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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조시학 | 2024년 겨울호(제93호)

인간 실존의 근원에 대한 사유

백애송 문학평론

2016년 『시와 시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평론집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말』, 『트렌드 포에트리, 틈의 계보학』, 연구서 『이성부 시에 나타난 공간 인식』이 있음.

김상규 시인의 시는 인간 실존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각하며 존재한다. 김상규 시인이 바라보는 존재의 심연에는 삶의 의미, 자아에 대한 정체성,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전통적인 시조 형식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투영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인 삶의 양상과 죽음의 경계를 풀어낸다. 더불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상실, 고독, 고요, 적막과 같은 감정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다소 무거운 주제 의식처럼 보이지만 이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하여 독자가 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전통적 운율과의 조화를 통해 현대인의 감정을 정밀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섬세함도 엿볼 수 있다.

 

 

삶의 의미

 

나의 작은 심장이 여름에 뛰었다면

바다 건너 극락조도 울지 않고 날았으리

파초도 제 잎 떨구며 햇살 내려 주었으리

 

꿈을 노래하세요, 고둥 속 바다처럼.’

원주민 소녀의 장난스런 놀림마저

요람 속 긴 숨소리에 흩어지고 말았으리

 

활짝 핀 두 손에 거미가 집을 짓곤

나비마저 쫓았으리, 어지러이 날아가는

눈 따윈 알지 못하는 맨살결의 초록처럼

 

서리 맞아 얼어붙은 무화과를 못 본 듯이

인중 끝 차게 식은 숨결마저 잊은 듯이

암소의 혓바닥보다 길고 긴 회귀선

김상규, 「12월생전문

 

시의 제목으로 보아 시 속 화자는 ‘12겨울에 태어났다. 만약 화자가 열정적이고 활기찬 여름에 태어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화자가 바라는 세계는 바다 건너 극락조도 울지 않고날고 파초도 제 잎 떨구며 햇살 내려주는 세계이다. 즉 극락조처럼 울지 않고 슬픔 없이 삶을 살며, 파초처럼 따뜻한 햇살을 마음껏 내려 주는 풍요로움 속에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고둥 속 바다처럼무한한 세계에서 꿈을 향한 노래를 할 뿐이다. “원주민 소녀의 장난스런 놀림마저/ 요람 속 긴 숨소리에 흩어지고 말았. 외로움과 고립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활짝 핀 두 손에 거미가 집을 짓곤/ 나비마저 쫓았, 풍요를 상징하는 무화과는 서리 맞아 얼어붙었으며 숨결은 인중 끝 차게 식어 버렸다. “암소의 혓바닥보다 길고 긴 회귀선속에 화자는 자신의 삶이 불완전함을 느낀다.

이 불완전함 속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시 속에서 삶의 회귀선은 순환론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살아가면서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사건과 행동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기쁨과 행복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번뇌 등의 모든 감정들 역시 반복된다. 이와 같은 서리 맞아 얼어붙은 무화과차게 식은 숨결과 같은 피하고 싶은 순간도 삶의 일부이고, 이 또한 회귀선 안에 내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체감한 화자는 있는 그대로의 불완전함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12월의 추운 겨울 속이지만 삶은 또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향유 가득 채워진 검푸른 바닷속에

나를 버려 주세요, 누구도 찾지 못하게

수탉도 우짖지 않을 미완의 그늘 속으로

 

바다가 어둠을 품는다고 했지요?

달빛마저 들지 않는 연산호 용암굴 밑

잘 여문 망각 속으로 선뜻 놓아주세요

 

해마 꼬리 휘어잡은 아가는 잊으셔요

청각 꽂고 매달리는 꼬마도 지우셔요

해류에 떠밀려 가는 길 잃은 부표처럼

 

탄생도 죽음도 오지 않을 심연으로

천천히 풀어주세요, 아무도 찾지 못하게

태곳적 나 낳기 전 그곳, 황량한 소금밭으로

 

*망각유아유아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

 

김상규, 「망각유아전문

 

유아 기억상실증은 두세 살 무렵의 어릴 적 일들 즉, 삶의 초기 몇 년 동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이다. 유아 기억상실은 뇌 발달이 미숙하고 언어 발달도 미숙하여 경험을 구조적으로 저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 기억상실증을 통해 시인은 태곳적 나 낳기 전 그곳인 미지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1연에서의 화자는 향유 가득 채워진 검푸른 바닷속으로 묘사된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에 머물러 있다. 이곳은 수탉도 우짖지 않을 미완의 그늘 속으로 아직 온전하지 못한 상태이다. 2연에서의 화자는 달빛마저 들지 않는 연산호 용암굴 밑에서 유영한다. 그러다 잘 여문 망각 속으로 선뜻나오게 되는데, 이는 곧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화자는 해마 꼬리 휘어잡은 아가청각 꽂고 매달리는 꼬마는 이제 그만 잊으라고 한다. 어머니와 분리된 화자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혹여 해류에 떠밀려” “길 잃은 부표처럼방향을 잃어버리더라도 즉 어떠한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화자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지속될 것이다.

