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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푸른사상 | 2024년 겨울호(제51호)

존재 사건과 이야기의 유전자 ― 한강, 『검은 사슴』

김효숙 문학평론

2017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 대학 강사. 현재 시 전문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평론집 『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눈물 없는 얼굴』, 『오늘 빛 미래』, 『시인의 거울 : 시의성들』, 그 외 공저가 있다. 2022년 처음 시행한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에 평론이 선정되었다.

1. 1990년대적인 것


  한강의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와 작품 간 구심점을 찾기 어려운 요인은 다양하다. 어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고 석연찮은 기분과 함께 미진하게 독서를 끝내게 되는 서사가 대부분이다. 솔직한 독자의 표현대로라면, 이들을 괴롭히는 건 전통 서사의 형식 변주로 얻은 효과가 작품을 얼마나 격상시켰느냐는 불신, 서사가 불완전한 소설이 찬사를 받는 것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이다.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도 예외가 아니다. 이 작품의 다양한 인자들이 이후의 한강 문학에 배분되고 있고, 앞선 앎이 이후의 앎에 근거가 되어 주는 이치대로라면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없이 후속작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고단한 일이다. 급진적인 실험성을 띠지 않으면서도 1990년대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이 작품을 다시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문학 장에서 1990년대는 문학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예속 관계를 본격적으로 의심한 시기다. 동구권 사회주의의 급격한 붕괴로 전 세계가 새로운 에피스테메에 직면하고, 세계자본을 앞세운 문화산업의 영향으로 문학 장에도 새로워야만 살아남는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청산해야 할 유습을 운위하면서 이것을 단절해야만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명제가 통용된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와 이념 편향의 실천주의에서 벗어나 당대 문화의 보편성을 수용해야만 일신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세대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이전 시대와 단절이냐 연결이냐는 문제를 놓고 투쟁적으로 문학의 생사를 판별하려는 시도였다. 이 모두가 여하한 경우에도 문학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의 표명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전처럼 우리 내부의 민족민중 담론을 중심으로 문학의 위기설이 유포되지는 않았다. 전세계적인 변화가 위기 상황을 만들면서 우리 내부의 문학을 압박하는, 전례가 없는 경험이었다. 이념·역사·문학·인간 중심의 근대의식을 전방위로 흔듦으로써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살아남아 이후 세대로 이어질 것이라 단언하기 어려웠다. 1990년대 현상을 진단한 어느 좌담에서 오간 내용을 몇 가지만 간추려 본다. 이 무렵 제출된 시대의 정언이라 할 근대 극복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편승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논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권장한 차이에다 세기말의 묵시록이 더해진 상황을 진단한다(황종연, 14~15).1) 1990년대의 규범이라는 것이 달리 없고, 자기 모멸과 자기 부정이 이 시기의 활력이라고 보는 견해(진정석, 16), 역사철학적인 상상력이 더 이상 유효성을 잃으면서 문학이 비로소 문학으로 섬세하게 기능 분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고도 보았다(김동식, 20~21). 또한 문학 내부의 미학적 움직임과 변화를 주시하기보다 선입견, 도식화, 1980년대 문학에 대한 세대적 타자 의식이 지배하는 1990년대 문학장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과거 청산이 아니라 조건의 지형을 따져보는 차원에서 이전 시대의 문학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언급하기도 한다(이광호, 18).

  한강의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2)에서 두드러지는 전환기의 의식은, 기원과 본질에 대한 의심을 바탕으로 사회적 인간-되기의 문제를 형상화한 점이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1980년대의 조건을 이어받은 1990년대식 리얼리티를 구현한 점은, 지난 연대의 경향을 회의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는 방법적 고민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전과의 연결고리를 과감히 끊어 작가 정신의 소속을 상실하거나, 그런 이유로 문학의 존립에 대한 불안을 내면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금 이 작품을 1990년대 현상 안에서 논의하는 이유를 충족시켜 주는 요인도 여기에 있다.

  이 무렵의 또 다른 특이점은 여성 작가들의 약진이다. 1990년대의 여성 문학이야말로 민족 문학의 위축 이후 가장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문학운동이라고 본 논자는 이런 경향을 우선은 가부장제의 내적 붕괴라는 계보에서, 또 다른 하나는 여성의 말의 발화라는 페미니즘 미학에서 그 가치를 발견한다(이광호, 44). 그러나 이 좌담에서 한강 문학의 페미니즘 성향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이유로 지금 이 글은 검은 사슴에서 20대 여성 의선의 말과 침묵을 둘러싼 여성 존재론과 정체성에 주목할 것이다. 그런데 그 정체성이 인간으로 비존재한다는 실존 조건에 먹혀 버림으로써 양자를 무효화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가혹한 질문이 발생한다. 이 문제는, 호적 미등재와 모어(mother tongue)의 원초적인 결핍에서 온다.

  이 시기 한강 문학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전통 문법을 안정적으로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이뤄졌다. 실험성이 강한 신진들과 달리 작품성과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낯설지도, 투쟁적이지도, 위악적이지도 않은 온건하고 연성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투쟁적으로 표방하거나, 문화가 우세해진 당대인의 삶을 기호적 글쓰기로 선도하거나, 일인칭 주체의 내화한 목소리를 담아내거나, 가부장을 부정하는 안티 프로이트 심리를 도발적으로 드러내거나, 신성을 파괴하면서 세기말의 온갖 증상들과 공포감을 표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동시대 작가들과 견주어 볼 때 한강은 지난 연대의 문학적 규율에 대한 도전을 노골화하지 않아서인지 안정을 추구하는 작가로 비쳤다.

