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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 2024년 여름호(제76호)

혼미의 사막에서 맞이하는 연둣빛 시의 일출

김규성 시, 산문, 문학평론

2000년 『현대시학』에 시 「달동네 2」 외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2015년 송순문학상 우수상, 2021년 디카시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저서로는 시집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신이 놓친 악보』,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 『중심의 거처』와 비평집 『남도 시의 현재와 미래』, 산문집 『산들내 민들레』, 『뫔』, 『모경(母經)』, 『산경(山徑)』 등이 있다. 창작 활동과 함께, 이태관 시집 『어둠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을 비롯하여 약 85편의 시평 및 시집 해설을 집필하며 활발한 비평 활동을 펼쳐왔다. 송순문학상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다양한 인문학 주제로 강의 활동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미래지향적 리얼리즘과 곡진한 서정의 혼융

-정우영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창비, 2024)


1

  리얼리즘 시와 서정시의 경계가 선명하던 시기가 있었다. 모더니즘 시인으로 분류되는 김수영이 적극적 사회참여를 통해 리얼리즘의 영역을 넓히고 그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던 즈음이었다. 그 시기, 소위 ‘참여시’로 일컬어지던 ‘한국적 리얼리즘 시’는 종전의 패턴을 안일하게 답습하던 서정시와는 분위기와 결이 다른 결기와 지향성, 사회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조는 모더니즘이, 급격한 세계화 속에서 다양성과 난해성을 동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격랑에 흡수되는 것과 동시에 무기력하게 퇴조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한국 의 현대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수명을 대체할 새로운 사조가 절실히 요청되는 기로에서 서성이고 있다.   여기에서 대체재의 하나로 소환당하는 리얼리즘 시와 서정시는 시대적 소명에 맞추어 새롭게 그 기능과 성향을 재정비해야 할 필요성을 안겨 준다. 그런데 최근 이 부분에서 참신한 경향의 시가 눈에 띈다. 리얼리즘 시와 서정시의 경계를 허물어 혼연일체를 이루고 현실과 이상, 감성과 이성을 흠집 없이 아우르고 있는 시풍이다. 이는 불안과 혼돈, 난해의 안개를 떨치고 시 본연의 순수 기능을 되찾아 미래 시문학 발전에 기여할 소중한 시적 자산이다. 정우영은 이번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에서 그 진수를 선보이고 있다.   흔히 한국적 리얼리즘 시의 특징으로 사회비판이나 저항 등, 적극적 현실 개선의 의지를 꼽는다. 참여시로 약칭되던 이 시운동은 혹독한 군부독재,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민주주의의 신장, 사회정의와 민생 복지 구현에 크게 이바지했다. 외형상 일정 부분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오늘날의 정치문화도 내부적으로는 아직 숱한 미해결의 과제를 안고 있으며 사회, 경제적 부조리와 불평등 구조는 여전히 심각한 미완의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시의 현실참여는 일시적 요구가 아니라 수시로 제기되는 시대적 소명과 결합해 꾸준히 수행해야 할 상시적 필요조건인 것이다. 이에 발맞춰 정우영 시인은 비문飛蚊과 이명으로 점철된 혁명의 뒤안길에서 다시 예전의 기억을 소환해 자칫 느슨해지려는 의지를 새롭게 다진다.


입김이 채 마르기도 전에 눈엔 비문飛蚊이 떠다니고 귀는 떠르르 울린다. 아닌가 하고 숨 고르 는 새, 혁명은 심장에 있다고 당신이 울부짖는다. 살구꽃 그늘 고이는 토방 마루에 앉아 꽃타령이 나 하려던 눈과 귀가 씰룩인다. 분분히 날리는 꽃잎처럼 터지는 살육들,

잊지 않기 위하여.
받아 적기 위하여.
차마 부끄럽고 서투른 항거일망정
눈과 귀가 어지러운 건 이 뜻이었구나.
  -「징후들」 부분

 

시인은 잊지 않기 위하여.”받아 적기 위하여.”라는 구절에 마침표를 찍어 그 의미를 강조한다. “눈과 귀가 어지러운 건 이 뜻이었구나.”에도 어김없이 마침표는 긴한 화두의 방점처럼 찍힌다.

 

2

  종전의 참여시가 거대담론에 치중한 데 비해 이제는 그 힘이 세부 과제를 일상생활과 밀착시켜 실천하는 미시적 리얼리티에 모아져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시의적절한 참여의 목소리가 시 본연의 질적 향상과 동반해서 발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토대로 정우영은 거대담론에 뿌리를 둔 미시담론의 건강성을 추구한다. 예컨대 자연친화적 서정과 인간 친화적 리얼리티가 사이좋게 일심동체를 이룬다.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드시더군요. 설거지한 그릇 널어 바짝 말리고는,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듬뿍 받는 거에요.

(중략)

함께 사는 소양이 하고만 먹기 아까워서 여기저기 기별합니다. 냥이야 제비야 집 나간 모란아, 밥 먹으러 와, 내가 맛있는 햇살밥을 지었단다.
  -「햇살밥」부분

 

순명順命과 평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정우영은 자연의 위력을 빌린다. 생명의 원천인 자연에 인위의 위력을 가하기 바쁜 현대문명과는 대조적이다. 그의 시는 사회적 공동체의식 에서  걸음  나아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자연과 생명의 합창을 구가한다. 그리고  정화의 씻김굿을 통해 비로소 벅찬 평범 준하는 평온과 해방에 이른다.

 

잘 돌아왔다, 아이야.
여기가 온통 네 집이다.
울고 웃고 떠들며 악몽을 씻으라.
찢긴 얼룩은 닦아내고
추앙보다 벅찬 평범을 맘껏 누리자.
  -「여기가 온통 네 집이다」부분

 

 

4

표제시 순한 먼지들의 책방에서 화자가 지시하는 먼지는 통상의 먼지와는 의미의 결이 른 상징어다. 화자가 배송한 먼지가 머물 공간은 책방이며 그 수신인은 책방 주인이다. 책방에서 먼지는 갈수록 격감하는 독서 인구를 하는 우려의 일단일  있다. 반면 책의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독자의 발길이 이어질 , 먼지는  숨은 동인動因에 비견되는 순기능  수도 있다.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
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
먼지는 가서 오래 묵을 거야.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 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을 끌 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

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하잖아.
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

(혹시라도 기역아 먼지라니, 곧 망하라는 뜻이냐고 언짢을 것도 같아 귀띔하는데, 우리가 먼지 의 기세를 몰라서 그래.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
  -「순한 먼지들의 책방」전문


  이 시에서 주목할 점은 “순한 먼지”라는 표현이다. “순한 먼지”는 부패와 오염으로 점철된‘ 더러운 먼지’와는 상치된 개념어다. 고결한 심지를 바탕으로 지고지순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심신에 곁들어 있는 습관성 질료의 일부다. 예컨대 윤동주의 서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만큼 자신의 부족한/부끄러운 현재를 돌이켜보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행여 어딘가 고여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 하늘의 심상을 온전히 닮으려는 염결한 마음가짐이 그 요지다. 이 부분에서 순한 먼지는 하늘을 향한 성찰과 분발의 동인으로 기능하는 형용모순적 역설에 해당한다.   그런데 화자는 여기서 또 한 차례 반전을 선사한다. 먼지는 “여기저기 떠다니” 다가(치 열한 역사의 현장을 함께 노숙하다가) 뒤늦게 서야 홀로 책방을 거처로 삼은 후배에게 꽃다발 대신 보낸 특별한 선물이다. 거대담론의 뒤안길에서 실천적 미세담론의 일환으로 독서인 구의 저변 확대와 열린사회의 문화공간을 지향하며 따뜻한 소통의 장을 마련한 결사結社에 대한 축하사절인 것이다.   이처럼 그 의미를 재구성한‘먼지’는 돈독한 인간관계의 자취이자 청탁淸濁의 굴레를 초월한 탈사전적 시어로 상징화된다. 사회학적 시각으로 번역하면 피에르 브루디외의 ‘아비 투스’에 가까운 먼지는 아무런 허물없이 정겨운 사람끼리의 관습법적 은어다. 그 엄혹하고 삭막한 동토에서 추위와 가난, 그리고 신기루 같은 순간의 환희를 뜨겁게 나눈 동지들만의 관계론적 ‘연대기호’다.   시 전편에 걸쳐 먼지는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을“걷어내는” 소통과 연대의 창구로 작용한다. 나아가“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는 범우주적 세계관으로 확장된다. 최악 혹은 차악만이 난무하는 세파 속에서 차선의 고지를 굳고 겸허하게 지키며 최선을 지향하는 화자의 견자적 시선이 “외롭고 높고 쓸쓸” 하게 잔잔한 파장과 긴 여운을 남긴다.


꽃과 그리움의 초언어적 기표

-이상인 시집 『불쑥 물앵두꽃이 피었다』(천년의 시작, 2023)

 

 

1

  사람은 생리적/선험적으로 뱀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반면 꽃은 남녀노소 따로 없이 좋아한다. 대개 꽃의 수명은 채 열흘을 버티지 못한다. 지는 꽃은 피는 꽃에 반비례해 초라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꽃이 잠시의 환상인 것만은 아니다. 꽃마다 아름다운 자태에 걸맞게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는 귀한 존재다. 꽃의 조화에 의한 결과물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꽃과 열매는 일관된 협업 과정을 나누는 일심동체로 열매가 목적이라면 꽃은 수단인 셈이다. 열매는 수명은 길지만 꽃처럼 곱지는 않다. 단명의 화려와 장수의 견실을 적절히 배려한 자연의 생명 미학이 볼수록 예사롭지 않다. 그럼에도 뿌리, 줄기, 가지, 꽃, 잎, 열매 중 유난히 꽃에 기우는 시인의 성정을 어찌하랴.   이상인의 이번 시집 제목은 『불쑥 물앵두꽃이 피었다』이며, ‘시인의 말’도 “사과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60여 편 대부분이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중 꽃을 주제로 한 시가 압도적이다. 편 편마다 꽃을 대하는 남다른 정취가 시를 읽는 즐거움을 선물한다. 가볍지 않은 사유와 순진무구한 감성이 꽃과 열매처럼 두터운 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이상인에게 꽃은 기다림의 보상이다. 기다림은 그리움과 동의어다. 그리움과 기다림을 원소로 하는 점에서 꽃은 사랑과 동격이다. 한편 꽃에서 그리움/기다림은 잠시의 황홀경이 주어지기 바쁘게 진한 아쉬움과 임무를 교대한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보다 오랜 기다림을 기약한다.


한때 나는
내 생이란
당신 곁에서 백 번을 웃음 지어 보다가
지쳐서 떠나는 것인 줄 알았다.
  -「백일홍」 부분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또 한 번의 가을이 잠시 앉았다 가고
봉숭아 꽃물이 지워지고도 한참 뒤였다.
  -「문밖의 여자」 부분


  기다림과 그리움을 동력으로 꽃은 핀다. 시인은 “꽃을 피운다는 것은/제 몸 어딘가에 상처”를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열매를 맺기 위한 결실의 과정을 꽃의 상처로 노래한 시들은 흔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처가 깊을수록” “처절하게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고 그 심도를 강조함으로써 상처의 미학을 치유의 가치로 승화하는데 이 시의 반전 매력이 있다. 일찍부터 고해로 일컬어져 온 세상을 상처를 통해 극복하는 지혜와 위로를 꽃에서 얻고자 한 것이다.


그래 꽃을 피운다는 것은
제 몸 어딘가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처절하게 아름다운 꽃을 뱉어낸다.
   -「깊은 상처」 부분


  이상인은 꽃의 일거일동을 청명한 발화發話로 본다. 그의 시에서 꽃은 “이야기”, “속삭임”, “아이의 작디작은 울음”, “주술”, “낮은 목소리”, “입방정” 등 각양각색의 소통기제로 작용한다. 자연은 저희들 끼리 수시로 말을 나누며 인간에게도 대화를 종용하는 청유형 이야기꾼이다. 시인은 변화무쌍한 꽃의 동정動靜을 언어로 재해석하는 통역사다. 이때 우주 삼라만상은 자연의 모어를 주고받는 공통의 언어권으로 일체화 한다.


