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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 2024년 9월호(제417호)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4) ― 김종삼 : 교섭운동의 미학적 형식

정과리 문학평론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정과리’라는 필명으로 ‘조세희론’이 입선하여 평론활동을 시작했으며, 1988년부터 2004년까지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한국 현대문학 및 현대 문명에 관한 평론 및 저술들을 발표해 왔다. 주요 저서로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2005), 『문신공방, 하나』(역락, 2006),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문학과지성사, 2008), 『네안데르탈인의 귀환』(문학과지성사, 2008), 『들어라 청년들아』(사문난적, 2008), 『글숨의 광합성』(문학과지성사, 2009),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2014), Un désir de littérature coréenne(DeCrescenzo éditeurs, 2015) , 『뫼비우스 분면을 떠도는 한국문학을 위한 안내서』(문학과지성사, 2016),『문신공방, 둘』(역락, 2018), 『문신공방, 셋』(역락, 2019) ,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문학과지성사, 2020),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2023) 등이 있다. 소천비평문학상(1992), 팔봉비평문학상(2000), 현대문학상(2000), 김환태평론상(2005), 대산문학상(2005), 편운문학상(2015)을 수상하였다. 1999년에 문화관광부에서 기획한 ‘2000년 새로운 예술의 해’ 문학분과위원으로서, 디지털환경과 문학의 공존 방식으로 모색하기 위한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언어의 새벽’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다. 2001-2002년에 KBS ‘TV 책을 말하다’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2000년 이후,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으로 있다. 1984년부터 2000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문과대학 불문과에서 재직하였으며, 2000년 9월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로 옮겨 2023년 8월 은퇴하였다. 주요 강의 분야는 한국 현대시, 정신분석 비평,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간의 상호관련성 연구, 디지털 문명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등이었다. 현재 『현대시학』 주간, 동인문학상 종신심사위원, 삼성호암문화재단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김종삼과 서정주


  김종삼의 죽음-삶의 병치가 상호교섭적이라면 그건 어떤 미학적 형식을 낳은 것일까?

  먼저 한 가지 점에 주목해보자. 그가 죽음의 현실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태도를 표명한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런 태도를 공언으로써 표명하는 게 아니라 형상적으로 그것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상상력의 물질성이다.

  물질적 상상력은 생생한 사물을 묘사하는 것으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의 촌철로서도 가능하다. 지난 호에 읽었던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에서 그것은 ‘오다’라는 어휘에 집약되었다. 내가 그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을 떠나 어디로 갈 게 아니라, 그 꿈을 여기로 데리고 와야 한다, 는 것이다.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았던 제 3연에 선명히 지시되어 있다.


누구나,
모진 서름을 잊는 이로서,
오시어도 좋은 너무
오래되어 응결되었으므로
구속이란 죄를 면치 못하는
이라면 오시어도 좋은
오동나무가 많은 부락입니다.


  다시 언급하자면, 제 3행의 “오시어도 좋은 너무”는 “오시어도 좋은 / 너무”로 끊어 읽어야 한다. 그것을 붙여 쓴 까닭은 호흡이 급해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꿈을 여기서 이루고 싶은 마음과 이 땅에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감이 격렬하게 부닥쳤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몸의 자연발생적 촉구(促句)가 시적 효과가 없다면 오문(汚文)이 되리라. 이 시행에서는 난데없이 붙은 “너무”가 독자의 읽는 호흡 안에서는 앞 부분의 “오시어도 좋은”에 연결되어 일종의 도치처럼 느끼게 한다. 그 때문에 ‘오심’의 감격이 증대된다. 그러나 잠깐 어딘가 어색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읽으면 ‘오심’의 무한한 지연을 가리키는 한정사이다. 따라서 “너무”는 교묘하게 양극을 순환한다. 물론 이것이 시인의 의도적 작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비평이 들여다보는 곳은 의도가 아니라 ‘무의식적 기도intention inconsciente’이다.

  아무튼 ‘오다’에 특별히 눈길이 간 까닭은 이것이 필자가 이미 풀이하였던 서정주의 ‘왔다’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정주의 ‘왔다’가 김영랑이 조성한 ‘기다림’의 시학을 이어받으면서 근본적으로 뒤집는 사정을 자세히 풀이한 바 있다1). 그 핵심에는 “고난의 자리가 상명당”이라는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다.

  독자가 놀라는 것은 김종삼의 ‘오다’도 기본 주제가 같다는 것이다. 그 주제가 아니라면 그가 죽음과 생을, 부정적 세계인식과 새 세상에 대한 꿈을 병치시키고 교섭시킬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밀구조가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차이를 낳게 된다. 서정주에게 있어서 저 깨달음은 ‘사실적 확언’으로 제시된다. 즉 고난의 자리에 상명당을 ‘실재’로서 구축한다. 따라서 고난의 장소=상명당에는 분리가 없다. 반면 김종삼에게는 그 둘이 명백하게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고난의 장소=상명당’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대신 등식이 아니라 조건이 붙는다. 조건은 ‘당위’이다. 즉 “~이다”가 아니라 “~이어야 한다”가 둘 사이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서정주의 확언 명제는 훗날 그가 ‘신라’에 귀의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반면 당위형 조건이 붙으면 귀의할 데가 없다. 그리고 현실과 이상이 격렬하게 충돌한다. 당위라는 조건은 연산식을 요구한다. 상명당 = F(현실)이다. 이 함수가 어떤 연산식을 가질 것인가?

  나중에 이런 현실인식이 정현종에 와서 다시 솟아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고통의 축제’ 역시 고난의 자리=상명당론이라는 무의식적 기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도 서정주와는 다른 길을 간다. 등식을 거부하고 함수를 구성한다. 그의 함수의 기본 출발점은 ‘당위’라기보다는 ‘다짐’이다. ‘~이어야 한다’라기보다 ‘~이어야겠다’이다2). 바로 그 점에서 그의 연산식은 김종삼의 연산식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진다. 때가 되면 다시 보게 되겠지만 이 자리에서 굳이 얘기하는 것은 시의 개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큰 주제가 같다고 해도 시인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세계를 만든다. 통시적으로 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해도 후대의 시들은 결코 원본과 같지 않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닮은 꼴을 이루지 않는다. 그 과정이 시의 진화사다.



● 김종삼과 샤갈


  필자는 김종삼과 샤갈Marc Chagall의 유사성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 점을 좀 더 자세히 풀이해보자.