  그렇다면 1990년대 한강 문학의 독자성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일까. 한강은 지난 연대의 리얼리즘이 구습이라는 판명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고 실천적으로 연결하면서도 벗어나는 이중화 전략을 편다. 검은 사슴 사회적 범주에 갇히지 않고 문제적 개인의 비밀스러운 삶의 내막에 밀착하여 내밀한 고통을 미학화하면서 우화의 알레고리 효과로 의미의 다층화를 꾀한다. 탄광 노동자가 등장하지만 그는 사회적 주제를 전달하기보다 이야기 발화자로서 미학적 지위를 지니며, 이야기의 유전자를 보유한 담지자다. 탄광 사진작가와 갱도에 갇혔을 때 우화를 들려주고, 문제적 캐릭터인 의선의 부친으로서 그녀의 성장기에도 같은 우화를 들려준다. 광부들이 갱도에서 기괴한 짐승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환상 동물이 이 우화의 검은 사슴이다. 이 탄광 노동자는 이전 시대처럼 민중문학의 주체로서 계층과 계급 문제를 떠안지도 않는다. 여기서 작가 전략은, 화해가 불가능한 대립 항들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식물성과 동물성, 오성과 촉각을 내적으로 배치하여 2차 의미를 생산하고, 이런 점이 말하기의 방법적 우회로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검은 사슴에서 작가는 남다른 사회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어느 정도 엄숙주의도 걷어내지 않고 있다. 국가의 연료 정책에 따라 채탄 산업이 활발하던 무렵 갱도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수많은 광부들, 그리고 남겨진 가족의 해체 요인에 착안한 발상을 보건대 그러하다. 이런 점이 한편으로는 한강 문학을 당대의 문학 장에서 일정 부분 소외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새롭지 않은 문학은 곧 죽음이라는 전환기의 법칙이 가동한 시대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정황에 작가는 서사주의만을 고수하지 않고 우화를 도입하여 본 서사에 균열을 가한다. 이는 상호 반립하는 쌍들을 배치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견인하는 작가 전략이다. 급격한 산업화의 도정에 대도시로 유입하는 가족 단위의 이동, 사고와 병고로 사망한 가부장의 부재로 직업 일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여성들이 일자리를 전전하는 등의 시대 변화도 세심하게 반영한다.

  이 작품에서 강력한 실재(reality), 황곡시의 폐광된 갱도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들, 전기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탄광이 폐광 조치에 돌입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점이다. 무엇보다 이 장소가 말을 잃은 의선의 기억을 견인하고 있어서 그녀 주변 인물들의 행동반경이 되어 주기도 한다. 유약하고 온전치 못한 이 여자가 호적 미등재자로서 사회적 비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그녀의 주변 인물들과 황곡시는 필연적으로 엮인다. 잡지사 기자인 인영은 탄광 사진작가 을 취재하기 위하여, 의선을 찾으러 나선 후배 명윤과 황곡시로 온다. 인물 구도를 보면 다른 인물들 모두가 의선의 존재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이 서사의 중심인물은 의선이다. 실종된 연인 의선을 찾기 위하여 기자인 인영을 동행자로 삼은 명윤은 대학 선배인 그녀가 사람 찾기에 강력한 조력자임을 믿는다. 하지만 인영은 의선 찾기에 협조할 수 없는 속내를 숨겨 두고 냉정히 자기 업무에 몰두한다. 명윤이 장에게 질문하는 내용이 표면으로는 선후배 관계인 인영과 명윤의 공통 관심사처럼 보이지만 정작은 어떻게든 의선의 흔적을 찾으려는 집요한 시도에 따른 것이다. 그만큼 명윤은 결사적으로 느껴질 만큼 끊임없이 장에게 질문(218)을 던지며 의선의 종적을 더듬는다. 이전 시대에 흥성했던 강원도의 폐광촌과 서울·인천을 배경으로 의선, 인영, 명윤, 장의 존재 사건이 겹쳐 있다.

  이상의 내용을 넓은 범주에서 요약하면, 이 작품은 명윤 중심으로 보면 침묵에 휩싸인 의선의 출생과 성장 과정의 비밀을 추적하는 서사다. 이때 인영은 명윤이 의선을 찾는 데 조력자가 된다. 인영과 명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제각기 다른 시점으로 의선의 삶에 관여한다. 그녀의 정체를 탐사하는 이들마저 가족 해체의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가족 구도가 해체되는 산업화 시기를 반영한다는 데서도 일부의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전통 서사에서 추구한 인간중심주의, 시각 중심주의, 역사 중심주의, 의미의 단일성, 단일 시점, 거대 서사 중심주의 등을 해체하면서 미약한 개인의 사회화가 실패하는 연원을 중층으로 구성한다. 이 글의 논의 방향은 이 같은 범주에 있다. 이는 1990년대 소설 양식 중에서 한강 문학의 고유성을 판별하려는 시도이자, 그의 소설이 모호하다는 평가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파악하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2. 복권된 촉각과 고통

 

