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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가을호(제120호)

김기태의 즐거운 시민들

김건형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2018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평론집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가 있다.

세계의 규칙을 다시 묻는 전환기의 화자들


     김기태의 화자들은 사회문화적 권력에 민감하면서도 동시에 둔감하다. 그들은 규범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파악하고 의문을 품는다는 점에 서 예민하지만, 그 규범과 불화하며 이탈하기보다는 이질감을 품고서도 그 미시 적 중력장 안에서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적응했다는 점에서 무던하기도 하다. 「전조등」은 제목처럼 김기태의 인물들이 선 출발선을 비추고 있다. “더러운 것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의 말을 떠올”(81쪽)리듯 그들은 규범과의 거리 감 각을 통해 자기를 인식한다. 농협 창구원과 공무원인 부모에게 절대 “남들에게 흉을 잡힐 만한 일”(82쪽)을 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어린 시절 부터 “이미 그는 주의해야 할 일들이 적힌 긴 목록을 갖고 있었다”(81쪽). 그렇다 고 소설이 부권적 금기에 저항하면서 뒤틀리는 욕망의 파토스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규범을 당연한 환경으로 간주하며 자랐으면서 도, 그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거리 감각이 출현한다는 역설 이다. 그는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히 공부해 중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고 대 기업에서 무난한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결혼 적령기에 결혼하는 인물이다. 그런 데 소설의 화자로서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자기 삶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수집’ 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주변과 비교하고 동료의 평가를 귀담아들은 덕분에 표준적인 중산계급 가족 모델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 만 그때마다 어떤 생각을 자꾸 밀어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자기다운 게 뭔 지 생각하다 자기답게 사는 게 지겨워졌다.”(90쪽) 자동차 전조등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설 속 파열음처럼, 표준적 규범이 주는 안정감과 자기다운 삶에 대한 궁금증 사이의 충돌이 김기태의 소설에 메아리친다.

     「세상 모든 바다」의 화자도 규범적 남성의 성장 모델과 재일 조선인 남성 청소년인 자신의 현 위치를 면밀하게 비교하고 사회문화적 취향을 조정하면서 성장한다. 「롤링 선더 러브」의 화자는 연애와 결혼의 표준적 모델을 형성하며 여 성 청년의 조바심을 부추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복판으로 뛰어들어가 작은 소동을 벌인다. 이처럼 규범적 삶에 대한 적응-의혹을 오가는 양가적 태도야말 로 김기태 소설 속 초점 화자의 공통점이다. 한국(혹은 동아시아)사회 특유의 계 급적, 이성애-젠더적, 가족주의적 생애 규범이 주조하는 주체의 형상을 정확하 게 탐지하는 그들은 기성 규범이 자신을 포함한 세대적·젠더적 집단의 현실을 더는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렇다고 이를 갱신할 새로운 시대/계급 의식을 정초하지는 못한다. 소설적 정념과 자아도취로 이 규 범을 내파할 예술가형 인물형도 아니기에 그들은 그 중력장에서 완전히 탈주하 지는 못한 채로 다만 어느 정도 서술적 거리를 두고 공전한다. 그래서 소설은 액 자식 구성으로 규범과 그에 대한 의혹 사이의 괴리를 고스란히 담곤 한다. 역사 적 변화를 감지하는 데 특화된 사적유물론적 비평을 새삼스럽게 환기하자면, (지성에 따른) 행동과 (감성이 주조한) 내면의 괴리로부터 시대정신의 잉여/균열 을 드러내는 전환기의 인간형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1)



공통 언어가 없는 시대의 앎의 원리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간극이 생긴 것이란 말인가. 「팍스 아토미 카」는 합리적 개인의 이성으로는 더는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해진 세계를 그 원 인으로 짚고 있다. 이제 인간은 지구를 이차원적 평면인 지각地殼으로 생각하며 안심하고 딛고 서 있을 수 없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기후, 물류, 경제, 정치, 무기, 핵-원자 에너지……의 출렁임이 모든 공간적 경계는 물론 시간까지 넘나드는) 중층적 ‘네트워크’로 이해해야 하는 인류세의 지각知覺 구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소 설은 주변 세계가 언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강박 때문에 주변의 모든 정보를 재확인해야만 일상을 가까스로 살 수 있는 경증 망상장애 환자의 일지처럼 보인다. 그의 불안은 단순히 문단속을 수십 번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매일 밤 “위키피디아의 링크를 타고 다”(284쪽)니면서 종말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들을 수집하는 데 여념이 없다. 지구 종말을 경고하는 과학자들 의 시계는 자정 구십 초 전을 가리키고, 민주주의의 최정상에 있다는 미국에서 는 트럼프가 재선을 앞두고 있고, 핵전쟁을 막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허무 하게도 전쟁이 반복되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연결’하면서 그는 동시대를 이 렇게 정의한다.


상호확증파괴 원리에 따라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그리고 그들의 동맹국 사이 에 전면적인 무력 충돌은 극히 어려워졌다. 물론 수단, 예멘, 아프가니스탄…… 또 는 레반트 지역의 사정은 다르지만, 혹자는 지난 만 년 동안 인간은 모두 전사거 나 전사의 유족으로 살았고, 20세기 전반에는 두 번의 총력전으로 팔천오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 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 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 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292쪽)


     과잉 연결(하이퍼링크)되었기에 도리어 과소하게 연결된 인류는 평화로운 전시戰時라는 역설적 조합을 아무렇지 않게 동시대(성)의 기본값으로 삼는다. 지 구상의 모든 정보를 수집, 저장함으로써 근대적 교양의 표준 규범을 구축했던 ‘백과전서파’를 본받는 화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지식은 그저 다른 링크 로 미끄러져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원인을 지목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275쪽). 아니 그전에, 가능은 한가.


