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어린이와 문학 2024년 봄호 (모두모아 186호)
옛이야기의 절묘한 환생 : 오시은의 『천삼이의 환생 작전』
옛이야기의 절묘한 환생 :
오시은의 『천삼이의 환생 작전』
최원오
1. 동화와 '창작 옛이야기'
오시은의 『천삼이의 환생 작전』은 옛이야기를 소재로 빚어낸 '창작 옛이야기'이다(최원오, 2023:227). 책에는 '오시은 동화'라 표기되어 있지만,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오시은 버전의 '창작 옛이야기'가 더 어울린다. 제주 신화 '명진국생불할망본풀이'뿐만 아니라, '이공본풀이', '창세가', 『삼국유사』 소재(所載) '경덕왕 표훈대덕조(景德王表訓大德條)' 등 여러 옛이야기가 잘 융합되어, 오시은 작가만의 '창작 옛이야기'로 재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재창조,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환생은 어떤가? 옛이야기들이 잘 융합되어 한 편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환생!
환생은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남을 지칭한다. 환생은 이전 생의 모습과 성격 등을 지닌 채 태어나지 않는다. 전혀 성별이 달라질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종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그에 따라 타고난 성품이나 기질이 달라질 수도 있다. 창세신화 식으로 표현하자면, 환생은 천지개벽에 준하는 사건이다. 태초의 신화적 사건인 천지개벽까지 언급하면서 오시은 작가의 『천삼이의 환생 작전』을 호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옛이야기를 전공하는 필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여러 옛이야기(일부는 고전소설)를 절묘하게 잘 엮어 완성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 또한 큰 울림을 준다. 근래 나온 작품 중 '창작 옛이야기'의 가장 모범적 사례에 해당한다.
2. 옛이야기 융합의 작법
오시은 작가는 옛이야기들을 어떻게 융합하였는가? 이는 작품의 중심 서사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그 융합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중심 서사라면 아무래도 활용 비중이 클 것이고, 보조 서사라면 상대적으로 그 활용 비중이 작을 것이다.
이 작품의 대강은 이렇다. 천삼이는 신라 경덕왕의 딸로 태어날 예정이었지만, 왕은 후사(後嗣: 대를 잇는 이들)를 원한다. 왕의 명령을 받은 표훈은 하늘과 소통하여 여자로 태어날 아이를 남자로 바꾼다. 천삼이는 어린 나이(8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그러나 신하들로부터 약해 빠졌다는 소리나 듣다가 반란군의 무리에게 죽고 만다. 그때로부터 여자아이로 태어날 순서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삼신할망의 실수로 또 남자로 태어날 처지가 된다. 천삼이는 그에 저항해 보지만, 이번 생에는 자신이 꿋꿋하게 살며 "성별의 구분이 없는 세상을 절반 가까이 앞당길 수 있다"(오시은, 2023:82)는 '예측 미래'를 보고, 드디어 남자로 이승에 태어나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환생'이다. '천삼이란 여자 영혼이 또다시 남자로 환생하게 될 것을 거부하다가 마침내는 받아들인다'라는 환생 사건. 신의 나라에서 벌어진 한바탕 실수담이다. 그런데 단순한 환생 실수담이 아니다. 여기에는 실제 역사, 그러니까 신라 경덕왕 때의 기이한 사건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거기에 서천꽃밭의 주인인 삼신할망이 인간의 아기를 점지한다는 신화, 즉 '명진국생불할망본풀이'가 또 다른 배경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외 여러 옛이야기의 요소가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일부 장면에 등장할 뿐 작품의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제어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이 세 가지가 작품의 중심 서사를 추동시키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독자는 이 작품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읽어나갈 것인가, 또는 작가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이 작품을 창작한 것인가, 그 답변에 따라 이 작품을 내 맘대로 읽을 수도, 아니면 '아, 그렇구나, 그런 거였군!' 하며 읽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 읽건 독자의 자유지만, 근래에는 독자의 수용성을 존중하다 보니 작가 의도는 전혀 무시되거나 고려되지 않는 풍조다. 