  작가는 의선을 내세워 식물 존재론을 펼치면서 인간 존재 간에 발생하는 동물적 대상화를 부순다. 식물성인 의선과 검은 사슴 이미지의 대비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포괄하는 존재론에 밀착하고 있다. 여기에 기반하면 동물성은 폭력성을, 식물성은 홀로 존재하는 고립 형태에서 순수한 생명체의 형상을 발현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우리가 통상 구분하여 말하는 동물/식물 이분법 같은 얇은 관념이 아니라는 데서 남다른 인식이다. 이성의 시대에 비천한 것으로 격하했던 감각에 주권을 부여하여 그 우연성에 의한 체험이 존재 사건을 구성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점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존재론적 감각을 복권하려 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 이해의 지점을 두게 한다.3) 그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그림을 들면서 그에게 유일한 연민의 대상이 고기라고 말하며, 고기가 지닌 살아 있는 살의 모든 고통과 색을 고통받는 인간의 그것과 동류로 묶었다.4) 언뜻 보면 검은 사슴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자리는 삶과 죽음의 접경에 있는 듯하다. 세밀히 보면 생사 문제보다 더 격렬한 것이 고통이라는 존재론적 감각이다. 고통의 감각이 인간의 심신에 가하는 충격을 성급하게 죽음 문제로 바꿔 사유하는 우리의 관념주의에 제동을 걸면서 그 고통의 연원을 살갗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고통의 관념화에 몰수되었던 감각의 갱신이야말로 신체가 곧 자기 자신인 인간에게는 생생한 존재론적 사건이다.

  이 작품에는 압도적인 동물 이미지가 등장한다. 하나는 성체가 되기도 전에 인간이 프라이팬에 깨트려 넣은 달걀노른자다. 이는 유기적인 신체 기관이 아니며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 의해 신체가 갈가리 찢겨 나가는 눈먼 사슴이다. 이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자기 신체가 찢기고, 흘러내리며, 죽어가는 듯한 경험적 상황에 처한다. 급기야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처럼 안구도, 코도, 입도 없이 해체되어 흘러내리는 기관 없는 신체(앙토넹 아르토) 이미지와 자기 신체를 동일시하게 된다. 들뢰즈가 썼듯이 자신이 희생된 동물이라는 생각(들뢰즈, 35)에 매혹되어 인간과 동물 간 비구분의 영역에서 고통받는 인간-동물이 되어 있는 현실에 놓인 것 같아진다. 한강은 고통받는 인간 그 자체의 표상인 동물 이미지와 의선의 식물성 이미지를 대비하면서 고통의 감각을 육화한다. 이 감각만이 강렬한 사실성을 발산하고, “유기적 활동의 경계들을 잘라(들뢰즈, 58) 내면서 신체에 작용하는 힘들의 진동을 전이시킨다.

  의선의 존재 사건은 죽음의 반대 항도, 죽음과 유기적인 현상도 아니다. 그녀에게 삶과 죽음은 비유기적 경계인 숱한 주름처럼 수평에 위치한다. 그녀는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살아 있다. 의선의 존재 사건에 얽힌 고통은 여기에 연유한다. 이 여자는 부모가 호적에 이름을 등재하지 않아 존재증명이 불가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비존재로 실재한다. 따라서 의선은 반드시 의선이어야 한다는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데도 의선이 의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의선의 정체성 찾기라는 사태가 그녀의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파급된다. 기억 상실과 의선 찾기의 관계 항에서 특징적인 것은 의선의 식물-되기다. 이는 의선과 식물의 동일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선이 지닌 식물의 특성을 일컫는다. 그다음은 기억을 매개하는 언어의 역할이다. 식물 같은 존재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의선에게 말과 침묵 사이에서 발생하는 한 줄 한 줄의 일기 문장은 그녀를 문학적으로 존재케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이렇게 볼 때 의선의 존재 사건은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가 발생하는 문학적 사건이기도 하다.

  의선의 촉각이 살아나는 장면만 하더라도 덩굴식물처럼 원시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녀의 몸 냄새를 우연히 맡게 된 명윤의 정신이 점차 혼미해질 때 무욕의 존재처럼 보였던 의선이 의외로 날 삼켜버려요.”(66)라며 그를 적극 받아들인다. 이 장면에는 털끝만치의 폭력성도 없다. 의선은 남성의 일방적인 눈[]의 지배력에 포위된 관능의 대상이 아니다. 두 사람은 살갗에 작용하는 촉각적 감응을 상호 적극적으로 교환하는 존재론적 사건의 당사자라 해야 한다. 신체에 가하는 강렬한 사실이라 할 수 있는 촉각만큼 생생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달리 없다. 이렇게 작가는 감각적 존재론을 통하여 의선의 존재 사건으로 육박해 들어가 주변 인물들의 존재론까지 아우른다. 인간 개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경위는 물론이고 삶이 단지 누구의 혈육이냐라는 탄생 사건으로만 확립하는 것인지를 물으면서 존재와 비존재의 접경을 탐사해 나간다. 검은 사슴 우화의 종결 지점에 식물-되기 현상을 두어 동물과 식물의 종간 차이를 파괴하는 인간 존재론에 관한 사유를 이어가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주요 서사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검은 사슴 우화는 본 서사의 주변부 서사다. 그런데 이런 점이 이 작품의 개별성을 확립하는 막강한 힘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무의식에 깔린 어두운 그림자, 예컨대 공포·불안 등을 망라하는 부정적 감정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이 짐승이다. 이 소설이 어두운 세계를 벗어나려는 인물들이 부단히 고투하는 서사로 읽히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이 이 짐승과 연계된다. 순결하고 연약한 사슴 이미지에 어두운 색채 이미지가 결합한 제호에서부터 길항하는 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얽힌 어떤 힘이다. 이 우화는 동굴을 배경으로 가상과 현실의 접합 지점을 형성하면서 존재론적 사건으로 밀착해 들어간다. 이는 실제와 가상의 접경에서 진실로 굴착해 가는 작가의식을 여실히 반영하는 부분이다.