서로 못 본 체하면서도 와글거리는 것들 사이에 비어 있는 곳, 공중에 이어진 거미 줄, 가로등 불빛에 반짝인 한 토막의 실선을 봤다. 걷다보면 살갗에 감겼다. 눈을 크게 뜨면 거미줄의 무늬가 보일 듯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점과 점, 선과 선의 패턴을 포착할 수 없었다. 포착할 수 없다면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휘저으면, 아무것도 없었다.(290쪽)


     앎의 매체와 앎의 형식을 모두 붙잡을 수 없는 세계에서 (기존처럼) “정 상적인 사고라는 말은 무섭다”(269쪽). 자신이 어떤 거대한 연결-네트워크를 보 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도 자신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외경심은 김기태의 화자가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감정이다. 이는 세계와 자신 사이의 간극과 괴리를 종합하고 지양함으로써 지적으로, 윤 리적으로 도약하던 근대적 앎의 체계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발견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는 김기태의 화자들은 비약적 상상력이나 멋부 린 허무주의로 향하지 않고 세계와 자기 사이를 매개할 언어를 성실히 찾는다. 다만 세계를 붙잡아 고정하는 근대적 합리성으로는 언어를 확보할 수 없기에,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한 연결에 집착한다. 「팍스 아토미카」에 서 그것은 ‘주문’이다. “내 뇌에 나의 의지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문을 읊 는 일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주문은 미신도 비유도 아니다. 과학이다.”(280쪽) 눈 에 보이는 사물마다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중얼거리는 주문은 일견 병리 적 증상처럼 보이지만, 자신만의 수행으로 개별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언어 형식 이자 존재 형식이기도 하다.


내가 연구한바, 결정적 주문은 최소한 다음 조건을 요구한다. 첫째, 내가 만든 나만의 주문이어야 한다. 둘째, 나만의 주문이지만 나에 관한 것만은 아니며, 나보다 더 크고 넓고 깊고 오 래된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셋째, 그것은 하나의 문장 또는 충분히 외울 수 있을 만한 개수의 문장들로 구성 되어야 한다. 이런 주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의심할 필요 도 없이 자유를 참칭하는 소음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289~290쪽)


     다시 말해, 세계의 진실을 담고 있고 세계와 ‘나’를 연결할 수 있으면서도 그 연결됨을 개인이 실감할 수 있는 규모의 언어를 통해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다. ‘주문’을 ‘연애’ 혹은 ‘관계’, ‘교양’이나 ‘취미(덕질)’로 바꾼다면, 이 조건은 김기태의 다른 화자들도 꾸준히 추구하는 목표다. 세계와 자신을 연결할 시대 정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선험적 자신감을 잃어버린 복잡계 네트워크 시대의 인물들은 자기 형성을 위한 언어를 스스로 만들고 탐색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팍스 아토미카」가 ‘앎에 대한 앎’의 근대적 형식이 무너져버린 시대의 사 변적 인식론을 다룬다면, 「보편 교양」은 앎의 실천윤리를 재생산하는 데 실패하 는 주체를 발견한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 ‘곽’은 획일적·정량적 줄 세우기에 몰 두하는 공교육에 염증이 난 차에, 학생의 자기 주도성을 강조하는 교육정책의 변화에 힘입어 인문학 고전 독서 수업을 개설한다.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 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속 “늙 은 교수”(148쪽) 같은 지식 상인을 경계하는 곽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교육 을 추구한다. 곽의 교육목표는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 한 인성을 형성하며, 학문이나 직업 활동에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갖”(152쪽) 춘 학생의 양성이다.

     여기서 전문적 학문·직업 교육 과정을 통해 (지배계급에 복무하라는 원래 목표와 달리) 보편적 인간을 향한 진보적 가치관을 함양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 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같은 지식인 역할론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전위적 인텔리겐치아의 역할론을 화이트칼라 직종이 확대되고 현대적 대학 교 육 제도가 확충된 후기산업사회에 재적용한 사르트르식의 논의는 한국 지식인 운동에도 주요한 모델이 된 바 있다. 가령, 평론가 김현은 이 ‘전문지식의 보편성’ 이라는 항에 ‘무용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문학’을 대입하여 한국문학의 자의식 을 정립했으며, 2) 평론가 백낙청은 민족·민중이 성글게 선취한 ‘민족적 시민의식’ 을 독려하는 보편 교양을 작가·지식인이 가르쳐 “시민다운 시민” 3)을 만들자는 문학론을 세웠다. 지배계급에 편입·복무하기 위한 교육제도를 통과하면서 획득 한 지식(문학)은 중간계급으로서 지식인(특수)의 자기모순을 발견하게 하고, 그 모순이 곧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과 같다는 것을 깨달으며 주체화된 지식인 독자 가 (계급을 초월한) 시민 독자를 이끌어 시민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인의 재생산 모델에 따라 특수한 위치와 보편적 앎 사 이의 모순을 넘는 변증법적 자기 지양의 계기를 마련해주려던 곽의 노력은 싱 겁게 끝난다. 소설의 위기는 수업을 열심히 듣던 모범생 ‘은재’의 아버지에게 『자 본론』이 교재에 포함되었다는 민원을 받는 장면이다. “‘사상의 자유’를 위협하 는 민원”(163쪽)에 곽은 도리어 “낯설고 활기찬 감정”(162쪽)을 느낀다. 자신의 수 업이 규범적 체제에 균열을 내리라는 기대가 은밀히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곽 은 계급적 이익을 초월한 보편적 지식에 도달하도록 돕는 교육자의 본분에 따 라 학부모를 설득하고 학교 당국에 저항할 마음의 준비를 마치지만, 이는 해프 닝으로 끝난다. 은재의 입시 컨설턴트가 아버지에게 마르크스도 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하자 곧바로 민원을 철회하고 사과까지 한데다, 과연 그 말대로 은재가 서울대 입시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애들 다 『공산당 선언』 읽히고, 머리에 빨간 띠도 매줘야 되는 거 아냐? 하하하.”(173쪽) 3학년 부장 교사의 농담 섞인 격려 를 들으며 곽은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176쪽) 을 맛본다. 입시에 성공하고 교육에 실패하는 역설적 서사 구조는 급진적 사회 비평마저 계급 세습을 위한 문화 자본으로 흡수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종합 적, 교양주의적 지성이 처한 종국적 한계를 부조한다.4) 그러니 곽은 인문학 서적 이 가득한 책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 었다”(같은 쪽). 이 결말은 세계와 괴리된 자기(특수)를 발견하고 이를 변증법적으 로 지양하는 지성적 훈련이 곧 시민 연대(보편)로 연결된다는 한국 (인)문학의 주체 재생산 양식이 무너졌다는 발견이기도 하다.

