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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작 | 2024년 봄호(제87호)

보호하지도, 파괴하지도 않는 사람들 ― 식물 SF에 나타난 인간과 비인간의 연대와 생존

유인혁 문학평론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새로운 식물 이야기를 상상하기


  어슐러 K. 르귄의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식물 행성에 도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헤인 우주를 탐사하는 열 명의 지구인 탐험가들이 주인공이다. 헤인 우주란 르귄이 만든 세계관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주 먼 옛날 헤인 행성의 개척자들이 온 우주를 누비며 정착지(혹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우주는 너무 광활했기 때문에, 헤인의 개척자들은 다른 항성계의 정착민들과 적절히 소통할 수 없었다. 아주 먼 시간,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는 지질학적·천체물리학적인 시간이 흐르고 나서, 대다수의 행성인들은 자신의 기원을 잊어버렸다. 아득한 시간 뒤 헤인인들은 자기 행성에 고립된 조난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금 모험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헤인인들은 심신이 행성의 환경에 맞춰 진화·적응된 형제자매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수많은 세계의 탄생을 기꺼이 탐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낯선 환경을 탐사하는 모험소설의 플롯과, 대안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SF의 문법이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의 주인공들은, “헤인의 개척자들이 일구고 정착한 땅이 아닌, 진정으로 낯선 세상”1)을 찾아다니는 ‘극한 탐사단’의 승무원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헤인 우주가 아닌 헤인 우주의 바깥을 찾아 나선 몽상가다. 그들의 목표는 “4470 세계라 불리는 녹색 행성”에서 ‘헤인인’의 후손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족’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러한 타자를 만났다. 4470 세계는 인간이 사는 행성이 아니었다. 그곳의 주인은 “개개의 나무 모양을 한 것들이 일종의 뇌세포”를 형성하고 있는 식물 군집체였다. 즉 4470 세계의 숲은 지표면의 모든 나무들이 모여 이루어진 생명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였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자아(self)와 개체(individual)의 개념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숲은 아무런 천적도, 경쟁자도, 조력자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러나 이 자족적인 세계는 10명의 불청객들이 찾아오고 나서야 처음으로 타자를 갖게 되었다. 그것의 즉각적인 반응은 긴장과 공포였다. 이는 창세 이래 처음 발생한 사건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모범적인 SF로서,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르귄은 지구와 전혀 다른 생태적·물리적 환경을 고안하고, 거기에 적응한 지적·인지적 존재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는 사실 르귄의 장기다. 그녀는 번식기에만 성별 분화가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행성(『어둠의 왼손』),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아나키즘으로 분할된 문명(『빼앗긴 자들』), 동성애와 이성애가 결합한 폴리아모리 가족(「선택하지 않은 사랑」), 남성들이 일종의 트로피이자 번식 기능으로 전락한 극단적 가모장 사회(「세그리의 사정」) 등을 보여 준 바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현재 우리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규범들을 상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다양한 인간들의 문명을 상상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 너머(post-human)의 세계를 정교하게 형상화했다. 식물들의 군집이 형성하게 되는 의식이란 무엇인가. 르귄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그것은 “감각 기관 없이 얻는 자각. 눈 멀고 귀먹고 신경도 움직임도 없는 상태. 접촉에 대한 약간의 짜증 반응. 태양, 빛, 물, 뿌리 부근 땅에 존재하는 화학물질에 관한 반응. 동물적 마음에 관한 몰이해. 마음 없는 존재. 객관이나 주관 따위는 없는 존재”다. 그것은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자이니, 말 그대로 물아일체의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포스트휴먼의 우주 및 그것과의 만남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줬다.

  또한 이 작품은 대안적인 서사를 만들어 내는 데도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정신을 가진 식물이나 군집 생명체로서의 식물은 르귄의 발명이 아니다. 잭 피니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1)과 돈 시겔의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5)은 이미 ‘하나이자 여럿인’ 식물 외계인의 아이디어를 실현한 바 있다. 이 이야기에서 식물-외계인들은 개체 간 의식이 연결된 군집체다. 한편 이 식물 외계인들은 인간의 적이다. 그들은 감정을 드러낸 인간들을 사냥 하여 개성 없는 복제 인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여기서 식물이 하나 이자 여럿이라는 특징은 정확히 적대적인 괴물의 특징으로 활용 되었다. 

  요컨대 르귄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식물-외계인이라는 소재가 새롭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익숙한 재료를 통해 어떠한 이야기를 직조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르귄의 이야기에서 군집체는 분명 공포의 대상이다. 이러한 괴물의 계보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의 외계 식물, 『스타쉽 트루퍼스』(1959)와 『엔더의 게임』(1985)의 곤충, 《스타트렉 뉴 제너레이션》(1987~1994)의 기계, 심지어 《스타크래프트》(1998)의 하이브 마인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SF들에서 타자와의 조우는 전쟁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르귄의 인물들은 접촉의 공포 속에서도 전혀 다른 만남을 수행한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오즈딘은 공감능력(empathy)을 가진 생태학자다. 그의 역할은 극한 환경에서 인지적·감정적 존재를 감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은, 오즈딘 개인에게는 고통에 다름 아니다. 그는 타인의 경계심, 긴장, 슬픔, 분노, 경멸, 충동, 좌절 등을 민감하게 감지하며, 거기에 감응(affect)된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그는 공적 생활을 지탱하는 사생활을 가질 수 없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individual)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과 연대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오즈딘은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4470 세계가 인간들에게 느끼는 공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오즈딘은 공포의 분위기가 꽉꽉 충전된 행성 위를 거닐어야 했다. 그것은 한 인간이 버텨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스케일의 시련이었다. 

  여기 아주 익숙한 이야기의 재료가 있다. 한쪽에는 특수한 능력 때문에 사회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다른 한쪽에는 거대하고 불가해한 시련이 있다. 많은 독자들은 오즈딘이 그의 특수한 능력 (super power)을 발휘해서 타자(alien)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혹은 오즈딘이 숲의 의식을 설득하거나 길들이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이때 오즈딘은 이 새로운 세계의 정복자 혹은 수호자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는 정확히 《스타트렉 더 오리지널 시리즈》(1966~1969)에서 스팍이 걸었던 길이다. 그는 일종의 텔레파시인 마인드 멜드(mind meld) 능력을 활용하여 다양한 외계 종족을 제압하거나 설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즈딘은 그러한 영웅이 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능력을 비우는 법을 익혔다. 그는 행성에게 감정을 투사하거나 반사하지 않는 법을 연습했다. 그는 무심無心을 연마했다. 그는 행성의 아무렇지도 않고 특수할 것이 없는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두려움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초월해 버렸다”. 그는 “자신을 외계에 스스럼없이 내던져” 버렸다. 그렇게 오즈딘은 식물 세계의 진정한 정착자가 되었다.

