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푸른사상 2025년 봄호(제51호)
존재 사건과 이야기의 유전자 ― 한강, 『검은 사슴』
1. 1990년대적인 것
한강의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와 작품 간 구심점을 찾기 어려운 요인은 다양하다. 어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고 석연찮은 기분과 함께 미진하게 독서를 끝내게 되는 서사가 대부분이다. 솔직한 독자의 표현대로라면, 이들을 괴롭히는 건 전통 서사의 형식 변주로 얻은 효과가 작품을 얼마나 격상시켰느냐는 불신, 서사가 불완전한 소설이 찬사를 받는 것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이다.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도 예외가 아니다. 이 작품의 다양한 인자들이 이후의 한강 문학에 배분되고 있고, 앞선 앎이 이후의 앎에 근거가 되어 주는 이치대로라면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없이 후속작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고단한 일이다. 급진적인 실험성을 띠지 않으면서도 1990년대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이 작품을 다시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문학 장에서 1990년대는 문학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예속 관계를 본격적으로 의심한 시기다. 동구권 사회주의의 급격한 붕괴로 전 세계가 새로운 에피스테메에 직면하고, 세계자본을 앞세운 문화산업의 영향으로 문학 장에도 새로워야만 살아남는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청산해야 할 유습을 운위하면서 이것을 단절해야만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명제가 통용된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와 이념 편향의 실천주의에서 벗어나 당대 문화의 보편성을 수용해야만 일신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세대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이전 시대와 단절이냐 연결이냐는 문제를 놓고 투쟁적으로 문학의 생사를 판별하려는 시도였다. 이 모두가 여하한 경우에도 문학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의 표명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전처럼 우리 내부의 민족‧민중 담론을 중심으로 문학의 위기설이 유포되지는 않았다. 전세계적인 변화가 위기 상황을 만들면서 우리 내부의 문학을 압박하는, 전례가 없는 경험이었다. 이념·역사·문학·인간 중심의 근대의식을 전방위로 흔듦으로써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살아남아 이후 세대로 이어질 것이라 단언하기 어려웠다. 1990년대 현상을 진단한 어느 좌담에서 오간 내용을 몇 가지만 간추려 본다. 이 무렵 제출된 시대의 정언이라 할 근대 극복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편승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논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권장한 ‘차이’에다 세기말의 묵시록이 더해진 상황을 진단한다(황종연, 14~15쪽).1) 1990년대의 규범이라는 것이 달리 없고, 자기 모멸과 자기 부정이 이 시기의 활력이라고 보는 견해(진정석, 16쪽), 역사철학적인 상상력이 더 이상 유효성을 잃으면서 문학이 비로소 문학으로 섬세하게 기능 분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고도 보았다(김동식, 20~21쪽). 또한 문학 내부의 미학적 움직임과 변화를 주시하기보다 선입견, 도식화, 1980년대 문학에 대한 세대적 타자 의식이 지배하는 1990년대 문학장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과거 청산이 아니라 조건의 지형을 따져보는 차원에서 이전 시대의 문학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언급하기도 한다(이광호, 18쪽).
한강의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2)에서 두드러지는 전환기의 의식은, 기원과 본질에 대한 의심을 바탕으로 사회적 인간-되기의 문제를 형상화한 점이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1980년대의 조건을 이어받은 1990년대식 리얼리티를 구현한 점은, 지난 연대의 경향을 회의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는 방법적 고민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전과의 연결고리를 과감히 끊어 작가 정신의 소속을 상실하거나, 그런 이유로 문학의 존립에 대한 불안을 내면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금 이 작품을 1990년대 현상 안에서 논의하는 이유를 충족시켜 주는 요인도 여기에 있다.
이 무렵의 또 다른 특이점은 여성 작가들의 약진이다. 1990년대의 여성 문학이야말로 민족 문학의 위축 이후 가장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문학운동이라고 본 논자는 이런 경향을 우선은 ‘가부장제의 내적 붕괴’라는 계보에서, 또 다른 하나는 ‘여성의 말’의 발화라는 페미니즘 미학에서 그 가치를 발견한다(이광호, 44쪽). 그러나 이 좌담에서 한강 문학의 페미니즘 성향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이유로 지금 이 글은 『검은 사슴』에서 20대 여성 ‘의선’의 말과 침묵을 둘러싼 여성 존재론과 정체성에 주목할 것이다. 그런데 그 정체성이 인간으로 비존재한다는 실존 조건에 먹혀 버림으로써 양자를 무효화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가혹한 질문이 발생한다. 이 문제는, 호적 미등재와 모어(mother tongue)의 원초적인 결핍에서 온다.
이 시기 한강 문학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전통 문법을 안정적으로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이뤄졌다. 실험성이 강한 신진들과 달리 작품성과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낯설지도, 투쟁적이지도, 위악적이지도 않은 온건하고 연성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투쟁적으로 표방하거나, 문화가 우세해진 당대인의 삶을 기호적 글쓰기로 선도하거나, 일인칭 주체의 내화한 목소리를 담아내거나, 가부장을 부정하는 안티 프로이트 심리를 도발적으로 드러내거나, 신성을 파괴하면서 세기말의 온갖 증상들과 공포감을 표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동시대 작가들과 견주어 볼 때 한강은 지난 연대의 문학적 규율에 대한 도전을 노골화하지 않아서인지 안정을 추구하는 작가로 비쳤다.
