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 2024년 봄호(제45호)

무신경이라는 전략 : 담론과 현실의 거리

최선교 문학평론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인간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는 순간에 가장 먼저 ‘비인간 동물’을 떠올리고 그것을 쓰려는 일은 처음부터 ‘올바른 전제’에서 이탈하며 실패한다. 왜냐하면 비인간 동물에 관해 쓰는 일은 이제 어느 정도 비슷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대부분 글은 인간과 비인간의 불분명한 경계를 시의 말하기에서 확인하는 도착지에서 만난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호출한 전제─어떤 의미에서든지 ‘인간이 아닌 것’에서 ‘동물’을 연상하는 행위─는 글이 도착한 결론과 어딘지 들어맞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을 남긴다. 기분이라는 말은 조금 무책임하지만, 어찌 됐든 비인간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여전히 인간과 비인간의 무의식적 구분이 꾸준히 작용한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하려는 것은 무의식적 구분을 전제로 한 비인간 담론이 어떤 종류의 오류를 품고 있는지 밝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비인간을 둘러싼 ‘담론적 사유’와 내가 자연스럽게 호출한 ‘무의식적 전제’ 사이의 괴리감이다. 때로 인간과 비인간의 무의식적 구분은 능란한 담론의 논리적 전개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곧바로 중단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무의식이 현실적 체감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 괴리감을 해결하려는 일은 곧 담론적 사유와 현실적 체감 사이의 넓은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비인간과 관련된 담론에 현실적 체감이 없다거나 지나치게 현학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하고 싶지 않다. 담론은 잘못이 없다. 담론을 체감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일은 일정 부분 독자의 몫이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비인간과 관련된 글을 쓰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개인적 진심이 몹시 필요했다. 불현듯 떠올린 일화는 이런 것이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은 3층짜리 주택의 꼭대기 층에 있다. 이 주택은 일반적인 한국식 건축물과 다른 형태로 설계되어 어느 건축 채널인가에 소개가 되었다고도 들었다. 건축의 심미성과 실용성은 다른 문제인지 몰라도 모든 문들의 틈이 아주 성글고, 벽과 바닥의 마감이 거칠다. 좋게 말하면 낭만적인 유럽식 주택을 떠올리게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살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다. 집의 내부는 10평이 안 되는 복층 구조이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이 있고 2층은 침실로 사용한다. 침실이라고 해봤자 침대 하나와 잡동사니를 놓으면 꽉 찰 정도로 비좁은 다락방이다. 키가 큰 사람이 완전히 일어서게 되면 삼각형 모양의 지붕에 머리가 닿는다.


  비가 거세게 내리던 여름밤이었다. 2층에서 잠을 자면 보통 수준의 비만 내려도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무척 크게 들린다. 그날 새벽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전 집들에서 나를 지켜 주었던 이중 유리창이나 공동 경비실의 관리인 등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느낀 것은 큰 공포였다. ‘비가 내린다는 건 이런 의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나는 집에 있었으나 특수한 공간의 형태로 인하여 (보통의 경우라면 문명의 기술이 일정 부분 차단해 주었을) 외부 환경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따라서 그날 비가 내리는 기후 상황은 죽음과 부상에 대한 공포로 직결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내가 떠올린 것은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함께 뜬금없게도 내가 지난날 도로 옆 빗물받이에 버렸던 담배꽁초였다. 사람들이 빗물받이에 버린 쓰레기가 하수구 역류의 원인이라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다. 내가 비 오는 밤마다 공포를 느끼던 그해 여름에, 신대방역에 살던 친구의 반지하 자취방이 물에 잠겼다. 나는 그제야 작은 쓰레기를 빗물받이에 버리는 습관, 특정 지역의 반지하에 살 수밖에 없던 친구의 경제적 상황, 날씨가 궂을 때 외부 자극에 대한 민감성이 높은 사람의 심리 상태 등이 모조리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이 일화를 두고 다음과 같은 비판적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경우에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한 철학자는 자신이 기르던 토마토밭에 과자 부스러기를 버리려던 순간, 이 쓰레기가 자기 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흙과 살 사이의 유대감에 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나는 재작년에 발표한 글에서 이 일화를 사례로 들며 “철학자가 흙을 곧 자신의 식사로 연결했기 때문에 과자를 버리지 않았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만나게 된다”고 비판한 적 있다. 당시에는 자연이 인간의 자아를 이룬다는 깨달음이야말로 흙이 살을 위해 봉사한다는 식의 위계적 구도를 형성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런 비판은 나의 현실적 체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자연과의 연결감을 피부로 체험하게 된 계기는 그것이 나의 생명을 위협하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비인간과 관련한 담론적 사유와 개인적 체험은 동일한 논리로 전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비인간과 관련된 사유에서는 두 층위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둘 중 하나를 옳거나 그른 것으로 택할 수도 없다. 서론에서 언급한 어딘지 들어맞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의 정체는 여기에 있었다.


  이 괴리감을 안은 채로 문학장에서 비인간을 언급하는 비중이 높아진 상황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나의 개인적 일화와 비슷한 논리라면) 동물의 등장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에 관해 사유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나에게는 비인간 담론을 탐구하려는 시도를 일축하거나 폄하하려는 의도가 없다. 다만 이런 질문들은 동물에 관한 논의가 유행 담론처럼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비인간의 존재가 소재주의적 명명으로 전락하는 싱거운 광경을 연출하고 싶지 않은 소망을 담고 있다. 비평장의 비인간 담론이 어떤 모양으로 진행될 수 있을까? (대략 한 계절 전의) 선행 비평 논리를 일반론으로 환원하여 그것을 비판하는 변증법적 전개를 띄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이러한 전개 과정 자체가 비평의 태생적인 생산 원리일까? 나는 비인간과 관련된 선행 문학 비평의 흐름을 다음과 같은 일반론적 문장들로 정리해 보기도 했다.


  평론가 A는 작품에 등장한 인간 화자와 비인간 대상의 관계를 두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실천으로 읽었다. 그러자 평론가 B는 인간과 비인간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종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읽는 비평의 욕망을 비판했다. 문학에서 비인간과의 유대 관계를 사유하는 비중이 늘어난다는 사실만으로 윤리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한편에서 평론가 C는 진짜 문제란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적 전제를 유지한 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비인간에 주목하는 비평들이 모두 이와 같은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평론의 제목을 밝히지 않으면서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흐름을 정리한 이유는 개별 평론에 대한 평가보다 이런 흐름의 본질이 더욱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방금 한 것처럼) 비인간 담론과 관련된 사유를 일종의 변증법적 전개 방식으로 파악하고 무엇이 무엇보다 더 ‘윤리적’인 논리인지 검증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경우, 동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는 피로감만 누적될 뿐이고 담론의 생산적인 확장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내가 신이인의 시집을 읽기 시작했을 때 맞닥뜨린 어려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신이인의 『검은 머리 짐승 사전』(민음사, 2023)을 읽고 동물이나 비인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물을 이야기하고 싶은 이 당연한 욕망이 수상하게 여겨졌다. 비인간 담론에서 일차적으로 화두에 오르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어떤 방식으로 사유할 것인지,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시선과 발화의 독점 여부이다. 현재 문학 비평의 경우는 시집에서 드러나는 후자의 양상을 관찰하여 전자의 사유를 확장하려는 작업이 될 것인데, 이 시집에서 시적 대상의 호명과 동일화 양상은 문학이 동물을 초대/소환할 때 일차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시선과 발화의 독점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무시한다. 쉽게 말해 독점하지 않으려 하지 않고, 그냥 독점한다. 신이인의 시집에서 시적 대상을 호명하는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현재 한국 문학이 생산하는 비인간 담론과 무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집은 “이제는 굳이 말을 고르지 않습니다. 막, 공들여, 애써서 얘기하지 않아요”(「검은 머리 짐승 사전」)라고 선언하며, 시집을 독해하는 과정에 삽입되는 당대성을 엄숙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환한다. 이 선언의 극단적인 증거는 「펄쩍펄쩍」이며, 이 외에도 동물 이미지의 재현 방식이나 ‘호명’ 등의 소재를 통해 신이인의 시집을 읽는 ‘여러 가지의 올바른 방식’ 중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마음은 주로 개구리였다”(「펄쩍펄쩍」)는 문장이 이 시집에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이인의 시집에 이 문장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개인의 취향을 넘어 제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어야 할 리듬과 문체와 이미지가 비로소 등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펄쩍펄쩍」은 단순하고 정직한 시다. 이 시는 ‘마음’을 ‘개구리’로 결합하는 은유로 첫 문장을 용감하게 적어 낸다. 현대 시에서 은유의 원관념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통설로부터 과감하게 역주행한다. 상황이나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여지를 남기지 않는 「펄쩍펄쩍」에서는 “축축”하거나, “쪼그라”들거나, “긴 다리를 힘껏 뻗”는 이미지들이 연결되며 “마음대로 나를 떠”나는 ‘마음’은 “징그럽고 뻔뻔한 개구리 자식”이라고 정확히 명명된다. 은유적 수사의 기본 원리인 유사성의 원리를 따르는 이 시는 “나는 마음의 배를 갈라 죽이고 싶었다”는 대목에서 은유적 결합의 묘미를 보여주는데, 곧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나쁜 게 아니다”라는 문장이 따라붙으면서 ‘굉장히 다양한 측면에서’ 2024년에 읽어야 할 시가 이런 모양이라는 사실을 상상하게 한다.