  오즈딘의 이야기 안에는 아주 낯선 서사가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픽션들이 다루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과 식물의 만남을 연출한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의 정복자도 숭배자도 아니다. 그리고 숲은 인간에게 보호받지도 않으며, 혹은 많은 나무 괴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복수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만나고, 긴장하며, 서로를 관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함께 유능해지기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SF의 쾌락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는 것이면서, 또한 새로운 서사의 방식을 경험하 게 되는 것임을 알려 준다. 즉 다르코 수빈의 ‘노붐novum’이나 데 이비드 나이의 ‘기술적인 숭고’ 등의 SF적 요소들은, 새로운 방식 의 서사 안에 배치되었을 때 미학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은 그러한 의미에서 좋은 SF다. 김초엽의 이야기가 인간의 세계관을 쇄신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이것은 김초엽이 포스트휴먼(post-human)에 대한 관심 속에서 주목받는 이유다. 예컨대 김미현은 김초엽 단편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지구 되기’라는 여성적 수행성을 통해서 타자의 취약성을 배려하고, 상호 간의 집단적인 책임감을 회복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주목했다.2) 연남경은 김초엽의 여성 인물들이 “보편-단일의 과학 담론의 허상을 고발하고 세상의 편견에 저항”한다고 주장했다.3) 김은주의 경우 김초엽이 “근대적 세계관을 비평하는 동시에 다른 방식의 세계를 사유하는 방편이 되는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 준다고 보았다.4) 여기서 김초엽은 특히 ‘남성 중심의 근대’라고 하는 ‘보편적 세계관’을 상대화하는 대안적 서사의 이야기꾼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김초엽의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은, 이러한 탈인간중심주의적인 정치와 윤리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오길영에 따르면, 김초엽은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며, 비인간 존재들을 “무시한 결과 발생한 파국 앞 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5) 이양숙은 이 작품이 “인간-사이보그-식물의 얽힘과 연결이 결국 지구를 행성적 위기에서 구출한다는 ‘희망적 서사’”를 보여 준다는 것이 대중적 성공의 원인이라고 평가했다.6)

  나는 이러한 비평들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관점을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해석들을 강화하고 싶다. 『지구 끝의 온실』이 인간과 비인간의 연대와 동맹을 새롭게 서사화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플롯은 대체로 인간의 관점에서 독해되었다. 예컨대 『지구 끝의 온실』의 이야기는 인간이 비인간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은 바로 비인간의 입장이다. 요컨대 인간이 비인간과 연대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새롭게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연대하거나 동맹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그들에게 인간과의 동맹은 어떠한 이득이 있는 가. 그들은 진실로 인간과의 공생(symbiosis) 혹은 공산(sympoesis)에 참여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지구 끝의 온실』의 주요 소재인 모스바나에 대한 주목을 끌어낸다. 모스바나는 식물학자 레이첼이 유전자 편집을 통해 만들어 낸 덩굴식물이다. 모스바나는 세계의 재앙인 ‘더스트’에 대한 강력한 내성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더스트에 자연 적응한 식물들”과 “증식 속도가 가장 빠른 야생 잡초들을 조합해 편집한 키메라”다.7) 그런데 이 GMO는 인간에게 유리한 형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체에 독성이 있고, 침입성이 매우 강해서 숲에 풀어놨다간 숲의 생태를 전부 파괴”할 것이다. 따라서 “더스트를 제거하는 게 확실해도 인류를 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정리하자면 모스바나는 환경독소에 대해 내성을 갖추고 있고, 심지어 그것을 정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 및 인간의 거주환경을 파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스바나의 가장 가까운 SF 친척은 바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부해腐海일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부해는 오염된 지구를 정화하고 있는 식물과 곰팡이의 군집체다. 그런데 부해는 이러한 정화 과정에서 인류에게 유해한 독소를 뿜어낸다. 즉 모스바나와 같이 인간의 구원자이며 파괴자라는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비교할 때 『지구 끝의 온실』이 갖고 있는 흥미로운 특성은, 부해와 다르게 모스바나의 파괴적 성격이 억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사 안에서 모스바나의 위험성은 크게 강조되지 않는다. 예컨대 모스바나의 독성은 치명적이지 않아 인간이 약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모스바나가 다른 식물들, 특히 식용 작물에 미칠 수 있는 영향 역시 최소한으로만 암시되었다. 이는 김초엽 SF가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 위주로, 적대와 불화를 겪는 인물과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적다거나8), “지구를 구하는 영웅 서사의 익숙함”을 환기하고 “남성적이고 인간 중심주의적 과거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부족”하다는 비판적 평가9)와도 관련이 있다. 즉 모스바나는 김초엽 SF가 인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나 비판보다는, 낭만적이고 더러는 유토피아적인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는 대표적인 표징일 수 있다.

  하지만 『지구 끝의 온실』을 모스바나의 입장에서 재구성해 보면 어떨까. 이때 모스바나의 무해성은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모스바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GMO라는 태생이다. 모스바나의 모든 특징은 식물학자 레이첼이 인위적으로 편집한 것으로서, 그것은 자연계에서는 볼 수 없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단정’한 유전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스바나의 제한적인 독성은, 식물학자 레이첼의 섬세한 조정과 통제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단계에서 모스바나는 비인간 행위자로서의 식물 혹은 ‘자연’의 대표자가 아니다. 오히려 모스바나는 인위의 산물이다. 여기서 인간과 식물의 동맹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인간이 자연을 일방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재)생산한 결과일 수 있다. 레이첼이 더스트폴의 주범인 솔라리타 연구소의 일원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혐의를 강화한다. 

  모스바나가 자율적인 행위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그 자신의 유전적 강점이 빛바래는 시점부터다. 모스바나는 모순적인 생물체인데 “그 자신의 경쟁력을 만드는 더스트라는 환경 자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순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것으로, 인위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모스바나는 더스트를 정화한다는 목적을 이루고 난 뒤,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 속에에서 “공존과 유전적 다양성을 습득하고 더스트 시대의 흔적을 자신에게서 지우는 것”으로 살아남았다. 즉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덩굴식물과 얽힘으로써 더스트 이후의 시대에 적응하게 되었다. 

  김초엽은 이러한 모스바나의 끈질긴 생명력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모스바나가 맺었던 동맹의 실체에 대해 암시한다. 요컨대 “인간이 모스바나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모스바나가 인간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모스바나는 원래의 유전적 자원만으로는 절대 생태계의 우세종(the dominant)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스바나는 레이첼과 유전공학의 도움을 통해 지구를 뒤덮었다. 그리고 인간의 도움을 얻어 획득한 유전자원이 더 이상 강점이 되지 않는 순간이 오자, 자연계의 다른 형질들을 받아들여 번성했다.

  이러한 시나리오 속에서 인간과 모스바나는 진정한 협력 관계 로 재구성된다. 여기서 모스바나는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시혜를 베푸는 자애로운 자연의 표상이 아니다. 반대로 모스바나는 인간 에 의해 통제된 자연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모스바나는 인간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모스바나는 인간을 통해 번성하지 만, 결코 인간에게 예속되지 않는다. 모스바나는 인간을 보호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 서 발생하는 일이다. 

  여기서 인간과 모스바나는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던 함께 유능해지기의 관계를 적시하는 것 같다. 도나 해러웨이에 따르면 지구의 반려종들은 서로를 유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두 종의 동맹은 결코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시혜와 원조의 관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동맹은 ‘손상된 땅’ 위에서 함께 생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즉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능력을 끌어내고, 상대방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함께 유능해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10) 정리하자면 『지구 끝의 온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연대를 서사화하고 있다. 이 간단한 문장은 보다 심오한 수준에서 사유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김초엽이 선보이고 있는 이야기는 다만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익숙한 패러다임으 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은 언제나 인간의 혹독 한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이는 우리의 세계를 반성 하는 하나의 방식이지만, 반대로 자연을 동등한 수준의 파트너로 대하기보다는, 낭만적인 예속자로 대상화할 위험을 늘 가지고 있다.

