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제120호)
김기태의 즐거운 시민들
세계의 규칙을 다시 묻는 전환기의 화자들
김기태의 화자들은 사회문화적 권력에 민감하면서도 동시에 둔감하다. 그들은 규범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파악하고 의문을 품는다는 점에 서 예민하지만, 그 규범과 불화하며 이탈하기보다는 이질감을 품고서도 그 미시 적 중력장 안에서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적응했다는 점에서 무던하기도 하다. 「전조등」은 제목처럼 김기태의 인물들이 선 출발선을 비추고 있다. “더러운 것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의 말을 떠올”(81쪽)리듯 그들은 규범과의 거리 감 각을 통해 자기를 인식한다. 농협 창구원과 공무원인 부모에게 절대 “남들에게 흉을 잡힐 만한 일”(82쪽)을 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어린 시절 부터 “이미 그는 주의해야 할 일들이 적힌 긴 목록을 갖고 있었다”(81쪽). 그렇다 고 소설이 부권적 금기에 저항하면서 뒤틀리는 욕망의 파토스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규범을 당연한 환경으로 간주하며 자랐으면서 도, 그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거리 감각이 출현한다는 역설 이다. 그는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히 공부해 중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고 대 기업에서 무난한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결혼 적령기에 결혼하는 인물이다. 그런 데 소설의 화자로서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자기 삶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수집’ 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주변과 비교하고 동료의 평가를 귀담아들은 덕분에 표준적인 중산계급 가족 모델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 만 그때마다 어떤 생각을 자꾸 밀어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자기다운 게 뭔 지 생각하다 자기답게 사는 게 지겨워졌다.”(90쪽) 자동차 전조등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설 속 파열음처럼, 표준적 규범이 주는 안정감과 자기다운 삶에 대한 궁금증 사이의 충돌이 김기태의 소설에 메아리친다.
「세상 모든 바다」의 화자도 규범적 남성의 성장 모델과 재일 조선인 남성 청소년인 자신의 현 위치를 면밀하게 비교하고 사회문화적 취향을 조정하면서 성장한다. 「롤링 선더 러브」의 화자는 연애와 결혼의 표준적 모델을 형성하며 여 성 청년의 조바심을 부추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복판으로 뛰어들어가 작은 소동을 벌인다. 이처럼 규범적 삶에 대한 적응-의혹을 오가는 양가적 태도야말 로 김기태 소설 속 초점 화자의 공통점이다. 한국(혹은 동아시아)사회 특유의 계 급적, 이성애-젠더적, 가족주의적 생애 규범이 주조하는 주체의 형상을 정확하 게 탐지하는 그들은 기성 규범이 자신을 포함한 세대적·젠더적 집단의 현실을 더는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렇다고 이를 갱신할 새로운 시대/계급 의식을 정초하지는 못한다. 소설적 정념과 자아도취로 이 규 범을 내파할 예술가형 인물형도 아니기에 그들은 그 중력장에서 완전히 탈주하 지는 못한 채로 다만 어느 정도 서술적 거리를 두고 공전한다. 그래서 소설은 액 자식 구성으로 규범과 그에 대한 의혹 사이의 괴리를 고스란히 담곤 한다. 역사 적 변화를 감지하는 데 특화된 사적유물론적 비평을 새삼스럽게 환기하자면, (지성에 따른) 행동과 (감성이 주조한) 내면의 괴리로부터 시대정신의 잉여/균열 을 드러내는 전환기의 인간형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1)
공통 언어가 없는 시대의 앎의 원리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간극이 생긴 것이란 말인가. 「팍스 아토미 카」는 합리적 개인의 이성으로는 더는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해진 세계를 그 원 인으로 짚고 있다. 이제 인간은 지구를 이차원적 평면인 지각地殼으로 생각하며 안심하고 딛고 서 있을 수 없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기후, 물류, 경제, 정치, 무기, 핵-원자 에너지……의 출렁임이 모든 공간적 경계는 물론 시간까지 넘나드는) 중층적 ‘네트워크’로 이해해야 하는 인류세의 지각知覺 구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소 설은 주변 세계가 언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강박 때문에 주변의 모든 정보를 재확인해야만 일상을 가까스로 살 수 있는 경증 망상장애 환자의 일지처럼 보인다. 그의 불안은 단순히 문단속을 수십 번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매일 밤 “위키피디아의 링크를 타고 다”(284쪽)니면서 종말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들을 수집하는 데 여념이 없다. 지구 종말을 경고하는 과학자들 의 시계는 자정 구십 초 전을 가리키고, 민주주의의 최정상에 있다는 미국에서 는 트럼프가 재선을 앞두고 있고, 핵전쟁을 막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허무 하게도 전쟁이 반복되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연결’하면서 그는 동시대를 이 렇게 정의한다.
상호확증파괴 원리에 따라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그리고 그들의 동맹국 사이 에 전면적인 무력 충돌은 극히 어려워졌다. 물론 수단, 예멘, 아프가니스탄…… 또 는 레반트 지역의 사정은 다르지만, 혹자는 지난 만 년 동안 인간은 모두 전사거 나 전사의 유족으로 살았고, 20세기 전반에는 두 번의 총력전으로 팔천오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 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 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 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292쪽)
과잉 연결(하이퍼링크)되었기에 도리어 과소하게 연결된 인류는 평화로운 전시戰時라는 역설적 조합을 아무렇지 않게 동시대(성)의 기본값으로 삼는다. 지 구상의 모든 정보를 수집, 저장함으로써 근대적 교양의 표준 규범을 구축했던 ‘백과전서파’를 본받는 화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지식은 그저 다른 링크 로 미끄러져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원인을 지목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275쪽). 아니 그전에, 가능은 한가.