입 큰 목련이 한 마디 말로 떨어져 내리면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흰 배꽃, 사과꽃들의 반짝이는 속삭임
봄이 되니 덩달아 말을 하고 싶어진다.
  -「자꾸 말을 걸고 싶어진다」 부분 애기들이 앙증맞게 피었다.
꽃 속에서 수많은 아이의
아주 작디작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애기사과꽃」 부분

 

상상력은 형식과 내용 양면에 걸쳐 창작의 외연을 넓히고, 상투성에서 탈피하는 첩경일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신화, 전설, 민담, 판타지, 우화 , 초현실적 소재의 개발이나 각색에 적극적이다. 이상인은 신화적 상상력을 빌려 꽃의 위상과 품격을 높인다. 시의 독창성을 가늠하는 상상력이 아름다운 서정과 어울려 꽃의 미학에 신비의 옷을 입힌다. 그가 노래하는 꽃들은 갖가지 신화를 배경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누군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고
몇 명의 낯익은 별은 내려와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도라지꽃」 부분

땅속에 있던 정령들이
일제히 깨어나 봄 바다를 쳐다본다.
바다가 일렁일 때마다
철썩철썩 파도치듯 함께 흔들린다.
   -「서귀포 유채꽃」 부분

 

3.

  아래의 시는 홍매를 보고 오는 길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를테면 꽃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돌아와야만 하는 숙명적 현실을 일깨우고 있다.


흑매 운용매雲龍梅 홍매가 피었다기에
몇 장 찍으러 다녀오는 길
모퉁이를 돌아 나오다 그만
앞차 엉덩이를 들이받았다.
  -「흑매 향에 눈이 멀어」 부분

 

꽃구경보다도 사진을 찍기 위한 목적이 주도했으니 매화 입장에서 보면 다분히 불순한 노릇이라 일련의 징벌을 가한 셈이다. 그보다 꽃과 현실을 비교해 삭막한 현실의 이면을 폭로하고, 그 대체 환경으로 꽃의 낭만성을 전경화하려는 전략의 일단으로 보는 것이 보다 시에 근접한 시각일 수 있을 것이다. 표제시이자 권두시이기도 한 불쑥 물앵두꼿이 피었다보자.

 

다시 태어난다는 것도
뜨겁게 사랑하다가 떠나가는 것도
지우개로 쓱쓱 지우듯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단지 때맞추어 찾아오는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불쑥 물앵두꽃이 피었다.
그동안 아끼며 슬그머니 가려 놓았던 사랑이
자신을 깊이 되새겨 보며 피었다, 진다.
  -「불쑥 물앵두꼿이 피었다」 전문


  시인에게 꽃은 사랑과 죽음까지도 포괄적으로 함의하는 존재다. “그동안 아끼며 슬그머니 가려 놓낳던 사랑이/ 자신을 깊이 되새겨 보며 피었다, 진다”는 마지막 구절은 꽃의 비의를 오묘한 사랑의 언어로 상징화환 압권이다.   시를 일부러 어렵게 쓰는 시인들이 있다. 물론 상투성에서 벗어나 독창적 새로움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라면 작위적 일탈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현대시의 전략적 특징인 모호함과 낯설게하기를 빙자해 독자는 물론 자신조차 기만하는 난해시를 양산하는 빌미가 되어선 안 된다. 반면 시를 일부러 쉽게 쓰는 시인도 있다. 전자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중화를 의식해 시적 안일과 결탁하는 경우다. 이는 시의 자연스러움을 해치고 자칫 독자에 대한 무시 혹은 아첨으로 비화할 우려가 있다. 이와 달리 시의 난이도를 의식하지 않고 쉬운 시를 쓰는 시인도 있다. (여기에서 쉬운 시와 시적 안일은 구별해야 한다.) 까다롭지 않고 진솔하게 독자에게 다가가는 창작 습관을 말한다. 이 경우, 자연스러움이 시의 특질로 기능한다. 또 형식과 언어의 친숙도 속에 깃든 내용은 순수하면서도 깊고 다의적인 의미망을 거느린다. 그 대표적인 시인이 이상인이다. 그의 시는 정체불명의 난해시가 난무하는 풍토에서 초연히 벗어나 시와 자연이 한 몸이 되어 유유자적하는 소중한 친환경적 자산이다.



한가閑暇와 일상의 천의무봉한 소실점

-황형철 시집 『그날  물병자리 』(시인의 일요일, 2024)

 

 

1.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풍경을 이룰 때 가장 자연스러운 서정시가 탄생한다. 물론 시적 형태는 다양한 포즈를 취하지만 그 주체와 배경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혼연일체의 화음을 이룬다. 우주 삼라만상을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는 범우주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공동운명체로 결합시킨다. 이는 환경운동과 생태주의가 표방하는 담론의 근간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간의 일방적 분리에서 출발한 현대문명은 자연파괴와 무분별한 자연 이용의 산물이다. 흙의 정서보다 도시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모더니즘 시는 이 부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간중심의 사회 현실을 무대로 하는 리얼리즘 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시문학사의 오랜 전통을 주도해 온 서정시는 기본적으로 친환경적 정서가 주조를 이룬다. 따라서 대부분의 서정시는 환경운동과 본질적으로 맥을 같이한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 중심의 시는 보편성을 결여하지만 시인 중심의 시는 허용된다. 아래의 시들처럼 시인이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잊고 자연에 동화되어 그만큼 순진무구한 경우다.


소원이 하나 있다면/얼마간 구름의 주인이 되는 것(「뜬구름」)
좀처럼 갈 수 없는 먼 곳까지/손끝에 체온을 실어 오가는 사이(「등 좀 긁어 줘」)
혼잣말 엿듣는 참새 떼와/자꾸 뒤를 따라오는 꼬리구름에게/핀잔을 주기도 하면서/지나는 것들에게 곁도 내주고/고요히 깊어지는(「좀 걸어 보는 일」)
이 둥근 평정平靜을 곁에 두고서/소연히 흘러가는 나이쯤 아랑곳없이/ 숭굴숭굴 너그러워지고 말았다(「숟가락 열쇠」)
투명하게 빛나는 별과 별을 이어 뿔이 뚜렷해 흰사슴자리로 작명하고 섬에서 가장 높은 산에 놓 아 주었다(「흰사슴자리」)
코를 열어 돌고래처럼 바다를 호흡하다/쿵쿵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쳤고/잠결에 지나간 이정표는 알 수 없었지(「수국 피는 계절」)
벌레들 문하에 들어서라도/송송 구멍을 내는 기술도 좀 익히고/그것들 한데 모아 싯줄로 엮고 싶 은 거야(「문하門下」)

 

황형철의 시에서 유희는 지고지순의 경지에서 유유자적하는 안분지족과 결을 같이한다. 언어와 감각의 유희, 과도하게 분출하는 감정의 유희와 달리 그의 시는 자연과의 격의 없는 어울림과 내밀한 소통이 그 질료다. 부연하자면 시의 요소인 유희성은 인간이 자연과 불가분의 호흡을 맞출 때 삶의 활력소로 기능하게 되는데, 이때 그에게는 노장의 천연에 근접한 평화와 자유가 주어진다.


2.

  시는 소설에 비해 서사의 비중과 강도가 느슨한 편이다. 서사의 얼개를 대신해 서정과 감성, 상징과 은유, 함축과 역설, 직관과 사유, 풍자가 다양한 형태의 주도적 기능을 한다. 한편 서정시가 사회적 진술 시나 이야기 시처럼 서사의 형식을 취할 때, 일련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게 된다. 이때 실제이든 환상이든 서사는 일정한 구도와 명시적 관점을 내포한다. 그 형태는 줄거리가 명료한 담화의 경우와, 시사성이 농후한 담론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묘사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는 데 비해 후자는 진술적 성격이 강하다. 황형철은 두 성향을 적절히 혼용함으로써 수준 높은 서정시를 담보한다.


벼랑 끝 틈새 흙 한 줌 잡고서/기어이 피어 있는 노루귀를 보았다(「멀고 먼 절반」)
질문이 많은 눈과 잎은/봄날 꽃잎 같아/사람은 평생 몇 번 벚꽃을 볼까(「당신의 손금을 보았네」)
고개를 숙이는 건 이사 후 생긴 버릇인데 종종 겸손으로 오해받기도 했어 겉잠 끝에 아침이와도 거미가 걷히지 않는 건 으레 그런 습관이었다(「물컹한 저녁」)
가까스로 반만 내민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면 물컹한 저녁이 쏟아졌고 어쩌다 멀리까지 잠행 한 날이라도 몸의 반쪽이 돌아오지 않아 사나흘을 심하게 앓았다(「물컹한 저녁」)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나면/방보다 굴에 가까운데/이것은 우주야/최면을 걸지요(「일요일」)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 기다리면/별이 앉고 동이 트고 멧새가 울고/열매에 뜨거운 빛이 들어 (「권상철 집 앞」
두껍게 딱지처럼 앉은 상처는/가뿐하게 헐어서/나무처럼 뿌리 내리고 싶어(「대추하다」
잠을 청해도 오지 않는 밤/십장생 사이를 사슴처럼 뛰어다니다/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 고/섧게 울었네(「모란도 연꽃도 향이 없고」)
우리 서로 이렇게 말라 갈 것이니/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던/시간의 줄기가/덤불처럼 어지러 워도(「꼬사리 한 주먹」)


  서정시에서 사람을 주제로 한 경우는 사람만을 다룬 시와 자연과 사람을 함께 다룬 시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가족, 이웃, 사회를 근간으로 한 인간중심의 상호관계와 거기에서 파생된 정감의 표출에 집중해 왔다. 반면, 후자는 이기적 이해관계로 점철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추구해 왔다. 앞에서 예로 든 다양한 시(구절)의 경우처럼 황형철은 후자가 전자의 부정적 성향을 극복, 건강하고 참신한 시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어떤 시적 혼미 속에서도 의연하게 시의 본령을 지킨다. 구심점을 잃고 반시적 풍조가 난무하는 시의 위기에 처해 건실한 방향을 주도하는 선구적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다.


3.

  시는 주로 진술, 묘사, 독백 형태의 표현 양식을 빌린다. 서정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시의 모태이자 본류인 서정시에서 파생된 다른 장르의 시들이 이를 응용했다고 보아야 맞다. 서정시는 감성의 미학, 범우주적 사유, 자연과의 농밀한 유희를 그 특징으로 삼는다. 절제와 순화를 주조로 한 감성의 미학은 사적 취향과 언어가 문맥을 주도하는 경우에도 일반 정서에 기초한 보편성을 담보로 할 때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서정시에서 범우주적 사유는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성향의 부정, 비판, 풍자, 상징, 형용모순의 역설에 비해 자연의 초언어적 속성, 격물치지, 현상학적 직관을 방법론으로 할 때 본연의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게 된다. 요컨대 사람이 자연의 일부로 편입된다. 시詩도, 술도, 그 일시적 주체인 사람도 자연과 한통속이 되어 대자연의 통섭적 묘리를 구가하며 그 흥을 북돋운다. 이때 사람과 자연의 접점은 천의무봉을 이룬다.