태어남은 곧 시작이지만, 과거의 어느 기억 한 페이지는 상실하게 된다. 태어나기 전에는 안전한 보호의 공간에 있지만,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황량한 소금밭을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모의 공간에 던져진 존재는 미지의 세계에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곧 존재 자체의 여정일 것이다.

 

수염 난 두꺼비가 나를 깨워주었지

정화수 맑은 물은 마당에 넘쳤지만

그것은 오욕이었어, 가문 땅 진흙뿐인

아궁이 깊은 곳 숨겨둔 온기마다

내 피 하나 뚝뚝 떨궈 불씨 끄고 싶었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그것은 천형이었어

 

선생님, 오늘도 학교에 못 가겠어요

꼬리 잘린 뱀이 와서 제 살을 태우거든요

할머닌 기도 중이셔요, 이것만은 진실이에요.

김상규, 「신열(身熱)」 전문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두꺼비는 길한 동물로 여겨져 설화나 민담에도 많이 등장한다. 은혜갚은 두꺼비나 콩쥐팥쥐에서 두꺼비는 밑 빠진 독의 구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 속에서 두꺼비는 신열(身熱)이 오른 화자를 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 속 정황은 밝지 못하다. “정화수 맑은 물마당에 넘쳤고 이를 오욕이라 생각한다.

정화수는 유교의 제사나 굿에서 올리는 깨끗한 물로 새벽 일찍 우물에서 길어온다. 전통적으로 정결한 기원을 상징하여 제수나 공물이기도 하지만, 시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처럼 주부들이 새벽에 소망을 빌기 위해 장독대나 우물가, 부엌 등에 떠 놓았던 물이기도 하다. 정화수는 부정을 쫓아내고 더러운 것들을 씻어주는 의미로 부정을 물리친다고 여겨왔다.

이 시에서 역시 정화수는 깨끗한 물이다. 하지만 이 깨끗한 물이 마당에 넘쳤고, 이를 오욕이라 표현한다. 즉 이는 깨끗함이 더럽혀졌다는 것으로 시인 내면의 갈등을 보여준다. 정화수가 오욕이 된 이유는 현실과 희망 사이의 괴리감 때문일 것이다. 바라는 희망은 저만큼 놓여 있고 현실은 불화하기에 이 사이의 간극이 결국은 시인을 좌절하게 만든 것이다.

아궁이 깊은 곳에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인 온기를 숨겨놓았으나,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천형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죽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어나간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현재의 삶이 매우 극심한 고통 속에 놓여 있기에 죽음을 통해 삶을 다시 이어가겠다는 복잡한 감정이 시인을 더욱 고뇌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기도 중인 할머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할머니는 신열(身熱)로 인해 오늘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꼬리 잘린 뱀이 와서살을 태우고 간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시인을 보호해준다. 삶을 지속하는 것이 천형과도 같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경계

 

설산을 넘는 새는 긴 날개를 지녔다

가장 밝은 북극성에 먼저 가야 하므로

주검의 영혼을 달고 비상해야 하므로

김상규, 「조장(鳥葬)」 전문

 

조장(鳥葬)」은 단시조이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시이다. 시의 배경은 눈으로 덮여 있는 산으로 고독하면서도 시련을 암시한다. 이 산 위를 긴 날개를지닌 새가 넘어가고 있다. 날개가 길다는 것은 춥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넘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더욱이 날개가 긴 새는 주검의 영혼을 달고앞서 나아가 먼저 가장 밝은 북극성에 도달하여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보여주는 묵직한 메시지가 새의 비상으로 인하여 아픔과 희생을 더욱 도드라지게 형상화한다.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삶의 영혼은 끝이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삶의 한 부분이다. 결국 새의 비상은 단순히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지고 나르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긴 꿈을 꾸었다, 죽은 자를 품에 안고

자취 없이 강을 건넌 물뱀의 허물처럼

설원 속 뿔을 떨구던 수사슴의 침묵처럼

김상규, 「윤회전문

 

설산의 이미지는 위의 시에서도 이어진다. 이 시 역시 단시조의 구조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을 보여준다. 시 속 화자는 긴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죽은 자를 품에 안고있었다. 삶은 강을 건넌 물뱀의 허물처럼” “자취 없이사라지는 것이며, “설원 속 뿔을 떨구던 수사슴의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이후에는 그동안 살아온 내력에 대한 흔적도 소멸하고 만다. 쇠퇴하여 뿔을 떨구던 수사슴역시 소리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삶과 죽음은 숙명적인 관계이다. 시 속 화자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큰 소란없이 담담하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일부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순환의 과정인 것이다.

