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제120호)
김기태의 즐거운 시민들
세계의 규칙을 다시 묻는 전환기의 화자들
김기태의 화자들은 사회문화적 권력에 민감하면서도 동시에 둔감하다. 그들은 규범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파악하고 의문을 품는다는 점에 서 예민하지만, 그 규범과 불화하며 이탈하기보다는 이질감을 품고서도 그 미시 적 중력장 안에서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적응했다는 점에서 무던하기도 하다. 「전조등」은 제목처럼 김기태의 인물들이 선 출발선을 비추고 있다. “더러운 것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의 말을 떠올”(81쪽)리듯 그들은 규범과의 거리 감 각을 통해 자기를 인식한다. 농협 창구원과 공무원인 부모에게 절대 “남들에게 흉을 잡힐 만한 일”(82쪽)을 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어린 시절 부터 “이미 그는 주의해야 할 일들이 적힌 긴 목록을 갖고 있었다”(81쪽). 그렇다 고 소설이 부권적 금기에 저항하면서 뒤틀리는 욕망의 파토스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규범을 당연한 환경으로 간주하며 자랐으면서 도, 그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거리 감각이 출현한다는 역설 이다. 그는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히 공부해 중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고 대 기업에서 무난한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결혼 적령기에 결혼하는 인물이다. 그런 데 소설의 화자로서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자기 삶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수집’ 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주변과 비교하고 동료의 평가를 귀담아들은 덕분에 표준적인 중산계급 가족 모델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 만 그때마다 어떤 생각을 자꾸 밀어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자기다운 게 뭔 지 생각하다 자기답게 사는 게 지겨워졌다.”(90쪽) 자동차 전조등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설 속 파열음처럼, 표준적 규범이 주는 안정감과 자기다운 삶에 대한 궁금증 사이의 충돌이 김기태의 소설에 메아리친다.
「세상 모든 바다」의 화자도 규범적 남성의 성장 모델과 재일 조선인 남성 청소년인 자신의 현 위치를 면밀하게 비교하고 사회문화적 취향을 조정하면서 성장한다. 「롤링 선더 러브」의 화자는 연애와 결혼의 표준적 모델을 형성하며 여 성 청년의 조바심을 부추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복판으로 뛰어들어가 작은 소동을 벌인다. 이처럼 규범적 삶에 대한 적응-의혹을 오가는 양가적 태도야말 로 김기태 소설 속 초점 화자의 공통점이다. 한국(혹은 동아시아)사회 특유의 계 급적, 이성애-젠더적, 가족주의적 생애 규범이 주조하는 주체의 형상을 정확하 게 탐지하는 그들은 기성 규범이 자신을 포함한 세대적·젠더적 집단의 현실을 더는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렇다고 이를 갱신할 새로운 시대/계급 의식을 정초하지는 못한다. 소설적 정념과 자아도취로 이 규 범을 내파할 예술가형 인물형도 아니기에 그들은 그 중력장에서 완전히 탈주하 지는 못한 채로 다만 어느 정도 서술적 거리를 두고 공전한다. 그래서 소설은 액 자식 구성으로 규범과 그에 대한 의혹 사이의 괴리를 고스란히 담곤 한다. 역사 적 변화를 감지하는 데 특화된 사적유물론적 비평을 새삼스럽게 환기하자면, (지성에 따른) 행동과 (감성이 주조한) 내면의 괴리로부터 시대정신의 잉여/균열 을 드러내는 전환기의 인간형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1)
공통 언어가 없는 시대의 앎의 원리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간극이 생긴 것이란 말인가. 「팍스 아토미 카」는 합리적 개인의 이성으로는 더는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해진 세계를 그 원 인으로 짚고 있다. 이제 인간은 지구를 이차원적 평면인 지각地殼으로 생각하며 안심하고 딛고 서 있을 수 없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기후, 물류, 경제, 정치, 무기, 핵-원자 에너지……의 출렁임이 모든 공간적 경계는 물론 시간까지 넘나드는) 중층적 ‘네트워크’로 이해해야 하는 인류세의 지각知覺 구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소 설은 주변 세계가 언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강박 때문에 주변의 모든 정보를 재확인해야만 일상을 가까스로 살 수 있는 경증 망상장애 환자의 일지처럼 보인다. 그의 불안은 단순히 문단속을 수십 번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매일 밤 “위키피디아의 링크를 타고 다”(284쪽)니면서 종말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들을 수집하는 데 여념이 없다. 지구 종말을 경고하는 과학자들 의 시계는 자정 구십 초 전을 가리키고, 민주주의의 최정상에 있다는 미국에서 는 트럼프가 재선을 앞두고 있고, 핵전쟁을 막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허무 하게도 전쟁이 반복되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연결’하면서 그는 동시대를 이 렇게 정의한다.
상호확증파괴 원리에 따라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그리고 그들의 동맹국 사이 에 전면적인 무력 충돌은 극히 어려워졌다. 물론 수단, 예멘, 아프가니스탄…… 또 는 레반트 지역의 사정은 다르지만, 혹자는 지난 만 년 동안 인간은 모두 전사거 나 전사의 유족으로 살았고, 20세기 전반에는 두 번의 총력전으로 팔천오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 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 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 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292쪽)
과잉 연결(하이퍼링크)되었기에 도리어 과소하게 연결된 인류는 평화로운 전시戰時라는 역설적 조합을 아무렇지 않게 동시대(성)의 기본값으로 삼는다. 지 구상의 모든 정보를 수집, 저장함으로써 근대적 교양의 표준 규범을 구축했던 ‘백과전서파’를 본받는 화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지식은 그저 다른 링크 로 미끄러져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원인을 지목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275쪽). 아니 그전에, 가능은 한가.
서로 못 본 체하면서도 와글거리는 것들 사이에 비어 있는 곳, 공중에 이어진 거미 줄, 가로등 불빛에 반짝인 한 토막의 실선을 봤다. 걷다보면 살갗에 감겼다. 눈을 크게 뜨면 거미줄의 무늬가 보일 듯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점과 점, 선과 선의 패턴을 포착할 수 없었다. 포착할 수 없다면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휘저으면, 아무것도 없었다.(290쪽)
앎의 매체와 앎의 형식을 모두 붙잡을 수 없는 세계에서 (기존처럼) “정 상적인 사고라는 말은 무섭다”(269쪽). 자신이 어떤 거대한 연결-네트워크를 보 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도 자신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외경심은 김기태의 화자가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감정이다. 이는 세계와 자신 사이의 간극과 괴리를 종합하고 지양함으로써 지적으로, 윤 리적으로 도약하던 근대적 앎의 체계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발견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는 김기태의 화자들은 비약적 상상력이나 멋부 린 허무주의로 향하지 않고 세계와 자기 사이를 매개할 언어를 성실히 찾는다. 다만 세계를 붙잡아 고정하는 근대적 합리성으로는 언어를 확보할 수 없기에,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한 연결에 집착한다. 「팍스 아토미카」에 서 그것은 ‘주문’이다. “내 뇌에 나의 의지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문을 읊 는 일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주문은 미신도 비유도 아니다. 과학이다.”(280쪽) 눈 에 보이는 사물마다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중얼거리는 주문은 일견 병리 적 증상처럼 보이지만, 자신만의 수행으로 개별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언어 형식 이자 존재 형식이기도 하다.
내가 연구한바, 결정적 주문은 최소한 다음 조건을 요구한다. 첫째, 내가 만든 나만의 주문이어야 한다. 둘째, 나만의 주문이지만 나에 관한 것만은 아니며, 나보다 더 크고 넓고 깊고 오 래된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셋째, 그것은 하나의 문장 또는 충분히 외울 수 있을 만한 개수의 문장들로 구성 되어야 한다. 이런 주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의심할 필요 도 없이 자유를 참칭하는 소음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289~290쪽)
다시 말해, 세계의 진실을 담고 있고 세계와 ‘나’를 연결할 수 있으면서도 그 연결됨을 개인이 실감할 수 있는 규모의 언어를 통해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다. ‘주문’을 ‘연애’ 혹은 ‘관계’, ‘교양’이나 ‘취미(덕질)’로 바꾼다면, 이 조건은 김기태의 다른 화자들도 꾸준히 추구하는 목표다. 세계와 자신을 연결할 시대 정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선험적 자신감을 잃어버린 복잡계 네트워크 시대의 인물들은 자기 형성을 위한 언어를 스스로 만들고 탐색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팍스 아토미카」가 ‘앎에 대한 앎’의 근대적 형식이 무너져버린 시대의 사 변적 인식론을 다룬다면, 「보편 교양」은 앎의 실천윤리를 재생산하는 데 실패하 는 주체를 발견한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 ‘곽’은 획일적·정량적 줄 세우기에 몰 두하는 공교육에 염증이 난 차에, 학생의 자기 주도성을 강조하는 교육정책의 변화에 힘입어 인문학 고전 독서 수업을 개설한다.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 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속 “늙 은 교수”(148쪽) 같은 지식 상인을 경계하는 곽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교육 을 추구한다. 곽의 교육목표는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 한 인성을 형성하며, 학문이나 직업 활동에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갖”(152쪽) 춘 학생의 양성이다.