  유럽의 예술사에 있어서 샤갈은 19세기 후반기 이래 지속적으로 추구되어 온 한 경향의 변곡점에 위치한다. 그 경향은 바로 시공간의 한계에서 탈출하는 것, 즉 근대의 물리적 조건을 넘어서 어떻게 진실의 세계를 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19세기 후반기부터 서양의 지식인들은 근대를 이끌어 온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에 대한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이 있었는데, 샤갈은 그것들을 끌어모아 도약하는 일종의 특이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앙드레 브르통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 점에서 읽을 만하다.


  오래전 랭보로부터 시작된 공간 구도들의 전복을 감행하고 동시에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대상을 해방시키기 위해, 샤갈의 메타포는 단박에 최면적 이미지 그리고 직관적인(혹은 미학적인) 이미지 속에서 저와 상응하는 조형물을 발견한다. […] 각기둥 모양의 경탄할만한 색깔들은 현대의 고통을 쓸어가면서, 동시에 쾌락원칙이 자연 속에서 공공연히 표출하는 천진난만한 표현들(꽃들과 사랑의 표현들)을 통해, 그것에 빛을 입힌다3).


  물론 샤갈만이 그 특이점의 주체는 아닐 것이다. 20세기 전반기는 ‘벨 에포크Belle-Époque’의 넘쳐나는 풍요의 분위기를 타고 예술적 혁신에 대한 열망이 수많은 사람들의 열기로 비등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4). 다만 샤갈이 그에 대한 가장 선명한 이미지를 제공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요점은 샤갈로 집약되는 충격적 영상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졌는가, 일 것이다. 인용문에서 독자는 곧바로 “최면적 이미지”, “쾌락원칙이 자연 속에서 공공연히 표출하는 천진난만한 표현들”에 눈길을 갈 터이지만,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대상을 해방”하는 이미지의 창출 방식이다. ‘최면적 이미지’, 혹은 ‘초현실적 이미지’를 출현시킨 방법은 무엇인가? “중력의 법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표현에 그 단서가 숨어 있다. 그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은 “비시간적 이미지”(장-미셸 몰프와5))의 난입이다. 첼란의 연구자인 로셀 토비아스는 첼란과 샤갈을 연동시키면서 “샤갈의 작품에서 일관된 모티프 중 하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지금은 사라진 세계에 속하는 슈테틀Shetetl[=유대인 촌락]6)”임에 주목한다.

  고대의 고향은 시간성을 초월한다. 그로 인해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두 개의 층위가 한 공간에 마분지 공작처럼 끼워진다. 파블로 피카소는 “샤갈이 그림을 그릴 때 그가 자고 있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받아 모리셔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말콤 드 샤잘Malcolm de Chazal은 이렇게 풀이한다. “샤갈은 이렇게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시킨다. 따라서 마르크 샤갈은 살바도르 달리보다도 더 편집증적 방법에 가깝다.7)” 피카소의 혼동이나 샤잘의 ‘편집증적 방법’은 샤갈이 두 어긋나는 차원을 대립시키기보다 공존시키면서 보는 사람을 ‘헷갈리게’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미술사가 빅토리아 샤를르에 의하면, 샤갈은 “‘스타일 상의 무염성immunité’이라고 부를 법한 것을 타고난” 화가이다. 그는 “모순을 제시하거나 분할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개방성 속에 머무른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고 자기가 만든 구조를 풍요화한다.8)”

  기념비적인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를 썼던 곰브리치E.H. Gombrich는 자신과 동시대인이었던 “그로피우스, 코코슈카, 피카소, 헨리 무어, 샤갈 및 달리”를 마지막 장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말았는데, 훗날 1965년의 「후기」에서, 이들이 “오늘 이 시점에도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미술가가 아니”라 “계속 참신하고 심지어 논쟁의 대상까지 될 수 있는 신기한 창조를 기대해 볼 수 있다9)”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이에 근거하면 샤갈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스타일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숱한 병행본을 생산하면서 계속 진화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의 인용문들에서 보듯, 그것은 회화를 넘어 첼란, 콕토 등 문학에까지도 연결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기이한 공존 구조가 샤갈에게 있어서는 행복감의 충만이라는 양태로 표현되었으나, 다른 이들에게서는 다른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토비아스는 첼란의 시에서 찢겨지고 피를 흘리는 “떠도는 천사roaming angel”의 이미지를 거론한다. “첼란의 시는 떠도는 천사를 통해 이 슈테틀의 운명을 가리킨다. 그의 발은 ‘불타는 석탄 위를 걷거나 연기가 자욱한 들판을 걸어온’ 것처럼 ‘피부가 벗겨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사의 상처 입은 발만이 온전한 신체 부위이다. 날개와 머리는 줄 바꿈으로 인해 수식어와 분리되어 찢겨 있다: ‘천사 / 요동 / 머리 / 축 처진 비행’10).”

  독자가 보는 것은 날개와 머리의 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상처입은 발과 그 둘의 삐걱거리는 공존이다. 이 공존은 세계의 파멸 앞에서 힘겹게 몸을 이끄는 고통하는 육체를 느끼게 한다. ‘벨 에포크’에서 ‘소하SHOAH’의 시대로 시간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존의 구조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저항의 의지를 “축 처지면서도” 결코 놓지 않았다는 것을, 놓기는커녕 날틀을 여전히 작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11)‘상처입은 발’은 방향키를 위로 올리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추락 중의 천사12)”인 것이다.



● 김종삼의 언어굴절론


  김종삼의 시가 샤갈과 공분모를 이루는 부분은 명백하다. 그가 구축한 삶과 죽음의 병치는 이미 말했듯이 시대의 절망과 저항의 의지를 공존시키는 방법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존의 구조이다. 즉 어긋난 두 차원의 기발한 끼워짐이다. 이것도 공분모에 속한다. 그러나 구조의 운동은 다르게 전개된다. 유럽의 샤갈적 추세가 이성에 기반한 근대의 물리적 구조를 넘어서고자 한 시도라면, 김종삼에게 있어서 그것은 죽음과 다를 게 없는 현실에 생의 기미를 끼워넣고자 하는 필사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차후의 시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을 미리 말해두어야 할 것이다. 유럽적 시도가 이성의 붕괴를 전제로 한다면, 그 다음은 이성적인 것을 훼쇄(毁碎)하는 격렬한 과정(초현실주의에 와서 극점에 달했던)을 거친 후에, 근대적 척도 너머에 있다고 가정되는 것들을 향한 매우 다양하고도 어지러운 분산(인디언 풍습, 아프리카 예술, 선[禪]...그린피스... 그리고 A.I.)으로 나아간다.

