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현대시학 | 2024년 1-2월호(제617호)

미래파 이후의 한국 시

정과리 문학평론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정과리’라는 필명으로 ‘조세희론’이 입선하여 평론활동을 시작했으며, 1988년부터 2004년까지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한국 현대문학 및 현대 문명에 관한 평론 및 저술들을 발표해 왔다. 주요 저서로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2005), 『문신공방, 하나』(역락, 2006),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문학과지성사, 2008), 『네안데르탈인의 귀환』(문학과지성사, 2008), 『들어라 청년들아』(사문난적, 2008), 『글숨의 광합성』(문학과지성사, 2009),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2014), Un désir de littérature coréenne(DeCrescenzo éditeurs, 2015) , 『뫼비우스 분면을 떠도는 한국문학을 위한 안내서』(문학과지성사, 2016),『문신공방, 둘』(역락, 2018), 『문신공방, 셋』(역락, 2019) ,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문학과지성사, 2020),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2023)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1992), 팔봉비평문학상(2000), 현대문학상(2000), 김환태평론상(2005), 대산문학상(2005), 편운문학상(2015)을 수상하였다. 1999년에 문화관광부에서 기획한 ‘2000년 새로운 예술의 해’ 문학분과위원으로서, 디지털환경과 문학의 공존 방식으로 모색하기 위한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언어의 새벽’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다. 2001-2002년에 KBS ‘TV 책을 말하다’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2000년 이후,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으로 있다. 1984년부터 2000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문과대학 불문과에서 재직하였으며, 2000년 9월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로 옮겨 2023년 8월 은퇴하였다. 주요 강의 분야는 한국 현대시, 정신분석 비평,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간의 상호관련성 연구, 디지털 문명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등이었다. 현재 『현대시학』 주간,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 삼성호암문화재단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매너리즘의 시절


  실제 사례들을 인용하지 못하는 불편한 상황을 무릅쓰고 오늘날 한국시의 추세가 되고 있는 양태를 지적하기로 한다. 그 양태를 ‘개그의 향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묘사는 줄고 말장난이 난무하고 있다. 그 춤은 대상을 조물락거리는 걸 즐기는 일종의 자기 현시의 독무들이다. 옆에서 비슷한 무희들이 저마다의 춤에 몰입하고 있다. 정면에 자리한 거울 속의 독자들 또한 저마다의 향락에 빠져든다. 그 행동의 방향은 오로지 일대일로 대응하는 직선들의 어지러운 교차이다.

  물리적 현상으로서 빛과 실물의 차이는 후자가 반발하거나 들러붙는 데 비해, 빛은 그저 스쳐 지나치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빛의 어지러운 교차는 풍요와 고독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시의 현황에 대한 비유로 쓰일 만하다. 오늘의 시인들이 세상을 향해서 쏟아붓는 얘기가 무척 많다는 걸 알리면서 동시에 저마다 자기만의 ‘문자 반죽’ 놀이를 통해 ‘창조’된 작품들이 더미를 이루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양을 보여준다. 이것은 일종의 ‘사이키델릭 효과’라고 부름직한 현상을 유발한다. 독자들이 점멸하는 시어들이 내뿜는 현란한 빛무리에 저마다의 환상을 투여하면서 열락하는 것이다.

  이 정황은 한국시가 일종의 ‘매너리즘’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매너리즘이란 “틀에 박힌 태도”라는 통상적인 뜻으로 쓰인 게 아니다. 이는 특정한 시대의 미학적 태도를 가리킨다. 르네상스 미술 이후 등장한 매너리즘은 미학의 타성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이어서 “구성과 의미의 통일성에 대한 기대를 해체하는” 기이한 놀이, “엉뚱함l’insolite”에 대한 주관적인 취향 속에 잠겨들었던 일련의 예술적 생산들을 가리킨다(앙드레 시마André Simha, 「철학적 접근」, Mathilde Bernard et al., 『예술과 정서Arts et Émotions. Dictionnaire』, 2016).

  이 매너리즘이 ‘바로크’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르네상스 예술에 대항할만한 집단적 규모의 형태를 창출하지 못하고 각개로 산개하는 미적 시도들로 웅성거렸다는 점이다. 이는 새로운 길에 대한 “풀꽃데미같은”(서정주) 갈망과 동시에 작로作路에 대한 무기력을 동시에 피워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바람직한 것일까? 이것을 묻기 전에 그 근원을 찾는 게 더 유의미한 일일 것 같다. 왜냐하면 이 현상이 새로운 미래를 향한 어지러운 준비운동으로 봐야 한다면, 동시에, 이를 한국시의 맥락 안에 위치시킬 때 그 정향이 시야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개인들의 폭력적 우울’이라는 사회적 현상의 반영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에 대한 문학사적 맥락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문학사적 맥락에 관여한 시인 사회의 실기失期가 있었고. 그리고 그로 인해 한국시에 진화의 특이점이 발생할 계기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래파' 라는 변곡점


  필자가 생각하기에 2005년 무렵 주목할 현상이 된 ‘미래파’ 소동에 변곡점이 놓여 있다. ‘변곡점’이라고 지칭한 것은, 분명 세칭 ‘미래파’로 거명된 새로운 시적 경향의 출현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으며, 그에 대한 해석이 온당하게 이루어졌다면 한국시는 그것을 발판으로 차원이동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뜻한다. 그리고 그런 이동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덧붙여 가리킨다.

  그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미래파’를 앞장 서서 알린 평론들이 새로운 시의 출현을 민감하게 포착하였으나 그것의 의미를 포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경과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이 비판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는 오히려 새로운 시의 발아를 짚어낸 그 감각을 존중하고 있다. 그리고 감각이 심화된 이해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또한 사태의 경과에 대해 필자의 외면이 책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필자에게도 한국문학의 현장을 지켜보고 그 추이에 대해 해석을 내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필자가 처한 물리적·심리적 정황을 변명거리로 내세운다고 해서 그 책임이 면해지는 건 아니다.

  이른바 ‘미래파’의 무엇을 놓쳤던 것일까? 미래파로 지목된 시인들 중에서 지금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할 이들은, 황병승, 김경주, 조연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시적 진술에서 의미를 종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없었다”는 과거형은 그들의 비극적 퇴장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은 시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조연호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으나 그가 지금 시를 쓰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주목할 것은 그들의 시가 두루 ‘의미 달성’이라는 한국문학의 줄기찬 염원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들의 시는 넓게 말해 ‘어불성설語不成說’의 차원으로, 다시 말해 의미의 여집합의 공간으로 이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호모섹슈얼리티를 떠올리는 반응은 쉽게 나올 수 있으나, 시는 철저히 그런 호기심을 좌절시킨다. 오히려 우리는 그 시집의 첫 시, 「주치의 h」의 첫 두 행,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에서 나타난 ‘뜻’의 삭제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구절은 사방에 산개해 있다.

  김경주를 괄목상대하게 했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는 문법적 범주를 깨뜨림으로써 독자들을 놀라게 하면서 매혹시켰다. 그의 시는 황병승에 비해 부드러운 파격을 꾀했고 따라서 아주 작은 소통의 문을 열어두었으니, 그를 한때의 스타로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소통의 반대편을 향해 가려 했다는 것은 첫 시의 다음과 같은 시구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외계」


  요컨대 의미의 시원을 건너 의미가 발생하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눈이나 날개 기관 따위는 다 소실돼버리고 팔다리만 조금씩 가늘게 길어진다는데 가늘어진다는 말의 소요들. 이것은 5~6 억 년 전부터 살아남은 캄브리아기 생물들의 절대음감에 관한 얘기다 ―「파이돈 —가늘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에서 지시된 “말의 소요들”을 통해서 “절대음감”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연호는 아예 ‘어불성설’의 차원으로 직접 가고자 했다.


부인이 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산문과 운문을 생의 모든 부분에서 반복했다
회색이 만든 아름답고 슬픈 시대
내가 그대에게 하루에 하나씩의 문밖을 던지던 것에 아직 방문객이 없던 시절
그늘을 잃었고 그날의 그림자를 모두 잃었다
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
하지만 자고 나면 이것이 어떤 잠이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리라 ―「고전주의자의 성」


  여기에 유일한 생의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생을 무의미로 돌리는 행위뿐이다. “하루에 하나씩의 문밖을 던지”는 것. 수탁자는 독자이다.



'의미주의'로부터의 탈주


  이와 같은 의미 소거의 경향이 왜 출몰했을까? 그것은 한국시가 오랫동안 의미 획득이라는 한결같은 목표를 향해 매진해 왔다는 배경을 유념해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을 ‘의미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의미주의의 올곧은 추구는 시대적 필연이며 동시에 시대의 한계이기도 했다. 근대에 눈 뜬 이후 한국의 식자들은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한국인의 존재 이유를 납득하고 설득시키는 데에 전력을 쏟았다. 그 노력은 군중의 호응을 점차로 얻어 지금은 군중의 모든 행위가 의미에 대한 투기가 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금 더 요약적으로 말하면, 한국인의 모든 행위는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는 이은상의 유명한 구절의 다양한 변이본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20세기를 통틀어 피해자이고 수난자이고 비-주체인, 즉 의미박탈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그 규정은 설움과 생존력의 증대(역동성)를 동시에 유발하였다. 설움은 한국인에게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근거로 작용했고, ‘역동성’은 한국인의 생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문학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문학은 한반도의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속절없이 추락하는 사태를 수난 혹은 한의 양태로 표출하였다. 앞에 인용한 조연호 시의 “부인이 괄태충처럼 사라질까봐 두렵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 사정을 그대로 가리킨다. 조연호에게 이 진술은 시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제 시에서 그걸 던져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주의의 질주는 이제 가속을 얻어 충만한 의미의 온갖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필자가 기 드보르Guy Debord의 개념을 빌어 ‘스펙타클의 시대’가 되었다고 보는 소이이다. 스펙타클의 시대는 단순히 시각적인 것의 광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방 시각적인 것이 언어를 집어삼키는 데까지 발전한 사태를 목도하고 있다. 수전 손택(『사진에 관하여』)이 활약하던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언어(이야기)는 시각적인 것의 순간적 환영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제공하는 듯이 여겨졌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의 온갖 매체, 행위, 사건들은 시각에 이야기를 내장시킴으로써 시각의 현혹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절정에 놓여 있는 것이 정치적 극렬분자들이 연출하는 별의별 언어-물리적 폭력들이다.