     대신 김기태 소설은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는 개인(성)을 탐색하 며, 개별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서로 시민적 정동을 나눌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이것이 김기림이나 김수영이 그랬듯 변증법적 종합력을 상실한 자신을 반성(하 면서 실은 사랑)하는 ‘지식인=소시민 문학’의 계보가 아님은 물론이다. 김기태 소 설은 유독 (사적 친소 관계로 한정되는 우정이나 성적 친밀성을 전제하는 사랑이 아 니라) 만난 지 오래지 않은 옆 사람과 연결되는 순간에 도래하는 우애라는 정동 에 주목한다. “오와 열 따위는 없이 털썩 앉거나 서성거리거나 제각각이지만 아 주 흩어지지는 않는 사람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위태로운 우애를 담아 말한 다./“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확실히 그렇네요.””(「팍스 아토미카」, 299쪽) 자기의 위치를 어떻게든 파악하려는 간절한 ‘주문’을 듣고 그 고유한 언어의 역 능을 확인해주는 옆 사람의 응답으로부터, 김기태의 인물들은 우애를 발견한다.



덕질과 취미의 파동 에너지


     근작 「일렉트릭 픽션」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 에 “사람은 전기로 산다”(115쪽)라고 대답하며 시작한다. 다소 엉뚱한 선문답 같 은 이 서두는 소설의 기획을 압축하고 있다. ‘전기 소설’이라는 제목처럼 화자는 ‘전기’라는 나름의 주문/언어를 통해 물질적인 복잡계 네트워크와 인간의 존재 형식을 통합하여 세계와 정신을 다시 연결하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한다. 소설에서 전기는 전자기력이라는 우주의 근본적 힘인 동시에 “콘센트와 플러그 로 결박된 현대적 관성”(같은 쪽)이라는 역사적·사회적 물질성을 의미하며, 감 각기관과 근육을 거쳐 신경세포가 주고받는 인간 신체의 전기신호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물리적-사회적 세계와 물리적(-사회적) 인간을 연결하는 공식에서 빈칸으로 남은 것은 ‘사회적 인간’이라는 항이다. 당연히 그 공백을 채 우는 것이 화자의 과업이다.


한국에는 스무 개가 넘는 에너지 공기업이 있다. 대표적이라 할 만한 한국전력공 사의 총자산은 235조에 달하며, 약 2만 4000명가량이 본사를 포함하여 250군데 가 넘는 지역 본부 및 사업소 등지에서 근무한다. (……) 석탄에서 출발했든 원자 에서 출발했든, 눈앞의 벽에 박힌 220볼트 콘센트에 전기가 도달하기까지 얼마 나 많은 인력과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따지자면 그도 길고 복잡한 과정의 일부였지만 전기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한번쯤 자신이 건전지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117쪽)


     노동과정과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라는 자의식이 어렴풋하 게 보이지만 노동자의 각성과 결집에 대한 기대가 싹트진 않는다. 사회적 연결 에 대한 나열적 서술은 오히려 그 복잡한 네트워크 전체를 가늠하기 어렵고 따 라서 알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동시대 청년의 단절된 세계 인식을 강조한다.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출퇴근하며 성실하게 일하지만, 사무실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계약직이다. 그 모욕에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과 분리된 집 안에서만 자유를 느끼기 때문이다. “진짜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문안에 있다고 느”낄 뿐, “문밖의 일은 문안의 삶을 위하여 수행하는, 견디는 무엇이었다”(116쪽). 그렇게 문안에서 자신을 성실하게 돌보던 어느 날 “전기신호가 그의 두 팔을 들 어올렸”(119쪽)고, 그는 그 내적 신호를 따라 전기기타를 배우기로 한다.

     그런데 혼자 즐겁게 연습을 하던 중 소음에 항의하는 메모가 붙고, 그는 문밖의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 않은 관성에 따라 기타를 처분하기 위해 ‘재니스 음악 학원’을 방문한다. 그러나 정작 기타는 팔지 못하고, 엉겁결에 재니스가 시 키는 대로 코드를 배운다. 어느새 “옥수수나 고구마 따위를 나눠 먹고 있던 나 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기묘한 합주를 연습하게 된 그는 “손가락들이 자유로워 짐을 느”(127쪽)끼고 전기가 사람 사이에도 흐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엘 리베이터 벽에 자신은 전기기타를 좋아하며, 아홉시 이후에는 연주하지 않겠지 만 그래도 불편하면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붙인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 을 다하는 이곳에서 자신이 505호, ‘여기’에 있다고 고백한 사람”(128쪽)으로 변 한 것이다. 그 쪽지는 쪽지를 읽은 501호 주민으로 하여금 옆집의 “아기가 울고 싶을 때 우렁차게 울기를 바”(같은 쪽)라게 한다. “내 안에도 전기가 있”고 “그 녀 석의 안에도 전기가 있”음을 깨달으며, 그는 “알지 못할 전기장치로 작동하는 엘 리베이터” 안에서 “가벼운 상승감”(같은 쪽)을 느낀다. 그리고 이 상승감은 다시 연결을 인식 가능한 범주로 돌려놓아 이웃을 향한 인사와 감사, 호의를 표하는 (역시 일종의 ‘주문’일) 문장을 큰 소리로 연습하게 한다. “Hei kaikki, 모두들 안 녕하세요. Kiitos, 감사합니다. pidän sinusta, 저는 당신이 좋아요.”(129쪽)