서로 못 본 체하면서도 와글거리는 것들 사이에 비어 있는 곳, 공중에 이어진 거미 줄, 가로등 불빛에 반짝인 한 토막의 실선을 봤다. 걷다보면 살갗에 감겼다. 눈을 크게 뜨면 거미줄의 무늬가 보일 듯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점과 점, 선과 선의 패턴을 포착할 수 없었다. 포착할 수 없다면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휘저으면, 아무것도 없었다.(290쪽)
앎의 매체와 앎의 형식을 모두 붙잡을 수 없는 세계에서 (기존처럼) “정 상적인 사고라는 말은 무섭다”(269쪽). 자신이 어떤 거대한 연결-네트워크를 보 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도 자신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외경심은 김기태의 화자가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감정이다. 이는 세계와 자신 사이의 간극과 괴리를 종합하고 지양함으로써 지적으로, 윤 리적으로 도약하던 근대적 앎의 체계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발견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는 김기태의 화자들은 비약적 상상력이나 멋부 린 허무주의로 향하지 않고 세계와 자기 사이를 매개할 언어를 성실히 찾는다. 다만 세계를 붙잡아 고정하는 근대적 합리성으로는 언어를 확보할 수 없기에,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한 연결에 집착한다. 「팍스 아토미카」에 서 그것은 ‘주문’이다. “내 뇌에 나의 의지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문을 읊 는 일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주문은 미신도 비유도 아니다. 과학이다.”(280쪽) 눈 에 보이는 사물마다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중얼거리는 주문은 일견 병리 적 증상처럼 보이지만, 자신만의 수행으로 개별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언어 형식 이자 존재 형식이기도 하다.
내가 연구한바, 결정적 주문은 최소한 다음 조건을 요구한다. 첫째, 내가 만든 나만의 주문이어야 한다. 둘째, 나만의 주문이지만 나에 관한 것만은 아니며, 나보다 더 크고 넓고 깊고 오 래된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셋째, 그것은 하나의 문장 또는 충분히 외울 수 있을 만한 개수의 문장들로 구성 되어야 한다. 이런 주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의심할 필요 도 없이 자유를 참칭하는 소음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289~290쪽)
다시 말해, 세계의 진실을 담고 있고 세계와 ‘나’를 연결할 수 있으면서도 그 연결됨을 개인이 실감할 수 있는 규모의 언어를 통해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다. ‘주문’을 ‘연애’ 혹은 ‘관계’, ‘교양’이나 ‘취미(덕질)’로 바꾼다면, 이 조건은 김기태의 다른 화자들도 꾸준히 추구하는 목표다. 세계와 자신을 연결할 시대 정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선험적 자신감을 잃어버린 복잡계 네트워크 시대의 인물들은 자기 형성을 위한 언어를 스스로 만들고 탐색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팍스 아토미카」가 ‘앎에 대한 앎’의 근대적 형식이 무너져버린 시대의 사 변적 인식론을 다룬다면, 「보편 교양」은 앎의 실천윤리를 재생산하는 데 실패하 는 주체를 발견한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 ‘곽’은 획일적·정량적 줄 세우기에 몰 두하는 공교육에 염증이 난 차에, 학생의 자기 주도성을 강조하는 교육정책의 변화에 힘입어 인문학 고전 독서 수업을 개설한다.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 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속 “늙 은 교수”(148쪽) 같은 지식 상인을 경계하는 곽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교육 을 추구한다. 곽의 교육목표는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 한 인성을 형성하며, 학문이나 직업 활동에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갖”(152쪽) 춘 학생의 양성이다.
여기서 전문적 학문·직업 교육 과정을 통해 (지배계급에 복무하라는 원래 목표와 달리) 보편적 인간을 향한 진보적 가치관을 함양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 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같은 지식인 역할론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전위적 인텔리겐치아의 역할론을 화이트칼라 직종이 확대되고 현대적 대학 교 육 제도가 확충된 후기산업사회에 재적용한 사르트르식의 논의는 한국 지식인 운동에도 주요한 모델이 된 바 있다. 가령, 평론가 김현은 이 ‘전문지식의 보편성’ 이라는 항에 ‘무용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문학’을 대입하여 한국문학의 자의식 을 정립했으며, 2) 평론가 백낙청은 민족·민중이 성글게 선취한 ‘민족적 시민의식’ 을 독려하는 보편 교양을 작가·지식인이 가르쳐 “시민다운 시민” 3)을 만들자는 문학론을 세웠다. 지배계급에 편입·복무하기 위한 교육제도를 통과하면서 획득 한 지식(문학)은 중간계급으로서 지식인(특수)의 자기모순을 발견하게 하고, 그 모순이 곧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과 같다는 것을 깨달으며 주체화된 지식인 독자 가 (계급을 초월한) 시민 독자를 이끌어 시민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인의 재생산 모델에 따라 특수한 위치와 보편적 앎 사 이의 모순을 넘는 변증법적 자기 지양의 계기를 마련해주려던 곽의 노력은 싱 겁게 끝난다. 소설의 위기는 수업을 열심히 듣던 모범생 ‘은재’의 아버지에게 『자 본론』이 교재에 포함되었다는 민원을 받는 장면이다. “‘사상의 자유’를 위협하 는 민원”(163쪽)에 곽은 도리어 “낯설고 활기찬 감정”(162쪽)을 느낀다. 자신의 수 업이 규범적 체제에 균열을 내리라는 기대가 은밀히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곽 은 계급적 이익을 초월한 보편적 지식에 도달하도록 돕는 교육자의 본분에 따 라 학부모를 설득하고 학교 당국에 저항할 마음의 준비를 마치지만, 이는 해프 닝으로 끝난다. 은재의 입시 컨설턴트가 아버지에게 마르크스도 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하자 곧바로 민원을 철회하고 사과까지 한데다, 과연 그 말대로 은재가 서울대 입시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애들 다 『공산당 선언』 읽히고, 머리에 빨간 띠도 매줘야 되는 거 아냐? 하하하.”(173쪽) 3학년 부장 교사의 농담 섞인 격려 를 들으며 곽은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176쪽) 을 맛본다. 입시에 성공하고 교육에 실패하는 역설적 서사 구조는 급진적 사회 비평마저 계급 세습을 위한 문화 자본으로 흡수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종합 적, 교양주의적 지성이 처한 종국적 한계를 부조한다.4) 그러니 곽은 인문학 서적 이 가득한 책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 었다”(같은 쪽). 이 결말은 세계와 괴리된 자기(특수)를 발견하고 이를 변증법적으 로 지양하는 지성적 훈련이 곧 시민 연대(보편)로 연결된다는 한국 (인)문학의 주체 재생산 양식이 무너졌다는 발견이기도 하다.