  반면 한국의 경우엔 ‘무’(전쟁에 의한 모든 것의 파괴와 망실)에 대한 거부로 시작한다. ‘무’에 ‘생’을 도입하는 게 가장 단순한 수식인데, 그 ‘생’은 처음 ‘혼돈’의 형태로 유입되다가 차츰 일종의 ‘맑게 갬’의 상태, 즉 정돈된 구조의 확립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혼돈 자체의 해체·재구성이라는 방법적 형태를 띠게 되기 때문에, 이 역시 다양한 기형적 시도들로 점철된다. 하지만 그 시도들은 언제나 구조적 안정성을 ‘가정13)’하고 전개되며, 그로부터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이데올로기’들로 빈번히 고착화되는 한편, 또한 ‘열린 구조’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가 복류한다14). 이런 흐름이 김수영·김춘수 세대를 거쳐 4.19세대로 나아가는 길의 역선을 형성한다.

  김종삼은, 전봉건 등과 함께, 한국적 정신 세계의 초기 우주에 속한다. 그에게는 우선 죽음 속에 생명을 끼워넣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미 말했듯 그 작업이 무작정 결합시키는 일로 될 수가 없다. 서로 ‘차원’이 다른 것을 끼워넣는 것은 누구에게나 지난한 사업이다.

  비교적 분명히 눈에 띠는 시를 읽어보자.


슈 사인들의 눈보라가
밀리어 갔던 새벽을
기대려 갔던
아스팔트
安全地帶와

하늘 같은 몇 군데인
안테나의 아침과

청량리로 가는 맑은
날씨인 다음인
다름 아닌 맑으신
당신이었읍니다
그 보다

오래인 日月이 지니어 온
苦膒의 꿈인 연류이기도
했습니다

누구의 이야기ㄹ 하는지
나는 모르며

그 이는 인간에 依하여 지는
누구의 힘도 아니었으므로

빛깔 깊은 꽃 피어 있는
시절에 대한 그이의
이야기 ㄹ — ( 「빛깔 깊은 꽃 피어 있는 시절에 대한 이야기」)


  이 시는 한국시가 오래도록 되풀이하고 있는 ‘임’에 대한 연모를 이어받고 있다. 이는 김종삼의 시가 엉뚱한 데서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 한국시사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넌지시 가리킨다. 이미 누누이 설명했듯이 한국인의 생존의 문제라는 점에서도 그의 시는 절실성을 가지고 있으며, 시사적으로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여하튼 이 시의 기본 구조는 ‘현실의 사람들’과 ‘님’의 대치이다. 현실인들은 “슈 샤인들”이 제유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슈 샤인들”은 물론 역전 등 노상에 자리를 깔고 앉은 ‘구두닦이들’을 뜻한다. 새벽이 되자, 이들이 어디론가 “눈보라가 / 밀리어” 가듯이 거리를 비웠다. 화자는 그 시간을 기다려 거리로 나가(“기대려 갔던”, “기대려”는 “기다려”로 읽어야 한다), 평탄하게 나 있는 아스팔트 길에서 몇 군데 님이 오시는 기척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안테나(들)를 점검한다. 그 안테나들은 새들일 수도 있고 나뭇가지일 수도 있고, 꽃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여하튼 ‘슈샤인 보이’들이 점령하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것들을 ‘나’는 말끔한 아스팔트 거리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화자는 그 님이 계신 장소가 “청량리”라고 짐작하는데, 이 청량리는 분명 한자어 ‘淸涼里’(맑고도 맑은 장소)에 근거해서 설정한 것이 틀림없다. 청량리는 그래서 ‘맑은 날씨’보다도 더 맑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와서 독자는 왜 “슈 샤인들”이 등장했는가를 이해할 수가 있다. 현실인들 중에서 가장 청결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겨우 구두를 닦는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온몸에 검댕을 묻힌다. 청량리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제 3,4연이다. 문자적 의미를 복원하면,


청량리로 가는
맑은 날씨[의] 다음[엔]
다름 아닌 맑으신
당신이 [계셨습니다].
그보다(=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드려야 하는 말씀은)

(당신이 거기 계시기를 바라는 꿈을)
오래(도록) 일월(=온 세상)이
쓰디쓴 굳기름이 되도록 [지니어 온] 연유(가)
(청량리로 가기 위해서였다는 점입니다.)


  이 두 연의 뜻은 분명하다. ‘나’는 청량리로 가고자 한다. 그리고 ‘나’의 소망은 나만의 소망이라기보다 모두의 소망이다. 청량리로 가기 위해서는 ‘당신’(님)을 만나야 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그런 소망을 정말 오래도록 간직해왔다.

  이 분명한 의미를 도저히 짐작할 수조차 없이 문면의 구문들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다. 이는 한국어 재학습 세대의 서툰 오문 탓인가? 필자가 보기엔 그보다 더 심오한 효과가 산출되고 있으며, 이는 분명 시인이 의도했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 점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제 3연에 와서 ‘님’이 목표가 아니라 매개자로 등장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걸 지적해두고자 한다. 이는 한국시사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아니, 좀 더 너른 시각으로 보자면, 만해의 ‘님’에서 그 단초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 탐구할 문제이다.)

  문제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왜 이런 이상한 구문이 씌어졌는가? 구문의 왜곡 상태를 들여다 보면, 앞의 복원문에서 [ ]로 가두어진 부분들에 왜곡이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 )로 가두어진 부분들은 표현이 감추어진 곳들이다. ( ) 부분의 감춤은 [ ]가 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 ]를 해독하면 ( ) 부분은 자연스럽게 노출된다.