     「일렉트릭 픽션」은 복잡계 네트워크 속에서 고립된 동시대 청년들의 사 회경제적 조건을 충분히 검토하면서도, 타인과 연결되는 감각을 어떻게 다시 회 복할 수 있을지 탐색한다. ‘오타쿠’와 ‘빠순이’에 대한 기존 담론이나 최근 화제 인 ‘MZ 오피스’ 등의 재현이 청년 세대는 공적 노동의 관행과 공동체에 대한 책 임에 무관심하고 사적 취미생활에만 몰두하며 고립되어간다는 비난을 (정의로 운 풍자인 양) 휘두르는 것을 상기하면, 사적 취미판단을 연결할 수 있는 계기와 그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우애의 정동에 주목하는 김기태 소설은 그와는 정반 대 방향에서 접근하는 셈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조건 없는 원천적 판단인 미 학적 감수성이 시민적 관계 맺음의 기초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 애의 감각을 회복하는 사건을 상상하는 것은 김기태 소설이 일찍부터 매진해온 작업이다.

     이 계열에서 「세상 모든 바다」는 지금 대중문화의 미감이 형성중인 거시 적, 미시적 관계성을 두루 관찰한다. 다양한 국적의 케이팝 여성 아이돌 그룹 ‘세상 모든 바다’는 전 지구적 기후 위기와 인종·젠더·기아 등의 사회문제, 민주 주의 운동에 목소리를 내고, 청년 팬덤 역시 이에 호응하며 국가 단위의 기성 정치를 넘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설정은 동시대 케이팝 아티스트와 팬덤이 수행하는 지구 단위의 문화정치(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5)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거시적 정동 네트워 크가 일군 정치적 성과보다는 그 근간이 되는 미시적 네트워크다. 서로 다른 타 인이 연결되면서 정동 네트워크가 발생하는 최초의 계기는 무엇일까.


백영록이라는 이름의 16세 소년이 사망한 사정에 대해, 군청 앞에서 행인에게 말 을 거는 아주머니의 사정에 대해, 그 사정에서 나의 몫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해내 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 가 세차게 튀어올랐다. 얼굴에 와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 낌뿐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36쪽)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 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 그것 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37쪽)


     ‘세상 모든 바다’와 팬덤의 원전 건설 반대 캠페인을 비롯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22쪽)에 대해 무지했던 영록을 화자는 ‘얼빠’거 나 “음습한 움짤이나 모으는 녀석”(17쪽)으로 치부했다. 그런데도 영록은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 본 낯선 외국인에게 서슴없이 말 을 걸고 선물을 건네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화자에겐 그의 즐거움이야말로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지금의 복잡한 네트워크에서는 바다 건너의 보편적 가치 를 떠올리는 것보다 당장 닿는 물방울의 감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낯설고 두렵다. 그러니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정동 정치는 우선 용감하게 눈앞의 타인을 온전히 보는 감성적 즐거움, ‘근시의 사랑’일 것이다.6)

     기실 이런 근시의 사랑을 갑작스레 마주하는 당혹감은 김기태 소설이 자 주 반복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보편 교양」처럼) 보편적인 가치에 공감한다는 자 신감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람을 마주하고는 뒷걸음질칠 수밖 에 없고, 그래서 (「팍스 아토미카」처럼) 기존의 언어로는 거대한 연결-네트워크를 충분히 파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어 무서워진다. 이런 서사 구조는 예상과 달 리 단절된 자신을 발견하고, 반대로 예상과 달리 연결된 자신을 발견하는 힘을 부조한다. 개별적인 인간-입자들이 연결되어 거대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 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떻게 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야 하) 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물방울의 집합에 불과한 바다에 어떻게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것 일까. 김기태 소설은 유독 전기, 음파, 파도, 빛 혹은 중고 거래 앱과 SNS 같은 매개를 통해 전달되는 파동 에너지에 주목한다. 하나의 입자가 곁에 있는 다른 입자로부터 운동에너지를 전달받고 이를 다시 전달하면서 파동이 생겨난다. 물 론 인간-입자를 떨리게 하는 운동에너지는 감정일 것이다. 이웃에게 폐를 끼치 거나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주체로 살라는 규범의 명령은 모두를 개별 적인 입자로 남게 한다. 하지만 김기태 소설은 인물로 하여금 그 강박과 조바심 을 버리고 자신에게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던 감정 에너지의 파동을 목격하게 한다.



용기로 연결되는 즐거움의 공동체


     그동안 입자들을 멈춰 세우던 관성을 이겨내고 진동하기 위해서는 그 단 차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파동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보내겠다는 결심, 용 기가 그 에너지다. 대개 김기태의 남성 인물이 거대한 파동에 대한 외경심과 관 성을 벗어나는 두려움을 가시화하는 역할이라면, 여성 인물은 기꺼이 연결될 용기를 품고 먼저 그 현장으로 뛰어든다. 「롤링 선더 러브」의 ‘맹희’도 일렉트릭 기타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연애 예능과 밈을 모두 챙겨보면서 동시대 대중문 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이를 자기만의 주문으로 바꾸는 인물이다. 서둘러 결혼 시장에 뛰어들기를 종용하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연애가 정말 “투자와 수익의 문제일까”(43쪽) 묻는 맹희에게는, 친구 ‘리아’가 조언한 “연애는 옵션이거나 그조차도 못 되므로 질척거리지 말고 단독자로서 산뜻한 연대의 가 능성을 모색”(47쪽)하는 방향도 마뜩잖다. 자신을 거래하고 싶지도 않지만, 누군 가와 친밀하게 연결되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일 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51쪽) 자문자답을 반복하던 맹희는 그 해답을 직접 알 아보고자 결심한다. 동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랑의 재현물인 연애 예능 ‘솔로 농장’에 용감하게 참가해 그 한복판에서 “시원하게 굴러보”(52쪽)려는 것이다.