  “눈도 귀도 코도 녹아버린 나에게 손의 주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는 것이 이상했다(12~13)는 인영의 꿈 장면은 서사를 관통하는 이미지 하나를 품고 있다. 작가는 제법 여러 편의 작품에서 꿈 장면에 이은 현몽이 현실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를 보여준 바 있다. 그만큼 꿈 장면은 많은 경우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극도의 고통이 무의식화된 것이다. 이런 점이 작가의 치밀한 설계임을 간파하게 되는 건 다음 문장을 만날 때다. “나는 의선을 향해 외치려 했으나 이미 입도 목구멍도 없었다.”라면서 해체당하는 몸의 주인인 자신의 무력감과 고통을 언표한다. 의선이 인영의 살갗·척추·갈비뼈 등을 능숙하게 발라내어 이목구비가 모두 녹아내려 감각이 사라졌는데도 인영은 자신을 해체하는 주체가 의선이라는 걸 잘 안다. 이는 인영에게 고통을 안기는 실체가 의선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에도 끝내 살아 있는 것이 촉각이라는 은유다. 전통 서사에서는 시각 중심으로 이 세계를 조망하고 이해했으나 작가는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 되도록 햇빛을 쏘아보는 의선을 내세워 시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촉각의 세계로 전환한다. 의선은 명윤에게도 인영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어 살갗을 접촉하면서 포근한 정감을 자아낸다.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 내 살과 뼈를 매만지며 추려내는 의선의 투명한 손마디를 나는 마치 생시인 것처럼 느꼈다.”는 감각적 언명만 하더라도 의선의 존재를 동물성으로는 해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악몽을 헤매다 깨어나면서 동물처럼 끈적끈적한 몸뚱이로 동물적인 신음을 뱉았다는 인영의 동물화한 목소리는 검은 사슴 이미지와 연접한다.

 

그녀는 햇빛과 정을 통했다. (중략) 저렇게 계속해서 해를 본다면 홍채가 타버릴지도 모른다. (중략) 눈물이 질금질금 비어져나오는 실눈으로 끝까지 응시해보려 애썼던 그날의 햇빛을, 그때 느꼈던 불가해한 질투와 함께 명윤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39~40)

 

  의선이 햇빛과 육감적으로 교감하는 장면이다. 눈이 멀어버릴지 모를 상황에서도 의선의 촉각은 마지막까지 생생하다. 의선이 인영의 살을 발라낼 때 인영의 촉각과 만나는 그 지점처럼, 햇빛과 의선 몸의 겹침을 의식하는 명윤의 질투 감정이 선연하다. 그는 자신도 이 감정을 해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뒤이은 의선의 언행을 보면 그녀는 동물성 생체이기를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다. 식물처럼 말이 없는 침묵의 화신, 그녀를 안고 있으면 투명한 물방울과 빛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하는 명윤은 의선의 내적인 면모에 매혹된 자다. 그는 침묵의 육감에 의지하여 천천히 의선에게다가가며, “과일 냄새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 살내 같기도 한 체취가 그녀의 몸에서 배어나오는 느낌을 좋아한다. 동물성 화학 작용을 유발하지 않고 반짝이며 사방으로 튀겨지던 물방울(65~66) 같은 투명한 감촉을 그녀에게서 느낀다.

  의선이 인영의 방을 좋아한 것도, 햇빛을 받아 안고 앉아 하염없이 햇빛 바라기에 집착한 동인도 그녀의 방과 근무처에 햇빛이 들지 않아서다. 횡단보도(이곳을 삶과 죽음의 접경으로 설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를 건너던 의선이 스트리킹(streaking)을 감행하여 파출소로 끌려갔으나 도망쳐 나와 그후 종적을 감추었다는 인영의 말대로라면 의선의 불가해한 행위는 식물-되기로서만 일말의 이해 지점을 찾을 수 있다. 향일성 식물처럼 빛 바라기를 일과로 알고, 침묵 중에 홀로 문장을 만들며 그것을 허공에 써보는 인영의 모습은 들판에 핀 야생화 한 송이를 방불케 한다. 본적도 주소지도 명부에 등재되지 않았기에 비존재이지만, 부모의 존재를 간신히 알아내기까지 인영과 명윤은 식물처럼 존재하는 의선이 내민 손에 살갗을 내준 사람이다.

  한강 작품에서 무해한 존재자가 본연의 생명성을 구가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제법 친숙하다. 동물 같은 포식성, 어떤 구조에 갇혀 짐승처럼 울부짖는 인물을 내세워 이 세계의 어두운 면모를 들추기보다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한 연약한 존재자로부터 세계의 어두운 지점을 비춰 낸다. 이 작품에서는 향일성 식물 같은 20대 여성의 감각으로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인간의 동물성과 폭력성을 해체하고 있다. 의선이 손 내밀어 쓰다듬어 주는 순간의 감촉을 식물성으로 전환하여 동물적 끈적거림에 동반되기 쉬운 인간의 폭력성을 부순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아무도 몰라요. 내가 죽든 앓든 병신이 되든 아무도 몰라요. 지옥에서도 날 쫓아오지 못해요. 나는 여기 있지도 않은걸요. 내 인생은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어요. 나는 그러니까 자유예요.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어요.”(502)

 