  [ ]의 왜곡은 단숨에 말해, ‘인접성’을 ‘등가성’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청량리로 가기 위해서, ‘맑은 날씨’를 지나 그 다음에 당신을 만나야 하는데, ‘맑은 날씨의 다음에는’이 “맑은 날씨인 다음인”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는 구문을 축약해서 ‘맑은 날씨’와 ‘당신’을 실질적인 동의어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날씨인”을 바른 구문으로 수용한다 하더라도 ‘다음엔’이 “다음인”으로 표현된 점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그 다음, ‘계셨습니다’가 “이었습니다”로 바뀐 것도 인접성을 등가성으로 바꾼 것이다. “지니어 온”은 놓여야 할 문법적 위치를 미리 쓴 경우인데, 오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고구의 꿈”을 강조하는 효과를 위해서 특별히 처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접성을 등가성으로 바꾼 까닭은 무엇인가? 인접성은 양자 간의 다름을 전제로 한다. 즉 ‘당신’이 계신 차원과 ‘슈샤인 들’이 있는 차원은 엄격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지 / 나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게다가 “그이15)”는 “인간에 의하여 지는[=만들어 질 수 있는] / 누구의 힘(‘에 의한 것’, 혹은 ‘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등가성은 차원이 다른 두 대상을 슬그머니 같은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당신’이 현실 속으로 틈입하는 것이다. 주제상으로는 암시가 지시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구문론적 효과는 이런 주제적 효과를 동반하지 않으면 느껴지기가 어렵다. 5,6연에 와서 ‘그이’의 존재의 모호성을 부러 강조한 것은 바로 암시를 강조하기 위한 무의식적 기도로 보인다. 심리학적으로 암시가 지시로 바뀌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간지럽힌 결과이며, 따라서 쉽게 달성되곤 하는 효과이다. 이는 슬쩍 언어를 굴절시키는 양태로서 움직인다.

  인접성을 등가성으로 바꾸는 것은 환유에 은유의 기능을 입히는 것과 같다16). 이 기능 변환을 통해서 꿈이 현실과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공존은 서로의 ‘다름’을 각인시키는 효과도 갖는다. 만일 그게 없다면 이 기능변환은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다름에 대한 인지는 시의 윤리학에 속한다. 바슐라르는 샤갈의 그림에서 “윤리적 가치”를 읽었다. 그가 본 것은 샤갈의 그림이 제시한 ‘낙원’이 무조건적인 행복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낙원에의 유혹만을 보지 않고, 낙원에 도사린 유혹의 위험이 표지되어 있음을 보았다.


  여자는 사과를 따버리고 말았다. 이 한가지 행위만으로 낙원은 망가지고 만 것이다. 조물주인 신은 이제 심판해야 할 신이 된 것이다. 샤갈은 그의 그림 속에서 신과 인간 쌍방에 있어서의 전환을 그리고 있다. 신은 복수의 둘째 손가락으로 하늘에 나타난다. 이브와 아담은 ‘노여움의 신 (Dieu du Courroux)’ 이 가리키는 손가락 앞에서 도망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샤갈적인 선의로서, 신이 이브를 저주하는 색채판화 속에서, 자신의 잘뭇으로 떨고 있는 여자 앞에 샤갈은 한 마리 놀란 어린양을 그려 놓고 있다. 한마리의 어린양? 아니 오히려 이 샤갈적 동물은 당나귀와 염소의 혼혈인 남녀양성의 동물로서 샤갈의 수많은 작품에 나오는 바로 그것이다. 짐승들의 평화스런 순진함을 가리키는 이 조그만 표시는 삶의 기쁨 앞에서의 인간들의 극적인 책임을 강조하는게 아닐까17)?


  바슐라르가 추출한 샤갈의 윤리학이 낙원에 대한 성찰이라면, 김종삼의 윤리학은 이상향 그 곳에 대한 요구로부터 나온다. 이상향이 존재해야 할 절박한 까닭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말 그대로 김종삼에 의해서 한국인은 ‘꿈꿀 권리’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폐허인 세상에서. 죽음 그 자체인 세상에서 말이다.

  우리는 김종삼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오해된 게 얼마동안인가? 무엇보다도 그를 한국 현대시사의 주추로 재정위할 필요가 있다. 전봉건과 더불어 김종삼 편을 이번 호에 끝내려고 했는데, 다른 일들에 밀려 마지막 마무리 부분을 다음 호로 이월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 1)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 - '님'은 '머언 꽃'을 어찌 피우시는가』, 문학과지성사, 2023.02를 참조하라.
  • 2) 필자는 앞의 책의 한 부분에서 정현종의 태도를 ‘당위’로 보았었다. 여기서 수정한다.
  • 3) 『André Breton, 『전집 4. 예술론, 기타 Œuvres complètes IV - Écrits sur l'art et autres textes 』(coll.: Pléiade), Paris: Gallimard, 2008, p.426.
  • 4) 이 열기는 결국 ‘다다’를 거쳐 ‘초현실주의’ 운동으로 화려한 불꽃놀이를 펼치게 된다.
  • 5) Jean-Michel Maulpoix, “Jean Cocteau l’illusionniste”, Serge Linarès (direc), Cahier Jean Cocteau (coll.: Cahiers de l'Herne No. 113), Paris: L'Herne, 2016, epub version
  • 6) Rochelle Tobias, 『파울 첼란의 시에 있어서 자연의 담화, 비자연성의 세계 The discourse of nature in the poetry of Paul Celan : the unnatural world』,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6, p.72.
  • 7) Malcolm de Chazal: “Confession d'un écrivain qui est devenu peintre”, in Bernard VIOLET, À la rencontre de Malcolm de Chazal, Paris: Philippe Rey, 2011, p.151
  • 8) Victoria Charles, 『1천 점의 걸작 그림 1000 Chefs-d'œuvre de la peinture』, New York: Parkstone International, 2021, epub version
  • 9)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 하』, 최민 옮김, 열화당, 1980, p.602
  • 10) Rochelle Tobias, op.cit.
  • 11) 토비아스에 의하면 “축 처진 비행”이라고 번역된 “lastig getrimmt”의 ‘getrmmt’는 비행기의 무게가 부분들마다 다르게 나뉘면서 비균질적 하중으로 작용하는 현상에 근거한 항공용어라고 한다.
  • 12) loc.cit.
  • 13) 한국의 식자들에게 빈번히 표출되었고, 표출되고 있는, 개념 선취를 향한 ‘욕망’은 이로부터 발원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필자가 이 ‘개념주의’(혹은 ‘조념사’ 경향)에 끊임없이 경고를 보냈는 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교정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한국인 내면의 거대한 집단무의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몇 마디 개처럼 컹컹 짖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요즘 와서 깨닫게 된다.
  • 14) 이는 대수학에서 ‘x’의 설정과 유사하다. ‘x’가 미지수로 설정되면 방정식의 개발이 촉진된다. 반면 x를 미리 확정하면 수식이 x에 의해서 재편되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성립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신동엽(에 대한 해석)·김춘수·김수영은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신동엽은 x의 확정, 김춘수는 x의 미지화, 김수영은 x의 가상적 설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신동엽의 시를 ‘민족주의’에 근거해서 해석하는 기존의 관행을 떠나, 그의 입장을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면, 신동엽의 입장은 김수영에 가까워진다. 왜 김수영이 신동엽을 그렇게 고평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어서 4.19의 문학은 x의 새로운 설정 단계로 돌입하게 된다. 기억을 위해서 미리 적어두지만, 이 얘기는 차후 다시 되풀이 될 것이다.
  • 15) “그이”를 “그 이”로 띄어 썼다. 조판 상의 오류인지 아니면 시인이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마지막 연에서는 “그이”로 붙여 썼다.
  • 16) 통상 이해되고 있는 것과 달리, 은유와 환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고등과학원 감정연구단’의 공동저서로 10월초에 출간될 『은유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시선』에 수록될 필자의 「문학에서의 은유, 제유 그리고 환유」를 참고해주기 바란다. 또한 필자의 「정신분석에 있어서의 은유와 환유」(정과리 평론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 - 존재의 변증법 · 4』, 역락, 2005)도 도움이 될 것이다.
  • 17) 바슐라르, 『꿈꿀 권리』, 이가림 옮김, 열화당, 1980, p.41; Gaston Bachelard, Le droit de rêver,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70,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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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엽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

