 여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12) 영국의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리얼리즘과 현대소설」의 일부로, 백낙청이 직접 “본지 7호에 번역 수록”했음을 밝혔다.
- 13) “한 명의 시민으로 긍지를 느낀다는 것은 과거에 발생한 트라우마에, 그러한 트라우마가 〔자부심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하는 일에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가리킨다. 트라우마를 넘어서 마침내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지 않는 일은 단지 마음이 메마른 것을 넘어서 적대 적인 것을 뜻하게 된다. 마치 행복을 느끼지 않는 일의 이면에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한 불신과 더 나아가 국가를 파괴하려는 음모가 도사리 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국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가 겪은 트라우마의 역사를 기억하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여정에서 이를 상기한다 는 것을 뜻한다.”(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486~487쪽)
- 14)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통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개개인의 창작이면서도 서로의 반응이 만나야만 하기에 “시가 정말 시답게 존재하 는 방식, 그러니까 협동적 창조를 통해 생성”(황정아,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22쪽)되는 유기적 전체성을 ‘문학이라 는 커먼즈’라고 칭한다고 할 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라는 자각 속에서” “공동체를 능동적으로 구성 및 재구성”(백영경, 「복 지와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8쪽)하는 태도가 중요해지는데, 이를 갱신된 시민문학론으로서, 그 주체의 내적 위계와 공동체의 역사적·선험적 자기실현 원리를 비교,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와 시민이 협동적으로 창조하는 커먼즈는, 대중에 미칠 미래적 영향력을 자긍하며 자신을 정체화하는 지식인의 죄책감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을까. 시민-독자의 ‘부분’적 현실로부터 작가-지식인의 보편적 책임을 발 견하는 ‘시민정신’의 구도, 시민과 지식인을 묶으면서 분리하는 ‘사랑’의 미학적 태도와는 얼마나 같고 다를까. “마을 공동체나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공동체 단위”라는 시민적 거버넌스를 전제로 하면서 “국가가 곧 공공성의 담지자라고 볼 수 없”(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25쪽) 다며 국가 중심주의와 다른 공동체를 섬세하게 논의한다는 점은 커먼즈론의 중요한 입각점이지만, 커먼즈를 민족국가로 종합되는 진보적 시민 집단과 일체화하는 경향이 여전히 없지는 않은 듯하다. 공공성을 대체하는 커먼즈라는 개념적 시도가 (순문학장에서) 특정 세대/이념의 비평가 바깥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사정도 어쩌면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 15) 조연정은 백낙청의 시민/민족/민중문학론이 동시대 현장 비평장에서 여전히 유효한 준거로 작동하는 양상을 지적하기도 한다(조연정, 「주 변부 문학의 (불)가능성 혹은 문학 대중화의 한계—백낙청의 ‘시민/민족/민중문학론’ 재고」, 『인문학연구』 51집, 2016). 『창작과비평』의 문학 론 전반을 백낙청의 “역사실천주의”로 손쉽게 환원하는 시각은 물론 곤란하지만, 백낙청의 글이 비판적 검토 없이 고스란히 내부 인용으로 순환 되는 『창작과비평』의 독특한 패턴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이 약화되고 문학의 자율성이 점점 더 강화된 90년대 이후부 터 최근까지의 문단에서, 창비가 어떤 행보를 보였으며 창비에 대한 이 같은 오래된 선입견이 어떤 문제적 작용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도 관심 을 둘 필요가 있”(327쪽)으므로 그 기점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조연정은 시민/민족문학론이 ‘운동’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인류의 모럴을 요청”(350쪽)하는 문학 근본주의자의 ‘문학 원론’이라고 정리한다. 관련하여 손유경은 창비의 민중, 민족문학론을 “부채 의식에 시달리 는 ‘지식인’이 아니라 특정 인물형이나 소재, 배경, 스토리를 애호하는 ‘문학예술가’로 간주하는 관점으로의 전환”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에 동의 하는 한편으로 도리어 ‘부채 의식에 시달리는 지식인’과 ‘부채 의식을 자부심으로 반전하는 지식인’이야말로 애호되는 문학적 모티프임을 덧붙여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손유경, 「현장과 육체—『창작과비평』의 민중지향성 분석」, 『현대문학의 연구』 56호, 2015, 38쪽).
- 16) 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21쪽, 34쪽; 한기욱, 「주체의 변화와 촛불혁 명—최근의 몇몇 소설들」, 『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 21쪽. ‘조국 사태’를 기득권 언론에 의한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폭주”이자 한국 사회의 입시 제도 기준에서 ‘공정’하지 않은 공격으로 보는 억울함은 김종엽, 「조국사태, 대학입시 그리고 교육불평등」(『창작과비평』 2019년 겨 울호, 274쪽)에서 본격적으로 개진된다. 민주당과 586 지식인/교수 집단의 학력 자본 세습이 다른 기득권의 부패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님에도 언론/검찰 유착 탓에 더 공격받는 프레임이 생겼다는 집단적 감각이다. 이는 민주당(내외의 담론)이 자처하는 ‘개혁적 중도주의’가 자기동일성의 재생산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따라서 그 역사적 시효를 다했음을 역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한기욱도 인용하듯이 “기후변화와 성장주의의 위기 앞에서 “구세대가 이어온 맹목의 질주에 새 세대도 끼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구세대의 ‘전향’을 요구하는” 것이 진짜 ‘세대 정치’라는 것이다. 장 석준, 「진짜 세대 정치」, 한겨레, 2019. 10. 18.”(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 19쪽 각주 3)
- 17) 강경석, 「촛불의 재배치—황정은, 윤이형, 김성중의 눈」, 『리얼리티 재장전』, 창비, 2023, 34쪽.
- 18) 강경석, 「리얼리티 재장전—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 같은 책, 107쪽.
- 19) 송종원, 「분할선 너머에서 작동하는 문학의 정치」,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 20) 김현, 「형들의 나라」,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문학동네, 2021, 164쪽.
- 21) 김건형, 「역사의 천사는 똥구멍 사원에서 온다—김현론」,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 문학동네, 2023.
- 22)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까? “도래할 미래를 향한 선한 약속은 고통을 구원의 시간을 예언하는 증례로 사용할 뿐, 고통받는 눈앞의 사람을 살리지는 않는다. 이는 신학적 구원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역사관의 형식이기도 하다.”(김건형, 같은 글, 498쪽)
- 23) “골리지 말고 상냥히 설득해달라는 주문은, 그러면 보다 건설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여성운동과 성소수자 운동 진영 에 지속적으로 요청”된다(오은교, 「손절과 벤딩」, 『문학3』, 2019년 3호, 49쪽).
- 24) 송종원,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23쪽.
- 25)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이하 인용시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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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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