  따라서 이제 ‘의미주의’는 한국인의 삶의 열화로 작용하던 데서, 한국인의 정신을 파괴하는 염증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제는 이로부터 벗어나야 할 절실한 이유가 발생한 것이다. 21세기 초엽은 이 문제의 보의 솔기가 튿어진 시기였다. 당시 통신망에서의 폭력성의 증가를 다시 생각해보라. 그때의 왁자지껄은 이제 아수라로 확장되었다. 그래서 황병승의 본능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쓰게 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기다란 수염을 달고
아무런 화면도 보여주지 않을 거야


  시각과 언어의 결탁은 의미를 절정 속으로 끌고 간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둘의 공모를 끊어버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반反-소통의 미학을 향하여


  이런 깨달음이 지금 요긴한 때이나, 이를 ‘미래파’로 일컬어진 시인들만이 느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후반기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글쓰기écriture’가 근본적으로 ‘반-소통contre-communication’의 행위임을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다.


  글쓰기는 언제나 언어 저편에 위치한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씨앗으로서 생장한다. 그것은 특정한 비밀[=태어남에 관한-옮긴 이]의 본질이자 위협인 사건을 표명한다. 그것은 반反-소통이다. 그것은 (현재의 언어 질서에) 위협을 가한다.
―『글쓰기의 영도』


  바르트의 이런 통찰에 앞서서, 장 콕토Jean Cocteau는 “난해한 책들로 능란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만드는 행위” 즉 “오해를 통해서만 소통하는 행위”를 문학에 할당한 바가 있다. 이에 대한 주석에서 피에르-마리 에롱Pierre-Marie Héron은 “‘문학이 자동사’라는 바르트의 말은 탁월한 반-소통anti-communication이라고 덧붙였다(이상, 『장 콕토 수첩Cahier Jean Cocteau』). “반소통은 의도적인 악필이다”라는 바르트의 진술(『S/Z』) 역시 콕토의 착안과 상응한다.

  또한 한국시의 자장 안에서도 이미 의미주의에 대한 각성은 일찍부터 출현한 바 있다. 이를 정확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의미주의의 변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의미주의는 시각+언어로 완성되지만, 그 시초에서는 소리+문자의 결합으로서 시작되었다는 것.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그 말씀이 바로 소리와 문자를 결합한 형태의 원본이다. 소리가 거대한 의미의 덩어리로 출현한 것, 데리다가 ‘음성중심주의’라는 이름으로 가리킨 것이다. 이에 대한 두 가지 방향의 저항이 있었다. 하나는 소리로서 불가능한 문자만으로 시를 쓰는 것, 그것을 최초로 시도한 이가 이상李箱이다. 문자의 기능에 대해서는 좀 더 섬세한 고찰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또한 데리다 이래 자주 언급된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한국시의 현장에서 문자로서의 시는 이수명 등에 와서 이미지가 의미를 추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른 방향은 소리에서 의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의성어와 의태어에서 극명하게 보이듯이 소리와 의미의 결합을 떼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리를 ‘소음’으로 돌리려 한 성기완의 이른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과 『래여애반다라』가 의미중심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반-소통의 미학은 험난한 장벽들을 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범주 혼돈의 문제가 있다. 의미주의에 대한 거부 자체가 하나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역설적 사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의미주의에 대한 거부는 미학적 거부를 북돋기 위해 지성적 의미를 부가적으로 발생시키고 촉진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즉 미적 차원의 의미와 지적 차원의 의미를 구별하고, 지적 차원의 의미는 일종의 발판으로 작용하면서 사람들의 인식을 제고하는 한편, 미적 차원에서 의미 중심이 아닌 다른 방식의 언어체가 나타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미래파’의 소란 속에서 시인들과 평론가들 모두가 그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미래파’의 명명자인 권혁웅은 미래파의 시도를 단일 진리로부터 복수적 진리로의 개방으로 보았다.


  미래파는 입체파와 마찬가지로, 화폭에 복수複數의 시점을 도입했다. 그들은 달리는 말의 다리가 네 개가 아니라 스무 개라고 말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잔상殘像이 사실은, 중첩된 면面들이 내보이는 실상實像이라는 것이다. 스무 개의 발을 재게 놀리며 달리는 말 그림을, 말의 왜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최근 시의 ‘특별한’ 형상들을 형상의 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 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그래서 앞의 비판을 이렇게 고쳐 말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은 중언부언을 중요한 발화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단형의 틀에 우겨넣기에는 시의 전언이 너무 풍부하다. 그들은 음악을 위해서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다. ―「미래파 – 2005년, 젊은 시인들」


  여기에 착오가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관적으로 미래파의 본질을 감지했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특히 그가 오랜 절필 끝에 재등장한 시인, 위선환과 친근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또렷한 간접 증거이다. 위선환의 시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바탕은 그가 종래의 시와 다른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쓰겠다고 결심했고 그로 인해 시의 발표장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위선환의 결심이 명확한 분석적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 흐른 ‘탐진강’을 통상적인 강에 대한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보아야 한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강’을 둘러싼 한국적 의미(정한을 중심으로 하는)로부터 현상학적 환원을 시도한 것이라 판단된다. 그것을 시인은


나 말고도 투신한 사람이 있다. 벼랑 밑 깊어진 물속이 퍼렇게 멍들어 있다.
―「탐진강 1」


라는 진술로 표현한 바 있다.



의미주의를 추월하기가 이리도 어려울지라도


  반-소통의 미학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한국사회가 그런 시적 여건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세기 이상을 의미에 대한 결핍감에 지독히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소통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내내 이어졌다. 자신의 시에 대해 ‘형태 파괴’라고 지칭한 김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 황지우는 “매스컴은 반反-커뮤니케이션이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라는 말로 당시의 언론을 질타하였었다. ‘형태 파괴’와 ‘커뮤니케이션’이 모순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그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현재의 시점까지도 의미를 향한 상향운동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점에서 기형도는 상징적이다. 이성복의 영향을 크게 받은 기형도는 이성복과는 거꾸로의 방향으로 갔다. 「입 속의 검은 혀」와 「빈집」은 위상학적으로 동궤에 놓이며 상호 연관된 시다. 그것은 모두 ‘진공眞空 속에 여하히 의미의 별을 집어 넣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연결된 시다. 그 답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이다. 의미의 성취에 다다르지 못해도 방법을 바꾸어 의미의 기록은 여전히 이어진다는 것이다. 기형도에 와서 의미주의는 완성되었다. 그가 사후 30년 동안 신화로 존재했다는 것은 바로 완성을 가리키는 지표다. 앞에서 말한 SNS의 언어 폭력은 완성 이후 의미주의의 부패를 가리킨다.

  의미주의의 완성 이후에 존재 가능한 의미주의적 시는 정한아의 철학적 반성의 시, 더 나아가 의미를 산산히 쪼갰던 황혜경의 시편들이다. 즉 의미주의의 시효는 소멸하였으며 이제 반성과 해체로서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건 철학의 제국이 무너진 이후, 분석철학이 가장 큰 존재 이유를 갖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시의 대부분은 의미주의의 점통 속에서 찰랑거리는 효爻들이다.

  모두冒頭에서 지적한 한국시의 매너리즘은 반-소통이 아니라 의미의 주관적 향락들이다. 그것은 미래파가 본능적 차원에서 제기했던 한국시의 새로운 도약이 포기된 현상을 반영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 육체적 차원에서 느끼고 있는 반-소통 미학의 의지를 지적 이해로 변환하여 새로운 미적 형상을 창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정은 지금까지 거의 이해되지 못했으며, 그걸 직접 시도한 시인들조차도 그에 대한 인식을 가지기가 어려웠으니, 그들의 시가 때때로 갈팡질팡하는 걸 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가령 필자는 이지아의 첫 시집, 『오트 쿠튀르』에서 의미주의를 넘어서는 다음 단계의 시적 가능성을 보았고 그런 기대를 글(「비유를 넘어, 차원 약동을 구축하기」)로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시집, 『이렇게나 뽀송해』는 그런 기대를 하향시켰다(이 글을 쓰는 도중에 세 번째 시집이 발간되었다. 이는 또다른 세계이다.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인들의 본능적 감각에 기대를 걸고 있다. 시인은 시를 손으로 쓰지 머리로 쓰지 않는다. 시적 실천과 지적 인식이 자주 어긋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들이 지적 인식을 방치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지적 단련은 그들의 손이 떨리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필자는 시의 무대에서 퇴장한 세칭 ‘미래파’ 시인들이 귀환하기를 절실히 바란다. 또한 독자들이 지금까지의 필자의 견해가 매우 낯설지라도 진지하게 읽어주기를 바란다.