그렇다면 1990년대 한강 문학의 독자성을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일까. 한강은 지난 연대의 리얼리즘이 구습이라는 판명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고 실천적으로 연결하면서도 벗어나는 이중화 전략을 편다. 『검은 사슴』은 사회적 범주에 갇히지 않고 문제적 개인의 비밀스러운 삶의 내막에 밀착하여 내밀한 고통을 미학화하면서 우화의 알레고리 효과로 의미의 다층화를 꾀한다. 탄광 노동자가 등장하지만 그는 사회적 주제를 전달하기보다 이야기 발화자로서 미학적 지위를 지니며, 이야기의 유전자를 보유한 담지자다. 탄광 사진작가와 갱도에 갇혔을 때 우화를 들려주고, 문제적 캐릭터인 ‘의선’의 부친으로서 그녀의 성장기에도 같은 우화를 들려준다. 광부들이 갱도에서 기괴한 짐승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환상 동물이 이 우화의 검은 사슴이다. 이 탄광 노동자는 이전 시대처럼 민중문학의 주체로서 계층과 계급 문제를 떠안지도 않는다. 여기서 작가 전략은, 화해가 불가능한 대립 항들―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식물성과 동물성, 오성과 촉각―을 내적으로 배치하여 2차 의미를 생산하고, 이런 점이 말하기의 방법적 우회로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검은 사슴』에서 작가는 남다른 사회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어느 정도 엄숙주의도 걷어내지 않고 있다. 국가의 연료 정책에 따라 채탄 산업이 활발하던 무렵 갱도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수많은 광부들, 그리고 남겨진 가족의 해체 요인에 착안한 발상을 보건대 그러하다. 이런 점이 한편으로는 한강 문학을 당대의 문학 장에서 일정 부분 소외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새롭지 않은 문학은 곧 죽음이라는 전환기의 법칙이 가동한 시대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정황에 작가는 서사주의만을 고수하지 않고 우화를 도입하여 본 서사에 균열을 가한다. 이는 상호 반립하는 쌍들을 배치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견인하는 작가 전략이다. 급격한 산업화의 도정에 대도시로 유입하는 가족 단위의 이동, 사고와 병고로 사망한 가부장의 부재로 직업 일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여성들이 일자리를 전전하는 등의 시대 변화도 세심하게 반영한다.
이 작품에서 강력한 실재(reality)는, 황곡시의 폐광된 갱도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들, 전기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탄광이 폐광 조치에 돌입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점이다. 무엇보다 이 장소가 말을 잃은 의선의 기억을 견인하고 있어서 그녀 주변 인물들의 행동반경이 되어 주기도 한다. 유약하고 온전치 못한 이 여자가 호적 미등재자로서 사회적 비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그녀의 주변 인물들과 황곡시는 필연적으로 엮인다. 잡지사 기자인 인영은 탄광 사진작가 ‘장’을 취재하기 위하여, 의선을 찾으러 나선 후배 명윤과 황곡시로 온다. 인물 구도를 보면 다른 인물들 모두가 의선의 존재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이 서사의 중심인물은 의선이다. 실종된 연인 의선을 찾기 위하여 기자인 인영을 동행자로 삼은 명윤은 대학 선배인 그녀가 사람 찾기에 강력한 조력자임을 믿는다. 하지만 인영은 의선 찾기에 협조할 수 없는 속내를 숨겨 두고 냉정히 자기 업무에 몰두한다. 명윤이 장에게 질문하는 내용이 표면으로는 선후배 관계인 인영과 명윤의 공통 관심사처럼 보이지만 정작은 어떻게든 의선의 흔적을 찾으려는 집요한 시도에 따른 것이다. 그만큼 명윤은 “결사적으로 느껴질 만큼 끊임없이 장에게 질문”(218쪽)을 던지며 의선의 종적을 더듬는다. 이전 시대에 흥성했던 강원도의 폐광촌과 서울·인천을 배경으로 의선, 인영, 명윤, 장의 존재 사건이 겹쳐 있다.
이상의 내용을 넓은 범주에서 요약하면, 이 작품은 명윤 중심으로 보면 침묵에 휩싸인 의선의 출생과 성장 과정의 비밀을 추적하는 서사다. 이때 인영은 명윤이 의선을 찾는 데 조력자가 된다. 인영과 명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제각기 다른 시점으로 의선의 삶에 관여한다. 그녀의 정체를 탐사하는 이들마저 가족 해체의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가족 구도가 해체되는 산업화 시기를 반영한다는 데서도 일부의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전통 서사에서 추구한 인간중심주의, 시각 중심주의, 역사 중심주의, 의미의 단일성, 단일 시점, 거대 서사 중심주의 등을 해체하면서 미약한 개인의 사회화가 실패하는 연원을 중층으로 구성한다. 이 글의 논의 방향은 이 같은 범주에 있다. 이는 1990년대 소설 양식 중에서 한강 문학의 고유성을 판별하려는 시도이자, 그의 소설이 모호하다는 평가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파악하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2. 복권된 촉각과 고통
작가는 의선을 내세워 식물 존재론을 펼치면서 인간 존재 간에 발생하는 동물적 대상화를 부순다. 식물성인 의선과 검은 사슴 이미지의 대비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포괄하는 존재론에 밀착하고 있다. 여기에 기반하면 동물성은 폭력성을, 식물성은 홀로 존재하는 고립 형태에서 순수한 생명체의 형상을 발현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우리가 통상 구분하여 말하는 동물/식물 이분법 같은 얇은 관념이 아니라는 데서 남다른 인식이다. 이성의 시대에 비천한 것으로 격하했던 감각에 주권을 부여하여 그 우연성에 의한 체험이 존재 사건을 구성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점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존재론적 감각을 복권하려 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 이해의 지점을 두게 한다.3) 그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그림을 들면서 그에게 유일한 연민의 대상이 고기라고 말하며, 고기가 지닌 “살아 있는 살의 모든 고통과 색”을 고통받는 인간의 그것과 동류로 묶었다.4) 언뜻 보면 『검은 사슴』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자리는 삶과 죽음의 접경에 있는 듯하다. 세밀히 보면 생사 문제보다 더 격렬한 것이 ‘고통’이라는 존재론적 감각이다. 고통의 감각이 인간의 심신에 가하는 충격을 성급하게 죽음 문제로 바꿔 사유하는 우리의 관념주의에 제동을 걸면서 그 고통의 연원을 살갗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고통의 관념화에 몰수되었던 감각의 갱신이야말로 신체가 곧 자기 자신인 인간에게는 생생한 존재론적 사건이다.