     낭만적 성애와 경제적 부조라는 상호 모순적 규범으로 구성된 이성 연애 의 형식, 이성혼 제도 자체를 전시하는 연애 예능은 기성의 이성애적 젠더 규범 과 관계 모델을 강화하지만, 그 담론을 응시의 대상으로 메타화하여 일종의 소 격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 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 떤 세상인지 의아했다.(70쪽)


     ‘솔로농장’에서 맹희가 실제로 만난 이들은 서로를 경쟁과 쟁취의 대상으 로 한정하고 감정을 투자 수단으로 만드는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눈앞 의 관계성을 일구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악플과 조롱을 받 는 서로를 위로해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성실한 사람들이 보여준 친밀성에 비하 면, 규범에 갇힌 채 평가만 일삼는 사람들은 “사랑할 용기도 없는 놈들!”(73쪽) 에 불과하다. 맹희는 이성애적 규범이 여성 청년에게 강요하는 수치심과 조바심 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마주한 감정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알고자 한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 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76쪽)7)

     김기태는 동시대 문화정치의 가장 세속적인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좌절 도 분노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맥락의 친밀성에 주목한다. 「로나, 우리의 별」의 여성 아이돌 ‘로나’는 자신의 음악과 팬덤이 퍼뜨리는 문화정치적 힘을 확인하 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 제도 정치를 변혁하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렇다고 로 나라는 인물의 성공담(성장)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부제 같은 첫 문장 “우리는 가능하다”(181쪽)가 암시하듯, 로나를 포함한 팬덤, 시민을 포괄하여 ‘우리’라 는 복수 시점을 취하는 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로나의 동지가 되려 하는 사 람들”(205쪽)(이 사용하는 온라인 아이디)로 서술 시점을 계속해서 옮겨가는 소설 은 그 서술 시점적-인물 관계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취향이 정치로 전이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사회적 참여 실험을 벌인다.

     그 출발선이 현재까지도 파급력이 강한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점은 중요한 설정이다. “선출직 스타”(183쪽)인 셈인 로나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로나에 대한 친근감뿐만 아니라 로나의 행보를 비판하거나 동참할 의무를 지니 게 되기 때문이다. 로나는 성실하게 음악을 발표하는 한편, 재생지를 활용해 앨 범을 만들고 기후 재난이 생길 때마다 억대의 기부도 한다. 팬들 역시 친환경 앨 범을 구매하거나 기부에 동참하며 “로나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한다는 의사표 시”(188쪽)를 한다. 엔터테인먼트 자본이 투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상품) 를 도입하자 뜻하지 않게 어떤 관계성이 생성되고, 이것이 욕망의 방향을 전환 해버리는 것이다. “자본은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잉태하는지도 모르고 질주한 다.”(185쪽) 물신과 대상화의 극단에 있는 아이돌로 하여금 그 욕망의 회로를 반 전하게 하면서, 소설은 역사 속 혁명가들 역시 삶의 욕망 회로를 바꾸는 라이프 스타일 아이콘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진부한 악과 싸우는 일보다는 감춰진 위선을 폭로하는 일이 자 극적”(189쪽)이기 때문에, 로나의 진정성은 계속 의심받는다. 로나가 광고한 “상 품의 생산과정과 음악적 동료들의 언행과 신곡 가사의 함의를 따”(190쪽)지는 팬덤의 검증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로나는 IT 기업을 운영하는 ‘데릭’과 함께 제3세계의 사회 기반시설과 빈민을 위한 사회적 금융 사업을 시작하지만, 이는 그나마 있던 기업의 사회 공헌 책임을 (간접적 금융 투자 이윤을 얻는) 새로운 투 자 영역으로 바꾸는 것에 가깝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방해하지 않아 지속 가능하다는 대안 자본주의 담론은 기실 복잡계 네트워크를 거쳐 자본을 세탁 하는 “절도-기부 모델”(193쪽)일 수 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소비, 가치 소비 같 은 자본주의적 적선을 최대한의 문화정치로 간주하는 동시대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로나 역시 변하지 않는 세계에 좌절해, 늘 연주하던 기타 ‘붉은 도브’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고 잠적한다. 이때 작가의 세계에 대한 전망, 다시 말해 소설적 우연성이 개입한다. 로나의 팬덤들이 중고 마켓에서 붉은 도브를 발견하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다시 로나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공동의 선물 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넘어서는 다른 지평을 마주하는 이 일화는 대중이 로 나가 말하는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수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 자신이 메 시지를 발신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변할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로나는 “창 당 선언”(202쪽)으로 그에 화답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적 형식/제도)를 상품으로 흡수한 자본을 재전유하는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로나와 팬덤은 아예 더 멀리 나아간다. 선한 자본 을 선별해 투표하는 소비 주권자의 대의제적 전유에 한계가 있다면, 시급한 것 은 욕망의 형식이 아닌 내용 자체를 전환하는 직접민주주의다. 로나는 두루뭉 술한 선의와 인류애에 기대는 문화적 전통에 대한 파업을 선언하고, 그의 팬덤 과 함께 정당을 만들어 직접 발화하고자 한다. 그들은 「보편 교양」의 화자가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 다. 하지만 알고 싶다.”(205쪽) ‘나’들이 원하는 하루를 지금 요구하는 단상壇上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원래적인 정치일 수 있다. 문화/경제/정치라는 각각의 영역을 분리하면서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 의하지 않는다”(204쪽). 노조의 ‘정치 파업’이나 예술인의 정치적 발언은 ‘불순’ 하다는 통념을 넘어, ‘우리’라는 급진적인 연결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노동 분업을 물신화함으로써 정치를 여타의 영역과 분리하고 계급을 고착하는 대의제도(정치 전문가의 선의에 호소하는 온정주의)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우리의 별, 로나가 예고한 대로” “붉은 도브의 연주에 맞춰” 다 함께 부를 “그 노 래의 제목은 ‘우리는 가능하다’이다”(205쪽). 급진 좌파 정당의 여러 코드를 연상 시키는 소설의 결말에 도착하면, ‘우리’의 가능성은 취향의 공동체를 일상적 정 치 공동체로 세속화할 용기를 의미하게 된다. ‘나’들이 모인 네트워크 속에서 정 치 미학적 공통 감각이 창발하는 동시대적 조건과, 이를 시민적 우애의 단초로 전환하는 감성적 조건을 보는 것이다.