  이 예시문은 비존재인 의선을 이해하기까지 그녀가 누구인지를 몰라야 했던 사정을 압축한다. 탄생과 죽음의 사건은 부모만이 알며, 인간 개체로서 몸은 존재하나 사회적 개인으로서 존재증명을 할 방법이 없고, 죄를 짓더라도 법 적용이 불가능한 비존재. 명윤이 사랑한 그녀의 말 없음, 인영이 짧은 기간이나마 호감을 가졌던 그녀의 담담함, 아픔을 함부로 호소하지 않는 면모 등은 의선의 자유가 기원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가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정체성으로서만 생체일 수 있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짓을 동원해야 하는 준거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된 그녀를 비존재자라며 추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이야기 속에서의 갱생

 

  소설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 위에서 사건화 단계를 밟는다. 검은 사슴은 현실을 참조한 서사가 본 줄기를 이루지만 이와 별개의 우화를 삽입하여 본 서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 노출을 유보하는 작품 전략을 편다. ‘허구 속의 허구인 우화는 주제화된 텍스트의 의미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면서 대화 관계를 형성한다. 본 서사와 별개로 화자-청자 간 관계에서 성립하는 이 우화는 문자로 기록된 텍스트이면서도 양자의 대화 관계를 보존하는 기억의 저장고 역할을 한다. 구술 언어로 이뤄진 이 텍스트의 해방적 기능은 단지 발화자에 머물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청자가 발화자의 위치에 서게 될 때 다시금 차이가 나는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다. 말하기와 듣기 행위에서 양자는 서로에 대하여 현존하며, 이때 듣기-해석은 말하기-암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 같은 대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알레고리다. 우화의 발화자와 청자의 대화 관계에서 검은 사슴은 본 서사의 주제를 강화하면서 인간의 존재 사건을 알레고리로 암시하게 된다. 온몸의 기관이 낱낱이 해체되는 듯한 고통에 처한 인간(의선)과 동물(검은 사슴)의 반립에서,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라는 고통스러운 인식을 읽게 된다. 고통을 비명으로 호소하는 짐승과 의선의 신체 감각은 똑같이 생명 있는 자의 것이다. 짐승은 비명으로, 인간은 이야기로 그 감각을 전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진예술가의 내면알 수 없는 정신 현상을 우리는 흔히 이렇게 부른다을 빛과 어둠의 감각으로 표상하는 이 작품에서 어떤 이는 탄광 폐광 무렵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읽을 것이며, 살기 위하여 죽음을 담보해야 했던 이들의 막장 같은 삶의 처절함을 통감하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선명한 사진 한 장을 보는 듯한 장면에서 내내 놓여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흑백 사진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우리의 시지각을 붙든다. 그중 단연 부상하는 이미지가 검은 사슴이다. 그런데 이 짐승은 이야기 속에 존재할 뿐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환상 동물이다. ‘에게 들려준 사슴 이야기와 딸 의선에게 들려준 서사는 결말에서 차이가 난다. 반복 화법으로 차이가 나는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청자가 누구냐에 따라 결말 부분이 변형·변주된다. 누구든 기본 서사와 연관성이 없는 결말을 창안할 수 있도록 열어 두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작가는 기이하고 모호한 검은 사슴 이야기로 무엇을 전하고자 한 것일까. ‘에게 닥친 갱도 사고 시 검은 사슴 이야기의 화술 주체는 임이다. 이 짐승과 맞닥뜨리는 사람은 누구나 사력을 다하여 절대 암흑과 같은 지경에서 벗어나고자 고투한다는 내용이다. 임영석(의선 부)과 함께 64시간 사투를 벌이다 살아 나온 장이 그 절체절명의 시간에 임에게서 들은 이 짐승 이야기는 서사에 틈입하는 알레고리 화소라 할 수 있다.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사투를 벌일 때 임이 들려준 그 이야기가 두 인물에게 상황을 견디는 힘을 부여함으로써 천일야화 같은 생명력을 발휘한다.

  검은 사슴 우화에는 불변하는 기본 서사가 있고, 화술 주체라면 누구나 재량껏 바꿀 수 있는 결말 부분도 있다. 그 말미에 구전 서사처럼 발화자의 처지를 담을 수 있어서 개인의 세계관이나 감정·기대가 곡진하게 드러난다. 기본 서사의 흐름이 단절되면서 언어가 불안전해지고, 이제껏 익숙했던 서사가 급작스레 낯설어진다. 본 서사와의 합의 없이 우연히 끼어든 이 우화가 인간의 생사 문제를 풀어주는 열쇠로 기능한다. 살아 있으나 죽었고, 죽었으나 이것이 곧 갱생임을 믿게 하는 것이 이 우화가 지닌 반어 효과다. 본 서사에 기여하지 않는 작은 화소가 총체적 서사에 균열을 가하면서 그 역능을 끌어올린다. 본 서사의 흐름과 별개인 이 파편이 의미하는 바를 알레고리로 해명할 수 있다. ‘우화술(寓話術)의 사전 정의를 보더라도 알레고리는 우화를 이해하는 주요 요건이다. 동물·인간··무정물 등을 주인공으로 전개하는 짧은 이야기에서 반어·비유·풍자 등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서구의 문학 용어로 알레고리라 한다. 총체적 서사에 비하면 허황한 이야기로서, 본 서사와 어긋나는 배열로 주제를 지원하는 방식이다.5) 이 작품에서 짐승 우화는 그 자체만으로는 소설이 성립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화소에 불과하며, 불변하는 어떤 정언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도 않다. 하지만 제아무리 모순투성이에다 과장과 부도덕·비합리가 횡행할지라도 어두운 현실에 직면한 화자가 해방 감각을 자유롭게 발화한다는 데에 이 우화의 의미를 둘 수 있다.