여기서 전문적 학문·직업 교육 과정을 통해 (지배계급에 복무하라는 원래 목표와 달리) 보편적 인간을 향한 진보적 가치관을 함양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 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같은 지식인 역할론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전위적 인텔리겐치아의 역할론을 화이트칼라 직종이 확대되고 현대적 대학 교 육 제도가 확충된 후기산업사회에 재적용한 사르트르식의 논의는 한국 지식인 운동에도 주요한 모델이 된 바 있다. 가령, 평론가 김현은 이 ‘전문지식의 보편성’ 이라는 항에 ‘무용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문학’을 대입하여 한국문학의 자의식 을 정립했으며, 2) 평론가 백낙청은 민족·민중이 성글게 선취한 ‘민족적 시민의식’ 을 독려하는 보편 교양을 작가·지식인이 가르쳐 “시민다운 시민” 3)을 만들자는 문학론을 세웠다. 지배계급에 편입·복무하기 위한 교육제도를 통과하면서 획득 한 지식(문학)은 중간계급으로서 지식인(특수)의 자기모순을 발견하게 하고, 그 모순이 곧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과 같다는 것을 깨달으며 주체화된 지식인 독자 가 (계급을 초월한) 시민 독자를 이끌어 시민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인의 재생산 모델에 따라 특수한 위치와 보편적 앎 사 이의 모순을 넘는 변증법적 자기 지양의 계기를 마련해주려던 곽의 노력은 싱 겁게 끝난다. 소설의 위기는 수업을 열심히 듣던 모범생 ‘은재’의 아버지에게 『자 본론』이 교재에 포함되었다는 민원을 받는 장면이다. “‘사상의 자유’를 위협하 는 민원”(163쪽)에 곽은 도리어 “낯설고 활기찬 감정”(162쪽)을 느낀다. 자신의 수 업이 규범적 체제에 균열을 내리라는 기대가 은밀히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곽 은 계급적 이익을 초월한 보편적 지식에 도달하도록 돕는 교육자의 본분에 따 라 학부모를 설득하고 학교 당국에 저항할 마음의 준비를 마치지만, 이는 해프 닝으로 끝난다. 은재의 입시 컨설턴트가 아버지에게 마르크스도 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하자 곧바로 민원을 철회하고 사과까지 한데다, 과연 그 말대로 은재가 서울대 입시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애들 다 『공산당 선언』 읽히고, 머리에 빨간 띠도 매줘야 되는 거 아냐? 하하하.”(173쪽) 3학년 부장 교사의 농담 섞인 격려 를 들으며 곽은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176쪽) 을 맛본다. 입시에 성공하고 교육에 실패하는 역설적 서사 구조는 급진적 사회 비평마저 계급 세습을 위한 문화 자본으로 흡수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종합 적, 교양주의적 지성이 처한 종국적 한계를 부조한다.4) 그러니 곽은 인문학 서적 이 가득한 책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 었다”(같은 쪽). 이 결말은 세계와 괴리된 자기(특수)를 발견하고 이를 변증법적으 로 지양하는 지성적 훈련이 곧 시민 연대(보편)로 연결된다는 한국 (인)문학의 주체 재생산 양식이 무너졌다는 발견이기도 하다.
대신 김기태 소설은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는 개인(성)을 탐색하 며, 개별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서로 시민적 정동을 나눌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이것이 김기림이나 김수영이 그랬듯 변증법적 종합력을 상실한 자신을 반성(하 면서 실은 사랑)하는 ‘지식인=소시민 문학’의 계보가 아님은 물론이다. 김기태 소 설은 유독 (사적 친소 관계로 한정되는 우정이나 성적 친밀성을 전제하는 사랑이 아 니라) 만난 지 오래지 않은 옆 사람과 연결되는 순간에 도래하는 우애라는 정동 에 주목한다. “오와 열 따위는 없이 털썩 앉거나 서성거리거나 제각각이지만 아 주 흩어지지는 않는 사람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위태로운 우애를 담아 말한 다./“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확실히 그렇네요.””(「팍스 아토미카」, 299쪽) 자기의 위치를 어떻게든 파악하려는 간절한 ‘주문’을 듣고 그 고유한 언어의 역 능을 확인해주는 옆 사람의 응답으로부터, 김기태의 인물들은 우애를 발견한다.
덕질과 취미의 파동 에너지
근작 「일렉트릭 픽션」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 에 “사람은 전기로 산다”(115쪽)라고 대답하며 시작한다. 다소 엉뚱한 선문답 같 은 이 서두는 소설의 기획을 압축하고 있다. ‘전기 소설’이라는 제목처럼 화자는 ‘전기’라는 나름의 주문/언어를 통해 물질적인 복잡계 네트워크와 인간의 존재 형식을 통합하여 세계와 정신을 다시 연결하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한다. 소설에서 전기는 전자기력이라는 우주의 근본적 힘인 동시에 “콘센트와 플러그 로 결박된 현대적 관성”(같은 쪽)이라는 역사적·사회적 물질성을 의미하며, 감 각기관과 근육을 거쳐 신경세포가 주고받는 인간 신체의 전기신호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물리적-사회적 세계와 물리적(-사회적) 인간을 연결하는 공식에서 빈칸으로 남은 것은 ‘사회적 인간’이라는 항이다. 당연히 그 공백을 채 우는 것이 화자의 과업이다.
한국에는 스무 개가 넘는 에너지 공기업이 있다. 대표적이라 할 만한 한국전력공 사의 총자산은 235조에 달하며, 약 2만 4000명가량이 본사를 포함하여 250군데 가 넘는 지역 본부 및 사업소 등지에서 근무한다. (……) 석탄에서 출발했든 원자 에서 출발했든, 눈앞의 벽에 박힌 220볼트 콘센트에 전기가 도달하기까지 얼마 나 많은 인력과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따지자면 그도 길고 복잡한 과정의 일부였지만 전기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한번쯤 자신이 건전지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117쪽)
노동과정과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라는 자의식이 어렴풋하 게 보이지만 노동자의 각성과 결집에 대한 기대가 싹트진 않는다. 사회적 연결 에 대한 나열적 서술은 오히려 그 복잡한 네트워크 전체를 가늠하기 어렵고 따 라서 알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동시대 청년의 단절된 세계 인식을 강조한다.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출퇴근하며 성실하게 일하지만, 사무실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계약직이다. 그 모욕에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과 분리된 집 안에서만 자유를 느끼기 때문이다. “진짜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문안에 있다고 느”낄 뿐, “문밖의 일은 문안의 삶을 위하여 수행하는, 견디는 무엇이었다”(116쪽). 그렇게 문안에서 자신을 성실하게 돌보던 어느 날 “전기신호가 그의 두 팔을 들 어올렸”(119쪽)고, 그는 그 내적 신호를 따라 전기기타를 배우기로 한다.
그런데 혼자 즐겁게 연습을 하던 중 소음에 항의하는 메모가 붙고, 그는 문밖의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 않은 관성에 따라 기타를 처분하기 위해 ‘재니스 음악 학원’을 방문한다. 그러나 정작 기타는 팔지 못하고, 엉겁결에 재니스가 시 키는 대로 코드를 배운다. 어느새 “옥수수나 고구마 따위를 나눠 먹고 있던 나 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기묘한 합주를 연습하게 된 그는 “손가락들이 자유로워 짐을 느”(127쪽)끼고 전기가 사람 사이에도 흐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엘 리베이터 벽에 자신은 전기기타를 좋아하며, 아홉시 이후에는 연주하지 않겠지 만 그래도 불편하면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붙인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 을 다하는 이곳에서 자신이 505호, ‘여기’에 있다고 고백한 사람”(128쪽)으로 변 한 것이다. 그 쪽지는 쪽지를 읽은 501호 주민으로 하여금 옆집의 “아기가 울고 싶을 때 우렁차게 울기를 바”(같은 쪽)라게 한다. “내 안에도 전기가 있”고 “그 녀 석의 안에도 전기가 있”음을 깨달으며, 그는 “알지 못할 전기장치로 작동하는 엘 리베이터” 안에서 “가벼운 상승감”(같은 쪽)을 느낀다. 그리고 이 상승감은 다시 연결을 인식 가능한 범주로 돌려놓아 이웃을 향한 인사와 감사, 호의를 표하는 (역시 일종의 ‘주문’일) 문장을 큰 소리로 연습하게 한다. “Hei kaikki, 모두들 안 녕하세요. Kiitos, 감사합니다. pidän sinusta, 저는 당신이 좋아요.”(129쪽)
「일렉트릭 픽션」은 복잡계 네트워크 속에서 고립된 동시대 청년들의 사 회경제적 조건을 충분히 검토하면서도, 타인과 연결되는 감각을 어떻게 다시 회 복할 수 있을지 탐색한다. ‘오타쿠’와 ‘빠순이’에 대한 기존 담론이나 최근 화제 인 ‘MZ 오피스’ 등의 재현이 청년 세대는 공적 노동의 관행과 공동체에 대한 책 임에 무관심하고 사적 취미생활에만 몰두하며 고립되어간다는 비난을 (정의로 운 풍자인 양) 휘두르는 것을 상기하면, 사적 취미판단을 연결할 수 있는 계기와 그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우애의 정동에 주목하는 김기태 소설은 그와는 정반 대 방향에서 접근하는 셈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조건 없는 원천적 판단인 미 학적 감수성이 시민적 관계 맺음의 기초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 애의 감각을 회복하는 사건을 상상하는 것은 김기태 소설이 일찍부터 매진해온 작업이다.
이 계열에서 「세상 모든 바다」는 지금 대중문화의 미감이 형성중인 거시 적, 미시적 관계성을 두루 관찰한다. 다양한 국적의 케이팝 여성 아이돌 그룹 ‘세상 모든 바다’는 전 지구적 기후 위기와 인종·젠더·기아 등의 사회문제, 민주 주의 운동에 목소리를 내고, 청년 팬덤 역시 이에 호응하며 국가 단위의 기성 정치를 넘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설정은 동시대 케이팝 아티스트와 팬덤이 수행하는 지구 단위의 문화정치(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5)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거시적 정동 네트워 크가 일군 정치적 성과보다는 그 근간이 되는 미시적 네트워크다. 서로 다른 타 인이 연결되면서 정동 네트워크가 발생하는 최초의 계기는 무엇일까.
