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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신생 | 2024년 겨울호(제101호)

이야기-하기의 시학

최진석 문학평론

『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도서출판b, 2022) 『사건과 형식. 소설과 비평, 반시대적 글쓰기』(그린비, 2022) 『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문학동네, 2020) 『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그린비, 2019)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그린비, 2017) 등을 썼고,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자음과모음, 2013) 『해체와 파괴. 현대철학자들과의 대담』(그린비, 2009) 등을 옮겼다.

1. 현실, 방법으로서의 문학


  현대 언어학의 주요 이론가 중 하나로 꼽히는 로만 야콥슨은 현대 문학이론의 창시자 명부에도 이름이 올려져 있다. 20세기 초엽 등장한 러시아 형식주의는 그가 참여했던 시학과 문학 이론 학파로서, 어떻게 시문학이 고유의 예술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지 묻고 답하려 했던 집단이었다.1) 야콥슨과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예술적 가치가 언어적 형식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 문학이 개시된 이래 작품의 이념적 내용이 예술적 가치를 자연스레 담보하리라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20세기 비평의 문제틀을 뒤바꾼 러시아 형식주의의 문제의식은 예술적 가치의 핵심이 ‘현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현하는 방법’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에 따르면 작가든 비평가든 현실이라는 관념에 맹목적인 우월성을 부여한 나머지 도대체 현실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재현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19세기의 특정 사조가 거의 독점해온 ‘리얼리즘’ 즉 ‘사실주의’라는 용어였다. 최대한의 개연성을 추구하여 현실을 가장 충실하게 전달하는 사조라는 사실주의의 일반적 정의는 근본적인 애매성에 봉착해 있었다.2) 무엇이 문제였을까?

  현실에 대한 충실성, 혹은 ‘그럴듯함’이라는 개연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의된다. 첫째, 무엇을 현실이라 믿고 재현하는가, 라는 질문은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을 함축한다. 모든 현실은 주체로서의 작가가 마주치고 형상화하는 가운데 조형되는 대상이니 근본적으로 작가에 의해 지향된 현실, 즉 특정한 입장과 태도로부터 연유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둘째, 재현된 현실을 개연적이라고 판단하는 수용자의 입장도 관건이다. 수용자로서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그는 작가가 재현한 현실의 진실성에 관해 판단해야 한다. 작품의 의미는 작가와 독자, 주체와 수용자의 두 시선이 마주치는 곳에서 성립한다. 이때 두 시선의 일치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개연성이 작가 입장에서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재현 방식을 가리킨다면, 독자 입장에서 그것은 자기 경험을 통해 실증되는 적합성 여부를 뜻한다. 두 시선의 교차점 어딘가에서 현실은 ‘발생’하며, 개연성은 두 시선이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규범적 결과이다. 요컨대 현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의 효과를 말한다.

  ‘현실’이 일정한 규범의 효과라는 말은 ‘재현’ 역시 자연적이거나 선험적인 확실성을 담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방법이 바뀌면 조건도 바뀌고, 현실은 다르게 구성된다. 따라서 개연성은 한편으로 규범의 준수에 대한 ‘법보존적 폭력’으로 작동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규범의 외부를 향한 ‘법정립적 폭력’으로 나아간다.3) 전자는 우리가 작품을 ‘사실주의적’으로 인지하는 규범의 조건(코드)을 강제하는 반면, 후자는 우리가 작품을 ‘무질서’로 지각하게 만드는 탈규범적 사건과 그 너머를 드러낸다. “혁신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을 사물 속에서 발견하고, 지각에 새로운 형식을 부과한다.”4) 그렇게 지각에 새로운 비전(vision)을 제공하는 데서 ‘새로움’이 나타나며,5) ‘무질서’는 ‘리얼’한 것으로 동기화된다.6) 요컨대 예술의 혁신, 또는 혁명은 현실을 지각하는 방법 즉 비전의 창조에 값한다. 현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현실적인 것인지는 예술가가 제시한 세계의 비전에 대해 수용자가 응답할 때 결정된다. ‘리얼한 것’으로서 세계는 창안된 현실의 비전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최고의 현실성을 가리키는 용어 ‘리얼리즘’은 19세기의 특정한 예술사조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예술가도 스스로를 ‘비현실주의자’라 자처하지 않고,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꾸로, 모든 예술가는 자신이 진정한 ‘리얼리스트’이고, 자신이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리얼한’ 대상임을 주장한다. 그의 펜끝에 재현된 세계야말로 참된 현실이라는 뜻이다. 핵심은 어떤 방법으로 묘사된 세계가 현실성을 갖는가에 대한 답변, 곧 재현의 방법에 놓여 있다.



2. 이야기, 공동체의 조건


  모든 시대의 작가는 자신을 ‘리얼리스트’라 명명한다. 특정 시대에 속한 작가는 자기의 묘사 방법이 (유일하게) ‘리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참되고 진실한 묘사가 문제라는 점은 우리 시대도 예외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방법에 대한 물음과 불가결하게 이어진 이 질문은 답변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를 우리 시대의 정체성이나 본질에 대한 정의와 곧장 연결하지는 말자. 그런 대답은 가능하지도 않고 부질없을 뿐이다. 한 시대를 보편적으로 대리하는 관념이나 의미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시대를 관류하는 특정한 분위기, 무의식적 욕망이나 집합적 감응에 대해 말할 따름이다.