 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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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월간 현대시 오형엽 미분적 시선시차(視差/時差)적 공백모티프미학적 특이성구조화 원리안태운 2025
조예은 적의 아이를 키워라 ― 『에너미 마인』

『에너미 마인』과의 만남은 뭐랄까…… 운명적이었다. 때는 전 국민을 잠 못 들게 한 12월 3일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난 어느 평일 저녁.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니 늘 눈이 피로했고, 집중력도 떨어져 독서는커녕 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매일매일 현실의 뉴스에 압도되어 실핏줄이 바짝 선 눈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봤더랬다. 가장 나를 괴롭혔던 건 ‘지금 소설 같은 걸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프리랜서인 나에게는 정해진 마감 날짜가 있었다. 도저히 가상 세계에 몰입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시시각각 디데이는 다가왔다. 나는 점차 초조함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글을 써야 한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일단 잃어버린 텍스트의 감각부터 되찾을 목적으로 독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집 소파 옆에는 사거나 선물 받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한참을 살펴봤는데도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내 신경은 계속 휴대폰과 그날 이후 ASMR처럼 틀어 놓는 뉴스 채널으로만 쏠렸다. 이러다가는 또 한 줄도 못 읽겠다 싶어서, 일단 눈을 감고 책탑을 더듬다가 아무 책이나 붙잡았다. 그게 바로 이 샛노란 표지의 『에너미 마인』. 무려 1979년에 쓰인 SF이다. 처음엔 내 손으로 골랐지만 우려스러웠다. 하필 지금, 급한 작업에조차 집중을 못 하는데 가상의 시대, 미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외계인 소설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중에 좀 더 심적 여유가 있을 때 읽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드라운 표지의 감촉에 이끌려 책을 펼쳤고, 단숨에 몰입해 그날 새벽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은 세상의 어떤 신묘한 흐름이 나에게 이 책을 만나게 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가 동생 시험 날에 예수님이 상장을 하사하는 꿈을 꿨던 것처럼……. 난 아직 종교가 없지만. 소설이 공개된 1979년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냉전 시기다. 그런 국제 정세를 비유하듯 소설 안의 두 종족, 드랙과 인간 사이에도 긴 전쟁이 진행 중이다. 드랙은 손가락이 세 개에 노란 피부를 가진 외계 종족이다. 우리의 주인공 군인 윌리스 데이비지는 전투 중 적군인 제리바 쉬간과 함께 무인 행성 ‘파이린 4호’에 조난 당한다.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대입해 보자면, 데스 매치 중이던 미군과 소련군이 함께 무인도에 불시착한 셈이다. 행성에서 눈을 뜬 두 존재는 서로를 인식하자마자 다시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곧 괜한 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건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제 두 종족 간의 원한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인간과 드랙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굴을 아늑하게 꾸민다. 낮의 노동 후에는 긴 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즐길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무료함을 달래 줄 만한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무인도와 달라 파도에 떠밀려 오는 새로운 아이템조차 없다. 날씨 변화 이외의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공간에서 오로지 두 존재의 회상만이 지루함을 달래 준다. 우리의 인간 주인공 데이비지는 외로움에 취약하다. 적군이었던 쉬간마저 없었으면 분명 미치거나 자살했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쉬간 역시 마찬가지다. 두 종족은 완전히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세월도 다르지만 절대적인 고립은 양극단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리바는 데이비지의 언어(영어)와 그의 농담을 이해하게 되고, 데이비지는 제리바의 족보와 드랙의 역사를 매일 밤 경청한다. 핏줄의 기록을 달달 외는 게 이 드랙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므로, 다행히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극 초반부 전개이다.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다. 고난은 계속된다. 드랙의 또 다른 특성은 스스로 번식이 가능한 양성체라는 점이다. 제리바는 삭막한 행성에서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 중 사망한다. 데이비지는 쉬간의 부탁으로 적이자 친구인 그의 배를 찢는다. 그렇게 샛노란 드랙 아기 자미스가 태어난다. 데이비지는 친구에게 섣불리 약속한 대가로 이 외계인 아기를 키워야 한다. 생존기에 육아가 더해진 것도 고달픈데, 자미스는 어마어마하게 발육이 빠르고 호기심도 왕성하다. 자미스는 데이비지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제 예정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삼촌,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나는 앉아서 자미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다른 두 손가락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데이비지는 너와 내가 어떻게, 왜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왜 이 행성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는지도 알려 주어야 한다. 쉬간과의 전투와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유리된 행성에서 태어난 자미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이 행성 밖에서도 ‘삼촌’인 데이비지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 자미스는 언젠가 행성을 떠나면 통역사가 되어 전쟁을 끝내게 돕고 싶다고 말한다. 두 존재의 애절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인 인간과 드랙 아이, 대척점의 존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소설은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안에서 개인과 개인이 공유한 시간은 상황이 급변한다 해도 동영상 파일처럼 간단히 삭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은 결말이 도달하도록 두 종족의 평화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종족 안에서도 깊어 가는 혐오와 차별의 현상을 짚어 낸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홍보 문구에 적혀 있듯이, 『에너미 마인』은 무려 ‘전 세계 최초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동시에 석권한 소프트sf의 걸작’이다. 이렇게 요란하게 상을 휩쓸면 기대감보다는 ‘어디 한번 보자.’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집중력 부족에 더불어 조금 삐뚤어진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결국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SF라는 장르와 외계 종족과의 전쟁이라는 오락적인 배경으로 작가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의 가치, 공존에 대해 말한다. 호불호 없이 흥미로운 전개는 다른 종족의 캐릭터에도 쉽게 이입하게 하고, 매력적인 대화와 문체는 독서에 속도감을 더한다. 나에게 SF는 정말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어려운 장르다. 스스로도 정확히 취향을 가늠할 수 없다. 어렸을 땐 스페이스 오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마블 시리즈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가장 좋은 걸 보니 아닌 것 같다. 절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작품에 심장이 직격타를 맞을 때도 있고, 분명 내 취향일 거라 생각하고 접했는데 그저 한편의 과학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작품도 있었다. 복불복이 크다보니 주변의 추천을 받은 게 아니면 선뜻 시작하기 꺼려진다. 그런 와중에 만난 『에너미 마인』은 쓰는 욕망을 되찾아 주는 것은 물론 어지러운 세계에서 소설이 가지는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sf 장르에 장벽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한다. 그렇게 한밤의 독서가 끝나고……. 나는 다음 날 이제 다시 힘내서 쓰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과연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 tmi. 이 리뷰 원고도 지각함…….