  요컨대 김초엽은 우리에게 새로운 서사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에서 모스바나는 생존과 자신의 번영을 위해 인간을 이용한다. 그것에게 인간은 훌륭한 파트너이자 자원이다. 모스바나는 인간을 떠나기도 한다. 인간이 자신에게 준 전략적 자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지자, 그것은 생태계의 다른 파트너들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다. 그것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다시금 번성한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진정한 의미에서 동맹 관계로 엮여 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연합할 수도 있으며, 때가 찾아오면 다시금 각자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 이러한 서사 안에서 비인간은 인간만큼이나 오롯한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 이후


  김초엽의 첫 번째 장편 『지구 끝의 온실』을 식물 SF라고 부를 수 있다면, 두 번째 장편인 『파견자들』은 버섯 SF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파견자들』의 인류는 외계로부터 도래한 ‘범람체’ 때문에 지하로 도피했다. 이 범람체란 “한때 지구의 흙 아래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었던 균류의 균사체”를 닮았는데, “보라색, 파란색, 빨간색의 범람 산호들”11)을 외형적 특징으로 한다. 즉 범람체는 균류와 그것의 자실체(fruit body)인 버섯을 차용하여 고안한 외계 생명체라 할 수 있다. 

  한편 범람체들은 자아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마치 균사체 네트워크의 버섯들처럼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들이다. 그래서 범람체에 노출된 인간은 자아를 상실한다. 이는 인류의 존속을 위협 하는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버섯 SF는 생각만큼 드물지 않다. 우선 앞서 살펴봤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부해가 포자를 퍼뜨리는 균류를 연상시키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비디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Last of Us》(2013)와 HBO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 (2023)는 포자에 감염된 인간의 형상을 으스스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파견자들』의 직접적인 선배라 할 수 있다. 이 세계관의 인간들은 동충하초에 감염되었다. 그들은 몸 위에 돌출된 균사체 각질과 비정상적인 폭력성으로 인하여 식별된다. 이는 『파견자들』에서 범람체에 감염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한편 알렉스 가랜드의 《서던 리치: 소멸의 땅》(2018) 역시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 준 바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인 쉬머(the shimmer)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에서 온 색채」(1927)를 연상시키는 이상한 지역이다. 그곳은 명백히 비자연적인 색채로 뒤덮여 있으며, 방문자들을 DNA 차원에서 변형시켜 식물 인간, 혹은 균사체 인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요컨대 『파견자들』은 최근 대중문화에서 재생산되고 있었던 버섯-인간 복합체의 이미지를 재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버섯 인간들은 살갗 위를 뒤덮는 형형색색의 각질을 신체적 특징으로 하며, 자아의 상실을 정신적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인간 아닌 무엇인가로 변이한다는 것.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플라이》(1986), 하나자와 켄고의 《아이 엠 어 히어로》 (2009~2017), 가까이는 CD PROJEKT의 《사이버펑크 2077》(2020) 이 보여 주는 것처럼, 비인간적 전이(transition)는 언제나 공포의 단골 주제였다. 

  요컨대 『파견자들』의 범람체는 (인접) 장르의 관습을 차용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새롭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김초엽은 이러한 익숙한 재료를 활용하여 대안적인 이야기를 전개한다. 요컨대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변이가 그저 공포의 대상이라면, 『파견자들』에서 변이는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파견자들』의 범람체들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침탈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인간 아닌 다른 것으로 변모시킨다. 그런데 『파견자들』의 행위자들은 이러한 변이를 통해 생존 역량을 극대화한 존재들이다. 이를테면 『파견자들』의 주인공 태린은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에 범람체를 수용한 인간이다. 그녀는 자아를 유연하게 만들어, 몸과 정신을 범람체와 공유하는 법을 습득했다. 이것은 태린이 다른 인간에 비해 범람체에 대한 내성이 높은 이유가 되었다. 즉 태린은 자기를 타자와 공유하였기 때문에, 타자를 몰아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태린은 자아의 개념을 양보함으로써, 자기를 지킬 수 있었다.

  한편 스벤과 같은 ‘혼합체’는 정반대 방향에서 유사한 주제를 형상화한다. 스벤은 범람체에 감염되었지만, 비교적 인간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범람체가 스벤의 두뇌가 아니라 사지에 깃들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결집된 범람체들은 의식을 갖게 된다. 그들은 생명체에 침투하려는 본능을 지키면서도, 최대한 대상의 본래의 삶을 존중하고자 했다. 요컨대 스벤은 범람체의 자비 덕분에 인간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서 범람체들은 자신이 일으키는 변화가 타자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탐색하는 주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파견자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포스트휴먼의 서사가 된다.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육체와 정신의 변형은 인간의 세계가 끝났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 세계의 버섯 인간은 다른 인간을 멸절하는 힘을 발휘할 뿐이다. 그러나 『파견자들』에서 변이는 생존을 위한 핵심적 역량이다. 여기서는 유연한 자아 개념을 가진 자만이 오래 살아남고, 윤리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태린은 자기 자신의 몸을 기꺼이 범람체와 함께 공유하고자 하며, 다른 감염자들에게도 그러한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자 했다. 범람체들의 경우 자기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며, 지구에 인간의 자리를 마련해 줬다. 그리하여 태린과 범람체는 인간 이후의 세계를 마련해 갔다. 그들은 모두 인간을 다른 종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새로운 행성의 환경과 질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멸망의 이야기는 새로운 종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됐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의 서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악역은 인간 세계의 수호자다. 태린의 보호자인 이제프는 유능한 군인이자 관료이다. 그는 수양딸인 태린에 대한 애정과, 인류에 대한 측은지심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가 지상을 탈환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러한 선한 마음의 발로다. 그는 지구를 다시 인간의 행성으로 되돌리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동족들이 지하 세계를 벗어나, 지상이 줄 수 있는 경험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동포애는 필연적으로 모든 범람체들을 제거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이제프의 이야기에는 공존의 결말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에서 ‘탈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지구의 우세종이라는 자만심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관념 자체를 상대화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세계를 상상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파견자들』은 우리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포스트휴먼의 난제를 내민다. 이 수수께끼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성찰 너머의 지점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대안적 세계를 상상하면서도, 여전히 지구의 지배종으로서의 책임감을 잃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유에 따르면 인류세, 혹은 자본세를 살아가는 인간은, 세계를 폐허로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지구 끝의 온실』을 관통하는 사유이기도 하다. 『지구 끝의 온실』에서 지구가 폐허가 된 것은 온전히 인간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중요하면서 핵심적인 행위자다. 레이첼이 만든 모스바나, 그리고 세계의 과학자들이 만든 ‘디스어셈블러’가 아니었다면 더스트 문제는 결국 지구의 모든 유기체를 살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견자들』에서 지구에 닥친 재앙은 인간과 무관하다. 범람체들은 인간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먼 우주로부터 도래했다. 또한 그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유해하다. 인간 외에 다른 동식물들은 범람체들의 기생에 적응했다. 오로지 강대한 자아를 가진 인간만이 범람체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광증을 발현한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인간과 범람체가 공존할 방법을 찾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12) 오히려 인간이 범람체의 세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적응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가깝다. 인간이 지하에 고립되어 있는 동안 “지구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범람체들의 행성”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포스트휴먼’으로 변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인정의 문제”에 불과하다. 