추천 콘텐츠

최다영 때에 따라 산다는 것, 그리고 ‘동시대 시’에 대한 단상 ― 허향숙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 2024), 한명희 『스위스행 종이비행기』(여우난골, 2024)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1) 1 유사하거나 상이한 시적 흐름들과의 관계 속에서 동시대 시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하는 이 기획은, 언뜻 십여 년 전 제출되었던 어떤 요청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파’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일련의 무리 짓기 현상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시인들의 개별 작업에 대한 정밀한 조명과 각 각의 시적 의의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하게 부상했던 것이다.2) 그렇다면 옹호에서든 비판에서든 최근 비평장에서 텍스트 분석의 ‘과도한 천착’이 종종 거론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요청이 지난 십여 년 이상 성실히 이행되어온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그때와 지금의 요청 모두 개별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가치 부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시적 경향을 인접시키거나 떼어놓고 보는 유형화 작업과, 각 시인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밀한 독해가 결코 대립하는 접근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는 동시대 여러 시적 흐름과의 관계성을 고려한 깊이 있는 독해의 필요성 또한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거시적인 연결의 좌표 위에서 개별적인 시세계에 대한 보다 마땅한 해명과 자리매김이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최근까지 축적된 주요 논의들을 다시 살핌으로써 그간 동시대 시를 읽는 독법이 어떠했는지를 점검하고, 함께 주목해야 할 시적 경향이 무엇인지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2020년대 초를 전후하여 ‘나’의 중층성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음은 주목을 요한다. 주로 기성 시를 다루는 평문에서는 ‘나’의 중층성이 실제 시인과 내부 발화자의 거리를 좁혀 가상의 허위를 폭로하는 현실 대면 의지로서 긍정되는 한편,3) 신인 시 심사평에서는 지나친 메타적 중층화가 복수의 ‘나’들 간의 거리를 넓히며 현실 대면 의지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우려되어온 것이다.4)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전자의 경우 ‘메타시’의 일반적인 정의와 특별한 변별점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고,5) 후자의 경우 90년대에는 메타시가 현실 인식의 한 중요한 관점이자 방편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6) 그런데 후자의 평가는 박상수가 황인찬과 송승언 등 기성 시인을 분석하면서도 동일하게 언급했던 내용이다. 따라서 기성 시와 신인 시 모두에서 유사한 작법 양식이 폭넓게 운용되고 있으며, 투고자들이 기성의 문법을 체화하여 학습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 산문화를 적극 활용하는 시적 경향은 이미 작법 차원을 넘어 동시대 시단의 주류로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어느 정도 보수화된 규범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내적 형식과 조직화 원리에 기인하여 각자 자신의 시를 추동하는 방법론을 개발해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적 경향이 구체적으로 다뤄지거나 적절히 자리매김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이는 그간 우리 시를 읽는 독법이 주로 시 장르 일반의 보편 가치와 의의, 효용, 그리고 주체의 태도와 관점에 다소 집중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7) 이러한 관점들이 그간 거두어온 성취는 별개로 두더라도, 작법의 차원을 중점에 두었을 때 끌어올릴 만한 긍정적 가치는 분명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불화하는 복수적 일인칭에 관한 논의들은 분명 유효적절한 것이었으나, 그보다 더 활발한 현상으로 대두했던 (현실과 가상이 아니라) 가상의 중층적 겹침, 자기동일성의 자가 복제 양상은 상대적으로 조명받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입체적이지도 않고 문학적 진정성도 없는 시들, 각자의 유희에 집중하며 긍정성을 부여하여 길어올릴 만한 근거가 한정적인 시들, 그러나 분명히 활발하게 존재하는 시들을 어떻게 포착하고 호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유사한 작법 의도와 형식적 특성을 공유하는 시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독자적인 특질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지만, 그렇기에 그간 가시화되기 쉽지 않았거나 다른 측면만이 주로 논해졌던 건 아닐까. 그들만의 독특함을 잘 해명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방식과 연결에 대한 고민 없이는, 기성 시인들에 의해 시의 모범 혹은 당위로 말해지는 덕목들과 투고자들의 시작 경향의 괴리가 나날이 커지는 현상 또한 적절히 읽어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현상에 대한 판단을 우선 유보하고 그들의 작법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시가 조직화되는 방식과 원리에 주목할 것인데, 한 편의 텍스트가 어떠한 언어적 가공과 배치를 거쳐 시라는 장르적 호명을 위해 제출되는지, 즉 해당 시인들이 각자 어떠한 경향성과 패턴 속에서 시를 생산해내는지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편의상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것인데, 가속류의 일반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몇몇 시적 흐름을 살펴보며 비교한 뒤 기저에 공통으로 흐르는 텍스트의 무의식을 통해 다른 연결점, 가능성과 징후들을 포착하고, 많은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가속류와 어긋나는 상이한 사례들 또한 숙고하고자 한다. 일러두자면 가속류라는 명명 자체는 상찬도 멸칭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도저한 현상이다. 2 가속류라는 명명은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8) 일군의 시적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는 물론 가속주의와 관련된 여러 논의들, 특히 사이버네틱스9)의 속성에서 차용한 개념이지만,10) 가속주의와는 엄연히 변별된다. 여기서 가속이란 시구를 대량 증식하는 데 적합한 창작 방법론을 효율적으로 구축한 뒤 반복적인 연쇄에 적합하도록 자 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각자의 지배적인 작법을 기계적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자가 복제 장치로 특화하는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11) 이는 창작 주체의 사고 및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기계나 인공지능의 데이터 집계, 처리, 산출 방식에 동기화되어 기계적 규율화로 추상화되고 단일화되는 무의식적 경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가속류는 일반적으로 기교와 수사, 비유와 가공보다는 객관적·사실적인 단문의 진술 활용이 두드러진다. 특정 패턴을 자동적으로 반복하기에 최적화된 이러한 미니멀리즘 양식은 동어반복과 변주, 메타적 중층화를 무한정 이어나갈 수 있다. “자신의 작동을 그 연쇄의 요건에 적응시켜야”12) 하는 기계공업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각 문장은 연쇄의 규범을 따르며 서로의 존속을 상호 보완한다. 여기서 시는 치열한 지적 사유의 집약이 아니라 기계적 강박과 우연의 연쇄적·분산적 배치이다. “문장 하나를 쓴 뒤/그 문장을 변주해 나가면서/그저 나열”(배시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집요하고도 주된 방법이다. 사전적 정의와 인용도 빈번하게 동원되며 그러한 객관적 문장들의 배치와 나열로 시적 효과가 의도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하듯 재귀적 무한 역행 루프와 순환적 인과관계 또한 자주 활용되며, 이때 시적 공간은 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은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데,13)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주체는 고유한 개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패턴처럼 사고하고 행위한다.14) 또 한정적인 언어의 가용 범위 내에서 ‘있다/없다’의 진술 구조가 자주 활용되는 가운데 돌연 끼어드는 판단 혹은 선언과 단발적 감정 표출에 의해 복합적 사고로의 이행은 빈번히 차단된다. 과거에 메타시가 내면 탐구를 위한 현대적 장치로 일컬어지던 것과 달리, 주로 익명을 지향하는 이들에게서는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나 욕망, 개성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욕구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가속류는 언뜻 통찰의 깊이가 담기지 않은 기계의 발화와 유사해 보인다. 또한 이들이 자주 익명을 표방하거나 욕망, 주체성의 의지가 없으며 일원화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시인의 본래 의도가 어떠했는지와 무관하게—이러한 작법이 기계적 효율성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의인화된 사유 습관을 추방”15)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통합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무수히 분할된 데이터이자 가분체16)로서 존재하는 동시대인들의 실존 감각과 빈번히 분절·재배치되는 사고 구조를 대변하는 시작 경향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체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 그들에게 주체라는 자리는 어떠한 인격체도 커스터마이즈하여 활성화를 거듭 반복할 수 있는 다회용 공용 장이 된다. 2022년 하반기에 출간된 배시은의 『소공포』는 이러한 가속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들을 대표한다. 이 시집은 주로 현상적 진술로 이루어진 단문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가속의 원리를 명확히 보여주며, 사전의 한 구절을 옮긴 듯한 인용도 빈번히 동원된다(「참가시은계목」 「해상 물류」). 무엇보다 지배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현상에 대한 단순 서술과 그 변주인데, “짐을 풀자/짐은 풀린다//(……)//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다 어디까지가 일어난 일인가 아는 것이다/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칫솔」)와 같은, 반복과 증식을 위한 무의미한 문장 생성은 가속류의 자가 복제 양상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도마는 하나면 된다.//웬만한 건 다 하나면 되듯이.//무언가가 내 몸을 통과해 나가고. 그것을 바람과 비슷한 것이라고 느끼지만 바람은 아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먹는다.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먹는다.//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뿐이다. 많은 미래를 상상하면 미래는 그저 그것들 중 하나에 그친다.//잠시 생각했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쳐서/생각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익월에 다시는/먹지 않는다. 나에게 그런 식의 자유는 주어진 적 없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친/생각은 어색한 구석이 있는데//그만큼 흠 잡을 데 없다.//이것을 이것으로 바꿔 주세요.//결정하면서.//도마는 하나면 된다./촛불이 하나면 충분함과 같다. ― 「익익월」 전문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어떤 인간이 썼다. 나는 이제/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쓰지 않는다, 그냥 인간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네. 그냥 인간/인간 대신에 은점토 생각을 한다. 반질반질한. 역동성 있는. 아무것도 닮지 않은/한 인간과. 그 인간과 닮게 닮아 가는 인간.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인간. 그냥 인간. 은점토에 대해 평생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인간. 그게 뭐였더라 — 「은점토」 중에서 위 시 또한 주제 문장의 반복과 변주, 천착한 단어의 동어반복을 중핵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지시 대상이 생략된 채 빈번히 동원되는 지시사가 지시의 모호성을 의도하는 한편으로 「소공포」(72쪽)에서 개별자들의 고유성이 융해되어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듯 단일하고 유일한 것에 대한 중앙 집중화적 지향도 눈에 띈다. 