밤사이 채마 밭에 무명천이 깔렸다 벌떼처럼 날리다가 어느새 가만사뿐 뜰에 앉으니 게으름이 움직였다

이만하면 별 공을 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발아하여 목련을 얻겠다 귀한 연꽃 곁에 두어 여가는 풍족하고 열매를 따면 공손히 술도 담가야지

무엇보다 꽤 고급스러운 목필 한 자루 갖게 될 테니 투명하게 먹을 갈아 새가 앉은 나무에 시를 곁들여 보내야겠다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술 익는 향기 백 리를 가서 취기에 젖은 사람들 차고 넘치고

어지러운 관계로부터 거리가 생겨 제법 멀고 새로운 데까지 가 볼 수 있는 기운이 활짝 피고 말 리라
  -「목필木筆」 전문


  시흥과 취흥, 자연과의 여흥이 어우러져 전개되는 이 시는 굳이 낱낱의 자구를 해석하려고 들기보다 전체적으로 그 음률과 파동을 음미해야 제 맛이 난다. 이 시의 진수는 시간을 부리는 한가와 여유에 있다.‘게으름’은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현대문명의 무분별한 과속을 제어하는 방어기제로 ‘느림’의 별칭이다. “벌떼처럼 날리다가 어느새 가만사뿐 뜰에 앉으니 게으름이 움직였다”는 구절은 이를 반증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시종 시를 가지고 노는데 그 솜씨가 어색하지 않고 몸에 밴 듯 자연스럽다. 예컨대 “이만하면 별 공을 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발아하여 목련을 얻겠다”는 예사롭지 않은 절창을 예사롭게 낳는다. 그의 정제된 시어는 은일한 탈속의 감성을 멜로디 삼아 한가(여가, 게으름, 술, 취기, )와 묵향 (목필, 먹, 시, 향기, ), 자연(발아, 목련, 연꽃, 열매, 채마밭, 무명천, 벌떼, 새 )의 3중주곡을 연주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지러운 관계로부터 거리가 생겨 제법 멀고 새로운 데까지 가 볼 수 있는 기운이 활짝 피고 말리라”는 개안開眼의 경지를 선보인다.   시력 25년을 넘어서는 황형철은 어느덧 시에 끌려 다니지 않고 시를 부리고 주무르는 고수의 반열에 이르렀다. 세 번째 역작에 해당하는 이번 시집 『그날 밤 물병자리』는 남도 서정시의 맥을 발전적으로 있는 교두보이자, 안갯속 한국 시단의 투명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순도 높은 결정結晶이다.



추상적 감각의 언어미학에서 실제를 조탁한 서정미학으로

-남길순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창비, 2024)


1.

  남길순의 제2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은 대부분 ‘사람’이 주체와 배경을 이룬다. 시인은 화자로 숨어 시의 얼개를 짜고, 다난한 시공의 흐름을 시에 담아낸다. 다양한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변화무쌍한 시간의 의미를 반추하고 공간의 질적 향상을 탐색한다. 이때 현실을 배경으로 한 사회적 시각이 표현기제로 기능하는 시는 막연한 모더니즘의 외투를 벗고 보다 구체적인 리얼리즘 색체를 띤다.   표제시 「한밤의 트램펄린」에서 트램펄린이 가리키는 시간은 한밤이다. 한밤은 비정상이 지배하는 부조리, 억압, 암울의 상징어이자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지시대명사다. 트램펄린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유희기구이며 그 운동의 주체는 사람이지만 한밤이라는 정황이 시사하는 현실적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도, 녹록지도 않다. ‘한밤의 트램펄린’은 남길순이 이번 시집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시세계를 요약한 함축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략 세 부류의 인간상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최소한의 존재 가치조차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도태된 현대문명의 간접적 피해자들의 경우다. 곱씹어볼수록 잉여인간이나 그림자처럼 주류에서 철저히 소외된 군상들이다.


형이 예고 없이 사라졌지만 찾으러 나서지는 않았다(「조용한 가족」)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일 때/빛이 나는/삼촌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맥락」)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 같다고/수런거리며 유모차를 밀고 가는 늙은 여자들(「살구」)
이 마을 마지막 남은 노구老嫗가 자꾸 아름다워져서/더 이상 바라볼 수 없다(「살아남은 여자」)
사업에 실패한 청년이/이 방에서 목을 맸다는 말을 듣고(「푸르고 투명한」)


  두 번째는 이념을 빙자한 권력집단의 횡포에 의해 파생된 반인륜적 상흔이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불가항력의 경우다. 제주 4·3사건, 여순 사건, 한국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그 동인이다. 이로 인해 일상의 평화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이들은 감당키 어려운 불안과 고통의 벼랑으로 추락한다.


포승에 묶인/청년 여섯이/총부리 앞에 서 있다(「흰 까마귀가 있는 죽음의 시퀸스」)
손이 발이 되도록 자식을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지(「초파일에 내린 비」)
소년은 아버지 가슴에 총알이 파고드는 것을 보고 있다(「평화로운 천국」)
사라에게로 오르다 내려오는 사람을 만났다. 죽다가 살아난 사람을 만났다(「사라오름」)

 

 

 번째는 크고 작은 소외와 상처를 딛고 일상의 평온과 질서를 지켜내는 사람들의 경우다. 이들 역시 역사적, 사회적 소외와 고통의 질곡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갖은 악조건 속에서도 순결하게 간직해  본연의 정서는 사랑과 평화이며 궁극의 지향처 역시 이웃과의 공동운명체적 친화다.

 

당신은 무슨 일이든 뚝딱 하는 사람/사람이 밥을 기다려야지 밥이 사람을 기다려서는 못쓴다고 여기는 사람(「집밥은 왜 질리지 않는가」)
어떤 날은 한아름 백오이를 따와서/상큼한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 놓고 간다(「낮 동안의 일」)
당숙은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어린아이에게도 말을 조리 있게 하여 궁금증을 풀어주셨다 (「구례」)
이슬람인 압둘라 할렘씨는 한국 여자와 결혼했다 딸 둘을 두었는데 아랍과 한국을 반반 닮은 얼굴이다(「순례」)
아기였던 네가/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온다(「장호항 갈매기」)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는 저 많은 인파가/한가닥/연실을 잡고 있다(「축제」)

 

 

3

권두시 「복희 사람이 주역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개와 소녀가 공동 주연이다이는 앞에서 세 가지 부류의 인물 군상을 통해 살펴본 인간 중심의 리얼리즘을 범우주적 서정으로 확장한 광의의 세계관을 의미한다.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

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다고 있다

호숫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내 걸음이 빠른 건지 그들과 만나는 거리가 조금씩 좁혀 졌는데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

희미한 달이 떠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복희」전문


  평범한 산책길의 일상이 더없이 평화롭고 자연스럽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개와 소녀의 관계인데 그 경계가 모호하다. “복희” 가 사람 이름인지 개 이름인지 분명하지 않다. “개가 걷고/소녀가 따라 걷는다”는 구절 역시 애매하다. 통상 사람을 개가 따라다녀야 정상이다. 화자와 소녀의 관계도 막연하다. 서로의 “거리가” “좁혀졌” 다고 여기는 순간, 소녀는 “멈춰 서서” 화자가 지나가기를 청하며, 다시 일정의 거리를 만든다. 개와의 일체감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소녀는 시공時空을 개와 함께하는 복수의 존재자다. 거기에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다”는 자연과의 합일이 더해진다. 각각 한 행으로 이루어진 7연 “희미한 달이 떠 있다”와 마지막 연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는 마지막 연은 이를 상징적으로 함축한다.   개는 사람과 구분할 경우 사물/자연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이 시에는 사람과 자연의 이분법적 경계를 지우고 그 일체화를 꾀하려는 전략이 숨어있다. 이 경우, 인간중심의 리얼리즘은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함으로써 자연과의 물아일체를 꿈꾸는 서정시와 결을 함께 한다. 잿빛 감각의 언어 미학에서 청명한 범우주적 서정으로 진화한 남길순의 시가 장르를 초월해 미래의 첨단적 사조로 거듭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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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모멸과 차별을 넘어, 치유의 글쓰기

