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제149호)
자주, 계속 실패해보겠습니다 : 김지연, 『조금 망한 사랑』 (문학동네, 2024) /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
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추천 콘텐츠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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