백영록이라는 이름의 16세 소년이 사망한 사정에 대해, 군청 앞에서 행인에게 말 을 거는 아주머니의 사정에 대해, 그 사정에서 나의 몫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해내 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 가 세차게 튀어올랐다. 얼굴에 와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 낌뿐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36쪽)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 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 그것 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37쪽)
‘세상 모든 바다’와 팬덤의 원전 건설 반대 캠페인을 비롯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22쪽)에 대해 무지했던 영록을 화자는 ‘얼빠’거 나 “음습한 움짤이나 모으는 녀석”(17쪽)으로 치부했다. 그런데도 영록은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 본 낯선 외국인에게 서슴없이 말 을 걸고 선물을 건네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화자에겐 그의 즐거움이야말로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지금의 복잡한 네트워크에서는 바다 건너의 보편적 가치 를 떠올리는 것보다 당장 닿는 물방울의 감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낯설고 두렵다. 그러니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정동 정치는 우선 용감하게 눈앞의 타인을 온전히 보는 감성적 즐거움, ‘근시의 사랑’일 것이다.6)
기실 이런 근시의 사랑을 갑작스레 마주하는 당혹감은 김기태 소설이 자 주 반복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보편 교양」처럼) 보편적인 가치에 공감한다는 자 신감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람을 마주하고는 뒷걸음질칠 수밖 에 없고, 그래서 (「팍스 아토미카」처럼) 기존의 언어로는 거대한 연결-네트워크를 충분히 파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어 무서워진다. 이런 서사 구조는 예상과 달 리 단절된 자신을 발견하고, 반대로 예상과 달리 연결된 자신을 발견하는 힘을 부조한다. 개별적인 인간-입자들이 연결되어 거대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 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떻게 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야 하) 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물방울의 집합에 불과한 바다에 어떻게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것 일까. 김기태 소설은 유독 전기, 음파, 파도, 빛 혹은 중고 거래 앱과 SNS 같은 매개를 통해 전달되는 파동 에너지에 주목한다. 하나의 입자가 곁에 있는 다른 입자로부터 운동에너지를 전달받고 이를 다시 전달하면서 파동이 생겨난다. 물 론 인간-입자를 떨리게 하는 운동에너지는 감정일 것이다. 이웃에게 폐를 끼치 거나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주체로 살라는 규범의 명령은 모두를 개별 적인 입자로 남게 한다. 하지만 김기태 소설은 인물로 하여금 그 강박과 조바심 을 버리고 자신에게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던 감정 에너지의 파동을 목격하게 한다.
용기로 연결되는 즐거움의 공동체
그동안 입자들을 멈춰 세우던 관성을 이겨내고 진동하기 위해서는 그 단 차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파동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보내겠다는 결심, 용 기가 그 에너지다. 대개 김기태의 남성 인물이 거대한 파동에 대한 외경심과 관 성을 벗어나는 두려움을 가시화하는 역할이라면, 여성 인물은 기꺼이 연결될 용기를 품고 먼저 그 현장으로 뛰어든다. 「롤링 선더 러브」의 ‘맹희’도 일렉트릭 기타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연애 예능과 밈을 모두 챙겨보면서 동시대 대중문 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이를 자기만의 주문으로 바꾸는 인물이다. 서둘러 결혼 시장에 뛰어들기를 종용하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연애가 정말 “투자와 수익의 문제일까”(43쪽) 묻는 맹희에게는, 친구 ‘리아’가 조언한 “연애는 옵션이거나 그조차도 못 되므로 질척거리지 말고 단독자로서 산뜻한 연대의 가 능성을 모색”(47쪽)하는 방향도 마뜩잖다. 자신을 거래하고 싶지도 않지만, 누군 가와 친밀하게 연결되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일 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51쪽) 자문자답을 반복하던 맹희는 그 해답을 직접 알 아보고자 결심한다. 동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랑의 재현물인 연애 예능 ‘솔로 농장’에 용감하게 참가해 그 한복판에서 “시원하게 굴러보”(52쪽)려는 것이다.
낭만적 성애와 경제적 부조라는 상호 모순적 규범으로 구성된 이성 연애 의 형식, 이성혼 제도 자체를 전시하는 연애 예능은 기성의 이성애적 젠더 규범 과 관계 모델을 강화하지만, 그 담론을 응시의 대상으로 메타화하여 일종의 소 격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 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 떤 세상인지 의아했다.(70쪽)
‘솔로농장’에서 맹희가 실제로 만난 이들은 서로를 경쟁과 쟁취의 대상으 로 한정하고 감정을 투자 수단으로 만드는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눈앞 의 관계성을 일구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악플과 조롱을 받 는 서로를 위로해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성실한 사람들이 보여준 친밀성에 비하 면, 규범에 갇힌 채 평가만 일삼는 사람들은 “사랑할 용기도 없는 놈들!”(73쪽) 에 불과하다. 맹희는 이성애적 규범이 여성 청년에게 강요하는 수치심과 조바심 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마주한 감정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알고자 한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 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76쪽)7)
김기태는 동시대 문화정치의 가장 세속적인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좌절 도 분노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맥락의 친밀성에 주목한다. 「로나, 우리의 별」의 여성 아이돌 ‘로나’는 자신의 음악과 팬덤이 퍼뜨리는 문화정치적 힘을 확인하 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 제도 정치를 변혁하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렇다고 로 나라는 인물의 성공담(성장)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부제 같은 첫 문장 “우리는 가능하다”(181쪽)가 암시하듯, 로나를 포함한 팬덤, 시민을 포괄하여 ‘우리’라 는 복수 시점을 취하는 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로나의 동지가 되려 하는 사 람들”(205쪽)(이 사용하는 온라인 아이디)로 서술 시점을 계속해서 옮겨가는 소설 은 그 서술 시점적-인물 관계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취향이 정치로 전이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사회적 참여 실험을 벌인다.
그 출발선이 현재까지도 파급력이 강한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점은 중요한 설정이다. “선출직 스타”(183쪽)인 셈인 로나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로나에 대한 친근감뿐만 아니라 로나의 행보를 비판하거나 동참할 의무를 지니 게 되기 때문이다. 로나는 성실하게 음악을 발표하는 한편, 재생지를 활용해 앨 범을 만들고 기후 재난이 생길 때마다 억대의 기부도 한다. 팬들 역시 친환경 앨 범을 구매하거나 기부에 동참하며 “로나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한다는 의사표 시”(188쪽)를 한다. 엔터테인먼트 자본이 투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상품) 를 도입하자 뜻하지 않게 어떤 관계성이 생성되고, 이것이 욕망의 방향을 전환 해버리는 것이다. “자본은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잉태하는지도 모르고 질주한 다.”(185쪽) 물신과 대상화의 극단에 있는 아이돌로 하여금 그 욕망의 회로를 반 전하게 하면서, 소설은 역사 속 혁명가들 역시 삶의 욕망 회로를 바꾸는 라이프 스타일 아이콘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진부한 악과 싸우는 일보다는 감춰진 위선을 폭로하는 일이 자 극적”(189쪽)이기 때문에, 로나의 진정성은 계속 의심받는다. 로나가 광고한 “상 품의 생산과정과 음악적 동료들의 언행과 신곡 가사의 함의를 따”(190쪽)지는 팬덤의 검증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로나는 IT 기업을 운영하는 ‘데릭’과 함께 제3세계의 사회 기반시설과 빈민을 위한 사회적 금융 사업을 시작하지만, 이는 그나마 있던 기업의 사회 공헌 책임을 (간접적 금융 투자 이윤을 얻는) 새로운 투 자 영역으로 바꾸는 것에 가깝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방해하지 않아 지속 가능하다는 대안 자본주의 담론은 기실 복잡계 네트워크를 거쳐 자본을 세탁 하는 “절도-기부 모델”(193쪽)일 수 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소비, 가치 소비 같 은 자본주의적 적선을 최대한의 문화정치로 간주하는 동시대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로나 역시 변하지 않는 세계에 좌절해, 늘 연주하던 기타 ‘붉은 도브’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고 잠적한다. 이때 작가의 세계에 대한 전망, 다시 말해 소설적 우연성이 개입한다. 로나의 팬덤들이 중고 마켓에서 붉은 도브를 발견하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다시 로나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공동의 선물 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넘어서는 다른 지평을 마주하는 이 일화는 대중이 로 나가 말하는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수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 자신이 메 시지를 발신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변할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로나는 “창 당 선언”(202쪽)으로 그에 화답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적 형식/제도)를 상품으로 흡수한 자본을 재전유하는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로나와 팬덤은 아예 더 멀리 나아간다. 선한 자본 을 선별해 투표하는 소비 주권자의 대의제적 전유에 한계가 있다면, 시급한 것 은 욕망의 형식이 아닌 내용 자체를 전환하는 직접민주주의다. 로나는 두루뭉 술한 선의와 인류애에 기대는 문화적 전통에 대한 파업을 선언하고, 그의 팬덤 과 함께 정당을 만들어 직접 발화하고자 한다. 그들은 「보편 교양」의 화자가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 다. 하지만 알고 싶다.”(205쪽) ‘나’들이 원하는 하루를 지금 요구하는 단상壇上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원래적인 정치일 수 있다. 문화/경제/정치라는 각각의 영역을 분리하면서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 의하지 않는다”(204쪽). 노조의 ‘정치 파업’이나 예술인의 정치적 발언은 ‘불순’ 하다는 통념을 넘어, ‘우리’라는 급진적인 연결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노동 분업을 물신화함으로써 정치를 여타의 영역과 분리하고 계급을 고착하는 대의제도(정치 전문가의 선의에 호소하는 온정주의)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우리의 별, 로나가 예고한 대로” “붉은 도브의 연주에 맞춰” 다 함께 부를 “그 노 래의 제목은 ‘우리는 가능하다’이다”(205쪽). 급진 좌파 정당의 여러 코드를 연상 시키는 소설의 결말에 도착하면, ‘우리’의 가능성은 취향의 공동체를 일상적 정 치 공동체로 세속화할 용기를 의미하게 된다. ‘나’들이 모인 네트워크 속에서 정 치 미학적 공통 감각이 창발하는 동시대적 조건과, 이를 시민적 우애의 단초로 전환하는 감성적 조건을 보는 것이다.