  거대 서사, 즉 한 시대를 초월적으로 장악하는 이념이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근대로 대표되는 거대 이념의 시대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상징적 매개를 통해 이 세계에 일관성의 틀을 도입했다. 어떤 지식이 ‘과학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실험 가능하고 반복 가능하며, 객관성을 실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과학적인 것과 과학적이지 않은 것으로 분류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기술이 등장했다는 말이고, 그로써 해당 사회를 지배하는 통치성이 확립된다.7) 그런 ‘일관성의 틀’은 예술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가령 근대 회화의 표준적 모델을 마련한 투시법은 묘사 대상을 마음속에 상상한 격자틀에 집어넣고 분할·배치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재현하면서 성립했다.8) 투시점을 중심으로 모든 대상은 특정한 비례관계를 맺음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고, 누구라도 이 틀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은 ‘합리적(과학적)’ 지식으로 인정받는다.

  문학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을 문자적 질서에 담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호 무관하게 벌어지는 숱한 사태들을 낱개의 말뭉치로 열거한 결과를 문학작품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근대 이전부터 이야기(narrative)의 형식을 통해 (‘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적인 것’은 항상 존재해 왔다.9) 문제는 그 많은 이야기-조각을 한데 엮는 틀을 얼마나 총체적이고 일관적으로 주조해 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무작위성의 묘사를 넘어서, 일련의 인과적 연쇄, 그리고 통일적으로 완결된 서사를 만드는 것이 근대 문학의 과제였던 것이다.10) 비록 19세기에 접어들며 더 이상 보편성 자체가 아니라 전형적인 동시에 개성적인 것을 재현의 목표로 삼게 되었을지라도, 세계의 전부를 묘사하되 세부의 우연성만은 기필코 봉쇄해야 한다는 데서 과학과 접목된 문학의 리얼리즘이 근거했다는 점은 거대 서사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11)

  과학이 일관성의 틀을 형성하는 지위를 상실함으로써, 과학 바깥의 모든 문화적 영역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시대가 ‘포스트모던’이다. 이 단어가 지금 얼마나 유효한지 우리는 논쟁할 여유가 없다. 다만, 포스트모던이 모던의 연장선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12) 모던 시대의 거대 서사는 미시 서사(petit récits)로 분해되고, 각각의 미시 서사는 저마다 자신의 정당성 담론으로 기능하게 되었음을 밝혀 두자. 핵심은 작건 크건 서사 자체의 형식적 기능, 즉 규범성의 형성에 있다. 모던 시대에 그러했듯, 모던 이후의 시대에서도 서사는 공동체의 의사소통을 가동시키는 조건으로 작동하고, 해당 공동체 자체를 정당화한다.13) 쉽게 말해, 하나의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사유와 행동을 합당한 것으로 공리화하고, 그에 정당성을 보장함으로써 공동체의 지속과 재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서사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서사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현재 우리 시대가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규범화하는 형식에 대한 물음이자 답변과 같다.

근대 문학사에 비추어, 문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 표상 형식이자 언술 형식의 지위를 잃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서사를 주된 표현적 양식으로 삼는 문학의 기초 존재론적 지위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편집과 재현의 글쓰기 전략으로서 문학은 여전히 공동체의 규범성을 형성하고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 점에서 문학은 현재의 공동체가 무엇을 자신의 표현적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시 또한 그와 같은 측면을 공유해왔다. 장르에 대한 교과서적 이론과 달리, 시는 소설과 다른 양식의 서사성을 보유하며 사회적 의사소통의 의미망을 형성해 왔다.14) 시적 서사는 소설적 서사와 다른 방식으로 직조되고 작동한다.

  이제 논의를 이끌어갈 핵심 주제에 거의 도달한 듯싶다. 시는 어떤 서사를 조직하는가? 시는 어떤 이야기를 형성하는가? 시적 서사는 무엇을 표현하는가? 최근 시 작품에서 서사적 경향의 우세라는 요소를 출발점 삼아, 시적 서사가 우리 시대를 형상화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3. 서사, 세계상의 시적 전개


  작품을 구체적으로 읽기 전에, 우선 시적 서사에 관해 어느 정도 합의할 필요가 있다. 관행적으로 문학에 국한하여 이해된 서사(récit)는 특수하게 쓰여진 언어적 수단을 통해 실제적이거나 허구적 사건, 또는 일련의 사건들을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15) 이 전통적 규정에 매달릴 때, 우리는 이야기하는 주체와 이야기되는 대상의 이분법에 고착되기 쉽상이며, 양자 사이에 위계를 놓곤 한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나가본다면, 서사라는 형식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조건 즉 사건의 여러 관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를 반영한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곳이 여기다. 이 같은 반영은 서사의 행위와 형식이 현실과 연동되어 있고, 현실의 실제 양태를 형식적으로 포섭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사는 이야기의 양식성과 더불어 시대 자체를 조건적으로 포함한다. 한편으로 서사는 시대를 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사는 시대를 창안한다. 특정하게 조건화된 세계의 형상화에 서사의 기능이 있다.