 

 

김상규 시인은 시조의 전통적인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통해 오늘날 시조를 읽는 독자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주제를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형식이라는 시조의 기본적인 특징은 계승하면서 현대적 주제와 정서를 반영하여 재해석한다는 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나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성찰을 시조의 형식을 통해 다루고 있다는 점은 시조의 현대화 측면에서도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다. 감각적인 이미지는 독자로 하여금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시의 내용을 보다 더 풍부하게 하여 독자가 그 정서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김상규 시인은 은유와 역설, 이미지를 시조에 적극 활용하여 정서의 깊이를 더하고 전통과 현대적 감각의 융합을 꿰한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실존적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깊이 고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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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현대시 정과리 응시부끄러움거세컴플레스김수영김춘수신동엽실존의 근거 2025
백애송 인간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내면화

인간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내면화 백애송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새로운 사회적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다양한 사고방식이 파생되면서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변화해 간다. 이러한 변화하는 삶 속에서 김범렬 시인의 시는 당면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탄탄하고 감각적인 시어를 통해 깊은 사유를 환기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감정 또한 분명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들을 모든 사람들이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김범렬 시인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어루만지듯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탄주(彈奏)되는 삶의 풍경 여름 한낮 탄주한다, 소낙비 오락가락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 경계 긋고 난센스 불가촉천민 간담 그리 서늘케 한.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 빠끔 낯 비춘다. 내로남불 청개구리 부르튼 입술 띄울 무렵 우화를 마친 쓰르라미 자연섭리 깨우친 듯. 말모이를 섬긴 걸까, 노랫말 줍는 그들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듣는 너나 나나 간절히 간구하는가, 목 떨구는 해바라기. 하늘 문 열고 닫는 해거름 멈칫 선다. 세상 물정 어둔 친구 금싸라기 안겨줄까?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마을 어귀 줄을 잇고. ― 김범렬, 「여름 한낮 판타지아」 전문 “여름 한낮”의 풍경은 가야금이나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힘차게 “탄주(彈奏)”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한여름의 날씨는 오락가락 소낙비를 뿌리며 변덕스러운 기운을 드러낸다. 이 소낙비는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을 경계로 삼아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을 만들어낸다. “불가촉천민”이라는 표현은 경계로 구분된 계급사회와 신분 차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가촉천민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난센스”처럼 느껴지며, 보는 이로 하여금 서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연은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소낙비가 지나간 뒤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는 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로남불 청개구리”와 같은 고단하고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연섭리 깨우친 듯” 흘러가는 “우화”의 시간은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쓰르라미가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환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노랫말 줍는 그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들으며 “간절히 간구”할 수 있다. “세상 물정 어둔” 순수한 이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의 탐욕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마을 어귀”에는 여전히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줄을 잇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 시는 여름의 한낮 풍경을 인간 사회의 모습에 빗대어 보여준다. 여기에 ‘판타지아(fantasia)’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배곯을까,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 검붉은 놀 드리울 즘 그 무슨 경종 울리나, 명치 끝 때리는 바람.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군다. 번개 배달된다기에 배꼽시계 수선 떤 날 아뿔싸! 한발 늦었구나, 한목숨 먼 길 뜨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 없고 불현듯 떠오른 그 말 “급할수록 돌아가라.” ― 김범렬, 「번개 배달 한때」 전문 현대 사회는 배달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빠른 소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음식과 물건이 주문과 동시에 집 앞까지 전달되는 편리한 환경이 일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로 위에서는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오토바이에는 배달 음식이 실려 있고, 라이더들은 음식이 식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속도를 높인다. 배달 라이더들의 증가는 생활의 편리함도 가져왔지만, 동시에 속도 중심의 문화가 만들어낸 양가적인 측면도 함께 드러낸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배곯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더 빠르게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배달 라이더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보다도 더 긴박한 것은 촉박한 시간 안에 배달을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이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해 있는 도시에서, “검붉은 놀 드리울” 해질 무렵이 되어도 라이더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구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한목숨 먼 길 뜨고” 난 뒤에야 “아뿔싸!