그러나 작품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유기체이니, 적어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어떻게 작동하여 한 편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어떤 주제를 전달하려는가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신라 역사뿐만 아니라, 다수의 옛이야기를 창작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숙지 여부가 작품 감상에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1) 천삼이가 여자아이로 태어날 순서를 천 년 넘게 기다렸다가 환생하는 이야기: 여자아이로 환생하기 위해 천 년 이상을 기다렸던 천삼이가 자신의 환생 과정상에 발생한 실수를 바로잡아달라고 항의하지만, 마침내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승에 환생하는 이야기. 캐릭터 특성: 부당한 일을 해결하려는 적극성
(2) 전생에 신라 혜공왕이었던 천삼이가 여자아이로 태어날 순서를 천 년 넘게 기다렸다가 환생하는 이야기: 천삼이가 성별이 뒤바뀌어 신라 경덕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으나 신하들의 성차별에 고통을 받았던 트라우마를 뚜렷하게 기억하며, 천 년이 훨씬 넘도록 여자로 환생할 순서만 기다려 왔는데, 그만 삼신할망의 실수로 다음 생에도 남자로 태어난다는 말에 전생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항의하지만, 다음 생에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거리낌 없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옥황상제의 말에 설득되어, 마침내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승에 환생하는 이야기. 캐릭터 특성: 부당한 일을 해결하려는 적극성 + 전생 트라우마(성차별)를 극복하기 위한 굳센 의지
(3) 전생에 신라 혜공왕이었던 천삼이가 여자아이로 태어날 순서를 천 년 넘게 기다렸다가 서천꽃밭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는 꽃을 받아서 환생하는 이야기: 전생에 신라 경덕왕의 아들로 성별이 뒤바뀌어 태어나 왕(혜공왕)까지 했지만, 신하들로부터 받은 성차별 트라우마 때문에 다음 생에는 본래 예정된 대로 여자로 태어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를 천 년이 넘도록 기다려 왔으나, 삼신할망의 실수로 또다시 남자로 태어날 것이라는 말에 항의하다가, 마침내는 서천꽃밭의 규칙(실수라 할지라도 한번 결정된 것은 되돌릴 수 없다)을 따르기로 하고, 삼신할망에게서 "무슨 일을 보고 듣든 무조건 네 편이 될"(오시은, 2023:95) 힘을 주는 꽃(용기를 보태주는 꽃)을 받아서 이승에 환생하는 이야기. 캐릭터 특성: 부당한 일을 해결하려는 적극성 + 전생 트라우마(성차별)를 극복하기 위한 굳센 의지 + 서천꽃밭의 규칙과 주술꽃의 힘을 믿고 다음 생의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태도
(1)은 작품의 배경지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거나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채, 그저 천삼이의 환생에만 초점을 두어 감상하는 경우다. 이 경우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치밀하게 고려하였을 배경지식이나, 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환생'이라는 독특한 소재가 뿜어내는 재미나 흥미에 밀려나게 된다. '아, 신들도 실수하는구나, 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게 신들의 실수담을 늘려주면 안 되나.' '나도 이런 얼토당토않은 실수로 태어난다면, 정말이지 억울하겠어.' '실수로 태어나는 영혼이 천삼이뿐이겠어? 부당환생심의조정위원회라도 만들어서 신들과 부당한 취급을 받은 영혼들이 대결하는 이야기도 재밌겠는걸.' 그러나 오시은 작가가, 이런 식의 '환생' 이야기 구성에 확 꽂힌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2)는 어떤가? 오시은 작가는 신라 역사를 읽어가다가, 경덕왕과 혜공왕 부자가 꽤 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혜공왕은 본래 여자로 태어날 운명이었는데, 경덕왕이 하도 후사를 원해 신적 소통 능력이 뛰어나다는 표훈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명령하고, 표훈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고자 천기를 누설하면서까지 하늘에 올라가 천제와 협상하여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태어나게 하다니, 정말이지 환생 이야기의 캐릭터로는 혜공왕이 딱인걸! 이참에, 비록 이야기로 꾸며낸 것이기는 하지만, 혜공왕의 억울함도 좀 위로하고 말이지.' 그래서 오시은 작가는 아마도 삼국유사의 '경덕왕 표훈대덕조'를 꼼꼼하게 분석하였을 것이다.