거대 서사가 몰락하며, 미시 서사들 곧 ‘작은 이야기들’이 이 세계를 채우게 되었으며,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 자주 언명되었다. 국가와 민족, 사회처럼 거대한 집단의 이념과 가치 등에 천착하지 않는 시대는 개별화된 모두의 삶을 귀중하게 여긴다. 위인과 영웅의 일대기만큼이나 장삼이사의 일상도 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나아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까지 나름의 의미를 간직하는 고귀한 존재로 부각된다. 그러나 유일무이한 각자의 실존은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서사 속에 장착될 때 존재하기 시작하며, 특정하게 가치화된다. 문제는 “세계에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온 천지 길바닥에 무수하게 굴러다”닌다는 사실에 있다.16)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황금처럼 빛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빛나는 것으로 식별할 수 없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든 의미란 기실 무의미나 다름없고, 그 무엇도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존재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은 동시에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의미는 한정된 자원이며, 특정한 구조를 통해 무의미 가운데서 의미로서 구별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이 보여주듯,17) 모든 것을 인식하는 자는 아무것도 의미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돌파구는 미시적인 것에 올려진 도덕적 무게추를 치우는 것, 현실을 방법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개별적인 것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자체가 사건들의 분절 불가능한 연쇄라 할 때, 유일무이한 사건의 순간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처럼 의미 없는 사건들이 파편적으로 분산된 채 우리를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개별적인 모든 것마다 가치가 충전되는 것은 그 순간들이 서사를 통해 엮이고 있을 때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세계 자체를 이해한다. [...] 다양한 이야기와 ‘화법’을 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해석하는 것이다. [...] 서사는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안경’ 같다.18)


  이야기를 통해 글쓰기를 형식화하는 것은, 특정한 굴절각과 색깔이 입혀진 안경을 쓰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시 서사 혹은 단편적인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안경으로서, 시가 이런 서사의 형식을 수용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짚어보는 것은 각별한 경험이다. 요컨대 특정한 서사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 시대의 시는 우리에게 발화하고 있다.

  최근의 시에 나타난 서사 형식은 다음 세 가지로 꼽아볼 만하다. 첫째, 시적 형식에 이야기를 삽입해 전개하는 방식. 환유적 서사의 산문 양식을 채택하되 운문의 형식성을 지킴으로써 혼합적 특성을 만들어 내는 것. 둘째, 각주와 설명적 기법을 동원해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 주석을 통해 인용이나 설명을 덧붙이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근 시의 각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본문을 대체보충함으로써 서사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셋째, 내용과 형식에서 산문적 글쓰기를 그대로 차용하고 운문의 양식은 최소화하는 방식. 전통적인 산문시와 유사하지만, 화법을 자유롭게 엮으면서 표현되는 세계상은 어떤 것인지 유심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 방식이 과거의 시적 형식과 크게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기교가 표현의 방식을 넘어서, 최근 시가 지향하는 세계상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특징들을 논의해 보려 한다. 이는 새롭고 낯선 세계에 대한 ‘징후’이자 ‘경향’으로서의 표현적 형식에 관한 독해에 가깝다.


3-1. 환유와 전복되는 세계


  시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개인의 감정을 압축적인 표현 속에 담아내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서정시는 시인 본인을 투사한 화자의 정서를 은유나 직유 등을 동원해 드러내는 장르이다. 이때 은유는 상이한 대상들을 접붙이는 방법으로서 시적 표현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각광받아 왔다. 은유는 순간적으로 강력하게 의미를 발화할 수 있으나, 행위의 사건적 연쇄를 낳는 데는 부적합하기에 서사적 구성에는 미흡하다고 간주되었다. 인접성에 근거한 환유적 서사가 산문 장르, 특히 소설에 주요하게 할당되었던 이유가 그에 있다. 그러나 서사시라는 분류 이외에도, 시 일반 또한 일정 정도 서사를 갖고 있으며, 여기서 환유는 적극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특히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는 환유가 주축일 수밖에 없고, 이는 하나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전시하는 방법이 된다.


가정주부로 살아온 자는
죽을 때도 주부로 죽는다

집안일에는 은퇴가 없으니까

내 꿈은 가정주부
사계절 일용직
시인은 비정규직이에요
저는 집이 없어요
재산도 없어요

저는 남편을 찾으러 여기 나왔어요

지금 가족은 너무 낡았어요

그러니까 내 꿈은

은퇴 없이 살고 있어요

말을 더 덧붙여야 할까요?19)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사에는 남성중심주의를 중심으로 구축된 가부장제가 놓여 있다.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식 양육을 통해 사회구성원 배출에 기여하는 데 여성의 목적을 설정하는 여성의 어떠한 개인적 성취나 의미도 부정한다. 평생을 주부로 헌신해야 하지만 “가정주부”는 “일용직”에 불과하며, “시인”이라는 예술적 성취는 “비정규직”으로 격하된다. “집”도 “재산”도 없다는 말은 여성이 시민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남성 시민에 대한 부차적 위치만 차지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홈 스위트 홈”은 남성 가부장제가 이룬 근대 국가와 사회, 그것들을 지탱하는 하부 중추로서의 가족/가정이 기실 ‘다른 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아빠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 앞에서 거칠게 거수했고, 모서리를 향해 발길질하겠다고, 겁을 줬다 단지 겁을 줬을 뿐인데내 펜은 부러졌고, 혀로
휘둘렸다