  즉 『파견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마침내 인간이 지배종이기를 멈추고, 비인간 종에게 지구의 권력과 권리를 이양한 시대를 상상하고 있다. 이것은 김초엽이 『지구 끝의 온실』에서 모스바나를 통해서 보여 주었던 삶의 방식이다. 김초엽은 레이첼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영광의 시대가 끝났을 때, 모스바나는 기꺼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인간이 우점종으로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김초엽은 『파견자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인간은 영광의 시대가 끝났을 때, 기꺼이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는가?’ 인간 가족과 인간성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고, “개인 혹은 작은 집단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행성 전체를 고려”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는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파견자들』, 나아가 김초엽의 SF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식물을, 자연을, 비인간을 파괴하지도, 그렇다고 하여 보호하지도 않는 세계에 대한 상상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자연에 대한 여하한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과 연대하거나 그들에 게 적응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존재다. 그럼으로써 김초엽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너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유인혁 문학연구자.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창작학부 조교수.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 1) 어슐러 K. 르귄, 최용준 옮김,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북스, 2004, 321쪽.
  • 2) 김미현,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과 테크노페미니즘-윤이형과 김초엽 소설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49, 한국여성문학학회, 2020, 11쪽.
  • 3) 연남경, 「여성 SF의 시공간과 포스트휴먼적 전망-윤이형, 김초엽, 김보영을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79, 한국현대소설학회, 2020, 125쪽.
  • 4) 김은주, 「어떠한 이야기들이 세계들을 만들고, 어떠한 세계들이 이야기들을 만 드는가?: 동시대 페미니즘과 SF의 조우로서 김초엽의 「관내분실」, 『문화과학』 111, 2022, 118쪽.
  • 5) 오길영, 「SF문학에 기대하는 것: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와 『지구 끝의 온 실』」, 황해문화 118, 새얼문화재단, 284쪽.
  • 6) 이양숙, 「인류세 시대의 유스토피아와 사이보그-‘되기’: 『지구 끝의 온실』을 중 심으로」, 『도시인문학연구』 15(1), 도시인문학연구소, 2023, 165쪽.
  • 7)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2, 323쪽.
  • 8) 복도훈, 「SF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서: 김초엽과 박문영의 소설을 중심으 로」,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창비, 2019, 56쪽.
  • 9) 이양숙, 앞의 글, 165쪽.
  • 10) 도나 해러웨이는 특히 ‘인류세’와 ‘자본세’라는 적대적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 해, 파트너들을 유능하게 만드는 관계들을 강조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 는 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 28쪽 을 참조.
  • 11) 김초엽, 『파견자들』, 퍼블리온, 2023, 71쪽.
  • 12) 이러한 특성을 심완선과 소영현은 ‘대안적 공존’이라고 명명했다(심완선·소 영현, 「장애학과 조우하는 SF: 범람하는 균사체 상상력과 변이·공존·공진 화」, 문학웹진 림 LIM(https://webzinelim.com/2803; 2024. 01. 31.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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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적의 아이를 키워라 ― 『에너미 마인』

『에너미 마인』과의 만남은 뭐랄까…… 운명적이었다. 때는 전 국민을 잠 못 들게 한 12월 3일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난 어느 평일 저녁.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니 늘 눈이 피로했고, 집중력도 떨어져 독서는커녕 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매일매일 현실의 뉴스에 압도되어 실핏줄이 바짝 선 눈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봤더랬다. 가장 나를 괴롭혔던 건 ‘지금 소설 같은 걸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프리랜서인 나에게는 정해진 마감 날짜가 있었다. 도저히 가상 세계에 몰입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시시각각 디데이는 다가왔다. 나는 점차 초조함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글을 써야 한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일단 잃어버린 텍스트의 감각부터 되찾을 목적으로 독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집 소파 옆에는 사거나 선물 받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한참을 살펴봤는데도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내 신경은 계속 휴대폰과 그날 이후 ASMR처럼 틀어 놓는 뉴스 채널으로만 쏠렸다. 이러다가는 또 한 줄도 못 읽겠다 싶어서, 일단 눈을 감고 책탑을 더듬다가 아무 책이나 붙잡았다. 그게 바로 이 샛노란 표지의 『에너미 마인』. 무려 1979년에 쓰인 SF이다. 처음엔 내 손으로 골랐지만 우려스러웠다. 하필 지금, 급한 작업에조차 집중을 못 하는데 가상의 시대, 미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외계인 소설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중에 좀 더 심적 여유가 있을 때 읽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드라운 표지의 감촉에 이끌려 책을 펼쳤고, 단숨에 몰입해 그날 새벽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은 세상의 어떤 신묘한 흐름이 나에게 이 책을 만나게 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가 동생 시험 날에 예수님이 상장을 하사하는 꿈을 꿨던 것처럼……. 난 아직 종교가 없지만. 소설이 공개된 1979년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냉전 시기다. 그런 국제 정세를 비유하듯 소설 안의 두 종족, 드랙과 인간 사이에도 긴 전쟁이 진행 중이다. 드랙은 손가락이 세 개에 노란 피부를 가진 외계 종족이다. 우리의 주인공 군인 윌리스 데이비지는 전투 중 적군인 제리바 쉬간과 함께 무인 행성 ‘파이린 4호’에 조난 당한다.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대입해 보자면, 데스 매치 중이던 미군과 소련군이 함께 무인도에 불시착한 셈이다. 행성에서 눈을 뜬 두 존재는 서로를 인식하자마자 다시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곧 괜한 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건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제 두 종족 간의 원한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인간과 드랙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굴을 아늑하게 꾸민다. 낮의 노동 후에는 긴 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즐길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무료함을 달래 줄 만한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무인도와 달라 파도에 떠밀려 오는 새로운 아이템조차 없다. 날씨 변화 이외의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공간에서 오로지 두 존재의 회상만이 지루함을 달래 준다. 우리의 인간 주인공 데이비지는 외로움에 취약하다. 적군이었던 쉬간마저 없었으면 분명 미치거나 자살했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쉬간 역시 마찬가지다. 두 종족은 완전히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세월도 다르지만 절대적인 고립은 양극단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리바는 데이비지의 언어(영어)와 그의 농담을 이해하게 되고, 데이비지는 제리바의 족보와 드랙의 역사를 매일 밤 경청한다. 핏줄의 기록을 달달 외는 게 이 드랙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므로, 다행히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극 초반부 전개이다.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다. 고난은 계속된다. 드랙의 또 다른 특성은 스스로 번식이 가능한 양성체라는 점이다. 제리바는 삭막한 행성에서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 중 사망한다. 데이비지는 쉬간의 부탁으로 적이자 친구인 그의 배를 찢는다. 그렇게 샛노란 드랙 아기 자미스가 태어난다. 데이비지는 친구에게 섣불리 약속한 대가로 이 외계인 아기를 키워야 한다. 생존기에 육아가 더해진 것도 고달픈데, 자미스는 어마어마하게 발육이 빠르고 호기심도 왕성하다. 자미스는 데이비지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제 예정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삼촌,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나는 앉아서 자미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다른 두 손가락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데이비지는 너와 내가 어떻게, 왜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왜 이 행성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는지도 알려 주어야 한다. 쉬간과의 전투와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유리된 행성에서 태어난 자미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이 행성 밖에서도 ‘삼촌’인 데이비지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 자미스는 언젠가 행성을 떠나면 통역사가 되어 전쟁을 끝내게 돕고 싶다고 말한다. 두 존재의 애절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인 인간과 드랙 아이, 대척점의 존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소설은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안에서 개인과 개인이 공유한 시간은 상황이 급변한다 해도 동영상 파일처럼 간단히 삭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은 결말이 도달하도록 두 종족의 평화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종족 안에서도 깊어 가는 혐오와 차별의 현상을 짚어 낸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홍보 문구에 적혀 있듯이, 『에너미 마인』은 무려 ‘전 세계 최초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동시에 석권한 소프트sf의 걸작’이다. 이렇게 요란하게 상을 휩쓸면 기대감보다는 ‘어디 한번 보자.’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집중력 부족에 더불어 조금 삐뚤어진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결국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SF라는 장르와 외계 종족과의 전쟁이라는 오락적인 배경으로 작가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의 가치, 공존에 대해 말한다. 호불호 없이 흥미로운 전개는 다른 종족의 캐릭터에도 쉽게 이입하게 하고, 매력적인 대화와 문체는 독서에 속도감을 더한다. 나에게 SF는 정말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어려운 장르다. 스스로도 정확히 취향을 가늠할 수 없다. 어렸을 땐 스페이스 오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마블 시리즈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가장 좋은 걸 보니 아닌 것 같다. 절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작품에 심장이 직격타를 맞을 때도 있고, 분명 내 취향일 거라 생각하고 접했는데 그저 한편의 과학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작품도 있었다. 복불복이 크다보니 주변의 추천을 받은 게 아니면 선뜻 시작하기 꺼려진다. 그런 와중에 만난 『에너미 마인』은 쓰는 욕망을 되찾아 주는 것은 물론 어지러운 세계에서 소설이 가지는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sf 장르에 장벽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한다. 그렇게 한밤의 독서가 끝나고……. 나는 다음 날 이제 다시 힘내서 쓰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과연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 tmi. 이 리뷰 원고도 지각함…….