이 작품에는 압도적인 동물 이미지가 등장한다. 하나는 성체가 되기도 전에 인간이 프라이팬에 깨트려 넣은 달걀노른자다. 이는 유기적인 신체 기관이 아니며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 의해 신체가 갈가리 찢겨 나가는 눈먼 사슴이다. 이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자기 신체가 찢기고, 흘러내리며, 죽어가는 듯한 경험적 상황에 처한다. 급기야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처럼 안구도, 코도, 입도 없이 해체되어 흘러내리는 ‘기관 없는 신체’(앙토넹 아르토) 이미지와 자기 신체를 동일시하게 된다. 들뢰즈가 썼듯이 자신이 “희생된 동물이라는 생각”(들뢰즈, 35쪽)에 매혹되어 인간과 동물 간 비구분의 영역에서 고통받는 인간-동물이 되어 있는 현실에 놓인 것 같아진다. 한강은 고통받는 인간 그 자체의 표상인 동물 이미지와 의선의 식물성 이미지를 대비하면서 고통의 감각을 육화한다. 이 감각만이 “강렬한 사실성”을 발산하고, “유기적 활동의 경계들을 잘라”(들뢰즈, 58쪽) 내면서 신체에 작용하는 힘들의 진동을 전이시킨다.
의선의 존재 사건은 죽음의 반대 항도, 죽음과 유기적인 현상도 아니다. 그녀에게 삶과 죽음은 비유기적 경계인 숱한 주름처럼 수평에 위치한다. 그녀는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살아 있다. 의선의 존재 사건에 얽힌 고통은 여기에 연유한다. 이 여자는 부모가 호적에 이름을 등재하지 않아 존재증명이 불가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비존재로 ‘실재’한다. 따라서 의선은 반드시 의선이어야 한다는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데도 의선이 의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의선의 정체성 찾기라는 사태가 그녀의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파급된다. 기억 상실과 의선 찾기의 관계 항에서 특징적인 것은 의선의 식물-되기다. 이는 의선과 식물의 동일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선이 지닌 식물의 특성을 일컫는다. 그다음은 기억을 매개하는 언어의 역할이다. 식물 같은 존재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의선에게 말과 침묵 사이에서 발생하는 한 줄 한 줄의 일기 문장은 그녀를 문학적으로 존재케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이렇게 볼 때 의선의 존재 사건은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가 발생하는 문학적 사건이기도 하다.
의선의 촉각이 살아나는 장면만 하더라도 덩굴식물처럼 원시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녀의 몸 냄새를 우연히 맡게 된 명윤의 정신이 점차 혼미해질 때 무욕의 존재처럼 보였던 의선이 의외로 “날 삼켜버려요.”(66쪽)라며 그를 적극 받아들인다. 이 장면에는 털끝만치의 폭력성도 없다. 의선은 남성의 일방적인 눈[目]의 지배력에 포위된 관능의 대상이 아니다. 두 사람은 살갗에 작용하는 촉각적 감응을 상호 적극적으로 교환하는 존재론적 사건의 당사자라 해야 한다. 신체에 가하는 강렬한 ‘사실’이라 할 수 있는 촉각만큼 생생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달리 없다. 이렇게 작가는 감각적 존재론을 통하여 의선의 존재 사건으로 육박해 들어가 주변 인물들의 존재론까지 아우른다. 인간 개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경위는 물론이고 삶이 단지 누구의 혈육이냐라는 탄생 사건으로만 확립하는 것인지를 물으면서 존재와 비존재의 접경을 탐사해 나간다. 검은 사슴 우화의 종결 지점에 식물-되기 현상을 두어 동물과 식물의 종간 차이를 파괴하는 인간 존재론에 관한 사유를 이어가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주요 서사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검은 사슴 우화는 본 서사의 주변부 서사다. 그런데 이런 점이 이 작품의 개별성을 확립하는 막강한 힘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무의식에 깔린 어두운 그림자, 예컨대 공포·불안 등을 망라하는 부정적 감정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이 짐승이다. 이 소설이 어두운 세계를 벗어나려는 인물들이 부단히 고투하는 서사로 읽히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이 이 짐승과 연계된다. 순결하고 연약한 사슴 이미지에 어두운 색채 이미지가 결합한 제호에서부터 길항하는 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얽힌 어떤 힘이다. 이 우화는 동굴을 배경으로 가상과 현실의 접합 지점을 형성하면서 존재론적 사건으로 밀착해 들어간다. 이는 실제와 가상의 접경에서 진실로 굴착해 가는 작가의식을 여실히 반영하는 부분이다.