철저한 익명의 개체로서 자신을 숨겨 일체화된 시스템 아래 귀속되고 몸은 그저 공유된 사고가 저장되거나 옮겨가는 매개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얼핏 “기술자본이 꿈꾸는 세계”인 “오토피아”17)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생각했다’고 말하지만 그 생각의 내용은 계속 부재 상태에 머무른다(「역소원」 「해상 물류」). 그런가 하면 「평균자유행정」에서 그려지는 독특한 NPC 주체는 게임 내부 환경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기도 하지만, 이미 현실이 곧 게임과 다름없는 지금 사회에서 “미리 정해진 특정한 경로를 따라가는 것밖에는 못하는 존재”18)인 가분체에 대한 통렬한 비유를 보여준다. 한편 김뉘연은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며 컴퓨터 프로그래밍 명령어의 발화를 전시한다. 이때 ‘시’는 놀이나 어떤 수행의 흔적, 우연적 배치의 잔해로 인식되며, 따라서 ‘시쓰기’ 자체가 ‘시’보다 우위에 선다. 독특한 배치와 조합에 의해 ‘시적’ 효과가 의도되는 가운데, 그러한 언어를 전유해보는 경험 자체가 중점에 놓이는 것이다. 계정에 접속해 드라이브를 연다. 왼쪽 상단의 ‘새로 만들기’를 누르고, ‘문서’ 오른쪽 끝에 위치한 기호에 마우스 커서를 올린다. ‘빈 문서’와 ‘템플릿’이 펼쳐진다. ‘빈 문서’를 누른다./‘제목 없는 문서’ 생성./생성된 페이지 왼쪽 상단에 위치 한 기호에 커서를 올린다. ‘문서 개요 표시’. 눌러 본다. ‘요약’과 ‘개요’가 펼쳐진다./(……)/적혀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은 문장을 첫 행으로 삼는다./적혀 있으면 서 드러나 있기도 한 문장은 괄호로 묶어 뒤이은 행에 둔다.//여기에 문서 요약 입력./(문서에 추가한 제목이 여기 표시됩니다.) — 「범례 설명」(15쪽) 중에서 네 줄 띄고/계정에 띄고 접속해 띄고 드라이브를 띄고 연다 마침표 띄고 왼쪽 띄고 상단의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새로 띄고 만들기 작은따옴표 닫고를 띄고 누르고 쉼표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문서 작은따옴표 닫고 띄고 오른쪽 띄고 끝에 띄고 위치한 띄고 기호에 띄고 마우스 띄고 커서를 띄고 올린다 — 「범례 설명」(16~17쪽) 중에서 이러한 김뉘연의 시는 워드프로세서에서 문장을 입력하는 과정 자체를 지면에 그대로 옮겨 언어라는 사물 자체를 전시하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물질적 감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상이한 층위들의 언어가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전면화된다. 강보원에 따르면 이러한 김뉘연의 작업은 ‘나’를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적 주체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 되며,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장소이지만 그 무엇도 독점적 지위를 점유할 수는 없는 장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획득한다.19) 3 배시은이 가속류 일반의 기본 원리와 전형성을 대표한다면, 성다영은 그 심화된 양상으로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가 구축한 자동 장치는 시를 무한히 늘려나가기에 최적화된 특정한 유형을 시사한다. 성다영은 빈번한 행갈이를 통해 주제적 측면에서 짧은 단위의 교체를 의도하고 일관된 주제로의 응집을 차단하려 한다. 성다영의 빈번한 동어반복 활용은 배시은과 마찬가지로 “사로잡혀서 반복”(「다중 슬픔」)하는 작법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다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단문의 절합 원리에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내적 논리의 구축에 대한 반감에 근간을 둔다. 타의에 의해 존재론적 승인이 좌우되거나 주관적으로 변용되는 것, 인위성을 적극 거부하고 불멸이 아닌 유한성이 인간존재의 조건임을 강조하는 성다영의 시는 시쓰기와 관련된 메타적 발화, 인간 예외주의와 인간 범주 내 위계의 문제를 포함한 사회문제 비판, 시간의 비가역성이라는 서로 다른 대주제, 관찰이나 건조한 감정 진술 등이 차례로 발언권을 넘겨받듯 한 편의 시 내에서 위계 없이 빈번히 교체되면서 전면화되는 방식을 주로 취한다.20) 그렇기에 낯선 문장들이 인과 없이 수시로 틈입하면서 가속적 몽타주의 우연적인 배치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박제/동물의 가죽을 벗긴 다음 솜 따위를 넣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새롭지 않은 상상/인터넷 용어로 쓰일 때에는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스크린샷 등으로 저장하는 것을 의미한다/카타 콜록의 수화에는 가정법이 없다/볼 수 없어도 추억할 수 있다/발이 없어도 춤을 출 수 있다/나는 자연과 상관없이 움직인다/여기에 뭔가 있어/누군가가 누군가의 상상 속에 갇힌다/오해하고 싶지 않아/그가 둘러본다/얼굴은 소유를 거부한다/나는 유기되었다/쓸모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버리지 말자//원근법/이미지가 갇혔다/나는 나에 갇혔다//예수는 겸손해서 남자로 태어났다//길에서 오줌을 싸듯 남자가 화를 낸다/나는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나는 창문을 찾아내 열고야 만다//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창문이 없다/창문을 연다 ― 「행운은 여기까지」 중에서 태초에 은유가 있었다/평생에 나는 개연성이 없다/내 생각은 개연성이 없다/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과거형은 왠지 슬프게 들린다/여기,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바깥을 상상하지 않는 태도는 성실하다/감정은 단순하다/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동물이 고기로 태어나지 않듯이/나는 누구로 태어나지 않았다/나는 거의 틀리다/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당신은 누구십니까?/느슨한 언어/느슨한 상상/느슨한 시나리오/나는 나다/나는 사이에 있다/어딘가에 가입할 수 없다/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그러나 이것은 시다/나는 내가 쓰는 시보다 가치 있다/아직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 「두 번째 피부」 전문 이러한 파편적인 사유의 잘라 붙이기를 통해 형성되는 무작위적이고 불연속적인 조합은 당초에는 구심점이 없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일련의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의미화의 통일을 차단하기 위해 유사성의 극단적인 배제가 시행되는 아래 역설적으로 사고 구획의 코드화된 패턴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완전히 다른 주제를 병치하는 성다영의 작업은 서로 다른 연상이 어떠한 직관의 회로를 거쳐 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코드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마찬가지로 동어반복과 수사를 제거한 객관적 진술, 메타적 중층화를 주로 활용하는 시적 경향들은 언뜻 가속류와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속류와 변별되는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단선적 논리의 증식이 아니라 중첩적 논리를 구축하여 시선의 다층화를 만들어내고 사고의 방향이 획일화되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들도 물론 데이터 백업 과 복구의 일상화 같은 기계 미디어 장치의 속성을 반영하지만, 무의식에 접목된 것과 작법의 방식으로 가공 방식을 차용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차라리 가속의 원리를 여러 겹으로 조작하여 모호성의 패턴을 늘리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 가령 한재범은 ‘나’가 아닌 다른 ‘나’의 중첩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한재범은 시간이나 공간의 격차를 두고 다층적인 차원들을 도입함으로써 시공간의 여러 층위를 혼재시키는데, 이는 시인의 시적 논리 확충과 그에 따른 시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이상의 「절벽」을 패러디한 「커피는 검다」에서 활용되는 다층의 모호성은 해석의 다양성을 이끌어내며 지시 대상과 언어의 가능한 다의적 관계를 폭넓게 확장한다. 커피는 검다 안이 보이지 않는다 개미가 날아다닌다 보이지 않는다 개미는 검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커피는 검다」 중에서 위 시에서 자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관찰자 화자의 시선이 드리우는 가운데, 첫 두 문장은 검어서 커피의 안이 안 보이는 것으로도, 화자 A와 화자 B의 발화가 교차로 제시되고 있어서 방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검은색의 속성에 의해 커피와 밤과 잠이 연결되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이 커피 안인지 방안인지 알 수 없다. 보거나 보지 못하는 화자로 볼 수 있는 또다른 근거는 이어지는 연들에서 “깨진 유리잔처럼 엎질러진 밤 커피가 마르지 않는다”와 “밤새 놓인 커피가 그대로였다”가,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와 “나는 종일 배가 부르다”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자’라는 문자가 첫 연과 마지막 연에 제시되는 모습은 문자를 보낸 화자와 받은 화자의 모호성을 유도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분절된 시간의 비순차적 이어붙임으로 읽을 수도, 꿈속의 중첩적 서사로 읽을 수도 있다. 커피, 밤, 잠이 공유하는 검은색의 가시성과 어미의 혼란을 통해 논리적 중첩 양상을 구축한 것이다. 「기호와 기후」에서도 마찬가지로 빗소리의 불규칙한 리듬과 편안함이 연결되어 불규칙한 심박동의 불편함이 파생되고 불성실과 아픔이 연결된다. 그리고 ‘그’가 ‘그’이거나 ‘방’으로 중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스위치가 달렸으면 좋겠다고/생각했다”를 받는 게 ‘심장’이거나 ‘방’이 된다. 이처럼 한재범의 시에서 동어반복의 유희처럼 보이는 것들을 대개 환유의 의도된 논리를 따르며 누적된 언술들의 논리적 적층으로 인해 모호함과 중층성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의도적으로 입체감이 없는 평평한 사유를 통해 수평의 단선적 논리를 지향하는 가속류와는 변별된다. 4 가속류는 인터넷 플랫폼과 기계장치의 작동 방식에 익숙해져서 매 순간 가상 환경에 동기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시대 디지털화된 주체 경험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이들이 처음에 어떠한 의도로 자기만의 자동적 작법을 개발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극도의 추상성과 단선적 논리로의 산발적 귀결, 현상을 관찰하는 단문의 서술과 사유의 생략 혹은 압축, 시공간의 비약은 가속의 원리에 적합하도록 동시대인들을 훈육하는 미디어 장치의 작동 원리와 결과적으로 흡사하다. 즉 가속류는 각 시인의 창작 매크로 장치라는 현상을 통해 읽은 텍스트의 무의식이므로, 창작자의 원래 의도나 수용자의 감상 지연 효과 등과는 엄연히 다른 차원에서 논해져야 한다. 이러한 가속류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장르의 속성을 되묻는 ‘시적’인 것의 정의와 경계 확장, 총체성의 거부와 파편의 긍정, 시각성과 청각성을 지면에 들여오려는 시도, 기표 자체에 대한 매혹과 끌림, 낯선 감각의 들여다봄, 발화 기계의 실험을 경유한 다른 타자 되어보기 등. 어쩌면 가속류는 디지털 처리 과정에 의해 욕망이 매개되거나 변형되는 동시대 삶의 양식,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에 가장 걸맞은 시 스타일은 아닐까? 그런데 한편으로 앞서 언급한 내용이 가속류 일반에 일률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가라는 점은 다소 비판점을 남긴다.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장피에르 뒤피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철저한 물화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거나 인간중심주의를 극대화하는 데 모두 공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속류의 ‘의의’는 해석 차원에서 부여되는 의의이지 시 자체가 내장한 속성으로 인해 도출되는 것은 아니므로, 같은 논리에 대한 정반대 해석에도 동일하게 무력할 수 있다. 의의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은 근거가 동시에 한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가속류 자체는 시대의 산물이자 징후로서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도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건,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가속류 자체의 어떠함보다는 특정한 경향성이 동시대 작법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상 자체이다. 서두에서 살펴봤듯 몇 년째 심사평에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개입의 의지가 축소되는 현상에 대한 유사한 고민과 유사한 평들이 제출되고 있다. 