     김기태는 자본(이 제공하는 대중적 즐거움의 경험)의 축적이 양질 전화를 일으키는 순간을 날카롭게 전유해낸다. 인신을 가장 세속적으로 대상화(아이돌 물신화와 관계의 예능화)하는 매체로부터, 자기를 파괴할 기반을 스스로 생산하 는 자본주의적 전회를 예감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태의 소설은 사적유 물론을 다시 소설의 무대로 불러들이고 있다.



평균의 감정과 밈의 즐거운 분노


     그렇게 사적유물론을 다시 불러들인 소설이라면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 내셔널」을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은 경제적 토대로부터 문화양식이 생성된다는 (물론 도식적인 통념이지만) 사적유물론의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문화적 언어야 말로 경제적 토대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방법임을 서사화한다. “두 사람의 역사 는 길다”(111쪽)라는 첫 문장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수미 상관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두 사람’들이 만들어온 역사를 계보적으로 살피는 ‘코드’가 된다. 소설의 서두는 ‘두 사람’들 을 ‘기호화’하여 (형식적으로) 유사한 사건을 나열하면서 역사적 인과에 대한 엄 밀한 분석 대신 ‘두 사람’의 관계성과 시민적 결속의 계보들을 환유적 유사성으 로 연결한다. 그럼으로써 혁명과 테러는 역사 속에 고정된 신성한 사건의 자리 에서 내려오고, 전쟁과 디아스포라는 위대한 영웅이나 선량한 희생자의 에피소 드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역사의 세속화는 과거를 기준으로 그 인과를 반추하 며 현재를 반성하는 지성적 기술이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의 유사성 을 찾아내는 즐거움에 기반한 밈meme의 화법에 가깝다.

     진주와 니콜라이 두 사람은 교무실에 따로 불려가 “내야 할 어떤 돈을 내 지 않았다는 안내문”을 받는 아이들이니 “둘이 친하게 지내”(114쪽)라는 말을 들 으며 처음 만난다. 이 ‘조언’은 가난을 극복하고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서로 도와가며 더 노력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계급적 수치심을 내면화하도록 유도 하는 다정한 교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작문 시간에 두 사 람은 진로나 꿈 같은 단어가 포함된 상투적인 에세이를 제출”하면서 “……니까 열심히 노력해야겠다”(116쪽)는 똑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니콜라이는 한국 에 정착하기 위해 열심히 기술을 배우며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진주는 공무원 시험을 위해 노력하며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서 “자신도 그럭저럭 평범한 이십대로 살고 있는 듯”(128쪽)하다고 아주 잠깐 느 끼기도 하지만, 평균적인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니콜라이가 한국에 계속 살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이 남아 있다. “전년 도 한국인 평균 이상을 벌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데, “그건 연봉 삼천팔 백만원 정도”(125쪽)다. 두 사람은 아무리 일해도 한국인 평균이라는 그 금액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134쪽)은 자괴감까지 든다. “남들 다 자리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같은 쪽) 잘못이라고 질책하는 것이 너 무 당연한 사회에서 평균이 되지 못한 두 사람은 묻는다. 결석 한 번 안 했고 법 을 어긴 적도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같은 쪽) 평균에 비추어 인 생을 평가하고 산출된 값을 부풀려 전시하거나 평균에 미달하는 자기를 혐오 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형태처럼 보이는 시대이기에, 청년들은 서로를 견주며 질투와 수치심을 느낀다. 평균 이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장을 멈추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열망과 패배하면 홀로 낙오되어 고립된다는 수치심. 이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한국사회는 (최소한) 경제적 공공재에 가까운 통신망에 접속 할 권리는 남겨둔 셈이다. 역설적으로 그 덕에 통신망은 (아직은) 정치적 공공재 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를 평균의 감정으로 대하는 공간이면서도 드립과 짤, 유 머와 밈이 난입하여 평균의 연결을 방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퇴근길에 지쳐 커뮤니티 게시판을 스크롤하는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신의 삶을 다른 이십대와 비교하면서 주눅들다가도 댓글에 달린 밈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는 여전히 현장실습생과 제빵사, 택배 기사와 대학 청소 노동자 등에 관한 게시글에 나타났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건 아니지만 아무도 알 바 아닌 일을 하다 무시당하고 위협받고 쫓겨나고 심지어 죽은 이들을 조롱하 는 댓글 속에서도 엠마는 늘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외쳤다. 때로는 한국 치킨 으로 신세계를 맛본 영국인이나 데드리프트가 3대 운동 중 최고인 이유, 다이어 트할 때 기립성저혈압 조심해 같은 제목의 게시물에도 끼어들었다. 금발의 양 갈 래 소녀는 인터넷 세계를 떠돌며 가끔 길을 잃기도 하는 꼬마 유령처럼 보였다. 또 는 태엽이 풀릴 때까지 아장아장 걸으며 오직 한 문장만 되풀이하는 인형.
“기립하시오 당신도!”
어쨌든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들은 계속 있었다.(136~137쪽)