  ‘굉장히 다양한 측면’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시집에는 「펄쩍펄쩍」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갈라파고스섬에 남겨진 마지막 코끼리거북인 외로운 ‘조지’를 소재로 한 (비인간 담론으로 아주 순조롭게 연결될 수 있는) 「외로운 조지-자폐」나 「외로운 조지-Summer Lover」 , 아니면 「도마뱀」 같은 시가 함께 실려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좋다. 가령, 「도마뱀」에서 화자와 시적 대상이 만나는 방식은 「펄쩍펄쩍」의 그것과는 다르다. ‘고구마밭’에 있는 ‘나’의 “낯설게 말”하기는 깊은 곳에 묻혀있다가 줄줄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의 이미지와 “일 초에 삼백사십 미터를 간다”는 ‘도마뱀’의 리듬을 결합하여 재현된다. 이 시에서 이미지가 연상되고 확장되는 양상은 무척이나 자유로운데, 여기저기로 뻗어 나가면서도 결국에는 꽤 단정한 방식으로 봉합되므로 선명하다. ‘나’의 “낯설게 말”하기와 시적 이미지들은 전이의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가운데서도 양쪽 모두 살아남는다.


여백 없이 꽉 찬 섬이다
나무도 우리고 돌멩이도 화산도 우리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이 잡듯이 따 낸 우리고
야생동물은 정수리에 손도끼가 꽂히게 될 우리
어제는 피를 묻혀 가며 뼈를 뒤졌고
오늘은 불을 피우고 노래를 불렀지
내일은 껴안고 자다가 입 냄새를 맡을 거다
마실 물이 없어서 오줌을 마실 지경이 됐을 때
낡아 떨어진 옷과 야하지 않은 몸
수백 일이고 안 씻은 얼굴 앞에서 우리는

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딛고 서 있었다
주제에 낙원이었고
─ 「신혼여행」 부분


식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 버거웠고
나에게 없는 식물이 너무 버거워서

(...) 잠 안의 꿈 꿈 안의 나 나는 계속해서 잠을 시도했어 그런 식으로 화분이 흙과 동일해 왔어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서 까맣게 젖은 나의 일부에서 무엇이 시작되리라고 여기지 않아 아직도 이 진흙의 이름을 모르고 있어
─ 「멀미와 소원」 부분


  맥락적 유사성을 경유하여 “나무”, “돌멩이”, “화산”, “열매”, “야생동물” 따위의 것들이 “우리”로 전이될 때 드러나는 시선과 발화의 양상은 어떤 방식으로 비인간을 이야기하는 담론과 조우할 수 있을까?1) 혹은 ‘화분’과 ‘흙’이 포개어진 모양새가 ‘나’의 내면의 발산과 연결되는 방식은? 시적 대상과 발화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신혼여행」의 경우는 대상과 “우리”가 빼곡하게(“여백 없이 꽉 찬 섬”) 일치하며, 종국에는 “섬” 자체가 “우리”로 환원된다. 「멀미와 소원」에서 잠을 자며 꿈을 꾸고 꿈-공간 내의 ‘나’을 인식하는 화자는 “그런 식으로” ‘화분’과 ‘흙’을 재현한다. 심지어는 대상을 딛고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인 “까맣게 젖은 나의 일부”에 주목하며 시를 마무리한다.


  비유에 담긴 정치성을 중심으로 이 시집의 말하기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유의미한 작업이 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김혜순은 자신의 시론에서 전통적인 언어학의 이항대립구조를 ‘일부’ 계승하며 은유와 환유 체계를 비교한다. 은유는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가 혼재된 존재를 동시에 발생시키는 ‘여성적 발화’의 환유와 대비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은유와 환유는 상호배타적 개념이 아니므로, 은유와 환유의 대립 구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적 대상의 개별성이나 구체성을 일방적으로 추상화하는 권력에 대한 경계심이다. 모든 은유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은유적 수사에서 특정한 경향이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은유는 자연을 외부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자아의 시선으로 포획한다고 해석되는 일부 서정시적 문법과 연결된다.2)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두 시의 공통점은 화자와 시적 대상이 꽤 선명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양상인데, 이때 시선과 발화는 명백하게 화자에게 할당된다. 화자의 세계관이 육화하여 드러나는 것이 시선과 발화의 방식이라고 할 때, 고려해야 하는 이 시집의 말하기 방식은 어떠한가? 물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시적 대상을 재현하는 태도는 인간 중심적인가? 이 시집에서 담백한 방식으로 시도되는 온갖 종류의 수사적 전략은 선험적 이론을 증명하려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막, 공들여, 애써서 얘기하지 않”는 목소리는 오히려 문학에서 비인간을 사유하려는 비평적 시도를 다소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신이인 시집에서 발견되는 수사적 전략의 무신경함은 동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 하나의 말하기 방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일깨운다.


그런데 우린 어쨌든 함께해야 한다고 영원히 말이야 밖 같은 건 하등 쓸데가 없다 화해하지 않으면 고통뿐인 멍청이들의 상자 멍청해서 모서리도 없는 상자의 핵이 바로 나고 나에게는 너다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
─ 「평화로운 가정」 부분


  인간과 비인간은 그 명칭이나 경계를 아무리 다양한 방식으로 사유한다고 하더라도, “화해하지 않으면 고통뿐인 멍청이들의 상자” 속에 공존한다. 나는 이 시에서 “멍청이”라는 호명이 정확하게 나에게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낀다. “밖 같은 건 하등 쓸데가 없다”는 선언은 그냥 진하게 “화해의 의미로 딥 키스”나 해버리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이것은 사유의 포기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용감한 방향 전환을 강제하는 욕망이다.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신이인의 시집이 비인간 담론에 소환되는 과정에서, 단일한 양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 시집의 말하기 방식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동물’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에서 ‘멍청이’로의 낙차, 그리고 다시 ‘동물’로 이어지며 도약하는 두 번의 낙차가 신이인의 시집에는 있다. 자유자재로 시도 때도 없이 발견되는 천방지축한 이미지들과 수사적 전략이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신이인의 시집은 안전한 이중 유리창 안에서 시적 대상에게 ‘실례’를 범할까 봐 고상을 떠는 것이 아니라 막 말해 버린다. 그래서 문학을 비인간 담론에 포섭하려 하거나, 선험하는 일반론을 증명해 줄 작품을 찾으려고 하는 비평적 욕망을 멋쩍은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우린 어쨌든 함께해야 한다고 (...) 모서리도 없는 상자의 핵이 바로 나고 나에게는 너다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가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에코리브르, 2023)에서 “정치는 이성에만 기반한 적이 전혀 없다”고 한 말의 의미는 당연하게도 반지성주의적 선언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인류세 시대는 지질학적 행위자인 인간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변이된 자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사유를 적극적으로 배치하라고 요청한다. 이 과정은 인간 이성의 개입을 요구하는 경향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의 전통 아래에서 자란 차크라바르티는 정치가 이성에만 기반해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인류세라는 개념에서 파생될 계몽주의적 사고관을 차단한다. 정치가 이성에만 기반해 있지 않다는 주장의 이유는 서론에서 언급한 담론과 현실의 격차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인류세 시대의 위기를 직면하여)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담론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현상과 그러한 사유가 현실의 정치적 실천으로 실현되는지의 여부는 가끔 별개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사유와 현실의 간극을 ‘시’ 혹은 ‘시적인 것’으로 명명한다. 차크라바르티는 ‘인간’이 ‘인간이지 않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인류세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로 연결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베물라의 우주론적 해방의 상상력이 결국 시적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것의 사유자들은 아직 과학의 여러 분야가 제공하는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 즉 인간의 몸이 그 경계에서 서로 스며들 수 있고, 다른 형식의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필연적으로 그것을 통해 교통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것을 구축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3)