경덕왕(景德王, 742-765)은 옥경(玉莖: 남자의 성기)의 길이가 여덟 치(약 24cm)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壽太后)이니 의충(義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어느 날 왕은 표훈 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왕의 명령을 받아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왕이 다시 말했다. "원하옵건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였다. 천제가 말했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지금 대사(大師)는 마치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 모든 조화를 꾸미는 하늘의 기밀)를 누설했으니, 이제부터는 아예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왕께 알아듣도록 말했건만 왕은 다시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무척 기뻐했다. 8세 때에 왕이 죽어서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 758-780)이다. 나이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태후(太后)가 임조(臨朝: 왕을 대신해 정치하는 행위)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 떼처럼 일어나 이루 막을 수가 없었다.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그렇다. 밑줄 그은 부분에 초점을 두어 더 꼼꼼히 읽어보니, 마침 환생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던 차였는데, 그 실마리를 잘 찾았다 싶다. 그러나 혜공왕이 환생한다면, 이야기 작법 상 '개연성(蓋然性)'을 만들어 주는 게 좋겠다. 나라를 위태롭게 한 왕,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한 왕. 그런 평은 모두 딸로 태어났으면 듣지 않아도 될 평가들이 아닌가. 참으로 혜공왕은 억울한 왕이다. 스스로 택한 것도 아닌 삶, 거기에다가 이런 악평까지 사서(史書)에 길이길이 남겨 놓게 될 줄이야. 이 지점의 사고에 이르러, 오시은 작가는 환생 서사에 남녀 차별의 서사, 즉 성차별의 서사를 버무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혜공왕은 고대 신라 궁중에서 발생한, 희대의 성차별 피해자다', 뭐 그런 생각! 상당히 개연성이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이런 성차별은 지금도 목도(目睹)되고 있지 않은가. 신라 천년, 고려 오백 년, 조선 오백 년을 지나왔어도 케케묵은 골동품처럼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성차별 의식. 이렇게 읽으면 단순한, 혜공왕의 환생 서사라기보다는 지금도 이 땅에 남아 있는 성차별 의식을 타파하기 위한 이야기, 즉 '성차별 의식 타파 서사'를 개진하기 위해 혜공왕을 선택하고, 그 작법으로써 '환생'을 선택한 것이리라.
이렇게 보면, 역사적 사실에다 오시은 작가의 개인적 상상력이 덧보태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성차별 의식 타파를 위해 혜공왕 캐릭터를 잘 가공한 듯하다. 일국의 왕마저도 '남성 구실'을 못한다며 차별당했다니! 얼마나 그게 한(恨)이 되었으면 '전생의 성차별 트라우마'를 기억한 채 환생하여, 다시는 같은 상처를 입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오시은 작가의 입장에 서면, '환생'을 개연성 있게 설계하는 게, 이 작품 창작의 가장 어려운 포인트가 될 수밖에 없다. (3)이 이 작품의 핵심 서사이자 창작 기법이 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환생 서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오시은 작가는 제주 신화 '명진국생불할망본풀이'에서 가장 적절한 방안을 찾는다. 이 신화의 핵심 부분은 다음과 같다.
(생불할망이) 서천꽃밭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꽃씨가 없었다. 지부왕에게 의논하니 옥황상제에게 있다 하여, 옥황상제한테 꽃씨를 얻어 삼월 삼짇날에 오색 꽃을 오방(五方)에 심었다. 동쪽에 청색, 서쪽에 백색, 남쪽에 적색, 북쪽에 흑색, 중앙에 황색을 심었더니 동에는 청재목이 나고, 서에는 백재목이 나고, 남에는 적재목이 나고, 북에는 흑재목이 나고, 중앙에는 황재목이 났다. 동쪽의 푸른 꽃은 남중보살을 생불시키고, 서쪽의 흰 꽃은 여중보살을 생불시키고, 남쪽의 붉은 꽃은 장수하도록 생불시키고, 북쪽의 검은 꽃은 단명하도록 생불시키고, 천지 중앙의 누런 꽃은 과거(科擧) 출신이라, 그 꽃을 받아 태어난 인간은 출세하게 되었다. 생불할망은 꽃이 번성하는 대로 인간에게 아기를 점지해 준다(최원오, 2004:58).