     엠마 리스의 일화는 브레히트의 시에서 유래하여 한국에서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기 전에 선창하는 구호가 되었고 다시 웹상의 밈으로 정착했다. 물 론 이 밈이 노동자의 전 세계적 연대를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게시 글 과 대화의 맥락을 단절하거나 변환하면서 현재 ‘나’를 위한 맥락으로 전환하는 화용론적 수행을 반복하기 쉽게 코드화한 언어를 제공해준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정직원이 아니라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유니폼이나 형편없는 구내식당 메 뉴, 덥고 춥고 좁은 휴게실 따위에 대해 소식을 전하며 “이거는 기립이네, 기립해 야겠네” 같은 농담을 주고받”(138쪽)는다. 노력하지 못한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 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이를 서로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서로를 대신해 분노해주는 밈을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돌보 고 있다. 여러 직업의 세계를 견학하는 유아교육용 캐릭터이면서도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펭수, 슬픈 표정이지만 어떤 상황에도 체념하지 않고 불만족 을 표시하는 개구리 페페 같은 밈들도 마찬가지로 청년 세대의 분노를 유희 속 에 담아내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축적하게 만드는 미래주 의적 삶의 규범, 성장을 청년기의 당연하고 유일한 목표로 자연화하는 ‘잔인한 낙관주의’8)를 비웃고 풍자하는 언어적 틈을 만들어낸다. 그 틈에서 마구 돋아 나는 밈은 새로운 즐거움을 통해 생존경쟁이 만들어내는 우울과 자기혐오를 멈 춰 세우는 ’다정한 비관주의’9)를 싹틔운다. 이 웃음은 긴말을 하기 어려울 만큼 지쳐버린 출퇴근길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당신도 기립하라고 고 집스럽게 외친다. 성장의 명령에 복종하거나, 좌절하고 수치를 느끼라는 회유에 따를 생각이 없다고 현재를 정지하는 함축적이고 단호한 주문이다.10)

     밈을 인용하며 대화하는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신과 이웃 사이의 친밀감 에도 다른 별명을 붙인다.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그저 마음에 따라 동 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자신들을 연인이나 부부 혹은 가족이나 친구 그 무엇이 라고 정의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142쪽)11)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같은 쪽)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산업재해를 당해 잠적한 친구와 인플루언서를 꿈꾸다 사라진 친구에 게도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한 마음을 전하고,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 버림”(143쪽)이라는 짧은 문장이 암시하듯, 집회중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가족 과도 관계를 맺는다. 정주민·내국인/이성애자/유자녀 가족을 기본 주체로 상정 하는 이웃간의 관계에도, 대단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던 계급적 연대에도 그렇 게 친밀하고 즐거운 새 이름이 붙는다. 가난한 집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내라는 교사의 조언이 끝내 이상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처럼 과거의 혁명사가 엉뚱한 밈 의 형태로, 기필코 고집스럽게 귀환한다. 친밀성의 이름을 다시 쓰면서. 국가-시 민의 관계가 아니라 시민-시민의 관계로 관점을 전환하면서.

     그렇게 김기태 소설은 고립의 위기에 처한 청년들을 경제/구조의 증상으 로 환원하지 않고, 도태된 시민(경제 동물, N포 세대)으로의 퇴화와 고립을 강조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규범적 정동이 되어버린 우울한 자기 비하 속에서도 청년 들이 찾아내는 즐거움에 주목한다. 이 즐거움은 ‘살 만한 삶’12)을 상상하게 한 다. 이는 한국문학사에서 익숙한, 선험적 집단(계급,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금욕하 고 희생하는 지식인의 지적 종합력(양심, 의식)을 재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시민 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정동적 조건을 탐문한다. 규범적 생애 서사에 근접하도 록 자기를 경영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좋은 삶, 살 만한 삶을 분리하고 재정의한 다. 이로써 각자가 즐거운 느낌의 연결체로, 다시 새로운 시민적 정동-관계로 향 하게 한다. 이것은 본래 정치 미학이 하던 일이기도 하다. 혁명이 통치 집단의 변 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재정의하는 것이라면, 지금 눈앞의 관계 에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 즐거 움의 연결이야말로 혁명의 선결 조건이다. 김기태는 이 조건을 정직하게 모으고 있다.