김기태는 자본(이 제공하는 대중적 즐거움의 경험)의 축적이 양질 전화를 일으키는 순간을 날카롭게 전유해낸다. 인신을 가장 세속적으로 대상화(아이돌 물신화와 관계의 예능화)하는 매체로부터, 자기를 파괴할 기반을 스스로 생산하 는 자본주의적 전회를 예감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태의 소설은 사적유 물론을 다시 소설의 무대로 불러들이고 있다.
평균의 감정과 밈의 즐거운 분노
그렇게 사적유물론을 다시 불러들인 소설이라면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 내셔널」을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은 경제적 토대로부터 문화양식이 생성된다는 (물론 도식적인 통념이지만) 사적유물론의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문화적 언어야 말로 경제적 토대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방법임을 서사화한다. “두 사람의 역사 는 길다”(111쪽)라는 첫 문장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수미 상관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두 사람’들이 만들어온 역사를 계보적으로 살피는 ‘코드’가 된다. 소설의 서두는 ‘두 사람’들 을 ‘기호화’하여 (형식적으로) 유사한 사건을 나열하면서 역사적 인과에 대한 엄 밀한 분석 대신 ‘두 사람’의 관계성과 시민적 결속의 계보들을 환유적 유사성으 로 연결한다. 그럼으로써 혁명과 테러는 역사 속에 고정된 신성한 사건의 자리 에서 내려오고, 전쟁과 디아스포라는 위대한 영웅이나 선량한 희생자의 에피소 드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역사의 세속화는 과거를 기준으로 그 인과를 반추하 며 현재를 반성하는 지성적 기술이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의 유사성 을 찾아내는 즐거움에 기반한 밈meme의 화법에 가깝다.
진주와 니콜라이 두 사람은 교무실에 따로 불려가 “내야 할 어떤 돈을 내 지 않았다는 안내문”을 받는 아이들이니 “둘이 친하게 지내”(114쪽)라는 말을 들 으며 처음 만난다. 이 ‘조언’은 가난을 극복하고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서로 도와가며 더 노력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계급적 수치심을 내면화하도록 유도 하는 다정한 교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작문 시간에 두 사 람은 진로나 꿈 같은 단어가 포함된 상투적인 에세이를 제출”하면서 “……니까 열심히 노력해야겠다”(116쪽)는 똑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니콜라이는 한국 에 정착하기 위해 열심히 기술을 배우며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진주는 공무원 시험을 위해 노력하며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서 “자신도 그럭저럭 평범한 이십대로 살고 있는 듯”(128쪽)하다고 아주 잠깐 느 끼기도 하지만, 평균적인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니콜라이가 한국에 계속 살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이 남아 있다. “전년 도 한국인 평균 이상을 벌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데, “그건 연봉 삼천팔 백만원 정도”(125쪽)다. 두 사람은 아무리 일해도 한국인 평균이라는 그 금액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134쪽)은 자괴감까지 든다. “남들 다 자리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같은 쪽) 잘못이라고 질책하는 것이 너 무 당연한 사회에서 평균이 되지 못한 두 사람은 묻는다. 결석 한 번 안 했고 법 을 어긴 적도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같은 쪽) 평균에 비추어 인 생을 평가하고 산출된 값을 부풀려 전시하거나 평균에 미달하는 자기를 혐오 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형태처럼 보이는 시대이기에, 청년들은 서로를 견주며 질투와 수치심을 느낀다. 평균 이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장을 멈추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열망과 패배하면 홀로 낙오되어 고립된다는 수치심. 이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한국사회는 (최소한) 경제적 공공재에 가까운 통신망에 접속 할 권리는 남겨둔 셈이다. 역설적으로 그 덕에 통신망은 (아직은) 정치적 공공재 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를 평균의 감정으로 대하는 공간이면서도 드립과 짤, 유 머와 밈이 난입하여 평균의 연결을 방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퇴근길에 지쳐 커뮤니티 게시판을 스크롤하는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신의 삶을 다른 이십대와 비교하면서 주눅들다가도 댓글에 달린 밈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는 여전히 현장실습생과 제빵사, 택배 기사와 대학 청소 노동자 등에 관한 게시글에 나타났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건 아니지만 아무도 알 바 아닌 일을 하다 무시당하고 위협받고 쫓겨나고 심지어 죽은 이들을 조롱하 는 댓글 속에서도 엠마는 늘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외쳤다. 때로는 한국 치킨 으로 신세계를 맛본 영국인이나 데드리프트가 3대 운동 중 최고인 이유, 다이어 트할 때 기립성저혈압 조심해 같은 제목의 게시물에도 끼어들었다. 금발의 양 갈 래 소녀는 인터넷 세계를 떠돌며 가끔 길을 잃기도 하는 꼬마 유령처럼 보였다. 또 는 태엽이 풀릴 때까지 아장아장 걸으며 오직 한 문장만 되풀이하는 인형.
“기립하시오 당신도!”
어쨌든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들은 계속 있었다.(136~137쪽)
엠마 리스의 일화는 브레히트의 시에서 유래하여 한국에서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기 전에 선창하는 구호가 되었고 다시 웹상의 밈으로 정착했다. 물 론 이 밈이 노동자의 전 세계적 연대를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게시 글 과 대화의 맥락을 단절하거나 변환하면서 현재 ‘나’를 위한 맥락으로 전환하는 화용론적 수행을 반복하기 쉽게 코드화한 언어를 제공해준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정직원이 아니라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유니폼이나 형편없는 구내식당 메 뉴, 덥고 춥고 좁은 휴게실 따위에 대해 소식을 전하며 “이거는 기립이네, 기립해 야겠네” 같은 농담을 주고받”(138쪽)는다. 노력하지 못한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 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이를 서로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서로를 대신해 분노해주는 밈을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돌보 고 있다. 여러 직업의 세계를 견학하는 유아교육용 캐릭터이면서도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펭수, 슬픈 표정이지만 어떤 상황에도 체념하지 않고 불만족 을 표시하는 개구리 페페 같은 밈들도 마찬가지로 청년 세대의 분노를 유희 속 에 담아내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축적하게 만드는 미래주 의적 삶의 규범, 성장을 청년기의 당연하고 유일한 목표로 자연화하는 ‘잔인한 낙관주의’8)를 비웃고 풍자하는 언어적 틈을 만들어낸다. 그 틈에서 마구 돋아 나는 밈은 새로운 즐거움을 통해 생존경쟁이 만들어내는 우울과 자기혐오를 멈 춰 세우는 ’다정한 비관주의’9)를 싹틔운다. 이 웃음은 긴말을 하기 어려울 만큼 지쳐버린 출퇴근길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당신도 기립하라고 고 집스럽게 외친다. 성장의 명령에 복종하거나, 좌절하고 수치를 느끼라는 회유에 따를 생각이 없다고 현재를 정지하는 함축적이고 단호한 주문이다.10)
밈을 인용하며 대화하는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신과 이웃 사이의 친밀감 에도 다른 별명을 붙인다.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그저 마음에 따라 동 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자신들을 연인이나 부부 혹은 가족이나 친구 그 무엇이 라고 정의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142쪽)11)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같은 쪽)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산업재해를 당해 잠적한 친구와 인플루언서를 꿈꾸다 사라진 친구에 게도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한 마음을 전하고,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 버림”(143쪽)이라는 짧은 문장이 암시하듯, 집회중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가족 과도 관계를 맺는다. 정주민·내국인/이성애자/유자녀 가족을 기본 주체로 상정 하는 이웃간의 관계에도, 대단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던 계급적 연대에도 그렇 게 친밀하고 즐거운 새 이름이 붙는다. 가난한 집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내라는 교사의 조언이 끝내 이상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처럼 과거의 혁명사가 엉뚱한 밈 의 형태로, 기필코 고집스럽게 귀환한다. 친밀성의 이름을 다시 쓰면서. 국가-시 민의 관계가 아니라 시민-시민의 관계로 관점을 전환하면서.
그렇게 김기태 소설은 고립의 위기에 처한 청년들을 경제/구조의 증상으 로 환원하지 않고, 도태된 시민(경제 동물, N포 세대)으로의 퇴화와 고립을 강조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규범적 정동이 되어버린 우울한 자기 비하 속에서도 청년 들이 찾아내는 즐거움에 주목한다. 이 즐거움은 ‘살 만한 삶’12)을 상상하게 한 다. 이는 한국문학사에서 익숙한, 선험적 집단(계급,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금욕하 고 희생하는 지식인의 지적 종합력(양심, 의식)을 재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시민 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정동적 조건을 탐문한다. 규범적 생애 서사에 근접하도 록 자기를 경영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좋은 삶, 살 만한 삶을 분리하고 재정의한 다. 이로써 각자가 즐거운 느낌의 연결체로, 다시 새로운 시민적 정동-관계로 향 하게 한다. 이것은 본래 정치 미학이 하던 일이기도 하다. 혁명이 통치 집단의 변 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재정의하는 것이라면, 지금 눈앞의 관계 에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 즐거 움의 연결이야말로 혁명의 선결 조건이다. 김기태는 이 조건을 정직하게 모으고 있다.