격월간 릿터 조예은 갈등sf장르문학리뷰소설전쟁 2025
임지훈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므로 ― 송은숙 시집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박지일 시집 『물보라』

인간은 3차원적 존재이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그 속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 축 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앉은 의자와 책상, 눈앞에 놓인 책과 연필, 당신이 먹고 있는 사과 같은 것들. 당신의 바깥에 놓인 사물들만이 아니라 당신의 입 속 어두운 구멍 끝에 있는 기관과 장기들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을 통해 폭과 높이를 가진다. 당신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것도 따져 말하자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신이 죽어 소멸하게 되는 순간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으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건 딱히 슬픈 이야기도 기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단지 현상적이고, 물리적인 이야기일 뿐이기에, 실재가 아닌 실제에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람직한 사실적인 공간 속에서 늘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예컨대, 우리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세 개의 방향만으로는 그것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앎이 현상에 항상 미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또 하나의 방향을 탐색하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세 개의 방향 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방향 축을 하나 더 도입하는 것이다. 한때 물리학은 이 방향을 Q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X, Y, Z에 속하지 않는 가상의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은 이 방향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성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기에 그러한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감각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Q축은 일종의 가능성이면서 잠재성으로서 함의를 갖는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가정할 수 있기에 늘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미지의 가능성 말이다. 어쩌면 이 Q를 우리는 질문(question)이라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것을 물리학적인 축의 문제가 아닌 질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실 시인들이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네 번째 방향을 헤매는 존재들이지 않을까. 물론 이 Q의 문제는 시인들이 가지는 공통의 문제이겠으나, 실질적인 방향성은 당연히도 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인간의 내면의 문제로 이해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에 대한 관찰과 참여의 부족으로 생각에 외부를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뿐일까. 어떤 이는 언어와 언어의 충돌과 연쇄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듭된 사고 실험을 통해 또 다른 행방을 추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언어 그 자체의 속성에 골몰해 자기 앞의 단어들과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할 것이다. 송은숙이라는 시인이 『열 두 개의 심장이 있다』는 말로 되풀이하고 있는 문제 또한 그러하다. 그의 시집에서는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을 관찰하는 한 사람의 화자가 등장한다. 높은 산과 굽은 강, 날개를 활짝 펼친 새와 어두운 숲, 그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이름 모를 들꽃 같은 것들까지도, 그는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감각을 활짝 펼치고 그것들의 기척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저녁의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 산책길 양옆을 따라 망초꽃이 줄지어 피어 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꽃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팽나무 그늘처럼 옮겨 가는 것이다 그날 나는 저녁과 함께 산책한 것인데 저녁은 서걱서걱 옷 스치는 소리와 쌀랑쌀랑 바람이 이는 소리로 한 발짝쯤 앞서 걸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던가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눈을 감고 섰을 때 물살이 나를 떠메고 가던 일 바람이 등을 밀어 줄 때 슬쩍슬쩍 허공을 밟던 일 분홍낮달맞이꽃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나비의 그림자에 대해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 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 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 망초 길이 끝나고 검은 아스팔트 길이 강처럼 가로지르고 그 너머 어둠 숲이 펼쳐지고 길을 건너다 징검다리에서 듣던 물소리를 아득히 다시 들으며 저녁이 저 녘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힘겹게 깨닫고 몸을 돌리는 것인데 바짓단에 흠뻑 이슬을 적시는 까만 밤의 반딧불처럼 저녁의 주술은 매혹이어서 - 송은숙, 「저녁의 발자국」,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위의 시에서와 같이, 송은숙의 화자는 세계를 산보하며 두 눈으로 세계의 한 부분을 저마다 차지하고 있는 사물들의 현존을 목격한다. 그의 오감은 자신이 목격한 사물의 현존을 감각하는 동시에 사물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관계성 속에서 피어나는 제각각의 의미들의 사슬이 존재함을 느끼고 있다. 그의 시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제각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연관 속에 위치 지어져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치는 객관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물이 객체로서 그 자체 존재함의 결과가 아닌, 화자의 시선의 이동이 만들어낸 배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시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성의 이야기가 허구이거나 그릇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객관적인 하나의 세계가 한 사람의 시선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빚어지는 방식을 설명해준다. 예컨대 “망초꽃”과 “팽나무”와 “징분홍낮달맞이꽃”과 “노란 달맞이 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시적 화자인 나의 감각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셈해지며 분화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다분한 주관적 서사들의 세계로 분화시키며, 그 분화 속에서 사물들은 또 다른 배치를 경험하며 잠재되어 있던 의미를 꽃피운다. 예컨대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와 같은 진술은 단지 감상어린 화자의 사물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의 객관적 배치 속에서 새로운 가능 세계를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시적 화자의 권능이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세계는 진정으로 그러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적어도 언어로 이루어진 시적 세계 그 속에서만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송은숙의 시에서 거듭 돌출되는 또 하나의 영역, ‘너머’의 문제와 관계된다. 창 너머, 담 너머 너머는 너무 멀다 고개 너머, 산 너머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너머는 넘어가 아니라서 더 아득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아야 보일 듯 말 듯한 아지랑이 같아서 고양이가 담 위에서 너머의 안쪽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뛰어내릴까 갸우뚱 궁리하고 있다 너머의 바깥쪽으로 바람이 분다 너머의 너머쪽으로 불었던 바람이 다시 너머의 안쪽에 막혀 되돌아온다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계절이라든지 지금, 이 순간이라든지 너머의 결계는 거미줄같이 가벼워서 너머의 너머는 너무 투명해서 돌아오지 못한다 - 송은숙, 「너머의 너머」,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분명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세계에 존재하는, 오감을 통해 인식되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그는 시에서 표현되는 “무지개”와 “구름”에 둘러싸인, 그리하여 계절의 변화가 오감을 통해 전해져오는 물리적 세계 속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의 오감, 특히 시선 또한 이 물리적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인식은 거듭 시각적 형상 ‘너머’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러한 오감과 인식의 서로 다른 방향성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치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세계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외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말이다. 