  문제적 부분을 보면, 우화의 기본 서사에서 검은 사슴의 유일한 소원은 하늘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슴에게는 동굴 밖으로 나가는 길을 모른다는 선천적 한계가 있다. 기괴한 외모의 짐승과 맞닥뜨리게 되어 공포에 질린 광부와 이 짐승 간에 거래가 이뤄진다. 사슴이 길을 물을 때마다 광부가 답해 준다는 조건으로 사슴의 귀중한 부위인 반짝이는 뿔, 그리고 강인한 이빨을 광부가 뽑아도 좋다는 내용이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하여 짐승다운 사나움을 빼앗겨야 할 때 최종 무엇이 남을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청자에 따라 달라진다. 이 말은, 존재 사건의 주인공이 이야기의 결말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그 인물이 어떤 존재로 전화(轉化)하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아래 인용문에서 앞의 청자는 이고, 뒤의 청자는 어린 의선이다.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 짐승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 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245)

 

열의 하나쯤이나 될까, 운 좋게 암반 사이의 가느다란 틈을 비집고 나와 꿈에도 그리던 하늘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햇빛을 받자마자 이 짐승은 순식간에 끈적끈적한 진홍색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눈부터 빨갛게 녹아버리는 거다. (중략)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가고 또 십 년이 가고 백 년이 가면서 그 웅덩이가 썩은 자리에 어느덧 연한 풀이 돋고, 자그마한 꽃들이 핀다. (중략) 그게 붉은애기풀이란다. 푸른 잎 가장자리에 녹물 같은 붉은 기운이 돌고, 뿌리를 달여먹으면 미친병이나 어질머리병이 직효이고, 산삼 찾는 것보다 더 힘든 풀이야. 그걸 찾는 약초꾼들은 꼭 전날 밤 꿈에, 산신령 대신 그 짐승의 검고 흉흉한 형상을 보곤 한단다……. (478~479. 밑줄은 필자가.)

 

  두 경우 모두 죽음을 죽음이라 하지 않고 존재를 변형하는 사건이라 말한다. 앞에서 검은 사슴은 들쥐 새끼만큼 쪼그라들었고, 뒤에서는 붉은애기풀로 환생한다. 앞에서는 화자-청자가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공포를 몰아오는 짐승이 쥐새끼만큼 쪼그라들어 무력해진 결말에는 임과 장이 사지에서도 살아남을 거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뒤에서는 전 남편의 막장 사고 후, 그의 아내가 실성하여 말을 잃어버리자 이 여자(의선 모)를 아내로 맞아들여 그녀를 구완할 약초를 찾아다니는 의 기대가 담겨 있다. 햇빛을 보게 된 짐승의 신체가 녹아내려 액체화하는 자리에서 야생화가 피어난다는 결말에는 자연에 속한 생명체의 순환 과정이 압축되어 있다. ‘은 실종된 아내가 야생화로 피어날 훗날을 상상하며 딸에게 사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우화는 화자와 청자 간 의사소통 사슬의 역할을 하면서 현재의 난관을 체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긍정적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지녔다.

  검은 사슴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작품에 겹겹이 내포를 만드는 화소로 작용한다. 사슴의 존재 조건이 갱도이듯이 인영과 명윤도 캄캄한 동굴에 처해 있다가 구사일생 빠져나오는 것 같은 겹겹 구조에 놓여 있다. 그 구조를 가능케 하는 물체는 검은 사슴과 외관이 유사한, 또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인 기차다. 기차의 기관이 해체되는 사고를 당하지만 두 사람은 운 좋게 그 험지를 빠져나온다. 이로써 이 작품은 겹겹 구조에서 한 인간의 존재 조건이 결정되는 점을 묘파하면서 인간의 존재 사건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작가는 혈연과 비혈연, 동물과 식물, 육체와 관념, 말과 침묵, 빛과 어둠 등의 이항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론으로 밀착해 들어간다.