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삐 서둘렀던 시간들이 결국 사고를 낳고, 한순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생명을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만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에 이미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조차 남아 있지 않다. 뒤늦게 후회하더라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속도를 미덕처럼 여겨온 ‘빨리빨리’ 문화는 배달 라이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라도 더 배달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곡예에 가까운 운전은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빠름을 추구하는 속도가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쉽게 외면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고요한 응시와 삶의 내면화 보름달 입맞춤한다, 소금쟁이 잠든 호수. ― 김범렬, 「달빛 호수」 전문 김범렬 시인의 시조는 현실 사회의 역동적인 풍경과 도시의 긴장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선은 한편으로는 고요한 자연의 풍경과 사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내적으로 성찰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위의 시 「달빛 호수」를 통해 고요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다. 그리고 호수에는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반영되어 보인다. 시인은 이를 호수와 달의 ‘입맞춤’이라 표현한다. 충만한 보름달이 호수를 비추고, 호수는 온몸으로 달빛을 감싸 안으며 고요한 정경을 이루고 있다. 잠든 소금쟁이가 떠 있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고,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이다. 살아가면서 시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잔잔한 순간을 얼마나 마주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시 속에 한 폭의 풍경처럼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시간이 마치 멈춰 있는 듯하다. 이 시는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을 붙잡아 고요한 사유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은 짙붉던 장미꽃 한 송이 피죽도 못 먹은 듯, 본디 넌 사랑의 화신化身 여태 불 밝히지 못한. ― 김범렬, 「겨울 장미」 전문 장미는 열정과 사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시를 지닌 존재로서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피어나는 계절은 5월이다. 그런데 시 속에 그려진 장미는 ‘겨울 장미’이다. 피어나기 어려운 계절에 피어난 장미는 환영받지 못한 채 제 빛깔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지만 한때 “짙붉던 장미꽃”은 “피죽도 못 먹은 듯” 색이 바래 있다. 본래 장미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지만 “여태 불 밝히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누군가를 향했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뜻한 계절에 피어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추운 겨울 피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장미. 시인은 이러한 겨울 장미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과 고독, 기다림의 감정을 중첩하여 보여주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존재들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타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 과정을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음의 시 「비누」가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눈길 주면 또 줄수록 닳아지는 몸맨두리 문대면 거품 게운다, 꽃무지개 띄울 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부리는 몸 한결같이.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본다.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한 떠꺼머리 뉘 봐줄까. 웬일일까, 분내 살내 몸 냄새가 그곳에서 배어난다, 바람 부는 그날따라 몸 부푸는 몸피, 몸피. 빛 쏟을 짬도 없이 폭죽 펑펑 터뜨린 날, 눈이 번쩍 귀가 쫑긋 번갯불 불똥 튄 날. 업보라는 짊어진 짐 내려놓을 그때까지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을 터. ― 김범렬, 「비누」 전문 위의 시조는 비누의 특성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표현하고 있다. 비누는 사용할수록 닳아서 없어지지만,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꽃무지개 띄울 듯” 나오는 거품으로 사물과 삶을 더욱 깨끗하게 만든다. 비누는 자신을 소모하면서 삶을 더 환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사라져가면서도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하고, 오히려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보며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빛 쏟을 짬도 없이” 하얀 거품을 폭죽처럼 펑펑 터뜨리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업보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비누의 업보는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여 끝내 닳아 소멸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으며 세상을 좀 더 맑고 깨끗한 만들고자 한다. 인간의 삶 역시 비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의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되지만 그 과정 속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며 삶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유한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배려하고 헌신하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개인의 삶은 소멸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누군가의 삶을 더 맑고 빛나게 하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새로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대 사회에서 김범렬 시인이 견인한 현실은 시어가 지닌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구체적이면서도 간명하게 드러난다. 시를 쓰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기에 김범렬 시인은 오늘의 시대를 다시 응시하며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삶의 모습들을 찾아내어 경고와 위로를 건넨다. 탄주하는 여름 한낮의 풍경과 배달 라이더,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는 비누, 겨울에 피어난 장미와 적막한 호수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다양한 장면들은 시인의 성찰을 거치며 시조 특유의 리듬 속에서 의미로 충만해진다. 시인의 언어는 시인이 직접 삶을 체화하여 행간에 의미들을 담아냈기에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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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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