고민이 해를 거듭하며 심화되는 와중에도 그러한 시의 창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은 뭔가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비단 가속류가 아니라도 특정한 경향이 우세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식과 스타일이 경합·견제되기보다는 다양성과 활발함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면, 진단의 전제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보편이라 가정되는) 다른 시대의 외래 담론보다도, 문학이란 본래 무엇인가 묻고 해명하는 제각각의 정의보다도, 제도나 관행 등을 포함한 우리 문학사의 특수성 위에서 해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추가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현실 대면에의 복권을 강조하기 전에, 현실 대면은 왜 요구되어야 하는지, ‘현실’이라 상정된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하지는 않을까. 이미 가상을 현실로 인식하는 지금 시대에서 ‘현실’이라 정의되는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 어느 정도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또 이러한 가속류는 어떠한 조건과 배경에서 동시대 시단의 주류적인 목소리가 되고 많은 시 독자와 투고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을까. 가속류는 왜 많은 시 창작자들에게 즐거움과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일까.21) 또 가속류가 대변하는 새로운 시대감각은 앞으로 한국시의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갈까. 아주 많은 길을 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과, 아무 길도 없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언뜻 유사해 보이나 실상 아주 다른지도 모른다. 향후를 기약하기로 한다. 1) 이 글에서 다루는 시집은 다음과 같으며 이후 인용시 시집 제목은 생략한다. 김뉘연, 『문서 없는 제목』(봄날의책, 2023), 배시은, 『소공포』(민음사, 2022), 성다영, 『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 2) 가령 조연정은 당시 비평가의 임무를 개별 시인들이 “‘미래파’라는 후광 또는 굴레를 떼어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따로 불러 대화를 시도해보는 일”이라 말한다. 조연정, 「가까스로 가능한, 진실의 세계—‘미래파’의 두번째 시집에 대하여」(2009), 『만짐의 시간』, 문학동네, 2013, 215쪽. 이러한 필요성은 이듬해 작성된 글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는 ‘미래파’의 출현 이후 새로운 감수성이 발견되고 독법이 확장된 것을 긍정하면서도 “미세하게 서로 다른 경향을 가진 시인들의 차별적 특징들이 하나의 이름 안에서 무화되거나, 같은 무리로 호명되지 못한 어떤 시인들은 제대로 읽히지 못하거나, 성숙한 실험의 난해함과 미숙한 실험의 난감함이 섬세히 구분되지 못했다는 반성이 많이 도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당시 ‘미래파’라는 거대한 시대적 자장으로부터 개별 시세계를 구출해야 할 필요성이 여러 논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조연정, 「‘나’라는 정념, ‘너’라는 추상—박희수와 주하림의 시를 읽으며」(2010), 같은 책, 305쪽. 3) 는 주로 조대한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그는 실제 작가의 목소리가 시 내부에 개입하여 중층적 레이어를 이루는 현상을 가리켜 2000년대에 극단으로 멀어졌던 두 일인칭이 2010년대에 다시 좁혀진 것이라 진단한다. 이처럼 그는 2000년대의 성취이자 이후 한계로 제기되었던 내용의 구도를 뒤집은 방식으로 동시대 시적 경향의 의의를 도출해내는데, 그렇기에 이를 자기동일성에 구획되는 양상이 아닌 일인칭의 무수한 수행으로 읽기를 강조한다. 조대한, 「1인칭의 역습, 그리고 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겹쳐진 세계에서 분투하는 시인들」,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나’의 응답—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모음』 2021년 봄호. 또 안지영에 따르면 이러한 ‘2010년대적 나’는 2000년대의 ‘혼종적 주체’들과는 달리 실제 시인과 완전히 단절되지도, 그렇다고 동일시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의의를 얻는다. 안지영, 「‘포스트-’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2010 년대 시에 대한 문학사적 읽기연습」, 『현대비평』 2022년 가을호, 59~60쪽. 4) 최근 심사평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용과 상호텍스트성의 두드러진 활용(황인찬,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367쪽), 세계로의 확장보다는 자기 인식의 되풀이(황인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361쪽), 현실과의 대면 부재(내 향화),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에 기반한 장형화 및 관념성 과잉, 언어의 미니멀리즘(박상수, 「심사평」, 『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 440쪽), “해체를 위한 해체”로 보이는 장르 해체의 가속화 경향(신해욱,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321쪽), 산문화, 무의미하고 비유기적인 이미지 더미의 나열(이병률, 「심사평」,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463쪽). 5) 이수명은 메타시를 “작품에 시인이라는 외부적 차원”이자 “현장성”을 도입하여 언어의 또다른 층위와 레이어를 상정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수명, 「메타시는 없다」, 『시와세계』 2015년 겨울호, 20~21쪽. 90년대에는 이러한 ‘삼인칭’의 활용이 “자아 탐구의 구조적 장치”로서 주목되었음을 떠올려본다면, 문제는 더욱 간단하지 않다. 김준오는 90년대를 전후하여 삼인칭의 활용이 중요한 징후로 두드러짐을 지적하면서 그 대표 주자로 이승훈을 거론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관찰이나 반성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분열된 두 자아 간의 비판적 거리가 유지되는 것을 현대시의 일반적인 양상이라 정의한다. 김준오, 「인칭의 의미론」(1995), 『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살림, 1997, 173~174쪽, 182쪽. 6) 물론 전자는 현실과 가상의 접합, 후자는 가상의 중층화 경향을 가리킨다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시인의 전기적 정보를 알지 못하면 분간이 모호한 그러한 차이보다 두드러지는 건 두 경향 모두 동시대 가장 빈번한 메타 장치인 ‘행위하는 나를 관찰하는 나’ 구도 혹은 그 중첩 구도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중 레이어 장치에서의 메타적 발화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현실과 맞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가름되는지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어쩌면 이는 레이어의 활용보다도 주제나 소재 혹은 발화자의 태도에 귀속되는 건 아닌지 하는 추가적인 의문도 든다. 7) 창작자의 사회적 여건, 그가 속한 세대 일반의 특징을 분석하거나 담론적 수사를 동원하여 시의 사회적 의의와 효용을 열거하는 독법이 과도 해질수록 시와 시인의 역량은 은연중에 무력화된다. 전자의 경우는 시의 당위적 모델에 견주어 작품의 ‘결여’와 ‘증상’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 무감으로 치우치기 쉬우며(따라서 당위적 모델에 대한 내부적 틀은 견고해진다) 후자의 경우는 시가 비평적 해석에 의탁할 수밖에 없게 되어 시보다 시를 치하하는 장식적 언어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따라서 상업주의와의 공모도 긴밀해진다). 시가 해석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시인의 의도된 배치와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개별 작품들의 고유한 역량, 시를 읽을 때 고려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충분히 탐색되지 못한 채 빠르게 지배 담론의 분류 체계가 적용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8) 투고자, 「비평 게임 설계하기—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문학동네, 2023)」,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9) 노버트 위너에 의해 창시된 사이버네틱스는 인지과학의 초석으로서 모든 행위자들에 기계의 지위를 부여하고 ‘마음’ 혹은 ‘생각’을 알고리즘에 의해 수행되는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고자 한 시도이다. 당초 위너는 인간 정신의 통제와 기계의 인간화를 강조하여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극대화를 지향했지만 이후 1차, 2차를 거치며 사이버네틱스의 흐름은 반인본주의적 근거 또한 제공했다. 10)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대항운동으로서 자본주의를 가속화하기 위해 “소외하기, 탈코드화하기, 추상화하기의 경향을 가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자본주의적 원리에 최적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갱신된 가속주의’는 광신적 자본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산출함을 아는 것 위에서 전개된다.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서론」, 『#가속하라—가속주의자 독본』,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엮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3, 14~15쪽, 37쪽. 탈자본주의를 위한 탈코드화가 전환기 이전의 가속주의라면, 오늘날의 가속주의는 “사이버네틱과 디지털, 인터넷으로의 포섭”을 의도한다. 윤태균, 「가속에 관한 몇 가지 서술과 기호에서의 벡터」, 콜리그, 2022. 7. 8. 11) 물론 성다영의 「더 명복」과 「투명한 얼굴」이 다르듯이 한 시인이 매번 유사한 작법만을 반복하지는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12) 소스타인 베블런, 「기계 과정, 그리고 영리 기업의 자연적 쇠퇴」(1904), 『#가속하라』, 103쪽. 13) 이를 적극 활용하는 시인으로 이유야와 변혜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가상화된 자아의 중층적 메타화를 활용하는 가운데 시공간의 압축과 확장 및 즉각적인 이동과 급전환으로 대표되는 가상공간의 원리를 시 내부에 구현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의 설정이나 그래픽을 차용하는 게 아니라 게임 플레이에서의 사고 과정이 창작 주체에게 체화된 양상, 즉 기계 인터페이스 경험이 시적 사유에 동기화된 양상의 반영이다. 그리하여 이유야에게는 스킬을 가동하듯 ‘그런데, 그러자’를 전후로 시공간의 빈번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변혜지는 의미 단어가 큰 추상어들을 리셋과 재플레이를 위한 기능적 어휘로 사용한다. 이유야, 『일인조』, 파란, 2022;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 14) 가령 김유림은 특정한 맵의 한정된 반경 내에서 이동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 화자(와 그 화자의 외부 관찰 구도)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한정된 거리만을 이동하도록 설정된 배시은의 「평균자유행정」 속 NPC 화자나 성다영의 산책-관찰-생각 연속체 화자를 떠올리게 한다. 김유림, 『별세계』, 창비, 2022. 15) 소스타인 베블런, 같은 글, 106쪽. 16) 들뢰즈에 따르면 가분체란 디지털 환경에 의해 생산된 주체로서 “파열된 혹은 균열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시작하고 재조직하게 하는 자아 경험”을 뜻하며, 이때 “경로들은 매순간 ‘새로고침’된다”. 앨피 본, 『게임, 사랑, 정치—게임화된 애정, 관계, 감정, 일상 그리고 기술 사회 욕망혁명의 미래』, 박종주 옮김, 시대의창, 2023, 177쪽. 17) 같은 책, 56쪽. 18) 같은 책, 176쪽. 19) 강보원, 「타국에서 펼쳐 든 사전」, 『문서 없는 제목』 해설, 136~137쪽 20) 투고자, 「은유와 지상명령—『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문학인』 2022년 겨울호, 222쪽. 21) 앞서 박상수가 심사평에서 중층적 메타 전략이 시가 저절로 진행되게 하여 편리하다고 언급한 것은 적은 수고로 시를 쓰기에 특화된 어떤 양식적 문법들이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바로 여기서 많은 투고자들이 이를 선호하는 또다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 가정해볼 수 있는 건 이런 것이다.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시를 쓰는 일보다도 (등단 여부를 떠나) ‘시인’으로의 진입과 공인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그럴 때 가속류와 같은 시쓰기는 시를 생산하는 데 무척 용이한 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경우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왜 매력적인 상징자본 혹은 안전장치가 되는가?