대신 김기태 소설은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는 개인(성)을 탐색하 며, 개별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서로 시민적 정동을 나눌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이것이 김기림이나 김수영이 그랬듯 변증법적 종합력을 상실한 자신을 반성(하 면서 실은 사랑)하는 ‘지식인=소시민 문학’의 계보가 아님은 물론이다. 김기태 소 설은 유독 (사적 친소 관계로 한정되는 우정이나 성적 친밀성을 전제하는 사랑이 아 니라) 만난 지 오래지 않은 옆 사람과 연결되는 순간에 도래하는 우애라는 정동 에 주목한다. “오와 열 따위는 없이 털썩 앉거나 서성거리거나 제각각이지만 아 주 흩어지지는 않는 사람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위태로운 우애를 담아 말한 다./“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확실히 그렇네요.””(「팍스 아토미카」, 299쪽) 자기의 위치를 어떻게든 파악하려는 간절한 ‘주문’을 듣고 그 고유한 언어의 역 능을 확인해주는 옆 사람의 응답으로부터, 김기태의 인물들은 우애를 발견한다.
덕질과 취미의 파동 에너지
근작 「일렉트릭 픽션」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 에 “사람은 전기로 산다”(115쪽)라고 대답하며 시작한다. 다소 엉뚱한 선문답 같 은 이 서두는 소설의 기획을 압축하고 있다. ‘전기 소설’이라는 제목처럼 화자는 ‘전기’라는 나름의 주문/언어를 통해 물질적인 복잡계 네트워크와 인간의 존재 형식을 통합하여 세계와 정신을 다시 연결하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한다. 소설에서 전기는 전자기력이라는 우주의 근본적 힘인 동시에 “콘센트와 플러그 로 결박된 현대적 관성”(같은 쪽)이라는 역사적·사회적 물질성을 의미하며, 감 각기관과 근육을 거쳐 신경세포가 주고받는 인간 신체의 전기신호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물리적-사회적 세계와 물리적(-사회적) 인간을 연결하는 공식에서 빈칸으로 남은 것은 ‘사회적 인간’이라는 항이다. 당연히 그 공백을 채 우는 것이 화자의 과업이다.
한국에는 스무 개가 넘는 에너지 공기업이 있다. 대표적이라 할 만한 한국전력공 사의 총자산은 235조에 달하며, 약 2만 4000명가량이 본사를 포함하여 250군데 가 넘는 지역 본부 및 사업소 등지에서 근무한다. (……) 석탄에서 출발했든 원자 에서 출발했든, 눈앞의 벽에 박힌 220볼트 콘센트에 전기가 도달하기까지 얼마 나 많은 인력과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따지자면 그도 길고 복잡한 과정의 일부였지만 전기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한번쯤 자신이 건전지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117쪽)
노동과정과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라는 자의식이 어렴풋하 게 보이지만 노동자의 각성과 결집에 대한 기대가 싹트진 않는다. 사회적 연결 에 대한 나열적 서술은 오히려 그 복잡한 네트워크 전체를 가늠하기 어렵고 따 라서 알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동시대 청년의 단절된 세계 인식을 강조한다.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출퇴근하며 성실하게 일하지만, 사무실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계약직이다. 그 모욕에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과 분리된 집 안에서만 자유를 느끼기 때문이다. “진짜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문안에 있다고 느”낄 뿐, “문밖의 일은 문안의 삶을 위하여 수행하는, 견디는 무엇이었다”(116쪽). 그렇게 문안에서 자신을 성실하게 돌보던 어느 날 “전기신호가 그의 두 팔을 들 어올렸”(119쪽)고, 그는 그 내적 신호를 따라 전기기타를 배우기로 한다.
그런데 혼자 즐겁게 연습을 하던 중 소음에 항의하는 메모가 붙고, 그는 문밖의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 않은 관성에 따라 기타를 처분하기 위해 ‘재니스 음악 학원’을 방문한다. 그러나 정작 기타는 팔지 못하고, 엉겁결에 재니스가 시 키는 대로 코드를 배운다. 어느새 “옥수수나 고구마 따위를 나눠 먹고 있던 나 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기묘한 합주를 연습하게 된 그는 “손가락들이 자유로워 짐을 느”(127쪽)끼고 전기가 사람 사이에도 흐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엘 리베이터 벽에 자신은 전기기타를 좋아하며, 아홉시 이후에는 연주하지 않겠지 만 그래도 불편하면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붙인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 을 다하는 이곳에서 자신이 505호, ‘여기’에 있다고 고백한 사람”(128쪽)으로 변 한 것이다. 그 쪽지는 쪽지를 읽은 501호 주민으로 하여금 옆집의 “아기가 울고 싶을 때 우렁차게 울기를 바”(같은 쪽)라게 한다. “내 안에도 전기가 있”고 “그 녀 석의 안에도 전기가 있”음을 깨달으며, 그는 “알지 못할 전기장치로 작동하는 엘 리베이터” 안에서 “가벼운 상승감”(같은 쪽)을 느낀다. 그리고 이 상승감은 다시 연결을 인식 가능한 범주로 돌려놓아 이웃을 향한 인사와 감사, 호의를 표하는 (역시 일종의 ‘주문’일) 문장을 큰 소리로 연습하게 한다. “Hei kaikki, 모두들 안 녕하세요. Kiitos, 감사합니다. pidän sinusta, 저는 당신이 좋아요.”(129쪽)
「일렉트릭 픽션」은 복잡계 네트워크 속에서 고립된 동시대 청년들의 사 회경제적 조건을 충분히 검토하면서도, 타인과 연결되는 감각을 어떻게 다시 회 복할 수 있을지 탐색한다. ‘오타쿠’와 ‘빠순이’에 대한 기존 담론이나 최근 화제 인 ‘MZ 오피스’ 등의 재현이 청년 세대는 공적 노동의 관행과 공동체에 대한 책 임에 무관심하고 사적 취미생활에만 몰두하며 고립되어간다는 비난을 (정의로 운 풍자인 양) 휘두르는 것을 상기하면, 사적 취미판단을 연결할 수 있는 계기와 그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우애의 정동에 주목하는 김기태 소설은 그와는 정반 대 방향에서 접근하는 셈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조건 없는 원천적 판단인 미 학적 감수성이 시민적 관계 맺음의 기초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 애의 감각을 회복하는 사건을 상상하는 것은 김기태 소설이 일찍부터 매진해온 작업이다.