  ‘정치적인 것을 구축하는 방법을 모르다’는 문장은 비인간에 관련된 사유가 ‘시적으로 남아 있는 이유’가 된다. 이런 연결은 ‘시적’이라는 말을 온갖 현실 구축적인 것에서 분리하지는 않는가? 그럼으로써 시를 관념론적 세계로 한정 짓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차크라바르티가 정치적 사유의 한계를 맞닥뜨린 지점을 ‘시적’이라고 명명했을 때, 오히려 ‘시적’이라는 말 속에 숨겨진 비인간과의 근원적인 연결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어서 차크라바르티는 인도 시인 타고르의 문장을 인용하며 “인간을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모두에 연결하는” 것이 “시인의 비전”이라고 말한다.4) 그리하여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사유해 온 인간 개념을 확장하는 (담론의) 과정은 근원적으로 시적인 행위로 해석된다.


  담론이라는 말을 구태여 빌려오지 않더라도 시의 말하기 방식은 언제나 인간이 아닌 것, 인간을 확장한 것, 인간과 연결된 것을 사유해 왔다. 이 문장을 적은 뒤 여러 번 읽어 보았다. 그리고 글의 결말에서 쓰인 이 문장이 어떤 글을 시작하는 자리에 놓일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두 경우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비인간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어느 정도 순환적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될까? 결론의 진리와 전제의 진리가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사실의 ‘발견’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비인간이라는 키워드로 시를 읽는 작업이 시를 축소하거나 담론에 대한 피로감을 더하지 않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평론의 숙제일 텐데, 지금으로써는 앞선 일화의 개인적 체감이나 시의 구체적인 말하기 방식 같은 ‘일종의 사례’에 집중하는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숙제를 하나 더 하자면 그 과정에서 ‘원래 그렇다’는 식의 초월적 의견에 주눅 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품은 자리에서 태어날 수 있는 질문들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개념이 확장되고 연결된다는 식의 담론적 사유가 인간과 자연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 동양 철학에 ‘이미’, ‘원래’ 있었다는 식의 의견 앞에서 던질 수 있는 새로운 질문들. 비인간 담론의 경우 어느 정도 결론과 전제의 진리가 의존하는 순환론적 특징과 함께 사유와 체감의 거리가 멀다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허탈하고 맥 빠진 듯한 느낌을 넘어서 읽고자 하는 동력이 무엇보다 몹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 1) 소재가 아닌 발화의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지만, 자연물 소재의 등장에 부리나케 주목하는 이러한 독해 방식은 이미 어떠한 지점에서 실패하고 있을까?
  • 2) 비유는 그 자체로 시인이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태도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로만 야콥슨이 은유와 환유를 문학 연구에 적용한 것처럼, 은유와 환유는 언어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 전반에서 관찰되는 현상으로 확장될 수 있다.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미 K. 바바는 은유와 환유의 두 축을 탈식민주의 문학 이론에 적용하기도 한다. 바바는 피식민지인이 재현된 텍스트의 의미를 은유화 할 경우에 피식민지의 개별적‧역사적 맥락이 소거되고 추상적 명제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피식민지의 재현 과정이 보편적 은유 기능에 의해 작동한다면 문화적 차별성이 고려되지 않은 채 구체적인 삶의 맥락이 추상화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은유와 환유에 대한 바바의 이론을 동물 재현으로 확장할 수도 있을까? 물론 피식민지인과 동물의 정체성을 동일한 것으로 치환할 수는 없으나, (식민주의에 내포된) 권력 기제에 의한 타자화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아주 범박한 공통점을 가질 수는 없을까? (김욱동, 「은유의 정치학, 환유의 정치학」, 『은유와 환유』, 민음사, 1999 참조.)
  • 3)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 이신철 옮김, 에코리브르, 2023, 213쪽. (강조는 인용자)
  • 4) 위의 책, 216쪽.