“눈도 귀도 코도 녹아버린 나에게 손의 주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는 것이 이상했다”(12~13쪽)는 인영의 꿈 장면은 서사를 관통하는 이미지 하나를 품고 있다. 작가는 제법 여러 편의 작품에서 꿈 장면에 이은 현몽이 현실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를 보여준 바 있다. 그만큼 꿈 장면은 많은 경우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극도의 고통이 무의식화된 것이다. 이런 점이 작가의 치밀한 설계임을 간파하게 되는 건 다음 문장을 만날 때다. “나는 의선을 향해 외치려 했으나 이미 입도 목구멍도 없었다.”라면서 해체당하는 몸의 주인인 자신의 무력감과 고통을 언표한다. 의선이 인영의 살갗·척추·갈비뼈 등을 능숙하게 발라내어 이목구비가 모두 녹아내려 감각이 사라졌는데도 인영은 자신을 해체하는 주체가 의선이라는 걸 잘 안다. 이는 인영에게 고통을 안기는 실체가 의선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에도 끝내 살아 있는 것이 촉각이라는 은유다. 전통 서사에서는 시각 중심으로 이 세계를 조망하고 이해했으나 작가는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 되도록 햇빛을 쏘아보는 의선을 내세워 시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촉각의 세계로 전환한다. 의선은 명윤에게도 인영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어 살갗을 접촉하면서 포근한 정감을 자아낸다.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 “내 살과 뼈를 매만지며 추려내는 의선의 투명한 손마디를 나는 마치 생시인 것처럼 느꼈다.”는 감각적 언명만 하더라도 의선의 존재를 동물성으로는 해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악몽을 헤매다 깨어나면서 동물처럼 끈적끈적한 몸뚱이로 “동물적인 신음을 뱉”았다는 인영의 동물화한 목소리는 검은 사슴 이미지와 연접한다.
그녀는 햇빛과 정을 통했다. (중략) 저렇게 계속해서 해를 본다면 홍채가 타버릴지도 모른다. (중략) 눈물이 질금질금 비어져나오는 실눈으로 끝까지 응시해보려 애썼던 그날의 햇빛을, 그때 느꼈던 불가해한 질투와 함께 명윤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39~40쪽)
의선이 햇빛과 육감적으로 교감하는 장면이다. 눈이 멀어버릴지 모를 상황에서도 의선의 촉각은 마지막까지 생생하다. 의선이 인영의 살을 발라낼 때 인영의 촉각과 만나는 그 지점처럼, 햇빛과 의선 몸의 겹침을 의식하는 명윤의 질투 감정이 선연하다. 그는 자신도 이 감정을 해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뒤이은 의선의 언행을 보면 그녀는 동물성 생체이기를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다. 식물처럼 말이 없는 침묵의 화신, 그녀를 안고 있으면 투명한 물방울과 빛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하는 명윤은 의선의 내적인 면모에 매혹된 자다. 그는 “침묵의 육감에 의지하여 천천히 의선에게” 다가가며, “과일 냄새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 살내 같기도 한 체취가 그녀의 몸에서 배어나오”는 느낌을 좋아한다. 동물성 화학 작용을 유발하지 않고 “반짝이며 사방으로 튀겨지던 물방울”(65~66쪽) 같은 투명한 감촉을 그녀에게서 느낀다.
의선이 인영의 방을 좋아한 것도, 햇빛을 받아 안고 앉아 하염없이 햇빛 바라기에 집착한 동인도 그녀의 방과 근무처에 햇빛이 들지 않아서다. 횡단보도(이곳을 삶과 죽음의 접경으로 설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를 건너던 의선이 스트리킹(streaking)을 감행하여 파출소로 끌려갔으나 도망쳐 나와 그후 종적을 감추었다는 인영의 말대로라면 의선의 불가해한 행위는 식물-되기로서만 일말의 이해 지점을 찾을 수 있다. 향일성 식물처럼 빛 바라기를 일과로 알고, 침묵 중에 홀로 문장을 만들며 그것을 허공에 써보는 인영의 모습은 들판에 핀 야생화 한 송이를 방불케 한다. 본적도 주소지도 명부에 등재되지 않았기에 비존재이지만, 부모의 존재를 간신히 알아내기까지 인영과 명윤은 식물처럼 존재하는 의선이 내민 손에 살갗을 내준 사람이다.