그날

나는 방 안에 꼼짝 않고 밤새 노안은 절대로 살필 수 없을 만한 크기의 글씨로 빈 바닥을 조용히 채웠다

살려주세요


  화자는 “노안”으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글씨로 “살려주세요”라는 원초적 비명을 쓸 수 있을 뿐이다. 자기 시를 널리 읽히고 싶은 시인의 꿈과는 정 반대되는 현실이 앞을 막아선 것이다. 통상적인 ‘시’의 정의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럼에도 시라는 비실용적이고 비실제적인 글쓰기를 통해서만 삶의 진실은 표명된다. 이 작품에서 가부장제와 여성의 억압이라는 현실을 읽어내기 위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는 일상어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전진하고, 이어지는 시행들은 화자가 겪는 멸시와 폭력, 모멸감의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전개해 보여준다. “홈 스위트 홈”이라는 제목에서 “가정주부”, “집안일”, “집”, “재산”, “남편” 등으로 이어지는 ‘아내’의 인접적 이미지와 “일용직”, “비정규직”의 이미지는 “시인”과 결합하며 기묘한 충돌을 빚어내고, “살려주세요”라는 어구에서 종결되며 여성이 경험하는 삶의 비참성을 강화한다.

  알다시피, 이 시는 2015년 이래 페미니즘 리부트를 계기로 터져나온 여성주의적 시문학의 큰 줄기에 속한 작품이다. 하나의 거대한 사회운동을 반영하고, 시대적 조류를 독해의 문맥으로 삼을 때 가장 적확하게 읽히는 이 작품은 환유적 서사를 통해 현재의 세계상을 폭로하고 이후에 도래할 세계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운문에 대해 기대할 법한 전통적인 형식을 취하긴 해도,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산문적 술어로 작성되어 있고, 그 의미론적 내용은 ‘지나간 시대’의 어두운 진실을 문제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예기하는 것이다. 산문 특유의 자질구레한 묘사를 걷어낸 채 행과 연을 통해 화자의 독백을 잇거나 끊고, 그로써 격렬한 정서의 파토스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시적 형식이 갖는 힘을 표현한다. 여성의 예속과 억압을 드러내는 문학작품은 많지만, 시적 서사가 갖는 고유함은 이러한 표현의 형식에 힘입은 것이다.

  삶의 다면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서사의 형식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전통 서정시가 갖는 압축적이고 간결한 생략의 특징과 달리, 환유를 바탕에 둔 서사는 현존하는 세계의 특정 국면을 설명하고 시적 형식을 통해 그 균열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우리 시대의 문학적 조류로서 소수성을 전면화하는 작품들, 특히 페미니즘 시문학의 문제의식을 드러낼 때 서사가 주요한 경향성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그에 있을 듯하다.



3-2. 주석과 대체보충되는 세계


  주석은 학술적 글쓰기의 표준적 방법론으로서, 타인의 말을 인용하거나 자신의 설명 및 주장에 대한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이다. 간단히 말해, 주석은 논증을 위해 동원되는 설득의 방법이다. 따라서 창작 장르에서 주석을 다는 것은 흔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허구에 바탕을 둔 글쓰기로서 시와 소설은 무엇인가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표명을 통해 자기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환유적 연쇄를 이용해 서사를 구축하는 소설의 경우,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여 문단을 만들고, 장과 절을 직조함으로써 주석이 갖는 논증의 특성을 본문 중에 구현하게 된다. 즉, 수많은 개별 이야기 다발을 길게 엮어서 인물과 그를 둘러싼 인적이고 사회적인 환경, 나아가 시대사적 배경까지 묶어내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가 소설인 것이다. 반면, 행과 연을 통해 단어와 어구를 잇고, 인물과 사건의 전체성이 아니라 특정한 장면을 구성해 전개하는 시적 서사에서 주석은 다르게 기능한다. 완성된 문장에서 빠진 부분들,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서술되지 않는 부분들을 보충적으로 이야기하고, 이로써 형상화된 세계상의 빈틈을 메우고 또 완성하는 것이 시에 나타나는 주석이다.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앵무새를 키웠다. 앵무새가 나의 얼굴에 부리를 그었다. 총을 쐈다. 앵무새처럼 밝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저, 태양에게. 다량의 수면제를 먹였다. 코뿔소처럼 밝음을 전투적으로 보여주는 저, 태양에게. 또, 실망이 나팔꽃 줄기처럼 뻗어 나간다. 이번에는, 눈물이 레몬처럼 달고 얼음처럼 따뜻하다. 내가 되기 위해 나를 따라했던 나는, 줄줄…… 잠시만요, 찬장에, 찬장에서…… 쌓아 놓았던 썩은 양파 같은…… 눈물이 깎은 손톱처럼…… 이를 어쩌나? 어떻게 해도 말끔하게 청소되지 않은 슬픔이 기진맥진한 채 천장 안쪽에 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꺼낸다. 잿빛으로 질질 떠다니는 살점이다. 실패의 모습이다. 코를 찌르는 본능이다. 정전이 되었던 신경이다. 내가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오늘이 컷, 되어도 오늘인 이유를 물어보는 건 실패에게 “왜 충실하지 못했니?” 물어보는 것과 같지 않나?20)