추천 콘텐츠

염선옥 메타시의 상상력을 구현하는 미학적 존재와 그 언어

《현대시》12월호 신인특집 메타시의 상상력을 구현하는 미학적 존재와 그 언어 염선옥  《현대시》 12월호 신인특집에 함께하게 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의 시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삶과 언어의 도정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여섯 개의 서로 다른 감각이자 하나의 세대적 사유로 읽힌다. 각기 다른 이력과 문학적 여정에서 출발한 이들의 시적 몸짓에는 관계의 불안과 결핍, 동일시의 실패, 존재의 진동, 텍스트와 사물의 해체, 제도와 언어의 부조리를 가로지르는 탐색이 응축되어 있으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장면들이 미리 스며들어 있다. 2025년 시단에 첫발을 내디딘 이 신인들의 작품은 단순한 개성의 제시를 넘어, 동시대 청년 세대가 마주한 균열과 감각의 변화를 촘촘한 형식 실험과 사유의 밀도로 형상화함으로써, 오늘 한국시가 어떤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고자 하는지 또렷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의 시 앞에 함께 서 있는 동안, 독자는 친밀과 거리, 소유와 결여, 있음과 있었음, 정지와 흐름, 안내와 방황 사이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감정과 사고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완결과 합일의 환상 대신, 실패와 잠정성, 불확정성과 우연을 감수하는 태도가 이들의 언어를 떠받치는 공통의 윤리로 드러나며, 그 위에서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과 존재의 사유, 시적 상상력의 책임이 다시 질문된다. 이들은 관습적 서정보다 불안정한 접속과 해체의 감각을 밀어붙이며, 평범한 일상과 비극적 현실, 실존적 결핍과 축제적 상상력을 교차시키는 다양한 전략으로 시의 경계를 확장한다. 올해의 신인 시인들을 통해 우리는, 시가 더 이상 하나의 의미나 메시지로 귀결되는 통로가 아니라, 세계와 주체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부딪히고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건네는 열린 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특집은 여섯 신인의 개별 작품을 따라가며 그러한 움직임의 결을 세밀히 더듬어보는 작은 동행이자, 앞으로 이들이 한국시의 지형 위에 남겨갈 긴 문장들의 서두가 되기를 바란다. ☆★☆  이수빈의 「빈속」과 「귀갓길」은 현대적 인간관계의 불안·결핍과 일시적 연대,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윤리의 잠정을 감각적으로 표상하는 작품이다. 두 시에서 시인은 익숙함이나 표면적 친밀 속에서도 오히려 더 깊이 체감되는 거리·결핍의 정동, 그리고 자기소외의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먼저 「빈속」에서 화자는 “나를 미워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받는다. 이 집은 “창문이 많았고 식물이 많았고 나무 빛깔의 가구들이 많”지만 “진짜 나무는 하나도 없”고, 온통 “나무 무늬를 흉내 낸” 것뿐이다. 친구의 집은 외관상 충만해 보이나 본질적 결여가 깃든 장소로, 친구 또한 소외와 결핍의 구조 안에 있으며 화자는 호두의 텅 빈 속에 자신의 존재를 포갠다. 이는 우정과 인정,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결국 실패로 전환되는 심리적 역학을 드러낸다. “나는 친구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친구가 주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일 것만 같은데”, “중요한 건 전부 친구에게 있는 것 같다”는 화자의 고백은, 타인과의 관계가 항시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을 차라리 결핍의 자리로 위치시킴으로써 관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것이다.  「귀갓길」은 「빈속」과 달리, “집에 가지 않”는 화자가 익명의 타자인 아저씨와 마주치면서 관계의 또 다른 층위를 탐구한다. 아저씨가 “정말 하수구 덮개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어깨까지 접어 넣어 손을 휘젓더니 내 지갑을 꺼”내는 행위는, 화자가 처음부터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과 교차하며 극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자신의 곁에서 “땡볕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힘을 다하는 “교과서에서 배운 좋은 사람”을 실제로 마주한 화자는 오히려 그 초월적 선의와 헌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놀라움과 낯섦을 경험한다. 이 만남은 타인과의 관계가 단순한 연대나 지속적 돌봄의 형태로만 해명되지 않더라도 사회적 선의가 분명히 세계 속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비둘기가 됐네. 아저씨가 말한다./그 말이 재밌어서 나는 웃는다.”는 구절이 상징하듯, 이런 일시적 돌봄과 선의가 완결이나 해결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관계의 의미와 삶의 풍요로움을 증명한다. 시인은 이 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관계 맺기가 미완성과 불확정성의 상태에 머무르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과 순간성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윤리적 언덕이 된다는 통찰을 환기한다.  「빈속」과 「귀갓길」 전편을 관통하는 관계의 구조는, 친밀에 대한 열망이 궁극적으로 결핍, 소외, 불안으로 되돌아오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완전한 결속이 아닌 잠정적 윤리가 성립된다는 데 있다. 친구, 그리고 익명 아저씨와의 관계 산물은 완전한 소유나 영속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두 시는 현대적 인간관계의 지속 불가능성과 일시성을 드러내며, 타자와의 만남의 현장이 언제든 실패와 결핍, 잠정성과 불안을 품을 수 있음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익숙하거나 친밀한 공간, 예상치 못한 우연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정동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오늘날 존재·윤리적 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선사한다. 이수빈의 시는 어떠한 교훈이나 모범답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담백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완전한 의미나 지속적 소유에 도달할 수 없는 현대적 관계성의 본질, 그리고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불완전한 시도와 실패,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연결,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미학을 포착한다. 감각적 이미지와 절제된 서사, 미묘한 정동의 떨림을 통해, 관계의 좌절·틈새 윤리·결핍의 정서를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실존적 현실에 대한 현대시의 성찰적 깊이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  이현아의 「거절」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부정의 표명이라기보다, 존재론적 함수처럼 읽혀야 한다. 이 시에서 ‘거절’은 행위의 단절이나 의사의 미수(未遂)를 넘어, 근본적인 내부적 불일치,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윤리적·존재적 통찰의 알레고리다. 또한 메타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동일시를 통한 묘사나 모방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면서도, 주체가 대상을 자기 안에 온전히 흡수하거나, 대상을 자신과 동등하게 체험하려는 시적 의지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즉, 관계와 삶에서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함을 전제하며, 이는 서정시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동일시의 전략, 곧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묶으려는 욕망의 실패를 현대시적 자의식으로 재구성한다.  「거절」 시의 주체는 대통령, 영부인, 수행원, 그리고 귀신으로서의 화자라는 다층적 관찰자와 중개자의 시선에서 이 비일치의 조건을 반복적으로 마주한다. 영부인의 반지를 대통령에게 건네는 장면, 수행원이 죽어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초월적 설정, 그리고 내밀한 공간인 침실에서조차 타자의 감정과 내면은 이해 불가능함인 “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으로 남는다. 여기서 ‘거절’은 소유와 일치, 결정적 진실에 대한 모든 요구에 부드럽지만 냉철하게 선을 긋는다. 어떤 친밀함과 접근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남기며, 타자의 고유성, 내부적 비밀에는 끝내 도달할 수 없음이 시 전면에 놓인다. 익숙한 동일시의 미학이 동질적 교감·일치로 수렴했던 것과 달리, 현대시에서 ‘거절’은 반대로 불일치, 미끄러짐, 간극의 미학을 긍정한다.  「망상과 착각」은 이현아 시의 존재론적 간극과 동일시 불가능의 미학을 한층 더 섬세하게 확장한다. 반려견을 둘러싼 고독사의 이야기와 “그 개가 남긴 망설임의 흔적”은 타자의 실존, 감정, 본능마저도 끝내 전적으로 포개지지 않는 비일치의 조건을 상징한다. 화자는 빨래 건조대 양 끝에서 “점점 멀어지는” 두 존재의 행위를 반복하며, 동일시의 실패와 존재론적 거리, 미끄러짐을 일상적 장면으로 그려낸다. “그 사람이 거기서 진짜 빨래를 너는지, 혼자 집으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라는 고백은, 실재와 상상 사이, 나와 타자, 기억과 현재 사이의 확인 불가능과 불확정성이 상상력의 출발점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일시와 이해, 행위의 의미가 결여와 불확정성의 지점에서만 반복되는 윤리를 지시한다. 이 시에서 상상과 미끄러짐은 채울 수 없는 거리를 감각하며, 결국 이러한 틈과 거리의 자각에서만 현대적인 시와 존재의 미학적·윤리적 가능성이 살아난다. 바르트가 텍스트의 미학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가는 해석의 복수성과, 완전한 합일에 도달할 수 없음 그 자체에 있다고 했듯, 시의 읽기도 언제나 ‘마지막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무한한 해석, 다양한 감정·경험 간의 에너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이현아의 「거절」과 「망상과 착각」은 동일화의 불가능성, 완결과 단일성의 유예를 담담하면서도 치밀하게 수락하는 현대시의 윤리적·미학적 혁신으로 자리한다. 