한강 작품에서 무해한 존재자가 본연의 생명성을 구가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제법 친숙하다. 동물 같은 포식성, 어떤 구조에 갇혀 짐승처럼 울부짖는 인물을 내세워 이 세계의 어두운 면모를 들추기보다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한 연약한 존재자로부터 세계의 어두운 지점을 비춰 낸다. 이 작품에서는 향일성 식물 같은 20대 여성의 감각으로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인간의 동물성과 폭력성을 해체하고 있다. 의선이 손 내밀어 쓰다듬어 주는 순간의 감촉을 식물성으로 전환하여 동물적 끈적거림에 동반되기 쉬운 인간의 폭력성을 부순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아무도 몰라요. 내가 죽든 앓든 병신이 되든 아무도 몰라요. 지옥에서도 날 쫓아오지 못해요. 나는 여기 있지도 않은걸요. 내 인생은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어요. 나는 그러니까 자유예요.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어요.”(502쪽)
이 예시문은 비존재인 의선을 이해하기까지 그녀가 누구인지를 몰라야 했던 사정을 압축한다. 탄생과 죽음의 사건은 부모만이 알며, 인간 개체로서 몸은 존재하나 사회적 개인으로서 존재증명을 할 방법이 없고, 죄를 짓더라도 법 적용이 불가능한 비존재. 명윤이 사랑한 그녀의 말 없음, 인영이 짧은 기간이나마 호감을 가졌던 그녀의 담담함, 아픔을 함부로 호소하지 않는 면모 등은 의선의 자유가 기원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가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정체성으로서만 생체일 수 있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짓을 동원해야 하는 준거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된 그녀를 비존재자라며 추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이야기 속에서의 갱생
소설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 위에서 사건화 단계를 밟는다. 『검은 사슴』은 현실을 참조한 서사가 본 줄기를 이루지만 이와 별개의 우화를 삽입하여 본 서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 노출을 유보하는 작품 전략을 편다. ‘허구 속의 허구’인 우화는 주제화된 텍스트의 의미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면서 대화 관계를 형성한다. 본 서사와 별개로 화자-청자 간 관계에서 성립하는 이 우화는 문자로 기록된 텍스트이면서도 양자의 대화 관계를 보존하는 기억의 저장고 역할을 한다. 구술 언어로 이뤄진 이 텍스트의 해방적 기능은 단지 발화자에 머물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청자가 발화자의 위치에 서게 될 때 다시금 차이가 나는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다. 말하기와 듣기 행위에서 양자는 서로에 대하여 현존하며, 이때 듣기-해석은 말하기-암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 같은 대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알레고리다. 우화의 발화자와 청자의 대화 관계에서 검은 사슴은 본 서사의 주제를 강화하면서 인간의 존재 사건을 알레고리로 암시하게 된다. 온몸의 기관이 낱낱이 해체되는 듯한 고통에 처한 인간(의선)과 동물(검은 사슴)의 반립에서,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라는 고통스러운 인식을 읽게 된다. 고통을 비명으로 호소하는 짐승과 의선의 신체 감각은 똑같이 생명 있는 자의 것이다. 짐승은 비명으로, 인간은 이야기로 그 감각을 전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진예술가의 내면―알 수 없는 정신 현상을 우리는 흔히 이렇게 부른다―을 빛과 어둠의 감각으로 표상하는 이 작품에서 어떤 이는 탄광 폐광 무렵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읽을 것이며, 살기 위하여 죽음을 담보해야 했던 이들의 막장 같은 삶의 처절함을 통감하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선명한 사진 한 장을 보는 듯한 장면에서 내내 놓여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흑백 사진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우리의 시지각을 붙든다. 그중 단연 부상하는 이미지가 검은 사슴이다. 그런데 이 짐승은 이야기 속에 존재할 뿐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환상 동물이다. ‘임’이 ‘장’에게 들려준 사슴 이야기와 딸 의선에게 들려준 서사는 결말에서 차이가 난다. 반복 화법으로 차이가 나는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청자가 누구냐에 따라 결말 부분이 변형·변주된다. 누구든 기본 서사와 연관성이 없는 결말을 창안할 수 있도록 열어 두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작가는 기이하고 모호한 검은 사슴 이야기로 무엇을 전하고자 한 것일까. ‘장’과 ‘임’에게 닥친 갱도 사고 시 검은 사슴 이야기의 화술 주체는 임이다. 이 짐승과 맞닥뜨리는 사람은 누구나 사력을 다하여 절대 암흑과 같은 지경에서 벗어나고자 고투한다는 내용이다. 임영석(의선 부)과 함께 64시간 사투를 벌이다 살아 나온 장이 그 절체절명의 시간에 임에게서 들은 이 짐승 이야기는 서사에 틈입하는 알레고리 화소라 할 수 있다.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사투를 벌일 때 임이 들려준 그 이야기가 두 인물에게 상황을 견디는 힘을 부여함으로써 천일야화 같은 생명력을 발휘한다.
검은 사슴 우화에는 불변하는 기본 서사가 있고, 화술 주체라면 누구나 재량껏 바꿀 수 있는 결말 부분도 있다. 그 말미에 구전 서사처럼 발화자의 처지를 담을 수 있어서 개인의 세계관이나 감정·기대가 곡진하게 드러난다. 기본 서사의 흐름이 단절되면서 언어가 불안전해지고, 이제껏 익숙했던 서사가 급작스레 낯설어진다. 본 서사와의 합의 없이 우연히 끼어든 이 우화가 인간의 생사 문제를 풀어주는 열쇠로 기능한다. 살아 있으나 죽었고, 죽었으나 이것이 곧 갱생임을 믿게 하는 것이 이 우화가 지닌 반어 효과다. 본 서사에 기여하지 않는 작은 화소가 총체적 서사에 균열을 가하면서 그 역능을 끌어올린다. 본 서사의 흐름과 별개인 이 파편이 의미하는 바를 알레고리로 해명할 수 있다. ‘우화술(寓話術)’의 사전 정의를 보더라도 알레고리는 우화를 이해하는 주요 요건이다. 동물·인간·신·무정물 등을 주인공으로 전개하는 짧은 이야기에서 반어·비유·풍자 등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서구의 문학 용어로 알레고리라 한다. 총체적 서사에 비하면 허황한 이야기로서, 본 서사와 어긋나는 배열로 주제를 지원하는 방식이다.5) 이 작품에서 짐승 우화는 그 자체만으로는 소설이 성립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화소에 불과하며, 불변하는 어떤 정언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도 않다. 하지만 제아무리 모순투성이에다 과장과 부도덕·비합리가 횡행할지라도 어두운 현실에 직면한 화자가 해방 감각을 자유롭게 발화한다는 데에 이 우화의 의미를 둘 수 있다.