- 1) 임화는 전환기 문학의 인식/감성 구조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문학이란 감성적 형식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적 활동의 영역”으로 “감성적 세계 가운데 지성은 자기를 용해(溶解)함으로써만 형성되는 독자(獨自)의 세계다.”(「의도와 작품의 낙차(落差)와 비평—특히 비평의 기능을 중 심으로 한 감상」(1938), 『문학의 논리—임화문학예술전집 3』, 소명출판, 2009, 561쪽) 대상/세계와 직접 대면한 감성이 먼저 영향을 받은 다 음에야 지성은 영향을 받으므로 “지성 가운데 의미된 내용은 이미 과거의 것으로 소멸된 감성계가—직관은 항상 순간적이고 그것이 지속적 의 미를 취득하는 곳이 지성이다—가져온 낡은 세계이고, 감성계는 늘 지성 가운데 정착한 낡은 세계와는 판이한 생성이 신세계로 형성되”므로 “지 성과 감성의 갈등이 의미하는 신과 구는 실상 낡은 세계와 새 세계의 대립이다”(같은 글, 564쪽).
- 2)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과지성』 1975년 겨울호.
- 3) 백낙청, 「시민문학론」, 『창작과비평』 1969년 여름호, 477쪽.
- 4) 김건형, 「촛불 이후의 정치라는 단상(斷想·單相·壇上)」, 『문학동네』 2024년 봄호 참조. 박서양과 이희우는 곽이 이상(보편)과 현실(특수) 을 종합하는 메타적 반성력을 발현했으나 동시대 교육 현장의 한계 때문에 실패했다고 읽으며, 그럼에도 고뇌하는 교육자이자 평범한 인간으로 서 그가 지닌 최소한의 진정성(직업윤리)을 애도한다(박서양, 「이토록 달콤한 멜랑콜리」,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이희우, 「평범한 자는 들어오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해설). 반대로 홍성희는 결말 이후에도 곽이 변하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했 으리라 전망하면서 ‘균열’을 미학화하는 데서 그치는 문학은 때로 안전한 공간에 머무르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홍성희, 「안전의 방향 (1)」, 문장웹진 2023년 10월호). 한편 임세화는 민주화 세대도 아니고 그 이후의 새로운 담론도 없는 “끼인 세대”로 곽을 읽는다. 동시대의 교양을 탐 구하지 않고 이전 세대의 진정성을 시대착오적으로 추구했기에 “자신의 비어 있음과 대면”했다는 것이다. 주도권 한 번 지니지 못한 채 늙은 세대 라는 독해는 문학사적으로 흥미롭지만, 김기태의 다른 소설과 연결해서 읽을 때 드러나는 혁명/주체 자체의 갱신 가능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 다(임세화,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문장웹진 2024년 7월호).
- 5) 미얀마, 태국, 홍콩 등 아시아의 권위주의 정부에 저항하는 청년들이 케이팝과 팬덤 문화를 민주화 운동의 코드로 활용하고 연대의 매개로 삼 았던 사례를 상기해볼 수 있다. 가령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오랜 애창곡이자 촛불집회(의 효시였던 이화여대의 2016년 집회부터)에서도 불렸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2020년 태국 민주화 집회 현장에서도 합창되었다. 이는 홍콩, 대만의 반권위주의 ‘밀크티 동맹’과 결합하며 케 이팝 팬덤의 연대를 상징했다. 2019년 산티아고 반정부 집회 배후에 케이팝 팬덤이 있다는 칠레 정부 보고서는 당시 한심한 책임 회피로 치부되 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핵심을 찌른 셈이다.
- 6) 김건형, 「가족도 미래도 없이 친밀하게」, 『문학동네』 2022년 겨울호, 136쪽.
- 7) 김건형, 「연애 예능과 프랜차이즈 자아의 시대를 굴러가는 ‘나’의 이야기」, 『2024 올해의 문제소설』, 푸른사상, 2024 참조.
- 8) 욕망하는 대상이 오히려 더 나은 삶의 걸림돌이 된다는 ‘잔인한 낙관주의’는 나중에 도래할 성공적 미래를 애착의 대상으로 만들어 잔혹한 현 재에 적응하고 인내하게 한다. 이는 당면한 모든 문제를 개인의 긍정적 태도와 자기 계발의 노력이라는 ‘합리적 선택’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며 개 인화하는 감정 통치술이다. 로런 벌랜트, 『잔인한 낙관』, 박미선·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 9) 마크 피셔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광범위한 스트레스의 개인화를 수용”하게 해 불안을 개인이 ‘치료’하도록 하는 의료적 시스템·담 론을 자연화한다. 그런데 “특히 그토록 많은 청년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게 되었는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정신건강 질환’이 유 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 체계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 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포스트포드주의는 청년을 취업과 실업을 번갈아 사는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 상태로 몰아 양극성 장애라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정신질환을 유포하며, 가족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약물을 제외하면) 대안적 미래로 상상하게 한다. 이는 우울과 불안, “정신질환을 재정치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낙관을 정지하는 비관이야말로 서로를 돌보는 다정함 일 수 있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24, 68~69쪽, 97쪽.
- 10) 밈과 같은 ‘대항 소음’은 정치적 목표나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연대 자체를 몸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로런 벌랜트, 같은 책, 465쪽)이다. “감 각 능력, 집중, 다시 한번 함께 모이는 즐거움의 코믹한 의미를 수반하는 민주적-존재-되기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정치적인 것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 “정치를 한다.””(같은 쪽) 그러므로 “잠재성이 긍정되는 장소인 ‘지금’에 수행을 통해 소속되는, 농밀한 감각적 활동”(466쪽)에서 시민권 이 작동한다. 이렇게 “주변 분위기로 형성되는 시민성의 정치적인 강도”는 미약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거부의 철학으로 헤게모니적 이데올 로기에 맞서지 않기 때문”(464쪽)이다. 하지만 이는 대의제의 대표자(와 그 환상)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면서 생긴 만성적인 정치적 우울에서 벗 어나 친밀한 사회성과 소속의 느낌을 생성하며, “정치에 의해 마모되지 않는 것을 정치적 행위로 가치 있게 여기면서 정치적 행동을 다시 활성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467쪽).
- 11) 이희우는 ““친한 사이”는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 시험중인 사랑”을 의미한다며 이를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명명한다. 우애의 정치성을 담은 적실한 명명이지만 본고에서는 동등한 둘 바깥으로, 옛 친구와 이주민 이웃과 우연히 만난 노동 집회로 ‘친한 사이들’이 확장되는 장면에 좀더 주목해보려 한다.
- 11) 이희우는 ““친한 사이”는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 시험중인 사랑”을 의미한다며 이를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명명한다(이희우, 같은 글, 329쪽). 우애의 정치성을 담은 적실한 명명이지만 본고에서는 동등한 둘 바깥으로, 옛 친구와 이주민 이웃과 우연히 만난 노동 집회로 ‘친한 사이들’이 확장되는 장면에 좀더 주목해보려 한다.
- 12) 주디스 버틀러는 안정적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동성애적 정동을 비가시화하는 ‘이성애적 우울’의 문화적 제도화를 지적(『젠더 트러블』)하 면서 권력이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성의 영역을 결정해왔음을 짚는다. 규범은 바깥으로 주변화된 사람을 ‘살 만한 삶’에서 배제하며 모두 가 취약한 신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망각하게 한다. 살 만한 삶은 사회계약론의 형식적 개인주의를 넘어 타인(과 나)의 취약한 신체를 지킬 때만 비로소 모두에게 도래한다(『비폭력의 힘』). ‘애도할 만한 삶’에서 ‘살 만한 삶’에 대한 사유로의 궤적은 윤조원, 「“살 만한 삶”을 향해— 『젠더 트러블』에서 『비폭력의 힘』까지」,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0권 4호, 20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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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고통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수치화할 수 없어서 증명하기 어려운 통증은 느끼는 이가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의 초점 화자인 '그녀'는 정강이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반깁스를 하게 된다. 그녀는 "가시 돋친 불덩이를 다리에 얹고 있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만, 그에 비해 의사가 해주는 처치는 너무나도 간단해 보인다. 게다가 딸은 병원에서 불평하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 더는 붕대를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통증을 증명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생각에 "아픔을 누릴 권리"를 잃은 것 같은 묘한 상실감을 느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혼자서 떠안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는 편혜영의 다른 단편소설 「리코더」(『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속 '무영'이 많은 사상자를 낸 건물 붕괴 사고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후, 멀쩡한 다리에 두 달간 깁스를 했던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참사를 겪은 당사자이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갖게 된 목격자임에도 운 좋은 생존자라는 이유로 아픔을 인정받지 못하자 무영은 자신의 고통을 그렇게라도 드러내려 한다. 당사자만이 아는 내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입증하는 일은 이토록 복잡다단하다. 「남은 사람」의 그녀는 몇 해 전에도 허리를 다쳐 통증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번번이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에 가서야 척추뼈 중 일부가 손상되었다는 소견을 듣게 되는데, 이때 그녀는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님에도 안심한다. 자기가 감각한 통증의 실체를 더는 스스로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해방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통은 자기에게는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타자에게는 추체험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이해받기 어렵다. 이 같은 고통의 맹점은 모녀 사이마저 갈라놓는다. 내내 앓던 손녀가 일곱 살에 죽자 그녀의 딸은 자식을 잃은 아픔에 오랫동안 자학하고 애통해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마음을 추스르라고 위로하는 그녀에게 딸은 "자식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아느냐"고 쏘아붙인다. 그녀는 딸이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딸 역시 "어린 자식을 앞세운 딸을 둔" 엄마의 비통함을 가늠할 수 없다.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사진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하는 딸에게 그녀가 "그 나이에 남자들이나 찍는 사진을 배워서 어떻게 먹고살려느냐"고 묻자 딸은 피식 웃는다.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응원받기는커녕 고정적인 성역할에 기반한 비난만 듣게 된 딸의 상처는 웃음 뒤에 가려진다. 편혜영은 고통에 울부짖고 몸서리치는 인물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증언 불가능성을 깨닫고 일찌감치 입을 다물게 된 인물을 많이 그려왔다. 고요하게 싸늘해지는 사람들 가까이에서 침묵에 덮인 그들의 참혹을 서서히 누설하는 편혜영은 「남은 사람」에서도 여지없이 읽는 이들이 섬뜩한 슬픔에 감염되도록 만든다. 그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게 하여 그녀의 감각을 체화하도록 유도하던 소설은 말미에 이르러서야 딸이 하던 "엄마, 괜찮아요. 이제는 다 지나갔어요"라는 무심한 말이 복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화상을 입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아파하는 그녀에게 딸은 그녀가 다리를 다친 것이 십수 년 전의 일임을 일러준다. 그녀는 신체에 각인된 고통 대신 그 환부가 아물어가던 시간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엉킨 시간은 지나간 고통을 도리어 생생하게 만들기도, 완전히 잊은 고통을 다시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기억을 상실해가는 이들이 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이 잊어버린 기억을 알려주지 말라고 딸에게 부탁한다. 절친했던 지숙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언젠가 남편과 손녀의 죽음을 잊게 될 때, 그 끔찍한 고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다.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가 무슨 일이든 겪게 하는 삶에 맞서서, 경험한 일들을 부단히 잊어가기를 바라는 결말은 섬찟하게 새롭고 선득하게 슬프다.