한국 신화에서 서천꽃밭은 특별한 의의가 있다. 외국 신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신화만의 독특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명진국생불할망(일반적으로는 '생불할망'으로 지칭)이 주관하는 곳으로, 이 여신은 아기의 포태(胞胎: 잉태), 출산, 육아(15세까지)를 관장한다고 믿어진다. 그런데 제주 신화에서는 특히 아기의 포태와 관련하여, 매우 특별한 방식이 언급되어 있다. 오색의 꽃으로 아기의 성별, 장수, 출세 여부를 점지한다는 것인데, 이를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동물의 포태, 출산, 육아에 식물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신화적 사고!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한 송이 국화꽃이 피는데, 소쩍새는 봄부터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고, 간밤에는 무서리가 내리고, 시적 화자인 나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고 고백한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는데, 여러 우주적 요소가 공명(共鳴)하고, 나는 그 국화꽃 탄생의 신비에 경도되어 잠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식물에 기초한 상상력, 즉 식물적 상상력이 이 시에는 발현되어 있다. 식물은 혼자서 자라지 못한다. 농부 혼자서 성장시키지도 못한다. 농부뿐만 아니라 모든 우주적 요소가 합심하지 않고서는, 그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걸 온전하게 유지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우리는 식물의 경작을 통해서 호혜적 이타성을 배우게 된다(최원오, 2003:47).
동물은 가깝게는 가족, 멀게는 인류에 더 친연성을 느끼는 혈연적 이타성의 존재인데, 제주의 이 신화는 우리에게 그런 동물적 상상력을 주장하지 않는다. 동물적 상상력의 존재여, 부디 식물적 상상력으로 무장하여 널리 우주 세계를 이롭게 하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등등 인간을 중심에 두고, 심지어는 인간 간에도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년 등 남녀 성별이나 사회적 지위로 구별하고, 분별하며 갈라치기하고 있는 게, 작금(昨今)의 현실이지 않은가. 따라서 '특별한 환생'을 말하고 싶다면, 더욱이 그 환생의 주체가 옥황상제에게서, 고전소설 구운몽의 육관대사가 성진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였던 '분별심(分別心)을 버려라'와 같은 깨달음, 즉 "여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남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그렇게 이쪽저쪽으로 나누려는 마음이 없어야"(오시은, 2023:88) 한다는 깨달음을 듣고서, 성차별이 없는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이승에 나아가는 걸로 설계하고자 했다면, 오시은 작가는 제주의 이 신화야말로 자신의 창작에 가장 적확한 것임을 파악한 것이다.
이상 세 가지 중심 서사 중 어느 것으로 천삼이의 환생 작전을 읽느냐에 따라, 오시은 작가가 펼쳐 놓은 작법의 수준은 달리 평가될 것이다. 필자가 추천하는 것은 (3)이다. 그래서 서천꽃밭이라는 공간, 그 신화적 공간에 있는 꽃들이 인간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상상력을 즐겨보았으면 좋겠다. 여기에 군데군데의 삽화 구성에 활용된 다수의 옛이야기도 즐길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모두 오시은 작가가 천삼이의 환생 작전을 구상하는 데 활용한 것이니, 옛이야기를 활용한 창작 기법의 차원에서 점검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인 것이다. 그중에서 이제까지 살펴본 중심 서사들을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렇지만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바로 '이승을 차지하기 위한 내기 VS 삼신이 되기 위한 내기' 부분이다. 한국신화에는 신들이 이승을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대결로 꽃 피우기 내기를 한다는 신화소(神話素)가 보편적으로 들어 있다. 내륙의 신화 '창세가'에서는 미륵과 석가, 제주의 '천지왕본풀이'에서는 대별왕과 소별왕이, 그 대결의 신이다. 여기서 미륵과 석가는 등장 순서에 따라, 마음 씀씀이에 따라 구별된다. 미륵은 이 세상에 최초로 등장한 신이며 공정과 정의를 준수하는 마음을 가졌고, 석가는 미륵의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 뒤늦게 등장한 신으로 공정과 정의와는 거리가 먼, 속임수를 잘 쓰는 마음을 가졌다. 한편, 대별왕과 소별왕은 쌍둥이 형제로, 신명(神名)만 다를 뿐 그 신적 기능과 성격은 미륵과 석가에 그대로 대응된다. 즉 대별왕은 미륵에 대응되며, 소별왕은 석가에 대응된다.