문제적 부분을 보면, 우화의 기본 서사에서 검은 사슴의 유일한 소원은 하늘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슴에게는 동굴 밖으로 나가는 길을 모른다는 선천적 한계가 있다. 기괴한 외모의 짐승과 맞닥뜨리게 되어 공포에 질린 광부와 이 짐승 간에 거래가 이뤄진다. 사슴이 길을 물을 때마다 광부가 답해 준다는 조건으로 사슴의 귀중한 부위인 반짝이는 뿔, 그리고 강인한 이빨을 광부가 뽑아도 좋다는 내용이다. 바깥으로 나가기 위하여 짐승다운 사나움을 빼앗겨야 할 때 최종 무엇이 남을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청자에 따라 달라진다. 이 말은, 존재 사건의 주인공이 이야기의 결말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그 인물이 어떤 존재로 전화(轉化)하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아래 인용문에서 앞의 청자는 ‘장’이고, 뒤의 청자는 어린 의선이다.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 짐승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 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245쪽)
열의 하나쯤이나 될까, 운 좋게 암반 사이의 가느다란 틈을 비집고 나와 꿈에도 그리던 하늘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햇빛을 받자마자 이 짐승은 순식간에 끈적끈적한 진홍색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눈부터 빨갛게 녹아버리는 거다. (중략)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가고 또 십 년이 가고 백 년이 가면서 그 웅덩이가 썩은 자리에 어느덧 연한 풀이 돋고, 자그마한 꽃들이 핀다. (중략) 그게 붉은애기풀이란다. 푸른 잎 가장자리에 녹물 같은 붉은 기운이 돌고, 뿌리를 달여먹으면 미친병이나 어질머리병이 직효이고, 산삼 찾는 것보다 더 힘든 풀이야. 그걸 찾는 약초꾼들은 꼭 전날 밤 꿈에, 산신령 대신 그 짐승의 검고 흉흉한 형상을 보곤 한단다……. (478~479쪽. 밑줄은 필자가.)
두 경우 모두 죽음을 죽음이라 하지 않고 존재를 변형하는 사건이라 말한다. 앞에서 검은 사슴은 들쥐 새끼만큼 쪼그라들었고, 뒤에서는 붉은애기풀로 환생한다. 앞에서는 화자-청자가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공포를 몰아오는 짐승이 쥐새끼만큼 쪼그라들어 무력해진 결말에는 임과 장이 사지에서도 살아남을 거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뒤에서는 전 남편의 막장 사고 후, 그의 아내가 실성하여 말을 잃어버리자 이 여자(의선 모)를 아내로 맞아들여 그녀를 구완할 약초를 찾아다니는 ‘임’의 기대가 담겨 있다. 햇빛을 보게 된 짐승의 신체가 녹아내려 액체화하는 자리에서 야생화가 피어난다는 결말에는 자연에 속한 생명체의 순환 과정이 압축되어 있다. ‘임’은 실종된 아내가 야생화로 피어날 훗날을 상상하며 딸에게 사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우화는 화자와 청자 간 의사소통 사슬의 역할을 하면서 현재의 난관을 체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긍정적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지녔다.
검은 사슴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작품에 겹겹이 내포를 만드는 화소로 작용한다. 사슴의 존재 조건이 갱도이듯이 인영과 명윤도 캄캄한 동굴에 처해 있다가 구사일생 빠져나오는 것 같은 겹겹 구조에 놓여 있다. 그 구조를 가능케 하는 물체는 검은 사슴과 외관이 유사한, 또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인 기차다. 기차의 기관이 해체되는 사고를 당하지만 두 사람은 운 좋게 그 험지를 빠져나온다. 이로써 이 작품은 겹겹 구조에서 한 인간의 존재 조건이 결정되는 점을 묘파하면서 인간의 존재 사건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작가는 혈연과 비혈연, 동물과 식물, 육체와 관념, 말과 침묵, 빛과 어둠 등의 이항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론으로 밀착해 들어간다.