Ⅰ. 모멸과 폭력 - 김현주, 『메리골드』, 다인숲, 2024. 1. 김현주의 소설집 『메리골드』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만든 감정의 살풍경을 행간에 숨겨두고 있다. 소설의 화자들이 자행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적 언어가 주는 당혹스러움과 예술로 포장된 인물들의 자기 방어기제는 소설 독해의 일차적 난관이다. 하지만 이는 김현주 소설의 성취점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모욕과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인물들이 사실 과거 연약한 주체(버려지거나 유폐되거나 모멸의 대상이기도 했던)였다는 점은 당혹스럽지만, 이들의 방어기제가 연약한 타자에 대한 폭력적 형태로 노출될 때 의도치 않게 감추어진 상처가 드러나면서 해체된다는 점은 소설의 행간을 읽어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김현주의 소설들은 자기 방어에 능숙한 ‘믿을 수 없는 화자’들의 언어를 통해 히스테리적 증상의 원인을 타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서사를 독해할 때 독자의 시선은 주체에게서 멀어지면서 타자에게로만 고착된다. 그러나 이 길을 역행하고 이중 잠금장치를 풀어내면서 행간에 감추어둔 감정의 풍경을 응시할 때, 우리는 김현주 소설의 입구에 서게 된다. 2. 오독을 유도하는 방어기제와 맥락을 무시한 채 배치된 언어들의 함정을 피하고 마주한 풍경에는 모욕과 모멸과 수치와 같은 감정들이 흥건하다. 때로는 피가 때로는 비겁함이 때로는 자기혐오가 때로는 눈물이 그 자리에서 축축하다. 가령, 「빛의 감옥」에서 직장 내 정치의 희생양이 된 원장의 무고함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 ‘그녀’의 비겁함은 모멸감이라는 깊은 강을 건너야만 했다(“당신이 해고되지 않으려면 쉿, 이라고 음험하게 웃었다. 그때, 모멸감을 느꼈다.”). 애도보다 망각이 정규직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타인의 죽음을 오래 애도하는 일은 어리석었다. 정상적으로 살려면 빨리 망각해야 했다”). 물론 정규직인 된 이후 ‘그녀’가 겪는 “불면증”과 “우울”과 “가슴 통증”은 모멸감이 남긴 흔적이겠지만, 일요일마다 작은 교회에서 행한 “참회의 기도”는 그것을 투명하게 세탁해주었다. 주식 리딩방을 운영하는 「꿀」의 주인공 ‘그녀’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고 달려드는 회원들(“꿀단지 옆으로 기어드는 개미들”)을 경멸하고(“가난한데다가 멍청하기까지. 의심 많은 인간들… 구제불능이야.”), 돈을 빌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가사도우미에게 약간의 돈을 적선함으로써 동정을 소비한다(“계좌번호 적어놓고 가. 삼백만원은 없어. 그 대신, 삼십만 원 그냥 줄게. 안 갚아도 돼. 가사도우미는 모멸감을 느꼈다.”). 정작 가족을 포함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소외된 듯 보이는 ‘그녀’는 우울증, 대인기피증, 편두통, 불안 등 신경증적 증상을 주식시장의 개미들과 하이에나들의 욕망을 잽싸게 포획하면서 치료한다(“그녀의 웃는 표정은 먹이를 낚아챈 한 마리 잔인한 맹수 같았다.”). ‘그녀’는 이빨 사이의 흥건한 피로 자신의 상처를 은폐할 줄 아는 주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 3. 「붉은, 행간」은 김현주의 소설집에서 모멸과 폭력의 역학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멸감’은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게 되는 괴로운 감정”(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61쪽. 이 글에 언급된 모멸감에 대한 사유들은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았다.)이다. 이 정의에는 모욕-경멸-수치의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 ‘모욕’이 타인을 업신여겨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모욕감’은 타인에게 그러한 모욕을 받았다는 감정의 응어리다. 그리고 ‘모멸’에는 모욕과 ‘경멸’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적나라한 공격을 드러내는 언행이 모욕이라면, 무심코 무시하거나 깔보는 태도는 경멸에 가깝다. 즉 경멸에는 적대적 의도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멸시하고 낮잡아 보는 일은 흔하다. 누군가를 직접 모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를 낮추고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행위양식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포식성을 희석화하는 최소한의 도덕률일 것이다. 모멸은 이러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김찬호;64)라고 할 수 있다. 「붉은, 행간」의 화자 ‘나’는 두 명의 남자(남편이자 작가인 ‘케이’, ‘나’의 정부이자 연극연출가인 ‘에스’)로부터 받은 모멸감을 그들의 작품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최악의 방아쇠’의 희생자이자 피의자이다. 그녀는 페이지가 찢겨나간 <중독>을 바닥에서 집어 들더니 책 무덤 위에 펼친다. 책 속에 접시 위의 과일을 집어넣는다. 청포도와 방울토마토가 책 속으로, 책 바깥으로 쏟아진다. 그녀는 책들 위에 올라선 후, <중독>을 밟는다. 토마토와 청포도가 튀어 나가고 일부는 그녀의 발길질에 짓뭉개진다. 다시 책 위를 두 발로 힘껏 내리밟는다. 책 속은 젖어 얼룩 범벅이 된다. 과육은 책 속에서 으깨어지고 과즙은 행간으로 스며들 것이다. 짓밟고, 태워버리고 싶은 책이다. 소설 속 인물들도 과즙 범벅이 된다. 책을 모독하고 싶다. (「붉은, 행간」, 23쪽) 그녀는 <중독>을 짓밟으며 무대 위에서 빛난다.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는 과감한 의상을 선택하면서 보다 파격적인 연기를 시도한다. 매회 무대 위에서 그녀는 에스를 다양한 부위별로 힘껏 물어뜯는다. 그때마다 에스는 신음을 내지른다. 고통과 쾌락을 오가는 에스의 야릇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관객을 열광시킨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반전이다. 그녀는 침착한 동작으로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젖은 혀로 부드럽게 천천히 핥는다.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온다. (「붉은, 행간」, 39쪽) 인용문의 <중독>은 남편 ‘케이’의 유작이다. 무명 소설가였던 남편의 작품은 ‘나’와 불륜 관계인 ‘에스’에 의해 불멸의 작품으로 포장된 채 연극 무대에서 상연된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 등장해 남편의 작품을 ‘모독’하는 퍼포먼스를 반복한다. 행위예술 특유의 난해함으로 승화되어버린 ‘나’의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남편의 소설에서 묘사된 아내 ‘나’의 모습은 수동적이며 무기력했다. 실재의 ‘나’는 자유로운 새처럼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소설 속의 ‘나’는 “새장 속의 새”이며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묘사되었다. 잠시 나가더라도 “새장 속으로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남편 케이에게 ‘나’는 그의 죽음과 함께 “순장된 영혼”일 뿐이었다. 남편 케이와 아내 ‘나’ 사이의 이 간극을 소설은 “틈”이라는 언어로 비유한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그녀의 불안과 케이의 애증으로 1502호는 땅 위에서 존재하지 않고 허공에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지상으로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격한 진동으로 실내의 벽, 틈은 무섭게 벌어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부풀린 틈이 그녀의 무게를 못 이겨 더 크게 벌어졌다.”/ “집요한 틈새는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틈이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등) 이 ‘틈’은 남편 케이에게서 받은 ‘나’의 모멸감의 다른 표현이다. ‘틈’에는 1502호의 위장된 평화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위태로운 행복이 노숙자 같은 불안을 데리고 침실까지 들어온 것”(20쪽)이라는 문장은 남편의 언어적 경멸과 아내의 존재가치에 대한 모욕으로 인해 ‘나’가 느낀 모멸감이 가장 정제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에서 ‘나’가 남편의 유작인 <중독>에게 가한 행위들(찢고, 밟고, 책 속에 과일을 넣고 짓뭉개는 등의 행위)은 모멸에 대한 되갚음으로써의 ‘모독’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세 가지 층위의 모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작품이 타인에게 인정받는 승인 과정을 통해 자기존재감을 확장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할 때, 모욕은 이러난 자존감이 손상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무명 작가였던 케이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내 작품이 모호하다고 하는데 그건 인물의 내면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지. … 상징을 잘 이해해봐. 그리고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내면 좋겠어.”) 세상은 그의 언어 속 행간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첫 번째 모욕이다. 케이의 죽음 후 그의 소설 <중독>은 에스의 연출에 의해 본래의 의미 맥락에서 이탈된 채 연극 <중독>으로 포장되고 소비된다. 에스는 작가의 죽음을 작품에 중첩시킴으로써 소설 <중독>의 행간을 영원히 감추어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 모욕이다. 그리고 연극 <중독>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나’는 소설 <중독>을 짓이기고 찢고 밟는 퍼포먼스를 통해 소설에 묘사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의미지점으로 이탈시킨다. 더불어 연극이 반복 상연되면서 ‘나’의 모독 행위는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이것이 세 번째 모욕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연극 <중독> 속에서 ‘나’의 예술적 행위의 승인 과정의 소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앞선 두 번째 인용문은 ‘나’의 행위가 연출가 에스의 의도를 완전히 역행하는 장면이다. ‘나’는 한때 ‘에스’와의 관계를 통해 모욕당한 자신의 존재감을 재승인받았다. 하지만 이후 이 둘의 관계에서도 ‘틈’이 발생한다. 남편 ‘케이’와 마찬가지로 ‘에스’ 또한 ‘나’를 자기 예술의 승인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로 수단화한 것이다. 연극 <중독>에서 ‘에스’가 ‘나’를 흡혈하는 장면이 그 증거다. 따라서 앞선 두 번째 인용문에서 ‘나’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에서 벗어나 ‘에스’를 물어뜯고 흡혈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에스’가 행한 모욕을 되갚는 중이다. 소설의 제목인 「붉은, 행간」은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천천히 핥는 ‘나’의 붉은 입술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완성한 셈이다. 이로써 연극 <중독>은 ‘나’의 작품이 된 것이다. 4. 이렇게 보면 김현주의 소설 「붉은, 행간」을 남성 예술가들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 인물의 신체와 정신이 자기모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예술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서사로 읽을 수도 있겠다.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과 모멸의 헤게모니 관계를 역전시키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모멸의 폭력을 그대로 되갚는 방식으로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온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모욕과 경멸에 노출되고 수치심과 분노가 꼬리를 물면서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주체와 폭력의 거리는 자못 가까워진다. ‘훼손된 자아(spoiled self)’(어빙 고프먼)의 폭력적 자기 증명. 문제는 이런 방식이 주체의 훼손된 자아를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에 갇히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방식의 예술행위 또는 글쓰기가 자기모멸의 늪에 빠진 주체에게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자못 위험해 보인다. 다행히 작가는 「메리골드」에서 이러한 폭력성의 늪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를 스릴러의 양식으로 서사화함으로써 자기 응시를 수행하고 있다. 모멸감은 폭력의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모멸감의 해소 방식이 항상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예외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수치심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거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비폭력적 수단을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폭력적 충동을 제어해주는 정서적 역량이 결핍되어 있을 때, 모멸감을 느낀 ‘훼손된 자아’는 자신의 뒤틀린 모습을 타자에 투영하면서 폭력과 폭언을 통한 자기 증명에 매몰될 수 있다. 김현주의 「메리 골드」에 이러한 장면이 등장한다. 갤러리 관장이자 도예가인 화자 ‘나’가 자신의 건물에서 무상으로 ‘꽃 카페’를 운영하는 ‘그녀’에게 건네는 말들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훼손된 자아가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를 통해 자기모멸감에서 벗어나려는 뒤틀린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싸구려 꽃으로 격조 있는 갤러리를 망쳐놓다니, 발코니랑 계단에 유치한 저것들, 당장 다 걷어내요!”/ “이렇게 예술적 센스가 없다니!”/ “당신의 예술적 감각은 형편없어요. 그래서야 카페 운영을 제대로 잘하겠어?”/ “그녀의 원피스는 시장에서 값싼 무명천을 떠다가 만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저급한 취향 때문에 화가 났다.” 등)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에 내몰린 ‘그녀’는 “무조건의 동정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가여운 존재”(79쪽)였다. 자신의 건물 2층을 내어준 ‘무상임대차계약’은 호의적인 주체가 동정의 대상에게 베푸는 적선으로써 상대적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우울해보였던 그녀의 삶이 메리골드처럼 화사해지면서부터다. 