계간 시작 최다영 허향숙한명희시집평론비평리뷰천년의시작여우난골 2024
최다영 믿음의 내용을 인식하는 시 ― 박영기 시집 『흰 것』(파란, 2023)

믿음의 내용을 인식하는 시 ― 박영기 『흰 것』(파란, 2023) 줄리엣 아이비의 「we’re all eating each other」은 모두가 결국엔 죽어서 꽃의 일부가 되고, 후손들이 그 꿀을 모닝티에 넣어 마실 것이므로 결국 우리는 서로를 먹게 된다는, 생과 사의 타당한 순환에 관한 노래이다. 박영기의 시집 『흰 것』 또한 죽음의 장면에 오래 시선을 두고 있지만, 이는 다시 생으로 돌아가는 어떤 원리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고 있어 깊고도 고요한 자연의 섭리에 대해 숙고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1 박영기의 시에서는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빈번히 들린다.(「수국정원」, 「귀신의 무게」, 「백년골목」, 「배려」) 무엇이 있다는 걸까. 존재를 확언하는 목소리는 왜 이 시집에서 그토록 자주 발화되는 걸까. 어쩌면 이는 믿음일까. 무언가가 있다는 말을 통해 실상 강조되거나 수행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시에서 ‘있다’의 연쇄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없다’가 강박적으로 출몰하며 특이점을 형성하는 「미끄러지는 오리」를 먼저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중요한 심증을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 오리가 호수에서 “자맥질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이 시에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오리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호수”가 “토하”거나 “수면이 게”우는 것으로 전도되어 제시된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을 관찰하고 있는 화자의 눈에 ‘오리’는 읽어내야 할 것이지만 결코 읽을 수 없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오리가 자꾸만 수면 위를 미끄러지기 때문인데, 이때 반복되는 ‘없음’의 내용은 “읽을 수 없다”로서 ‘오리’가 통상적인 문맥을 어긋나는 시의 언어에 빗대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오리 대신 ‘언어’를 기입하여 오리와 수면의 관계를 다시 읽어본다면, “오리 밖으로 미끄러지는 오리/오리는 오리를 더 미끄러져야/읽을 수 있다”라는 말은 언어의 지시성을 엇돌거나 자기 자신과의 어긋남을 통해서만 도달이 가능한 시 언어의 독특한 역설에 대한 비유로도 이해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의 언어에 대한 박영기의 사유는 글쓰기에 대한 태도와 결의로도 표출된다. 그에게 “소설”은 “화구에서 막 꺼내/부서지기 직전/뜨거운” 흰 재의 속성을 닮은 “흰 것”으로 일컬어진다. 화자는 “죽어도” 희고 “검어도” 흰 이 잿더미를 보면서 “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쓸 것”을 다짐한다. 그가 “끝까지” 써야만 하는 당위는 “쓰지 않을 때/시간이 멈”추고 “계절이 사라”지기 때문인데(「흰 것」) 여기에는 무언가를 계속 써야만 슬픔의 시간에 고립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 생을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가 배어 있다. 소진되거나 명을 다하여 ‘흰 것’이 되어버린 어떠한 삶을 두고 그저 슬퍼하기만 하는 데 모든 기력을 쏟기보다는 가능한 한 계속해서 “말하기”를 실천해나갈 것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이 시집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죽음을 다루는 시 중에서도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발화는 특별히 주목을 요한다. 「우리가 돼지를 심고 있을 때」에서 깊게 판 “구덩이”에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장면은 고랑을 만들어 씨앗을 ‘심는’ 일처럼 비유된다.1) 이 섬뜩한 풍경은 돼지의 발화로 구체화되면서 인간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도 읽힌다.(“오늘은 우리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들이 끝장날 거요”) 「역할극」 또한 칼로 손질될 때부터 식탁 위에서 살과 뼈가 발라지는 모든 과정이 생선구이 화자의 입을 빌려 전개됨으로써 다른 존재의 피와 살과 뼈를 취하는 일에 대해 숙고하도록 이끈다. 피와 살과 뼈는 『흰 것』에서 생명의 근원이자 속성을 상징하며 자주 등장하는 시어이기도 하다. 심지어 감자를 살과 피가 흐르는 것처럼 감각하고(「접착테이프와 구운 감자」), 추상적인 생각까지도 물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하는 건 이 시인이 살아 있는 상태에 대해 보다 역동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2) 더 나아가 이는 ‘있다’의 범위를 확장하여 가치 있는 생명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 이미 소멸되어 물질적 존재가 없는 것들에게도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있다’고 자리를 부여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2 한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그 존재를 확언하는 일은 실상 ‘나’의 실존에 대한 확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 다른 존재자들은 ‘나’의 ‘있음’에서 말미암은 지각 능력에 의해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문처럼 ‘있다’를 되뇌는 박영기의 화자들은 당연하게 존재하던 풍경들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게 되묻고 낯설게 감각함으로써 그러한 대상들을 발견하는 인식 주체 ‘나’에 대한 인식을 다시 수행한다. 끓는 해변이 있다. 숯불처럼 거꾸로 타는 태양이 있다. 뜨거운 자갈들이 있다. 지글지글 뱃살을 굽고 있다. 자갈 밑에 게거미가 있다. 지그시 누르는 오후 1시의 자갈돌이 있다. 꿈틀거림을 꾸욱 누르는 손바닥이 있다. 버티다 뚝 끊어지는 힘이 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쾌감이 있다. 담뱃불처럼 게거미를 비벼 끄는 손가락이 있다. 태양을 비벼 끄는 검지가 있다. ― 「백년골목」 부분 위 시는 ‘있다’가 확언하는 서술의 대상에 대한 연상이 그 대상의 감각적 속성에 착안하여 시선을 옮겨가면서 시의 공간을 넓혀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끓는’ 것의 뜨거움에 대한 인식은 마찬가지로 뜨거움이라는 속성을 공유하는 “숯불”과 “태양”이 위치한 “해변”의 위쪽으로 시선을 이동시키고, 다시 하강과 상승, 줌인을 반복하며 해변에 ‘있는’ 풍경들을 차례로 조망한다. 뜨거운 속성에 기대어 담뱃불로 옮겨 간 태양은 “검지”가 “비벼 끄는” 것이 된다. 화자의 이동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는 이 시의 공간은 1연의 해변 외 다양한 장소들로까지 시선의 침투를 이어받으며 다채롭게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환기한다. 그런데 이렇게 발견한 ‘있음’의 나열은 ‘나’를 서술할 보어의 자리에 들어갈 목록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기준」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어 ‘나는 ~입니다’라는 문장의 연쇄가 이어지는데, 이는 서술어를 ‘있다’로 대치할 경우 한자리에서부터 시선의 이동을 시작하여 풍경의 조감도를 넓혀가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내’가 발견한 풍경이 곧 ‘내’가 되는 것이다. 이때 “나는 있다와 보이지 않는 모든 있다만큼 많은 있다가 기준입니다”라는 단언은 당장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까지를 ‘있음’의 영역에 포함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란히 연쇄되는 항목들이 지금 보고 있는 풍경과 지금은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 맞붙어 구성되어 있음은 이를 강조하는 면이 있다. 3 그러나 가장 독특한 ‘되기’의 양상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요한 마음이 죽음을 거쳐 자신을 그 대상의 일부로 변화시키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딱따구리 혀에 대한 최초의 정확한 묘사는 1575년 네덜란드 해부학자 폴 허르 코이터르에 의해 이루어졌다.(월터 아이작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딱따구리의 혀는 부리 길이의 세 배 이상 늘어날 수 있다. 혀는 사용하지 않을 땐 두개골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연골 같은 구조의 혀는 턱을 지나 딱따구리의 머리를 휘감은 뒤 콧구멍으로 휘어져 내려온다. 긴 혀는 나무 안쪽의 유충을 파먹을 때 쓰인다. 더불어 뇌를 보호해 준다. 부리로 나무껍질을 반복적으로 쫄 때, 혀는 쿠션 역할을 하면서 뇌를 충격으로부터 보호한다. 딱따구리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깊어진다.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 먼저 딱따구리를 잡아야 한다. 먼저 딱따구리보다 빨리 날아야 한다. 차라리 딱따구리 먹이로 태어난다. 그보다 먼저 죽어야 태어날 수 있다. 딱따구리를 유인한다. 두통이 시작된다. 골이 띵하다. 1초에 스무 번 쫀다. 부리를 피해 골 깊숙이 들어간다. 묘사할 짬 없이 뇌를 공격당한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뇌 주름으로 딱따구리 혀를 꽉 움켜쥔다. 혀끝에 뼈가 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다. 딱따구리 입속으로 들어간다. ― 「두통의 원인」 전문 화자는 딱따구리에 대한 묘사를 읽다가 딱따구리를 궁금해하고 딱따구리를 묘사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딱따구리를 잡아야 한다.” 화자가 읽던 딱따구리에 대한 ‘묘사’는 이제 화자가 묘사해야 하는 과업으로 바뀌고, 그러기 위해 화자는 “딱따구리 먹이로 태어”나고자 한다. “그[딱따구리]보다 먼저 죽어야 태어날 수 있다”는 화자의 진술은 딱따구리에게 먹혀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딱따구리 몸의 숙주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벌레로 변신한 화자는 “두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곳으로 가서 딱따구리에게 쪼이고 먹히는데, 이때 “뇌를 공격당”하는 모습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쫄 때 겪는 고통과 언뜻 구별되지 않는다. 이후 딱따구리의 내부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벌레 화자는 딱따구리의 혀를 움켜쥠으로써 혀가 보호하고 있던 뇌를 탐닉하기 시작한다. 무언가에 대한 집요한 궁금증과 집착이 그 대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는 이러한 과정을 통과하여 대상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아니던 무존재의 정체성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되어가는 양상도 발견할 수 있다.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그 무엇도 아닌데/그 무엇이 되어 가는 중이다//나는//이것, 저것, 그것이/느리게 되어 가고 있다”(「바람행성」). 그런데 어느 한 존재자가 “무엇으로” “이동”할 때의 모습은 껍질이나 옷을 탈피하는 이미지로 그려지곤 한다. “오늘의 수피를 벗는 나무/오늘의 살비듬을 털어 내는 사람/오늘 하루치의 고양이를 가죽 밖으로 밀어내는 고양이”에서 그려지듯이, 언뜻 변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하는 것이 그 존재 자체의 변화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 세계에서 무언가가 되었다가 다시 무존재로 돌아가는 일은 “무엇의 몸을 입었다가 입은 몸을 벗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 무엇도 아닌 게 되”는 일은 생명 있는 모든 존재자에게 필연적으로 거듭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시/그 무엇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라는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이 시의 첫 문장인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의 순환이 모든 존재자에게 살아 있는 내내 이어지는 것이라는, 삶에 대한 박영기 시인 특유의 섭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불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네 껍질은/네 살이고 네 피고 네 뼈다”(「접착테이프와 구운 감자」)라는 창조주의 언명과 같은 말이 가리키듯 이 시집에서 ‘껍질’이 가장 근본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삶이 ‘되기’와 ‘되기로부터의 탈피’의 연속이라면, 껍질 안의 알맹이가 또 다른 껍질을 겹겹이 입고 들어차 있는 양상이 생과 사의 원형임을 암시한다. “알맹이가 알맹이를 밀어 올”리는 상승의 장소이자 “까고 까도 껍데기뿐”인 하강의 장소로서 껍질의 적층 자체가 역방향의 대칭을 이루며 생사의 순환을 형성하는 것이다.(「기억의 오류」) 그렇기에 껍질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감하는 것이 가능한 장소가 된다. 이렇듯 박영기의 『흰 것』은 분명히 소멸되면서도 소멸되지 않고 다른 생명의 이어짐을 예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임을 일깨운다. 1) 흰 것』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돼지’는 주로 죽은 돼지로 그려진다. 「비너스」에서의 잠자는 돼지 또한 “시취”나 “송장파리” 등이 암시하듯 이미 죽었음을 알 수 있다. 2) 「서식지」에서 추상적인 것이 감각 가능한 물질의 형상을 입고 더 나아가 생물로까지 변화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기도는 생각만으로도 은총이 비처럼 쏟아진다/샤워기에서 뼈가 훤히 보이는 물뱀들/나에게 다섯 번째 면사포를 씌운다”에서 “은총”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과 결합하여 물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다시 여러 줄기로 나뉘어 쏟아지는 속성에 착안하여 “물뱀”에 비유된다. 이후 “물뱀”이자 “물줄기”인 것은 흰색과의 유사성으로 “국수”나 “흰떡”에 대한 연상으로 이어진다.