그렇다면 이들 신이 펼친 '꽃 피우기 내기'에서 누가 이겼을까? 실질적으로는 미륵과 대별왕이 이겼지만, 석가와 소별왕은 속임수를 써서 자기가 먼저 꽃을 피웠노라고 억지 주장을 펼쳐 이승을 차지하고, 미륵과 대별왕은 저승으로 밀려난다. 석가와 소별왕이 속임수를 써서 이승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이승에는 온갖 부정한 신들이 만연하게 되었고, 그에 비해 저승은 청명(淸明)한 미륵과 대별왕이 다스리기 때문에 항상 공명정대하게 되었다는 게, 이들 신화의 결말이다. 오시은 작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변용한다. 즉 이승을 차지하기 위해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이 내기를 하였고, 그 내기에서 옥황상제는 "세 번의 내기마다 속임수를 써서 염라를 거짓으로"(오시은, 2023:58-59) 이긴다. 그래서 "내기는 내기라 결과에 따라 옥황은 이승을, 염라는 저승을 다스리게"(오시은, 2023:59) 된 것으로, 창작은 연금술사에 준하는 작업이니, 이 정도 비튼 것에 뭐랄 수는 없다.
그러나 누가 삼신이 될 것인가를 다투는 대결에서, 삼승할망(명진국생불할망)과 구삼승할망의 꽃 피우기 내기는 미륵과 석가, 대별왕과 소별왕의 그것에 비해 사뭇 다른 점이 있다. 구삼승할망의 꽃나무는 처음에는 꽃이 번성하였으나 이내 시들어버리고, 생불할망의 꽃나무는 처음에는 꽃이 연약하였으나 나중에는 번성한다. 그 결과 구삼승할망은 저승에 가서 죽은 아이들을 맡고, 생불할망은 인간의 생불 노릇, 즉 포태시키고, 출산시키고, 그 아이가 15세가 될 때까지 육아를 담당하는 삼신이 된다. 결코 속임수도 없고, 승패도 명확하며, 결과에 승복하는 신들의 내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신화의 결말에는 내기에 진 구삼승할망이 성질을 부려, 검뉴을꽃(시드는 꽃)으로 백일 지난 아기에게 경풍(驚風: 어린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병의 총칭)을 주어 저승으로 데려가기도 한다는, 지극히 현실적 사례가 덧붙여진다. 실제로 예전에는 백일 이전에 아기가 죽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신화에서는 이를 내기에 진 구삼승할망의 작란(作亂)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이를 오시은 작가는 "이승에 저승 할망의 영역이 있기 때문"(오시은, 2023:74)에 "열 살 전이라도 죽음을 맞는다는 것"(오시은, 2023:74)으로 약간 비틀어서 설정한다.