격월간 릿터 조예은 갈등sf장르문학리뷰소설전쟁 2025
기혁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3D 렌티큘러』(천년의시작, 2024) 임경숙,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천년의시작, 2024)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시집, 『3D 렌티큘러』, 천년의시작, 2024. - 임경숙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 천년의시작, 2024. 기혁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읽고 ‘서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의 본령’ 혹은 학술적으로 합의된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난해한 실험성, 자폐적 세계 인식에 따른 파편화와 산문화 경향의 반대편에 선 작품을 언급하기 위해선 진정성과 소통 가능성, 최소한의 리듬감 등을 동시에 충족하는 ‘가정된 일관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실험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 그 형식에서 첨단의 사회성을 도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반면, ‘서정시’ 혹은 ‘정통 서정시’ 등으로 분류된 작품은 대체로 형식보다 내용을 우선시함으로써 인간(자연)의 본성이나 보편성 등 원론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는 형식과 내용, 형식과 사회의 불화를 해소된 것으로 간주하는 서정시의 독법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로 인해 개인적 경험과 감상에 머무른다거나, ‘지금, 여기’의 현실과는 거리감을 유지하는 시풍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다만 서정성이 강조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내부적으론 ‘가정된 일관성’의 이탈과 유지가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새로운 시적 형식이나 긴장감 있는 표현에 대한 도전 의식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비루한 삶의 슬픔이나 고통의 진정성만을 읽어 낸다면 서정성의 범위 내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시도마저 평면화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전통 장르인 시조의 형식을 갖춘 서정화의 『3D 렌티큘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여는 시로 배치된 「천수암 인생네컷」은 시집의 서문 격으로 ‘자연’이 상실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접근하고자 하는지 전반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형형색색 태어나는 행리단길 간판들 영원 같은 전경으로 변하고 있을 전생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 움직이는 손, 전망은 어딘지 신점 같은 면이 있지 문턱 낮은 입구로 통과하는 호기심들 이음매 빠진 시간 앞 네 개의 컷 네게로의 컷,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 환생한 천수관음보살 수행같이 넓어지는 행렬과 행간 사이 세상과 말을 걸며 압축된 암호를 풀고 나를 올려놓는다 - 「천수암 인생네컷」 전문  인용한 시편의 1수 초장의 “행리단길”에는 ‘수원 행궁동은 점집 타운이었으나 점집이 나간 자리에 다양한 가게들이 입점되었다’는 각주가 붙어 있다. 신과 소통하던 무당이 사라진 자리에 상업적 논리에 따라 존립이 결정되는 ‘맛집’ 등이 들어섰을 저녁 풍경은 시의 창작 동기이자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설 조로 늘인 1수 중장에서 시인은 “행리단길”의 “전생”이라 할 수 있는 ‘점집 타운’의 풍경을 겹쳐 봄으로써 “형형색색”인 “간판”의 불빛과 사이사이의 어둠 너머로 “천수관음보살”의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과 “움직이는 손”을 떠올린다. 과거세(過去世) 중생을 구원하던 “천수관음보살”은 신이자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로서 과거 ‘점집 타운’의 무당을 매개로 공존할 수 있었으나, “인생네컷”을 찍는 방문객들의 “호기심” 앞에선 한낮 미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자연’에 동화될 수 있었던 마지막 매개체(“이음매”)인 무당이 사라진 시공간 속에서 본성의 박탈과 은폐를 인지하지 못한 계몽된 주체는 통제된 사회가 요구하는 “네 개의 컷”에 맞춰 동일한 셀카를 찍는다. 동시에 구속의 결과물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재생산함으로써 모든 행위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네게로의 컷”) 순환 구조에 갇히고 만다.  여기서 시인은 문명을 비판하거나 도래하지 않는 과거를 추억하는 대신 모호한 전언을 남긴다. 1수 중장의 마지막 문장인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에서 시인은 구속의 산물인 ‘셀카’(“이미지”)가 사실상 어둠과 빛의 예술인 사진 작품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 “행리단길”의 야경 “이미지”에서 과거의 ‘점집 타운’과 “천수관음보살”을 겹쳐 보는 시적 화자(예술가)의 응시는 “이미지” 자체에서 도래한 것이 아니라 계몽 사회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재현 불가능한 자연의 존재 방식인 ‘자연미’는 예술 작품 속에서 계몽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불러일으키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모사한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 진정한 ‘자연미’를 담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비록 ‘셀카’라 할지라도 어떻게 향유되느냐에 따라 부여할 만한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리면서 시작된 시적 화자의 자각은 ‘숭고’로 이어진다. “천수관음보살”의 숭고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 주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간 스스로 “운명도 바꿔 놓을” 수 있도록 지배권을 내려놓음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과거세 중생을 구원하는 “천수관음보살”이 미래 어느 시점에서 ‘지금, 여기’를 바라본다면, 구원이란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자연)을 구속할 운명에 놓인 계몽된 주체가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일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1수 종장의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는 앞서 언급한 아도르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서, 가닿을 수 없는 ‘자연’과 계몽적 주체의 화해가 인공물인 예술 작품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반영된 가상의 영역이다.  이어지는 2수에서 시인은 별다른 부연 없이 3장 전체를 할애해 예술가로서의 각오를 드러내고 있는데 1수에서 전개한 자각의 과정과 호응 관계를 이루려는 의도로 짐작된다. 예술가의 작업이란 결국 “행렬과 행간 사이” 침묵뿐인 “세상”(자연)과의 대화이며 자연의 “압축된 암호”(‘자연미’)는 작두를 탄 무당이 그러하듯 이성과 논리가 아닌 “나를 올려놓”고 대상과 동화됨으로써만 해독의 여지를 갖는다. 말도 되지 않는 말과 함께 언어의 들판을 횡단하면서 시 속에 한참 빠져 말무리 가까이에서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의 시는 서툰 말만큼 아직도 미숙한 것임을 깨달았다. 끝없이 펼쳐진 언어의 광야, 그 속에서 말과 시를 구분할 때까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었다. 언어의 뿌리를 내려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말의 나무. 그렇다. 나무의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 「시인의 말」 부분  하지만 시가 문자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의 소산이라면 가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셀카’가 예술 사진으로 향유될 수 있는 가상의 영역에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용한 「시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문명 이전과 같은 완전한 동화는 “꿈”에서만 가능하다. 도구화된 일상어를 사용하는 한 “말과 시”를 구분해 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은 실패를 향한 수많은 시도 속에 잠재된 가능성이므로, “말의 나무” 역시 가상이 현실로 육박할 때의 ‘마법’처럼 휘발하면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마법의 무대 뒤편에는 무수한 실패로 쌓아 올린 “나무의 무덤”이 버티고 있다. 