  산문 형식으로 쓰여진 이 시는, 서술된 형태나 내용 자체로는 화자의 본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앵무새”는 반복되는 어떤 언표나 상황(“밝음”)을 뜻하는데, 대개 긍정을 표상하는 “태양”의 함의가 그것과 어떻게 연계되는지는 불분명하다. 후반부를 뒤덮는 “포름알데히드 병”과 “살점”, “실패”의 언표은 “죽음”과 결합함으로써 글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제목(“리스트 컷”)과 부제(“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될 것”)는 이 작품의 주제가 자신을 향한 물음과 답변에 대한 치열한 요구임을 직감하게 만들지만, 본문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이런 본문의 불확실성을 보충하면서, 전반적인 주제를 보다 명료히 만들어주는 것이 첫 문장의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에 붙은 주석이다. 무려 두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주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자살했다. “나와 함께 나라는 인간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분석하고 마침내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으니까. 자살은 “아기”니까. 최근 고안한 자살 방법은 지금까지 썼던 방법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칼이란 칼은 모두 꺼내 식탁에 올려 놓은 다음 천장 안쪽에 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꺼내 칼들 사이에 놓는다. 그리고, 본다. 나는 나의 살점이 떠다니는 포름알데히드 병을 보는 동안의 나는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중인 나다. “사산한 내일의 작은 기형아들이 옹기종기 누워 있는” 엄마의 자궁 속에 있다 보면 “기진맥진한 불면의 혈액이 혈관 속에 질질 기어다니고, 공기는 비로 탁해져 잿빛으로 변해 버리고, 길 건너에 사는 빌어먹을 난쟁이들은 죄다 몰려와 도끼며 송곳이며 끌 따위로 지붕을 퉁탕퉁탕 두들기고 있고, 타르의 지옥 같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상태가 되는데, 그 상태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을 다시 재현”해 보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왜 자살했을까?” 생각한다. “사라 티즈데일을 비롯해 그 수많은 영민한 여성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신경증 때문에? 그들의 글은 과연 깊은 본능적 욕구의 승화(아, 이 끔찍스런 단어)였던 것일까? 그 해답을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삶의 목표를, 삶의 조건을 얼마나 높이 내걸어야 하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번에도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칼을 서투르게 들고 휘”두르며 “칼처럼, 몸을 돌릴 때마다, 칼을 중심으로 돌면서, 펄떡펄떡”거리다가, “펄떡펄떡” 떨어져 나가는 살점에 흠칫 놀라 칼을 떨어뜨려 버리고 만다. 또, 실패구나. 용의주도하지 못했기에 “실패 속에서도 더듬으며 열심히 파악해 보고자 하지만, 도체체 어쩌다”이렇게 되었을까? 자책하게 된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자살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믿기에, 떨어져 나간 나의 살점을 포름알데히드 병에 넣으며 “내 평화와 온전함에 친절하게 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칼로 벤 상처에 더욱 충실”할 것임을 다짐한다. “지금까지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으니, 칼에 찔렸던 상처도 금욕한다 해서 더는 치료될 수 없”지 않겠는가?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자살했다.”고 말했고, 당신은 그런 나를 『실비아 플라스에게 빠진 여자』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라고 치부하며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The Journals of Sylvia Plath)』를 옮겨 적는 나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미쳤다”고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고 “모욕을 가했”다. 나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의 말을 “진실”이라고 “전적으로 믿게”되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그러므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흉측스런 징표와 흉터를 뺨에 달고 무덤에서 뛰쳐 나오는 일이 주는 감각적 매혹”으로 “죽음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을 뿐이라고 어차피 “내일은 죽음으로 향한 또 하나의 하루”일 뿐이라고 말했고, 당신은 어떻게 “몽산가들이 꿈꾸는 것은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말했다. 당신이 나의 어머니처럼 나를 “수치”스럽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뻔뻔스럽고 당돌”하게 자살할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은 남자들의 세상이라는 사실로 다시금 귀결”되고 “여자로 태어난 게 나의 끔찍스러운 비극”이기에, “페니스와 음낭이 아니라 가슴과 난소의 싹을 틔울 운명을 타고”나 “엄격한 관계 속에 갇혀” 버렸기에, “기껏 남의 정서를 맡아 관리해 주는 관리인이나 아기 보는 사람, 남자의 영혼과 육체와 자존심을 먹여 살리는 유모 노릇이나 해야” 하기에, 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는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로 시작하는 주석의 첫 문장은 본문의 첫 문장과 같다. 어쩌면 본문과 주석이 상호 호환되는 두 세계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석의 글자 수가 본문보다 많으며, 더욱 구체적인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주석과 본문 모두 구조적으로 완성되거나 자족적인 전체를 이루지는 않고,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읽힘으로써 전체적인 주제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21) 나아가, 이를 통해 ‘자기에 대한 물음을 위한 자기의 답변’이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돌파해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여성의 삶과 자기의식이 남성중심적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억압되었고, 이는 사회적 진출이라는 외적 측면에 대해서나 자기 정체성 형성이라는 내적 측면에 대해서도 부정적 효과를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성주의적 서사는 남성이 스스로의 결단과 결의를 통해 주체화되었음을 선포했지만, 여성은 그 같은 질문에 답하기에는 부적합하고 미달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 시는 “나에 대해 말하기”, 즉 여성의 자기 형성에 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쓰여졌다. 그에 대한 답변을 본문에서는 시적 형식을 통해 전경화했고, 주석을 통해서는 그것이 참조해야 할 사회‧역사적 맥락을 만들어 후경화했다. 본문과 주석은 각각 여전히 미완성과 불완전성에 머물러 있으나, 서로에게 섞여 들며 지향된 상태로 나아갈 여지를 열고 있다. 그것은 근대의 남성중심적 서사가 만들었던 길과는 다른 여정을 예고하며, 낯선 세계의 도래를 알리는 미-래의 흔적일지 모른다. 요컨대, ‘대체보충적 서사’라 명명할 만한 이 글쓰기 스타일은 낡은 세계의 기각과 새로운 세계의 전진을 본문과 주석이 벌이는 이중의 운동 속에서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3-3. 대화와 (재)창안되는 세계