이 글은 조경란의 단편소설 「검은 개 흰 말」(『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4), 「그들」(『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및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 2013),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 2018), 『가정 사정』(문학동네, 2022), 장편소설 『복어』(문학동네, 2010),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문학동네, 2024) 등을 다룬다. 이하 소설을 인용할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나의 등을 향해 걸어가기 조경란 작가는 "좋은 제목은 독자에게 문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1)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소설 제목 하나를 들여다보는 일로 글을 시작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의 소설집 『가정 사정』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 「한방향 걷기」를 보자. 이 제목은 낯설지 않다. 터미널 표지판 또는 길가의 현수막에서 익히 보아왔던 문구이기 때문이다. 보행자들의 발길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돕는 안내문은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도 "문화재청에서 나무에 달아놓은"(255쪽) 푯말에 쓰인 말로 등장한다. "한방향 걷기"는 해당 소설의 본문에서 유일하게 다른 글씨체로 표시되어 있어 형식 측면에서도 표지판 역할을 한다. 걸어온 방향 그대로 걸어가라고 조언하는 것 같기도, 다른 방향은 기웃대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 같기도 한 이 구절을 읽으면 궁금해진다. 그래서 '한방향'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걷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단 이래 이십구 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온 조경란의 작품세계는 다채롭고 방대하여 이를 한 가지 특징으로 일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세계를 축소하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하나의 공통점을 꼽아본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웅크리고 쪼그라들어 아주 납작해진 공처럼 보일 때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걷는다. 그리고 걷기는 조경란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공들여 묘사하는 행위다.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 인물이 걷는 장면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소설들만 몇 가지 꼽아보아도 다음과 같이 많다. 조경란의 첫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의 결미에서 여진은 사람들은 모두 "지도라곤 없는 자신만의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160쪽)는 것을 깨닫고는 창가에서 등을 돌려 식빵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걸어간다. 두 번째 장편 『가족의 기원』 또한 정원이 "지도도, 아무도 없는 길 저쪽으로" "트렁크"를 쥐고 "서툴게 걸음을 옮"(333쪽)기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는 정원을 가두어왔던 "세계로부터의 탈주"2)로 비친다. 「양파 던지기」(『가정 사정』)의 초점 화자인 원진은 생각이 많아질 때면 산에 올라 양파를 던지던 세입자 기중구가 떠난 후 그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집을 나선다. "그는 양파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걸었다. 꽃도 아닌 것을, 어쩌면 마음만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115쪽) 이 소설 역시 인물의 걷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네 번째 장편소설 『복어』 또한 "그녀는 머리를 앞으로 내민 채 그를 향해 걸었다"(346쪽)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아버지의 삶을 추모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성냥의 시대」(『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햇살이 번져들고 있었다. 공장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귀마개가 필요할 만큼 많이 만들어내야 할 성냥도 없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햇빛을 받으면 눈이 아플지도 몰랐다. 어둠이 아니라 그늘 속으로 그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가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53쪽) 이 단편이 소설집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경란이 소설집 전체를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조경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지각색의 걷기는 물리적인 행위이자 실질적인 운동이면서 동시에 주저앉은 곳에서 다시 일어나 나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띤다. "매일 10분씩이라도 글을 쓴다면 삶이 적어도 1킬로미터쯤은 나아간 거라고"3)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조경란의 에세이를 참조하면, 걷기는 쓰기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욱 궁금해진다. 단일한 방향으로 걸으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소설가 이승우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 옛사람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4) 생각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한방향으로 계속 걷는다면 출발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 되는 이 세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등 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자가 된다고 한다. 이승우는 한 번 더 생각이 도약하게끔 이끈다. 등 뒤에 있는 사람보다 그 등을 가진 사람이 출발점에서 더욱 먼 사람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한방향으로 쉬지 않고 지구를 다 걸어서야 만날 수 있는 가장 먼 사람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어쩐지 마주보기 두려워서 사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이 둥근 지구상에서 종내에는 퉁, 부딪히게 될 굽은 등.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낯설기만 한 캄캄한 뒷면, 그것은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나'에게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일 테다. 조경란의 소설에는 "세상과 잘 사귀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유기되어 있는"5)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지나치게 내향적"(「양파 던지기」, 85쪽)이고 소심하여 타인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번번이 소외되는 이들은 가족에게마저 거부당하거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에도 실패한 채 고독하게 남겨져 있을 때가 많다. 이들은 외로운 자신을 돌보는 방법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자기와도 불화한다. 하지만 조경란은 그런 인물들이 마음의 장벽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침잠해 질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작가 자신과도 닮아 있는 인물들이 자기 안을 헤집고 허물어 내면을 넓히고서 '나'의 실존을 찾기 위해 걸음을 떼는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자기를 알아가는 일에 실패할 때도 유의미한 성공을 거둘 때도 계속해서 이들이 '나'를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어떻게든 그들 안의 자력을 발견해주려 노력해왔다. 조경란의 최근 소설들은 주관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여러 주관이 병존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음을 밝히려 한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이 보편의 세계에서 등 돌리는 일이 아님을 헤아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응시가 평균으로 동일시될 것을 강요하는 외압에서 벗어나 특수한 삶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임을 이해할 때, 조경란의 소설은 더욱 와닿게 된다. '나'라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보기 위해서 지구 한 바퀴를 다 걸어 '나'에게 다다르는 일은 언뜻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저마다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걸음마다 여러 '나'를 마주치면서 처음에 품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들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가게 된다. 아둔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행로는 복수의 '나'가 병존하는 세계의 이치를 일찍이 이해한 자가 설정한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2. 원한의 역학 단순한 움직임으로 보이는 걷기는 의외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일부터가 고역이다. 그러므로 걷기 시작했다는 것,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회복의 단초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아지기 위한 첫걸음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비치는 '원한'에서 시작되었다면 어떤가? 독특한 발단을 꾀하고 있는 2024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중심인물인 종소와 영주가 만나게 된 계기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음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종소가 품은 복수심으로 인해 서로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겸임교수였던 종소는 자기 제자를 뽑으려는 최교수에 의해 임용 과정에서 부당하게 제외되어 팔 년간 담당해온 과목을 더는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 종소는 "자신은 수업을 더 할 권리가 있다"(41쪽)고 자기 몫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 번 항의해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알아온 "유일한 삶"(24쪽)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이후 그는 후배의 출판사 일을 돕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해고당한다. 군산, 부산, 광주와 같이 먼 지역을 전전하며 자기 전공과 무관한 강의도 가리지 않고 떠맡아 생계를 이어나가지만, 당장 다음 학기를 보장할 수 없는 불안정한 강사 생활에 불안해한다. 고용의 불안정성 외에도 그를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 우울증을 진단받은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들이 늘 공기처럼"(12쪽)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종소는 양파를 물에 담그다가도 불안해져 어머니가 닫은 방문을 열어두고서 그 문이 다시 닫힐까 마음 졸인다. 일상생활에서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하는 그는 불안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이 있"(13쪽)는 것일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종소가 하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거라고 추측하며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소는 문득 "내가 이선생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같은 쪽)이라고 통보함으로써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종소의 삶에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 축소해버렸던 최교수를 떠올린다. 매사 두려움을 느끼며 위축되고 경직되었던 종소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같은 쪽)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상의 가장 유명한 시 「오감도-시 제1호」에 등장하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분간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동일 인물인 것처럼, 두려움에 떠는 이는 위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공포감에 제압당하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자가 되려는 기획, 그것으로 종소는 미래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자신에게 다가올 최악의 일에만 골몰하던 종소가 부도덕한 일이나마 계획하고 실행하려 하는 것이다. 