이것에 상응하듯, 그의 시적 화자는 거듭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마치 눈에 보이는 세계와 자신이 산보할 수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그의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어투가 의미하듯, 그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세계 속에 머무르고 있다. 「너머의 너머」에는 그렇게 머무르는 시적 화자의 세계에 대한 주관적 감상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 세계는 분명 무수한 색채와 기척이 가득한 생기 넘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창”과 “담”으로 둘러싸인, 비유적 의미에서의 “고개”와 “산”에 둘러싸여 화자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한계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한계의 영역 속에서 화자는 물리적인 이동이 오직 그가 존재하는 물리적 영역의 안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며, 자신의 오감이 감각하는 세계의 모습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한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부리처럼 솟은 산이 하나 있고 산 옆으로 굽은 강이 흐르는 어느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강에는 다리가 하나 있어 두 다리가, 네 다리가, 여섯 다리가 지껄지껄 건너다니는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 저 거룩한 글자는 날개를 활짝 펼친 새의 눈이 바라보는 지구의 한 모퉁이를 상형한 것 다리 이쪽 끝에는 한 사내가 있어 소맷부리에서 새를 꺼내 자꾸자구 날리고 있다 새들은 새, 새, 새, 새, 새, 휘파람 소리를 내며 둥근 산의 정수리에 부리를 닦고 날아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등성이로 비스듬히 해가 솟는 어느 마을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 - 송은숙, 「조감도」,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한계가 부추기는 초월에 대한 명상, 그것은 송은숙의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에서 거듭 반복되는 문제이다. 그의 시적 화자가 가진 ‘너머’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계를 더욱 강하게 인지하도록 만들며, 동시에 그토록 강하게 인지되는 한계의 문제가 물리적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자꾸만 상상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것을 그의 시적 구조로 치환하여 말하자면, 한계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 세계 내에 또 다른 가능한 세계에 대한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가 감지되는 자리이자 가능한 세계가 피어나는 지점인 셈이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새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될 수 있는 모든 영역으로서의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예컨대, 세계는 결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의 사랑 또한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것을 시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송은숙의 시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로부터 그 너머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가 던지는 질문은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박지일의 시 또한 이 세계가 결코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님을 전제하고는 있으나, 그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령, 송은숙의 시적 화자가 명확한 시각과 대상에 대한 선명한 진술을 통해 진술될 수 없는 나머지에 대해 대략적인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는 명확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이며 때로는 환각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두서없는 정보들의 배치 속에서 일별되는 미지의 대상의 실루엣을 그리고자 시도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열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에서 네가 느낀 탈력과 굴복의 강도에 비례하여 문은 희열을 얻는다고 하던데. 근데, 네가 너를 작동할 수 있던가? 열거나, 열지 않거나, 선택을 어지하긴 해야 하는데… 너는 선택하지 못할 것 같고(선택하지 않는 선택까지 포함하여) 네게 너는 주도권이 없는 것 같아.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13쪽, 부분. 위의 시에서 나타나듯 박지일이 집중하는 문제는 “문”으로 상징되는 경계성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시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 대상인 ‘문’은 공간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또 다른 문제에 동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문’이라는 사물이 그 외관으로 인해 갖게 되는 일종의 기만과 관계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은 공간을 나누고, 그 사이를 시각적으로 차폐시킨다. 그리고 이때의 시각적 차폐는 기묘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어떤 공간이 존재하리라는 환영이다. 비록 주체가 그 ‘문’을 실제로 열어보지 않더라도, ‘문’이라는 외관은 주체로 하여금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인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실질적으로 그 너머에 실체적 공간이 존재하기에 ‘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물론 「물보라」 속 화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화자는 다음과 같이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예컨대,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주체는 그것이 기만이고 환영임을 알고 있음에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위태롭고 나약한 존재로 느껴진다. ‘문’은 그러한 기만을 통해 주체에게 감각적 착취를 행하며 희열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진술들을 종합하자면 ‘문’이란 실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비유적인 것, 예컨대 기만을 통해 인간 주체의 경향성을 추동하는 모든 대상을 가리킨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에서 ‘문’은 열리지 않는다. 사물의 기만은 시적 공간의 끝까지 이어지며, 화자는 ‘문’ 앞에서 끝나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답변을 번복하며 존재한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자면, 시적 화자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인간은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와 같은 가능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시적 정황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실재적이냐 실제적이냐의 여부가 아닌, 그 앞에서 번민하길 반복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1. 누구는 없는 너. 누구만 없는 너. 네가 너를 계속하여 믿기 위해선, 너로부터 끝없이 도망쳐1. 야만 한단다. 멧닭은 듣는다; 네가 반복하여 내쉬는 한숨을. 평화를 내쉬는 것도, 불안을 내쉬1. 는 것도 아닌. 그것은 마치… 가장 작은 소리로 도망하기 위하여 1천년 동안 자기 뼈를 조금1. 씩 조금씩 긁어내는 바람의 들숨.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32쪽, 부분. 비참하군, 설명하자니 비참해. 물보라. 너는 네가 비참하다. 이렇게 한들 저렇게 한들, 비참하다고 씀으로써 너는 너의 작업을 아주 망쳐 놓았어. 어쩔 수 없이 비참하다고 중얼거리며 너는 너를 시작하다; 네가 비참한 마트에 들르다, 네 목적이 아니었던 생물 코너 앞을 비참한 네가 어슬렁대면서, 생물 오징어 한 팩을 비참하게 찍고 마트를 나와서 비참한 건널목 건너서 비참한 랩을 뜯은 다음에, 횟집 수족관에 오징어를 풀어 놓고 악을 쓰다; 내가 비참하다고, 비참해서 비참 이의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비참, 그게 뭘까? 어리둥절. 어리둥절이 너를 훔친다. - 박지일, 「「물보라」 우수리 편」, 『물보라』, 민음사, 2024, 189쪽, 부분. 그런 까닭에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에서는 주체를 호명하는 대명사인 ‘나’와 ‘너’라는 시어가 가장 많이 반복된다. 그 모든 ‘나’와 ‘너’는 하나의 공통점을 소유하는데, 그것은 번민과 방황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좀 더 명징하게 말하자면, 두 가능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기에(혹은 할 수 없기에) 발생하는 번민과 방황이라 할 수 있다. 선택의 가능성은 주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민과 방황에 밀어넣는 기제인 것이다. 