  문학작품에서 대화를 독립된 문장으로 표현하게 된 것은 화법이 발전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가령, 간접 화법 속에 포함되었던 제3자의 말은 직접 화법 곧 따옴표 속 문장으로 분리됨으로써 온전히 누군가의 소유격 언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여러 행에 걸쳐 교차하는 대화 표시 구문의 연쇄를 통해 타인들 사이의 언어적 소통으로 현시된다. 개화기 초의 신소설이 잘 보여주듯, 근대 소설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너’와 ‘나’ 사이의 언어적 경계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든 ‘나’든 ‘그/녀’든, 언표하는 주체 사이에서 ‘누구의’라는 소유격이 확실하게 규정될 수 있는 말이 과연 가능할까? 일견 엉뚱해 보이는 이 질문은, 말과 사유의 본원적인 특성에 관해 묻는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말로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언어를 창시한 자는 없다. 개별적 자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언어는 존재했고, 기능했다. 태초의 언어가 있었으리라 가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소유격을 통해 확정되는 소유물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들 사이의 대화는 물론이고, 개인의 독백적 사유에서도 언어는 대화 및 사유의 주체에 속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체의 외부, 바깥으로부터 틈입한 이물질에 가깝고, ‘나’보다는 ‘세계’의 사물성에 근접해 있다. 그러니 사유든 대화든 ‘주어’라는 소유주, 또는 소유의 주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착각에 다름 아니다.

  문학작품, 특히 소설이 당연하게 전제하는 대화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끊임없이 서로를 침범하고 섞여 드는 타자성의 말들, 혼종성의 언표들이다. ‘자유 간접 화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낯선 말의 흐름은 새로운 언술을 요청한다. 문법화와 탈문법화가 길항하는 가운데 새로운 발화의 형식이 탄생하는 것이다.22) 그것은 무엇을 새롭게 구축하는가?


구로동 2길 23번지 옵션 완비 명찰 달고 오늘의 일자릴 찾는다 찾는데 저건 똥인가 쏘아 올린 별이긴 한데 잡히질 않아요 3번 출구 쏟아지는 사람들인가 깜빡하고 켜지는 쪽문 센서등인데 꺼져버려 나의 밝은 비애라 말할까
경계는 부수고 깨고 쓰러지는데 자리가 없대요 바닥은 아니라잖아 서 있지 말라잖아 거기 밀지 말라잖아 누구야 어깨 치지 말라잖아 기다리라잖아 반토막이라잖아 파버린다 동태눈깔 내리깔라잖아 노려보면 어쩔 건데 찔러보면 어쩔 건데 옆에 그 옆에서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가 뭉근하게 파고들기도 했다가 길 건너 서성이는 신호등을 바라본다
전단지를 길 건너 서성이는 입간판을 서성이는 공구들을 서성이는 잿빛 여인숙을 서성이는 배낭을 길 잃은 사람들을 길 찾는 사람들을 서성이는, 서성이는 삼팔씨들 서성이는 삼구씨들 서성이는 것들 죄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니미, 검었다가 노랬다가 반짝들 하고 자빠졌네23)


  새벽녘,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일용직 노동자의 눈에 비친 거리가 흐릿하게 엿보인다. 명확한 지명을 뇌까리며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오늘의 일자릴 찾는다”라는 문장에 담긴 일회성과 단기성은 하루의 운수를 별똥별에 점쳐야 할 정도로 불확실성에 젖어있다. 아침이 되니 당연하게 꺼지는 “센서등”임에도, 그로부터 하루 일진을 체념해도 좋은 “밝은 비애”가 넘치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당일만 바라보며 매일을 버텨야 하는 비정규 노동의 비참함이 극대화된 시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는 단기 노동자의 불안과 우울을 묘사하는 데만 바쳐진 것이 아니다. 두 번째 문단부터 이어지는 문장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일감을 기다리는 노동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리다툼을 형상화한 듯한 그 문장들은 누구의 것인지 특정할 수 없는 무수한 대화의 연속이고, 그것들은 운을 맞추며 서로에게 다시 연이어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지시적 의미들로 짜맞춰진 의사소통이 아니라 하루에 대한 기대와 초조함,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감응의 전파 및 흐름을 보여주는 대화이다.24) 이는 다음 문단에서도 변주되어, 감응의 또 다른 (탈)의미적 연쇄를 개시한다.