최교수를 두렵게 만들기 위해 "그를 찾아가야겠다고"(14쪽) 다짐할 때, 미래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볼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따라서 이때 원한의 감정은 그것을 품은 이를 살려두는 동력이 된다. 무엇이라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해보자면, 「그들」은 자기를 살려두는 일에 기여하는 감정적 자원인 '원한'으로 우연한 만남을 발생시킨 후, 그 만남을 통해 인물들이 원망하는 마음에 응축되었던 에너지를 차츰 다른 방향으로 발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때 원한으로 일어선 인물들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살 만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으로 바뀌어나간다. 어찌됐든 그 만남 자체는 종소의 복수심에서 시작한다. 그는 최교수의 부인인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악의를 품고 일부러 카페에 찾아왔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종소가 카페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교수가 영주에게 위험해 보이는 그를 내보낼 것을 권유할 때, 종소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다. 그러나 원한으로 시작된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의도하지 않은 굴절은 주어진 정보를 통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는 다른, 직관적인 알아차림에서 발생한다. 종소는 멀리서 보면 "우는 사람처럼"(20쪽) 보이는 영주의 슬픔을 알아챈다. 영주 역시 종소가 누군가를 나름의 방식으로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카페에 오지만, 막상 자신의 두 손이 "무기라도 되는 듯 주머니 깊이 찔러넣"(30쪽)고서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삼간다는 것을 포착한다. 영주는 그가 자신이 당한 부적절한 해고에 소극적이나마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으면서 짧게나마 고요와 평온을 누리다가 가는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영주는 최교수의 작은 손이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크고 두꺼운 손"(21쪽)에 비해 무섭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다. 영주가 안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는 점은 그녀가 언제나 안전을 위협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교수의 손과 종소의 손은 영주의 불안을 낮추어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안정감을 선사하는 방식에서는 대조된다. 최교수의 작은 손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공격력이 약하리라고 추측되기에 영주를 덜 두렵게 한다. 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한 신체적 외양일 뿐이다. 이와 달리 자기를 비롯한 누군가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손을 주머니 속에 가둬두는 종소의 습관은 그가 선택한 행동이며, 그의 성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종소라는 인물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진다. 종소의 습관은 영주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종소가 영주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생각이 기울어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영주는 실제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구름과 전선줄이 겹친 듯 보이는 풍경을 "깃털 구름이 전선줄에 걸려 있"(23쪽)는 모양으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전선줄을 "잘못 그어놓은"(같은 쪽) 금으로 인식하는 영주는 그것을 통해 남편과 아들의 편에 좀처럼 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 밖에 놓인 자기 처지를 환기하기도 하지만,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16쪽) 것만 같은 불안을 단번에 종식할 방법으로서의 죽음 또한 은연중에 떠올린다. 종소도 강의실 창문 커튼을 묶어둔 "케이블 줄"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 죽음을 돕는 "다른 용도"(25쪽)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생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리라는 생각에 마음 졸이며 살아온 종소와 영주는 죽음에 갈증을 느낀다. 자기 상처는 외면한 채 삶을 견뎌온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만큼은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나' 아닌 대상이 망쳐지는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잠귀가 밝은 어머니가 도어 록 소리에 깰까 싶어 열쇠를 지니고 다닌다. 영주는 카페 문을 닫을 때마다 야외 테이블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쇠줄로 동여매는 일, 즉 불특정 다수를 의심하며 자기 것을 지켜내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 카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상추와 고추 모종을 심는다. 이러한 사정을 살피면, 영주 또한 종소처럼 원한을 지닌 인물이다. 엄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자기를 몰아세워 천천히 죽여가고 있었던 영주는 종소의 찢어진 재킷 주머니를 꿰매어주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때 영주는 미움의 칼날이 시종 자기를 겨누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오랫동안 벼려온 날이 자기를 찌르는 대신 바늘이 되어 다른 사람의 찢긴 상처를 꿰매어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안 꿰매면 더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29쪽)라는 영주의 충고는 외투 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슬픔이 줄줄 새는 다친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안에 든 내용물 전부를 들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들고 다니던 에코백에서 영주가 '반짇고리'를 꺼내고 이를 종소가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들키고 싶었지만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불안을 알아채주는 상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자기를 살려놓기 위해 동아줄처럼 붙들어야 했던 원한은 점차 희미해진다. 살려만 놓자는 생각이 살 만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의 욕구로 나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팔 년간 재직했던 학교를 떠나며 건물의 수도꼭지를 모두 틀어놓았던 것처럼, 자신의 슬픔보다 더 많은 양의 무엇을 대신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불행에 대처해왔던 인물이다. 자기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다른 큰 소리를 냄으로써 내면의 소리를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감추고,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종소는 어머니가 자주 소리 내서 운다는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이 슬픈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래서 자신도 울고 싶은 심정임을 영주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처음 고백한다. 종소는 더는 최교수를 기다리지 않게 된다. 대신 다른 것을 기다리게 된다. 누군가를 두렵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에 떠는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서 사그라든 것이다. 결국 종소는 최교수와 마주치는 상황을 기다렸으면서도 그것이 더 미뤄졌으면 하고 바란다. 원망의 마음, 최교수를 두렵게 하려는 마음은 비슷한 불안을 지닌 영주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자 자연스레 내쫓겨버린다. 영주 역시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아들 상현을 괴롭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부족한 엄마 밑에서 자란 아들 주변의 또래 아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리라는 공포에서 걸어나와 자기와 닮은 불안을 지닌 사람의 상처를 꿰매어주면서, 자신이 작은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임을 배우게 된다. 3. 필연적인 불안 각자의 불안은 본디 특수성이 있지만, '여성적 불안'이라고 불러봄직한 영주의 불안은 종소의 것과는 구별된다. 영주는 눌러왔던 마음이 솟구칠 때,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이야기를 적어 '선생님'에게 문자로 전송한다. 선생님의 번호로 "알았어"(16쪽)라는 세 글자의 답장이 왔을 때, 영주는 그것이 선생님의 말투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번호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후 선생님인 체하며 답장을 보내온 상대가 자신의 카페를 찾아와 자기를 위협하리라고 예상하며 영주는 두려움에 떤다. 영주의 불길한 상상 속에서 그는 해치기 쉬운 "여자"(17쪽)로 대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비약적 사고가 과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사소한 계기로 스토킹 당하거나 죽임당하는 여성이 실제로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다친 이웃을 대신해 가게 일을 돕다가 손님에게 "씨발, 아줌마 뭘 그렇게까지 친절하세요"(22쪽)라는 욕설을 듣는 「일러두기」의 미용, 「양파 던지기」에서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95쪽) 남자를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원진의 아내, 이웃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집에 남자도 없으면서"(245쪽)와 같이 사건과 무관한 비하의 말을 듣는 「한방향 걷기」의 은제 이모, 「봉천동의 유령」(『일요일의 철학』)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하는 남자 세입자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엄마로 대변되는 여성 인물6)은 모두 불안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은제 이모가 베란다에 흙물이 드는 사건을 언급하면서 "어딜 가도 완전히 안전한 데가 없"(「한방향 걷기」, 233쪽)다고 토로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십일층 남자가 화분에 물을 주느라 은제 이모의 베란다를 더럽히는 일은 언뜻 안전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 이웃에게 항의하는 일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그와 같은 불길한 예감은 매우 비논리적인 망상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삶을 참조하면 적절한 추론에 가깝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조차 범죄의 위협과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의 처지는 불안 또한 젠더화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최교수를 두렵게 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는 종소, 그 소극적인 방식의 앙갚음조차 종소의 성별이 바뀌면 불가능하리라고 씁쓸히 예측하게 된다. 쉽게 일터에서 내쳐지는, 그러나 누군가를 짧은 시간이나마 두렵게 할 수는 있는 종소의 그 불안정한 위치조차 비교적 안정적으로 비친다는 점은 성차별의 심각성을 환기한다. 조경란이 지속해온 여성 폭력에 대한 섬세한 고찰은 젠더화된 불안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집이나 직장, 일터의 화장실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조차 여성에게는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밝혀주었던 조경란은 범죄에 노출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어 빈번히 경험해야만 하는 여성적 불안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어려움까지 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강제로 날 선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불안이 유별난 기질에 기반한 왜곡된 감정이 아님을 소설은 확인하게 한다.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가 원래 '궁지'라는 뜻이었다는 점은 불안이 "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한다"7)는 사실을 환기한다. 불안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를 고립시키고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불안 요소들을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만든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도모하기보다 모든 불행을 잘 모면하여 생존해가는 일에 연연하게 한다. 「그들」의 인물들은 불안이 추동하던 도망침을 멈추고 그렇게 도망치기만 했던 자기를 마주하고 돌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게 된다. 