  이야기 속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감각은 비존재인 의선뿐만 아니라 실종의 형태로 사라져 버린 인물들 모두의 존재 사건과 연접한다. 의선, 의선 모, 명윤의 누이, 인영의 언니, 장의 아내 등이 모두 지금-여기에 부재하는 이를 기억하는 자의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검은 사슴과 의선의 소속이 자연이라 해서 소속이 분명한 다른 인물들과 처지가 다른 것도 아니다. 모두가 이야기 속의 존재자다. 따라서 말과 글, 그리고 기억 작용으로 인간 존재론을 말하는 여기서 침묵하는 자에게 작용하는 상징언어의 역할은 사뭇 막중하다. 말과 침묵 사이에서 존재감을 표명하는 의선의 글에 관한 경험도 마찬가지다. 탄생 이후 줄곧 외딴 화전민 마을에 살면서 부모가 집을 비워 운명적으로 무학자일 수밖에 없었던 비존재자로서의 사정은 호적 미등록에서 비롯한다. 그런 그녀가 기억을 잃은 후 이것을 되찾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거기에 편입된 건 저 환상 동물이다. 기억의 단편들을 조합하는 계기가 되어 준 것이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검은 사슴이다. 그 이야기를 기억해내는 능력과 상징언어 사용자로서 사회적 개인의 정체성은 같은 맥락에 놓인다. 의선은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사건을 증명하며,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타자들의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증상으로 보건대 의선은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이야기할 능력도 있다. “오랫동안 글을 써서 다듬은 문장 같은 말들을 천천히 독백하(201)는 그녀는 시종 글 같은 말을 한다. 허공에 글을 쓰며 문장 연습을 반복하는 동인도 기억의 선명성을 위한 말 고르기에 있다. 그녀는 기억이 휘발하지 않는 한 언어를 운용할 줄 알고, 그것은 이야기 형식을 갖췄으며, 극도로 말을 아끼는 것처럼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언어의 밀도를 높인다. 허공에 일기를 쓰면서 어제의 문장을 기억해낸 뒤 수정 과정을 거치는 작업도 기억 되찾기의 일환이다. 의선이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와 교감할 수 없었던 이유를 당신이 일찍이 상징언어를 상실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모어를 전수받지 못했으나 문장을 만들어 부단히 존재 표명을 해온 의선의 조용한 모습이 침묵하는 자처럼 보이는 건 여기에 기인한다. 원활하지 못한 언어 환경 탓에 말에서 분리되면서 말의 욕구(need)를 억압당하게 된 것이다. 의선의 요구가 현실적인 욕구의 검열로 하여 채워지지 않게 되지만 이것이 요구의 차원으로 환원하지 않고 번번이 욕망이라는 잔여물을 경험하는 형태가 된다. 욕구가 요구에 종속되면서 의선이 말을 한다는 사실과 분리되고, 그녀의 모든 언어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의 연쇄 속에 놓인 채 해석의 여지를 만든다. 의식 속에 부유하는 모호한 관념들을 문자로 붙잡아 두려는 의지로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이 그녀의 글이다. 아래 예시문이 보여주듯이 말이 되지 못한 것을 글로 전환하는 의선에게 말과 글의 의미와 미감은 일치한다.

 

…… 봄이 오면 연들을 태워요. 거기 흐르는 냇물…… 징검다리가 오십 개나 될 만큼 긴 냇물이라고 해서 오십천이라고 부르는데…… (중략) 창호지는 물에 씻기워 가고 살만 바위에 걸려 있는 연들을 건져내고, 나뭇가지에 흰 속곳처럼 걸려 있는 것, 상복 옷고름처럼 꼬리만 떨어져 걸려 있는 것, 지붕에, 수풀 사이에, 마당에 어지럽게 널린 흰 연들을 모조리 모아 산비탈에서 태워요. 이른 봄햇살 사이로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고 붉은 불꽃이 오르면, 그때부터가 봄이에요. (203)


  말하기에서 글쓰기로 변화가 가능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의선에게 글쓰기는 말(langue)이 되지 못했으면서도 여전히 그 말이 불완전하게나마 잠재된 채로 어느 순간 글을 써야만 할 때 매우 개인적인 말(parole)의 형태로 주조된다.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언술처럼 잠재적 상태 속에 있던 무언가가, 살아 있는 말 속에 맹아적이고 불완전한 채로 담겨 있던 무언가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 의미가 사건으로부터 분리되는 것”6)이다. 앞서 본 우화와 비교해 보면, 우화에서 사건과 의미의 관계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연쇄적인 사건의 의미를 추궁케 하면서 알레고리 효과가 정점에 달한다. 그러나 의선의 글쓰기는 온전치 못한 기억 속에서 온전에 가까운 기억을 고정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사회적 합의와 소통이 목적인 언어가 아니라 개인의 경험인 일회적 사건들을 쓴 것이며, 자연 속에서 의선의 시지각이 포집한 내용에 대한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의선은 고향의 봄 정경을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으로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존재 사건을 증명하는 사회적 합의에서는 제외된 자다. 그래서 그녀의 말과 글은 의미를 초월한 곳에서 생성하는 텍스트가 되고 만다. 그녀의 존재 사건과 말·글의 의미론에서 자유는 같은 맥락에 놓인다. 상징계에서 출생 기록이 없다는 점이 그녀가 비존재임을 여실히 입증하면서 말이나 글도 의미화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야기 속에 존재하면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떠올라 주는 의선의 행방도 뒤늦은 후문으로만 전해진다. 그 와중에도 의선이라는 주체의 탄생이 말과 글로 이뤄진다는 점만은 자명하다.