시의 목표는 더 이상 단일함이나 일치가 아니라, 열린 장 속에서 실패와 미끄러짐,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시적 전략은 독자의 읽기도 정적 재현이 아닌 무한히 개방된 해석과 자기성찰, 그리고 주체와 타자, 이미지와 기억이 과정적으로 겹쳐지는 창조적 소통의 현장임을 강하게 환기한다. ☆★☆  임어지니의 「있음과 있었음」과 「모델 하우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이 시적으로 펼쳐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자인(Sein)은 ‘얼음’이나 ‘집’처럼 물질적이고 세계에 놓인 단순한 ‘있음’의 상태다. 이런 사물들은 자신의 변화나 소멸, 의미를 자각하지 않는다. 「있음과 있었음」에서 사물로 제시되는 얼음은 자연의 섭리와 순환성의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 시적 주체가 되지 않는다. 집 역시 「모델 하우스」의 서두에서 경제적 표상, 사회적 기호, 공간에 한정된다. 시의 화자는 이와 같은 ‘자인’적 사물과의 작용에서 시적인 의미를 확장한다. 얼음의 녹음과 소멸, 집의 존재와 이동이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닌 자기 인식의 계기가 된다. “얼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에서 시작해, 사라짐과 흔적, 남겨짐 앞에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주체는 집에 대해서도 “집을 사기로 했다 살 것이다”라는 주체의 인식에서 시작해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 건너려고 신호 기다릴 때” 등 모든 공간과 장소를 초월해 존재의 사유를 채움을 보여준다. 이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다자인(Dasein)’의 인식이 풍요로워짐을 말한다. 다자인의 관계성은 ‘자인’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는 것이다. 주체는 사물 자체의 운명과 자기 경험의 흔적, 결핍, 해석의 운동을 실존적으로 배치한다. “글러브 박스”의 비어 있던 자리, 얼음의 흔적을 집요하게 감각하고 환기하는 과정은 세계 내 던져진 존재인 다자인의 실존적 태도를 소환한다. 주체는 시간과 부재, 흔적과 상상의 교차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며, 항상 세계와 사물, 시간적 가능성의 긴장 안에 존재한다.  「모델 하우스」는 집이라는 사물이 단순한 경제적 혹은 사회적 표상을 넘어 의미와 기억, 내면적 진동이 축적되는 복합적 장소로 전환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시의 화자는 집을 단순한 정주의 공간이나 투자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일상 속 크고 작은 경험, 가족과의 삶, 소유와 결여, 귀속과 떠남의 감정이 집에 층위별로 배어든다. “집에 살았다, 집에 살 것이다”라는 시제의 중첩은 주체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축 위에서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정체성의 진동을 감각함을 의미한다. 집이 일상의 반복적 경험에 내면적으로 녹아들면서, 어느 순간 과거의 긴 시간에 편입된 현재가 존재의 가장 큰 불안의 근원이 된다. 이 시에서 집 자체는 원래 하나의 기의, 단순한 본질에 가둘 수 없는 존재다. 집은 한때의 경험이기도 하며, 불확정한 미래의 가능성, 소망 혹은 결여의 상징으로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띤다. 시적 주체는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라는 엄청난 입에 삼켜지듯, 항상 어딘가로 쓸려가는 자신의 존립 조건을 예민하게 인식한다. 단어와 장소, 기표와 의미의 관계는 하나의 본질에 고정되지 않고 풀려나가며, 그것이 곧 언어의 연약함과 해석의 불완전함, 나아가 존재의 덧없음과 상실의 미학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임어지니의 시는 실존적 경험에 귀속된 사물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이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며 내면적 지각의 장으로 소환하는 주체의 감각을 정교하게 교차시킨다. 집이나 얼음 같은 물질적 대상은 자인(Sein)의 차원에 머물지만, 주체가 자신의 기억, 상상, 소망, 상실, 불안, 내면의 흔적을 그 위에 겹쳐 올릴 때 다자인(Dasein)의 자기성찰과 해석의 운동이 비로소 시작된다. 이 층위에서 시는 단순한 사물의 존재를 넘어, 실존의 불안과 정체성, 상상과 결여, 시간과 흔적이 교차하는 해석의 장 역할을 하며,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존재의 불확정성과 생성, 상실의 미학을 현대적 감각과 깊이로 펼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임어지니의 시는 자인과 다자인이 교차하는 시적 현장에서 언어와 세계, 주체와 의미의 긴장과 개방성을 유기적으로 드러낸다. 임어지니의 시들은 일상적 사물과 내면적 세계, 정체성과 시간의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대적 존재의 진동과 경험의 의미를 담담하면서도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사물의 나열이나 감정의 표출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와 의미화, 언어와 세계의 복합적 긴장을 정교하게 펼치는 현대시의 한 실천으로 평가할 수 있다. ☆★☆  장희수의 「싱크대」와 「적설」은 일상적 경험과 자연의 이미지를 감각적이며 서정적으로 조직하여, 존재의 온도와 따스함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두 시 모두 홀로 선 주체라기보다는 타자와의 교감, 일상과 공동체적 체온이 작품 세계를 따뜻하게 감싼다는 믿음을 바탕에 둔다. 「싱크대」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생활 사물과 신체적 경험을 극대화하면서 감각과 정서, 시간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너의 옆구리가 젖은 건, 설거지를 마친 손을 허리춤에 슥슥 문질렀기 때문”과 같은 동작은 “덕분에 네 옆구리에서는 오후 내/세제향이 났다”로 이어지며, 손목, 바람, 식물과 같은 일상의 요소들이 신체적 교감과 감정적 유대를 촘촘하게 확장한다. 손목이 옆구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로 연상되고, 서로 옆구리를 찌르거나 긁고 오랫동안 함께 웃는 모습은, 일상적인 순간조차 관계의 친밀성, 촉각적 유대, 공동의 정서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장희수의 시에서 실현되는 미학적 방법은 반복과 일상의 평범함이 결코 낡은 것, 시적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의 시편은 시간과 수많은 사물,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적 해방과 미학적 자유의 가능성을 실감나게 입증한다. 구체적 손길, 바람, 미묘한 향, 일상의 움직임과 그 감정의 변동, 타자와의 촉각적 교감은 모두 언어와 이미지의 층위에서 섬세하게 조율된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일상적 순간과 신체 감각의 자연스러운 연계를 통해 ‘평범함’ 자체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의 작품은 반복의 세계에서도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며, 사물과 시간, 타자와의 접촉이 곧 미학적 존재의 시작점이자 메타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출발점이 됨을 증명한다.  「적설」의 첫 부분은 ‘너’가 “떠날 사람처럼” 화자를 “꼭 안아준” 장면에서 시작한다. 화자는 그 체온을 간직하고 있다. 눈은 “끝나버린 세상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세상이 얼어붙을 것 같아도, “마지막에 껴안은 사람과는/영원히 붙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에, 화자는 그 믿음을 간직한다. 화자는 “어떤 말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자꾸만 믿고 싶어”하고, 언젠가는 “끝나버릴 것 같”아도, ‘너’의 포옹에 남겨진 가능성을 “희게 쌓는다.” 시는 처음부터 따스함과 이별,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남는 온기와 만남, 신뢰와 관계의 지속성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종말적 상상, 관계의 소멸과 재생, 윤리적 가능성을 끝까지 탐색한다.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면 하얀색일 것”, “끝이 날 것이라고//누구에게 말하는지 몰라도/누군가에게 말하는 목소리가//희게 쌓이고 있었다”와 같은 구절에서 시인은 세계의 거짓과 희망, 종말과 만남, 현실과 상상, 영화와 눈이 교차하는 미학을 그린다.  이 두 시는 일상성과 감각, 시간성, 정체성, 관계, 흔적, 소멸, 애도라는 현대시의 주요 의제를 집요하게 탐색한 셈이다. 평범한 사물과 신체적 행위, 작은 몸짓과 자연의 미묘한 변화가 모두 언어와 이미지로 실존의 결, 감정의 파장, 시간의 불확정성을 유기적으로 직조한다. 장희수의 시세계는 언어, 세부적 감각, 상상력, 공동체적 연대가 만나는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과 자기성찰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는 ‘돌’처럼 “정지한 사고”와 언어,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상상력과 “움직이는 시간”이 “삐걱대”(「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면서 직조해내는 우리의 상상력의 현실적 질감, 텍스트의 탈장소적 특질, 해체적 실험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현대시의 모범적 성취를 보여준다. 시의 첫 구절 “나: 보이는 순간 끝을 예견한다”는 시적 객체가 등장하자마자 곧 상상력이 소진되는 불확정성과 파편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꺾였다/다채로워서... 유복해서”, “나: 차라리 망쳐 보라 했다”와 같은 파편화된 장면과 파괴적 명령을 통해 시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를 흔들며, 독자가 하나의 알레고리나 고정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항상 새로운 체험적 해석의 장을 만들도록 한다. 이러한 해체적 실험정신은 바르트가 강조한 “텍스트는 기호에 비해 접근하거나 체험되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기의로 닫혀진다.”(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2002, 41쪽)라는 원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정태인은 단일한 해석이나 알레고리에 저항하며, 각 행과 단어·이미지를 독자 몸에 밀착시키며, 독자가 읽는 순간마다 “내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도록 이끈다. 이로써 ‘목이 긴 나무’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독자가 진입하는 열림의 장이자, 매번 흔들리는 사건의 연속체로 기능하게 된다. 