무력감에 빠질 법도 하지만 시인은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은폐하는 대신 창작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해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시집을 살펴보면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긴 자의 허무는 보이지 않는다. AI, 생체공학 등 문명의 발달에 따른 상실된 인간 본성을 다루거나, 자연이 부재한 세계를 채우고 있는 남겨진 존재에 대한 여러 감정을 노출하며 현실을 직시한다. 표제작인 「3D 렌티큘러」를 비롯해 「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호모 라보란스 칸탄스」 「날아가는 침대처럼」 「Butter Book」 「영화 경로당」 「봄날」 등 시조 장르에서 익숙한 소재와 낯선 소재가 혼재되어 있다. 또한 텍스트의 자리에 특정 기호를 콜라주(collage) 하거나(「휴지통」), 여백의 구분을 회화적으로 활용하는(「평화 인쇄사」) 실험적인 형식도 눈에 띈다. 소재가 혼재된 만큼 다양한 어투를 구사하는데 과도한 비판이나 냉소, 관조나 회상에 스며드는 ‘잠언투’ 등은 절제되어 있다. 형식적인 면에선 대체로 시조의 3장 중 중장을 변형한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통념상의 시조 장르와 달리 당사자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의 괴리에 대한 시인의 대응은 무엇일까? 열거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개별 작품의 면면은 ‘서정성’의 범위 내에 있다. 정형시의 제약과 종장의 묘미를 살리는 시상 전개의 관습 등도 유지된다. 실험적인 작품에서조차 시조의 3장 형식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는 장르적 이탈이나 의도적인 실험이 ‘자연미’를 환기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인식을 내비친다. 중요한 것은 형식을 유지하거나 이탈하려는 예술적 행위가 인과적 논리를 언급할 만큼 경직될 때 계몽의 산물로 추락한다는 점이다. 현실과 가상의 괴리 앞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예술적 형식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올랐어요 눈부신 디테일의 볼륨은 투명해져요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더군요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사이 루프탑이 솟아나고 시간은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편의점 간판처럼 변해 가도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어요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네요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 성 사이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416 생명안전공원은 노란 리본을 수놓았어요 사라진 그 아이들이 굳어 가는 걸 보았어요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켜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 바다를 증명하려던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회멸이 되지 않도록 오늘의 뒷면과 앞면을 이제 당신이 이어 주세요 - 「3D 렌티큘러」 전문  주로 장난감이나 각종 카드, 케이스의 장식으로 사용되는 “3D 렌티큘러”는 빛의 각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사자의 모습이 정면이라면 보는 각도에 따라 포효하는 모습으로 변함으로써 평면 위에 입체감을 주게 된다. 그런데 “렌티큘러”의 작동 원리1)는 동굴벽화에서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벽화를 그리고 신을 호출하던 주술사(예술가)에게 “렌티큘러”의 원리는 눈속임이 아니라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물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신성한 작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그러한 작업은 이상적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현대 예술가의 “3D 렌티큘러”는 실재로부터 소외되어 더 뛰어난 눈속임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인다. 앞서 열거한 “렌티큘러”의 쓰임새가 말해 주듯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작은 유희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주술사의 작업 방식을 단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예술 형식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오르고 “3D 렌티큘러”가 작동하는 순간만큼은 고대 주술사가 그러했듯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는 ‘마술’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종이에 적힌 시조가 입체의 ‘자연미’를 드러내는 순간과 겹친다. 천(天)·지(地)·인(人) 3장의 기본 형식은 ‘자연미’를 재현해 본 기억이 잠재된 형식이다. 비록 근대 이후 재발견된 ‘전통’으로서 ‘자연’과의 화해를 가정할 뿐이라고 해도, 고대 주술사가 그러하듯 진실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눈속임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동화(同化)를 위한 움직임이다.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동화의 움직임이 없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렌티큘러”라 해도 입체를 보여 주지 못한다.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다는 기대와 믿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고개를 돌려 가며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는 현실의 이면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성 사이”에서 시선의 각도를 달리할 때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물으며 비로소 ‘자연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의 시인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겹쳐 봄으로써 계몽된 세계의 명령(‘조난 시 안내 방송에 따라 행동하라!’)이 ‘자연’을 정복하지도 인간을 구원하지도 못했던 사건을 상기한다. 수로의 특성을 분석하고, 침몰의 원인을 찾고, 재발 방지를 위한 기술을 모색하는 가운데 “의문(계몽)의 시간”은 모든 사고의 책임을 ‘자연’에 전가한다. 하지만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키게 할 뿐 “바다”도 희생된 아이들의 ‘자연’도 “증명”하지 못한다. 시인에게 ‘자연’과 계몽의 불화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이므로, ‘자연미’ 역시 “불투명”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앞선 질문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시인의 기대와 믿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장 형식의 훌륭한 “3D 렌티큘러” 장치를 지닌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의 역할은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기는 것도, ‘형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 정신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위장된 화해를 경계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은 “바다”가 불타 버리듯 이내 성질을 뒤바꾸고 “회멸” 되어 버린다. 엄밀히 말해 시인은 현실과 “3D 렌티큘러”의 가상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공존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동화를 꿈꾼다. n개로 분절된 세계의 모습과 입체 사이에 위치하는 볼록렌즈처럼 “오늘의 뒷면(과거)과 앞면(미래)을” 조율하고 매개함으로써 계몽된 주체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모조품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아르고스처럼 백 개의 눈을”(「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뜨고 “늦은 봄, 개의 목줄은(이) 아직도 팽팽”(「봄날」)해지는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곧 괴물이 되어 버린 계몽의 능력을 온전한 인간의 시선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일 것이다. “백 개의 눈”으로 걸러 낸 생의 이유를 벼르고 별러 다시금 이유로 남겨 두려는 응시. 이것이 바로 서정화의 ‘서정’이자 동일자들의 세계에서 비동일자로서의 시인에게 주어진 동화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임경숙의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는 별다른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삶의 진정성을 개진한 흔적이 역력하다. 연과 행의 구분에서도 낭독을 염두에 둔 듯 자연스럽다. 