이 계열에서 「세상 모든 바다」는 지금 대중문화의 미감이 형성중인 거시 적, 미시적 관계성을 두루 관찰한다. 다양한 국적의 케이팝 여성 아이돌 그룹 ‘세상 모든 바다’는 전 지구적 기후 위기와 인종·젠더·기아 등의 사회문제, 민주 주의 운동에 목소리를 내고, 청년 팬덤 역시 이에 호응하며 국가 단위의 기성 정치를 넘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설정은 동시대 케이팝 아티스트와 팬덤이 수행하는 지구 단위의 문화정치(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5)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거시적 정동 네트워 크가 일군 정치적 성과보다는 그 근간이 되는 미시적 네트워크다. 서로 다른 타 인이 연결되면서 정동 네트워크가 발생하는 최초의 계기는 무엇일까.
백영록이라는 이름의 16세 소년이 사망한 사정에 대해, 군청 앞에서 행인에게 말 을 거는 아주머니의 사정에 대해, 그 사정에서 나의 몫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해내 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 가 세차게 튀어올랐다. 얼굴에 와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 낌뿐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36쪽)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 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 그것 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37쪽)
‘세상 모든 바다’와 팬덤의 원전 건설 반대 캠페인을 비롯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22쪽)에 대해 무지했던 영록을 화자는 ‘얼빠’거 나 “음습한 움짤이나 모으는 녀석”(17쪽)으로 치부했다. 그런데도 영록은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 본 낯선 외국인에게 서슴없이 말 을 걸고 선물을 건네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화자에겐 그의 즐거움이야말로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지금의 복잡한 네트워크에서는 바다 건너의 보편적 가치 를 떠올리는 것보다 당장 닿는 물방울의 감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낯설고 두렵다. 그러니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정동 정치는 우선 용감하게 눈앞의 타인을 온전히 보는 감성적 즐거움, ‘근시의 사랑’일 것이다.6)
기실 이런 근시의 사랑을 갑작스레 마주하는 당혹감은 김기태 소설이 자 주 반복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보편 교양」처럼) 보편적인 가치에 공감한다는 자 신감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람을 마주하고는 뒷걸음질칠 수밖 에 없고, 그래서 (「팍스 아토미카」처럼) 기존의 언어로는 거대한 연결-네트워크를 충분히 파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어 무서워진다. 이런 서사 구조는 예상과 달 리 단절된 자신을 발견하고, 반대로 예상과 달리 연결된 자신을 발견하는 힘을 부조한다. 개별적인 인간-입자들이 연결되어 거대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 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떻게 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야 하) 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물방울의 집합에 불과한 바다에 어떻게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것 일까. 김기태 소설은 유독 전기, 음파, 파도, 빛 혹은 중고 거래 앱과 SNS 같은 매개를 통해 전달되는 파동 에너지에 주목한다. 하나의 입자가 곁에 있는 다른 입자로부터 운동에너지를 전달받고 이를 다시 전달하면서 파동이 생겨난다. 물 론 인간-입자를 떨리게 하는 운동에너지는 감정일 것이다. 이웃에게 폐를 끼치 거나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주체로 살라는 규범의 명령은 모두를 개별 적인 입자로 남게 한다. 하지만 김기태 소설은 인물로 하여금 그 강박과 조바심 을 버리고 자신에게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던 감정 에너지의 파동을 목격하게 한다.
용기로 연결되는 즐거움의 공동체
그동안 입자들을 멈춰 세우던 관성을 이겨내고 진동하기 위해서는 그 단 차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파동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보내겠다는 결심, 용 기가 그 에너지다. 대개 김기태의 남성 인물이 거대한 파동에 대한 외경심과 관 성을 벗어나는 두려움을 가시화하는 역할이라면, 여성 인물은 기꺼이 연결될 용기를 품고 먼저 그 현장으로 뛰어든다. 「롤링 선더 러브」의 ‘맹희’도 일렉트릭 기타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연애 예능과 밈을 모두 챙겨보면서 동시대 대중문 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이를 자기만의 주문으로 바꾸는 인물이다. 서둘러 결혼 시장에 뛰어들기를 종용하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연애가 정말 “투자와 수익의 문제일까”(43쪽) 묻는 맹희에게는, 친구 ‘리아’가 조언한 “연애는 옵션이거나 그조차도 못 되므로 질척거리지 말고 단독자로서 산뜻한 연대의 가 능성을 모색”(47쪽)하는 방향도 마뜩잖다. 자신을 거래하고 싶지도 않지만, 누군 가와 친밀하게 연결되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일 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51쪽) 자문자답을 반복하던 맹희는 그 해답을 직접 알 아보고자 결심한다. 동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랑의 재현물인 연애 예능 ‘솔로 농장’에 용감하게 참가해 그 한복판에서 “시원하게 굴러보”(52쪽)려는 것이다.