특히 “시계 침이 뾰족해지고/서정은 유리 공예에 갇히면/나는 너와 너를 사랑한 적 없다”와 같은 구절은 ‘목이 긴 나무’와 ‘시계’라는 시간성과 경직성을 병치함으로써, 단일한 기호에 의미를 환원하지 않고 시간의 연장, 멎음, 서정의 경직 등 다양한 감각적 층위를 활성화한다. 이어지는 “모방은 창조를 학대/구체는 모방의 미끈함을 덮고”, “유복함이 가짜일 때/목덜미에서 살냄새가 난다”, “딸기씨가 때론 딸기를 벗어나 종이에 우글거린다” 등에서 실체와 모방, 감각과 추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유희하며, 독자에게 언어의 돌발적 감각과 의미의 미끄러짐을 선사한다. “유복함”이라는 표현은 시 창작에서 모방이 과잉되면 ‘가짜’가 되기에 십상이고, 그것이 “유복함이 가짜일 때” 느끼는 “살냄새”를 통해 진짜 시적 실재의 감각을 드러낸다. 우글거리는 기의들 속에서 하나의 기의를 찾으려는 독서 행위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바르트적 “텍스트의 체험성” 원리를 재확인하게 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정태인은 각 행, 어휘, 이미지를 독자 경험에 침잠시키며, 닫힌 작품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체험되는 텍스트의 본질을 구현한다. 독자는 시를 읽는 순간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 의미를 발명하고, 새로운 감각적 사건과 해석의 여정을 실현하는 텍스트의 자유와 해체적 실험정신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리자여(舍利子, Śāriputra)여」와의 교차적 맥락을 통해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의 밀도는 더욱 강화된다. “멎음;/부둣가에 달려가 해를 잡으면 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다/내려간다?”와 같은 구절은, 사유의 지점이 미끄러지고, 실체처럼 굳어진 사고와 움직이는 시간 사이에서 자주 삐걱대는 현존을 고스란히 포착한다. 결국, 정태인의 시는 닫힌 작품, 해석의 최종성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접근하고 체험되는 ‘텍스트’로서의 공간을 창출한다. 돌처럼 굳어진 사고, 용암이 굳은 자리, 흐르는 시간과 붉은 해, 썩어가는 나무, 비옥하지 않은 땅 등 다양한 사물과 현상을 통해 시인은 실체 없는 실체, 멈추고 흔들리는 삶의 흔적을 복합적으로 상상한다. 이렇게 시와 독자는 서로 병치 되고, 결과적으로 바르트적 해석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텍스트의 본질, 의미의 창출과 사유의 미끄러짐이 정태인의 시 안에서 가장 섬세하게 실현된다.  두 시에서 드러나는 제목의 배열과 라틴어와 한자, 영어(외국어)의 사용은 미학적으로 ‘열림’, ‘다성’, 그리고 경계의 유연함을 구현하는 전략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우리 고유 언어와 문화의 소중함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다양한 언어와 표현 방식을 단절하고 배척하는 폐쇄적 태도는 결국 ‘돌’처럼 굳어버린 사고, 무관심적·기계적 반복, 혹은 철학적 질문 없는 ‘비사유’에 머무를 위험성을 내포한다. 정태인의 시적 구도에서 ‘돌’은 의미를 경직시키는 사고를 상징하며, “이매진(Imagine)”과 같은 흐르는 영어 동사는 의식과 감각의 흐름을 동적인 사유의 힘으로 전환한다. 시인은 고정적 해석에 안주하지 않고, 낯설고 열린 체험을 지속적으로 유도함으로써 정동적 힘, 곧 주체와 언어·이미지의 역동적 재배치를 구현한다. 많은 시인들이 상상력의 융합, 이질적 감각, 독특한 형식 실험을 펼쳐왔던 흐름과 달리, 정태인은 언뜻 파편적으로 보이는 시상의 흐름을 각 이미지를 통해 유기적으로 직조해내며 결과적으로 명확한 사유와 체험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의 시는 바르트의 텍스트는 접근하고 체험되는 것이라는 미학을 적극적으로 설계해, 단일한 알레고리와 저자 중심 해석을 철저히 거부하고 시적 언어와 감각을 독자 신체와 경험으로 촘촘히 전달한다.  정태인의 『목이 긴 나무 이매진 (상상하다)』에서 “목이 긴 나무”라는 이미지는 특정 의미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이미지는 독자가 텍스트 안을 걷고 감각하며, 흔들리고, 다시 일어나는 해체적 사건의 연속으로 기능한다. 독자는 그 열린 공간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자유롭게 발명하며, 언어·상상력·사유의 무한한 변주를 직접 체험한다. 바르트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닫힌 ‘작품’의 형식이 아니라 독자와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능동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로 작동한다.  여기에 정태인의 시적 축제의 장(場)에는 연극적 요소가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연극은 현실의 경계를 해체하며, 공연마다 새롭게 변형되는 극적 힘을 품고 있다. 알프레드 시몽이 『기호와 몽상』(박형섭 역, 동문선, 1999)에서 말하는 축제와 연극의 파편적·전복적 구조, 그리고 몽상가의 세계가 고독 속에서 우주적 상상과 평형(아니마)의 정동적 열림으로 나아간다는 점은, 정태인 시의 파편적 이미지·공간의 단절·대화와 소리의 겹침·물질의 초월·멎음·윤리적 감정 등과 긴밀히 맞닿는다. 한편 시몽은 인간의 삶을 연극과 축제에 비유하며, 축제와 연극 모두 민중 삶의 조건과 비극성에서 태어난 문화적 산물로 해석한다. 정태인의 시작품은 시적 조건과 비극적 현실에서 발현되는 환희와, ‘사리자’의 목소리로 상징되는 지혜와 질문, 감정 구조를 동시에 담아낸다. 정태인의 시는 주체와 기호, 현실과 환상, 언어와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해체·재배치되는 역동적 현장이다. 축제적 해방, 연극적 전환, 몽상적 상상력, 그리고 유연한 경계의 감각은 실험적 언어와 구체적인 체험 구조로 귀결되며, 현대시 해체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  최경민의 「안내원」과 「라스굴라」는 현대시가 부조리의 미학과 해체적 언어 전략을 어떻게 갱신하는지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두 시는 현대사회에 널리 퍼진 “사람의 말이 차가운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언어와 제도, 관리 절차가 인간 고유의 감정·고통·기억·죽음을 어떻게 표면적이고 소외된 대상으로 환원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안내원」은 반복적·무표정한 안내 언어로 구성된 시스템 안에서, “너무 누르지 마세요. 쉽게 터질 수도 있습니다. 터지면 저희가 치워야 해요.”, “실족사는 누구의 기억도 아니어서 복원할 수 없습니다. 대신 깔끔한 가족을 써드릴게요.”, “번호가 불리면 나아가세요. 끝나면 힘껏 돌아오세요.” 등 절차적 언표가 일상적 사건, 개인의 상실, 심지어 죽음조차 데이터로, 복원 불가한 에러로 치환한다. 이는 의미 없는 반복과 객체화, 존재적 공허의 심화로, 소통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라스굴라」는 인도 디저트 캔이라는 사물에 ‘예언’과 ‘유산’을 덧씌운다. “콜카타에서 가져온 예언이었다.”, “당신은 세 개의 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입구가 찌그러진 제품은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같은 구절을 통해, 신화적 내러티브와 산업사회의 경고와 공지, 소비와 관리의 언어가 구체 사물(캔)의 표면에 동시에 아로새겨진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 정보 혹은 경고를 넘어, 인간 경험의 현실과 신화적 상상, 관리사회의 절차가 겹겹이 작동하는 복합적 층위를 형성한다. 남자의 신체 “둔부가 사실 거대한 종기…흘러내”리고, 들개의 상상적 파트너십과 반복적 언어는 결국 모든 것이 관리·절차·소비의 공허 속에 미끄러지는 인간 실존의 우울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이 보여준 미학과 맞닿는다. 『엔드게임』에서 넬과 네그가 깡통(쓰레기통)에 갇혀 기억, 신체, 생의 잔여물로만 존재하는 것과 같이, 「라스굴라」의 남자와 들개는 캔 속에서 ‘예언’의 의미도, 유산의 실체도 다 소진된 채로 반복과 공허, 아이러니와 우울 속 부조리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예언이 텅 비고 말았군”, “유산은 달콤한 맛이 나는군”과 같은 반복적 대사는, 삶의 의미 생성 실패와 현대적 소외·결핍의 심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두 작품은 이 세계가 소통 불능, 맹목적 반복, 파편화·객체화·공허, 그리고 시스템 언어와 관리·경고·소비 코드가 인간 조건을 조직함을 밀도 있게 드러낸다. 그 핵심은, 현대 존재가 결핍과 부조리·불확정성과 아이러니로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그 경계에서 해체적 언어와 블랙코미디 미학만이 진실로 인간 실존을 감각하게 한다는 통찰에 있다. 이를 통해 두 시는 해체미학의 실천적 성취를 드러낸다.  올해 등단한 이수빈, 이현아, 임어지니, 장희수, 정태인, 최경민 등 여섯 신인의 시편들은 단순한 개성 표현이나 언어실험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대 청년 세대가 겪는 세계의 깊은 변화와 복합적 결핍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들은 관계의 불안과 결핍을 연대의 가능성, 타자와의 접촉, 아이러니와 부조리, 파격적 상상력과 시적 실험을 통해 깊이 탐색한다. ‘관계’의 불안정성은 피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언어, 일상적 감각, 상상력, 존재 인식 층위로 확장·해체되어 작동하며, 이는 단순한 시의성을 넘어 세계와 존재의 분리 불가능한 틈 사이에서만 생성되는 독특한 감각과 사유, 윤리·상상력의 책임까지 묻는다. 이러한 결핍은 고립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이 충돌·포개지는 현장으로 성립되고, 시적 언어는 해체와 실험, 평범한 일상을 뒤흔드는 감각의 진동, 정체성과 타자성, 세계와 자신 사이의 긴밀한 긴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이 신인들은 구체적 경험과 내면의 리듬,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을 미감으로 끌어들여, 한국시의 서사적 확장과 일상에서 새로운 언어적 감수성을 착취하며, 시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넓히고 있다. 현실과 내면, 언어와 침묵, 소외와 감각이 교직된 이들의 시는 결코 완성과 합일로 안착하지 않으며, 손이 닿지 않는 영역, 불안정의 운동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특히 이들의 시적 작업은 메타시의 상상력과 존재 미학의 구현, 언어의 자기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존재의 다양한 양태를 시적으로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로 이해된다. 시는 언어적 표현을 넘어 존재와 현실의 틈새, 그곳에서만 드러나는 감각과 상상력, 윤리를 길어 올리고, 이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주체적 활동이 된다. 올해 신인 시인들의 작품은 그렇게 오늘날 한국시의 중대한 미학·문학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시단의 방향성과 역할에 대해 깊은 통찰을 낳게 하는 의미 있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 믿는다.