전단지를 길 건너 서성이는 입간판을 서성이는 공구들을 서성이는 잿빛 여인숙을 서성이는 배낭을 길 잃은 사람들을 길 찾는 사람들을 서성이는, 서성이는 삼팔씨들 서성이는 삼구씨들 서성이는 것들 죄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니미, 검었다가 노랬다가 반짝들 하고 자빠졌네


  앞 문단에 잠깐 비치던 동사 “서성이는”이 본격적으로 이 문단을 지배하고 있다. ‘한 곳에 멈춰서지 않은 채 주위를 배회한다’는 뜻의 ‘서성이다’는 “전단지”와 “입간판”, “공구들” “잿빛 여인숙”, “길 잃은 사람들”과 “길 찾는 사람들”, “삼팔씨들”, “삼구씨들” 전체를 휘감아 돈다. 기이하게도, 이 명사들이 해당 동사의 주어로 사용된 것인지, 혹은 목적어로 사용된 것인지 알기는 불가능하다. 문장의 성분을 따지고, 대화 속 문법이나 어법을 검토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특정되지 않은 채 주변을 어슬렁대며 알 듯 모를 듯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일용직 노동자에게 하루하루는 동일하면서도 항상 다른 것이듯, 이 세계는 혼돈스러우면서도 바로 그처럼 변화한다는 사실의 동일성으로 인해 진리를 갖는다. 영원히 차이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는 니체의 금언처럼, 인간과 사물, 세계를 배회하면서도 완전히 포착되지 않은 채 항상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근대적 노동의 잉여이자 여백인 ‘이곳’에서 서로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서성이는 인간과 사물 전체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의 양식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대화에서 무엇이 주어이고 목적어인지, 동사는 적법하게 쓰인 것인지 따질 필요가 없듯,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할 발화의 원점 또한 누구/무엇인지 적시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이름이 없어요”.



4. 징후의 서사, 출발과 몰락 사이


  최근, 어쩌면 ‘MZ’라고 불리는 시인들이 구사하는 시적 표현들이 어떤 특징을 갖는 것인지, 어떻게 의미 규정될 수 있는지 검토하는 작업은 문학사의 세대론적 특수성에 관한 문답이면서도 그 경계를 벗어나 있다. 먼저 세대론적 문답이 온당한지 생각해 보자.

  대략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에 태어난 ‘Z세대’를 아우르는 용어인 ‘MZ’는 세대론적 진폭이 너무 크다. 출생 연수만 따져도 근 30년 동안 태어난 이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중간의 십여 년 정도는 겹쳐 있기에 누구를 ‘M세대’로 분류하고 누구를 ‘Z세대’로 넣을 것인지 대단히 주관적이다. 더구나 ‘MZ’라는 명명 자체가 상업주의적 시장 논리에서 유래했으며, 대중문화 속에서 호사가적 관심사에 휘둘리기 쉽상이기에 시사(詩史)의 객관적 지표가 될 수 없다. ‘MZ세대’에 속해 있기에 시적 표현의 특수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적 표현의 특수성을 소구하다 보니 ‘MZ’라는 기표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일부의 시인들을 분류하기 위해 ‘MZ’라는 레테르를 사용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문학사에는 다양한 명명과 구별의 기호들이 넘쳐났었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MZ’라는 레테르는 사후적 시점에서만 유효한 기표로 남을 공산이 크다.

  시적 표현의 낯선 경향을 세대론적 분류 이상의 관점에서 점검해야 할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한편으로 이는 근대 문학의 오랜 분류법과 관행, 규범의 후퇴와 관련된 현상이다. ‘근대’ 자체를 획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대략의 큰 그림을 그려볼 수는 있다. 16세기 이후의 오백여 년 정도가 그에 해당한다. 나아가, 서구에서 근대 문학의 정립 자체는 17-18세기 고전주의나 19세기 낭만주의 이후의 일로 산정되곤 했다. 동아시아의 경우를 따져 보면, 서구적 근대성이 도입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고, 한국의 경우는 20세기 초 식민지 시대부터였다. 따라서 한국 근대 문학, 시문학의 성립사는 백여 년 정도의 시간으로 충분할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논의했듯,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서구와 동아시아, 한국에서 모두 근대성의 퇴조가 언명되었다. 여전히 근대의 연속적 지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것을 넘어서는 징후 또한 완연한 시대가 지금이다. ‘문학의 죽음’이 운위된 지도 한참 전의 일이며, 그것은 근대 문학이라는 제도의 해체를 핵심으로 둔다는 점에서 근대성 일반의 해체와 결을 같이 한다. 문학적 글쓰기의 ‘낯선 경향’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 ‘제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이 문학적이고 문학적이 아닌지를 결정짓는 기제가 바로 그 제도에 있는 탓이다. 근대 문학의 개념과 범주가 작동하지 않는 시점에서 ‘문학의 낯설음’은 이전의 문학이 규정할 수 없는 ‘낯선 글쓰기’, 혹은 ‘문학’이라는 명명조차 불가능한 시대적 단초를 드러낼 것이다.

  근대의 끝, 그 너머는 다만 ‘포스트모던’, ‘탈근대’ 등으로 표지되는 지점을 벗어나 버렸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인류세’, ‘기후위기’로 표징되는 지질학적 위기의 시대이자 지구사적 전환의 시대이다. 우리가 근대 문학이라 불렀던 글쓰기의 양식과 장르 분류, 형식 등은 비단 사회적 제도의 한 시대뿐만 아니라 지질학적으로도 특정하게 규정되는 시대의 인간학적 사실에 속한 것이었다. 문명사적 발전이나 문화적 흥기의 징표처럼 여겨지던 근대 문학의 특성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시대적 변천을 맞이하여 몰락하고 소멸할 계기에 근접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같은 변천을 의미화하는 것, 포착하고 사유하여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파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25) 서사, 그러니까 이야기-하기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며, 지금-여기의 사태를 서술하기 위해서라도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근대 이성애와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의 종말, 자본주의적 노동의 종언 등에 대해 또 다른 방식으로 발화함으로써 새롭게 도래하는 시대를 포착하는 사유-하기와 말-하기의 표현형식에 이야기-하기가 있다.