이야기 속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감각은 비존재인 의선뿐만 아니라 실종의 형태로 사라져 버린 인물들 모두의 존재 사건과 연접한다. 의선, 의선 모, 명윤의 누이, 인영의 언니, 장의 아내 등이 모두 지금-여기에 부재하는 이를 기억하는 자의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검은 사슴과 의선의 소속이 자연이라 해서 소속이 분명한 다른 인물들과 처지가 다른 것도 아니다. 모두가 이야기 속의 존재자다. 따라서 말과 글, 그리고 기억 작용으로 인간 존재론을 말하는 여기서 침묵하는 자에게 작용하는 상징언어의 역할은 사뭇 막중하다. 말과 침묵 사이에서 존재감을 표명하는 의선의 글에 관한 경험도 마찬가지다. 탄생 이후 줄곧 외딴 화전민 마을에 살면서 부모가 집을 비워 운명적으로 무학자일 수밖에 없었던 비존재자로서의 사정은 호적 미등록에서 비롯한다. 그런 그녀가 기억을 잃은 후 이것을 되찾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거기에 편입된 건 저 환상 동물이다. 기억의 단편들을 조합하는 계기가 되어 준 것이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검은 사슴이다. 그 이야기를 기억해내는 능력과 상징언어 사용자로서 사회적 개인의 정체성은 같은 맥락에 놓인다. 의선은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사건을 증명하며,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타자들의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증상으로 보건대 의선은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이야기할 능력도 있다. “오랫동안 글을 써서 다듬은 문장 같은 말들을 천천히 독백하”(201쪽)는 그녀는 시종 글 같은 말을 한다. 허공에 글을 쓰며 문장 연습을 반복하는 동인도 기억의 선명성을 위한 말 고르기에 있다. 그녀는 기억이 휘발하지 않는 한 언어를 운용할 줄 알고, 그것은 이야기 형식을 갖췄으며, 극도로 말을 아끼는 것처럼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언어의 밀도를 높인다. 허공에 일기를 쓰면서 어제의 문장을 기억해낸 뒤 수정 과정을 거치는 작업도 기억 되찾기의 일환이다. 의선이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와 교감할 수 없었던 이유를 당신이 일찍이 상징언어를 상실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모어를 전수받지 못했으나 문장을 만들어 부단히 존재 표명을 해온 의선의 조용한 모습이 침묵하는 자처럼 보이는 건 여기에 기인한다. 원활하지 못한 언어 환경 탓에 말에서 분리되면서 말의 욕구(need)를 억압당하게 된 것이다. 의선의 요구가 현실적인 욕구의 검열로 하여 채워지지 않게 되지만 이것이 요구의 차원으로 환원하지 않고 번번이 욕망이라는 잔여물을 경험하는 형태가 된다. 욕구가 요구에 종속되면서 의선이 말을 한다는 사실과 분리되고, 그녀의 모든 언어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의 연쇄 속에 놓인 채 해석의 여지를 만든다. 의식 속에 부유하는 모호한 관념들을 문자로 붙잡아 두려는 의지로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이 그녀의 글이다. 아래 예시문이 보여주듯이 말이 되지 못한 것을 글로 전환하는 의선에게 말과 글의 의미와 미감은 일치한다.
…… 봄이 오면 연들을 태워요. 거기 흐르는 냇물…… 징검다리가 오십 개나 될 만큼 긴 냇물이라고 해서 오십천이라고 부르는데…… (중략) 창호지는 물에 씻기워 가고 살만 바위에 걸려 있는 연들을 건져내고, 나뭇가지에 흰 속곳처럼 걸려 있는 것, 상복 옷고름처럼 꼬리만 떨어져 걸려 있는 것, 지붕에, 수풀 사이에, 마당에 어지럽게 널린 흰 연들을 모조리 모아 산비탈에서 태워요. 이른 봄햇살 사이로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고 붉은 불꽃이 오르면, 그때부터가 봄이에요. (203쪽)
말하기에서 글쓰기로 변화가 가능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의선에게 글쓰기는 말(langue)이 되지 못했으면서도 여전히 그 말이 불완전하게나마 잠재된 채로 어느 순간 글을 써야만 할 때 매우 개인적인 말(parole)의 형태로 주조된다.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언술처럼 “잠재적 상태 속에 있던 무언가가, 살아 있는 말 속에 맹아적이고 불완전한 채로 담겨 있던 무언가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 즉 “의미가 사건으로부터 분리되는 것”6)이다. 앞서 본 우화와 비교해 보면, 우화에서 사건과 의미의 관계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연쇄적인 사건의 의미를 추궁케 하면서 알레고리 효과가 정점에 달한다. 그러나 의선의 글쓰기는 온전치 못한 기억 속에서 온전에 가까운 기억을 고정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사회적 합의와 소통이 목적인 언어가 아니라 개인의 경험인 일회적 사건들을 쓴 것이며, 자연 속에서 의선의 시지각이 포집한 내용에 대한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의선은 고향의 봄 정경을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으로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존재 사건을 증명하는 사회적 합의에서는 제외된 자다. 그래서 그녀의 말과 글은 의미를 초월한 곳에서 생성하는 텍스트가 되고 만다. 그녀의 존재 사건과 말·글의 의미론에서 자유는 같은 맥락에 놓인다. 상징계에서 출생 기록이 없다는 점이 그녀가 비존재임을 여실히 입증하면서 말이나 글도 의미화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야기 속에 존재하면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떠올라 주는 의선의 행방도 뒤늦은 후문으로만 전해진다. 그 와중에도 의선이라는 주체의 탄생이 말과 글로 이뤄진다는 점만은 자명하다.