  • 1) 임화는 전환기 문학의 인식/감성 구조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문학이란 감성적 형식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적 활동의 영역”으로 “감성적 세계 가운데 지성은 자기를 용해(溶解)함으로써만 형성되는 독자(獨自)의 세계다.”(「의도와 작품의 낙차(落差)와 비평—특히 비평의 기능을 중 심으로 한 감상」(1938), 『문학의 논리—임화문학예술전집 3』, 소명출판, 2009, 561쪽) 대상/세계와 직접 대면한 감성이 먼저 영향을 받은 다 음에야 지성은 영향을 받으므로 “지성 가운데 의미된 내용은 이미 과거의 것으로 소멸된 감성계가—직관은 항상 순간적이고 그것이 지속적 의 미를 취득하는 곳이 지성이다—가져온 낡은 세계이고, 감성계는 늘 지성 가운데 정착한 낡은 세계와는 판이한 생성이 신세계로 형성되”므로 “지 성과 감성의 갈등이 의미하는 신과 구는 실상 낡은 세계와 새 세계의 대립이다”(같은 글, 564쪽).
  • 2)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과지성』 1975년 겨울호.
  • 3) 백낙청, 「시민문학론」, 『창작과비평』 1969년 여름호, 477쪽.
  • 4) 김건형, 「촛불 이후의 정치라는 단상(斷想·單相·壇上)」, 『문학동네』 2024년 봄호 참조. 박서양과 이희우는 곽이 이상(보편)과 현실(특수) 을 종합하는 메타적 반성력을 발현했으나 동시대 교육 현장의 한계 때문에 실패했다고 읽으며, 그럼에도 고뇌하는 교육자이자 평범한 인간으로 서 그가 지닌 최소한의 진정성(직업윤리)을 애도한다(박서양, 「이토록 달콤한 멜랑콜리」,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이희우, 「평범한 자는 들어오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해설). 반대로 홍성희는 결말 이후에도 곽이 변하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했 으리라 전망하면서 ‘균열’을 미학화하는 데서 그치는 문학은 때로 안전한 공간에 머무르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홍성희, 「안전의 방향 (1)」, 문장웹진 2023년 10월호). 한편 임세화는 민주화 세대도 아니고 그 이후의 새로운 담론도 없는 “끼인 세대”로 곽을 읽는다. 동시대의 교양을 탐 구하지 않고 이전 세대의 진정성을 시대착오적으로 추구했기에 “자신의 비어 있음과 대면”했다는 것이다. 주도권 한 번 지니지 못한 채 늙은 세대 라는 독해는 문학사적으로 흥미롭지만, 김기태의 다른 소설과 연결해서 읽을 때 드러나는 혁명/주체 자체의 갱신 가능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 다(임세화,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문장웹진 2024년 7월호).
  • 5) 미얀마, 태국, 홍콩 등 아시아의 권위주의 정부에 저항하는 청년들이 케이팝과 팬덤 문화를 민주화 운동의 코드로 활용하고 연대의 매개로 삼 았던 사례를 상기해볼 수 있다. 가령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오랜 애창곡이자 촛불집회(의 효시였던 이화여대의 2016년 집회부터)에서도 불렸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2020년 태국 민주화 집회 현장에서도 합창되었다. 이는 홍콩, 대만의 반권위주의 ‘밀크티 동맹’과 결합하며 케 이팝 팬덤의 연대를 상징했다. 2019년 산티아고 반정부 집회 배후에 케이팝 팬덤이 있다는 칠레 정부 보고서는 당시 한심한 책임 회피로 치부되 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핵심을 찌른 셈이다.
  • 6) 김건형, 「가족도 미래도 없이 친밀하게」, 『문학동네』 2022년 겨울호, 136쪽.
  • 7) 김건형, 「연애 예능과 프랜차이즈 자아의 시대를 굴러가는 ‘나’의 이야기」, 『2024 올해의 문제소설』, 푸른사상, 2024 참조.
  • 8) 욕망하는 대상이 오히려 더 나은 삶의 걸림돌이 된다는 ‘잔인한 낙관주의’는 나중에 도래할 성공적 미래를 애착의 대상으로 만들어 잔혹한 현 재에 적응하고 인내하게 한다. 이는 당면한 모든 문제를 개인의 긍정적 태도와 자기 계발의 노력이라는 ‘합리적 선택’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며 개 인화하는 감정 통치술이다. 로런 벌랜트, 『잔인한 낙관』, 박미선·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 9) 마크 피셔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광범위한 스트레스의 개인화를 수용”하게 해 불안을 개인이 ‘치료’하도록 하는 의료적 시스템·담 론을 자연화한다. 그런데 “특히 그토록 많은 청년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게 되었는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정신건강 질환’이 유 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 체계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 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포스트포드주의는 청년을 취업과 실업을 번갈아 사는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 상태로 몰아 양극성 장애라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정신질환을 유포하며, 가족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약물을 제외하면) 대안적 미래로 상상하게 한다. 이는 우울과 불안, “정신질환을 재정치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낙관을 정지하는 비관이야말로 서로를 돌보는 다정함 일 수 있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24, 68~69쪽, 97쪽.
  • 10) 밈과 같은 ‘대항 소음’은 정치적 목표나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연대 자체를 몸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로런 벌랜트, 같은 책, 465쪽)이다. “감 각 능력, 집중, 다시 한번 함께 모이는 즐거움의 코믹한 의미를 수반하는 민주적-존재-되기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정치적인 것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 “정치를 한다.””(같은 쪽) 그러므로 “잠재성이 긍정되는 장소인 ‘지금’에 수행을 통해 소속되는, 농밀한 감각적 활동”(466쪽)에서 시민권 이 작동한다. 이렇게 “주변 분위기로 형성되는 시민성의 정치적인 강도”는 미약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거부의 철학으로 헤게모니적 이데올 로기에 맞서지 않기 때문”(464쪽)이다. 하지만 이는 대의제의 대표자(와 그 환상)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면서 생긴 만성적인 정치적 우울에서 벗 어나 친밀한 사회성과 소속의 느낌을 생성하며, “정치에 의해 마모되지 않는 것을 정치적 행위로 가치 있게 여기면서 정치적 행동을 다시 활성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467쪽).
  • 11) 이희우는 ““친한 사이”는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 시험중인 사랑”을 의미한다며 이를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명명한다. 우애의 정치성을 담은 적실한 명명이지만 본고에서는 동등한 둘 바깥으로, 옛 친구와 이주민 이웃과 우연히 만난 노동 집회로 ‘친한 사이들’이 확장되는 장면에 좀더 주목해보려 한다.
  • 11) 이희우는 ““친한 사이”는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 시험중인 사랑”을 의미한다며 이를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명명한다(이희우, 같은 글, 329쪽). 우애의 정치성을 담은 적실한 명명이지만 본고에서는 동등한 둘 바깥으로, 옛 친구와 이주민 이웃과 우연히 만난 노동 집회로 ‘친한 사이들’이 확장되는 장면에 좀더 주목해보려 한다.
  • 12) 주디스 버틀러는 안정적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동성애적 정동을 비가시화하는 ‘이성애적 우울’의 문화적 제도화를 지적(『젠더 트러블』)하 면서 권력이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성의 영역을 결정해왔음을 짚는다. 규범은 바깥으로 주변화된 사람을 ‘살 만한 삶’에서 배제하며 모두 가 취약한 신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망각하게 한다. 살 만한 삶은 사회계약론의 형식적 개인주의를 넘어 타인(과 나)의 취약한 신체를 지킬 때만 비로소 모두에게 도래한다(『비폭력의 힘』). ‘애도할 만한 삶’에서 ‘살 만한 삶’에 대한 사유로의 궤적은 윤조원, 「“살 만한 삶”을 향해— 『젠더 트러블』에서 『비폭력의 힘』까지」,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0권 4호, 20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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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계간 시작 박형준 체험만남풍경마음마을사 2024
나희덕 [문학평론]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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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탄생하는 예술가와 그의 붉은 몸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계간 현대비평 강지희 AI예술비가역적 시간붉은 몸성해나혼모노김지연하와이사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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