적막했던 갤러리는 그녀가 온 뒤로부터 오히려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메리골드 덕분에 행인들이 들어와 일층 전시실을 구경하고 카페로 올라가 차를 마시고 돌아가기도 했다.”), 반면 자신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볼품없어 보이이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쫓겨난 듯 한쪽 구석에 몰려 있는, 내 작품들은 이상하리만큼 볼품없어 보였다. 초록으로 뒤덮인 실내에서 박제동물처럼 생명력이 없었다. 나는 도자기의 미적 가치를 모르는 그녀를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자기가 업신여기던 사람에게서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자괴감과 자신의 예술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수치심으로 인해 ‘나’는 모멸의 가해자가 되었다. ‘나’의 모욕적인 말들과 무상임대를 대가로 그녀를 자신의 조수처럼 부리며 멸시하는 장면들에는 자신과 그녀 사이의 위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는 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여기에 ‘그녀’가 남편의 전처를 닮았다는 사실까지 더해지자 모멸과 폭력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가령, 남편의 전처 사진을 칼로 긋는 장면(“환하게 웃는 신부의 얼굴을 나이프로 천천히 그었다. 후련했다.”)이나, 무기력한 대상이 자신에게 굴복했을 때의 쾌감을 묘사하는 장면(“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쾌감이 내 몸에 전율처럼 흘렀다.”)에서 ‘나’가 느끼는 쾌감은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생산하는 감정이다. 소설은 이러한 감정의 근원에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 허영을 위한 싸구려 소비품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불안감(“내 작품들, 원가에 내놓는다고 홀대하지 마세요. 이거 최상급이야. 전부 팔렸으면 좋겠네.”)과 ‘나’가 과거 엄마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는 트라우마를 배치하고 있다. 마땅히 사랑을 주어야 할 존재에게서 버려졌다는 모욕과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수치가 ‘그녀’에 대한 분노로 착종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 건물에서…어떻게 나보다 더 행복할 수 있어?”(100쪽)라는 말에는 자신을 버린 엄마가 행복하면 안 된다는 분노, 버림받은 자신이 행복질 수는 없다는 슬픔, 나보다 못한 위치의 누군가가 행복하다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억울함의 감정들이 뒤섞인 증상인 셈이다. (한 번도 해소되지 못한 이러한 모독의 감정들은 「떠도는 영혼의 노래」와 「아무도 모른다」에서 각각 국가폭력과 면역 정치에 의해 잊혀진 죽음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은 작품의 행간에 감추어진 죽음을 통해 스릴러로 서사화된다. ‘나’가 코엑스 전시 후 일주일 만에 돌아왔을 때 ‘그녀’가 사라진 사건을 주목해보자. 화자는 “그녀는 노란 메리골드를 뽑지도 않았고, 붉은 샐비어를 심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없는 동안, 갤러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99쪽)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화자의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이유는 소설의 말미에 아무렇지 않게 슬쩍 언급된 다음의 문장 때문이다. “나는 뒤틀린 손가락 관절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그녀의 겁먹은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100쪽) 그러니까 일주일 전 ‘그녀’는 ‘나’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 기억상실은 2층 카페를 가득 채운 “사라지지 않는 소독 냄새”라는 무의식적 진술로만 확인된다. 따라서 소설 맨 앞에 배치된 평범한 문장(“이층 카페의 탁자보를 걷어내면서, 나는 그녀를 느꼈다. 표백제를 푼 물통에 누런 탁자보를 담그고 카페 내부에 소독약을 뿌렸다.”)은 ‘나’의 무의식이 남긴 사후적 증거에 해당한다. 5. 소설의 스릴러적 플롯이 잘 배치되고 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메리골드」는 분명 자신이 자행한 폭력의 기억마저 멸균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멸적 폭력의 초라함, 모욕당한 자존감이 자기를 위협하는 외부 인자에 대해 보이는 면역학적 과잉 반응,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모멸감의 극단에서 어떻게 역진화하면서 파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단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모멸감의 근원에 오랜 시간 글쓰기로부터 멀어진 작가의 자기진단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현주 작가의 소설을 모멸감과 폭력의 역학관계로 독해하는 이 글의 시작점에는 「빅 블루」가 있었다. 이는 앞서 진술한 바 있는 말, 그러니까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과 연관된다. 「빅 블루」는 작품을 생산하지는 못하고 문화 소비에만 매몰된 채 문학이라는 질병에 침전된 화자의 모습을 자기혐오와 시대와의 불화라는 방식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이 자꾸 “아주 오랫동안 소설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라는 <작가의 말>과 겹쳐 읽힌다. 또 김현주의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느끼는 자기혐오와 모멸감이 글쓰기로부터 멀어졌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것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섣부른 짐작 때문에 나는 다음의 문장들이 아프게 읽혔다.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천 일 동안 매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밤, 고통의 밤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이야기가 완성되면 죽음의 공포는 사라진다. 불멸의 글쓰기, 나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아무 책도 읽고 싶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멍 때리며 노는 인간,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작가가 되었다.(「빅 블루」, 64쪽) 나는 어쩌면 <그랑블루>의 주인공처럼 깊이 잠수하는 병에 걸린 것일까. 빅 블루, 푸른 바닷속으로 책이 떠다니면서 작가가, 작가가 만든 주인공이, 작가가 썼던 문장들이 돌고래처럼 헤엄치거나 솟구쳐 오르는 것을 연상하면서 … 죽는다. 푸른 바다로 몸을 던진다. … 막막한 소설의 바다. … 바다 맨 밑으로 들어간다. 바다 속, 눈이 어두운 심해어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수영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익사한다. (「빅 블루」, 68쪽) 여기서 ‘나’는 가혹한 자기 심문 과정에서 스스로를 모멸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깊고 푸른 어둠 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대상화한다. 문학이라는 ‘질병’에 갇힌 화자의 무기력은 예술가로서의 승인과정에서 경험한 어떤 모욕에 대한 자기 심문으로 읽혔다. 글을 쓰기 위해 국가 행정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느껴야 했던 모독은 그 감정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또 생산 없이 소비로만 이어지는 상황에서의 공허함은 한 인간의 자기 실격 보고서임과 동시에 자기모멸의 감정을 통과하기 직전의 가장 깊은 어둠에 대한 기록으로 읽혔다. 무엇보다 이 강도 높은 고해성사는 대단한 용기로 읽혔다는 점도 말해 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서툰 짐작 끝에 생기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왜 어떤 사람들의 자기증명 과정은 세계 전체와 싸우는 방식으로만 가능한지? 왜 어떤 사람들의 구조신호는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찢어야만 겨우 낮은 주파수나마 얻게 되는 것인지? 왜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모욕하고 모멸하면서 그것이 어쩌면 자기 고백일 수도 있는 가혹한 지점에 서야만 하는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글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누구 또한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었으나 오랫동안 글을 읽는 세계에서 유폐되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공감 또는 응원이 될 수 있을까? 믿고 싶은 한 가지는 ‘사건의 지평선’을 빠져나온 힘이라면 무한한 우주 어디라도 이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작가 김현주의 앞으로의 항해를 응원한다. Ⅱ. 차별과 환대 - 김성훈, 『길목의 무늬』, 문학들, 2024. 1. 김성훈의 소설집 『길목의 무늬』에는 버려진 아이들의 좌절과 상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이 미성숙한 자아의 패배적 자전서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는 버려진 아이들의 구조신호에 기꺼이 응답하는 인물들의 환대와 연대 때문이다. 김성훈의 소설은 제 몫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제와 사회의 셈법에서 뺄셈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에 주목하고 있다. 경제발전의 뒷골목에서 하위주체로 명명되거나, 정당한 이름으로 호명되지 못하고 그늘진 외진 장소로 배치된 채 ‘비체’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서사의 대상들이다. 2. 소설집의 표제작인 「길목의 무늬」의 배경인 목포의 ‘다순구미’ 마을은 이러한 인물들의 장소이다. “볕이 잘 들고 따뜻하다”는 의미와 달리 이곳은 “가난을 머리에 이고 지고 사는 동네”(34족)로서 지금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폐허의 장소다.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화자 ‘나’는 이른바 ‘파시의 아이’였다. 바다에서 서는 장을 파시라고 한다. 나는 파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산동 유곽에서 버림받았다. 나를 낳은 어머니를 일컬어 누구는 임자도 여자라고 했고, 또 누구는 흑산도 각시라 했고, 더러는 산다이 색시라고도 했다. 동네 사람들의 절구질하는 입방아가 싫었다. (「길목의 무늬」, 37쪽) 그러니까 ‘나’는 바닷사람들의 욕망이 부딪는 장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부모의 존재나 출생지조차 불분명하여 처음부터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로 이 세계에 내던져진 우연적 존재였던 셈이다. ‘파시’에서 몸을 팔던 어머니는 “어선이 입항하는 날, 나를 낳고, 기침하고, 다시 유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49쪽) 손님으로 만난 아버지에게 ‘나’를 맡김으로써 그녀는 장차 어린 아이가 겪어야 할 차별과 혐오를 벗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어린 화자의 삶은 “태생의 천박함에 응시한 타인들의 시선”(37쪽)에 노출되었고, ‘다순구미’를 떠나 바깥 세계로 입문하려던 시도도 실패했다. 몸을 파는 어머니의 직업과 버려진 아이라는 주홍글씨는 ‘나’의 태생에서부터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작동했다. 사회의 정상적 성원권을 획득하려던 시도는 모두 실패로 귀결된다. ‘나’의 친구이자 첫사랑이기도 한 ‘달순’은 주인공이 겪은 사회적 차별을 젠더의 측면에서 강화하고 보충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외부화된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달순의 희망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소규모 직장에서 경험한 남성들의 성희롱과 차별은 결국 ‘달순’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야기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나’가 ‘달순’의 기타를 가지고 비행기에 올라 타국으로 향하는 장면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존재들의 바깥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띤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성훈의 등단작품인 「길목의 무늬」는 버려진 아이들의 실패서사로 읽히면서 사회적 차별을 서사화한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은 ‘나’를 기꺼이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와 ‘달순 엄마’의 희생과 환대의 서사를 통해 소설을 패배주의와 우울에서 건져내고 있다. 양부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머리 검은 짐승 거둬 키워도 잘만 산다는 것”(49쪽)을 동네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나’를 차별의 늪에서 건져냈다. 그는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우짜든지 너랑 나는 잘 살아야 해.”(49쪽)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달순 엄마’는 친모의 빈자리를 그 이상으로 대리보충한 ‘엄마’였다. 운동회고 소풍이면 내 도시락까지 싸줬던 달순 엄마였다. 그 품에 엄마의 젖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 아버지가 먼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달순네 집에 들어가 그 좁은 방에 꾸역꾸역 발을 들이밀고, 유달산 자락에서 얻어온 도깨비바늘을 그 집 이불에 달라붙게 했다. (「길목의 무늬」, 39쪽) ‘달순 엄마’는 ‘나’의 인생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가 “휴학, 복학, 취업, 명예퇴직, 재입학” 등의 말들이 암시하는 거친 시간들을 통과하는 동안 그 “단어들이 빚어낸 내 세월을 흉금 없이”(39쪽)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달순네’는 ‘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젖 냄새”가 배어있는 장소이면서 외로움과 자기비하에서 화자를 건져내 준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은 ‘나’의 출생에 얽힌 공백 위에 ‘아버지’와 ‘달순 엄마’의 무조건적 환대를 중첩시킴으로써 어린 인물을 차별과 혐오의 늪에서 구원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환대의 힘은 ‘나’가 이후 ‘견습 선교사’가 되어 케냐로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곳은 국가폭력과 전쟁의 희생자들이 생산되는 장소, 달리 말해 자신과 같이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상처를 극복한 인물이 자신이 받은 환대를 타자에게 되돌려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달순 엄마’에게 새로운 임무를 한 가지 더 부여하면서 서사의 의미를 확장한다. ‘달순 엄마’는 버려진 아이가 자기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돕는 조력자이면서, 비밀에 부쳐진 인물들의 과거를 현재로 재송신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달순 엄마’는 과거 “일제 강점기 유곽촌이 있던 동네, 서산동, 그곳에서 산다이 색시들의 밥을 만들고, 빨래하며 품삯”(38쪽)을 벌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친모와 함께 “식모 일을 하면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41쪽)이기도 했다. 