이것은 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중요시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추전 골목”의 “가교리 언니”와 “태봉 할매”(「봄의 좌판」), “한낮에도 셔터가 내려진 문구점 신발 가게 옷 가게 레코드 가게”(「중동 골목 147」), “베트남 여인, 예쁜이 린이”(「공심채」), ‘공곶이 수목원’을 처음 일군 “아흔두 살 사내”(「공곶이 수선화」), 포로수용소의 “아버지”(「1953년 거제도」) 등등 구체화된 인물과 배경엔 아픈 전사(前事)가 깃들어 있다. 낡고 손때가 탄 사진첩을 꺼내듯 사연을 적어 내는 시인에게 그것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무게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북쪽은 응달이었다 산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하지만 바닥은 늘 보이지 않는 블랙 아이스가 깔려 있다 길은 좁아서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어 모든 그림자는 강물 쪽으로 기운다 위태로운 바퀴는 자주 경계선을 넘었다 어미는 아이 하나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켰지만 바람 잘 날 없는 그 방에선 자주 불을 꺼뜨렸다 길 없는 길로 접어든 순간부터 운전대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가끔은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날에는 가늘어진 손목에 과부하가 걸려서 떨리기도 했다 한동안 밖으로 폭주하던 아이가 이제는 골방으로 들어가 성장통이 끝난 저를 잠가 두고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었다 어미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빈다 - 「결빙 구간」 전문  인용한 시편 역시 불우한 환경을 살아온 모자(母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블랙 아이스”가 깔린 아슬아슬한 삶의 현장에서 시적 화자가 기댈 곳은 없다. “아이 하나에 희망”을 걸고 견뎌 보지만 “길 없는 길”처럼 막막한 일상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브레이크”를 잡은 만큼 “아이”는 “밖으로 폭주”하다 마침내 자신을 “골방”에 가둬 버린다. 그토록 피하고자 애쓰던 “블랙 아이스”의 냉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미의 언어”를 얼리고 “성장통이 끝난” 다 큰 “아이”의 마음까지 얼려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게 만든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어미”의 모습은 시린 손이 서러운 “어미”의 모습으로도, 참회의 합장을 대신한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서정시’로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시 쓰기’의 여정과도 겹쳐 읽을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닌 시인에게 시 쓰기란 “결빙 구간”을 지니듯 조심스럽고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는 성질일 테다. 착상 이후엔 시인의 의지대로 전개되는 듯했으나 물러나 보면 “모든 그림자는(가) 강물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인다. “강물”의 ‘자연미’와 ‘역사’는 손쉽게 재현되지 않는 것이어서, 형식과 관습의 “경계선을 넘”고 ‘길이 아닌 길’을 찾아 “브레이크를 밟”기도 한다. “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한 그늘진 현실은 그곳이 어디든 “골방”처럼 주체를 고립시키고, 시인은 자식 같은 작품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작은 “등불”을 “햇살” 삼아 고립된 현실을 견뎌 내고자 한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는 기교가 능숙해질수록 자판을 치는 “손목”이 상할 뿐 “강물”을 끼고 도는 ‘진실’은 멀어진다. 그렇게 “폭주”와 자폐의 “성장통이 끝난” 작품을 완성했으나 이제는 작품이 시인의 “언어”를 거부하는 난감한 사태가 발생한다. “아이”만을 생각하는 “어미의 언어”조차 그것이 ‘시를 위한 시’가 될 때 생기를 잃고서 “냉동고에” 쌓아 놓은 얼음덩어리가 되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부로 “문”을 두드리지 않는 시인의 자세에 있다. 시인은 “성장통이 끝난” 청소년을 인격체로서 대하듯이 작품 역시 하나의 ‘자연’으로서 존중한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시적 화자의 행동은 변명이나 체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세계의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 자들이 그러하듯 “문”이 열리는 순간을 믿고 견뎌 내는 것이다. 그러한 견딤이 추구하는 바는 언어적 소통이 아니라 삶을 견뎌 낸 자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의 재현을 가리킨다.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데 가장 아름다운 손님이 오실 때에는 만사를 제치고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 절정이라고 - 「꽃의 초대」 부분 도시에서 세상 소식 물고 오는 박 씨의 차 안이 궁금하다 마땅히 살 물건도 없으면서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다 …(중략)… 시속 삼십 킬로 이하, 저속의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양손 가득 봉지 봉지 들려 있지만 그것이 꼭 필요했던 것인지 가물거린다 …(중략)… 바람 소리만 채우는 빈 밥그릇 몰고 다니는 구산댁 멍구도 낡은 트럭 지나가는 소리를 알아보고 덩달아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날이다 - 「노인 보호 지역」 부분  시집 전반에 걸쳐 세련된 도시의 모습보다는 시골 변두리의 풍경과 각종 자연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용한 시편들에서 보여지듯이 소재적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어딘지 낡은 시어가 동원되어 있고 시상의 전개에서도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그런데 시인이 재현하고자 하는 ‘자연미’는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에서 도래한다. 이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거기”의 풍경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의 절정”처럼 ‘지금, 여기’의 ‘양말’로는 대체 불가능한 공감의 눈높이가 선행되어야만 “손”으로 “꽃”을 만지는 합리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꽃”이 먼저 “손”을 만지는 ‘한순간의 절정’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화되어 관리되는 현대 사회에서 계몽과 자연의 화해는 가상이겠지만, 지난날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 소비를 할 수 있었다. 인용한 두 번째 시편에 드러나듯이 ‘판매자’와 ‘소비자’의 개념으론 설명할 수 없는 관계 맺기가 가능했고, 이심전심(以心傳心)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은 감정을 언어 없이 소통해 본 경험도 있다. 그러한 진심은 “구산댁 멍구”에게까지 전달되는데 ‘자연’의 언어는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말 없는 개의 외침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루한 농촌의 풍경이나 소외된 존재의 사연 등은 그것이 번화한 도시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의 진실에 가깝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임경숙의 이번 시집에서 그것은 공감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고, 말 없는 개의 외침이 그러하듯 시인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말 걸기’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목줄 풀린 “푸들”(‘자연’)이 수풀로 내달리는 대신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 낯선 풍경처럼(“급하게 누른 경적에도/ 푸들은 소리 나는 방향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다”, 「선을 지키다」) “푸들”의 ‘자연’은 우리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의도치 않게 ‘자연미’를 드러내곤 한다.  대개의 서정시가 ‘일인칭 자기동일성의 원리’를 기본으로 ‘자연’을 전유해 왔다면, ‘자연미’는 대상을 전유하는 과정에서 뒤따르는 억압과 왜곡을 넘어서는 영역을 가정하는 한에서 재현을 기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정된 영역이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든 ‘비동일자’로서의 시선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결빙 구간」의 “어미”와 “아이”의 관계처럼 동일성 내부에 존재하는 비동일성의 특질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가시’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양립 가능성을 여는 시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표제작에 해당하는 「가시 많은 생」에서 짐작되듯이 “가시”의 은유는 중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생선의 경우 수압에 저항해 몸의 형체를 유지하고 장기를 보호하는 ‘뼈’를 뜻하기도 하고, 요리되거나 타자의 소유물인 상태에선 이물질인 “가시”로 표현되기도 한다. 