낭만적 성애와 경제적 부조라는 상호 모순적 규범으로 구성된 이성 연애 의 형식, 이성혼 제도 자체를 전시하는 연애 예능은 기성의 이성애적 젠더 규범 과 관계 모델을 강화하지만, 그 담론을 응시의 대상으로 메타화하여 일종의 소 격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 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 떤 세상인지 의아했다.(70쪽)
‘솔로농장’에서 맹희가 실제로 만난 이들은 서로를 경쟁과 쟁취의 대상으 로 한정하고 감정을 투자 수단으로 만드는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눈앞 의 관계성을 일구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악플과 조롱을 받 는 서로를 위로해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성실한 사람들이 보여준 친밀성에 비하 면, 규범에 갇힌 채 평가만 일삼는 사람들은 “사랑할 용기도 없는 놈들!”(73쪽) 에 불과하다. 맹희는 이성애적 규범이 여성 청년에게 강요하는 수치심과 조바심 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마주한 감정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알고자 한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 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76쪽)7)
김기태는 동시대 문화정치의 가장 세속적인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좌절 도 분노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맥락의 친밀성에 주목한다. 「로나, 우리의 별」의 여성 아이돌 ‘로나’는 자신의 음악과 팬덤이 퍼뜨리는 문화정치적 힘을 확인하 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 제도 정치를 변혁하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렇다고 로 나라는 인물의 성공담(성장)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부제 같은 첫 문장 “우리는 가능하다”(181쪽)가 암시하듯, 로나를 포함한 팬덤, 시민을 포괄하여 ‘우리’라 는 복수 시점을 취하는 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로나의 동지가 되려 하는 사 람들”(205쪽)(이 사용하는 온라인 아이디)로 서술 시점을 계속해서 옮겨가는 소설 은 그 서술 시점적-인물 관계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취향이 정치로 전이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사회적 참여 실험을 벌인다.
그 출발선이 현재까지도 파급력이 강한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점은 중요한 설정이다. “선출직 스타”(183쪽)인 셈인 로나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로나에 대한 친근감뿐만 아니라 로나의 행보를 비판하거나 동참할 의무를 지니 게 되기 때문이다. 로나는 성실하게 음악을 발표하는 한편, 재생지를 활용해 앨 범을 만들고 기후 재난이 생길 때마다 억대의 기부도 한다. 팬들 역시 친환경 앨 범을 구매하거나 기부에 동참하며 “로나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한다는 의사표 시”(188쪽)를 한다. 엔터테인먼트 자본이 투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상품) 를 도입하자 뜻하지 않게 어떤 관계성이 생성되고, 이것이 욕망의 방향을 전환 해버리는 것이다. “자본은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잉태하는지도 모르고 질주한 다.”(185쪽) 물신과 대상화의 극단에 있는 아이돌로 하여금 그 욕망의 회로를 반 전하게 하면서, 소설은 역사 속 혁명가들 역시 삶의 욕망 회로를 바꾸는 라이프 스타일 아이콘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진부한 악과 싸우는 일보다는 감춰진 위선을 폭로하는 일이 자 극적”(189쪽)이기 때문에, 로나의 진정성은 계속 의심받는다. 로나가 광고한 “상 품의 생산과정과 음악적 동료들의 언행과 신곡 가사의 함의를 따”(190쪽)지는 팬덤의 검증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로나는 IT 기업을 운영하는 ‘데릭’과 함께 제3세계의 사회 기반시설과 빈민을 위한 사회적 금융 사업을 시작하지만, 이는 그나마 있던 기업의 사회 공헌 책임을 (간접적 금융 투자 이윤을 얻는) 새로운 투 자 영역으로 바꾸는 것에 가깝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방해하지 않아 지속 가능하다는 대안 자본주의 담론은 기실 복잡계 네트워크를 거쳐 자본을 세탁 하는 “절도-기부 모델”(193쪽)일 수 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소비, 가치 소비 같 은 자본주의적 적선을 최대한의 문화정치로 간주하는 동시대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로나 역시 변하지 않는 세계에 좌절해, 늘 연주하던 기타 ‘붉은 도브’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고 잠적한다. 이때 작가의 세계에 대한 전망, 다시 말해 소설적 우연성이 개입한다. 로나의 팬덤들이 중고 마켓에서 붉은 도브를 발견하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다시 로나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공동의 선물 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넘어서는 다른 지평을 마주하는 이 일화는 대중이 로 나가 말하는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수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 자신이 메 시지를 발신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변할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로나는 “창 당 선언”(202쪽)으로 그에 화답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적 형식/제도)를 상품으로 흡수한 자본을 재전유하는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로나와 팬덤은 아예 더 멀리 나아간다. 선한 자본 을 선별해 투표하는 소비 주권자의 대의제적 전유에 한계가 있다면, 시급한 것 은 욕망의 형식이 아닌 내용 자체를 전환하는 직접민주주의다. 로나는 두루뭉 술한 선의와 인류애에 기대는 문화적 전통에 대한 파업을 선언하고, 그의 팬덤 과 함께 정당을 만들어 직접 발화하고자 한다. 그들은 「보편 교양」의 화자가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 다. 하지만 알고 싶다.”(205쪽) ‘나’들이 원하는 하루를 지금 요구하는 단상壇上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원래적인 정치일 수 있다. 문화/경제/정치라는 각각의 영역을 분리하면서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 의하지 않는다”(204쪽). 노조의 ‘정치 파업’이나 예술인의 정치적 발언은 ‘불순’ 하다는 통념을 넘어, ‘우리’라는 급진적인 연결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노동 분업을 물신화함으로써 정치를 여타의 영역과 분리하고 계급을 고착하는 대의제도(정치 전문가의 선의에 호소하는 온정주의)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우리의 별, 로나가 예고한 대로” “붉은 도브의 연주에 맞춰” 다 함께 부를 “그 노 래의 제목은 ‘우리는 가능하다’이다”(205쪽). 급진 좌파 정당의 여러 코드를 연상 시키는 소설의 결말에 도착하면, ‘우리’의 가능성은 취향의 공동체를 일상적 정 치 공동체로 세속화할 용기를 의미하게 된다. ‘나’들이 모인 네트워크 속에서 정 치 미학적 공통 감각이 창발하는 동시대적 조건과, 이를 시민적 우애의 단초로 전환하는 감성적 조건을 보는 것이다.