이러한 소설의 설정은 ‘나’의 친모가 비워진 공백의 자리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성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길목의 무늬」는 어머니의 실종으로 상징되는 공백의 장소에 과거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소녀들이 짊어졌던 희생의 무게와 그녀들이 거쳐 온 사회적 장소들을 기입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속 도시로 이주한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을 상기할 때, 나’의 친모에 대한 서사적 누락과 죽음을 앞둔 ‘달순 엄마’의 쇠락한 신체는 그 시대 하위주체 여성들의 삶과 존재가 사회에 정상적으로 기입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더불어 친모의 부재는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이 역사의 서술에서 누락되었다는 점을 의미하며, 재개발지역에 거주하는 ‘달순 엄마’의 현재성은 이들의 삶이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외부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김성훈의 소설 「길목의 무늬」는 ‘다순구미’와 같은 버려진 장소에 얽힌 인물들의 삶을 산업화 시대를 통과한 하위 주체들이 걸어 온 ‘길들의 무늬’로 재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다순구미’라는 장소의 역설적 의미를 현재화하면서 목포의 특정 장소에 한국 사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덧입히는 작업을 수행하는 작품이다. 3. 산업화 시대의 첨병 공간이었던 여수와 마산을 배경으로 쓰인 「정오의 끝자리, 빛」과 「홍콩빠 이모」는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와 레드콤플렉스에 포획된 인물들을 전면 배치하면서 한국 사회의 국가 폭력이 혐오의 대상을 낙인찍고 그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배제했던 폭력의 역사를 서사화하고 있다. 전자의 소설이 그 대표적 낙인의 서사라면 후자의 소설은 이를 연대의 차원에서 극복하고 있다. 「정오의 끝자리, 빛」의 한덕수는 그 출생부터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덕수의 현재 시점에서 두 세대의 시간을 거슬러야 도착할 수 있는 지점이 가혹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이다. 한덕수의 외할아버지는 여수읍의 한 국민학교에서 음악교사로 부임 중이었다. 그러다 1948년 10월 어느 날 그는 빨갱이의 부역자로 내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이후 그의 가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국가폭력의 구성적 외부로 배치되었다. “울 엄마가 그랬시야, 차라리 고아랑 놀아라, 빨갱이 자석하고 말 섞었다간 네 신세 조져분다고잉.” 학교에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르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아이를 기다리며 놀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아이의 입에서 ‘빨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생김새를 알았다. 피 묻은 돌멩이라는 것을 말이다. 번갯불이 내 몸을 지지는 듯했다. 나는 엄마에게 그 사건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빨갱이’라는 뜻은 몰라도 그 단어는 무서웠다. ‘빨갱이’는 이후의 내 삶을 내 의지랑 상관없이 끌고 갔다. 땅의 중력처럼, 파도의 출렁거림처럼. 살아 있는 동안 내게 떠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나는 ‘빨갱이’랑 살았다. (「정오의 끝자리, 빛」, 61쪽) 인용문은 억울하게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된 한 인물의 후손들이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사회로부터 차별화되고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는지를 보여준다. 오래 전의 낙인은 사건과 무관한 후손들의 삶을 비극으로 색칠했다. 차이 나는 대상에게 혐오와 배제의 스티그마(stigma)를 라벨링하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했던 시간들이었다. 국가폭력이 생산한 어떤 오염물이 행여라도 주체의 내부로 침투할까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한때나마 주체의 일부(가족이나 친족)였거나 아주 가까운 대상들(친구나 이웃)까지도 오염물로 치부하면서 주체의 바깥으로 뱉어내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오염의 가능성이 있는 이웃을 타자화하고, 이념적 차이를 악으로 규정짓고 차이가 있는 타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국가의 동질성 유지를 위한 정의로 위장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던 시절이었다. 이런 점에 주목할 때 김성훈의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한 인물이 처한 사회적 의미를 역사적 시간을 소환하면서 계통 발생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다. 여전히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을 1948년의 여순사건으로 기점화함으로써 김성훈의 버려진 아이들의 성장 소설로 멈출 수도 있었던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국 사회의 차별적 구조가 생산된 발생지점까지 확장하고 있다. 한덕수의 어머니인 양순임의 탄생과정은 이러한 비극을 더욱 강화한다. 그녀의 출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기입된 국가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너무나 쉽게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극화한다. 외증조할머니의 원망은 그날 1학년 1반 교실에 모인 마흔 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었다. 하지만 마흔 명의 사람 중에 엄마를 제외하고, 외할머니의 넋두리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다. 생살여탈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외할머니가 갓 태어난 엄마에게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소리는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엄마는 알지 못했다. 다만 엄마는 감각적으로 교실의 냉랭한 기운을 느꼈고, 당시의 운동장 흙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모진 말의 생김새를 봤다. (「정오의 끝자리, 빛」, 67~68쪽. 강조 인용자) 그러니까 한덕수의 어머니 양순임은 한덕수의 외할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죽던 그날 그밤 그곳에서 태어났다. 양순임은 생사여탈권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의해 결정되기도 했던 그 잔인했던 폭력의 시간에, 모두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숨죽이던 그 시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저주와 원망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아마도 그 순간 태어난 아이가 여자였기 때문에 더 가혹했을 외증조할머니의 저주의 언어는, 그 죽음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외증조할머니를 비롯한 당대 민중들의 무지로 인해 죽음과 탄생의 엇갈리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봉건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만 해석됨으로써 정작 그 본질적 원인에 해당하는 국가폭력의 무차별성과 비인간성을 삭제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유리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해석하지 않고서는 그 죽음을 의미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양순임은 태어난 순간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녀가 태어나는 그 순간 “처음 느낀 감각은 고립”(36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탄생 자체가 부정당한 양순임은 생의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봉건주의가 생산한 두 층위의 주홍글씨에서 자유롭지 못한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했던 셈이다. 4. 마산의 자유무역지구의 대폿집을 배경으로 쓰인 「홍콩빠 이모」는 「정오의 끝자리, 빛」이 보여주는 차별의 재생산을 반복한다. ‘홍콩빠’로 불리는 술집의 여주인 김명자가 느끼는 불안과 조바심을 통해 소설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반공주의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한 번 오염물로 분류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은 그 주변까지 오염의 대상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명자는 혹여라도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낙인의 대상으로 라벨링되지나 않을까 무섭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겪은 사실은 그녀의 이런 조바심이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이 대부분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기록된 온갖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극화되기 때문이다. 가령 홍콩빠의 단골이자 1980년대 산업역군으로 호명되었던 ‘공순이들’이 YH사건을 경험하면서 언어와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실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명자의 가족들의 사정을 보면, 직업학교를 다니며 구두닦이 생활을 하던 김명자의 막내동생은 4·19 시절 목숨을 잃었다(“마산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이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동생은 시위대를 이끌다 산화했다.”, 87쪽). 김명자의 남편은 베트남전쟁의 용병으로 참전한 후 고장 난 신체와 정신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 대학생인 김명자의 아들은 유신정권의 폭력성과 불합리함을 알리기 위해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아마도 소설이 생략한 작품의 백스토리를 상상건대. 김명자 아들은 이후 부마항쟁과 5·18로 명명되는 한국현대사의 정치적 비극에서 피해자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러나 김성훈 소설이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홍콩빠’를 비롯한 마산자유무역지구 일대를 해방 공간으로 만드는 이곳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연대의 장면에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김명자가 아들 또래의 노동자 ‘육손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기면서 보호하고, 그가 국가 폭력의 희생제물로 전락하는 순간을 막아서는 장면이다. 저 멀리 호각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명자의 가슴팍에는 비가 흠뻑 젖었고 바지단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김명자는 육손이가 길거리에서 몰매는 맞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옴마야. 점마 일 내것다 아입니꺼.” 김명자는 육손이에게 허둥지둥 다가가 포대기 감싸듯 그를 끌어 안았다. 옷을 적신 비 때문에 서늘한 기운이 김명자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육손이의 입에서 흘리는 몸 냄새는 김명자의 얼굴에 닿아 체온을 데웠다. “불 끄입시더. 우리! 아, 저…우리 아, 얼굴 별빛에도 비추면 안 되입니더. 불 끄입시더. 이모들이요. 이 야, 어린 것 맨상부터 가리입시더. 퍼뜩 안 하고 뭐하십니꺼. 불 꺼!” 김명자는 기운을 뻗쳐 소리쳤다. 홍콩빠의 불빛이 하나, 둘 소등됐다. 이윽고 마산 시내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홍콩빠 거리가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수선스러운 움직임이 육손이를 향해 동심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하늘에서 구름에 가린 조약돌 같은 별이 바다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사람들은 스크럼을 짰다. (「홍콩빠 이모」, 100~101쪽) 마산자유무역지구의 화려한 야경을 칠흑으로 변신시키는 “불 꺼!”라는 외침은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은폐되는 국가폭력을 일시 정지시켰다. 또 김명자를 비롯한 홍콩빠 사람들의 “스크럼”은 김성훈의 작업이 기입하려고 하는 무조건적 환대와 자기희생의 윤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면서 어두운 시대의 좌절을 이겨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마도 이 환대의 자리에 「길목의 무늬」에 등장한 ‘달순 엄마’와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김성훈 소설집의 해설을 쓰고서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흐른 후인 2024년 12월 어느 날 계엄 사태가 발생했다. 숨죽이며 상황의 흐름을 응시하던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국회와 그 인근의 거리에서 계엄군을 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을 보았다. 그들이 벌어준 30여 분의 시간이 한국사회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그들의 신체가 맞닿은 스크럼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만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와 1987년의 시청 광장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 스크럼과 연대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가 지녔던 어느 도시에 대한 부채를 한꺼번에 갚아준 장면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한강 작가의 질문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국현대사를 소환하면서 2024년에 쓰인 김성훈의 소설들이 뒤늦은 첨언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증명된 시간이었다.