4. 한순간의 빛 존재론
쇠락해 가는 탄광촌과 주민을 사진에 담고 싶어 하는 ‘장’이 광부 임영석을 알게 되면서 이 소설은 사진 예술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 사건은 물론이고 순수예술에 대한 질문을 품은 서사로 진전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로 생명의 비밀과 죽음의 문제, 나아가 삶과 죽음의 순환 과정에 놓인 인간 존재론에 관하여 질문하면서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의 순연한 본래 모습과 재현의 예술인 사진의 세계로까지 탐사를 이어간다. 이런 점은 “연출 사진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략) 연출된 사진에 대해서는 환멸밖에 더 느끼는 것이 없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그림이 되는 순간을 포착”(253쪽)하려는 장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요컨대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섬뜩한 고발성”(273쪽) 때문에 그의 사진은 이제 미학적으로도 상품성으로도 유명세를 타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 작품은 이전과 달라진 시대가 요구하는 대중예술의 현주소를 반영한다. 문화가 우세해진 시대에는 잡지도 대중 지향의 기획을 더욱 강화하고 확장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한 것이다. “사물의 껍데기만을 핥을 수 있을 따름인 카메라라는 기계”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장은 이제 이 기기가 “만지고 냄새 맡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흘릴 수”(528쪽)도 없는 것임을 통감하기에 이른다. 예술의 가치를 사실 재현에 맞춰 온 리얼리즘 예술관이 급속도로 힘을 잃어가는 시대를 지각한 것일 테다. 표면의 예술인 사진이 사실 재현만을 추구할 때 미적 풍크툼을 안기지 못한다는 점을 그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연출 사진을 촬영하면서 가장과 기만의 포즈를 취하지 않는 이유는, 사진이 빛의 예술이라는 정통 예술관을 견지하는 데다 풍크툼 미학을 추구하는 자로서 상품성을 제고하는 자에게 사진을 팔아넘길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인영의 공감을 끌어내는 다음 구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장의 사진에서 “사진 찍는 이가 피사체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 “고통스러운 생을 완전히 까발리지 않기 위해, 위엄을 지켜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105쪽)다는 느낌이 전달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장은 타자를 피사체로 다루지 않기 위하여 몇 달에 걸쳐 ‘임’과 친분을 쌓는데, 이는 한순간의 촬영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다. 그만큼 그는 연출이 불가능한 찰나의 시간에 한 줄기 빛으로 현신하는 인간 존재의 존엄을 소중히 여긴다. 카메라의 광학 기술에 의존한 표면 현상의 획득보다는 관계 간 정감을 바탕으로 상대방에게서 진정한 인간성을 견인하는 일에 더 가치를 둔다. 그는 광학적 시각의 지배력에 압수당해 버린 정감을 복원하고 싶어 하며, 한순간의 빛 작용에 의지하여 피사체를 훔쳐내는 카메라옵스큐라의 관음 권력을 부정한다. 피사체는 의도치 않은 빛에 노출되는 순간 대상화되면서 시선의 권력 앞에서 피지배자가 되고 만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검은 사슴』은 이전 시대와 당대를 유리시키지 않는 미학적 구성물이다. 산업화 사회에서 대도시로 대거 유입한 노동자 가족이 해체되는 양상을 보면, 가족의 범주를 벗어난 구성원들은 대개 실종의 형태로 도처에 흩어져 살아간다. 피차 실종자로서 단독자의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는 가족 공동체가 끔찍한 존재 사건의 시발점일 수 있다. 대비되는 것은, 대도시로 귀환하는 명윤·장과 달리 의선은 대도시를 이탈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개인의 존재증명이 가능할 때만 그녀는 사회의 일개 구성원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라면 의선은 산업사회에서 실종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면 어디든 조용히 나타나 이전 장소로부터 거듭 실종될 것이다.
특히 알레고리 효과로 주제를 점층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동물이 탄생하는 순간을 예고하는 꿈 장면을 작품의 초입에 배치한 경우에 주목을 요한다. 기원 부정과 야생화 같은 삶의 구경에 동물성이 틈입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검은 프라이팬에 웅크린 짐승 이미지, 끈적끈적한 달걀노른자, 부화하다 만 달걀, 태아 이미지. 급기야 이것을 양변기에 쏟아 물을 내리는 장면은, 함부로 태어나서는 안 된다면서 생명체에 가하는 폭력처럼 보인다. 생명체의 존엄이 무시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경악스러운 장면에서 작가의 의도를 간파할 때 비로소 2000년대 이후 한강 문학과의 연결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의선의 존재 사건은 단지 1990년대 작가들이 주목한 정체성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존재 사건에서 필수인 생명의 문제를 다루면서, 비존재의 존재화가 가능한 쓰기/말하기 행위로 인간 존재를 갱생시키고 있다.
한강은 전환기의 감각으로 이전 문학의 전통을 전방위적으로 의심하면서 일신을 꾀한 작가다. 등단 이후 줄곧 새로운 영토를 만들면서 체류지를 이탈하였고, 반복을 통한 차이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실험을 이어 왔다. 이전과 이후의 연결을 꾀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화법을 구사했는데 이는 작가의 세계관이 당시 사회와 문학 장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탐사하는 것과 직결되고 있음을 뜻한다. 1980년대적인 것의 사라짐(fade-out)과 1990년대적인 것의 나타남(fade-in)의 접경에서 미학적인 실험을 벌이면서도 이것을 극렬한 지적인 게임으로 표면화하지 않았을 뿐이다.
- 1) 황종연‧진정석‧김동식‧이광호, 「좌담 : 90년대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황종연·이광호 외 10인, 『90년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민음사, 1999. 이후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좌담자의 이름과 쪽수를 밝힌다.
- 2) 이 글은 문학동네, 2024년(1판 13쇄) 발간본을 참고하였다. 이 작품은 원고지 1,790매에 달한다. ‘황곡’은 강원도 태백의 허구적 공간으로서 작품을 쓰는 동안 작가가 “서너 번 정도 4,5일씩” 다녀왔다. 박홍규, 「이 작가를 말한다 :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으로 주목받는 신예, 한강」, 『경향신문』, 1998.9.1.
- 3) 질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분석한 진중권의 글을 참조.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16(2판 5쇄), 203~205쪽.
- 4) 질 들뢰즈, 하태환 역,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15(1판 10쇄), 34쪽.
- 5)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편, 『문학비평용어사전 하』, 국학자료원, 2006, 571~572쪽.
- 6) 폴 리쾨르, 김윤성·조현범 역, 『해석 이론』, 서광사, 2003(수정판 제3쇄),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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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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