마치 앞서 인용했던 「물보라」의 한 장면에서 시적 화자가 문을 열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과 같이 시적 화자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이 강제되는 상황 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기에 번민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러한 번민은 시적 화자를 “비참”하게,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조금씩 지쳐가게 만든다. 예컨대,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 상황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처럼. 그러나 이 반복의 양상 속에서 ‘나’와 ‘너’는 결코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시적 정황이 만들어내는 다소간의 차이의 연속 속에서, ‘나’와 ‘너’는 언어상 같은 모습으로 출현할지라도 그 양태 또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물론 그러한 차이 속에서도 여전히 화자는 번민하고 방황하며 비참한 상태로 놓여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번민과 방황, 비참의 모습들은 하나의 시그널로 기능한다. 그것은 시적 화자로 대표되는 인간 존재가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는(예컨대 상황의 강요에 떠밀려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여전히 끈질긴 사유의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자체가 하나의 답변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시적 화자는 번민과 방황의 무대인 ‘여기’에 존재하며, 그의 사유의 줄다리기가 지속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황은 여전히 상황으로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가항력적인 상황 여부와 관계없이, 진정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주체’가 계속해서 사유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러한 번민이 반복될 때에만, ‘나’와 ‘너’는 ‘나’와 ‘너’로서, 이 시적 무대의 정중앙에 위치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나의 질문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문’ 너머에 정말로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가의 여부나 이러한 가무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와는 조금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즉,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시’라는 한정된 공간에 질문을 적용하자면 무엇이 저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시적 화자로서, ‘나’와 ‘너’라는 주체성의 상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가. 물론 박지일의 시적 화자가 제시하는 답변은 ‘사유’의 지속성이다. 『물보라』의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가 오직 한정적이며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토대란 이처럼 위태롭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살아지듯이 죽으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입장한다. 중부 지방은 맑거나 아침에 차차 맑아지겠다. 남부 지방은 흐리겠다. 경남 해안과 제주도 지방은 곳에 따라 한때 비가 조금 온 후 차차 개겠다. 바람은 약하겠다. 기상청은 “아침과 낮의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날씨가 계속되겠다.”라고 밝혔다. 아침 최저기온 섭씨 –1에서 14도, 낮 최고 기온 16에서 20도. - 박지일, 「11月 6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7쪽, 전문. 죽어지듯이 살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온다. 사투리를 쓰면서 온다. 헤이수이(黑水县) 현은 좀 덥거나 아침은 아니 온다. 나나이 칼란(Nanai Kalan)은 습하거나 땅감이 익겠고 저녁은 아주 아니 온다. 마조르다(Majorda)와 파나두라(Panadura) 해안은 한때 더워 개골창으로 변한다. 바람은 없다. 눈도 없고 비도 없고 햇볕은 아주 없고 내일은 없다. 끝. - 박지일, 「11月 6.4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8쪽, 전문. 어디가 죽음 이전이고 어디가 죽음 이후인지 모르겠다. 네 앞에 선 거울이 너를 슬쩍 납치한다. 너는 그네를 돌려달라고 엄마에게 조르는 중이었다. 엄마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거울아, 거울아, 너는 거울에게 배운 대로 빌어 본다. 거울은 미동이 없고 너는 홀로 미동을 키운다. 엄마가 거울 속에서 등장한다. 너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너만 없다. 너는 거울을 납치하여 등에 업고 날아오른다. 너는 물구나무 한다. 네 긴 머리카락이 손잡이처럼 흔들린다. 세상이 뒤집히고 열차는 순환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 박지일, 「11月 9.7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34쪽, 전문. 정리하자면, 박지일의 시적 세계에서 그토록 호명되는 ‘나’와 ‘너’라는 인간 주체는 실로 한 순간의 물보라와 같이 순간적이며 부서지기 쉬운, 영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위태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시집의 후반부에 위치한 일기의 형태를 띤 작품들에서는 유독 의지 혹은 지시를 전달하는 단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분명한 대응관계라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어쩌면 이러한 의지와 지시를 담은 단정적인 표현들은 유약한 인간 존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단서들이 아닐까 싶다.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란 그처럼 무수한 순간을 거쳐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시적 세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란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가와는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 『물보라』와 같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가 계속되는 한에서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적 공간은 단지 언어를 통한 재치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태로운 실존이 걸린 무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적 무대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 존재가 오직 거듭되는 방황과 번민 속에서 사유를 이어가는 한에서 인간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것을 일종의 철저한 데카르트적 주체라고도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주체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데카르트적 주체보다도 훨씬 더 회의론적이며 위태로운 것이라는 한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는 순간 인간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으로.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가 지닌 여럿 가운데 하나의 단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언어로 짜집어진 사물과 사물의 연쇄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론적 발견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최고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시집 또한 이 세계가 X.Y.Z라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되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설명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반복될 것이며,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박지일의 시적 주체는 여전히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3차원의 공간임을 상식을 통해 알고 있다. 입체성을 지닌, 그림자를 지닌 세계의 부피들이란 그 자체로 이 세계가 3개의 방향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인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듯, 세계와 그 안의 사물과 일어나는 현상들은 세 개의 축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이 실재의 영역을 향해 시인은 거듭 질문을 던지며 자기만의 답변을 질문의 형태로 거듭 제시한다. 우리가 언젠가 온전한 답변에, 정답에,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다소 회의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빛이 이 세계에서 30만km의 속도를 지닌다는 것이 하나의 규칙인 것처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모든 것의 정답에 다다르는 일 역시 불가능한 것이 세계의 규칙인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질문을 이어가며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혹은 잠재되어 있던 위기를 거듭 질문의 형태로 발견해나갈 것이다. 아마 그때까지 시는 거듭 쓰여질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를 지속하는 한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언어를 통해 이 불완전한 세계를 더듬거리며 계속 나아가는 한에서.

월간 현대시 임지훈 송은숙박지일방향성「너머의 너머」「물보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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