계간 문학들 김영삼 차별혐오모멸치유팬데믹코로나 2025
김규성 바람재에 앉아 무등의 진경을 그리다

백수인과 이지담, 박현우는 남도의 서남해안이 고향이다. 그래서일까 알게 모르게 바다의 원초적 기억과 집단무의식이 심리와 정서의 근간을 이루며 시의 원형적 모태로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시에는 산해진미가 어우러진 혼신의 생체리듬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백수인은 선비적 기품과 육화된 지성, 이지담은 참신한 은유와 고결한 성정, 박현우는 원초적 고독으로 연마한 현실 초극의 지혜가 돋보인다. 모두가 남도와 한국 시단의 소중한 자산이다. 우주의 숨결로 흐르는 안분安分의 교향악 - 백수인 시집 『겨울 언덕의 백양나무 숲』(2024. 문학들) 1. 백수인의 시세계를 조망하려면 고향 장흥 기산마을에 있는 그의 서재를 탐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의 산 증인인 고서古書가 은은한 묵향을 머금고 있다. 한국문학사의 획기적 장르로 꼽히는 가사문학은 남도를 배경으로 꽃을 피웠다. 그 효시인 『관서별곡』은 또 한 권의 기행가사인 정철의 『관동별곡』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관서별곡』을 쓴 백광홍과 삼당시인 중 하나인 백광훈,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산 팔문장’으로 꼽히는 백광안, 백광성 등을 배출한 백씨 가문의 문학적 적통을 계승한 시인이자 국문학자가 백수인이다. 백수인은 조상의 문혼文魂으로 충만한 종가에서 나서 자라, 청·장년기를 오월의 메아리가 생생한 광주에서 복무한 다음, 여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고향집(백씨가문)으로 귀의했다. 이번 제3시집 『겨울 언덕의 백양나무 숲』(2024. 문학들)은 그 귀거래사의 서사緖詞다. 하얀 날개를 널리 펴고 창공을 비상하는 한 마리 학이라 하네 선비의 지조를 장삼자락처럼 휘날리며 천년의 세월을 날고 있는 외로운 섬이라 하네 - 「장재도」 부분 이 시에서 “학”은 “고결한 지조를 장삼자락처럼 휘날리며” “천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수절해 온 고결한 선비정신을 표상한다. 이는 면면이 이어온 백씨 가문의 전통적 가치관을 암유하며 시인 자신에게 해당되는 좌우명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지행합일의 지표는 시 「겨울의 입구에서」 암묵적 인고와 결연한 의지로 체화된다. 겨울의 입구에 서서 우리들의 오랜 동안거, 그 아득한 적막을 들여다보네 한 시절 견디고 부대껴야 했던 두 손바닥을 다시 들여다보네 겨울은 늘 우리에게 차디찬 얼음의 두께를 보여 주었지 언덕을 지나 들판을 지날 때 불어닥친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눈초리를 보여 주었지 텅 빈 들판에는 찬바람만 가득하지만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랑물은 아직도 쩌렁쩌렁 들판을 울리며 흐르고 있네 - 「겨울의 입구에서」 부분 시인은 "겨울은 늘 우리에게 차디찬 얼음의 두께를 보여 주었지"만 "언덕을 지나 들판을 지날 때 불어닥친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눈초리를 보여 주"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랑물은/아직도 쩌렁쩌렁 들판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고 술회한다. 춥고 엄혹한 시절에 직간접적으로 저항하며 오늘에 이른 견자의 서슬 퍼런 안목이 가슴을 적신다. 이 시는 시인의 귀향이 단순한 노후의 휴식이 아니라, 본연의 궁극적 자아를 추스르기 위한 새로운 동안거의 출발이라는 불퇴전의 각오를 새삼스럽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2. 바다를 원형으로 하는 유치환의 시 「파도」는 부드러운 물의 이미지가 난폭한 파도로 격랑을 일으키고, 용광로 같은 사랑의 불길로 달아오른다. 잔잔한 바다는 물의 원형으로 관조적이고 성찰적이다. 반면 물을 원형으로 하면서도 난폭한 바다는 물의 역동적 발화이다. 흔히 물과 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의 대립관계로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생명체에게 두 원소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필수적 요소다. 두 원소의 보완과 조화에 의해서만 생명체는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기운이 있어야 차가운 기온을 따뜻이 할 수 있고, 물이 있어야 뜨거운 열기를 식혀 적절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의 정신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신세계의 동적 요소인 열정이 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정적 요소인 이성은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고, 이성이 없는 열정은 맹목이다. 이성은 열정에 의해 실천에 이르고 열정은 이성에 의해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 둘의 조화에 의해 사랑은 결실을 맺고 정신은 그 건강을 유지한다. 물과 불의 아름다운 조화에 중용의 묘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백수인의 고향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남해안 산자락 밑이다. 내륙의 끝이자 해양의 시원이다. 그 접점은 통상의 경계와는 개념이 다르다. 대립이 아닌 조화, 반목이 아닌 상생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수인의 시세계는 바다와 내륙이 경계를 지우는 소실점에 터 잡고 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바다의 일상인 조수를 주제로 시 3편을 선보이고 있다. 그 함의와 이미지를 통상의 조수 순서와는 역순(썰물, 밀물과 썰물, 밀물)으로 환치해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바다가 물러서기로 마음먹을 때 물의 벼랑은 무너지네 세상의 높이와 깊이가 모두 날아가 버리면 남은 건 펄 위에 찍힌 쓸쓸한 발자국뿐이네 가파른 삶의 언덕에서 모든 걸 다 잃고 난 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 스산한 새벽바람이 일렁이는 뒷골목 희미한 가로등 밑을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이네 모래밭에 누워 배 속까지 뼛속까지 다 보여주는 해파리의 투명한 고백이네 - 「썰물 이후」 전문 위의 시는 썰물을 “가파른 삶의 언덕에서 모든 걸 다 잃고 난 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에 견주고 있다. 이는 시 「밀물」에서의 역동적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장치다. 따라서 “모래밭에 누워 배 속까지 뼛속까지 다 보여주는/해파리의 투명한 고백”이라는 마지막 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열거한 세 편의 시를 단계별로 한 데 아우르는 설계(역순의 배치)는 시 「밀물」에 앞서 중간 역할을 하는 다음의 시 「밀물과 썰물」에서 구체화된다. 이제 비로소 밀물은 썰물이 된다 썰물 모든 욕망 버리고 돌아서는 뒷모습이다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진다 꽃상여 매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소리다 그들이 다 떠나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 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 그 발자국이 깊고 깊다 - 「밀물과 썰물」 부분 뒤돌아서 가는 썰물의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지는 정경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꽃상여 매고 돌아가는 골목길에/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소리”다. “다 떠나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그 발자국이 깊고 깊”은 것은 새로운 밀물을 기약하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이때 썰물은 사적 욕망의 물결을 잠재우고 멸사봉공의 공동체적 불길/밀물로 역동화한다. 최후의 결전에 임하던 장흥 동학혁명군의 기세, 오월 금남로의 함성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들은 등 떠밀려 마지못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바위를 깎아 다듬은 단단한 신념을 품고 달려드는 것이다 하늘에 닿고도 남을 저 함성을 들어보아라 칼날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낯빛을 보아라 - 「밀물」 부분 “하늘에 닿고도 남을” 함성을 “칼날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낯빛”으로 재해석한 시적 예지가 예사롭지 않다. “바위를 깎아 다듬은 단단한 신념을 품고 달려드는” 밀물은 고향 바다의 원체험과 오월 광주의 실체험이 시공을 초월해 결합하는 교향악의 마지막 악장이다. 3. 이번 시집에서 선보인 53편의 시 제목들은 대부분 구체적 사물을 지시하는 명사가 주축을 이룬다. 시집 제목도 겨울+언덕+백양나무+숲이라는 네 개의 구상명사를 관형격 조사 "~의"가 홀로 다리 놓고 있을 뿐이다. 추상적인 관념어나 난해한 ‘안개 언어’를 배제하고 담백하면서도 진솔한 실사구시적 테제가 제목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부분은 시인의 자서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날마다 걷는다. 강가를 걷고, 해변을 걷고, 산골짜기를 걷는다. 걸으면서 거기에 깃들어 사는 존재들과 마주친다. 새들을 만나고 나무들과 마주 서고 꽃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을 만나고, 흙과 돌멩이와 바위와 물결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오는 빛깔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늘 길을 걸으며 사물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어 이를 장자의 소요유적 직관과 후설의 현상학적 사유로 내면화한다. 아래의 시 「들판에 자귀나무 꽃 피었네」도 특별한 수식 없이 사물의 생명력과 존재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때 존재자(시인)와 존재(시)는 관념의 늪을 떠나 격의 없이 한 데 어우러져 미분화의 축제를 이룬다. 들판을 걸었네 벼 포기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네 포기 사이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고 흰 구름이 둥둥 떠가고 있었네 그때 문득 들리는 소리 꽹과리 소리 깨갱 깽깽 징소리 지잉~지잉~ 장구소리 덩더꿍 덩더꿍 북소리 둥둥둥 태평소 소리 띠띠 떼떼 잔치 벌이는 소리가 온 들판에 가득했네 뒤를 돌아보니 논 가에 우뚝 서 있는 자귀나무 한 그루 그 안에 수백 송이 꽃들이 상모를 돌리고 있었네 - 「들판에 자귀나무 꽃 피었네」 전문 “벼 포기들이 쑥쑥 자라고”(시각), 덩달아 꽹과리 북소리(청각)가 들판에 가득 차자, 저만치 서 있던 자귀나무도 어느새 다가와 배경에서 전경으로 동참한다. 들판이 온통 “수백 송이 꽃(후각)들이 상모를 돌리”(촉각)는 공감각의 대연회를 이룬다. 오감이 풍성한 자연친화적 감각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는 절창이다. 소동파는 가는 곳 마다 비록 유배지임에도 그곳에서의 정착을 꿈꾼다. 장소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달관의 경지에서 현실에 초연한 단면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첫 유배지 황주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자 “황주에서 오래 적거한 탓에 이젠 평안하게 이 땅에 안주할 수 있게 되어, 본래의 황주사람과 똑같다”고 여긴다. 또 두 번째 유배지 혜주에서는 “이제는 북쪽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혜주사람이라 생각하고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 이와 같은 현지에의 귀속 의식은 낯선 마지막 유배지로 위리안치의 형극에 내몰린 해남도조차도 담담히 죽음을 준비하는 종명지로 여기게 한다. 백수인의 시에서도 이와 같은 현존재로서의 공간 의식에 숙련된 여유와 행간의 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는 거추장스런 수식이나 화려한 기교를 배제, 조촐하고 소박한 언어로 자연에 의해 정화된 감성을 소담하게 그린다. 이를테면 자연의 속성을 자연스럽게 한 폭의 수채화로 담아낸다. 그에게 현실은 유토피아로의 공상적 일탈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 속에서 일상의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는 실존의 향연이다. 그 소요유 속에서 지혜롭고 성실한 자기관리에 의한 ‘중용의 자유’가 일상화된다. 따로 상상력의 수고를 빌리지 않아도 주위의 대자연에 눈길만 돌리면 별세계가 펼쳐진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만 하면 현실 속에서 탈속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문장으로 새긴 경건한 사유의 향기 - 이지담 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2004. 문학들) 1. 본성, 즉 마음의 바탕은 원래 티 없이 맑고, 두루 밝고 고요해서 어떤 번뇌도 두려움도 없는 지고지순하고 지극한 경지이다. 온전한 마음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자아를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기에 수행자는 혹 그 마음이 잠시나마 흐트러질까 봐 외부의 훼방을 경계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동시에 그 지극한 경지를 어린애처럼 누린다. 온전한 마음에 지극히 머물며, 그 마음 씀을 오롯이 하면 텅 빈 마음이 맑고 고요함으로 충만해진다. 그 상태여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을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주의 유기적 분업체로 가장 바람직한 경지이다. 어느덧 이순을 넘어선 이지담의 시에는 본성에 천착하는 구도자적 포즈가 내면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제4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에는 먼 집, 먼 일, 먼 기억, 먼산바라기 등 ‘먼’이라는 시어가 수식하는 시 제목이 눈에 띈다. ‘멀다’의 활용형인 ‘먼’은 거리와 시간, 즉 시공간을 아우르는 수식어로 현재의 자아(가까움)를 부각시키려는 일련의 언어 장치이다. 이는 시의 제목뿐 아니라 다수의 시에서도 그 핵심어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성정의 고삐를 수시로 다잡는 자기 도야의 일환이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시작된 혼자만이 건너야 할 길/아직 멀다(「출렁다리」) 너무 멀다, 보고 싶다를 구름에 띄워놓고(「침묵의 꽃」) 어둠과 빛이 출발선상에서 자세를 낮추고/ 멀리 보는 눈으로 또 다른 문장을 쓰는 중이다(「감자북을 쌓다」) 멀리 오름이 지표처럼 보이고 공포가 자라 잡풀이 무성한 곳(「다랑쉬굴 입구에서」) 먼 거리는 태생 이전부터 하나로 엮어 있다는 다른 말일 뿐인데(「먼나무」) 멀리 더 멀리 날아갔다 돌아오는 새를 반긴다(「먼나무」) 아침마다 뻐꾸기 소리 들으며 먼 길 배웅한다(「먼 길」) 먼 나라 아이들에게 손을 뻗어 빛이 되어 준 사람(「여행자 2」) 먼 이방인들이 발길 멈추지 않은 것은/예를 다하고 있는 풍경에 취하고 싶을 뿐(「면앙정에 올라」) 책상 위의 문양이 휘어지는 쪽에 앉아 멀리 보면/더 작아지지 않아도 되는 밤이 아직 남아 있었다(「라플레시아, 안녕」) 장자는 상상력의 무한 확장을 통해 자아와 우주만물의 상대성을 해체해 버린다. 우주 만상을 맘대로 재단하고 누리는 우주적 상상력의 요술대 위에 놓이면 지상의 어떤 상처도 먼지 한 점으로 작아지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허공으로 부풀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아래의 두 연은 시 「구겨진 종이」의 일부인데 연마다 “멀리”라는 수식어가 사건의 전말을 지시하고 있다. 장자의 우주적 스펙트럼을 내밀하게 재구성한 제2의 창조를 연상케 한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종이를 날려 봅니다 멀리 가지 못하고 발등에 떨어집니다 상처가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구겨 버립니다 그늘의 무게를 담은 종이를 던지니 멀리 달아나는 구겨진 종이를 바라봅니다 - 「구겨진 종이」 부분 아무리 깨끗한 백지도 넓게 펼쳐진 평면 자체로는 날지 못한다. 일단 종이비행기로 접어서 공중에 띄워야 멀리 날아간다. 그런데 시인은 “그늘의 무게를 담은 종이를 던”진다. 