4. 한순간의 빛 존재론


  쇠락해 가는 탄광촌과 주민을 사진에 담고 싶어 하는 이 광부 임영석을 알게 되면서 이 소설은 사진 예술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 사건은 물론이고 순수예술에 대한 질문을 품은 서사로 진전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로 생명의 비밀과 죽음의 문제, 나아가 삶과 죽음의 순환 과정에 놓인 인간 존재론에 관하여 질문하면서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의 순연한 본래 모습과 재현의 예술인 사진의 세계로까지 탐사를 이어간다. 이런 점은 연출 사진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략) 연출된 사진에 대해서는 환멸밖에 더 느끼는 것이 없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그림이 되는 순간을 포착(253)하려는 장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요컨대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섬뜩한 고발성(273) 때문에 그의 사진은 이제 미학적으로도 상품성으로도 유명세를 타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 작품은 이전과 달라진 시대가 요구하는 대중예술의 현주소를 반영한다. 문화가 우세해진 시대에는 잡지도 대중 지향의 기획을 더욱 강화하고 확장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한 것이다. “사물의 껍데기만을 핥을 수 있을 따름인 카메라라는 기계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장은 이제 이 기기가 만지고 냄새 맡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흘릴 수(528)도 없는 것임을 통감하기에 이른다. 예술의 가치를 사실 재현에 맞춰 온 리얼리즘 예술관이 급속도로 힘을 잃어가는 시대를 지각한 것일 테다. 표면의 예술인 사진이 사실 재현만을 추구할 때 미적 풍크툼을 안기지 못한다는 점을 그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연출 사진을 촬영하면서 가장과 기만의 포즈를 취하지 않는 이유는, 사진이 빛의 예술이라는 정통 예술관을 견지하는 데다 풍크툼 미학을 추구하는 자로서 상품성을 제고하는 자에게 사진을 팔아넘길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인영의 공감을 끌어내는 다음 구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장의 사진에서 사진 찍는 이가 피사체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 “고통스러운 생을 완전히 까발리지 않기 위해, 위엄을 지켜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105)다는 느낌이 전달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장은 타자를 피사체로 다루지 않기 위하여 몇 달에 걸쳐 과 친분을 쌓는데, 이는 한순간의 촬영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다. 그만큼 그는 연출이 불가능한 찰나의 시간에 한 줄기 빛으로 현신하는 인간 존재의 존엄을 소중히 여긴다. 카메라의 광학 기술에 의존한 표면 현상의 획득보다는 관계 간 정감을 바탕으로 상대방에게서 진정한 인간성을 견인하는 일에 더 가치를 둔다. 그는 광학적 시각의 지배력에 압수당해 버린 정감을 복원하고 싶어 하며, 한순간의 빛 작용에 의지하여 피사체를 훔쳐내는 카메라옵스큐라의 관음 권력을 부정한다. 피사체는 의도치 않은 빛에 노출되는 순간 대상화되면서 시선의 권력 앞에서 피지배자가 되고 만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검은 사슴은 이전 시대와 당대를 유리시키지 않는 미학적 구성물이다. 산업화 사회에서 대도시로 대거 유입한 노동자 가족이 해체되는 양상을 보면, 가족의 범주를 벗어난 구성원들은 대개 실종의 형태로 도처에 흩어져 살아간다. 피차 실종자로서 단독자의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는 가족 공동체가 끔찍한 존재 사건의 시발점일 수 있다. 대비되는 것은, 대도시로 귀환하는 명윤·장과 달리 의선은 대도시를 이탈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개인의 존재증명이 가능할 때만 그녀는 사회의 일개 구성원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라면 의선은 산업사회에서 실종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면 어디든 조용히 나타나 이전 장소로부터 거듭 실종될 것이다.

  특히 알레고리 효과로 주제를 점층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동물이 탄생하는 순간을 예고하는 꿈 장면을 작품의 초입에 배치한 경우에 주목을 요한다. 기원 부정과 야생화 같은 삶의 구경에 동물성이 틈입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검은 프라이팬에 웅크린 짐승 이미지, 끈적끈적한 달걀노른자, 부화하다 만 달걀, 태아 이미지. 급기야 이것을 양변기에 쏟아 물을 내리는 장면은, 함부로 태어나서는 안 된다면서 생명체에 가하는 폭력처럼 보인다. 생명체의 존엄이 무시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경악스러운 장면에서 작가의 의도를 간파할 때 비로소 2000년대 이후 한강 문학과의 연결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의선의 존재 사건은 단지 1990년대 작가들이 주목한 정체성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존재 사건에서 필수인 생명의 문제를 다루면서, 비존재의 존재화가 가능한 쓰기/말하기 행위로 인간 존재를 갱생시키고 있다.

  한강은 전환기의 감각으로 이전 문학의 전통을 전방위적으로 의심하면서 일신을 꾀한 작가다. 등단 이후 줄곧 새로운 영토를 만들면서 체류지를 이탈하였고, 반복을 통한 차이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실험을 이어 왔다. 이전과 이후의 연결을 꾀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화법을 구사했는데 이는 작가의 세계관이 당시 사회와 문학 장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탐사하는 것과 직결되고 있음을 뜻한다. 1980년대적인 것의 사라짐(fade-out)1990년대적인 것의 나타남(fade-in)의 접경에서 미학적인 실험을 벌이면서도 이것을 극렬한 지적인 게임으로 표면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 1) 황종연‧진정석‧김동식‧이광호, 「좌담 : 90년대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황종연·이광호 외 10인, 『90년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민음사, 1999. 이후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좌담자의 이름과 쪽수를 밝힌다.
  • 2) 이 글은 문학동네, 2024년(1판 13쇄) 발간본을 참고하였다. 이 작품은 원고지 1,790매에 달한다. ‘황곡’은 강원도 태백의 허구적 공간으로서 작품을 쓰는 동안 작가가 “서너 번 정도 4,5일씩” 다녀왔다. 박홍규, 「이 작가를 말한다 :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으로 주목받는 신예, 한강」, 『경향신문』, 1998.9.1.
  • 3) 질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분석한 진중권의 글을 참조.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16(2판 5쇄), 203~205쪽.
  • 4) 질 들뢰즈, 하태환 역,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15(1판 10쇄), 34쪽.
  • 5)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편, 『문학비평용어사전 하』, 국학자료원, 2006, 571~572쪽.
  • 6) 폴 리쾨르, 김윤성·조현범 역, 『해석 이론』, 서광사, 2003(수정판 제3쇄),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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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계간 현대비평 강지희 AI예술비가역적 시간붉은 몸성해나혼모노김지연하와이사과 2024
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계간 문학동네 강지희 인공지능개체성집단성탈인간감상자 2024
배하은 눈보라 속에서 문학은 ―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계간 문학인 배하은 유신시대개발독재시대김지하조세희이문구황석영문사문학의 정치성근대문학의 종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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