서로에게 들키고 서로를 알아채주면서 종소와 영주는 도저히 삶을 지탱할 수 없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불행한 미래에의 예감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48쪽)다는 다행한 현재의 확인으로 바꾸어낸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과도하게 예민한 성정 때문이 아니라 언제든 해고되고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경란의 소설은 불안함을 느끼는 개개인을 탓하지 않고 그 불안을 창출하고 체득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를 조명하게 한다. 조경란은 안전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누구도 해칠 의도가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눌리어 죽어가야 했던 이태원 참사에 대한 흔적을 소설 곳곳에 녹여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지적한다. 권희철은 소설 「그들」이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한다는 점, 상현이 가한 학교폭력이 참사를 흉내내는 '압사 놀이'의 형태를 띤다는 점, 영주가 압박당하는 공포에 대해서 자주 거론한다는 점 등을 분석하여 '그들'이라는 지칭이 트라우마 이후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8) 이러한 해석을 참조할 때, 소설 「그들」은 종소와 영주가 지닌 개별적인 아픔뿐 아니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부와 그로 인한 치안의 부재가 사람들을 강제로 불안에 취약해지도록 한다는 점까지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해에 인재가 더해져서 일어나는 참사는 그의 다른 소설 「검은 개 흰 말」에서도 묘사된다.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도림천이 범람하고 "인근 반지하 빌라가 침수돼 세 이웃이 사망"했다는 뉴스(106쪽)가 보도되는 장면은 2022년 집중호우로 사망한 신림동의 세 모녀를 떠올리게 한다. "졸업여행을 가던 길에 생을 마치게 될 수도 있다"(108쪽)고 '나'(서양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가정하는 대목은 세월호 참사를 상기시킨다. "수해 피해의 경험들"로 인해서 '나'에게 여름은 "일년 중 가장 긴장하는 시기"(96쪽)로 감각되며, '나'는 "평범한 순간에도"(108쪽) 자신 혹은 타자들의 죽음을 걱정하며 초조해한다. 구조적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안전관리에는 소홀한 한국사회가 개개인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조경란의 소설은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대목들은 조경란의 소설이 '나'에 천착하고 있음에도 결코 개인의 단위로 이야기를 축소하거나 '나'라는 한 사람의 서사로만 유폐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한다. 4. 그저 살아내는 삶에서 살리는 삶으로 조경란의 최근 소설에는 이처럼 복수심에서 걷기 시작했더라도 자기를 살리는 일로 반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 방치해왔던 자기의 굽은 등을 안아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의 이야기가 자주 발견된다. 「일러두기」의 중심 인물인 미용은 마흔아홉 살로 공교롭게도 「그들」의 종소와 같은 나이이다. 복사집 '대학사'를 운영하는 재서는 인쇄를 하러 온 손님인 미용의 글을 읽게 되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자식을 바란 적 없었다는 이유로 자식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미용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길이라는 판단하에 자기감정과 자기 존재를 숨기는 데 "가진 에너지를 다"(19쪽) 소진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지금은 반찬가게 주인인 미용은 특성화고등학교로 배달을 나갔다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기절한다. 구강 기능 저하증을 진단받고, 팔을 다친 재서를 대신하여 인쇄소 일을 돕다가 욕설까지 듣게 된 미용은 "아무래도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지금이라도"(22~23쪽)라며, 과거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했던 교련 선생님을 찾겠다는 결심을 한다. 1987년, 미용은 당시 열일곱 살이었고 교련 수업을 맡은 선생은 지금 미용의 나이였다. 그는 "교련의 원래 목적이 길들여진 신체를 만드는 거"(42쪽)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수업시간에 여학생의 뺨을 내리치기도 하는 사람이었고, 겁을 먹은 미용은 붕대 감기를 연습하는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한다. 그러자 교련 선생은 여럿이 돌아가면서 맡았던 환자 역할을 미용이 홀로 감당하게 만든다. 수업시간 내내 미용은 업혔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또다시 일으켜 세워졌다가 내동댕이쳐진다. 경찰청장의 딸로 추정되는, 선생님들도 눈치를 보는 여학생이 "가여워서 못 보겠으니깐"(45쪽) 그만하라고 선생을 만류하고 나서야 이 가혹한 형벌은 끝이 난다. 미용은 아주 오랜 시간 막 대해도 되는 신체로 길들어왔던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18쪽)는 내용이 담긴 미용의 글을 보았던 재서는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 불안해한다. 독자 또한 재서의 시선으로 미용을 바라보고 미용에 대해 추측하면서, 그가 원한을 품고서 선생님을 찾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종소가 그랬듯,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은 원망감은 불안에 떨며 자기방어에만 힘써왔던 웅크린 존재를 일으켜세워 어딘가로 걸어나가게 만든다. 부정적일지언정 강력한 원한의 감정은 멈춰 있던 내면의 시계를 움직인다. 하지만 조경란의 소설은 언제나 그 시작점에서 훨씬 더 먼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 재서는 미용이 불행했던 자기 삶을 보상받기 위해 선생을 찾았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선사한 부모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찌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리라고 상상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서는 미용을 찾아가지만, 미용은 짐작과 달리 밝은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미용은 자신이 쓴 글을 재서에게 보여주면서 자기가 쓰고 싶었던 게 교련 시간에 당했던 폭력이 아니라 교련 시간 시작 전에 마주한, 창밖의 복사나무에서 "연연한 분홍 꽃잎 몇 장이 후르르 떨어지"(46쪽)던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에 관해 쓰려고 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는 미용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재서는 미용이 선생님을 찾아서 하려던 일이 그러한 잔혹한 시간을 겪고도 이렇게 또렷이 "계속 자신으로 살아가고"(47쪽) 있음을, 그 단단한 생명력이 미용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일임을 이해한다. 조경란은 "평생을 움츠리고 산 아이"가 "자라서 펼치는 미니멀한 복수 서사"를 쓰려고 했으나 미용이 그것을 거부했다고 전한 바 있다.9) 조경란의 소설 속 인물들이 처음엔 원한 때문에 걷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걸음의 끝에 세워두었던 원망의 대상을 지나쳐 더 멀리에 있는, 숱한 폭력과 불의를 견디면서 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나'에게로 꿋꿋하게 나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처음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 사고, 지식 등등"10)을 의미하는 소설의 중심부가 바뀐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각각 쓰기와 읽기를 통해 그 감춰진 중심부이자 진짜 주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흥미로운 유동성과 창조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물의 걸음이 그려내는 궤적은 작가가 설정해두었던 최단거리가 아니라 인물이 경로를 이탈하여 내달린, 그리하여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만들어낸, 생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다. 「한방향 걷기」에서, 은제 이모가 어렵게 가꾸어온 세계에 흙물을 끼얹는 십일층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흔아홉의 미석이 고안하는 방식 역시 동갑인 미용의 반격과 유사하다. 그는 민폐를 끼치는 당사자가 있는 십일층이 아니라 십이층으로 올라가서 몬스테라 화분을 문 앞에 두고 올 계획을 세운다. 그것을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고 물을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십일층 남자가 아랫집의 입장이 되어 은제 이모가 경험하는 불편함과 불쾌를 고스란히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므로 그것은 "악의"(256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원망의 감정을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살려내는 일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다. 미석은 십이층에 선물한 몬스테라가 잘 자라나기를, 강력한 생기를 지니고서 아래층으로 뻗어가기를 바라는 것으로 앙갚음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을 안에서 마냥 걸어 잠그고 있"(247쪽)던 미석이 처음으로 위했던 타자, 은제 이모가 자기 삶을 오롯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대리 복수다. 조경란의 소설에서 중심인물이 지닌 원한은 결국에는 살리고 살아내는 일로 나아간다. 이는 더 멀리 내다보면서 더욱 나은 곳으로 걸어가는 일이자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나아지게 하는 아름다운 대안이 된다. 5. 취약한 사람들의 걷기 연합, 아니 살기 연합 서로를 살리고 살고 싶게끔 만드는 길을 내는 조경란의 인물들은 하잘것없다고 여겨져 사회에서 배제되었음에도 그러한 서로를 하찮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취약함을 오래 들여다본 이들은 그것이 어떤 것을 갖추지 못했거나 어떤 능력을 연마하지 못해서 또는 어떤 덕목이 부족해서 얻게 된 나약함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대의 약함을 나무라지 않고 그 아픔과 외로움을 오롯이 보듬는다. 단, 조경란 소설의 차별점은 그와 같은 돌봄의 공동체가 "개개인의 선함에 호소되는 관계의 합이라기보다 각자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연합"11)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인물과 독자에게 연민이나 이타적인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세계를 탐색하는 일이 곧 '나'와 같은 연약한 '나'들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둔다.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든 자격 미달"(「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72쪽)이라고 느끼던 인물들이 각자의 자기를 찾으러 떠날 때, 그것은 홀로 감내해야 하는 여정이지만 잠깐씩 서로의 동행이 되어준다면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서로 들키고 마주치고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가는 '나'들이 서로의 보폭이 다르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다채로운 속도에 안도하면서, 모르는 걸음걸이를 따라 배우기도 하면서 걸어간다. 이제는 이상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다는 소설12)을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작가처럼, 그의 소설을 함께 걸어내는 독자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굽은 등, 그 볼품없지만 고유한 이면을 껴안아주기 위해 나선 길에 마주치는 숱한 등을 토닥이며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1) 조경란, 「제목의 힘」, 『세계일보』, 2024. 12. 13. 2) 염승숙, 「가족의 '양막'을 찢어내고 홀로서기」,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해설, 357쪽. 3) 조경란, 「날마다 10분씩 볼펜」, 『소설가의 사물』, 마음산책, 2018, 80~81쪽. 4) 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17쪽. 5) 이광호, 「죽음을 견디는 메타포」, 『불란서 안경원』 해설, 문학동네, 2006 (개정판), 342쪽. 6) 이에 대해서는 류진아의 글 「공간 인식과 여성에 대한 폭력-하성란 조경란의 소설을 중심으로」(『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집, 2019)를 참조할 수 있다. 7) 한병철, 『불안사회』,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4, 19쪽. 8) 권희철, 「타임아웃, 조경란, 그들 리뷰」,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60~61쪽. 9) 조경란 수상 소감, 「오늘은 여기까지만」,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52쪽. 10)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2, 149쪽. 11) 김미정, 「리무버블 스티커의 마음」, 『가정 사정』 해설, 304쪽. 12) "예전에는 소설이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이제 소설은 생활(生活)이 되었다." (조경란, 작가의 말, 『가정 사정』,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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