김기태는 자본(이 제공하는 대중적 즐거움의 경험)의 축적이 양질 전화를 일으키는 순간을 날카롭게 전유해낸다. 인신을 가장 세속적으로 대상화(아이돌 물신화와 관계의 예능화)하는 매체로부터, 자기를 파괴할 기반을 스스로 생산하 는 자본주의적 전회를 예감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태의 소설은 사적유 물론을 다시 소설의 무대로 불러들이고 있다.
평균의 감정과 밈의 즐거운 분노
그렇게 사적유물론을 다시 불러들인 소설이라면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 내셔널」을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은 경제적 토대로부터 문화양식이 생성된다는 (물론 도식적인 통념이지만) 사적유물론의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문화적 언어야 말로 경제적 토대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방법임을 서사화한다. “두 사람의 역사 는 길다”(111쪽)라는 첫 문장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수미 상관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두 사람’들이 만들어온 역사를 계보적으로 살피는 ‘코드’가 된다. 소설의 서두는 ‘두 사람’들 을 ‘기호화’하여 (형식적으로) 유사한 사건을 나열하면서 역사적 인과에 대한 엄 밀한 분석 대신 ‘두 사람’의 관계성과 시민적 결속의 계보들을 환유적 유사성으 로 연결한다. 그럼으로써 혁명과 테러는 역사 속에 고정된 신성한 사건의 자리 에서 내려오고, 전쟁과 디아스포라는 위대한 영웅이나 선량한 희생자의 에피소 드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역사의 세속화는 과거를 기준으로 그 인과를 반추하 며 현재를 반성하는 지성적 기술이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의 유사성 을 찾아내는 즐거움에 기반한 밈meme의 화법에 가깝다.
진주와 니콜라이 두 사람은 교무실에 따로 불려가 “내야 할 어떤 돈을 내 지 않았다는 안내문”을 받는 아이들이니 “둘이 친하게 지내”(114쪽)라는 말을 들 으며 처음 만난다. 이 ‘조언’은 가난을 극복하고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서로 도와가며 더 노력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계급적 수치심을 내면화하도록 유도 하는 다정한 교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작문 시간에 두 사 람은 진로나 꿈 같은 단어가 포함된 상투적인 에세이를 제출”하면서 “……니까 열심히 노력해야겠다”(116쪽)는 똑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니콜라이는 한국 에 정착하기 위해 열심히 기술을 배우며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진주는 공무원 시험을 위해 노력하며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서 “자신도 그럭저럭 평범한 이십대로 살고 있는 듯”(128쪽)하다고 아주 잠깐 느 끼기도 하지만, 평균적인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니콜라이가 한국에 계속 살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이 남아 있다. “전년 도 한국인 평균 이상을 벌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데, “그건 연봉 삼천팔 백만원 정도”(125쪽)다. 두 사람은 아무리 일해도 한국인 평균이라는 그 금액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134쪽)은 자괴감까지 든다. “남들 다 자리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같은 쪽) 잘못이라고 질책하는 것이 너 무 당연한 사회에서 평균이 되지 못한 두 사람은 묻는다. 결석 한 번 안 했고 법 을 어긴 적도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같은 쪽) 평균에 비추어 인 생을 평가하고 산출된 값을 부풀려 전시하거나 평균에 미달하는 자기를 혐오 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형태처럼 보이는 시대이기에, 청년들은 서로를 견주며 질투와 수치심을 느낀다. 평균 이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장을 멈추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열망과 패배하면 홀로 낙오되어 고립된다는 수치심. 이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한국사회는 (최소한) 경제적 공공재에 가까운 통신망에 접속 할 권리는 남겨둔 셈이다. 역설적으로 그 덕에 통신망은 (아직은) 정치적 공공재 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를 평균의 감정으로 대하는 공간이면서도 드립과 짤, 유 머와 밈이 난입하여 평균의 연결을 방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퇴근길에 지쳐 커뮤니티 게시판을 스크롤하는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신의 삶을 다른 이십대와 비교하면서 주눅들다가도 댓글에 달린 밈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는 여전히 현장실습생과 제빵사, 택배 기사와 대학 청소 노동자 등에 관한 게시글에 나타났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건 아니지만 아무도 알 바 아닌 일을 하다 무시당하고 위협받고 쫓겨나고 심지어 죽은 이들을 조롱하 는 댓글 속에서도 엠마는 늘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외쳤다. 때로는 한국 치킨 으로 신세계를 맛본 영국인이나 데드리프트가 3대 운동 중 최고인 이유, 다이어 트할 때 기립성저혈압 조심해 같은 제목의 게시물에도 끼어들었다. 금발의 양 갈 래 소녀는 인터넷 세계를 떠돌며 가끔 길을 잃기도 하는 꼬마 유령처럼 보였다. 또 는 태엽이 풀릴 때까지 아장아장 걸으며 오직 한 문장만 되풀이하는 인형.
“기립하시오 당신도!”