계간 파란 최다영 박영기시집평론비평리뷰파란 2024
최다영 비평 게임 설계하기 :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

비평 게임 설계하기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1) 1. ‘시―쓰기’를 읽는 일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취미를 묻는 질문에 어느 팀 스포츠를 말하면 ‘하는 것’과 ‘보는 것’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느냐는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그때마다 (현장 관중이 아닌) 화면 너머로 경기를 보는 관람자만이 가지는 독자적인 즐거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주어진 정보와 90분 내내 새롭게 축적되는 정보 및 변수 들을 바탕으로 매초마다 변화하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예측과 복기가 즉각적으로 입력된다. 경기가 완결된 이후의 복기 과정은 나만의 의미화에 따라 타임라인을 구성하게 한다. 나는 옵저버 나에 의해 재편된 경기를 읽는다. 물론 이는 경기에 직접 참가한 플레이어가 경기를 복기하면서 행위적 서사를 기입하는 경우와는 (일정 부분 겹친다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이동휘는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 이론에서 더 나아가 행위적 서사를 미적인 분투형 게임의 독자적인 특질로 제안한다. 그는 노엘 캐럴이 언급한 예술 작품 비평의 구성 요소 중 특별히 기술(description)에 집중하는데, 그에 따르면 장기적 행위자의 게임 감상이 미적으로 형성되고 공유되는 과정의 핵심은 감상 단계에서의 게임 경험 기술에 있으며 플레이를 기술하는 일은 반드시 서사로 이루어진다.2) 행위자가 자신의 게임 경험을 복기하는(review) 과정은 반드시 특정한 ‘환경’과 ‘제약’ 속에서의 ‘목표’ 추구라는 서사의 구조를 띠고,3) 플레이어이자 감상자인 자신을 ‘인물’이라는 구성 요소로 더함으로써 서사의 요건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동휘는 게임 플레이의 경험이 서사화의 경험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게임 경험은 행위적 서사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위적 서사를 통해 예술 경험을 기술하는 장르”4)는 게임이 유일한 걸까. 나는 감상을 통한 행위적 서사의 산출이 시집을 읽는 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권의 기획으로 묶인 텍스트들의 언어 배치를 게임 디자인에 준하는 미적 인공물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시집 읽기의 한 목표를 내적 체계의 구성으로 설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러한 작업은 각 행위자들이 지형지물을 활용해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생성하는 일로 이어지는데, 이때 독자의 수만큼이나 무수한 시나리오의 발생이 가능하다. 시집의 독자는 읽는 동시에 (놀이를) 쓴다.5) 물론 이는 단순히 시적 요소들의 미적 조화를 감상하는 것과는 변별된다. 내적 논리의 결여를 텍스트 외부의 상상력으로 메우거나 독자의 ‘참여’로 원 텍스트의 전개에 영향을 가하는 하이퍼 서사와도 전연 다른 차원의 감상이다. 시인의 ‘실제’ 의도를 파악하는 것과도 또한 무관하다. 오히려 쓰기 과정에서의 내적 필연성과 논리를 사후적으로 구성해보는 것에 가까운 이러한 작업을 통해 텍스트의 의도는 해석하거나 알아맞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창조하고 생성하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 각자가 제시하는 텍스트의 개별성과 서로 다른 문학적 지향들이 만나 경합할 수 있다면, 해당 텍스트는 단일한 해석에 구획되지 않고 다층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텍스트를 재편해보는 즐거움은 내게 비평 쓰기를 촉발하게 한 중요한 심적 계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쓰기를 재편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해의 제안은 시를 읽는 다양한 즐거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면서 비평의 역할을 확장하는 일과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비판은 넓은 의미로 분화되고 확장되면서 여러 생산적인 비평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편의적으로 분절된 이분법적 준거에의 귀속을 경계하고, 같은 논의의 반복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비판적 읽기의 역량과 그 즐거움을 깊이 탐구할 수 있도록 독해의 방식들을 다양화하는 것이 지금 비평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일 수 있다. 시를 읽는 방법들이 더 많이 제시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미 어떠한 경향의 시집들은 독자적인 규칙과 세계관을 갖추고자 스스로를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비롯해 타 장르의 속성을 차용하던 것이 이전의 경향성이었다면, 요즘의 풍경은 시집 자체가 하나의 출입 가능한 가상 세계관이 되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창작 및 기획에서 목적이 되는 것은 ‘시’보다 ‘시 쓰기’ 자체라 할 수 있으므로, ‘시’를 목적에 두고 읽는 것보다 유효한 독해의 방법이 제시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기능적 장치로서의 ‘사랑’과 익명의 시 쓰기 이러한 생각은 『멸망법』을 읽으며 더욱 강화되었다. 『멸망법』의 시적 전략은 추상성과 비현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별 구체성을 적극적으로 소거하는 것에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 “온통 새하얀 벌판”(「팩맨」)이라는 장소가 대표하듯 이 표백된 세계에서 묘사와 디테일은 극도로 제한되고, 비의적 진술은 빈번히 등장한다. 또한 “가장 큰”(「플라스틱 아일랜드」), ‘모든’, “아주/먼/곳”(「여름에 꾼 꿈」), ‘마지막’, ‘영원히’ 등 최상급 수사와 의미화 개념이 큰 추상어가 거의 모든 시에 동원된다. ‘사람들’에 대한 묘사 또한 ‘아무도’, ‘누구나’, ‘누군가’ 등의 익명의 집단 군중으로 처리되는데, 이들은 얼굴 또한 부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비현실감 주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아마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이다. 이 아름다움의 실체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은 반면, 비현실성의 의도가 개입되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아름다운’이라는 관형어가 등장한다. ‘사랑’이 사용되는 용례도 마찬가지다. 시집 내 행위자들의 명분은 ‘사랑’이라는 추상으로 집약된다. 사랑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자 “절대로 끝나지 않”(「세계법」)는 절대적인 가치로 제시되지만, 그러한 언명을 통해 사랑을 수식할 최상급 수사들을 불러내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해 보인다. ‘사랑’이 마치 기능적 어휘처럼 쓰이는 것이다. 이처럼 『멸망법』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추상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그 단어 자체가 내포하리라 여겨지는 비의적 속성에 맡겨져 있다. 이 세계관에 익명의 누구든 새로 기입할 수 있도록 어휘 사용을 제한한 것인지, “굼뜬”(「테라포밍」) 창조주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비유하기 위함인지, 「스카이다이빙」에서 화자의 고백처럼 상상력의 곤혹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향성은 이미 동시대 시의 한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 경향이 강한 이러한 시들을 잠정적으로 ‘가속류’라고 칭하자. 그런데 이들에게 앞서 마련된 어떤 기준을 성급하게 적용하여 구획과 할당의 영역으로 곧장 넘어간다면 지금 시의 중요한 한 징후를 통해 유의미한 논의를 이끌어낼 여지는 축소되고 말 것이다. 고선경의 시가 암시하듯 이미 동시대인들은 “채널을 바꾸면”(「무대륙」) 리셋이 가능한 경험과 감각을 공유하면서 이전의 인간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 위치에서 보다 많은 대화를 가능케 할 생산적인 질문을 먼저 모색해보는 게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판단을 유보하고 질문을 전환해보자. 이러한 시 쓰기는 왜 필요했으며 시인에게 어떤 유용을 주는가? 이를 통해 시인은 어떤 효과를 도모하고 있는가? 이러한 시 쓰기를 통해 발생했을 즐거움을 독자는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봤듯, 한 권의 시집을 미적 인공물로 가정하고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중층적 행위적 서사를 축조해보는 것이 시를 읽는 유의미한 즐거움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은 발생 가능한 무수한 시나리오 중 나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희재의 세계’를 보존하는 파수꾼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은 그 내부의 또 다른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이 현실화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이를 시집 제목으로 차용한 것에서부터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듯, 변혜지의 『멸망법』 또한 세계를 완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 창작 노동자 ‘신’의 시점과 그 신이 쓴 소설 내부 화자의 시점으로 구분된다. 구체적으로 ‘창’을 경계로 그 안과 밖이 구획되는데,6) 이때 창밖의 게임 아바타 ‘나’는 미리 입력된 행위를 매크로처럼 연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는 언급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리고 아바타 화자는 다시 ‘문’의 안과 밖으로 구분되는데, 문안에는 “소분”(「테라포밍」)되어 비상용으로 보관된 복수의 ‘나’들이 존재하고, 문밖에서 실패하면 다시 문안으로 회귀한다.(「예쁜꼬마선충」) 또 『전독시』의 세계관이 그러하듯 『멸망법』에서도 게임의 회차가 반복되는데, 매 게임의 시연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꿈속’을 감상하는 옵저버(observer)로서의 ‘나’ 또한 이 시집에 중층적 시선을 드리운다. 그 각각의 층위는 구분되지 않도록 의도되어 있지만, 엄밀히 각각 다른 층위에서 ‘나’의 시점들이 교차되며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목표는 ‘이번에는’ “완벽한 엔딩”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 생(시―게임)’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너’가 “이번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손가락」)(「모자의 일」) 그리하여 사랑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스템을 초기화”하고, 아바타인 ‘나’는 이미 “곤죽이” 된 상태이지만 “다시 태어”(「손가락」)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즉, 게임을 리셋하여 다시 시작할 기능적 구실을 ‘사랑’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하였다”는 서술어로부터 시작되는 다음 인용 시는 이 세계관의 목적이 달성되어 이상적인 결말로서 사랑이 성사된 모습을 보여준다. 무릎을 굽혀 희재의 운동화를 벗기고 씻지 않은 몸을 침대에 눕힐 것이다. 