계간 현대시 염선옥 진리 담론과 형식의 해체불확실성의 감각다양한 연대 가능성존재의 진동해체적 실험성이질적 요소의 혼융 2025
최다영 기계기담(機械奇談)

1. 머리 셋 달린 여우 기이한 짧은 이야기를 기담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여러 설화와 전래동화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기이한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정우신의 이번 신작시들은 언뜻 기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 제주설화 삼두구미 본풀이의 모티프를 활용한 「삼두구미(三頭九尾)」는 이러한 신작시들의 입구가 되어주는 시처럼 보인다. ‘삼두구미’는 머리 셋에 꼬리가 아홉 개 달렸으며 시신을 파먹는 늙은 땅귀신 요괴를 가리킨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두구미는 가난한 나무꾼의 세 딸을 돈을 주고 데려와 사람 다리를 주면서 먹도록 하는데, 먹지 않고 거짓말을 한 첫째와 둘째는 그 사실을 들켜서 죽게 되지만, 막내는 다리를 불에 태운 뒤 그 가루를 보따리로 싸서 자신의 배에 묶어놔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삼두구미의 아내가 된 막내는 달걀과 무쇠, 버드나무로 괴물을 퇴치한 후 그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2) 무엇보다 「삼두구미」에서 주목되는 건 이러한 삼인 분할의 모티프가 시의 형식과도 긴밀히 이어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삼두구미의 머리가 셋으로 나뉘어 있듯, 발화자 ‘나’ 역시도 셋으로 분할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삼두구미가 삼킨 두 딸이 각각 머리 하나씩을 차지한 형태로 본래의 삼두구미와 합일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화 속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백골만 남았을지언정, 그 혼이 삼두구미의 육신과 합쳐진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온전히 분리되지도 온전히 합일되지도 않은 채 존재 양태의 변모를 거듭하는 삼두구미의 형상은 발화 측면에도 반영되어 있다. 光.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습니다. 滅. 나를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歸. 나는 편리합니다. (…) 歸.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光. 나만 네모 방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滅. 동그라미가 돌아갑니다. (…) 光. 나는 滅과 歸로 쏙 들어갔습니다. 滅. 나는 나를 말려놓고 공중제비를 돕니다. 歸.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삼두구미(三頭九尾) 중에서 각 행 앞에 붙은 한자들은 光(광), 滅(멸), 歸(귀)로서, 발화의 주인인 삼두구미의 세 머리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산문에 따르면 이 한자들은 각각 ‘발광’, ‘자살’, ‘귀의’를 의미하며, “비극의 삼각형”을 형성하는 꼭짓점이라 한다.3) 그렇다면 이 비극의 삼각형은 미쳐서 죽었다가 원점으로 돌아가 미쳐서 죽기를 다시 반복하는 일련의 순환을 표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해 이들이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세 사람이 방의 각 꼭짓점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으로 도는 귀신 술래잡기를 연상케 하는데, 셋만으로는 게임을 끝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무한 순환의 굴레를 암시한다. 한편 이처럼 각 행을 서로 다른 머리들의 교차하는 발화로 읽을 때, “빚이 무거워 나는 죽 늘어졌”다는 목소리에서 ‘빚’은 팔려가는 조건으로 받은 돈을 지시하므로, ‘滅’에 해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두 딸 중 하나일 것임을 알게 한다. 맨 마지막 연은 둔갑의 단계를 보여주는데 ‘光’이 ‘滅’ 속에 숨고 ‘滅’은 ‘歸’ 안에 숨게 되므로,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는 건 세 머리가 마트료시카처럼 합쳐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은 아침이 되면 하나로 존재하다가 밤이 되면 합일체 속에서 차례로 튀어나와 셋으로 분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연에서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다는 그 장소는 바로 삼두구미 자신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또 “오늘도 아침이 왔”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이러한 루틴은 정확하게 설정된 기계처럼 끝을 모르고 계속 반복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복제, 클론, 리플리컨트 모티프와 순환의 질서는 정우신의 시 세계에서 빈번히 다뤄져왔다. 특별히 양순모는 정우신의 시에서 활용되는 반복 장치가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거듭 그것들로 회귀하기 위한 반복”4)임을 포착한 바 있다. 요컨대 정우신의 화자들은 불행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우신의 시에서 미분 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들에 주목할 것을 청하는데, 정우신에게 “미분은 ‘입체’에서 다시금 ‘육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 ‘방법론’”5)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삼두구미로 대표되는 육체 분할의 반복 양상은 정우신의 시 세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상상, 삼각형의 꼭짓점을 형성하고서 자동 반복되는 순환의 되풀이를 설정하는 구도는 다른 신작시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동일한 개체의 복제, 일정한 순환 피드백의 반복, 설정된 입력값에 기반해 출력물을 산출하는 성질은 무엇보다도 기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기계기담이라 명명하고서 다른 시들을 더 따라가보자. 2.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6) 「샐리」에서도 ‘샐리’의 리플리컨트들이라 할 수 있는 샐리2, 3, 4가 등장한다. 심지어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층층이 샐리가 서 있다”는 언급을 통해 더 많은 복제 샐리들, n명의 샐리들이 같은 건물에 존재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클론 모티프는 “손톱을 모은다”는 언급과 만나며 자연히 쥐둔갑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쥐가 손톱을 먹으면 손톱의 주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둔갑한다는 해당 전래동화를 따라, 이 복제 샐리들은 샐리가 자신의 손톱을 통해 증식시킨 인물들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세부 정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약을 타러 지하로 내려간다”는 언급을 통해 극도로 통제된 병동이 배경인 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샐리는 매일 볼펜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데, 샐리2가 그 볼펜을 빌려 교정기를 떼어내고는 떼어낸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다. 뒤꿈치를 찌르는 일만이 목적이었다면 날카로워진 볼펜으로 해도 되었겠지만, 반드시 뜯어낸 교정기여야만 했다는 점에서 교정기를 뒤꿈치에 밀어 넣는 행위가 중요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일까. 마지막 연에서 샐리가 손톱을 “아물어가는 곳마다/힘껏 밀어 넣는”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이 손톱 둔갑에는 기한이 있으며 기한이 다하면 살이 아물어버림과 동시에 둔갑 상태가 끝나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샐리는 리플리컨트들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손톱을 충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경우 샐리2가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 이유는 아물지 않는 상태를 지속하려는 다른 방편으로도, 혹은 뒤꿈치가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여 손톱을 더 보충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리플리컨트는 왜 생을 지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촘촘한 감시망과 통제를 견디며 갇혀 사는 삶, “I’m free to be whatever I/Whatever I choose”가 불가능한 일상에 일찍이 진절머리가 난 걸까. 그런가 하면 비상구에서 다른 샐리들을 기다리는 샐리의 모습은 탈옥을 계획하는 수감자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어떤 방과 “다음 방”에서 “15분과 30분”간 이루어지는 일정한 루틴을 매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샐리는 그보다 더한 “한 시간과 세 시간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인내심 강한 샐리는 “샐리3과 샐리4가 계단에서 내려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말 그대로, “Sally can wait”. 