어쨌든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들은 계속 있었다.(136~137쪽)
엠마 리스의 일화는 브레히트의 시에서 유래하여 한국에서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기 전에 선창하는 구호가 되었고 다시 웹상의 밈으로 정착했다. 물 론 이 밈이 노동자의 전 세계적 연대를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게시 글 과 대화의 맥락을 단절하거나 변환하면서 현재 ‘나’를 위한 맥락으로 전환하는 화용론적 수행을 반복하기 쉽게 코드화한 언어를 제공해준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정직원이 아니라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유니폼이나 형편없는 구내식당 메 뉴, 덥고 춥고 좁은 휴게실 따위에 대해 소식을 전하며 “이거는 기립이네, 기립해 야겠네” 같은 농담을 주고받”(138쪽)는다. 노력하지 못한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 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이를 서로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서로를 대신해 분노해주는 밈을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돌보 고 있다. 여러 직업의 세계를 견학하는 유아교육용 캐릭터이면서도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펭수, 슬픈 표정이지만 어떤 상황에도 체념하지 않고 불만족 을 표시하는 개구리 페페 같은 밈들도 마찬가지로 청년 세대의 분노를 유희 속 에 담아내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축적하게 만드는 미래주 의적 삶의 규범, 성장을 청년기의 당연하고 유일한 목표로 자연화하는 ‘잔인한 낙관주의’8)를 비웃고 풍자하는 언어적 틈을 만들어낸다. 그 틈에서 마구 돋아 나는 밈은 새로운 즐거움을 통해 생존경쟁이 만들어내는 우울과 자기혐오를 멈 춰 세우는 ’다정한 비관주의’9)를 싹틔운다. 이 웃음은 긴말을 하기 어려울 만큼 지쳐버린 출퇴근길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당신도 기립하라고 고 집스럽게 외친다. 성장의 명령에 복종하거나, 좌절하고 수치를 느끼라는 회유에 따를 생각이 없다고 현재를 정지하는 함축적이고 단호한 주문이다.10)
밈을 인용하며 대화하는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신과 이웃 사이의 친밀감 에도 다른 별명을 붙인다.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그저 마음에 따라 동 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자신들을 연인이나 부부 혹은 가족이나 친구 그 무엇이 라고 정의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142쪽)11)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같은 쪽)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산업재해를 당해 잠적한 친구와 인플루언서를 꿈꾸다 사라진 친구에 게도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한 마음을 전하고,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 버림”(143쪽)이라는 짧은 문장이 암시하듯, 집회중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가족 과도 관계를 맺는다. 정주민·내국인/이성애자/유자녀 가족을 기본 주체로 상정 하는 이웃간의 관계에도, 대단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던 계급적 연대에도 그렇 게 친밀하고 즐거운 새 이름이 붙는다. 가난한 집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내라는 교사의 조언이 끝내 이상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처럼 과거의 혁명사가 엉뚱한 밈 의 형태로, 기필코 고집스럽게 귀환한다. 친밀성의 이름을 다시 쓰면서. 국가-시 민의 관계가 아니라 시민-시민의 관계로 관점을 전환하면서.
그렇게 김기태 소설은 고립의 위기에 처한 청년들을 경제/구조의 증상으 로 환원하지 않고, 도태된 시민(경제 동물, N포 세대)으로의 퇴화와 고립을 강조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규범적 정동이 되어버린 우울한 자기 비하 속에서도 청년 들이 찾아내는 즐거움에 주목한다. 이 즐거움은 ‘살 만한 삶’12)을 상상하게 한 다. 이는 한국문학사에서 익숙한, 선험적 집단(계급,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금욕하 고 희생하는 지식인의 지적 종합력(양심, 의식)을 재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시민 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정동적 조건을 탐문한다. 규범적 생애 서사에 근접하도 록 자기를 경영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좋은 삶, 살 만한 삶을 분리하고 재정의한 다. 이로써 각자가 즐거운 느낌의 연결체로, 다시 새로운 시민적 정동-관계로 향 하게 한다. 이것은 본래 정치 미학이 하던 일이기도 하다. 혁명이 통치 집단의 변 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재정의하는 것이라면, 지금 눈앞의 관계 에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 즐거 움의 연결이야말로 혁명의 선결 조건이다. 김기태는 이 조건을 정직하게 모으고 있다.
- 1) 임화는 전환기 문학의 인식/감성 구조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문학이란 감성적 형식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적 활동의 영역”으로 “감성적 세계 가운데 지성은 자기를 용해(溶解)함으로써만 형성되는 독자(獨自)의 세계다.”(「의도와 작품의 낙차(落差)와 비평—특히 비평의 기능을 중 심으로 한 감상」(1938), 『문학의 논리—임화문학예술전집 3』, 소명출판, 2009, 561쪽) 대상/세계와 직접 대면한 감성이 먼저 영향을 받은 다 음에야 지성은 영향을 받으므로 “지성 가운데 의미된 내용은 이미 과거의 것으로 소멸된 감성계가—직관은 항상 순간적이고 그것이 지속적 의 미를 취득하는 곳이 지성이다—가져온 낡은 세계이고, 감성계는 늘 지성 가운데 정착한 낡은 세계와는 판이한 생성이 신세계로 형성되”므로 “지 성과 감성의 갈등이 의미하는 신과 구는 실상 낡은 세계와 새 세계의 대립이다”(같은 글, 564쪽).
- 2)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과지성』 1975년 겨울호.
- 3) 백낙청, 「시민문학론」, 『창작과비평』 1969년 여름호, 477쪽.