신화는 현재적 제 현상에 대한 기원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승에 부정한 사람이 많으니, 그건 최초의 신들이 벌인 이승 차지 내기가 잘못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아기의 포태, 출산, 육아는 다르다. 이것들이 부정하게 실행되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도 아예 포태를 못 하게 된다거나, 겨우 포태는 되었지만 출산 과정에서 대부분 죽는다거나, 또 태어나 자라더라도 15세 이전에 대부분 죽는다거나 하는 현실은 없는 것이다. 물론 검뉴을꽃, 즉 '시드는 꽃'이나 피워내는 구삼승할망이 삼신이 되어 인간의 포태, 출산, 육아를 관장하게 된다면 가능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면 인간 세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신화에서도 정정당당하게 이긴, 삼승할망이 삼신의 신직(神職)을 맡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한데,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을 이승 차지 내기의 당사자들로 설정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절대적으로 착오 없이 이뤄져야 할, 생명을 탄생시키거나 환생시키는 기능을 맡은 삼신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이것은 신화와 현실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작법이다. 오시은 작가가 부린 작법의 마법 중에서 유일한 옥에 티가 아닐까 한다. 삼신의 손이 아닌, 그래서 삼신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 작동하여 천삼이가 또다시 남자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설정, 예컨대 제주 신화에서 보듯이 서천꽃밭에 등장하는 '새'(서천꽃밭에 침입한 새)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부분이다.
3. 신적 영웅의 길, 천삼이의 길
성차별을 받는 아이들, 그러니까 외모는 남자인데 왜 그리 여자처럼 "약해 빠졌다고"(오시은, 2023:45), "차라리 치맛자락을 두르고 바느질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오시은, 2023:45)는 말을 듣는 남자아이, 또는 외모는 여자인데 왜 그리 남자처럼 "뻐시냐고", "차라리 바지 입고 칼이나 들고서 무예 훈련하는 게 나을 것 같다."라는 말을 듣는 여자아이, 이 두 가지 상황 중에서, 오시은 작가는 첫 번째 상황을 선택했다. "여자고 남자고 똑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하고 누구는 못 하는 일"(오시은, 2023:44)이 없는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첫 번째 상황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은 사회적 약자의 몫이고, 항상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니, 옛이야기의 문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리라. 또한 사회적 강자가 이룬 혁명보다 사회적 약자가 이룬 혁명이 더 위대하지 않은가. "성별의 구분이 없는 세상을 절반 가까이 앞당길 수 있"(오시은, 2023:87)는 주인공 천삼이의 탄생, 그 자체로써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확하다. 성차별이 만연하였던 세상에서 성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천삼이의 환생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주제다.
한국 구전신화의 주인공은 자신이 겪은 일에 부합하는 신직을 맡는다. 바리공주가 생인(生人)으로서 저승에 다녀왔기 때문에 나중에 망자를 저승에 천도(薦度)하는 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점에서 천삼이의 환생 서사(출생 서사)는 신화의 주인공에 비견되는 바가 있다. 따라서 천삼이는 신라 적에 성차별을 겪었으니, 이번 생에는 그걸 개선함으로써 마침내는 그에 상응하는 신적 영웅(신과 인간 영웅의 중간적 존재를 말한다. 최원오, 2019:9-47)의 길에 도달할 것이다. 천삼이가 환생하자마자 "벌써 하루가 당겨졌군,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오시은, 2023:97)는 벌써 그 신적 영웅의 길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지금은 며칠이나 당겨졌을까? 이 작품이 2023년 8월 11일에 출판되었으니, 현재 150일은 넘은 듯하다. 독자 여러분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천삼이의 길, 신적 영웅의 길을 응원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오시은(2023), 천삼이의 환생 작전, 창비.
최원오(2004),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 한국신화, 여름언덕.
최원오(2003), 창세신화에 나타난 신화적 사유의 재현과 변주: 창세, 홍수, 문화의 신화적 연관성을 통해, 국어교육 111, 한국어교육학회.
최원오(2019), 창세신화의 창세신과 신적 영웅, 그 변별적 자질의 분석과 의미: 남미 테우엘체 원주민의 엘랄 작품군을 중심으로, 외국문학연구 74,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최원오(2023), 옛이야기와 전래동화, 한국아동청소년문학학회 지음, 100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아동청소년문학, 창비.
최원오 광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현재 한국구비문학회 회장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아동청소년문학회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동문학 관련 작업으로 굽이구비 옛이야기전집 1-10(기획 감수, 해와 나무, 2011-2018), 맨 처음 사람이 생겨난 이야기(공저, 미세기, 201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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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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