그러나 기다릴 수 있는 것과 너무 늦어버린 것은 다르다. 시 전반에 드리운 디스토피아적 정조에 기대볼 때 샐리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고, 어쩌면 샐리도 그걸 안다. 3. 버들치와 모자 한편 이러한 복제 모티프는 환유의 활용과 더불어 더욱 생동감 있는 시적 효과를 얻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버들치」를 들 수 있다. 이 시에서 ‘버들치’도 크게 세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실제 어류로서 버들치를 지시하거나 ②사람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비유하거나 ③그러한 마른 외양과 피로한 행색으로 인해 버들치에 빗대어지는 사람들을 환유적으로 지시한다. 손가락이라는 원관념의 활용도 두드러지는 가운데, 환유적 의미의 버들치와 보조관념으로서의 버들치가 다채롭게 교차되며 삼각형의 각 변을 오가는 것이다. 가령 “버들치는 렌즈를 닦는다”는 문장에서 버들치는 손가락이나 사람으로 읽을 수 있으며, “버들치는 검수원을 만나기 전 버들치를 먹는다”고 할 때 앞의 버들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뒤의 버들치는 조리된 생선을 의미한다. 특별히 사람으로서의 버들치는 “버들치와 대화한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어느 개인의 독자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을 겪는 여느 서민들을 일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십분마다 뛰쳐나가고 두 시간씩 이동”했다가 “종점에서 졸고” “물비린내 가득한 방으로 돌아”오는 피로한 출퇴근의 루틴은 이를 대표한다. 방에서 방으로 복귀하는 이러한 고단한 루틴을 ‘n번째 버들치’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이십 년”에 걸쳐 수행하는 모습은 각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이 소거되고 루틴을 주인 삼아 루틴의 종속물로 전락하는, 마치 기계의 소모품과도 같은 현대 노동자들의 초상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하급 노동자 일반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서로는 서로의 리플리컨트나 다름없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무형의 루틴이 지키고 영속해야 할 최우선순위로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임시직 버들치로 소모되다 퇴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버들치가 “상점 유리나 거울에 난 손자국을 보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다른 버들치들의 존재를 상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이 한여름의 댐처럼 단번에 쏟아질 때 버들치는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동안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왔다 ― 「버들치」 중에서 이와 더불어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모습은 익숙한 재현 문법을 따라 죽음에 대한 지향을 연상하게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결말은 그간 주어 자리에 놓여 있던 버들치 대신, 사람의 형태를 그려보게 한다. 내내 버들치가 손가락을 가진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에서 버들치가 흘러나오도록 하여 전도된 이미지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는 자연히 사람이 놓이게 되면서 익명의 군중이나 노동 부품으로서의 ‘n번째 버들치’가 아니라 한 개인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버들치가 된 인간을 버들치로만 남겨두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버들치」에서처럼 환유의 대상으로 전도가 일어나는 양상은 「진」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는 ‘진’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어떤 얼굴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의 루틴은 휴일마다 “오렌지 스웨터를 입고/에코백을 들고 외출”하는 것이다. 오렌지빛과 강렬한 태양빛의 색채적 유사성으로, 빛이 내리쬐는 모습은 “햇살의 소매가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된다. 특별히 주목되는 건 모자를 쓰고 있던 진이 결말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히며 모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이 쓰고 있던 모자는 진이 된다. 「삼두구미」에서 자신이 접촉한 사물의 일부가 되는 상상력이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접촉한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얼굴을 기다”리는 이유는 자기가 얹힐 머리를 찾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방 안에 수북한 “주인 없는/머리카락” 다발 또한 모자와 함께 달라붙을 머리카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실종된 빛 앞서 이번 신작시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삼각형의 꼭짓점을 주축으로 순환의 되풀이가 자동 반복되는 양상을 언급했는데, 「파동 일기」에서도 “나의 꼭짓점으로/모이는 어둠”이 거론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비극의 삼각형’은 빛과 어둠, 화자를 각각 세 꼭짓점에 두고서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간 정우신의 시에서 빛은 “어둠의 긴 머리카락을 뒤집어쓰고 개미를 주워 먹는”7) 것과 같이 포식을 즐기는 유생물, 특별히 “뱀처럼/별처럼 (…) 움직임을 따라 하며 우리를 조롱하”8)는 교활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 신작시에서는 가시성을 중심으로 하여 빛과 어둠의 고유한 속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야가 점점 줄어든다 태양의 샌드백 모래사장에 빛을 줄줄 흘리고 한발 앞에 서 있던 빛이 안면에서 일렁인다 (…) 헛디디고 데이고 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어둠 (…) 가스불 앞에 서면 이마 앞의 어둠이 부르르 떤다 ― 「파동 일기」 중에서 하강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파동 일기」는 시력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화자에 의해 발화된다.‘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日부터 土까지 이어지는 요일에 따른 분절이다. 각 요일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날의 일기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게도 목요일에 해당하는 일기에는 木 대신 目이 ‘목’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는 시각과 관련된 빛의 속성이 이 시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월요일에 그는 마치 “샌드백”이 찢어져 모래가 쏟아지는 것과 같이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느낀다. 그는 “한발 앞에” 존재하는 빛을 그 온기와 일렁임으로 감각하지만 빛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또 그는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불을 켜려다 “반찬통”을 넘어뜨리기도 한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모든 활자”는 “재가 되어”간다. “헛디디고/데이”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며, 눈과 눈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한 소실점인 “꼭짓점”에는 빛의 상이 형성되는 대신 “어둠”이 모인다. 토요일에 그는 “가스불”바로 앞에서도 가스불의 외양을 보지 못하고 가스불에 무언가가 끓는 것을 눈앞의 어둠이 떨리는 것을 통해 감지한다. 일요일에 “안면에서 일렁”이던 것이 빛이었다면 이제는 어둠이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실명에 가까워지는 일상은 일기라는 제목과 요일 표기에서 암시되듯이 되풀이되며 더욱 심화될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1) 근작시인 「전자 늑대」도 빨간 모자와 늑대 동화를 차용하고 있다. 2) 이러한 삼두구미 모티프는 정우신의 이전 시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다. 복제인간 이미지를 주로 활용하는 그에게 자가복제적 키메라와 같은 형상의 삼두구미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에게 남은 다리를 나눠 줬어요. 어떤 끝이 뒤돌아 나를 탄생시켜요. 삭제하고 싶니. 너의 몸. 너의 의식. 이리로 오렴. 바깥으로 오렴. 여기에는 너의 불행들이 있다. 태워 주마.” 정우신, 「주술」, 『비금속 소년』, 파란, 2018. 3) 정우신, 「그것과 그것들」. 4) 양순모 해설, 「달리기, 비극적」 『미분과 달리기』, 파란, 2024, 128쪽. 5) 양순모, 같은 글, 132쪽. 6) Oasis, 중에서 7) 정우신, 「사제의 뜰」, 『비금속 소년』. 8) 정우신, 「네온사인」,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포지션 최다영 정우신시집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