식물의 경우 보호를 위해 진화한 잎사귀를 떠올릴 때 그것은 본체(本體)의 일부지만, 꽃과 열매만을 취하려는 외부적 입장에선 접근을 방해하는 이체(異體)로 간주 된다. 도마 위에 준치 몇 마리 어머니 칼질 소리가 칼칼하다 검푸른 살 속에 무수히 박힌 가시가 납작하게 혼절해 가는 동안 살이 많은 물고기도 많은데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랐을까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들 썩어도 준치는 찬란한 맛이었다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진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 목에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럽다 뜨거운 완자 몇 알 삼키다가 맛있는 생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가시가 박혀야 할까 내가 삼킨 가시는 몇 줌이나 될까 - 「가시 많은 생」 전문  살에 “가시”가 많은 생선인 “준치”는 대체로 “가시”를 발라 요리한다. 그러한 경우 발라낸 “가시”는 쓰레기로 취급된다. 하지만 “어머니 칼질”로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지게 되면 버릴 것 없이 “준치”의 “가시”까지 온전하게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인 정확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경제적인 요인이나 음식에 대한 추억 등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는 합리성 너머에 위치한다. “어머니”와 “준치” 사이의 비합리성을 공감의 형식으로 재현하려는 시인은 3연에서 “준치”의 본래 모습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처럼 “가시”가 ‘뼈’로 인식될 때 “준치”는 크기와 맛으로 규정되는 세계를 벗어난다. 그러한 가상의 영역에서 시인은 생의 잔뼈가 지금처럼 굵지 않았던 “어머니”를 호출하는 것이다.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처럼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러웠을 소녀의 ‘자연’과 “준치”의 ‘자연’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만난다.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이는 “어머니”의 사연은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 칼질 소리”를 통해서 비로소 전달된다. “찬란한 맛”이란 억압과 고통을 견뎌 낸 자가 자신을 닮은 자식에게 내미는 소통의 시도이고, “맛있”다는 시적 화자의 반응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자연’을 경험한 자들과의 소통은 형체를 알 수 없게 갈린 “몇 줌”의 “가시”처럼 소멸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관성적으로 “삼킨” 무수한 “가시”가 실은 뭉개 버린 ‘자연’의 말 걸기가 아니었을까 자문해 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에 빚진 시의 부채이며, 끊임없이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와 “준치”가 공존하는 가상을 깨트리는 대신 현실 속 “뜨거운 완자 몇 알”만을 ‘자연’에 대한 시 쓰기로 전유한다. 이를 통해 동일자로서 포섭되지 않은 “어머니”의 ‘자연’은 또 다른 시편(「외면」)에서 다시금 말을 걸 수 있다. “준치완자탕”을 끓여 주던 다정한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는 것도, 병 수발에 지친 딸이 “어머니”처럼 생의 잔뼈가 굵어지는 것도, 그런 딸의 “하소연을 단칼에 베어 내듯/ 누가 그렇게 살랬니?”(「외면」) 매몰차게 대하는 것도 모두 ‘자연’의 말 걸기라고 할 수 있다.  시집 전반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처 입은 여성과 노인, 삐뚤게 커 버린 청년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 가해자이자 역사의 피해자로서 존재하는 아버지까지 이분법적 구도와 진부한 서술 방식, 후반부의 단정적인 감상 등 얼마간의 흠결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산까치도 먹고/ 고라니도 먹고/ 밭 임자도 먹는”(「공평」)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견딤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그러한 시작(詩作) 자체가 ‘가시’일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한 식견으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미학에 기대어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도르노를 경유하게 된 것은 ‘전통’과 ‘자연’에 대한 조지훈의 문장에서 큰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2) 시에 대한 사랑이 생성해 내는 자연이야말로 ‘서정’의 본령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평에 어울리지 않게 해석에 치중한 것은 ‘서정’에 대한 선입견을 걸러 읽고 싶은 독자로서의 소망임을 고백한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자연에 대한 공포가 고대 주술사로 하여금 미메시스를 통한 극복을 모색하도록 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과 더불어 외부에 대한 불안이 추상 충동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주장3)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대인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탄핵 정국에 불안을 느끼는 ‘지금, 여기’의 독자들 역시 예술이 어떤 형식적 미학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불안과 공포의 극복을 위해 어떻게 추상과 미메시스를 오가며 ‘운동’했는가가 훨씬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운동성이 서정의 전통에 잠재되어 있다면 ‘자연미’의 재현이란 존재론적 닮기를 넘어서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전통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자유를 얻을 때, 우리는 “공기의 방식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물리적 그물코」)는 시조를 읽을 수 있고, “가끔은// 제 가시(시)에 찔려// 흠칫 놀라”(「양심」)는 서정 시인의 고백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왜 시문학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어째서 무수한 시편들이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지 ‘서정’의 본령을 둘러싼 질문을 좀 더 우리의 삶 쪽으로 밀어 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1) 계단처럼 수직과 수평에서 보이는 면이 각각 다를 때, 두 장의 그림을 계단의 수만큼 n등분한 후 수직면과 수평면에 잘라 붙이고 계단의 위쪽 혹은 아래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면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이 달라짐으로써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계단이 아닌 평면에서 구현하기 위해 상이 확대되어 보이면서 관측하는 각도에 따라 표시하는 지점의 위치가 변하는 작은 볼록렌즈를 붙인 것이 오늘날의 렌티큘러다.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도 벽면의 굴곡과 횃불이 비추는 방향을 활용한 원시 렌티큘러가 발견된다. 2) “참뜻의 전통은 언제나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을 고심참담한 노력 속에서 창조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생명(詩生命)의 비의(祕義)를 체득하려면 먼저 시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말로 말하면 시생명의 본질은 ‘시를 사랑하는 인생 속에 내재(內在)하여 생성(生成)하는 자연(自然)’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지훈, 「시의 생명」, 『조지훈 전집 2: 시의 원리』(홍일식 외 편), 나남, 1998, 20쪽. 3) “감정이입의 자극은 인간과 외부 현상 사이의 완전무결한 신뢰 관계를 조건으로 하는 반면, 추상의 자극은 외부 현상들에 의해 유발된 인간의 내부가 매우 불안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 영역에서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색조와도 관련된다.” 도라 바이에, 『추상예술』, 문고판, 1980, 21쪽(알랭 봉팡(김은정 옮김), 『추상미술』, 한길사, 2000, 15쪽. 재수록)

계간 시작 기혁 서정시시조현대시조자연자연미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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