그것도 “상처가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구”긴 것이다. 그리고 “멀리 달아나는 구겨진 종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종이비행기의 비상은 상처/그늘과의 결별을 뜻한다. 그것은 백지, 즉 순수 본연을 회복하고 지키려는 구심력의 일환이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에 자신과 공존한다는 사실을 사물과의 소통을 통해 깨친 시인의 실존적 자기 확인인 것이다. 심원하면서도 비근한 통시적 원근법의 실체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지담은 화려하지 않게 빛날 줄 아는, 평범 속에서 특별한 가치를 발휘하는 비결을 조곤조곤 일러주고 있다. 인류의 행복이나 위대한 업적에 가려 돋보이지 않을지라도, 작은 개인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자세는 시인에게 그 어느 것보다 필요한 덕목이다. 이지담은 작고 하찮은 것 속에서 진리의 핵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다듬고 닦아 지성의 좌대에 올려놓는 세공사이다. 2. 개체적 자아의 완성을 통해 전체적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이지담 시의 핵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인 나와 사회 구성원인 나의 이중적 존재이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룰 때 나의 삶은 비로소 완벽에 이른다. 자아를 도야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인격의 가장 이상적 경지이다. 인격은 나와 우주/사회의 거리를 측정하는 척도인 것이다. 대부분의 남도 지성이 그렇듯 이지담의 인격적 토양은 참신한 자아에서 사회적 결사結社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예컨대 건강한 역사의식을 배경으로 발화한 비판적 리얼리즘, 무궁한 생명애, 사회정의를 기표로 한 휴머니즘이 그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시를 통해 새롭게 승화된 역사적 과제는 제주(활주로 무덤)→광주(마지막 승객)→서울(딱 하루만)로 이어지며 꺼지지 않는 촛불의 숭고한 역사성을 공통의 의미소로 재현한다. 유채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착륙하고 꽃에 취한 사람들이 육지를 향해 이륙하는 활주로 바닥 아래 잠겨진 열쇠는 기억을 두드려 빚어내야 한다 한라산 중간산에서 내려가라는 말에 살던 집을 버리고 살기 위해 내려온 사람들 잡풀인 듯 베어져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이름 없는 영혼들이 잠든 활주로 하루에도 수십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 「활주로 무덤」 부분 괜찮니, 물음에 대답이 없다 텅 빈 차 안 유리창이 깨지고 승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흥건히 고인 피 멸종을 바랐을 밤은 새벽을 끌고 오고 있었다 - 「마지막 승객」 부분 그저 딱 하루만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소소하게 웃어보자고 나선 길 이태원길에서 해일처럼 밀려든 인파에 웃음은 난파되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SOS 문자를 보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 - 「딱 하루만」 부분 이지담은 민족적 비극과 비상식적 참극을 떠올리며 그 유훈을 일상의 평화와 새로운 기운에 상응하는 유채꽃(제주4.3), 새벽(광주 5월), 소소한 웃음(서울 이태원)으로 상징화한다. 나아가 사건의 핵심을 절제와 함축, 내면화된 육성으로 차분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재조명한다. 3. 사색과 명상, 고요한 기도는 자신과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칸트가 평생을 시골에 묻혀 오솔길 산책을 즐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별장의 대부분도 그런 고요와 한가함이 주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수행 정진을 일삼는 스님들도 한사코 깊은 산중을 찾는다. 자신과 만나는 것은 자신과의 내밀한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을 의미한다. 소로는 두 해 동안 오지의 숲속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생활한다. 거기서 『월든』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다. 이지담의 이번 시집에도 자연을 벗 삼아 번뇌를 씻고 사색의 지평을 심화해 문향을 꽃피운 누정 문학의 산실·환벽당·면앙정·연계정 등을 주제로 한 시가 눈길을 끈다. 환벽당 마루 위에서 장삼자락 늘인 채 버선발을 옮기며 영혼에 숨길을 불어 넣는다 춤사위는 이미 누군가에 전이되어 판소리 가락을 열고 들어가 옛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니 나무들도 푸르름으로 어깨를 들썩인다 백수를 누린다 해도 연못에 핀 연꽃의 순간에 지나지 않으려나 - 「순간이 영원으로」 부분 죽창처럼 푸르던 벼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데 면앙정에서 책을 읽고 가르치는 강학소리 - 「면앙정에 올라」 부분 무거운 돌에 눌린 시간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 허허벌판 말고삐를 잡고 달려오는데 멀리서 통행금지 해제를 올리는 파루의 종소리 가슴을 때린 적이 몇 번이던가 묵은 숙제를 풀며 국화주 한 잔 따라마시며 차가운 마음을 녹입니다 - 「미암일기」 부분 편지 사이사이 묻어둔 행간 연못 위의 발자국을 지우며 내리는 가랑비에 젖어 연계정은 홀로 앉아 물 위에 뜬 모현관을 들어 올린다 오랜 친구인 침묵을 품에 안고 한 구절도 고쳐 쓰지 않았으므로 먹구름이 세상을 뒤흔들 때마저도 그 너머에서 빛을 내는 볕을 키워냈던 것처럼 뒤뜰 대숲을 흔든 바람이거나 참새들이 밤낮 소란스레 지껄이는 지저귐도 쌀뜨물 가라앉히듯 하였으니 너무 멀다, 보고싶다를 구름에 띄워놓고 눈 위에 발자국만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던 시간 뚜렷하게 보이는 침묵을 받아 적어 남긴다 가장 선명하게 피워낸 그 순간들 - 「침묵의 꽃」 전문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마음을 묶어 두려고 일부러 애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마음은 억지로 다스리려 들 때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방어기제의 일환인 무의식 속 억압의 심연으로 잠수하여 끊임없이 존재감의 노출과 탈출을 시도한다. 따라서 제멋대로 고삐를 풀고 달아나려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제어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는 마음의 고삐를 풀어주고 그 향방을 살피는 내면의 환기와 집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끄는 바깥 환경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산만하고 왜곡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맑고 상쾌하게 다독여 주는 산이나 강, 너른 들판, 고요한 호수, 쾌적한 숲, 한적한 오솔길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이지담은 그렇게 정화된 청정한 마음으로 자아를 다스려 이웃과 만나고, 이를 시로 형상화 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꽃의 수사修辭와 사색의 밀도 - 박현우 시집 『멀어지는 것들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다』 (2024.문학들) 1. 절실하게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은 치열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축제를 의미한다. 『백경』에서 고래와 싸우는 선장이 그랬고 또 소설을 쓰는 멜빌이 그랬다. 과거나 미래를 떠나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허락된 유일한 시간이다. 잡념이나 상대적 관념 따위가 낄 틈이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즉 사물을 향한 순수하고 온전한 상태의 몰입은 작가에게 밀도 깊은 생명력과 창조력을 선물한다. 박현우의 시는 사물과 혼연일체를 이룬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부터 “꽃”을 빌려 그의 시가 사물에 대한 몰입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다. 꽃밭에는 수 없는 풀꽃들이 피고지고 나를 잃어버린 언어들이 윙윙거렸다. 꽃의 수사修辭, 사색에 익숙해질 무렵 꽃의 이면을 탐하는 벌 나비가 부러웠다. 아니다 가까이 잡꽃이 윙윙거리는 소박한 언어이고 싶었다 - 시인의 말에서 이를 방증하듯 이번 시집 2부는 하나같이 다양한 ‘꽃’들이 제목을 이루고 있다. 3부의 「달맞이꽃」, 「11월 철쭉이 피었다」, 4부의 「물봉선 비에 젖는」 등의 시도 꽃을 주제로 하고 있다. 1부의 「분갈이」도 꽃을 가꾸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호접꽃」을 보자. 생기 잃은 손 잡아주다 향기마저 잃은 채 멍울져 오던 초라함이 꽃이 되는 지상의 역설 마주하며 난감한 현실이 꿈이 되고 꿈꾸는 너의 색에 취한 취객일 뿐이라서 꿈이라도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인데 - 「호접꽃」 부분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을 연상케 한다.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구분하지 않고, 꿈속의 환상을 전경화 한다. 새삼 꽃에 대한 몰입도를 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자기 최면은 아래의 시 「천리향」에서 고차원의 사유를 동반한 실존적 자각으로 의미화 된다. 식목일 시청에서 나눠준 천리향 한 그루 뭉툭하게 잘린 뿌리 마음에 묻은 여러 해 천 리를 간다는 향에 취해 시름을 떨치던 일처럼 살도록 그늘 한 번 된 적이 없는 냉가슴 열어보니 나잇살이나 잡수신 맹환이네 팽나무가 느닷없이 다가와 사랑앓이나 하는 듯 아노래* 골목을 덮기도 하여 보고 싶단 말보다 더한 가슴을 달래주는 것이어서 무심을 붙안고 천리만리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은은함이 그늘 됨을 알았네 *진도 고군 자막리 골목 이름 - 「천리향」 전문 시인은 이름처럼 "천 리를 간다는 향"이 실은 "무심을 붙안고/천리만리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은은함"으로 환치되는 사실을 깨친다. 그리고 거기에서 산출된 “그늘”을 사회적 메시지로 부각시킨다. 2. 눈에 띄지 않게 묵묵히 보편적 가치와 자신의 세계를 성실하게 가꾸고 실천해 가는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어느 위대한 업적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중요하다. 행복의 요건 중에 크고 작고 따위의 구분은 따로 없다.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저마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하찮은 것 속에서 귀한 것을, 숨은 것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눈과 귀와 감각이 필요하다. 박현우는 일상의 다반사인 “설거지”(작은 것)를 주제로 적폐 청산(큰 것)의 막중한 과제와 방법론을 환기시킨다. 날마다 우리 살아 있음을 이토록 진지하게 씻어내는 일 빈부가 문제랴 누린 만큼 눌어붙은 고상한 찌꺼기들 저희끼리 냄새피우는 일 지천인지라 새삼 놀랄 일 아니라 쳐도 잠깐 한눈팔아 보시게 순간에 기생하는 벌레 같은 것들 반드시 죽치고 앉아 오감을 자극할 것이니 되도록 빠르게 뽀득뽀득 씻어내야 하네 적폐청산 참 좋은 설거지네만 꽉 달라붙은 밥풀때기 하나라도 어디 쉽게 떨어지던가 - 「설거지」 전문 제철이라는 죽순나물 한 잎 오물거리다 말고 내 맘대로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등짝을 어루만져 쓸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왈칵 소름이 돋았네 - 「안아주기」 부분 시인은 “잠깐 한눈팔다 보”면 “순간에 기생하는 벌레같은 것들이/반드시 죽치고 앉아 오감을 자극할 것”이라고 경계한다.(「설거지」) 그리고 “내 맘대로 보지도 못하고/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등짝을/어루만져 쓸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면 “왈칵 소름이 돋”는다(「안아주기」)고 자신의 무감각에 스스로 일침을 가한다. 이와 같은 무감각은 그 파장이 사회적 적폐로 확산될 때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따라서 “적폐청산 참 좋은 설거지네만/꽉 달라붙은 밥풀때기 하나라도/어디 쉽게 떨어지던가”라는 자조적 청유를 빌려 무감각한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인생은 여행이다. 그리고 그 여독으로 크고 작은 상처가 동반하기 마련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찾아내기는 쉽다. 다만 눈을 감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못 찾을 뿐이다. 상처는 몸을 작게 움츠리고 은밀히 숨어있다. 그러나 그 흉터는 크다. 자기 이외의 몸집까지 욕심껏 껴안고 있기에 덩치는 더 크다. 그럴수록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상처의 실물은 비로소 가까이 다가온다. 3. 사물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종전과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에는 그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겠다는 의지가 숨어있다. 반조가 따르지 않은 개혁은 정교하지 못하다. 신앙에도 믿음의 전제조건으로 반조와 참회가 따른다. 따라서 시의 미학에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뿐 아니라 상처를 다스리는 불완전한 존재, 즉 상처의 주체로서의 자신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철거 아파트 담벼락에 오누이가 앉아 볼록렌즈에 찬 빛을 담는다 참새 두 마리도 간이 빨랫줄에 앉아 시린 볕에 날개를 그을린다. - 「데칼코마니」 전문 시는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야 하는 종교와, 다분히 관념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철학에 비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물을 새롭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는 실제적이다. 그러나 이미 신이 창조한 사물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창조해야 하기에 종교나 철학에 비해 추상적이고 고독하다. 우주를 설계하고 만물을 골고루 특이하게 빚은 신의 손길에 걸맞은 상상력과 언어의 조탁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박현우는 시의 도처에서 “손님은 갔는데 옆 교회 첨탑에서 까치가 운다(「술의 화법」)” “밤이면 구슬픈 여귀곡이 들렸다는 둠벙/비수 품은 달이 꽃단장한다(「궁녀둠벙」)” 등의 절묘한 구절을 선보인다. 아래의 시구도 음미할수록 맛과 멋, 향기를 더해주는 절창들이다. 갈꽃 날리는 극락강에 낙싯대를 폈다 흔들리지 않는 찌불을 긴장으로 보라보는 것은 상처 난 잎들 가장 가벼운 여행처럼 극락강역 마지막 기적이 환청이길 바라서다. - 「조락凋落」부분 오는 길 정 맞은 돌 몇 주워 빈틈 많은 생의 구멍을 메워볼까 하는, - 「모난 돌」 부분 고향집 매화송이 눈을 뜨면 지시락 물 받던 대야 가득 어머니 빨랫물이 주인 없이 넘치겠다. - 「봄비」 부분 짜낸 것만큼 얼룩진 시선들이 있어 비워야 빛나는 것들 주무르며 마음에도 걸레 하나 챙겨둘 일이다 - 「문득」 부분 타들어 가는 사랑이 길게 늘어선 화장터 슬픔이 슬픔을 화장하는 동안 - 「물봉선 비에 젖는」 부분 사위를 날아오르던 늙은 새 갑판 구석에 둥지를 틀어놓고 칠게 구멍 더듬다 와 졸고 있다 - 「벌포리 바닷가」 부분 시인들은 창작이 원활할 때는 황홀한 자기만족을 맛보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심각한 내적 진통을 앓는다. 그러면서도 그 고통스런 작업에 혼신을 쏟아 몰입한다. 회임의 기대감과 출산의 희열은 고통조차도 산고의 통과의례로 음미하게 부추기기 때문이다. 박현우의 시는 일상의 고통과 고독을 연마해 충일한 생명성으로 형상화한 인고의 결집이다. 그 저변에는 오랜 시적 내공과 연마, 대자연과의 물아일체에서 체화된 심층적 사유가 담겨있다.

계간 문학들 김규성 백수인 시인이지담 시인박현우 시인남도 시남도 서정시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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