- 4) 김건형, 「촛불 이후의 정치라는 단상(斷想·單相·壇上)」, 『문학동네』 2024년 봄호 참조. 박서양과 이희우는 곽이 이상(보편)과 현실(특수) 을 종합하는 메타적 반성력을 발현했으나 동시대 교육 현장의 한계 때문에 실패했다고 읽으며, 그럼에도 고뇌하는 교육자이자 평범한 인간으로 서 그가 지닌 최소한의 진정성(직업윤리)을 애도한다(박서양, 「이토록 달콤한 멜랑콜리」,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이희우, 「평범한 자는 들어오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해설). 반대로 홍성희는 결말 이후에도 곽이 변하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했 으리라 전망하면서 ‘균열’을 미학화하는 데서 그치는 문학은 때로 안전한 공간에 머무르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홍성희, 「안전의 방향 (1)」, 문장웹진 2023년 10월호). 한편 임세화는 민주화 세대도 아니고 그 이후의 새로운 담론도 없는 “끼인 세대”로 곽을 읽는다. 동시대의 교양을 탐 구하지 않고 이전 세대의 진정성을 시대착오적으로 추구했기에 “자신의 비어 있음과 대면”했다는 것이다. 주도권 한 번 지니지 못한 채 늙은 세대 라는 독해는 문학사적으로 흥미롭지만, 김기태의 다른 소설과 연결해서 읽을 때 드러나는 혁명/주체 자체의 갱신 가능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 다(임세화,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문장웹진 2024년 7월호).
- 5) 미얀마, 태국, 홍콩 등 아시아의 권위주의 정부에 저항하는 청년들이 케이팝과 팬덤 문화를 민주화 운동의 코드로 활용하고 연대의 매개로 삼 았던 사례를 상기해볼 수 있다. 가령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오랜 애창곡이자 촛불집회(의 효시였던 이화여대의 2016년 집회부터)에서도 불렸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2020년 태국 민주화 집회 현장에서도 합창되었다. 이는 홍콩, 대만의 반권위주의 ‘밀크티 동맹’과 결합하며 케 이팝 팬덤의 연대를 상징했다. 2019년 산티아고 반정부 집회 배후에 케이팝 팬덤이 있다는 칠레 정부 보고서는 당시 한심한 책임 회피로 치부되 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핵심을 찌른 셈이다.
- 6) 김건형, 「가족도 미래도 없이 친밀하게」, 『문학동네』 2022년 겨울호, 136쪽.
- 7) 김건형, 「연애 예능과 프랜차이즈 자아의 시대를 굴러가는 ‘나’의 이야기」, 『2024 올해의 문제소설』, 푸른사상, 2024 참조.
- 8) 욕망하는 대상이 오히려 더 나은 삶의 걸림돌이 된다는 ‘잔인한 낙관주의’는 나중에 도래할 성공적 미래를 애착의 대상으로 만들어 잔혹한 현 재에 적응하고 인내하게 한다. 이는 당면한 모든 문제를 개인의 긍정적 태도와 자기 계발의 노력이라는 ‘합리적 선택’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며 개 인화하는 감정 통치술이다. 로런 벌랜트, 『잔인한 낙관』, 박미선·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 9) 마크 피셔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광범위한 스트레스의 개인화를 수용”하게 해 불안을 개인이 ‘치료’하도록 하는 의료적 시스템·담 론을 자연화한다. 그런데 “특히 그토록 많은 청년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게 되었는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정신건강 질환’이 유 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 체계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 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포스트포드주의는 청년을 취업과 실업을 번갈아 사는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 상태로 몰아 양극성 장애라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정신질환을 유포하며, 가족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약물을 제외하면) 대안적 미래로 상상하게 한다. 이는 우울과 불안, “정신질환을 재정치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낙관을 정지하는 비관이야말로 서로를 돌보는 다정함 일 수 있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24, 68~69쪽, 97쪽.
- 10) 밈과 같은 ‘대항 소음’은 정치적 목표나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연대 자체를 몸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로런 벌랜트, 같은 책, 465쪽)이다. “감 각 능력, 집중, 다시 한번 함께 모이는 즐거움의 코믹한 의미를 수반하는 민주적-존재-되기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정치적인 것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 “정치를 한다.””(같은 쪽) 그러므로 “잠재성이 긍정되는 장소인 ‘지금’에 수행을 통해 소속되는, 농밀한 감각적 활동”(466쪽)에서 시민권 이 작동한다. 이렇게 “주변 분위기로 형성되는 시민성의 정치적인 강도”는 미약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거부의 철학으로 헤게모니적 이데올 로기에 맞서지 않기 때문”(464쪽)이다. 하지만 이는 대의제의 대표자(와 그 환상)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면서 생긴 만성적인 정치적 우울에서 벗 어나 친밀한 사회성과 소속의 느낌을 생성하며, “정치에 의해 마모되지 않는 것을 정치적 행위로 가치 있게 여기면서 정치적 행동을 다시 활성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467쪽).
- 11) 이희우는 ““친한 사이”는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 시험중인 사랑”을 의미한다며 이를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명명한다. 우애의 정치성을 담은 적실한 명명이지만 본고에서는 동등한 둘 바깥으로, 옛 친구와 이주민 이웃과 우연히 만난 노동 집회로 ‘친한 사이들’이 확장되는 장면에 좀더 주목해보려 한다.
- 11) 이희우는 ““친한 사이”는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 시험중인 사랑”을 의미한다며 이를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명명한다(이희우, 같은 글, 329쪽). 우애의 정치성을 담은 적실한 명명이지만 본고에서는 동등한 둘 바깥으로, 옛 친구와 이주민 이웃과 우연히 만난 노동 집회로 ‘친한 사이들’이 확장되는 장면에 좀더 주목해보려 한다.
- 12) 주디스 버틀러는 안정적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동성애적 정동을 비가시화하는 ‘이성애적 우울’의 문화적 제도화를 지적(『젠더 트러블』)하 면서 권력이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성의 영역을 결정해왔음을 짚는다. 규범은 바깥으로 주변화된 사람을 ‘살 만한 삶’에서 배제하며 모두 가 취약한 신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망각하게 한다. 살 만한 삶은 사회계약론의 형식적 개인주의를 넘어 타인(과 나)의 취약한 신체를 지킬 때만 비로소 모두에게 도래한다(『비폭력의 힘』). ‘애도할 만한 삶’에서 ‘살 만한 삶’에 대한 사유로의 궤적은 윤조원, 「“살 만한 삶”을 향해— 『젠더 트러블』에서 『비폭력의 힘』까지」,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0권 4호, 20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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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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