  시적인 것은 늘 예지의 형식으로 존속해 왔다. 고대의 탄생과 종막, 중세의 가을과 근대의 여명, 그리고 황혼에 이르기까지 시적 언명은 낯설음을 감지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앞서 살펴본 작품들이 그 같은 예언의 고동일지, 또는 잘못 짚은 오해의 한 자락에 불과할지 당장은 알 수 없다. 지금은 그저 그들이 내는 또 다른 목소리에 괴롭게 귀 기울이는 수고만이 언젠가 우리를 위로하리라 믿을 뿐이다.

  • 1) lieter Steiner, Russian Formalism. A Metalioetics, Cornell University liress, 1984, li. 15-43
  • 2) Роман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Работы по поэтике, Прогресс, 1987, li. 387.
  • 3)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88쪽. 법과 사회/공동체의 관계를 다루는 이 논리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 가능하다. 개연성이 선험적으로 규정된 척도가 아니라면, 이를 달성하기 위한 현실 재현/표현의 방법에 따라 개연성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4)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li. 388.
  • 5) Victor Shklovsky, “Art as Technique,” Russian Formalist Criticism. Four Essays, University of Nebraska liress, 1965, li. 22.
  • 6) Якобсон, “О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реализме,” li. 388.
  • 7)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 옮김, 민음사, 1992, 41-49쪽.
  • 8)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알베르티의 회화론』, 노성두 옮김, 사계절, 1998, 69쪽.
  • 9) Mikhail Bakhtin, “Forms of Time and of the Chronotolie in the Novel,” The Dialogic Imagination, University of Texas liress, 1981, li. 84-258.
  • 10) 윌리스 마틴, 『소설이론의 역사』, 김문현 옮김, 현대소설사, 1991, 85쪽.
  • 11) 스테판 코올,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여균동 편역, 미래사, 1986, 84-89쪽.
  • 12)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180쪽.
  • 13)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69-79쪽.
  • 14) 러시아 형식주의는 일상어를 폭력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시어를 창안해 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경우조차 일상어는 시어의 질료적 바탕을 이룬다. 이로써 시적 언어는 해당 공동체에 낯설음과 새로움의 감응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준다(affect and be affected)’는 감응의 현상 자체가 이미 사회적 의사소통의 양상인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마크 터너, 『시와 인지』, 이기우 외 옮김, 한국문화사, 1996, 266-267쪽. 같은 의미에서 서정적 발화는 개별 화자의 표현 이상으로, ‘다수 화자의 공동적 표현’일 수 있다. 디이터 람핑, 『서정시: 이론과 역사』, 장영태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4, 105쪽.
  • 15) 제라르 주네트, 「서술의 경계선」, 『현대 서술 이론의 흐름』, 석경징 외 옮김, 솔, 1997, 13쪽.
  • 16)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김경원 옮김, 이마, 2016, 26쪽.
  • 1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픽션들』, 민음사, 1994, 187-188쪽.
  • 18)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60-61쪽.
  • 19) 이소호, 「홈 스위트 홈」, 『홈 스위트 홈』, 문학과지성사, 2023, 30쪽.
  • 20) 권박, 「리스트 컷(wrist cut) — 죽음에 대해 알아 갈수록 죽음과 나와의 거리를 직시하게 될 것」, 『이해할 차례이다』, 민음사, 2019, 15쪽. 이어지는 주석은 16-17쪽에 걸쳐 덧붙여져 있다.
  • 21) 데리다의 용어에서 유래한 대체보충(suliliélment)은, 이 작품을 통해 말하자면, 주석이 본문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필수불가결한 대체/보충물임을 시사한다. 주석 없이 본문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주석을 통해서만 주제를 구현할 수 있으며 비로소 완결체로도 드러난다. 이 점에서 대체보충은, 통념과 달리 중심적인 것이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깊숙이 의존하며 전제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역설의 사유이다. 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The Johns Holikins University liress, 1974, li. 144.
  • 22) Михаил Бахтин, Марксизм и философия языка, 2-ое изд., Л.: 1930, li. 122.
  • 23) 이용훈, 「남구로역」, 『근무일지』, 창비, 2022, 86쪽.
  • 24) “노려보면 어쩔 건데”에서 시작되는 주석이 흥미롭다. 반페이지 정도를 차지하는 이 주석은 본문을 보충하는 내용도 아니고, 특정한 인용이나 논증을 위한 것도 띠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외전(外傳)과도 같은 ‘다른 이야기’를 파생시켜 노동자의 감응이 어떤 형식으로든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좋(다)’를 변용시켜 의미의 양가성을 노정하는 부분이 특히 이채롭다. “좋나”는 표기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실제 발화와 독해를 통해 ‘좃나’로 읽힐 수 있고, 이는 노동자의 사유와 대화에서 긍정성과 부정성이 혼합되어 또 다른 긍정성으로 나아갈 여지를 열어준다. 양가적 웃음이 창출하는 세계상이 여기 있다.
  • 25)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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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계간 현대비평 강지희 AI예술비가역적 시간붉은 몸성해나혼모노김지연하와이사과 2024
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계간 문학동네 강지희 인공지능개체성집단성탈인간감상자 2024
배하은 눈보라 속에서 문학은 ―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계간 문학인 배하은 유신시대개발독재시대김지하조세희이문구황석영문사문학의 정치성근대문학의 종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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