축축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희재의 배를 토닥이며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 나는 밖으로 나갈 것이다. 잠시 후 누군가 깨어날 것이다. 깨어난 사람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카메라 속의 풍경이 함께 명멸할 것이다. 어둑한 천장이 서서히 밝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어서 눈을 감아. 침 흘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파수꾼이 문 앞에 엎드려 있다. 나는 개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으려다 말고, 34평방미터의 세계를 잠근다. 그 속에서 희재는 내내 안전할 것이다. ―「마침내 희재를 위한 세계를」 부분 여기서 ‘나’는 희재가 잠들자 희재가 속해 있는 공간 자체를 닫고 그 앞을 파수꾼 개가 지키게 한다.7) 단언에 가까운 진술인 마지막 문장은 마냥 기능적 목적만 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느 정도 해명해준다. 『멸망법』에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시선 안에 가두어서 보존하는 것이다. “놀이”와 “이지메”(「플라스틱 아일랜드」)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다소 섬뜩하더라도 오직 한 명에게만 집중된 관심 말이다.(「희박하게 끓어오르는 물」, 「브릭하우스」) 이러한 “파수(把守)”(「세계법」)가 이 세계관에서는 ‘사랑’이자 ‘놀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멸살법」 차용의 연장에서, 『멸망법』은 이 시집의 독자일 무수한 ‘김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독자’ 중 하나로서 『멸망법』을 읽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어느 날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이 시집이 현실화될 일을 대비하기?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보며 이 시집을 가지고 더 잘 ‘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김독자’가 “디지털 사이보그”이면서 “크리에이터이자 스트리머”8)가 되었던 것처럼, 스스로 플레이를 연출하면서 독자가 새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게 되는 일이다. 4. 버블 기분 『소다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엉뚱한 상상이 자주 끼어든다는 것이다. 고선경은 주로 어느 공간에서 바라보이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곳에서 자유롭게 흐르는 단상이나 공상을 동시에 쓴다. 그리하여 단문의 묘사와 연상이 짧은 행 단위로 빈번히 교차 전환된다. 가령 “절반만 빛바랜 이파리/물웅덩이에 둥둥/컨버스는 역시 로우보다 하이//밟으면/이파리가 구겨지고 구름이 조각난다”(「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는 짧은 단락에서 화자는 자신이 클로즈업한 장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단상을 빠르게 옮겨간다. 그리고 수시로 틈입하는 상상은 주로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뭐가 되고 싶다는 엉뚱한 ‘바람’에서 비롯된다. 음식이 나오기 전 연분홍색 다이얼 전화기를 빤히 쳐다봤어 나는 가끔 인테리어 소품이 되는 상상을 해 조용하고 신비한 (…) 케첩 묻은 앞치마를 두른 네 정체가 실은 스파이였으면 좋겠어 메론소다에 이상한 가루약을 넣었으면 (…) 음악이 배경이 될 수 있다면 생각도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속에서 생각을 스파게티처럼 포크로 돌돌 감는다 그리고 우리는 스파이답게 몰래 눈빛을 주고받지 짜이찌엔…… 워시환니 우리가 지금은 살아 있어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죽은 사람 노래를 다 듣네 생각은 불어서 포크 끝에서 툭툭 끊어진다 이렇게라도 살아 있으면 언젠가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신주쿠 시먼딩 킷사텐……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가라앉는 메론소다의 기분 ―「메론소다와 나폴리탄」 부분 이때 ‘생각’이 파스타처럼 감아 먹을 수 있는 물성으로 제시되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생각은 마실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생각이 “너무도 시끄러”(「츠키에게는」)워서 현실의 청각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와 항상 함께 있으면서 화자를 “쓰다듬”(「샤워젤과 소다수」)는 것 또한 생각이다. 그런가 하면 “메론소다의 기분”(「메론소다와 나폴리탄」)과 같이 ‘기분’이 감각적 이미지로 대신 제시되는 것 또한 『소다수』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체육대회가 끝난 다음날의 기분”(「여름 오후의 슬러시」)도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고선경은 경험한 감각 자체를 기분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감정을 이미지로 느낀다기보다, 기분이라는 것 자체가 그날의 이미지에 각인된 감정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 바람만으로도 감각을 환기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9) 한편 『멸망법』에서 기능적 역할을 겸하던 것이 ‘사랑’이라는 시어였다면, 『소다수』에서는 빗물이 끓는 이미지가 강박적으로 돌출하면서 이미지의 각운을 형성하는 양상을 눈여겨볼 만하다. 끓는 빗물이 유리창을 부술 듯이 때리며 몰아치거나, 빗속에 피워둔 향이 꺼지지 않거나, 불타는 나무 위로 비가 내리는 이미지 등은 모두 그 변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가능의 이미지들은 시부야 취향과 일상 ‘추구미’,10) ‘킹받는 밈’과 시시껄렁한 농담, 색색의 디저트, 향기와 맛으로 대표되는 감각 묘사 사이로 돌연 나타나 이 세계의 혈당을 적절히 낮추는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고선경의 개인적 이미지는 「밝은 산책」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듯 자기 자신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충동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소다수』에 수록된 여러 시에서 죽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고선경의 ‘개복치’ 화자들은 툭하면 죽고, 또 그 죽음을 희화화한다. “어디서든/간절하게 살고 싶진 않”(「파르코백화점이 보이는 시부야 카페에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져버려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수정과 세리」) 만들고자 하는 심적 동기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러한 모습은 “세계를 구할 영웅의 운명”(「무대륙」)이라는 일시적 행위성으로부터 일부러 이탈하여 ‘사냥’ 대신 다른 모험가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플레이어의 형상에서도 발견된다.11) 어쩌면 이는 고선경에게 ‘사랑’인 것과도 긴밀히 연동되는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혜지에게 사랑이 멸균 지대를 만들어 대상을 보존하고 지켜보는 것이었다면 고선경에게 사랑은 뒤엉켜 정체가 불분명한 여러 기분의 갈래들을 섬세하게 “더 잘 구별해”(「사랑의 달인)」내는 능력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서로의 취향에 감염되어 뒤섞이고 싶은 마음이다.(「사이버 시옷시옷」) 이러한 양가성과 소통에의 지향을 필연적인 사랑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각자가 감상 활동을 통해 생성하게 될 서사화 과정 또한 그 사랑의 구체성을 직접 기술해보는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가 궁금한 건 더 재미있게 놀 방법”(「우주 달팽이 정거장」)일 뿐이다. 1) 이하 본문에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은 『멸망법』으로, 수록작인 「누군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절대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마침내 희재를 위한 세계를」, 「하늘과 땅 사이에 뭐가 있더라?」는 각각 「손가락」, 「멸망법」, 「세계법」, 「희재계」, 「하늘과 땅」으로, 『샤워젤과 소다수』의 경우 『소다수』로 표기한다. 2) 이동휘, 「게임, 서사, 감상―『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이전과 이후」, 『문학동네』 2023년 여름호, p.106. 3) 같은 쪽. 4) 같은 글, p.107. 5) 이때 게임의 목표는 서사 창안이기 때문에 행위적 서사는 중층적으로 서술될 것이다. 표면적인 서사에서 ‘인물’의 위치에 놓이는 것은 시집의 독자이지만, 내부 서사에서는 ‘화자(들)’이 ‘인물’로 놓인다. 6) 한편 희재가 창조물이면서 ‘신’ 파트타임 근무를 하는 모습은 이 내부 세계가 또다시 창작자와 창조물들로 중층화되어 있음을 암시한다.(「Enter the World」) 이는 『전독시』가 ‘김독자’의 독자이면서 후원자인 ‘성좌’의 존재를 가정한 대표적인 ‘성좌물’임을 떠올리게 한다. 독자이자 크리에이터의 관찰 구도가 무한 소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7) 이 시에서는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오마주가 두드러진다. 「오수」의 변주처럼 보일 수 있는 요인들을 적극 활용하는 「희재계」 외에도, 「하늘과 땅」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하기 위해 ‘생각’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모습은 “그 아이를 개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는 「오수」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시에서는 에반게리온의 세카이계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는데, “여러 장르 요소들이 결합한 키메라”인 『전독시』와 마찬가지로, 변혜지의 시 또한 동시대 시의 주요 모티프와 “웹소설 상품미학의 우세종”을 적극 차용하여 ‘키메라-시’가 되기를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전독시』에 대한 분석은 다음을 참고. 유인혁, 「사랑의 사이보그: 한국 웹소설에 나타난 디지털 사이보그와 친밀성 자본의 상상력」, 『현대비평』 2021년 가을호, pp. 65~66. 키메라의 목적은 유기체 형성으로 응집된다는 점에서 패스티시나 ‘접붙이기’와는 다르다. 『멸망법』은 가속류이면서 차용해온 조직들로 자체적인 세계관을 축조하는 ‘가속류-키메라’인 셈인데, 이는 뒤이어 살펴볼 고선경과는 변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8) 유인혁, 같은 글, pp.70, 72. 9) “온천에 가고 싶다/한여름에 그렇게 말하니까 쪄 죽을 것 같은/더위가 입속까지 밀려들어오는구나 열대야/열대야니까/노상에서 과자 한 봉지 펼쳐놓고 캔맥주를 마신다”(「연장전」) 10) “내 파란 담뱃갑, 투명한 뿔테안경, 외국어가 적힌 티셔츠, 절간 냄새, 팥빙수 모양 핸드폰 고리, 처피 뱅, 빌어먹을”(「일요일 오전의 짜파게티」) 11) 시의 배경은 RPG 메이플스토리의 수중맵 아쿠아리움이다. 이 게임에서 사냥을 하지 않으면 경험치를 쌓지 못해 다음 레벨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같은 몬스터를 수천 마리씩 사냥하는 ‘노가다 퀘스트’를 완수해야 하지만, 이 플레이어 화자는 몬스터가 귀여워서 죽이지 못하고 고민에 빠진다. “이봐, 몬스터/너에게도 엄마가 있나?”(「몬스터의 유품」)

계간 문학과사회 최다영 변혜지고선경시집평론비평리뷰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 202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